베트남의 자금성-뚜깜탄(紫禁城, 午門)
쓸쓸한 유적을 보는 헛헛한 마음
[연합뉴스] 2008년 11월 05일(수) 오전 10:31
지금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Hanoi)는 생겨난 지 2천 년이 넘는,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다. 1010년 리(李, Ly) 왕조가 수도로 지정한 이래 단 한 차례를 빼고는 계속 베트남의 정치 중심지로 기능했다.
그 잠깐의 공백을 메운 도시가 바로 중부에 자리한 후에(Hue)이다. 19세기 초반에 새롭게 등장한 응우옌(阮, Nguyen) 왕조는 수도를 하노이에서 후에로 이전한다. 이유는 응우옌 가문의 본거지가 베트남 중부였고, 중국과 거리가 멀어 안전을 담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13대에 걸쳐 베트남을 다스렸지만, 여느 왕조와 마찬가지로 비참한 종말을 맞았다.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의 침략으로 국력이 쇠하기 시작해 결국에는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광경을 목도해야만 했다.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왕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45년 퇴위 선언을 하고 왕위에서 물러났다.
서양 열강들의 아시아 점령이 본격화한 19세기, 베트남의 응우옌 왕조도 그들의 예봉을 피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거듭한 뒤 몰락했다. 그래서 후에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유독 쓸쓸하게 다가온다. 마치 주인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커다란 폐가처럼 느껴진다.
도시 분위기도 매우 차분하다. 흐엉 강(香江, Huong River)이 유유히 흐르는 시가지는 조용하고 고즈넉하기 그지없다. 후에의 구시가 한복판에는 응우옌 왕조의 왕들이 거주하고 집무를 보았던 왕궁(Forbidden Purple City)이 있다. 공교롭게도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과 명칭이 동일하다. 다만 베트남어로 읽어 '뚜깜탄'이라고 한다.
왕궁으로 통하는 정문의 이름인 응오몬(午門)도 쯔진청과 똑같다. 쯔진청을 완공한 중국과 같이 강성한 대국을 만들고자 했던 희망이 담겨진 듯하다. 응오몬은 오늘날도 출입이 통제된다. 오직 왕에게만 허락된 문이었기 때문이다. 신하와 말들이 드나들던 옆쪽 문으로 들어서면 내성인데, '정직탕평(正直蕩平)'이란 친숙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길수록, 웅장하고 멋진 왕궁을 기대했던 사람들은 이내 실망하기 마련이다. 도서관 등 몇몇 건물을 제외하고는 원형 그대로 잔존해 있는 것이 없고, 폐허 속에서 잡초들이 무성한 탓이다.
후에의 왕궁은 쯔진청을 모방한 듯하지만,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한다. 쯔진청과 달리 응우옌 왕조의 왕궁에는 정원처럼 나무와 연못이 많고, 지붕의 끝부분도 말아 올라가지 않고 곧게 내려뜨린 점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사람들의 손으로 쌓은 왕궁은 그들의 후예에 의해 파괴됐다.
사실 후에가 속해 있는 베트남 중부는 베트남 전쟁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장이었다. 북베트남 군대는 1968년 설을 맞이해 후에에 공세를 퍼부었고, 왕궁은 처절하게 무너졌다. 게다가 1975년부터 1990년까지는 봉건 왕조를 부정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었다.
흐엉 강을 따라서는 응우옌 왕조의 왕릉 7기가 흩어져 있다. 이중에서 민망(Minh Mang), 뜨득(Tu Duc), 카이딘(Khai Dinh) 왕릉 등 3곳이 관광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민망 왕릉과 뜨득 왕릉은 전형적인 베트남의 건축양식으로 조성된 반면, 가장 나중에 완성된 카이딘 왕릉에는 프랑스의 영향이 나타나 있다. 다소 이론의 여지는 있겠지만, 후에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릉은 민망 왕릉이다. 응우옌 왕조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820년부터 1840년까지 군림한 민망 왕의 무덤에는 기품과 위엄이 배어 있다.
하지만 장기간 치세를 했던 뜨득 왕은 프랑스의 침공을 지켜보고, 자손을 얻지 못했던 불행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묻힐 무덤을 생전에 짓도록 명령하고, 왕궁 대신 왕릉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그의 능묘에는 연회를 위한 연못과 침실, 창고 등이 함께 만들어졌다. 그에게 왕릉은 생과 사가 겹치는 공간이었다.
카이딘 왕릉은 민망, 뜨득 왕릉에 비해 작지만 높은 곳에 위치한다. 계단이 많고, 나무는 적으며 시멘트를 재료로 사용했다는 점이 이전 왕릉과의 차이점이다. 세월에 빛이 바래 회색을 띠는 외부와는 달리 무덤이 있는 실내는 형형색색의 타일로 장식돼 있다. 조명을 비추면 자잘한 도자기 조각들이 반짝거리며 현란함을 뽐낸다.
카이딘 왕릉에 대해서는 '동양과 서양의 만남'이라는 칭찬과 고유의 정체성이 소멸됐다는 비판이 공존한다. 어느 쪽의 견해가 맞든, 프랑스를 베트남의 시각으로 재해석했다는 사실만은 분명한 듯싶다.
사진/김주형 기자ㆍ글/박상현 기자 연합르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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