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巴里長書 (파리장서사건)

한부울 2008. 11. 7. 21:32

조선을 승계한 대한제국이 망하고 일제에게 합방이 된 민족은 한반도에서 망실 된 것이 아니라 변함없이 대륙에서 지속적으로 저항했으며 대 항일의 주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이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듭말하는 것이지만 한반도는 반도역사의 세트장에 불과 할 뿐이다.

그 세트장을 일제가 언제쯤 마무리하고 완성하였는지는 정확하게 확인 할 수 없으나 1919년이라면 3.1운동(5.4운동)이 벌어진 년도인데 일제가 대륙에서 벌어진 역사사실을 한반도에 집어 넣기에 바빴던 시기였음도 상기할 필요성이 있어 하는 말이다.

김창숙은 곽종석·김복한 등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3월말 상해로 건너(?)가 파리 평화회의에 우송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상을 세계에 폭로했다라고 하는 대목에서 파리에 청원서를 우송하기 위하여 상해에 갔다는 것인데 사실 한반도에서 상해로 간 것이 아니다.

3.1운동이 발발하여 일제 경비가 삼엄하고 엄중할 때인데 열차를 타고 만주로 가 다시 북경에서 기차를 타고 상해로 갔다(?) 그것은 안 될 말이다.

본래 대륙 본거지에서 항일하던 전라, 충청, 경상도의 유림들이 한양(한구:무산:무창)에서 모여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김창숙이가 상해로 간 것인데 한양에서 한강과 양자강을 이용하여 상해로 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바로 우리민족의 본거지가 바로 대륙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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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里長書 (파리장서사건)

[데일리안]2007/06/24   

                                                                

일제하 유림 137명 서명 독립청원서 파리평화회의 우송

우리에 유리한 국제여론 환기, 3.1운동과 쌍벽


1910년 치욕스런 한일 합방 후 1945년 해방까지 한국인의 일거일동은 망국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한 애국적 독립정신과 관련되지 않는 것이 없다. 지위의 고하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종교나 사상 또는 직업의 구별 없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독립문제에 있어서만은 일치단결 하였던 것이다.


청(淸)과 러시아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낸 일본이 한반도에서의 식민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학자들은 약화일로에 놓인 국운을 회복하기 위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한국의 유림(儒林)은 의병운동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러한 반일 의병 항쟁은 대체로 1914년까지 계속되었고 그 후로는 암살음모를 주목적으로 하였던 독립혁명 의용군의 형태로 변모하였다. 1910년 8월 민족의 치욕과 국권의 상실로 온 국민의 울부짖음은 매우 높았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일제의 강권정책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한일 합방 후 1919년 3월 1일 운동 까지 일제의 대 한국 정책을 무단정치라고 일컬어지는 바와 같이 일제는 한민족 말살 정책을 각 방면에서 감행하였던 것이다.


1911년 105인 사건을 날조하여 민족 지도급 인사 6백여 명을 체포 투옥 또는 살상하는 등 조국의 독립을 꾀하는 민족의 여러 단체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1918년까지 애국지사 약 9만명을 투옥 또는 살상하였으니 이것은 민족적 저항 운동을 말살시키려는 소행으로서 그 잔학상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치욕의 수난기를 당하여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한말의 유인석은 독립을 회복하려는 갖은 노력에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5년 세상을 떠나니 유학계의 의병운동은 이로서 그 진력을 잃고 마는 셈이었다.


일제 식민시대에 있어 유림의 독립에 관한 사건은 1919년 파리평화 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 한 일과, 1926년 병인(丙寅) 유림단사건을 말하는데 이를 1,2차 한국 유림단 사건을 말한다.


1919 년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에 참례코자 서울에 모인 유림 이중업·김창숙·곽대연·김정호·권상도 등은 3·1운동의 시위를 보고 “우리 유림만이 이에 뒤질 수 없다.”하여 활동방향을 모색하였는데, “이 일이 중대한 것이므로 중망(衆望)의 인물이 아니고는 주장할 수 없다.”하여 김창숙은 경남 거창으로 전 의정부 삼찬(參贊)이었고 호남의 전우(田愚)와 쌍벽을 이뤘던 원로 유학자 곽종석(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에 은거한 바 있음)을 찾았다.


그때 김창숙은 유림이 단결하여 파리에 사람을 보내 만국평화회의에 독립청원의 글을 전달 한민족의 대의(大義)를 성명하기로 의논하였는데, 이에 대해 곽종석은 “내가 오늘에야 죽을 곳을 얻었다. 그대는 힘쓸 지어다.”라고 하며 쾌히 승낙을 하였다.


김창숙은 다시 상경하여 여러 유림들과 의논하고 각 도에 사람을 보내 연락을 취했다. 이때 승지를 지낸바 있는 홍성의 김복한은 그의 문인 이었던 임성백을 보내 적극 협력하였다. 김창숙은 곽종석·김복한 등 유림 137명이 서명한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3월말 상해로 건너가 파리 평화회의에 우송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상을 세계에 폭로하게 된다.


이 청원서를 일명 ‘파리장서(巴里長書)’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소재 만회고택와 해관구택(사랑채)에서 한국 유림의 대표들의 극비리에 모여 숙의하고 최초 문안을 작성하고 서명하였다.

이 파리장서의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 기초 작성의 책임은 곽종석으로 되어 있으며, 한문 3000부, 영문 2000부, 불어 1000부를 번역 인쇄하여 김규식 박사로 하여금 당시 파리에서 열리던 세계평화회의에 제출한 사건이다. 이는 국내를 비롯하여 중국, 미국, 일본과 구미제국에 반포하여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국제여론을 환기시킨 유림단의 파리장서사건은 3·1운동과 쌍벽을 이룬 중대한 독립운동이다.


이와 같은 일이 있은 후 일제는 곽종석 등 137명을 체포 투옥하였으며, 곽종석·유필영·하용제·김복한 등은 모두 옥사하였고 그 밖의 유림들은 악형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징역형을 받았다.


이러한 한국 유림의 독립시위사건을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이라 하며 ‘제1차 유림단 사건’이라고도 한다. ‘한국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으로 시작되는 독립청원서 가운데 “나라 없이 사는 것보다 나라있는 죽음만 못 할 것이며, 한 곳에 속박되는 것 보다 어찌 공공연히 듣고 함께 볼 수 있는 땅에 헌심함만 못하리오.”라는 말에는 더욱 읽는 이로 하여금 시선을 모은다.


떳떳한 삶과 관련하여 독립에 관한 절규를 드러내고 있다.


[다음은 이 파리장서라 불리는 한문의 독립청원서를 한글로 번역한 전문]


한국의 유림대표 곽종석 김복한 등 137인은 삼가 파리평화회의 제대위(諸大位)에게 글을 드립니다. 무릇 천지간에는 만물이 공생하고 있으니 이에서 우리는 햇볕을 같이 쬐고 화육(化育)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그 러나 싸우고 빼앗는데서 강약이 나누어지고 병합(倂合)의 권리를 남용하여, 대소의 차이가 생기면서부터, 남의 생명을 해쳐 그 위세를 부리고 남의 나라를 훔쳐 가로채는 경우가 아! 천하에 어찌 이리도 허다합니까? 이것이 바로 하늘이 제대위로 하여금 천지의 정기를 받들어 햇볕처럼 밝히게 하고 교화를 행하여 천하를 하나로 묶어 대동의 세계로 돌아가게 하며, 만물로 하여금 각각 그 본성을 이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만국(萬國)이 동일하고 사해(四海)가 일로인데도 소문만 듣고 실덕(實德)을 입지 못했거나 원통한데도 공의(公議)에 알리지 못한 나라가 있다면, 어찌 제대위의 배려가 홀로 여기에만 제외될 수 있습니까? 대저 제외시킬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그 피를 뿌리고 흉중(胸中)을 쏟아내어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또한 비통하고 절박하여 참을 수 없는 심정에서 울어나는 것이니, 제대위는 살피십시오.


아! 우리 한국은 천하 만방의 하나입니다. 영토가 삼천리이고 국민이 2천만이며 4천여년을 유지보존 하면서 반도의 문명을 잃지 않았으니, 또한 만방에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불행히도 근래에 강린(强隣)이 밖에서 압박하여 맹약을 억지로 맺고 뒤이어 국토를 빼앗으며 왕위를 폐하여 우리 한국을 세계에서 없애버렸습니다.


이에 이론의 소위(所爲)를 거론 하자면, 일본은 병자년(1876)에 우리나라 대신과 강화에서 맹약하고 을미년(1895)에 청국대신과 마관(馬關)에서 조약하면서 우리 한국에게 선전포고 할 적에도 명확하게 우리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한다는 사실을 성명으로 공포하였으니 이는 만국이 다 아는 바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온갖 거짓을 만들어 안으로 협박하고 밖으로 속이더니, 독립이 변하여 보호가 되고 보호가 변하여 합병이 되었습니다.


이 에 한국인이 자원한다고 핑계하여 만국의 공의(公議)를 면하려 하니, 이는 그들의 수단아래 한국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실로 그들의 심중에는 만국도 없는 것입니다. 모르긴 해도 제공(諸公)은 참으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소위(所爲)가 공의(公議)에 위배됨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분발함이 소용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석으로 나라와 백성에 대하여 구가(謳歌)하기를“상천(上天)이 우리를 도와 호운(好運)이 올 것이다.”하면서 수치(羞恥)를 참고 고난을 감내한지 이에 십년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제위께서 평화회의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힘차게 분기(奮起)하여 이르기를,“만국이 평화롭게 된다면, 우리도 만국의 하나거늘 어찌 우리만이 평화롭지 않게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또 파란제국(波蘭諸國)들이 이미 독립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만세를 외치면서 말하기를,“평화와 공의(公議)는 이미 정해졌다. 저들은 어떤 나라이며, 우리는 어떤 나라인가? 만국을 동일시하는 인덕(仁德)이 또한 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천운은 때가 오면 돌아오니, 제대위는 이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일을 마치고 우리는 이로 말미암아 나라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우리는 당장 죽어 구렁이에 뒹군다 하여도 백골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니 눈을 부릅뜬 채 좋은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연되는 사이에 하늘 또한 무심하여 하루 밤에 갑자기 우리 임금 승하하시니, 온 나라가 흉흉하고 슬픔에 가득하여 원통함을 호소할 곳조차 없었습니다.


이 에 국장일(國葬日)에 즈음하여 각교(各敎) 각사(各社)와 개인 남녀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우리 임금의 영혼을 위로 하였습니다. 비록 포박과 매질을 당하여도 맨손으로 죽음을 돌보지 않고 전진하니 이에 억울함이 오래 동안 쌓이면 반드시 분출함을 볼 수 있으니, 이는 또한 제대위께서 그 기회를 열어주고, 용기를 고취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시일만 끌면서 분명한 처분을 내리지 아니하니 또 의아하고 괴이하게 여기면서 통(通)할 수 없음을 탄식 하였습니다. 이는 중간에서 일을 방해하는 자들이 거짓을 반복하여 제대위의 시청을 현혹시킨 것이니, 청컨대 다시 이를 변명 하겠습니다.


하늘이 만물을 생(生)하면 반드시 물(物)마다 그 능력을 갖게 하였습니다. 작게는 인개(鱗介)와 곤충도 모두 자유로운 생활능력을 지니며, 사람이 사람 되고, 나라가 나라 되는 까닭도, 또한 각자가 다스리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은 비록 작지만, 2천만 국민과 4천년 역사를 지니고 있으니, 족히 나라 일을 담당할 사람이 부족하지 않거늘, 애당초에 어찌 인국(隣國)의 대치(代治)를 바라겠습니까? 천리마다 풍토가 다르고, 백리마다 민속이 다른 것입니다.


저들이 이르기를,“한국은 독립할 수 없으니 우리가 다스려야 된다.”고 하나 풍속이란 갑자기 변할 수 없으며, 이르는바 대치는 단지 혼란만을 일으킬 뿐 이므로 이는 행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 그러나 또 공회(公會)에서 말하기를,“한국인이 일본에 부속되기를 원 한지 오래다.”라고 할 것입니다.


대저 한민(韓民)이 스스로 한민 된 까닭은, 그 영토와 풍토가 이미 정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천성(天性)에서 얻은 바가 그러한 것입니다. 차라리 일시에 속하여 위세를 감수할지언정, 그 마음만은 장차 천만년이 지나도 한국민임을 잃지 않을 것이니, 본심이 존재함을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본심을 끝내 속일 수 없거늘, 만국이 함께 폐한 권위를 이용하여 만인이 한결 같이 말하는 공의를 누리고자 한다면 이는 일본에게도 또한 정당한 계책이 아닙니다. 종석(郭鍾錫) 등은 산야의 폐인이라 외방사정을 상세히 못 듣고, 오직 구국(舊國)의 신자(臣子)로써 선군(先君)의 유풍(遺風)에 의지하여 유교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계유신의 날을 맞이하여, 나라의 유무가 이 일거(一擧)에 달렸으니, 그 나라 없이 살기보다는, 차라리 나라를 가지고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구석진데서 고사(枯死)하는 것 보다는, 만인이 보고 듣는 자리에서 한 번 그 억울함을 드러내고 그 진퇴를 기다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돌 아 보건데 해륙(海陸)의 길이 너무나 멀고 관문의 검열이 매우 엄중하니, 행여나 길이 막혀 이르지 못하고 부르짖는 소리가 제대위(諸大位)에게 전해지지 않은 채, 목숨이 중도에서 쓰러지고 만다면, 이 세상에 이 회포(懷抱)를 길이 드러낼 가망이 없습니다.


비록 제대위의 총명으로도 또한 어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헤아려 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이에 감히 척지(尺紙)를 마련하여 10년간 고통 받은 사실을 갖추어 천애(天涯)의 만리 밖에서 서신을 드리니, 참으로 비통하고 절박한 심정에 말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오직 제대위께서는 가련하게 여겨 이를 살펴주시고, 공판(公判)에 논의를 더욱 넓히시어 햇볕의 광채로 하여금 두루 미치게 하고, 화육(化育)으로 하여금 유행(遊行)을 순탄하게 한다면, 종석(鍾錫) 등은 나라를 잃었다가, 나라를 되찾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도덕이 일세(一世)에 펼쳐져 대제위의 할 일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종석(鍾錫) 등은 차라리 머리를 나란히 하여 죽을 지언정, 맹세코 일본의 노예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2천만 생명이 홀로 천지의 화육을 입지 못하고, 방창(方暢)한 화기(和氣)를 한탄해서야 되겠습니까? 대제위는 도모(圖謀)하시오.


개국(開國)528년 3월 일 청원인(請願人) 곽종석 등 137명(곽종석 등 137명의 서명자 명단 생략)


한국 유림단의 독립운동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힘으로 합방한 10년째인 기미년 3월에 전국 유림대표 1백37명이 파리에서 개최중인 세계평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전개한 1,2차 독립운동을 말한다.


이 파리장서 운동을 주동한 김창숙·김정호·성태영·이중업·유준근·유진태· 백은·윤중수 등은 곽종석을 추대하여 그 지휘아래 왜병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가며 청원서를 단일화하여 3월 24일 심산 김창숙은 곽종석이 지은 청원서를 지참하고 출발 같은 달 27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창숙은 상해에 거류중인 지사(志士)들과 논의하여 당초의 파리행을 중지하고 이미 그곳에 체재중인 김규식 박사를 통해 평화회의에 송포하는 동시 각국의 주중(駐中)공관 그리고 중국 정부와 국내의 각 기관 및 향교에 보내니, 세계가 놀라고 일제가 외축(畏縮)하였으며 국내는 2천만이 궐기하여 메아리치는 만세소리가 강산을 흔들었다.


이 로 인해 이에 가담하였던 유림단의 상당수는 일본경찰에 붙잡혀 모진 박해와 고문 등으로 고생을 하다 여생을 마친 역사적 대사건으로 파리장서 운동의 진앙지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곳.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군에서 위대한 선조들이 피 땀 흘려 일제와 싸운 역사의 현장에는 변변한 안내판이나 기념비 하나 세워져있지 않다.


경상북도 봉화군(봉화읍 해저리 만회고택, 해관구택 사랑채)에서 파리장서 운동을 숙의하고 장서를 초안하고 서명(봉화군 11명: 전국 유림단 서명자의 8%)하고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는 등 파리장서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고도 역사 속에 묻혀지고 잊혀져 가는 이곳에 비록 늦었으나 파리장서운동 기념공원의 건립과 기념탑과 기념비와 기념관의 조성, 파리장서 운동사 발간, 세미나 개최, 유공자 생가 복원 및 안내 시설 등 파리장서 운동의 문화사업 과 기념화(명소화) 사업을 연차적으로 여러 관련 기관이 협력, 선현들의 자취를 발굴·조명하여 그 정신을 대대로 전승 고취하는 요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巴里: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音借]


[이문학 자유기고가]이주영 기자[데일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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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장서사건 (巴里長書事件)   

1919년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보낸 사건.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1919. 3)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과 파리 강화회의 등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1운동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고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곽종석은 김창숙(金昌淑)과 상의하여 3·1운동 때 유림이 제외되어 일어난 사실을 아쉬워하며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의논,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합의했다.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에는 곽종석을 대표로 영남 유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서명했다. 곽종석은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듬해인 1896년초 의병운동에 나서기보다는 이승희와 함께 각국 공사관에 일본의 침략행위를 성토하고 토죄(討罪)하도록 호소했을 만큼 국제여론을 중시했다.


장서의 핵심적 내용은

① 여러 나라 여러 겨례는 제각기 전통과 습속이 있어 남에게 복종이나 동화를 강요받을 수 없으며,

② 사람이나 나라는 그 자체의 운용능력이 있게 마련이므로 남이 대신 관리하거나 통치할 필요가 없으며,

③ 한국은 삼천리강토와 2,000만 인구와 4,000년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며 우리 자신의 정치원리와 능력이 있으므로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④ 일본은 지난날 한국의 자주독립을 약속했지만 사기와 포악한 수법으로 독립이 보호로 변하고 보호가 병합으로 변하게 했고, 교활한 술책으로 한국 사람이 일본에 붙어살기를 원한다는 허위선전을 하고 있으며,

⑤ 일본의 포악무도한 통치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우리는 거족적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만국평화회의와 폴란드 등의 독립소식을 듣고 희망에 부풀어서 만국평화회의가 죽음으로 투쟁하는 우리 2,000만의 처지를 통찰해줄 것으로 믿고 있음을 주장했다.


김창숙이 이 장서를 해외로 가져가는 책임을 맡아 상경했을 때 호남의 전우(田愚)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호남지방의 김복한(金福漢)은 여러 선비들의 연명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김복한의 제자인 임경호(林敬鎬)를 만나 확인하고 서로 공동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양쪽에서 작성한 장서를 공동의 문서로 채택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가 연명한 유림단의 파리 장서를 김창숙이 휴대하여 국경을 넘게 했다. 장서의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 기초의 책임은 곽종석으로 되어 있다.


김창숙은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자 손진형(孫晉衡)·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상의한 끝에 이 장서를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에게 우송하여 제출하게 하며, 영문번역과 국문번역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 대표와 외국의 공관을 비롯한 국내의 각 향교 등 여러 기관에 우송했다.


김창숙이 장서를 가지고 상하이에 와 있을 때 경상북도 지역에서는 국권회복단의 대표들이 유학자 조긍섭(曺兢燮)에게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문안을 초안하게 했다가 곽종석의 허락을 받고 김창숙이 가져간 장서와 같은 내용의 글을 김응섭(金應燮)에게 휴대하게 하여 상하이에 보냈다.


이는 일제강점 이후 유림들의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의 행동화라고 할 수 있다. 장서사건이 드러나자 여기에 서명한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들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곽종석은 74세의 노령에도 옥중에서 일본의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포로로서 잡혀왔다는 전사(戰士)의 의지로 대응했다.


그는 징역 2년형을 언도받았으나, 도중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와 그해 8월에 죽었다.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