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mp3]황성예터-80년간 과거 숨기고 산 '전설의 女가수

한부울 2008. 10. 28. 12:48

 

이노래를 듣고 있으면 무엇인가 의문점이 크게 두가지 있다.

하나는 노래를 부르는 이애리수의 발음상태이고

또 하나는 왕평의 죽음이다.


여기서 예측하고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이 노래 주인공인 작사가, 작곡가, 노래를 부린사람 3인 모두가 그 당시 대륙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노래를 가만히 들어보면 대륙중국인이 우리말을 하는 것처럼 어눌하게 들림을 느낄 것이다.

바로 대륙조선인이 우리 말로 노래 한 것이다.

그 당시 발음인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발음과 전혀다르게 들리는 것은 그 당시 발음과 지금의 발음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때문에 이애리수는 대륙인이다.


두번째 의문은 왕평의 죽음이다.

荒城의 跡  (황성의 적)

우리는 그 황성의 적을 황성옛터이라고 부르고 있다.

황성의 자취을 찾아 그 폐허를 보고 그 사적( 史跡 )에 애닯픔을 표현 한 것이다.

황성의 적 작사가인 왕평은 1940년 32세 나이에 무대에서 사망했다고 하는데 그 정확한 내용은 지금 우리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 당시 상황으로 보았을 때 많은 의문점이 없지 않다.

이 또한 대륙역사 존재에 대한 입막음 대상으로서 제거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황성을 보통 한반도 개성이라고 우린 알고있다.

전수린의 고향이 개성이라고 하였기때문이지만 개성은 한반도 황해도 개성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전수린의 고향은 경기도 개성이라고 하였다.

황해도 개성이어야 한반도 개성이다.

그러나 경기도 개성은 대륙이다.

어딜까?

바로 낙양이 아니면 성도일 것이라고 판단된다.

반도역사에는 개성이 수도로 인정되었던 때가 고려때이다.

개성이 황성이라 했으니 고려때 우리 왕조가 황제칭을 했다는 말인데

반도사관에서는 어림도 없는 전설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대륙사관으로 보았을 땐 고려 왕들 모두가 분명코 황제 칭을 했다.

그렇다면 한반도 개성이 황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개성이 한반도 개성이 아닌 것이다.

전수린이 태어난 시기가 1907년이라면 일제에 의하여 대륙의 역사지명이 한반도로 이전 이동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이거나 작업전이라고 보면 대륙개성일 가능성이 많다는 말이다.

때문에 친구인 대륙영천출신 왕평이 찾아 그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고 그것을 작곡한 노래가 황성의 적이다.

문제는 한반도 개성이 아니라 대륙 개성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한반도 민중들의 기억을 새롭게 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노래자체를 금지 할 수 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아예 기억을 없애는 방법을 취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 점이다.

그러한 개연성을 바탕으로 보았을 때 왕평이 일제에 의하여 제거 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전수린은 스스로 창씨개명하면서 아마도 그러한 사실을 발설치 않겠다는 암묵적 조건하에 무사 한 것으로 보일뿐이다.

전수린은 어쨌거나 왕평이 죽고 난 이후로부터는 작곡은 하지 않고 만주와 일본등을 순회공연만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추론이 가능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종합적으로 판단하였을 때 위 3인은 분명코 대륙조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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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간 과거 숨기고 산 '전설의 女가수'

[한국일보] 2008년 10월 28일(화) 오전 04:35

 


18세에 '황성옛터' 부른 이애리수 생존 확인


1932년 음반판매 5만장 기록한 첫 '국민가수'

"가수 발설 안된다" 조건 대학생과 부부의 緣

휠체어에 의지하지만 白壽 앞두고도 건강해


1928년 가을, 극단 취성좌(聚星座ㆍ후에 조선연극사로 개칭)의 공연이 열리던 서울 종로의 단성사. 공연 중간 소위 '막간(幕間) 무대'에 앳된 모습의 여가수가 등장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왔노라."


나라 잃은 설움을 에둘러 표현한 구슬픈 곡조의 노래는 이내 객석을 뒤흔들었다. 숨죽인 흐느낌은 어느새 통곡으로 번졌고, 가수도 목이 메어 '노래 반, 울음 반'의 무대가 이어졌다. 놀란 일제 순사들이 무대에 올라 노래를 중단시켰고, 작사가 왕평, 작곡가 전수린을 비롯한 공연 관계자들이 종로경찰서로 붙들려 가 밤샘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한국인이 작사, 작곡한 최초의 대중가요이자 80년 지난 지금도 국민 애창곡으로 사랑 받는 '황성옛터'(발표 당시 '荒城의 跡')는 그렇게 대중에 첫 선을 보였다. 당시 노래를 부른 배우 겸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의 나이는 불과 열 여덟이었다.


跡[적] 자취; 뒤를 밟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중 결혼과 함께 모습을 감춰 이미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졌던 이애리수(98) 여사가 정정하게 생존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1일 경기 일산 백석마을의 한 요양원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녀는 맏아들 배두영(71)씨와 딸들, 외손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에 앉아 있었지만,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느냐'는 물음에 "괜찮다"고 또렷하게 대답했다. 그녀를 돌보는 간병사는 "하루 세 끼 죽을 드시는데 한 그릇씩 모두 비운다"고 귀뜸했다.


그녀는 "신문사에서 뵈러 왔다"는 아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황성옛터' 부르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자 "몰라"라고 한마디 던지고는 입을 닫았다. 워낙 고령이라 대화가 어렵기도 했지만, 옛 추억을 마음대로 떠올릴 수 없는 아픔을 지닌 탓이었다.


그녀의 본명은 이음전(李音全), 개성 출신으로 9세 때 극단에 들어가 배우 겸 막간 가수로 활동했다. 빼어난 노래솜씨와 미모로 인기가 있었던 그녀는 '황성옛터'를 통해 일약 '국민 가수'로 떠올랐다. 1932년 빅타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황성옛터'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지금의 인구비례로 따지면 500만장 정도이니, 경이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레코드 업계에 '조선 유행가 취입 붐'까지 몰고 왔던 그녀의 삶은 22세 때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재학생 배동필씨를 만나며 격랑에 휩싸였다. 둘은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씨 부친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치자 파고다공원(탑골공원)에서 면도칼로 손목을 긋고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부친은 본인은 물론 가족들에게 그녀가 가수 출신임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도록 '함구령'을 내리고 결혼식도 올리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부부의 연을 허락했다.


그 후 그녀는 남편과의 사이에 2남7녀를 낳고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에만 충실했다. 과거와 독하게 인연을 끊고는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 맏아들조차도 "어머니가 '황성옛터'를 부른 가수라는 것을 대학(연세대) 다닐 때 처음 알았다"고 말할 정도다. 결혼 후 단 한 번도 대중매체에 얼굴을 비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그녀는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건강한 모습이었다. 인터뷰를 하며 500여장의 사진을 찍는 동안에도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달 전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담당의사가 "본인이 일부러 식음을 끊지 않는 한 110세까지 충분히 사시겠다"고 진단했다고 한다. 또 1년 전부터 무슨 연유인지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있다고 한다.


'황성옛터'가 세상에 나온 지 꼭 80년이 지난 2008년 가을, 사랑을 좇아 화려했던 과거를 미련 없이 버린 채 그 긴 세월을 꿋꿋하게 살아온 전설 속 여가수와의 만남은 만감을 불러 일으켰다. 인터뷰를 마치고 가겠다고 인사를 했을 때, 얼굴을 돌려 말없이 쳐다보던 커다란 두 눈이 가슴에 와 박혔다.


글=정홍택 한국저작권단체연합회 이사장

사진=배정환 한국보도사진가협회 회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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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글 : 이준희


이미 오륙십 년 전에 나온 노래라면 누구든 그것을 '흘러간 옛 노래'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미 흘러간 것으로 치부되고 있는 노래 가운데에는 의외로 여전히 '흐르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래도 그 모습을 바꾸어 가며 계속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황성 옛터'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荒城의 跡'은, 그렇게 조금씩 모습을 달리하며 흐르고 있는 노래의 생명력을 보여 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30년대 초에 나온 다른 많은 유행가들처럼, '황성의 적'도 이미 막간무대 공연을 통해 발표되어 유행하고 있던 것이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으로 발매되었다. 제목 그대로 황폐한 옛 성터의 자취를 더듬는 진한 회고조 분위기의 가사는 왕평이 지은 것이고, 가사와 꼭 들어맞는 애잔한 곡조는 전수린의 작품이다.

 

                                                                  이애리수


첫 취입은 인기 연극배우인 동시에 유행가 가수로도 크게 활약한 이애리수가 했으며, 바로 같은 해 말에는 역시 배우겸 가수였던 윤백단이 두 번째 '황성의 적'을 태평레코드에서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1932년 말부터 음반을 내기 시작한 폴리돌레코드에서는 제목을 '고성의 밤'으로 바꾸어 이경설이 노래한 것을 이듬해에 발매했는데, 이경설도 역시 이애리수 못지 않게 인기를 누리던 배우겸 가수였으며 비극에 특히 뛰어나 '비극의 여왕'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시각으로는 '황성의 적'이 너무 소극적이고 퇴영적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그렇게 힘없는 넋두리조차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시대의 상처를 정확히 자극했기에, '황성의 적'에 대한 당시 민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러한 사정을 의식한 탓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터인가 '황성의 적'은 일제시대에 탄압을 받은 대표적인 금지곡으로 알려져 왔다.


30년대 당시 활동하던 가요계 원로들의 회고담을 들어 보면 분명 '황성의 적'이 마음놓고 어느 무대에서나 부를 수 있는 곳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연 내용을 감시하기 위해 온 순사들이 걸핏하면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중단시키곤 했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가수나 작가를 들볶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2년에만 두 차례나 발매되었는데도 1935년까지의 금지곡을 수록한 목록에서는 '황성의 적'을 찾아 볼 수가 없고, 1938년에는 되려 이애리수의 재발매 음반까지 나온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러므로, 적어도 30년대 말까지는 '황성의 적'이 공식적인 금지곡은 아니었던 듯하며, 오히려 꾸준히 유행한 인기곡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제목이 바뀌어 이경설의 노래로 발매된 '고성의 밤'이 치안방해를 이유로 음반이 압수되는 조치를 당했다는 기사가 1934년 6월 19일자 조선일보에 나오므로, 이후 '황성의 적'이 금지곡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1945년 광복은 유행가의 역사에서도 확연한 분기점이 되는데, 일제시대와 함께 흘러가 버린 많은 유행가들과는 달리, '황성의 적'은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인기를 잃지 않고 있었다. 다만, 이 무렵부터 몇 가지 변화가 생기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1942년에 나온 잡지에서만 해도 분명 '황성의 적'으로 표기되고 있던 제목이 이후 조금씩 '황성 옛터'로 바뀌어 불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가사 첫 구절인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에서 '황성 옛터'라는 제목이 연상된 것 같은데, '눈물 젖은 두만강'이 '두만강 푸른 물'로도 통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하겠다.


또한, 첫 취입자인 이애리수가 1935년 이후로 사실상 연예 활동을 중단한 이후, 다른 가수들 가운데 특히 남인수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많이 부르자,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은 점차 잊혀지고 남인수가 부른 '황성 옛터'가 대신 사람들 머리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남인수 생전에 노래하는 모습을 담고 있는 것으로 현재 유일하게 남아 있는 1959년작 문화영화를 보면, 30년대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50년대 남인수의 '황성 옛터', 그리고 현재 불리는 있는 '황성 옛터'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를 비교하여 그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다.

 

                                                     황성(荒城)의 적(跡) 가사지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어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의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덧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라 끝이 없이 이 발길 닫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처가 없이도

아 한없는 이 심사를 가슴 속 깊이 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

<황성(荒城)의 적(跡) - 이애리수 >

 

 


위에 적은 30년대 '황성의 적' 가사와 남인수가 부른 50년대 '황성 옛터' 가사를 비교해 보면, 부분적으로 세세하게 다른 곳이 몇몇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거의 같다.

그러나, 현재 불리고 있는 '황성 옛터' 가사는 이와 큰 차이가 있으니, 1절 마지막 두 구절인 '아 외로운... 눈물 지어요'와 2절 마지막 두 구절인 '아 가엾다... 헤매어 있노라'가 뒤바뀌어 있다.


60년대 이후 어느 시점부터 1절과 2절이 섞여 버린 것이다. 곡조 면에서도 각각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전주와 간주는 시대에 따라 모두 다른 것이 뚜렷하고, 본 곡조에서도 약간 변한 부분이 있다. 이 경우는 가사와는 달리 50년대와 현재가 거의 일치하고 있는데, 각절 세 번째 구절 말미, 즉 '홀로 잠 못 이뤄'에 해당하는 대목에서 '황성의 적'과 '황성 옛터'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렇게 1932년 첫 음반이 나올 당시 '황성의 적'과 현재 통상 불리고 있는 '황성 옛터'를 비교해 보면, 7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제목, 가사, 곡조와 노래한 가수에 대한 인식까지 많은 점이 달라져 버린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흘러간' 노래가 아니라 '흐르고 있는' 노래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변화는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유행가의 유통형식이 음반이라는 매체를 뛰어넘어 민요처럼 구전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한 시대의 유행가를 넘어서는 의미를 가질 것이다.

퇴폐니 왜색이니 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지껏 '황성의 적', 즉 '황성 옛터'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 대해 우리 민중들이 보내는 암묵적인 동의의 표현이 아닐까.

 

이준희 :

서울대학교 대학원 동양사학과 수료.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과정.

[사의 찬미(외)](2006), [일제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군국가요’다시보기](2003) [가요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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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평(王平) (작가)

 


본명 이응호

출생 1908년?

경상북도 영천군

사망 1940년

평안북도 강계군

분야 연극,영화,대중가요

교육 배재고등보통학교 졸업


왕평(王平, 1908년? ~ 1940년)은 일제 강점기에 연극, 영화, 대중가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한 예술인이다. 본명 이응호로도 활동했다.


생애


경상북도 영천군 출신이나 생년과 성장 과정은 불분명하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배우학교의 제1기 입학생으로 들어가 연기를 공부했다.


배우뿐 아니라 극작가와 대중가요 작사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다. 1930년대 초에는 조선연극사의 전속 작가로 작품을 발표했고, 1932년에는 포리돌레코드의 조선 지점 설립에 관여한 뒤 문예부장을 맡았다.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트로트인 이애리수의 〈황성의 적〉과 선우일선의 신민요 〈조선팔경가〉가 작사가로서의 대표작이다. 1933년부터 8장이 발매된 인기 극반 《항구의 일야》도 유명하다. 《항구의 일야》는 왕평이 작품을 쓰고 전옥과 함께 주연을 맡기도 했다. 이때는 작가로서는 본명 이응호를, 배우로서는 예명 왕평을 사용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성봉영화원에 참여하여 《나그네》(1937)와 《군용열차》(1938)에 출연함으로써 영화계에도 데뷔했다. 풍채가 좋은 왕평은 영화에서 듬직한 오빠 이미지로 출연했다. 1940년에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연극 《남매》를 공연하다가 무대에서 쓰러져 30대 초반의 나이로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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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린(全壽麟)

 


기본 정보

본명 전수남

출생 1907년 2월 15일

경기도 개성

사망 1984년 11월 28일

장르 트로트

직업 작곡가


활동 시기 1920년대 후반 ~ 1960년대


대표작

〈황성의 적〉 1932년

〈에라 좋구나〉 1932년

〈알뜰한 당신〉 1937년

〈나는 열일곱살〉 1938년

〈외로운 가로등〉 1939년


전수린(全壽麟, 1907년 2월 15일 ~ 1984년 11월 28일)은 일제 강점기부터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본명은 전수남(全壽南)이다.


생애


경기도 개성 출신으로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였다. 학창 시절에 기독교 모임에서 서양음악을 접했으며,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교장이던 선교사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에 무용가 조택원의 소개를 받아 동반예술단에 입단하면서 취성좌 등 연극 극단의 악사와 작곡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홍난파가 이끌던 연악회에도 참여하는 등 1930년대 초반에는 이미 작곡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알리게 된 것은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서 출반한 이애리수의 노래 〈황성의 적〉이 큰 히트를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노래는 정식 발매 수년 전부터 취성좌에서 이애리수가 연극 막간에 부르면서 알려진 곡으로, 전수린이 1920년대 후반에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회공연을 펼치다가 고향인 개성에서 왕평과 함께 만월대를 산책하던 중 악상이 떠올라 작곡했다는 일화가 있다.


〈황성의 적〉은 1980년대에 주현미가 장조 트로트로 인기를 얻기 전까지 약 50년 이상 한국에서 대중가요의 주류를 이룬 단조 트로트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연 곡이라 의미가 깊다. 전수린은 〈황성의 적〉의 성공 이후 김교성과 함께 1930년대 초중반을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전수린이 작곡한 노래는 신민요에서부터 트로트와 서양풍의 음악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신민요 색채가 강한 이애리수의 〈에라 좋구나, 전형적인 트로트곡인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재즈와 블루스가 트로트에 접합된 박단마의 〈나는 열일곱살,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한 자신의 이름을 딴 다마가와위문단을 조직하여 만주와 일본 등지를 순회하며 위문공연을 벌였고, 태평양 전쟁 종전 후에는 악기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1960년대까지 방송극 《강화도령》 주제가를 작곡하며 활동하였으며, 1970년대에 창립된 한국가요반세기작가동지회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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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연극사 동경공연 1933년 맨오른쪽 왕평, 맨왼쪽 강홍식 전옥 부부[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