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남과 북서 버림받은 광복군 태항산 전투

한부울 2008. 9. 24. 21:25

남과 북서 버림받은 광복군 태항산 전투

[e-사상계]김세린 2006-10-18 


아! 장준하(張俊河)구국장정 6천리’ 동행 취재


아홉째 날 새벽(1월19일) “눈이 많이 와서 기차가 세 시간째 그 자리에서 못 움직여”라는 약사의 말에 눈을 떴다. 일어나 창가를 보니 기차는 움직일 생각을 안했고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서주에 이어 기상악화로 인해 또 하나의 일정이 취소되는 순간이었다.

  

기차는 이제 한단이 아닌 북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정단이 원래 가려했던 한단에는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잊혀진 중요한 광복군 전투의 현장이 있는 곳이었다. 한단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가량 더 가면 나오는 태항산 남장촌. 그곳에는 광복군 사상 가장 대규모이자 중국과 연합해 일본과 싸운 전투현장과 그 전투에서 사망한 무명의 병사들 무덤이 있다. 장정단은 태항산 남장촌에 가서 진혼제를 지낼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인해 진혼제는 결국 그 다음날 호텔 세미나실에서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남한에서는 그 전투를 주도한 광복군 제1지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계열이 북한 건국세력이자 철저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 세력이자 김일성이 뒤집어씌운 6.25 책임자라는 오명 때문에 양측 모두에게 외면 받았다. 현재 남한과 북한 모두 광복군 1지대에 관한 기록은 미진하며 조선의용대에 관해서는 극히 기본적인 내용밖에는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태항산 전투도 마찬가지다.

  

우선 이 전투의 주가 됐던 광복군 제1지대는 김원봉이 대장으로 있는 지대다. 이 태항산 전투는 조선의용대 동맹과 중국 팔로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운 전투로 조선의용대 윤세주, 진광화가 총지휘를 맡았으며 이들은 모두 전사해 태항산에 묻혀있다 1950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한단으로 유해가 모셔졌다. 이들이 몸담아 활동했던 조선의용대는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그 뿌리가 있었으며 이들의 활동은 김원봉의 활동을 위주로 살펴보면 그 맥이 파악된다.

  

소설 아리랑에는 김산이 김원봉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그는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며 개인주의적인 사람이다. 그는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일본 관헌은 그에 대한 산더미 같은 조사 자료를 만들어 놓고 현지의 다른 어떤 한국인보다 그를 체포하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광복군 제1지대장 김원봉 맡아, 민족주의 지키려다 버림받아

  

김원봉은 의열단장, 조선의용대 창설, 임시정부광복군 부사령, 민주주의민족전선 공동의장, 북한정부 검열상 등 다양한 발자취를 남겼지만 이런 화려한 발자취가 오히려 그를 남북 모두에게서 잊어야 하는 존재로 만들고 말았다.

  

남한에서는 월북을 한 이유로 그의 일가친척이 풍비박산이 났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인해 숙청되고 말았다. 그가 좌익인가 민족주의자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있어서 제국주의침략기의 독립이라는 목표는 이데올로기보다 언제나 우선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1898년 밀양에서 태어나 이후 상경하여 민족주의성향이 짙은 중앙학교에서 수학했는데 현재 중앙고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 중앙학교는 계몽운동가들이 민족독립의 후진양성 차원에서 만든 학교인데 김원봉이 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민족주의자인 유근이 교장으로 있었다. 따라서 초기 김원봉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교육 받았다.

  

교장 유근이 학생들을 강화도 마니산으로 데리고 가서 단군이야기를 해주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자 학생과 교사가 모두 울었다는 일화가 현재 중앙고에 전해 내려올 정도로 중앙학교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했다.

  

김원봉은 학교를 중퇴하고 선후배인 김약수, 이여성과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김원봉의 호가 약산인데 우국지사이자 고모부인 홍명규가 물과 같아라 약수, 별과 같아라 여성, 산과 같아라 약산으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의 본격적 독립운동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면서 시작된다. 그의 활동은 일본총독부 경무대로 하여금 위협적인 존재가 될 정도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얼마나 위협적이었으면 당시 악명높던 마루야마 경무부장이 담화문을 통해 “과거 조선에 관한 흉악한 음모로서 이미 폭로된 것은 모두 이들의 소위라 할 만큼 의열단은 광포한 암살단으로, 경남 밀양 출신의 김원봉이란 청년을 단장으로 하고 있다. 동단체가 조직된 것은 다이쇼(대정) 9년으로 그 후 동인은 상해, 북경, 천진을 구치(驅馳)하면서 항상 음모를 기획하고 있어서 당국에서도 그를 체포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로 고심하고 있다.”고 말했을까.

  

김원봉 중앙고 재학 민족주의 의식 길러 의열단 조직 

 

                                                                ●김원봉


1919년 김원봉은 의열단을 조직하고 의백(단장)이 된다. 앞에 연재했던 조선총독부 폭파사건, 다나카 기이치 저격사건, 종로경찰서 폭파사건 외에도 밀양경찰서 폭파사건, 도쿄 이중교 폭탄사건, 부산경찰서 폭파사건, 김달하, 박용만 등 친일파 암살 등 의열단은 수많은 대일 테러와 암살을 감행했다.

  

김원봉은 1922년 겨울 북경에서 평소 존경해 오던 신채호에게 의열단 활동의 지침이 될 만한 선언서를 작성해 달라고 간청하는데 여기서 마련된 것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 이다. 조선혁명선언의 내용은 아나키즘적인 사상이 엿보이는데 의열단에서도 유자명 같은 이는 대표적인 아나키스트로 활동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이러한 테러, 암살 활동으로는 조국독립을 성취하기 어렵다고 절실히 느끼게 됐다. 물론 김원봉은 처음부터 대일 테러만으로 독립 운동을 해낼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김원봉이 의열단을 조직하기 전에 국내에서도 광복단이라는 암살조직이 있었는데 박상진을 단장으로 하고 김좌진 등이 활동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친일거부인 장승원을 암살한 사건인데 장승원은 해방공간에서 수도청장을 역임하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장택상의 아버지이다.

  

김원봉은 광복단의 단원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긴 했지만 광복단의 운동방향에는 회의적이었다. 즉 단발적인 테러나 암살로는 조국광복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인데 자신이 의열단 활동으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절실히 느낀듯하다.

  

1926년 김원봉은 강력한 군사조직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그 첫 걸음으로 단원들을 이끌고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이미 김원봉은 명성이 내외로 떨쳐져 있는 상태였으므로 그가 다시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탐탁찮게 여긴 동지들도 있었고, 그 역시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김상윤 같은 이는 의열단이 해체되는 것을 비관하여 머리를 깍고 중이 되었다. 김원봉은 황포군관학교 제4기로 졸업하고 그가 이끌던 의열단원들은 중국 국민혁명에 투신하게 된다.

  

1926년 의열단 해체 장개석의 황포군관학교 입학

 

                                                                ●윤세주


1927년 4월 장개석은 제1차 국공합작을 깨뜨리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김원봉은 이 사건을 좌우합작운동을 배신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반 장개석 진영에 서게 되어 중국공산당과 보조를 함께 하기도 하며 국내에서 검거를 피해 중국으로 와있던 안광천과 함께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설립하여 중국과 조선에서 온 청년들을 훈련시켜 조선 국내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 때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졸업한 권인갑이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됐는데 테러리스트 김원봉이 공산주의운동가라는 사실로 국내에 크게 알려지게 됐다. 그런데 김원봉은 코민테른(국제공산당)과 연계한 흔적이 없다고 한다. 또한 1국1당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자인 김원봉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런 점은 그가 비정통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공산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그는 그저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로 보일 뿐이다.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그의 사상은 ‘주의건 사상이건 우선 민족을 행복하고 잘 살게 하는 독립이 이루어지면 된다.’는 식으로 굳어진다.

  

한편 황포군관학교의 졸업은 김원봉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황포군관학교는 당시에 우리나라 육사를 졸업한 것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김원봉이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사실은 중국에서 나름대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황포 동창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중국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명으로 남게 되는 밑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만주사변 이후 김원봉은 국민당세력과 화해하고 1932년 장개석의 도움으로 조선혁명간부학교를 남경 외부에 설립하고 혁명 요원 양성에 나선다. 150명가량의 졸업생 가운데 많은 이가 후에 조선의용대에 가담하게 된다.

  

김원봉은 중국내 항일민족세력의 단합을 모색하면서 분열됐던 독립운동가들의 통일 전선을 이룩하게 된다. 대일전선통일동맹과 그 후신인 민족혁명당에는 의열단세력을 비롯, 한국독립당(조소앙, 양기탁), 대한독립당(김규식), 신한독립당(홍진, 이청천), 조선혁명당(최동오, 김학규) 등 5개 정당과 재미 4개 단체를 합하여 모두 9개 정당과 단체였다.

  

중국내 항일민족세력 규합, 김구는 참가 거부

 

                                               ●전투가 일어났던 태항산 남장촌


김구 세력은 참가를 거부하였고, 김원봉의 좌우익을 가리지 않는 급진적인 성향을 비판하던 일부세력이 빠져나가 1937년에는 임시정부세력이 주도하는 한국광복진선과 김원봉이 주도하는 조선민족항일진선이 양립하게 되었다.

  

1938년 10월 중국과 일본의 무한전투가 한창일 무렵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 결성식에는 조선인들뿐 아니라 중국의 군,정 관계요원들이 많이 참석했다. 이날 군관학교 졸업생 중심이 된 100여명의 대원들은 배지 하나씩을 받았는데 거기에는 한문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라는 다섯글자와 영문으로“korean Volunteer¨라는 글자 한줄이 새겨져 있었다. 부대는 총대와 2개 지대로 편성되었는데 배지 수여에 이어 김원봉 총대장이 제1지대와 제2지대장에게 각각 군기 하나씩을 수여하자 대원들은 그 군기 밑에 서서 왜적을 섬멸하겠다고 기세도 더 높이 선서함으로써 민족의 사업에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했다.

  

76명의 민족혁명당원으로 구성된 제1지대는 약산과 황포군관학교 4기 동기생이며 중국군 현역 대좌인 박효삼이 지대장을 맡고 왕통이 정치지도원을 맡아 중국군 제4전구(광서성 방면)와 제9전구(호남성을 중심으로 호북성의 양자강 이남과 강서성 서북부를 관할)에 들어가 활동하기로 했고, 73명의 전위동맹 소속원들로 구성된 제2지대는 성자군관학교 소대장이었던 이익성이 맡고 임평이 정치지도원을 맡아 중국군 제1전구(하남성 전역,안휘성 북부 일부지역)와 제5전구(호북성 북부,하남성 남부,안휘성 서부지역)에서 활동하도록 임무가 주어졌다.

  

총대부(HQ)의 지도원으로는 이춘암, 김성숙, 유자명, 최창익이 추대됐고 부대장에 신악, 정치조장에 김학무, 학무조장에 이집중, 훈련소 주임은 김원봉이 겸임했다. 그 외 부녀봉사단 단장에는 김원봉의 부인 박차정이, 3.1소년단 단장은 당시 17세였던 최동선(박차정의 사망이 후 김원봉의 후처가 된 사람)이, 의무실 주임은 한금원이 맡았고 편집위원에는 이두산이 임명돼 월간 잡지 ‘조선의용대’, 격주 발행 잡지 ‘조선의용대 통신’발행을 맡았다. 이렇게 진용을 갖추므로 해서 오랜 항일투쟁으로 국내외에서 이름이 높았던 김원봉은 조선인 항일부대의 최고 지도자가 된 것이다.

  

조선의용대 창설 중국 돕는 비정규군 역할

 

                           좌)태항산에 세워진 김학철 시비,우)손녀와 나란히 있는 김학철


그러나 조선의용대는 중국군을 돕는 비정규군이었는데 전선지구에 나가 대적 심리전에 종사하거나, 일본군 포로 심문, 일본군 문서 번역 그리고 일본군 점령지역에 파견되어 첩보, 유인, 암살, 시설 파괴 등의 일을 했다.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책자 5만권 제작, 배포, 표어 40여만 장, 적의 통행증 1만장 위조, 일본군 122명 심문, 일본군 문건 95만자를 번역했다고 한다.

  

조선의용대가 창설되던 바로 그 시기에 일본군 25개 사단 약100만 명의 병력이 중국 내륙의 거점 도시인 무한, 한양, 한구 등 소위 무한삼진지구를 향하여 물밀듯이 쳐 들어왔다. 이에 조선의용대는 창설 즉시 중국군과 함께 무한방어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됐다.

  

10여 일 동안 참전한 무한방어전에서 의용대원들은 자기가 덮고 자던 흰 이불속을 뜯어 만화 표어 등을 써서 선전사업을 펼쳤고, 먹을 것이 없으면 의복을 팔아서라도 하루에 한 끼 정도 겨우 배를 채우면서 거리에서, 극장에서, 역전에서, 선전고무사업을 하여 무한 시민들에게 항일투쟁에 일어서라고 호소하는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전세가 악화되자 국민정부의 당, 정, 군, 요인들마저 모두 무한을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무한이 함락되기 3일전인 1938년 10월 22일 조선의용대도 무한을 떠나야만 했다.

  

박효삼의 제1지대는 제9전구인 장사지역으로, 이익성의 제2지대는 제1전구인 낙양지역으로 철수하고 약산은 민족전선 및 총대부를 이끌고 제4전구인 광서성 계림으로 철수하여 1938년 12월 3일부터 계림시 동령가 1호(현 칠성공원 자리)에 조선의용대 본부가 자리 잡게 되었다.

  

중국군에 배속되었던 각지의 조선의용대원들은 진지에서나 적후에 들어가거나를 막론하고 포로를 교양하고 적을 와해시키는 사업에 참가했으며 또한 군과 민을 고무하여 항일투쟁 정서를 높이는 사업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특히 포로교양 사업에 있어서 그 성적이 뛰어났는데 교양을 거친 많은 일본인 포로들은 의용대를 떠나지 않고 그림을 그리거나 표어를 쓰거나 참호에서 고함지르는 연습(喊話)을 하는 등 일본군을 와해시키는 사업에 큰 기여를 했다.

  

조선의용대가 창설이후 2년이 되는 1940년 하반기까지의 사업실적을 보면 진지상 대적 공작으로 적진의 200~300m, 심지어는 50~60m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정서(厭戰反戰情緖:전쟁을 싫어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감정을 갖도록 하는)공작”을 벌이고 반전가극을 공연했으며,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유격전 반소탕전, 통신 및 철도 파괴공작에 참가했다.

  

포로 교양이나 염전반전정서 고취 적 와해 공작


그런가 하면 적의 포로 50여명을 교육하여 의용대에 편입시키고 75명을 훈련시켰으며 122명을 심문했고 적의 문건 95만자를 번역했으며 6만여명의 대적 선전요원을 교육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1939년 말에는 제1지대 일부 인원과 일본군 귀순자를 포함한 신입대원을 합쳐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창립시켰는데, 총대부 98명, 제1지대 78명(지대장:박효삼), 제2지대 75명(지대장:이익성), 제3지대 63명(지대장:김세왈) 등 도합 314명의 대원을 확보함으로써 창립당시 보다 약 3배가량 인원수가 불어났다.

  

조선의용대를 창설 할 때부터 약산이 의도했던 바는 독자 무력으로 성장하여 우리의 군대로 일제를 섬멸하겠다는 것 이었는데, 창설된 이후 2년 동안 많은 공적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의용대가 중국의 각 전구에 분산 배치되어 있어 독자적 무력으로 발전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또한 활동지역이 주로 국민정부군의 작전지역 내의 일선 진지로 국한되다 보니 적후 공작이 초보적 수준에 머물러 그 성과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국민당의 소극적 항일이 대원들의 불만을 초래했으며, 조선혁명군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무장 대오를 증대시키는 일이 절실한 문제인데도 조선인들이 별로 없는 화중지방과 화남지방에서 활동함으로써 무장 대오를 늘릴 수 가 없는 것이 불만이자 문제점이었으므로 이러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화북지방이나 만주로 진출할 필요가 있게 됐던 것이다.

  

보수 민족주의자들이 1940년 3월에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만들고, 9월에는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을 설치하여 의용대의 우수한 청년들을 끌어들이려는 의용대 분열공작을 취하는 것과 소속원 속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이 의용대 내부에서 분파투쟁을 일으키는 것에 맞서려면 역시 의용대 무력을 화북으로 집결시켜 적 후방 유격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의용대도 단결시키고 지도력도 확고해 질 것으로 판단하고 1940년 11월 4일 중경에서 개최된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에서 의용대를 화북으로 북상시킬 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지대장을 박효삼이 맡고 정치위원에 윤세주, 두 부지대장을 이춘암과 김세광이 맡은 조선의용대 1.3 혼성지대가 화북을 향하여 민생호 기선을 타고 중경을 출발한 것은 1941년 1월 1일이였다. 전선에 있던 제2지대도 지대장 이익성이 인솔하여 낙양 방향으로 이동함으로서 총대부를 제외한 전 의용대원이 북상을 시작하게 됐다.

  

중경을 출발하여 만현, 노하구, 낙양, 맹진, 임현, 섭현을 거쳐 팔로군 관할 지역인 태항산 지역에 7월에 도착(선발대로 최채와 이근이 5월에 먼저 들어옴)한 조선의용대 1.3 혼성지대와 제2지대는 하북성 요현(현,좌권현) 동욕진 상무촌에 있는 홍복사터에 주둔하며 “조선의용군 화북지대(지대장: 박효삼, 정치위원: 윤세주)”로 명칭을 변경하고 마전에 있던 팔로군 제18집단군전방총사령부(사령관: 주덕)의 보호아래 들어가게 됐다.

  

중국군 대일항전 돕는 보조에 불만 좌우장이 반기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황하강 이남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전개한 일로써 일정한 한계를 나타내기도 했다. 즉 독자적인 조선독립군이 아니고 무장군대도 아닌, 이름 그대로 중국군의 대일항전을 돕는 보조군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원봉의 좌장격인 윤세주와 우장격인 박효삼이 군대를 이끌고 화북으로 건너가 그 세력이 약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김원봉이 화북지역의 무장 세력과 연합을 모색하려 한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윤세주 등이 화북으로 건너가고 김원봉이 관내에 남은 것은 갈등의 표출이 아니라 관내에 김원봉이 남아서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계속 받으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김원봉이 윤세주가 태항산 전투에서 사망한 이후 석정동지약사(석정은 윤세주의 호)를 기술한 점은 김원봉과 윤세주의 우애를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에게 패배했으나 그 자존심은 굽히지 않고 계속 싸워 전사한 이들과 ‘마지막 분대장’이라 불리는 김학철이란 이에 의해 더 높여졌다.

  

김학철은 본명이 홍성걸로 1916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태어났다.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가 중국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김원봉(金元鳳)이 1938년 한구에서 조직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에 가담해 분대장으로 활약했다.

  

1941년 만주 태항산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 붙잡힌 뒤, 나가사키(長崎)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으로 출옥해 귀국했다. 이어 서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1946년 월북, 노동신문기자로 일하다가 다시 김일성(金日成) 정권에 환멸을 느끼고 195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김학철 ‘마지막 분대장’ 죽기 전 2001년 서울 방문

  

이후 작품 창작에 전념하던 중 1966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가리켜 "인민이 굶어 죽는데 웬 우상숭배냐"고 비판했다가 필화사건에 연루돼 반동분자로 숙청, 10년간 옥고를 치렀고, 24년간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가장 오래까지 살아남은 조선의용대 분대장으로서, 일명 '조선의용대 마지막 분대장'으로 불렸다. 2001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일절 부고를 내지 말고 화장해서 가루를 두만강 하류에 뿌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곡기를 끊었고, 유언에 따라 유해는 '원산 앞바다행-김학철의 고향'이라는 주소가 적힌 상자에 넣어져 두만강을 따라 흘러갔다.

 

                                                ●북경 호텔에서 지낸 진혼제


주요 작품에는 장편소설 『격정시대』『20세기의 신화』『해란강아 말하라』,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과 2001년 서울 방문 때 출간한 수필집 『우렁이 속 같은 세상』이 있다.

  

어쨌든 주력부대가 화북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으로 건너가 태항산 전투 등 치열한 전투를 치루고 있을 때 김원봉은 남은 세력들과 함께 중경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했다.(총사령 이청천) 또한 1944년 4월에는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해방 후 귀국한 김원봉은 임시정부 특별정치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좌익 쪽과 협상을 하다가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해 지자 임시정부를 나와 좌익 쪽의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공동의장에 선출돼 활약했다.

  

1946년 봄 수십 년 만에 찾은 밀양 고향을 찾은 김원봉은 열렬한 주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김원봉이 오는 길에는 광목으로 카페트가 깔렸으며, 밀양국민학교에서 열린 환영대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조선의용대의 활약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읍내 극장에서 상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우익측과 결별한 김원봉은 계속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1947년 3월 남로당이 주동하여 총파업이 발생하자 김원봉이 연루되어 체포됐는데 김원봉을 체포한 사람이 악명 높은 친일경찰 출신인 노덕술이었다.

  

김원봉, 친일파 노덕술에 체포, 여론 압력 풀려나 남북협상 월북

  

결국 김원봉 체포는 애국지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크게 형성돼 풀려나기는 하였지만 친일파나 우익들의 표적이 되어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원봉은 5개의 거처를 마련하고 테러를 피해 항상 옮겨 다니며 잠을 잤다고 한다.

  

1948년 김원봉은 이승만의 남한단정에 반대하고 4월 남북협상회의에 참가했다. 그러나 다시 월남하지 않고 그 곳에 남아 북한정부 수립에 참여해 초대 국가검열상이 됐다. 이후 1954년 노동상,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까지 승진하고 이듬해 그의 탄생 60주년을 기념하여 노동훈장을 수여하기도 했으나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당시 김원봉 계열과 납북된 김구계열이 모두 숙청됐는데 아마 김원봉도 함께 숙청된 듯싶다. 한때 자살했다는 설과 강등돼 시골에서 생활했다는 설이 있기도 했으나 확실치 않다. 북한에는 빨치산 투쟁가들을 위한 혁명열사릉과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자들을 위한 애국열사릉이 있는데 숙청이 됐어도 열사릉에 안장돼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김원봉의 무덤은 애국열사릉에서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김원봉은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 정부와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되기도 했다. 이는 그가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었다기 보다 그 어떤 사상과 이념보다 조선의 독립을 중요시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가족은 남한에서 친동생 4명과 사촌동생 등 모두 5명이 죽음을 당했으며 그 역시 북한에서 장개석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숙청되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그는 분단이 낳은 수많은 비극 중에 한 사람으로 남게 됐다.

  

기차를 타고 북경까지 가는 예정 소요시간은 9시간이었다. 그러나 폭설로 인해 기차가 멈춰서고 느리게 가면서 9시간 만에 중간기점인 정주에 도착했다. 정주에서 간식거리를 사와 각 호차에 있는 단원들에게 돌아갔다.

  

많은 독립운동사를 기차 안에서 들으면서 생각했다. 치열하게 지켜낸 이 나라가 지금 그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나라일까? 독립군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들이 자신의 이득을 위해 이익 집단을 만들고 그것을 자기 명분으로 삼는 이들이 난무하고 부정부패가 판 치고 남성들의 여성 성희롱이 습관화 되고 있는 이런 상황이 과연 그들이 원한 나라일까?

  

그들이 원한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하던 그 시절 그들은 높고 낮음이 없는 계몽을 하겠다고 나서면서 스스로 잘난 자라고 자처하는 이가 없는 함께 어울려 나가며 사는 그런 민족국가를 원했다.

  

그들은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치열하게 일본군과 싸웠다. 그들이 원하는 아름다운 국가를 위해 이젠 남아있는 우리가 노력해야 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