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최남선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한부울 2008. 10. 19. 14:09

최남선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오마이뉴스] 2008년 10월 19일(일) 오전 11:20


동경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는 학도궐기 대강연회가 진행 중이었다. 한국의 저명인사들은 일주일이 멀게 동경에 와 학병 권유 연설을 하고 있던 차였다. 화신백화점 업주 박흥식은 거액의 비행기 자금을 헌납해서인지 일본 천황을 접견하기도 했다. 삼양그룹의 창업주 김연수(인촌 김성수의 동생)가 와 학병 권유 연설을 할 때까지만 해도 뜻있는 학생들의 마음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돈 벌어 먹기 급급한 기업인들이니 무슨 일인들 못 하겠어?"


그러나 학생들은 일말의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김활란이나 주요한 등이 나섰을 때에는 실망감과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지금까지 우리는 나라를 위해서 귀한 아들을 즐겁게 전장으로 내보내는 내지의 어머니들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반도 여성 자신들이 그 어머니, 그 아내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진정한 황국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이다. 이 감격을 저버리지 말고 우리에게 부여된 책임을 다하자."(김활란, <징병제와 반도 여성의 각오>)


"출진 학도의 구두 소리는 아시아 부흥의 진군이 되고, 조선의 일본적 재생의 새벽 종소리가 될 것이다. 오늘에서야 우리를 부르시는 높으신 뜻을 서로 전하여 말하며 눈물 흘리자."(주요한, <손에 손을>)


그러다가 최남선과 이광수까지 나서자 유학생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친애하는 반도 학도여! 반도를 응시하라. 일본을 정시하라. 그리고 세계를 통찰하라. 이천 오백만의 운명은 어디까지나 학생 제군의 양 어깨에 달려 있다. 대동아는 우리 일본을 중심으로 건립되고 있다. 전쟁은 동아 전체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다."


평소 가장 점잖은 편에 속하는 김용묵이 듣다못해 시부렁댔다.


"미친놈들이군. 아무리 왜놈의 앞잡이가 되어 부귀영화를 누린다 해도 저럴 수가 있나?"


그 때 청중석의 맨 앞자리에서 웬 학생이 손을 번쩍 쳐들며 일어나더니 고함을 지르듯이 말했다.


"일군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좋다면 당신들 자식부터 내보내시오!"


그 학생은 동경제대 법학부에 다니는 신상초였다. 단상 뒤 의자에 앉아 있던 이광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안경을 벗어 손에 들고 신상초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신상초는 일본인 형사에 의해 끌려 나갔다. 연설 중이던 최남선은 못 본 척하며 물을 마셨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대동아의 성전은 세계 역사의 개조입니다. 바라건대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화랑도의 의기를 발휘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전하기를 바랍니다."

"이제 육당은 죽고야 말았다"


최남선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그의 셋째 아들 최한검은 경성제대 법학부에 다니고 있었는데 학병 출전을 한사코 거부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아는 신상초가 최남선의 아픈 곳을 찔렀던 것이었다. (끝까지 학병에 응하지 않은 최한검은 해방 후 월북하여 김일성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는 증언이 있다.)


사실 최남선은 3·1운동 직후부터 총독부에 의해 관리된 친일파였다. 그는 진작부터 제국주의자의 눈에 띌 만한 글들을 써댔다. 그의 유명한 노래 <경부철도가>는 3·1운동 훨씬 이전에 발표된 작품이었다. 이 노래는 개항으로 인한 식민지 조선의 번영을 미화하고 있다.


부산항은 인천의 다음 연대니/ 한일 사이 무역의 주장이 되고/ 항구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아무리 큰 배라도 족히 다히네./ 수입 수출 총액이 일천여 만원/ 입항 출항 선박이 일백이만 톤/ 행정 사무 처리는 부윤이 하고/ 물화 출입 감독은 해관이 하네./ 일본 사람 거류민 이만 인이니/ 얼른 보면 일본과 다름이 없고/ 조그마한 종선(從船)도 일인이 부려/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하네.


그가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에는 그의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기질과 함께 명료하지 않은  역사의식이 뚜렷이 드러난다. "자기를 추스르기에 급한 우리는 타인을 원망할 틈이 없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급한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따질 겨를이 없노라. 다만 우리의 소임은 자기의 건설에 있을 뿐이지 타인을 파괴하는 데에 있지 아니하도다."


사학자였던 최남선은 일본의 단군 부정론에 맞서 불함문화론을 제시하는 의기를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불함문화론은 너무도 근거가 박약하여 오히려 단군 부정론을 강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그의 불함문화론은 진정성도 결여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훗날 식민사관의 본산인 조선사 편수위원이 되었으며, 불함문화론을 내놓기 전부터 이미 미심쩍은 편지 글을 쓴 사실이 드러났다. 편지의 수신자는 사이토 총독의 언론 참모 겸 경성일보 사장 아베였다.


잡지는 '동명'이라는 이름으로 지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잡지를 통해 그동안 진력한 성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금후의 처분은 모든 것을 하나로 하여 선생님의 가르침에 어긋남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고 있습니다.(중략)


지난 날 (선생께서) 경성을 출발하실 때, 부친과 함께 역까지 달려갔습니다만 공교롭게도 시간에 늦어 실례가 많았습니다.(중략) 우선 이렇게 보고를 드리면서 붓을 놓겠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소장 자료)


그는 총독부 언론 공작의 지휘자였던 아베의‘가르침’을 받고 있었고, 그에게‘보고’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가출옥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의 일이었다. 친일 성향이 조선인들에게 누설되면 전면으로 내세우는 총독부 지침에 따라, 그는 1936년 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고 이어서 만주의 친일지 <만몽일보>의 고문과 만주국의 친일 엘리트 양성 기관인 건국대학의 교수 등을 역임한다.


그의 친구 위당 정인보가 최남선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에 술을 부어 놓고, “이제 육당은 죽고야 말았다.”고 통곡한 것이 그 즈음의 일이었다. 최남선은 매부 박석윤과 함께 만주에서 일제 관동군의 선무공작 업무에 참여했다. 그 후 귀국한 그는 이광수등과 어울려 본격적으로 학병 권유 연설에 나선 것이었다.


장준하와 임주호와 김용묵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연장에서 나왔다. 세 사람은 아키하바라 거리를 다 지나는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임주호가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하는 장준하를 힐끗 보면서 김용묵에게 말했다.


"김형, 어디 오뎅집에라도 가서 따끈한 대포라도 한 잔 합시다."


세 사람은 오뎅집의 포장을 들치고 들어갔다. 임주호는 빈속에 정종을 먼저 넣었고 김용묵은 오뎅 꼬치를 손에 들었다. 장준하만 엷은 김이 오르는 오뎅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김용묵이 장준하에게 말했다.


"장형, 선배들 모습이 추하더라도 그만 기분을 풀어. 장형이 그러고 있으니 여기 임형도 속이 상하는지 빈속에 술을 붓고 있잖아."


임주호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사실 그는 술이 당겨서 마시는 것이었지 장준하의 침묵에 마음 쓰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침묵할 때도 있는 법이고, 또 그럴 때일수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임주호는 하고 있었다. 오히려 마음이 쓰인 것은 김용묵인 것 같았다. 장준하는 김용묵의 말을 듣고 나서야 자기의 침묵이 지나치게 길었음을 아는 것 같았다.


"미안, 사실은 조선의 선배들 때문이 아니었어."


두 사람은 장준하의 얼굴을 보았다.


"김형, 사실 나는 학병에 지원할까 해."


김용묵은 놀라, "뭐라고?"라고 물었고, 임주호는 말없이 정종 잔을 비웠다.


[오마이뉴스 김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