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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무효선언, 문서공개

한부울 2008. 11. 4. 16:40

을사조약 무효선언, 문서공개

[경향신문]2005년 02월 28일 17:46:18

 

 

3·1절을 맞아 공개된 을사조약 무효선언서들은 고종황제가 1905년부터 일본의 압력으로 퇴위할 때까지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투쟁해 왔음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 일본의 주장과 달리 을사조약이 황제의 위임, 조인, 비준이라는 국제조약의 성립요건을 갖추지 않은 채 강박으로 체결됐음을 입증한다.


일제는 1905년 11월18일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조약은 정당한 절차를 거친 합법적인 조약이 아니었다. 당시 조약체결을 위해 특파대사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주일공사관의 문서관장을 지낸 마에다 교사쿠(前間恭作)를 시켜 한국 외부대신의 관인을 훔쳐 조약문에 날인하게 했다. 물론 조약 체결 당사자인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에게는 양국 통치권자의 위임 절차가 전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조약 비준권자인 고종 황제의 태도이다. 고종은 여러 차례에 걸쳐 조약 체결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며 일제에 강요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약체결을 전후해 고종은 헐버트와 민영찬을 잇따라 미국에 파송해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선처’를 요청했다. 또 알렌에게 따로 밀지를 보내 미국의 협조를 부탁했으나 미국은 ‘비공식 비밀외교’라며 묵살하고 만다.


조약이 체결되고 일본의 통감부 설치가 임박해지자 고종황제는 1906년 1월 29일 국서를 만들어 을사조약 무효와 통감 파견 반대를 공식 선언한다. 문서는 별도의 제목 없이 고종황제의 주장을 담은 6개 조항으로만 이뤄져 있어 작성 당시 다급했던 상황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인장만은 대한제국에서 외교문서에 사용하던 ‘대한국새’를 찍어 국가문서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문서는 당시 특파원으로 국내에 파견된 영국 트리뷴지 더글러스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되었고, 스토리 기자는 이 문서를 트리뷴지 1906년 12월1일자에 보도, 고종이 조약체결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양에 알렸다.

트리뷴지와 스토리기자의 저서 ‘동방의 미래’(Tomorrow in the East)에서 이 문서의 사본을 찾아낸 김교수는 “이 문서는 대한매일신보가 트리뷴지의 외신 보도를 받아 국내에 알릴 정도로 을사조약 무효를 대내외에 선포한 최초의 문서”라고 밝혔다.


이러한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열강의 협조가 뒤따르지 않자,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위원으로 임명해 일본을 만국공판소에 제소하는 한편 미국과 유럽의 9개국 원수에게 친서를 발송한다. 1906년 6월22일 작성한 친서는 고종황제가 직접 작성한 밀지를, 자신이 선택한 밀사에게 위임했다는 점에서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된 국서보다 한 차원 진전된 것이다. 친서 전달은 만국평화회의가 연기되는 바람에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1907년 6월 만국평화회의를 앞두고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헤이그특사에게 위임장을 주어 대한제국이 국제법상 독립국가임을 재확인 받고자 했다. 또 헤이그특사에게 별도로 러시아 황제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친서를 전달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상설 등은 회의 참석 자격도 얻지 못했으며 러시아 황제로부터도 아무런 협조를 얻지 못했다. 특사 중의 한 명인 이준은 당시 헤이그에서 순국하는 비운을 겪기도 한다.

 


일제는 헤이그사건을 빌미로 1907년 7월16일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내쫓았다. 이때까지 고종이 을사조약을 비준하지 않은 것은 물론 비준 거부와 주권 회복을 위해 투쟁했다.


김기석 서울대 교수는 “그간 외국의 일부 학자들은 고종을 ‘나라를 팔아넘긴’ 무능한 제왕으로 묘사했으나 이번 문서는 대한제국의 주권 수호를 위해 조직적으로 외교투쟁을 벌인 충의의 제왕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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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무효’ 國書 있다

입력: 2005년 02월 28일 17:58:19

 

  

을사조약 100주년을 맞아 고종황제가 을사조약이 무효였음을 대외에 공포한 국서(國書)와 친서들이 한꺼번에 공개됐다.

경향신문이 28일 서울대 김기석 교육학과 교수로부터 단독입수한 고종황제의 을사조약 무효선언 문서들에 따르면, 고종황제는 을사조약 문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을사조약의 무효를 공식선언했으며 이후 퇴위 때까지 줄기차게 일본의 주권침해를 공개규탄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번에 공개된 고종의 을사조약 무효선언서는

▲1906년 1월29일 작성된 국서

▲1906년 6월22일 헐버트 특별위원에게 건넨 친서

▲1906년 6월22일 프랑스 대통령에 보낸 친서

▲1907년 4월20일 헤이그 특사 이상설에게 준 황제의 위임장 등이다.


이중 가장 주목되는 문서는 고종황제 이름으로 작성된 을사조약 무효선언 국서. 조약체결 불과 2개월 뒤인 1906년 1월29일 작성된 이 문서는 그 해 영국 트리뷴지(1906년 12월1일자)에 보도되며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서양에 처음 알렸다. 또 이듬해에는 대한매일신문(1907년 1월16일자)에 게재되기도 했다.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열강의 공동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고종황제가 조약 직후 발표한 이 문서는

▲을사조약 무효선언

▲통감부 설치 반대

▲열강의 5년 기한 공동보호 수용 등 모두 6개 항으로 이뤄져 있다. 문서에는 대한제국 황실의 공식 국새인 ‘대한국새’가 찍혀 있어 문서의 내용이 황제의 뜻임을 보여주고 있다.


김기석 교수는 “을사조약 무효선언 국서는 고종이 을사조약 무효를 내외에 공식 선언한 첫 문서”라고 밝혔다.


경향신문 조운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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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늑약’, 비분강개 대신들 日 위협에 ‘투항’

[경향신문]2005년 11월 14일 08:17:01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25년이 지나서야 들려준 한규설의 회고담은 100년 전 조약체결 현장에 참여했던 조선의 조약 담당자, 그것도 조정의 최고책임자의 구체적인 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지금까지 영국 언론인 매킨지 등의 저서를 통해 을사늑약 상황이 알려지긴 했으나 한국인에 의한 증언은 처음이다. 한규설의 회고담을 요약,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해본다.

 

 

광무 9년, 즉 1905년에는 한반도에는 풍운이 드리워 있었다. 서울에는 일본군 하세가와 요미시치(長谷川好道) 대장을 비롯한 일본 군대들이 드나들었다. 11월9일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와 10일 고종황제를 알현했다. 이때 일진회에서는 일본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소동을 피웠다. 나는 관리들에게 일진회의 언동에 현혹되지 말도록 하고 이토 대사의 행동을 감시했다.


15일 외부대신 박제순은 하야시 곤스케(林勸助) 공사의 초청을 받고 다녀와 을사조약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예정된 사실이어서 별로 놀라지 않았다. 모두 일치하여 반대할 것을 결심했다. 16일 이토 대사가 숙소에서 원로 민영환과 심상훈, 그리고 대신들을 초청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동양의 대세이니 조약 동의에 날인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모두들 거절하였다. 밤중에 수옥헌에서 어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나와 박제순이 “군신들이 순직하는 결심을 가져야 한다”고 아뢰니 숙고하여 선처하라는 하명이 있었다.


대신들은 회의 때마다 비분강개하며 조약에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특히 박제순은 자주 나를 찾아와 의견을 나누었다. 한번은 그가 “외무대신의 인장을 뺏길 것 같으면 자결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서너 살의 아이밖에 없어 사후가 걱정된다”며 유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을사늑약 직후 ‘코리안 페이퍼’에 실린 풍자화. 군도로 협박하는 ‘왜병’(일본군)과 득의양양한 미소를 띤 ‘왜적’(일본 외교관) 앞에서 을사오적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종이 주먹을 불끈 쥔 채 비분강개하고 있다. ‘한일협약도’(韓日脅約圖)란 제목과 ‘일본이 한왕을 위협해 조약을 늑정’이란 설명을 붙여 조약체결의 부당성을 고발하고 있다. 


17일에 공사관에 불려가 회담을 했다. 모두들 변함없이 ‘불가’라고 완강하게 말했다. 그러나 회의가 계속되면서 대신들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어떤 대신은 조문을 수정한 뒤 승낙하면 어떤가 하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때 나는 사직도 고려했다. 그러나 나보다 약한 사람이 임명될 경우 내가 죄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그만두었다.


공사관에서 돌아와 궁중에서 다시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사이 이토, 하야시, 하세가와 등 외교관과 군인들이 다수 내전 근처로 들어왔다. 각 대신이 차례로 의견을 말했다. 학부대신 이완용이 “반대한다고 해결되는 형세가 아니니 차라리 조문 수정을 요구하는 게 낫다”고 말하자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내부대신 이지용도 찬성 의견을 말해 회의가 혼란에 빠졌다. 이 사이 고종은 내전으로 들어가고 이토 대사가 회담장에 들어와 찬성할 것을 설명하였다.


이때 나는 이 문제가 군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중대사이니 만민의 공론에 부쳐 해결하자고 제의하고 회의 연기를 청하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잠시 후 공사관 통역관 시오카와를 통해 이토 대사가 만나고 싶다는 전갈이 와 들어가니 이토가 날인을 강요했다. 나는 끝내 불가하다며 반대했고 이 와중에서 일본군들에게 감금되었다.


새벽 1시30분쯤 일본군들이 물러나 나와보니 조약서에 외무대신 박제순이 날인했다는 것이다. 벌건 얼굴로 나온 박제순에게 “숨긴 도장은 어떻게 된 거야”라고 소리쳤으나 이미 늦은 때였다. 그때 나는 조약 무효를 위해 법부대신과 탁지대신을 제외한 모든 대신을 면직하는 수속을 밟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일본군 장성과 공사관원들의 함께 찍은 기념 사진 


그러나 다음날은 이미 별천지였다. 나에게는 ‘어전에서의 행위가 도리에 어그러졌다’는 죄명으로 ‘3년 유형’에 처한다는 칙명이 내려와 있었다. 23일 조약이 공포되었고, 그때부터 나는 두문불출하며 집안에서 유형을 받았다.


조운찬기자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