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맞이한 8.15 (피는 살아 있었다)
2006-08-10 22:40:48 김준경
“한국 독립 만세!”
“한국 독립 만세!”
“중화민꿔 완시!”
“중화민꿔 완시!”
“항꿔 두리 완시!”
미쳐 날뛰는 군관민(軍官民), 물결치는 깃발들. 1945년 8월 11일 오전 10시 경,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조그만 촌락은 열광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광복을 맞이한 것은 호북성(湖北省) 함녕(咸寧)이라는 곳에서 동쪽으로 약 사십여 리 떨어진 보절현(縣)의 한 촌락에서였다.
멀리 후방 강서성(江西省) 수수(修水)로부터 이곳으로 진격하여 함녕(咸寧) 시내에 있는 일본군 여단본부와 대치하기를 벌써 십여 일.
‘오늘이냐, 내일이냐?’하고 공격 명령이 내리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8월 9일 하오,
“한국 동지들! 반가운 소식을 전하여 주겠소.
미국은 어제 무서운 폭발력을 가진 원자폭탄(原子爆彈)을 일본의 장기(長騎), 광도(廣島), 선대(仙臺)(다소 잘못 알려졌던 듯) 등 세 군데에 떨어뜨렸소. 광도(廣島)의 백만 인구 중 육십만이 전멸했다고 하오. 그뿐이 아니라, 아국(俄國-소련)이 이제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하고 동삼성(東三省) 일대에서 진격해 나가고 있소.
연합국의 추측으로는 일본이 일주일 이내에 ‘무조건항복(無條件降伏)’ 할 것으로 보고 있소. 만약, 일본이 연합국 추측대로 항복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삼 개월 이내에 무한삼진(武漢三鎭)을 탈환하고, 금년 12월 말까지는 북경(北京)까지 수복하는 작전계획이 되어 있으니, 이제 일본의 패망은 목전에 다다랐소.
승리는 가까이 와있고, 여러분의 조국 독립도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소!”
우리를 직접 지도하고, 우리의 지휘자로서 진군을 같이해오던, ‘국부군 신편 15사 보병 제45단(國府軍 新編 15師 步兵 第45團)’의 부단장 ‘도계문(陶啓文)’ 중교(中校)가 우리 ‘항꿔쓰스(韓國志士)’들에게 알려준 소식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그렇게 불렀다.
‘글쎄? 그 악착같은 왜놈들이 그렇게 쉽게 항복을 할까? 그러나 그들의 운명도 멀지는 않았겠지.’
하루가 지난 8월 10일 저녁 아홉시 경, “스봉꿰이즈 왕료(일본 놈 망했다)! 스봉꿰이즈 왕료(일본 놈 망했다)!” 15사령부로부터 숨가쁘게 달려오며 외치는 전령(傳令)의 목소리!
아직도 먹이 뚝뚝 떨어지는, 한지(漢紙)에 쓴 연락문을 단 본부에 전달했다.
<일본은 8월 15일 상오 11시 35분 중립국 서서(瑞西-스위스)를 통하여 포스담 선언을 수락함으로써, 무조건 항복할 것을 연합국 측에 통고했다.> 단 본부 특무상사 이(李) 상위(上尉)가 낭독하는 내용을 듣고 있던 전 장병들의 입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우렁찬 만세 소리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 이튿날 승전경축행사(勝戰慶祝行事) 광장에 입추의 여지없이 모여든 전 단부(團部) 장병의 총구에는
中華民國 萬歲(중화민국 만세)!
光復山河 萬歲(광복산하 만세)!
抗戰八年 勝利萬歲(항전팔년 승리만세)!
라는 깃발들이 빠짐없이 꽂혀있었다. 그러나 그 승전 깃발 못지 않게
韓國獨立 萬歲(한국독립 만세)!
하는, 우리 조국의 독립을 축하하는 깃발들이 그들 단부(團部) 병력의 거의 절반이나 되는 장병들의 총구에 꽂혀있었으며, 기념식에서는
“중화민꿔 완시!” 와 함께,
“항꿔두리 완시!”
가 우렁차게 광장의 전 군관민(軍官民)에 의해 제창되었으며, 행진하는 부대의 장병들 손에서는 우리의 독립을 축하하는 깃발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앞가슴에 ‘韓國志士(한국지사)’라는 명찰을 단 8, 9명의 한국동지들이 선두에서 행진하다가, 뒤돌아보았을 때의 그 감격!
그날 저녁인 8월 11일 밤에는,
‘9전구(戰區) 34단장과 45단 부단장인 도계문(陶啓文) 중교(中校)는 무한지구(武漢地區) 일본군에 대한 무장해제(武裝解除)와 경비인수(警備引受)에 대한 교섭대표로서 일본군 측과 교섭을 진행하라.’ 는 내용의 지령이 중경(重慶)으로부터 접수되었고, 8월 12일에는 홍산(洪山)이라는 곳에 있는 일본군 대대본부를 찾아가게 되었다.
양 대표에게 7, 8명의 정보원이 수행하는 이 대표단에, 나는 한국인으로서 수행하게 되었으며, 5, 6일이 지난 8월 18일에는 일본군 여단본부가 있는 함녕(咸寧)을 향하여 경호대원 100여 명을 인솔한 우리 대표단이 일본군(日本軍) 여단장(旅團長)을 교섭하기 위하여 입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차도에 도열한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는 군중, 거리거리에 나붙은 수많은 축하전단과 아울러, 터져 나오는 환호성. 시골 부녀자들이 나무 물통에 뜨거운 엽차를 가득히 끓여놓고 정성껏 차를 떠서는,
“니, 허사- 바-(차 드세요).” 하며 권하던 모습.
그날 오후, 일행이 함녕(咸寧) 동문(東門) 밖에 이르렀을 때, 그 앞에 미리부터 도열하고 기다리던 일본군 여단장(旅團長) 이하 여단본부(旅團本部)의 전 장병(將兵)이, 여단장의
“기오___쓰께, 가시라___미깃(부대 차렷, 우로 �)!”
하는 구령으로 부대경례를 올리고, 그 앞을 마상에 늠름하게 앉은 양 대표장교들을 선두로 바로 그 뒤에는 비록 무명용사이나마 앞가슴에 ‘韓國志士(한국지사)’라는 명찰을 단 내가, 곁눈질도 주지 않은 채 그들을 사열하며 당당하게 승리군의 교섭대표로 입성하고 있었다.
그 감격-, 아 잊을 수 없는 그 감격! 어찌 잊을 수 있으리.
김 준경
1924년 4월 22일 강원도 횡성에서 출생
특별경찰대
6.25 종군
강원경찰학교장 역임
1973년 5월 5일 경찰병원에서 별세
1969. 8. 15 강원일보
http://blog.joins.com/dooni/6689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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