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켈로부대원, 장근주씨의 굴절된 인생역정

한부울 2008. 6. 26. 20:18
 

켈로부대원, 장근주씨의 굴절된 인생역정

[연합뉴스] 2008년 06월 15일(일) 오전 07:01


(푸순=연합뉴스) 조계창 특파원 = "이렇게 찾아주셔서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한국전쟁 당시 중국 영해에서 첩보활동을 벌이다 생포된 북파공작 '켈로(KLO)부대원'으로 현재까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랴오닝(遼寧)성 푸순(撫順)시에서 신장암과 힘겨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장근주(77)씨는 14일 자신을 찾아온 푸순한국인회 이성남 회장을 보자 병상에서 쉰 목소리로 연신 "고맙다"는 말을 되뇌었다.


현재 그는 5년 전 발견한 신장암이 악화돼 한 눈에 보기에도 "곧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장씨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기 전 한국에 가는 게 마지막 희망이라며 이 회장의 손을 부여잡고 간절하게 호소했다. 그의 애타는 호소의 목소리에서는 자신을 외면한 조국에 대한 서운함이 짙게 묻어나왔다.


그간 켈로부대원이 생포돼 현재까지 중국에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꾸준하게 제기돼 왔다. 미 극동군사령부는 예하에 13개 대북 첩보부대를 만들어 약 4만2천여명에 달하는 한국인을 입대시켜 첩보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켈로부대는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중국을 대상으로 한 첩보수집 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장씨는 바로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인인 셈이다. 장씨 역시 북한 출신이라는 점이 고려돼 켈로부대에 입대한 사례였다. 1950년 7월 아버지와 동생을 데리고 남포를 거쳐 황해도 초도(椒島)로 피난을 간 장씨는 그곳에서 모병관을 만나 "아버지와 동생은 한국으로 피난을 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은 부대에 입대했다.


자신이 입대한 부대가 첩보부대라는 사실은 배를 타고 평안북도 회도(灰島)에 도착해서야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부대장을 맡았던 김모씨는 장씨 등 신병들에게 "우리 부대는 미 극동공군사령부 소속 정보유격대인 호염(湖鹽)부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장씨에게는 전투를 맡는 무장원이라는 보직을 정해줬다.


호염부대는 중국 단둥(丹東)과 가까운 회도에 주둔해 있었으며 부대원 중에는 국민당 계열 중국인도 참가하고 있었던 대중, 대북 첩보부대였으며, 부대유지 및 작전에 필요한 식량과 무기는 모두 미군이 탑승한 배를 통해 조달했다. 하지만 장씨는 입대 두 달이 못돼 중국에 생포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1951년 9월13일 부대의 명령을 받고 정보원 한모(한국인)씨와 통역 안모(한국인)씨, 분대장 최모(한국인)씨, 무장원 이모(한국인)씨 등 5명의 공작원과 함께 선장 왕모(중국인)씨가 조종하는 침투선박을 타고 중국 영해로 들어가 첩보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틀 뒤 중국 경비정과 어선 등에 발각돼 교전을 벌였지만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생포되고 말았다.


이후 장씨는 다른 공작원들과 일단 단둥으로 압송돼 조사와 재판을 받으며 고초를 겪다 1952년 9월 랴오닝성고급인민법원에서 중국측 영해를 침범해 중국과 북한 선박에 총격을 가하고 선원 1명에 부상을 입힌 혐의 등으로 징역 15년을 받고 푸순감옥에서 복역하다 1965년 10월 석방됐다.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갈 곳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에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시만 해도 외교관계도 없는 적대국이었던 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중국인도 아니고 북한인도 아닌 한국인이었던 그를 받아줄 곳은 중국 어디에도 없었다. 호구지책이 없었던 장씨는 석방된 후에도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 숙식을 하며 공장에서 목공으로 일하다 1967년 조선족 교포인 곽달선(69)씨를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중국에 정착하게 됐다.


곽씨는 "남편이 간첩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가족들이 극구 반대했지만 사람이 성실하고 착해 보여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국으로 돌아갈 기약없이 지냈던 장씨는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교포들의 한국 방문길이 열리자 친구로 지냈던 조선족 심모(현재 사망)씨가 한국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한국에 있을지도 모를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노력 끝에 2000년 5월 서울 상계동에 살고 있던 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심씨는 장씨의 편지를 들고 우리 국방부를 찾아갔고, 국방부가 수소문 끝에 동생을 찾아 형이 중국에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동생은 2000년 6월에 형이 있는 푸순까지 찾아와 극적인 상봉을 했지만 그해 7월 편지를 마지막으로 무슨 연유인지 연락이 두절되고 말았다. 또 국방부에서 자신을 데려가겠다는 통지도 오지 않았다. 장씨의 가족들은 "한국의 국방부에서도 아버님이 국군이 아니라 미군부대 소속이었다는 점 때문에 연락을 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둔 장씨를 만나본 이성남 회장은 "북한을 탈출한 국군포로도 다 조국으로 모셔가는데 이런 분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돼왔다는 게 너무 안타깝다"며 "같은 한국인으로 장 선생님이 조속히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