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아메리칸 리포트/ 1950년6월~1952년, 한국에서의 비밀 전쟁
[미주한국일보] 2008년 06월 26일(목) 오전 06:26
북한서 게릴라 활동 미 공작원 8,000명
CIA 비밀해제 문서서 드러나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과 미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에서의 게릴라 전술 작전을 위해 각각 별도의 북파공작 프로그램을 운용했으며 당시 미군 지휘하에 북한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인 공작원만도 최소한 8,000명에 달했던 사실이 최근 비밀해제된 CIA 문서에서 확인됐다.
CIA가 1964년 3월 작성, 이번에 공개한 ‘1950년 6월~1952년 6월, 한국에서의 비밀 전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1951년 초 CIA와 주한 미8군(EUSAK) 작전부(G-3)가 게릴라 전술 작전 및 지휘를 위해 서로 조화를 이뤄 북한을 2개 지대로 분할했다”고 밝히고 있다.보고서는 “CIA는 이미 한국 극동북 산악지대에 훈련된 게릴라 활동을 위한 기반을 구축해 놓은 상태였고 육군은 1950년 10월7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진격한 후 유엔군 지지 게릴라 움직임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서부 지대를 차지했다”며 1951년 10월에 들어서 38선 위의 서해안에는 모집 방법과 훈련 수준에 따라 다양한 능력에 맞춰 16개로 조직된 부대 소속 게릴라 약 8,000명이 EUSAK G-3 프로그램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고서는 이어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해상을 지배한 미 해군의 보호하에 서해 인근 섬 기지들에 의존했기 때문에 해안선 만입과 갯벌 바닷가에 기지가 설립돼 있지 않았고 이 같이 해안 지상에 안전한 기지를 설립하지 않은 잘못은 후에 결국 비참한 결과를 낳았다”며 “판문점 정전협상이 벌어진 1951년~52년 겨울 공산당은 이 지역을 소탕했다”고 회고했다.
보고서는 이에반해 “CIA에 주어진 첫 임무 중 하나는 북한의 북방 국경을 따라 X곳(비밀해제 안됨) 지역에 X개 팀을 투입하는 것이었다"며 "목표는 북한군이 이용하는 철도, 항만과 주요 도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악지대에 관측 주둔지를 확립, 중국 공산당 또는 소련의 지원에 대한 사전 경고를 위해서 였다"고 기록, 한국전 당시 CIA의 북파공작 활동에 대해서는 그 규모와 구체적인 활동지역 등 정보를 아직도 비밀에 부치고 있다.
보고서는 "10주간의 훈련 이후 X개 팀이 극동공군 B-17기에서 목표 지역 인근에 낙하 투입됐다. X개 팀들의 X명은 자신들의 무전기로 연락을 취해왔으나 4일 이내로 적에 적발돼 도피하고 있다고 보고해왔다"며 "10개월간 낙하 투입된 X명 중 X명이 미 육군 또는 미 해병 사단을 찾아 피신해 CIA로 돌아왔다. 이 작전은 철저하게 훈련되고 자극된 코리안 첩보원들이 적에 적발되지 않고 북파 될 경우 그들이 북에서 자생하면서 실적을 올릴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라고 밝혀 CIA의 코리안 북파공작원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뒀음을 확인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 1950년 늦은 여름에는 CIA의 코리안 무장 수색팀이 정기적으로 동해안 적진에 야간 상륙을 하기 시작했고 그 중 성공적인 작전의 한 예로 미국이 세균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공산당의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미 해군 구축함에서 출동한 팀이 극동사령부 의무감 크로우포드 F. 샘스 준장을 밤에 호위, 적군 어촌에서 촌장과의 비밀 회동을 성사시킨 사례를 들었다.
보고서는 이외에도 첩보수집 분야에 있어 1951년 10월에 북한 노동당, 인민군, 군사정보부(M.S.S.)와 정부를 깊이 파고든 첩보망이 형성돼 이 모든 곳에서 고급첩보를 입수하는 튼튼한 기반이 성립되기 시작해 군사, 경제, 사회, 방첩 등 장기적인 차원의 정보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이 첩보망을 통해 1952년 1월에는 북한과 중공군의 총괄적인 전투작전계획에 대한 2종의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외에도 CIA의 북파공작원들에게 배급된 무기와 무전기, 적지에 낙하 투입된 공작원들을 위한 지원물자 공급 수단 및 방법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CIA가 “한국 육군과 전투적 불교집단과 접촉망을 설립해 그들을 이용한 강력한 저항 및 게릴라 프로그램 시험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고 밝혀 CIA 북파공작원 프로그램 역시 미8군 북파공작 프로그램과 마찬가지로 한국 군인들뿐만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포함돼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보고서는 "한국전쟁 초기 당시 첩보 수집 분야에 상당한 혼돈이 있었다. 군부는 공산당의 침략에 준비가 안돼 있었고 따라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의 전략적 첩보 수집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예산은 삭감돼 있었고 교육을 받은 인력도 준비돼 있지 않았다"며 "극동사령부 G-2(정보부)의 윌러비 장군이 CIA에게 이 같은 전략적 첩보 수집 공백을 채워달라고 요청해왔고 (CIA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 역할에서 빠져나가지를 못했다"고 밝혀 한국전쟁 당시 CIA의 북파공작 프로그램은 CIA의 이니셔티브가 아니라 미군의 요청에 의해 전개된 작전임을 강조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군부의 요청에 따라 한국전쟁 발발 12주만에 북한의 만주, 소련 국경 인근 지역에 북파공작원들을 낙하, 투입하기 시작했으며 그 후 CIA와 EUSAK G-3의 북파공작 작전 이외에도 미 극동군사령부연락분대(FEC/LD), 미 5공군특수작전부대(SAU), 대한민국 육군첩보부대(HID) 등이 정보활동 기구로서 적군 활동에 대한 첩보망을 유지해오다 1951년 11월말에 들어서야 군부가 CIA와의 협의를 거쳐 한국내 모든 군사, 유격, 특수, 정보작전을 총괄하는 '합동사령부한국수색작전부대'(CCRAK)를 구성했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지난 15일 중국 랴오닝성 푸순에 사는 장근주(77)씨가 자신이 1951년 7월 미 극동군사령부 예하 13개 ‘켈로’(KLO:한국연락소) 부대 중 하나였던 ‘호염부대’에서 활동하다 이듬해 9월13일 중국 영해에서 체포됐다고 주장해 한국전쟁 당시 북파된 미군 소속 한국인 공작원 문제가 최근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장씨는 한국전쟁 당시 동료 공작원 5명과 함께 첩보를 수집하던 중 중국 경비정과 어선에 발각, 생포돼 안둥(지금의 단둥)으로 압송된 후 중국 영해를 침범하고, 중국 어선에 총격을 가한 혐의로 랴오닝성 고급인민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나, 14년 만인 1965년 10월9일 석방됐으며 1967년 조선족과 결혼, 1992년 10월까지 푸순감옥 공장에서 목수로 일하며 삶을 이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1951년 11월 미 군부-CIA협의
한국내 정보작전 총광 'CCRAK' 구성
미 육군 기록에 따르면 '미8육군 G-3 혼합전술보조부대(Miscellaneous Group)'는 1951년 1월15일 공식 구성됐다. 그 후 1951년 5월5일 별도의 부대인 8086육군부대(AU)로 독립, 분리됐으나 1951년 12월10일 해산됐다. 8069 AU는 미 극동군사령부가 한국에서의 군사 유격, 특수, 정보작전 총지휘권을 확보함에 따라 해산과 동시에 모든 병력과 물자가 극동사령부한국연락분대(FEC/LD[K])로 편입됐다.
FEC/LD[K]는 8242육군부대가 한국에서의 군사, 유격, 특수, 정보작전 총지휘권을 부여한 별도의 부대인 합동사령부한국수색작전부대(CCRAK)를 구성함에 따라 1952년 10월6일 CCRAK의 예하부대가 됐다. 그 후 FEC/LD[K] 8240 AU 본부는 1953년 9월1일 해산됐으나 FEC/LD[K] 8240 AU의 예하부대인 '유엔한국유격보병부대 8240 AU'(전 유엔한국유격대)는 1954년 5월까지 계속 CCRAK의 예하부대로 존재했다.
신용일 기자미주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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