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의 민간인 '집단학살'과 맥아더의 '묵인'
[노컷뉴스] 2008년 07월 07일(월) 오전 08:54
대전 산내동의 골령골.
한국 전쟁 발발 초기인 1950년 7월 대전 형무소 수감자들을 포함해 최대 7천명에 이르는 민간인들이 한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 학살된 곳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처럼 한국 전쟁 당시 한국 군경에 의해 집단 학살이 자행된 대전과 수원, 인천, 대구, 부산등 전국 150여 군데에 대한 발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대전 산내학살사건 희생자 위령제'는 지난 2000년부터 시작돼 올해로 9번째를 맞고 있다.
◈ 한국 군경에 의해 최소 10만 여명 총살
AP통신은 '산내동의 골령골'은 한국 전쟁 당시 '테러의 여름'(summer of terror)속 '킬링필드'(killing field) 였다고 소개했다. AP통신은 이와 관련해 6일 한국 전쟁 당시 한국군과 경찰이 좌익인사와 동조자들을 집단으로 처형했으며, 미국 맥아더 사령부는 사실상 이를 묵인했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한국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 처형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그 해 여름과 가을에 집중적으로 이뤄져 최소 10만여명이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총살을 당했다고 전했다. 미 육군 1급 비밀보고서와 국립문서보관소 자료등에 따르면 당시 한국군의 지휘권한을 가진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군사령관도 이 같은 집단처형 사실을 보고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1950년 8월 일본 도쿄에 머물던 맥아더 장군은 대구 부근에서 처형된 200~300명의 민간인 가운데 여성과 12세 소녀가 포함됐다는 보고를 받고 한국 군경의 '잔인함'(extreme cruelty)을 언급했다고 AP통신은 소개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존 무초(John J. Muccio) 당시 주한 미국대사에게 관련 사실을 전했을 뿐 집단처형을 중단시켰다는 기록은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AP통신은 덧붙였다. 무초 대사는 이후 한국 정부에 잔인한 민간인 학살을 중지하고 법에 따른 집행을 요구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이와 관련해 맥아더 사령부에 파견됐던 국무부 관리 세발드(W.J. Sebald)는 그 해 12월 19일자 전문에 맥아더 사령부는 '남한 내부의 문제'(South Korean internal matter)로 보고 있으며, 때문에 '특별한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had refrained from taking any action)고 기술했다.
◈ 미군 집단학살 목격·감독·사진촬영…CIA, 미군 입회감독사실 보고 제외
한국 군경의 집단학살은 1950년 6월 29일 남쪽으로 퇴각하던 한국군과 미군 고문관들이 '북한군이 서울 시내 교도소 수감자들을 모두 풀어주고 점령군으로 징발한다'는 보고를 접하면서 시작됐다.
비밀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군 군사고문관 롤린스 에머리히(Rollins S. Emmerich-1986년 사망)는 부산 교도소에 있는 수감자 3,500명을 처형하려던 한국군 김 모 대령을 제지했지만 결국 김 모 대령은 북한군이 부산 외곽까지 접근하는 위급한 상황이 오기전에 이들을 모두 사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미 공군 정보장교였던 도널드 니콜스
(Donald Nichols-1981년 사망)도 그 해 7월 1일 경기도 수원에서 1,800명이 집단 처형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었다.
당시 영국 공산당 기관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Alan Winnington)도 그 해 7월 1일부터 사흘동안 대전지역에서도 집단처형이 이뤄졌으며 지프에 탄미군 장교들이 '살육을 감독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중앙정보국(CIA)과 미군 첩보대는 당시 관련 사실을 상부에 보고하면서 집단처형 현장에 미군이 입회하거나 감독했다는 사실은 제외했으며 처형사진은 한 달이 지나 펜타곤에 보내졌다고 덧붙였다.
AP는 이후 패럴 장군(Gen. Francis W. Farrell)이 미군의 집단학살 참여여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는 사실은 확인됐지만 실제 조사가 이뤄졌는지는 알 수 없다고 전했다.
◈ 美 방조…영국군에 의해 제동, 한국정부 집단처형지 언론 저지
이처럼 집단처형을 묵인 방조하는 미국의 애매모호한 태도는 그 해 가을까지 계속되다가 결국 영국군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영국군 장교들이 1950년 12월 미군 점령하에 있던 북한 지역에서 총살 직전의 민간인 21명의 목숨을 구했으며, 더 이상의 대량학살을 막기 위해 서울 외곽의 이른바 '처형의 언덕'(Execution Hill)을 장악했다.
영국의 계속된 항의에 딘 러스크(Dean Rusk) 미 국무부 차관보는 '미군 사령관들은 그같은 잔혹행위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말한 것으로 AP는 전했다.
AP는 이제 반세기가 지나 한국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역사에 감춰졌던 '테러의 여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조사하고 있다면서 조만간 미국의 모순된 행동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병준 이대 교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군경들은 집단처형을 중단하지 않았고, 미군들은 당시 범죄현장에 입회해 사진을 찍고 보고서를 작성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도 '민간인 집단처형은 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대 가을까지 이어졌으며, 대략 150군데 집단 매장지에 희생자는 최소 10만명에 이를 것'이라고 덧붙였다.
AP통신은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집단처형지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금지했다면서 한국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핵심 참모들의 지시에 따라 집단처형이 이뤄졌을 개연성이 높지만 관련 증거자료는 없다고 소개했다.
◈ 모든 책임은 한국에 vs 미국은 은폐 책임여부 팽팽
한편 민간인 집단처형에 대한 미국의 책임여부를 놓고서는 찬반양론이 팽팽한 상태다. 당시 대전에 주둔했던 미군 자문관 프랭크 윈슬로(Frank Winslow.81)는 AP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칠면조 사격'(Turkey Shoot)으로 불렸던 처형장에 미군이 참여하긴 했지만 '한국인은 주권국이며, 모든 책임은 한국에 있다'(The Koreans were sovereign. There was never any question that the Koreans were in charge)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는 '미국은 아무 행동(제재 조치)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전 학살극을 은폐했다'(the U.S. not only did nothing, but covered up the Daejeon massacres)고 반박했다.
안병욱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은 '관련 사례들에 대한 조사를 끝낸 뒤 미국 정부에 대해 자체 조사를 벌일 것을 권고할 계획'이라고 AP통신은 전했다.
[워싱턴=CBS 박종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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