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역변절

방아쇠 당겼던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해

한부울 2008. 7. 7. 16:50
 

방아쇠 당겼던 그 순간 평생 잊지 못해

[노컷뉴스] 2008년 07월 07일(월) 오전 06:00


대전 산내학살 사건은 반세기가 넘도록 '그 날의 진실'이 여전히 묻힌 채 진상규명이 되지 않고 있다. 대전 CBS는 '역사적 비극'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산내학살 사건을 집중 조명한다. 7일은 '산내 학살 당시 방아쇠를 당겨야만 했던 한 교도대원의 58년만의 증언'을 담아보았다.


“자기한테 총 좀 쏴달라고 하는데, 방아쇠를 당겨야 했던 그 순간 그 사람의 눈빛을 난 평생 잊을 수 없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 형무소 특수경호 부대장이었던 이준영(사진.85)씨는 그 해 7월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대한민국 군인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학살의 순간을 5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못한다.


“경찰관들이 쏜 총을 잘못 맞아 목숨이 붙어있었던 거지. 그런데 교도소 특경 부대장이었던 날 보더니 그 사람이 ‘부장님, 부장님, 나 좀 한 방 쏴주세요’라고 하더라구”라며 “그 사람의 고통을 끊어주기 위해 방아쇠를 당기기는 했지만 내가 사람 하나를 죽였구나 하는 죄책감은 아직도 남아 있어”라며 이 씨는 당시의 심정을 회고한다.


이 씨는 이어 “10년 이상을 언도받았지만 남은 형기가 1년도 안되고 모범수여서 취사장에 나와 일을 하던 사람이었어”라며 “만약 그 사람이 공산당이었다면 나한테 적개심을 보였어야지 나한테 ‘부장님’이라며 죽여 달라고 애원을 했겠어? 그런 사람이 무슨 사상범이라고 죽였는지 난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어”고 안타까워했다.


당시 27살이었던 이 씨는 형무소 특경 부대장으로 헌병대의 지시에 따라 사상범과 보도연맹, 10년 이상 형이 확정된 기결수 등을 분류해 산내 골령골로 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씨는 “사상범들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보도연맹이나 10년 이상 기결수들이 무슨 이유로 그런 변을 당해야 했느냐”며 “위정자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무고한 양민들이 이렇게 죽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나 스스로를 살인 방조자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죽을까 두려워 이런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 씨는 재소자 이송 트럭을 타고 산내 골령골도 찾았다. 족히 50m는 되는 길이에 배 높이까지 팬 호가 학살을 미리 계획한 듯 몇 개씩이나 패 있었고 인근 마을에서 동원된 청년들이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주검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던져 넣으면 보다 많은 시체를 파묻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이 씨의 설명.[IMG0]이 씨는 그 곳에서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으로 ‘사수’ 역할을 맡은 경찰관을 볼 수 있었다.


“사격을 하고 자기 자리에 앉아 담뱃불을 붙이는데 성냥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구”라며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하는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그 모습이 지금도 안 잊혀져”라며 이 씨 역시 깊은 한 숨을 내쉰다. 재소자들에 대한 ‘처형’은 그 해 7월의 몇 날 동안 대전 산내 골령골 골짜기를 빨갛게 물들였다.


이 씨는 “이게 약소민족의 비극이구나, 더구나 인권을 경시하는 위정자들의 오판이 이 처럼 무고한 백성을 죽이는구나 하는 생각에 속으로 눈물이 쫙 흘렀다”며 “전쟁이 끝나고 구천에 떠도는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교도관들과 함께 골령골도 찾아가 묵념도 드리고 했지만 가슴 속에 남은 응어리는 아직도 풀리지 않아”라고 말했다.


그는 또 “학살당한 백성은 물론이고 당시 총을 쏜 경찰관이나 이를 감독한 군인, 이송을 맡은 교도관들 역시 전쟁이라는 참극이 만들어낸 피해자들”이라며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니고 이제는 화해하고 진실을 밝혀서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성은 있었지만 책임자는 없었다"


한국전쟁 당시 최고 수 천명에 이르는 양민을 ‘총살’시키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지만 학살과정에서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일부 정부 관료들의 무책임한 지시가 죄 없는 양민들의 학살로까지 이어졌다는 증언도 나왔다. 1950년 7월 1일 새벽 3시쯤 대전 형무소에는 “재소자 가운데 인민군들의 우두머리를 처형하라”는 한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날이 밝는대로 인민군의 공습이 시작된다는 첩보가 입수됐다는 것.


정세 악화를 우려했던 정부는 인민군에게 동조할 가능성이 높은 재소자들을 처형키로 하고 사상범과 보도연맹원, 10년 이상 장기수 등에 대한 총살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 대전으로 피난해 있던 이승만 대통령 등 정부는 이 같은 명령을 내린 뒤 곧바로 후방으로 피난길을 떠난다. 이때부터 더욱 혼란에 빠진 남측 진영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대학살을 시작하게 된다.


헌병대의 지휘 아래 경찰관들에 의해 자행된 산내 학살이었지만 당시 내무부 교정국장은 피난길에 오른 장관을 만난다는 이유로 대전역을 찾았다가 “모든 권한을 소장에게 맡긴다”는 말만 남긴 채 인파 속에 묻혀 돌아오지 않았다.


대전 형무소장은 직원들에게 해산 명령을 내리고 논산 방면으로 줄행랑을 쳤으며 나머지 간부들도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에 나섰다. 또 헌병대에 재소자를 넘길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찾아간 한 장관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를 만났다는 말은 하지 말아달라”는 부탁까지 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장관을 찾았던 이준영 대전형무소 특경대 부대장은 “자기만 생각하는 정부 관료들 때문에 나라가 이 지경이 됐구나하는 생각에 총으로 쏘고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형무소 소장을 비롯해 보안과장, 간수장, 간수부장, 운전기사 등 도망친 형무소 간부들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계엄군에 붙잡혀 와 한 경찰서 안에서 총살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국가 위급 상황에 형무소를 버리고 도망간 것에 대한 죄를 물은 것.


하지만 “대통령도 도망가고 장. 차관에 교정국장까지 도망간 판에 하급 관리들에게만 죄를 물을 수는 없다”며 “이들에게 죄를 묻는다면 앞서 도망간 대통령과 정부 고위 관료들에게도 똑같은 처벌을 내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준영 부대장의 이의 제기로 이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 씨의 증언으로 볼 때 산내 학살은 ‘혼자만 살기 위해’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의 처형 명령 하나가 수천명에 이르는 무고한 양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사건.


이준영씨는 “지금 생각해도 당시 그와 같은 관료들이 있어 나라가 그런 혼란을 겪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며 “어느 나라고 어느 시대이고 지도자를 잘 만나야 나라가 평화롭고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고 충고했다.


[대전CBS 신석우/정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