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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 일기 시작한 한류

한부울 2008. 2. 10. 13:24
 

뉴욕에 일기 시작한 한류

[중앙일보] 2008년 02월 05일(화) 오후 06:35


[중앙일보 남정호]  미국 뉴욕에 살다 보면 종종 신선한 충격을 경험할 때가 있다. 최근 젊음의 거리 이스트 빌리지에서 겪은 일이다. 일을 끝내고 차 한잔 할 겸 검은 간판이 인상적인 음식점에 들어갔다. ‘더 스미스(The Smith)’. 메뉴엔 뉴욕 스테이크, 버섯 라비올리, 지중해식 샐러드 등이 올라 있다. 이름부터 인테리어까지, 어딜 봐도 주변 뉴욕대생이 좋아할 세련된 미국식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다 문득 메뉴에서 예상치 못한 요리가 눈에 띄는 것 아닌가. ‘Vegetable Bibimbap’, 바로 야채비빔밥이었다. 레스토랑 매니저는 “창업자가 고른 메뉴로 손님들 사이에 무척 인기가 있다”고 귀띔한다.


요즘 음식 등 한국 문화가 미국 주류사회에 뿌리내리는 흔적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지난해 뉴욕 타임스가 ‘베스트 뉴 레스토랑’으로 꼽은 게 보쌈 전문점 ‘모모푸쿠 쌈 바’였다. 뉴욕 일류 채식 레스토랑으로 늘 거론되는 게 한식당 ‘한가위’다. 이 신문이 지난해 한식 특집기사를 낸 적이 있다. 그러면서 “다른 동양음식보다 덜 알려졌지만 많은 팬이 생기고 있다”고 평했었다.


뉴욕 맨해튼엔 ‘마사’란 컬트(Cult) 일식 레스토랑이 있다. 메뉴가 아예 없어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미국에서 가장 비싼 레스토랑으로 싼 점심 메뉴가 1인당 350달러, 저녁은 500달러다. 그 다음으로 비싸다는 프랑스 식당 알랭 뒤카스도 한 끼에 200달러 정도니 2위보다 두 배나 비싼 셈이다. 이처럼 이제는 일식이 최고급으로 대접받지만 1960·70년대만 해도 경멸의 대상이었다. 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릴 무렵, 주간지 ‘타임(Time)’에는 “날생선을 먹는 야만스러운 일본에서 어떻게 올림픽을 치를 수 있느냐”는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러다 80년대에 일식이 건강에 좋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혐오식품이던 스시는 졸지에 건강식으로 둔갑했다.


지금 한식이 딱 그 초기단계 같다. 어느 틈에 한식은 건강식이란 관념이 미국에서 퍼져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이뿐 아니다. 요즘 미국에선 한국 문화의 약진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다. 다른 하나가 찜질방이다. 언제부터인지 뉴욕 일대 한국 찜질방 손님의 20~30%는 외국인으로 채워진다. 목욕 가운을 걸친 서양인 가족들이 발그레한 얼굴로 육개장을 맛나게 먹는 걸 보면 웃음만 나오는 게 아니다. 한국 문화의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고개를 든다. 한류는 아시아를 넘어 미국 본토에서도 불고 있다. ‘한국무리’란 한류 동호회가 이런 기운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 모임은 한국의 꽃미남에게 푹 빠진 미국 거주 일본 아줌마들이 만든 게 아니다. 한국 드라마에 울고 웃는 본토박이 미국인 200여 명이 결성한 것이다.


이처럼 경쟁력 있는 한국 문화를 꽃피우려면 민간이든, 정부든 체계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눈여겨볼 만한 나라가 태국이다. 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태국 정부는 음식의 세계화가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태국이 동남아 제일의 농업국가인 까닭이다. 그래서 ‘태국의 세계 주방화’ 계획을 수립하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국가 차원에서 요리학교를 세우고 조리사들을 길러냈다. �양꿍(수프)·얌(샐러드) 등 다섯 가지 정통음식을 제대로 만들 줄 알고 외국어 능력을 갖추면 해외에서 ‘태국 요리대사’ 이름으로 일할 수 있는 자격증이 주어졌다. 이 덕에 90년 500여 개 남짓했던 해외의 태국 음식점은 2000년에 10배인 5000여 개가 됐다 한다. 태국 음식처럼 한식도 잘만 하면 중국·일본에 이어 세계의 음식으로 등극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얘기다. 김치 냄새 풀풀 풍기는 게 잘나가는 뉴욕 멋쟁이들의 상징이 될 날이 오지 말란 법도 없는 것이다.


남정호 뉴욕 특파원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