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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은 양복 처음 입은 ‘패션 리더’

한부울 2008. 2. 8. 15:51
 

김옥균은 양복 처음 입은 ‘패션 리더’

[문화일보] 2007년 10월 25일(목) 오후 03:19


‘연애(戀愛)’란 말은 언제부터 쓰였을까. 서양의 ‘러브(Love)’에 해당하는 연애라는 말은 1912년 무렵 소설에서 처음 나온다. 매일신보에 연재된 조중환의 번안소설 ‘쌍옥루(雙玉淚)’에서 젊은 남녀의 연애를 ‘매우 신성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상협이 쓴 ‘눈물’에선 연애를 순결·신성 따위의 수식어와 함께 썼다. 1920년대 들어 연애라는 말은 젊은이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대중적인 말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한반도의 근대는 숱한 신조어 및 새로운 사회풍조와 함께 시작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대의 실상을 전면적으로 재조명한 책 ‘근대를 보는 창 20’(최규진 엮음, 서해문집·사진)이 최근 출간됐다. 책에선 의식주에서부터 연애, 교육, 여성문제에 이르기까지 20가지 주제로 근대 한국의 생활상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이중 눈길을 끄는 대목을 소개한다.


◆ 서양 옷은 언제 들어왔나 = 우리나라 의생활에서 서양 복식을 처음 받아들인 것은 별기군이다. 1881년에 창설한 별기군은 신식 무기를 갖추고 근대식 훈련을 받으면서 복식도 서양식으로 바꿨다. 처음 양복을 입은 사람들은 1881년 일본에 조사시찰단으로 갔던 김옥균, 서광범, 유길준, 홍영식, 윤치호 등이었다. 1884년 갑신 의제개혁, 1894년 갑오 의제개혁, 1895년 을미 의제개혁 등을 통해 군복과 관복 등에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간편한 옷으로 바꾸도록’ 조치했다. 1900년에는 관리들의 관복을 양복으로 바꾸고, 일반인이 양복을 입는 것을 정식으로 인정했다.


1920년대가 되면 양복이 의생활 문화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며 차츰 일반인들에게 퍼져 간다. 이어 1930년대에는 유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양복이 크게 번졌다. 조선인 엘리트들은 두루마기 대신 양복에 스프링코트와 오버코트를 입었으며, 셔츠 넥타이 모자 구두 지팡이 회중시계 넥타이핀 등의 장신구를 갖췄다.


◆ 서양 음식이 밀려들어오다 =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한 외국 음식은 차츰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독일 여성 손탁은 1902년 고종에게서 하사 받은 서울 중구 정동 땅에 2층 양옥을 지어 ‘손탁 호텔’을 열었다. 이곳이 서양음식을 먹을 수 있는 이 땅의 첫 레스토랑이었다. 그 뒤 충무로에 양식 전문점인 청목당이 들어섰다.


중국 음식점은 1882년 임오군란 때 중국 군인과 함께 중국 상인이 들어오면서 따라 들어왔다. 인천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면서 1899년 무렵 화교들은 자장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팔기 시작했다. 중국 음식점은 중국 사람이 많이 사는 서울 중구 북창동 일대를 비롯, 인천·평양 같은 곳에 많이 들어섰다. 일제 말기 조선에 사는 화교는 6만5000명이었고, 중국 음식점은 300개 남짓이었다.


음식 문화에서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 가운데 화학조미료를 빼놓을 수 없다. 일제시대 음식에 ‘감칠 맛’을 내는 아지노모토는 서구식 문화생활의 상징이 됐다. 서양 문명의 상징처럼 여겼던 커피는 1896년 아관파천 때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처음 맛을 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뒤 커피는 왕족과 귀족 사이에서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 서양식 주거문화와 일본주택 = 개항 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들은 외교 활동을 위한 공간을 짓고, 새로운 숙박시설인 호텔도 만들었다. 근대 교육제도를 도입하면서 옛 서당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시설을 짓고, 교회·성당 등 종교시설을 세우면서 이와 관련된 건축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1884년 인천에 세운 세창양행 사택은 독일인 회사의 숙소로 쓰려고 지은 집인데, 우리나라에 들어선 맨 처음 양옥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부산 인천과 같은 도시에서 일본인 비율이 늘면서 일본식 집도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개항장에 일본식 주택이 들어서면서 일부 도시는 마치 일본의 작은 도시 같은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들어온 일본인이 대부분 상인이어서 그들의 집은 상업을 겸한 주상복합 건물이 많았다.


1920년대 초반부터 근대적인 설비를 갖춘 서구식 주택이 들어서면서 이를 문화주택이라고 불렀다. 홀을 중심으로 거실과 침실이 있는 방갈로식 문화주택은 잠깐 유행하고 말았지만, 1930년대엔 서양과 일본식, 재래식을 절충한 문화주택이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김영번기자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