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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 탄 전봉준’의 비밀은…

한부울 2008. 2. 6. 20:57
 

가마 탄 전봉준’의 비밀은…

[조선일보]2006.09.13 00:52 33'


교과서엔 ‘형장行 또는 서울 압송장면’

“日영사관서 법무부 이송” 주장 나와


동학농민혁명(1894) 지도자 전봉준(全琫準·1855~1895)의 유일한 사진은 당시 서울의 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法務衙門·법무부)으로 옮겨질 때 찍은 것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 사진은 지금까지 ‘전봉준이 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 ‘순창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장면’ 등으로 교과서나 백과사전 등에 실려왔다.


이치백(李治白·77)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은 1895년 3월1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에 실린 기사와 컷을 마이니치신문사 자료실에서 찾아 13일 공개했다. 이 회장은 “’가마(與) 탄 전봉준’이라는 제목의 컷은 사진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라며 “당시의 신문 기술로는 사진을 인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오사카마이니치 신문 3면은 ‘전봉준을 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필자(蘇嵐生)가 일본 영사관 철창에서 신음하는 전봉준을 2월 28일 면회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사 및 전봉준과 구면인 다른 일본인과 함께였다.


기사는 전봉준을 “총검(銃劍) 때문에 붕대를 감았고 안색은 창백해 병상이었지만, 눈빛은 예리하게 빛났다”고 묘사했다. 전봉준은 1894년 12월 30일 전북 순창에서 민병에 의해 체포돼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를 다쳤으며, 법무아문에서 재판받은 뒤 1895년 3월 29일 손화중·김덕명 등과 함께 처형됐다. 41세였다.

 

▲ 전봉준의 유일한 사진〈왼쪽〉은‘서울로 압송되는 장면’혹은‘형장으로 가는 장면’으로 알려져 왔으나, 사실은‘일본영사관에서 법무아문(법무부)으로 옮겨지는 장면’일 가능성이 커졌다. 오른쪽 사진은 1895년 3월12일자 일본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에 실린 컷. /이치백 전북향토문화연구회장 제공

 


전주=김창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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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압송되어가는 전봉준의 사진의 진실

글쓴이:최두환

옛날에 보았던 전봉준에 관한 글을 다시 보면서 이렇게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아졌는지 나 스스로도 놀랄 정도다.

오늘은 전봉준이 1895년 12월 초에 관군에 붙잡혀서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장면을 사진으로 남겨진 것이 있다. 이것을 한번 보자.

나는 사진에 대해 특별한 지식은 없다. 그러나 여느 사람처럼 볼 줄은 안다.

어떤 글에는 "나주 초토영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전봉준"이라고 소개되어있고, 어떤 글에는 "전봉준, 순창 피로리에서 체포되어 초토영이 설치된 나주성"이라고 소개되어있다.

우선 전봉준이 잡혀간 시기가 한 겨울이다. 겨울엔 눈이 온다. 사진에도 그런 모습이 보인다.

그 사진이 겨울로 꾸며져 있다.

(1) 배경의 집은 기와집이며, 그 지붕 위엔 하얗게 된 것으로 보아 눈이 쌓인 것 같다.

(2) 땅 바닥은 사람이 다니는 곳을 빼고는 하얗게 된 것을 보아 눈이 쌓인 것 같다.

(3) 집 건물과 마당 사이의 집 앞에 쌓아둔 땔감/섶 위가 하얀 것으로 보아 그 위에도 눈이 쌓인 것 같다.

(4) 관군이 2명인데, 입은 복장이 검고, 양쪽 앞가슴 쪽에 단추 5개씩 나란히 달려 있고, 소매가 길며, 일본칼(日本刀)를 차고 있으며, 한 사람은 남바위를 쓰고, 상모 없는 벙거지를 쓴 것으로 보아 겨울옷임에 분명하다. 다른 한 사람은 남바위가 쓴 것 같지 않다.

(5) 전봉준과 가마꾼이 입은 옷은 흰색이며, 소매가 길고 두터운 옷인 것으로 보아 누비지는 않았지만, 핫옷인 것 같다.

(6) 가마꾼이 신은 신발은 눈길에도 다닐 수 있는 설피를 신은 것 같으며, 관군의 신은 목화(木靴)인지, 설피인지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두터운 신임에는 분명하다.


이 정도면 겨울로 보기에 충분하다. 겨울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겨울로 보이기에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다.

(1) 가마를 맨 앞사람은 양 어깨에 가마 끈으로 매어져 있음에 비하여 뒤 사람은 가마 손잡이에 손을 잡고 있을 뿐 가마멜빵이 어깨에 걸쳐져 있지 않다.

(2) 가마꾼이 2명인데, 앞 사람 무릎까지, 뒤 사람은 무릎 위에까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려 다리의 맨 살이 다 보인다.


겨울, 그것도 12월이면 한겨울인데, 아무리 미천한 상놈이고 사람 취급 못 받는다고 하지만 전주/순창에서 서울까지 가마를 메고 이동하는데, 비록 중간에 사람을 바꾼다고 할지라도, 눈이 발 위에까지 쌓인 추운 겨울에 바짓가랑이를 무릎 위에까지 걷어 올리고서 걷는다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다. 추운 겨울이기에 바짓가랑이를 단단히 묶어서 바람이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런 장면은 따뜻한 방안에 있던 사람을 불러내어 옷을 입혀 사진을 찍은 현장 검증 내지 현장 재현을 급조한 모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장재현 같은 모습이라고 거의 단정 지을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우선 죄인을 잡아다 싣고 가는 도구가 아니다. 통상 함거(檻車)에 싣고 말이나, 소가 끌고 가는데도 그 먼 길을  단 두 사람이 메고 있다는 것이다.

(2) 가마는 평교자라 할지라도 앞에 2명, 뒤에 2명으로 4명이 가마를 메는데, 여긴 2명뿐이다.

(3) 가마는 2명이 멘다면 갸자(架子)가마인데, 가마 윗부분이 상식의 것과는 다르면 마치 바퀴 없는 초헌(車+召 軒)같다.

(3) 가마는 보교(步轎)도 앞 가마꾼이나, 뒤 가마꾼도 어깨에 매는 멜빵이 있는데, 여긴 뒤 가마꾼은 멜빵을 하지 않았다.

(4) 전봉준의 태도에서 그에겐 아무런 구속된 장치가 없다. 적어도 썩은 새ㄲ ㅣ줄이라도 두 팔을 묶든지, 팔을 몸에 묶어서 함부로 행동하거나 달아나지 못하게 했어야 함에도 오른 팔은 가마에까지 내려져 있는 상태이다. 이것은 어디론가 행차하는 모양이지 체포되어가는 모습은 아닌 것이다.

(5) 앞 가마꾼의 발 자세인데, 오른쪽 다리를 뒤쪽으로 당겨진 상태로써 앞으로 가는 듯한 태도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건물의 구조로 보아 안마당 같기도 하며, 마당에서 사진 찍겠다고 포즈를 잔뜩 취하라는 구령, 즉 "이쪽 카메라를 봐!"라는 소리에 따라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봉준을 포함한 5명 모두 시선이 카메라를 향하여 고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따스한 안방이나, 사랑방에 있는 사람을 불러내다가 현장재현을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그 관군 2명을 보면 사진으로 확실히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얼굴이 한 사람은 20살 안팎의 젊은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30살 미만인 듯하다. 관군 치고는 너무도 앳되다. 상대는 농민혁명을 주도했다는 장군인 전봉준이다.

이 정도의 의문되는 점만으로 전봉준이 나주/순창에서 서울로 압송되어가는 장면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허술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전봉준의 그러한 관군과 그러한 행동통제 장치 및 인원으로써 순순히 잡혀갈 사람이었던가? 참으로 의심스럽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사진 그 자체이다.

그 사진의 선명도로 보면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진으로만 판단컨대, 110년이 된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하고도 선명하다는 것이다. 나의 결혼사진 28년 전의 흑백사진은 누렇게 떴는데 말이다. 보관의 문제겠지만.

그렇다면, 그 당시에 어떤 사진기/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을까? 필름은 한 장짜리 원판용인가? 아니면 롤필름이겠는가?

우선 그 당시에 전봉준을 체포하러 간다고 해서 종군기자도 아닌데, 카메라맨(적어도 2명)을 붙여서 보냈을까?

카메라는 누가 가지고 관리했을까? 물론 일본인이겠지만.

그냥 전봉준을 잡아오기만 하면 될 것을 카메라맨까지 붙여서, 그 먼 곳까지, 그것도 사진을 꼬박꼬박 찍어서 현장을 보존하고, 그 사진을 보관했다는 것이 35미리 롤필름 카메라가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보인다.

이런 롤필름을 사용한 카메라는 독일제 라이카로서 1925년에 시판되었다. 그 이전엔 원판 필름으로 카메라 자체가 크고 무거웠다. 크고도 무거웠지만 롤필름으로 쓴 것은 1888년의 코닥 카메라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용되지는 않았으며, 그 보다 10년 뒤에 1898년에 코닥 카메라가 접는식 롤필름의 포켓 코닥이 판매되었다.

그러니 1898년 이전에 조선에서, 그것도 한반도에서 찍었다는 사진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므로, 1895년의 전봉준의 사진은 거짓이 된다. 이 사진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기록보존소에서, 만약 보관/소장하고 있다면, 그 사진의 본디 인화지나 촬영한 필름을 조사/분석하여 아니라고 반증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그 사진은 아예 한반도 경성(서울)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보며, 그것도 라이카 카메라가 나온 뒤의 1925년 이후에 찍은 것이라고 본다.

아무리 쳐다봐도 전봉준을 압송해가는 장면의 사진은 그냥 나들이 하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런 구속력/통제력이 보이지도 않는다. 아무리 쳐다봐도 양반 어느 집안의 세력 과시하는 기념사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