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인물

호찌민과 목민심서

한부울 2008. 2. 6. 13:39
 

호찌민과 목민심서

[위클리조선] 2008년 02월 05일(화) 오전 09:55


지난 1월 중순 다산 정약용 선생의 7대손인 정건영(36)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베트남 환경상의 수상자로 선정됐다. 한국환경자원공사 베트남 사무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정씨는 다산 선생과 같은 나주 정(丁)씨다. 정 소장은 2006년 한국환경자원공사에서 베트남에 사무소를 연다는 계획을 듣고 자원했다.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는 베트남의 국부(國父)인 고(故) 호찌민 주석이 생전에 다산의 목민심서를 탐독했고 피신할 때에도 늘 몸에 지녔으며 관 속에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호찌민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다산을 꼽았으며 다산의 기일에 반드시 제사상을 올렸다는 이야기까지 있을 만큼 정약용을 평생의 사표(師表)로 삼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베트남과 아무 연고 없던 정 소장을 베트남으로 이끌었다.

 


호찌민 주석은 목민심서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아 트레이드 마크인 ‘3꿍 정신’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전해진다. 베트남이 한자문화권이고 호찌민의 젊은 시절만 해도 한학을 공부하는 전통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원전(原典)을 읽을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께 산다(꿍아), 함께 먹는다(꿍안), 함께 일한다(꿍땀)의 세 가지 정신이 호찌민의 ‘3꿍 정신’이다. 호찌민은 ‘국민과 더불어 살고 함께 먹으며 같이 일한다’는 3꿍 정신을 가지고 청빈한 삶을 살며 민본주의를 실현했다. 양국 학자들은 3꿍 정신의 민본주의가 지방관이 애민정신에 입각해 지방 행정을 다스려야 한다는 목민심서의 민본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고 지적한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교류가 적지 않다. 역사의 로망을 보여주는 호찌민과 목민심서의 인연을 계기로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사를 살펴본다.

 

                                                화산 이씨 시조는 베트남 왕족


외교통상부에 따르면 한국과 베트남의 첫 교류는 고려시대에 리롱떵(李龍祥·이용상) 베트남 왕자의 귀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산이씨 정사세보(花山李氏丁巳世譜)에 의하면 화산 이씨의 시조인 리롱떵은 1226년 변란을 피하기 위하여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와 황해도 옹진군 화산(花山)에 정착하였다. 리롱떵은 안남국(安南國·현재의 베트남)의 6대 임금 이천조(李天祚)의 둘째 아들로 베트남 역사상 첫 독립국가인 리(Ly·李) 왕조(1009~1225)의 9대 왕 혜종의 숙부이자 왕자 신분의 군 총수였다. 리 왕조는 1225년 권세를 잡은 신하 쩐(Tran·陳)에 의해 몰락하게 되고 이듬해인 1226년 리롱떵 왕자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탈출해 배를 타고 황해도 지역인 옹진군 화산에 닿게 된다. 이것이 고려 고종 13년, 1226년의 일이다. 2000년 경제기획원의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남한에 살고 있는 화산 이씨는 1350여명이다.


화산 이씨 외에도 리즈엉꼰(이양혼·李陽?)을 시조로 하는 강원도 정선 이씨 역시 베트남 귀화인이다. 판후이레 베트남 역사과학회장은 지난해 8월 20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한·베트남 수교 15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베트남 왕족으로 처음 한국에 정착한 가문은 지금까지 알려진 화산 이씨가 아니라 정선 이씨라고 주장했다. 리롱떵보다 99년 앞선 1127년 리 왕조 인종의 셋째 왕자인 리즈엉꼰이 경주에 도착한 후 정선에 정착해 정선(旌善) 이씨의 시조가 됐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판 회장은 고려 명종(1170~1197) 때 정중부의 난을 도와 경대승이 죽은 후 무신 최고 집권자가 된 이의민이 리즈엉꼰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조선·베트남 학자 교유, 명심보감도 전해


한국인이 쓴 책이 베트남에 전해지기도 했다. 13~14세기경에 고려시대 추적이 편찬한 ‘명심보감(明心寶鑑)’이 베트남에 전래됐다. 당시 ‘밍떰바오지암(Minh Tam Bao Giam)’이라는 현지 한자발음으로 명심보감이 번역돼 베트남 유학자들 사이에 읽혔다.

이 같은 사실은 1960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윌리엄 시어도어 드 배리 교수(중국학)가 사이공(Saigon·호찌민시의 옛 이름)을 방문했을 때 현대 베트남어판 ‘명심보감’을 발견하면서 밝혀졌다. 조선과 베트남의 학자들이 중국에서 만나 필담으로 교유한 사례도 있다. 두 나라가 모두 한자를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5세기에는 조선의 사신이었던 조신과 후기 레(Le) 왕조(1428~1524)의 사신이었던 레티꺼(Le Thi Cu·黎時擧)의 만남도 있었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에는 조신이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 베트남 사신 레티꺼와 한문으로 된 시를 주고 받으며 필담을 나누었다는 내용이 수록돼 있다.

1598년 조선 실학의 선구자로 추앙 받는 이수광과 후기 레 왕조의 사신 풍칵콴

(Phung Khac Khoan·馮克寬·1528~1613)도 연경에서 만남을 가졌다.

이수광과 베트남 사신 풍칵콴은 서로 시와 필담을 주고받았다. 이수광은 풍칵콴이 명(明)나라의 신종(神宗)에게 바치는 ‘만수경하시집(萬壽慶賀詩集)’의 서문도 써 주었다.

 

 

숙종 때는 제주도민 21명 베트남 표류


베트남을 직접 다녀온 한국인도 있다. 조선 선비 조완벽은 한민족 최초로 베트남을 방문했다. 진주 출신의 선비 조완벽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일본에서 일본상인의 서기로 일하던 중 1605년부터 세 차례 베트남을 왕래하고 그 뒤 조선으로 귀환했다. 제주도민이 베트남까지 표류했다 돌아온 일도 있었다.


조선 숙종 때 제주도민 24명이 배를 타고 가다가 큰 바람을 만나 표류해 베트남의 호이 안(Hoi An·會安) 근처에 도착했다. 제주도민은 당시 중남부 베트남 지배자였던 응웬푹떤(Nguyen Phuc Tan)을 알현하고 응웬푹떤과 중국상인의 도움을 받아 1686년 21명이 살아서 돌아왔다. 양승윤·최영수가 쓴 ‘바다의 실크로드’에 따르면 바다에 표류했다가 살아 돌아온 제주의 백성인 고상영의 안남(베트남) 표류기를 역관 이제담이 들어 기록했고 이 표류기를 다시 정동유가 자신의 문집 ‘주영편(晝永編)’에서 소개한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교류는 베트남 측의 문헌에도 나온다. 베트남의 대학자 레뀌돈(Le Quy Don·黎貴惇)이 ‘북사통록(北史通錄·Bac Su Thong Luc)’에서 1760년에서 1762년 사이에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조선 사신 홍계희와 만나 시를 주고 받은 사실을 수록하기도 했다.


한동안 단절됐던 한국과 베트남의 인연은 20세기 초에 다시 이어진다. 1906년에 현채(玄采)가, 1907년에는 주시경과 이상익이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번역해서 출판했다. 월남망국사는 1905년 중국 상하이에서 출판된 책이다. 1945년 9월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군에 징발됐던 조선인 장교 이용문이 다량의 무기를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군에 인계한 일도 있었다.


한·베트남 회담 때 단골 화제


개인적 차원에서 이어지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전쟁이라는 최악의 사태로 비화된다. 한국이 미국의 요청으로 1964년부터 베트남에 병력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1973년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후 베트남을 통일한 공산정권은 베트남전 당시 교전 상대였던 대한민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다 1992년 국교를 수립했다. 현재 한국은 베트남의 최대 투자국이다.국교 수립 후에는 민간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흥미로운 사례도 적지 않다. 1995년 화산 이씨 종친회 대표들이 선조의 고향인 베트남을 방문했다. 리롱떵 왕자 일가가 망명한 지 780여년 만이었다. 대통령을 비롯한 3부 요인이 모두 나와 환대하고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인과 똑같은 법적 지위를 부여해주며 깍듯이 왕손 예우를 했다. 지금도 해마다 리 왕조 건국기념식(음력 3월 15일)에 종친회 대표들이 초청된다. 2002년에는 양국 예술가들이 하노이에서 ‘이용상 오페라’를 합작 공연하기도 했다. 2005년 11월 경기도 남양주시는 호찌민의 고향인 베트남 빈(Vinh)시와 자매결연했다. 이 역시 호찌민이 남양주에서 태어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평소 즐겨 읽었다는 인연으로 맺어졌다.


최근 양국에 이런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한국의 고위공무원이 베트남을 방문하면 베트남의 공무원들이 호찌민 주석이 다산의 목민심서를 애독했다고 언급하면서 회담을 시작하는 사례가 많다. 공통 화제가 있으면 회담 분위기도 자연히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이처럼 다산과 호찌민 사이의 인연은 양국 우호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2006년 여름 호찌민 박물관에서 한국과 베트남의 NGO(시민단체)가 목민심서와 관련한 전시를 공동 주최하기도 했다.


베트남에는 한류 열기도 뜨겁다. 베트남의 한류는 오늘날 멋진 드라마 주인공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다. 베트남인의 의식 속에는 이미 호찌민이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는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 정신’이 있었다. 베트남에 불고 있는 한류 열풍은 한국문화의 심원(深源)에서 시작됐다.



목민심서


목민심서(牧民心書)는 정조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순조 때 천주교(天主敎) 박해로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귀양 생활을 하는 동안에 저술한 책이다. 다산은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에서 뽑은 자료를 모아 목민심서를 엮으며 지방 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고자 했다. 내용은 총 12편(篇)으로 각 편을 6조(條)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엮었다. 이 책은 농민의 실태, 서리의 부정, 토호의 작폐, 도서민의 생활 상태 등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어 한국의 사회·경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내용은 목민관의 부임 길(부임), 목민관의 자기 수양(율기), 법과 도리에 기초한 공무 처리(봉공), 목민관의 백성 사랑(애민), 지방 행정의 실무(이·호·예·병·형·공전), 흉년의 백성 구제(진황), 물러나는 길(해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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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찌민(胡志明·Ho Chi Minh·1890~1969)


본명은 웡떡탄(Nguyen Tat Thanh). 중부 베트남의 게친주(州)에서 농민 출신 문인학자(文人學者)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1년 프랑스선(船)의 견습 요리사로 프랑스에 건너가 ‘구엔아이(阮愛國)’이란 이름으로 식민지해방운동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회의에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해 유명해졌다. 이후 혁명운동을 계속하며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창립했다.


1941년 인도차이나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민(베트남독립동맹회)을 결성했고 1945년 8월 태평양전쟁의 종전과 동시에 총봉기를 주도해 구엔(阮)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했다. 이른바 ‘8월 혁명’이다. 베트남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 주석으로 취임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1942∼1943년 중국국민당에 체포됐을 때부터 사용했다. 일생을 독신으로 살았으며, 1969년 재임 중 심장병으로 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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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건영 한국환경자원공사 베트남 사무소장


“베트남 국민 다산에 관심 많아… 후손인 만큼 늘 행동 조심”


한국환경자원공사 베트남 사무소장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베트남 환경상을 받았다.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호찌민 주석이 사숙(私淑)한 정약용 선생의 후손이다. 최근 정 소장과 전화 인터뷰를 가졌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베트남 호찌민 주석의 애독서 중 하나였다는 설이 있는데요.


“한국에서 ‘호찌민이 다산의 목민심서를 읽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아 베트남에서도 다산이 누구인지, 목민심서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아요. 얼마 전 호찌민박물관에서 호찌민의 유품에는 목민심서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하노이국립대 교수들이 목민심서를 읽어보고 정부관리(목민관)로서의 애민정신과 청렴함을 강조한 다산의 철학이 호찌민의 통치철학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점에서 호찌민이 목민심서를 탐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목민심서가 베트남인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가요.


“목민심서가 현재 베트남 공무원의 필독서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면서 목민심서를 베트남어로 번역하고자 희망하는 교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자 문화권이었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에 한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번역을 해야만 베트남 국민들이 읽을 수 있거든요. 요즘 베트남에서는 부패를 척결하자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공무원이 익혀야 할 덕목이 목민심서에 잘 나타나 있어 의미가 있다는 말도 자주 합니다.”


베트남인에게 호찌민은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베트남 국민은 호찌민을 ‘호 아저씨’라고 불러요. 베트남 국민이면 누구나 자신이 지향하는 사상에 상관없이 호찌민을 민족의 아버지로 여깁니다. 모든 화폐에 호찌민 그림만 그려져 있을 정도로 호찌민은 국민의 절대적인 우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호찌민이 탐독했다는 다산의 목민심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이 베트남에 많은 자본을 투자하고 있는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양국이 호찌민과 목민심서로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는다면 여러 모로 유익할 거라 생각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후손이라는 점을 주변 베트남인도 알고 있나요.


“(베트남의) 젊은 세대는 다산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사상적인 측면에 대해 풀어서 이야기하면 호찌민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하며 공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산의 후예로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산의 후예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면 모든 행동을 조심스럽게 하게 됩니다. 한국의 대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아서요. 제 자신을 다스릴 수 있고 힘이 되기도 해서 도움이 됩니다. 앞으로도 바르게 행동하면서 동료들과 함께 환경도 열심히 살리겠습니다.”


박영철 차장대우 

이윤아 인턴기자·서울대 중어중문학과 4년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