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서서히 대륙조선의 자취가 들어나고 있다.
왜구집단 일제가 그렇게도 감추고 싶고 끝까지 꼭꼭 숨겨 영원히 덮으려고 하였던 대륙조선의 역사적 사실들이 하나 둘 실체가 벗겨지고 있다.
한반도에서만 존재하였고 청나라에게 조공하면서 속국에 있었다고 하던 나약한 조선, 왜소하다고 생각한 조선을 왜구집단 일제의 화가들이 그 당시에 호랑이에 비유하였는데 그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바로 대륙조선을 호랑이에 비유한 것이다.
호랑이는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동물이 분명히 아님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그들 역시 호랑이 신분에 걸 맞았던 대륙조선이 한편으론 무섭고 두렵기도 하였으나 알 수없는 이유로 일시에 힘이 빠져 버린 호랑이는 더 이상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 충분히 사냥할 수있는 사냥감으로 전락하고 만 슬픈 역사의 단면을 어렴풋이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프다.
청일전쟁이 발발시기가 1894년이라고 보았을 때 이 당시에도 서울은 대륙 어디 쯤엔가 있었다.
대륙지도를 보면 상해와 남경 그리고 항주가 지척에 있다.
조선사람들이 상하이 근처에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상하이박 상하이트위스트 상하이...등 오래된 영화제목에서도 나오듯이 생소하지 않고 안의사는 물론 존경해 마지않는 독립투사들의 행로가 그곳에 귀착되듯 늘 평상스러운 움직임이었으며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여 적지 않은 조선사람들이 웅거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반도사관에 의한 역사적 상식은 선조들이 상하이에 갔다고 하면 한반도에서 배를 타고 몇날 몇일 황해 즉 동해를 건너 가거나 열차를 타고 한반도에서 휘 돌아 북경을 거쳐 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에서 일상적으로 서울에서 인천 가듯이 늘 왕래하였다고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도 곧 밝혀질 것이다.
어제는 남경대학살이 있었던 기념일이다.
지금은 30만명정도라고 보통 희생숫자를 말하지만 그당시 일제가 자랑삼아 외교관들에게 60만명이라고 말한 사실에서 보더라도 남경시 전체 인명을 도륙하였던 것이다.
일제 지도부가 지시하고 작전처럼 작심하고 버렸던 사건이기 때문에 주도면밀하게 살육을 감행하였다고 보며 증거 인멸까지 완벽하게 한 것이라 정확한 이유가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남경에 중국인들 즉 지나인들만 있었다고 할 순 없다.
대륙전체가 국공분쟁과 대일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이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지나인들에게 극도로 핍박 받았을 것이라고 보며 그러한 곤경에서 피신하거나 안전한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경황도 많이 있다.
남경에 있었던 주체가 바로 대륙에 살던 조선인들이며 그곳에 함께 모여 살았다고 감히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대다수 우리나라 사람들이 남경대학살사건은 중국 즉 지나인들의 문제이지 우리와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모든 역사적 정황으로 보았을 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더 많고 농후하다는 것이다.
중공(중화인민공화국)주석 모택동이는 남경대학살사건을 외부로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려 했으며 뒤 덮으려고만 하였다.
원수같은 일제에 의하여 자국민이 엄청나게 살해 되었던 비극적인 대학살극 임에도 불구하고 외부에 공개되는 것을 꺼려 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출 될 것이 두려워 꺼린 것이 아닌가 하는 꼭 되새겨 볼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다.
곧 밝혀질 것이다.
재일역사학자 강교수가 서울전쟁이라고 하는데 대륙조선이 힘이 약해지고 이리저리 농단을 당할 때 대륙 어디쯤에 서울(한성. 한양)이라고 지칭되는 곳에서 대륙전권을 탈취하기 위한 청과 전쟁이 분명있었을 것이고 똑같은 이유로 왜구집단인 일제와 전쟁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결국 대륙조선은 이 전쟁에서 다 패하고 말았기 때문에 힘빠지고 이빨빠진 호랑이 신세가 되었고 그림에 보듯이 호랑이 목에 고리가 연결되어 거대한 힘을 잃고 말았다는 상징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이러한 사실을 낱낱이 찾아 밝히는 일이다.
호랑이 처럼 한때 막강한 힘을 가지고 아시아 전역을 지배하며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륙조선의 참모습을 찾아 명명백백하게 세상에 밝히는 일만 남았다.
한양, 또는 한성이라고 지칭한 곳도 밝히고 대륙조선의 주 활동영역이 과연 어디까지 인지 찾아 밝혀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민족의 천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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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속화 속 역사적 진실-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YTN] 2007-12-13 10:29
[리포트]
조선경성전쟁 일본병 대승리도 그림 묘사
위용 가득한 일본군에 밀려 조선 관군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갑니다.
청일전쟁 이틀 전인 1894년 7월23일, 고종이 잠들고 있던 경복궁을 일본군대가 무력 점거하는 과정에서 7시간에 걸쳐 교전이 벌어진 것입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간의 패권 다툼으로 잘 알려진 청일전쟁.
하지만 오랜 기간 일본의 풍속화 '니시키에'를 연구한 재일 역사학자 강덕상 교수는 이 전쟁이 우리나라도 개입된 '한·청·일 전쟁'이라고 주장합니다.
[인터뷰: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니시키에를 보니 '조선 서울전쟁, 일한청 전쟁'이라는 그림이 많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청일 전쟁이 처음에는 서울에서 시작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 교수는 같은 해 9월에 일어난 동학혁명 즉 '갑오농민전쟁' 2차 봉기 또한 '한일 전쟁'이라고 밝힙니다.
농민들을 토벌하는 행위가 우리나라를 해방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인다는 일본의 주장과 맞지 않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동학혁명에 관한 니시키에도 그리지 못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인터뷰: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
"일본이 세계에 청일 전쟁을 한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라고 선전했는데, 농민 토벌이 정의에 맞지 않으니까 니시키에 작가들도 그림을 못 그렸던 것입니다." 일본 무사들이 한반도를 상징하는 호랑이들을 단칼에 제압하는 그림에선 일찍부터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일본의 야욕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도쿄에서 YTN 인터내셔널 박은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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