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일본 문물은 한국 통해 전파된 것

한부울 2007. 12. 26. 12:18
 

일본 문물은 한국 통해 전파된 것

[쿠키뉴스] 2007년 12월 26일(수) 오전 09:30

 

 

[쿠키 사회] “학창시절 역사교과서는 중국에서 일본으로 문물이 전달됐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민속촌에 와보니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옮겨 왔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한국미술협회 수원지부(지회장 조진식)가 주최한 제41회 정기전에 일본 작가 작품 20여점을 전시하기 위해 지난 22일부터 3박4일 일정으로 수원을 찾았던 일본 훗카이도 아사히카와시 미술회 회원 오구찌 마사루씨.


오구찌 마사루씨는 지난 24일 민속촌을 방문한 자리에서 “어릴적 보았던 물건들이 많아 놀랐다”며 “일본의 문물은 한국을 통해 전파됐음이 확실하다”고 감탄했다.


그는 이어 “한·일간에는 아픈 역사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다”며 “특히 이런 동질감을 옛 농기구나 생활용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리이 호세 회장도 “이 곳에 와 보니 한국의 온돌과 못을 쓰지 않고 지었다는 한옥에 무척 흥미를 느꼈다”며 “한국의 문물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무엇인가 독창성이 돋보인다”고 평가했다.


초등학교 교사인 사이토우 켄쇼씨는 “농기구와 생활용품 등 한국문물을 접하고는 ‘한국은 마음의 고향’이라는 생각을 가졌다”며 “수원 미술인들을 비롯 한국인 모두의 따뜻한 호의에서 넉넉한 정(情)을 느꼈다”고 흐뭇해 했다.


이어 이들은 “수원미술전시관 입구에 일본작가들의 작품을 배치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며 “수원 미술인들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들은 짧은 일정속에서 수원미술전시관을 비롯 도박물관, 미술관, 한국민속촌 등을 연이어 둘러보며 한국 문화를 깊게 음미했다.


한편 수원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아사히카와시는 인구 36만1000여명의 훗카이도 제2의 도시로 1년 내내 쾌적한 기후와 함께 2월 눈축제가 인기이며, 특히 일본 원주민 훗카이도 아이누족의 문화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제휴사 / 경기일보 이형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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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인 - 美 사학자 코벨 

국민일보 [2006.12.15 ]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10년 전 세상을 떠난 한 미국인 여성 사학자에게 대한 헌사로 보인다. 존 카터 코벨(John Carter Covell·1910∼1996).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 사학자로 서양인으로는 맨 처음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캘리포니아 주립대와 하와이 주립대에서 동양미술사를 가르쳤던 인물이다.

출판사는 이 책을 시작으로 ‘코벨의 한국문화 시리즈’를 이어갈 예정이라고 한다.

조만간 나올 2권의 제목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이름도 낯선 서양 사학자를 뒤늦게 재조명하고 나선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코벨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에 머물며 한일고대사, 한국미술, 불교, 도자기 등에 대한 1400여편의 칼럼을 썼고, ‘한국이 일본문화에 미친 영향’ ‘한국문화의 뿌리’ 등 5권의 한국문화 관련 책을 냈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코벨 만큼 정력적으로 한국문화를 연구한 서양 학자를 찾기 어려울 정도.


그러나 코벨의 존재가 진정 빛나는 것은 연구의 양이 아니라 그 질 때문이다.

그녀의 연구는 한일간 역사전쟁의 한복판을 통과한다.

바로 한일 고대사 분야다.

일본 미술사 분야의 거장을 꿈꾸던 코벨은 일본에서 발굴되는 고대 유물의 대부분이 한국 땅에 뿌리를 두었다는 ‘고대사의 진실’을 눈치 채게 된다.

그때부터 그녀의 시선은 한국미술사에 집중되었고, 일본의 고대유물에 남아있는 한국의 흔적들을 찾아내는데 매진하게 된다.


코벨은 1970년대 후반부터 매우 대담한 주장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4세기경 한국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문화를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국가 건설을 주도했다”

“일본인의 조상 중 상당수는 한국에서 건너간 한인이다”

“일본 왕실은 한국에서 말을 배에 싣고 건너간 모험가들이 건국한 왕실에서 시작된 것이다” 등

그녀의 주장은 당시의 한국 사학계에서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글 대부분이 영문으로 발표되는 바람에 대중에게 닿기 어려웠다.

코벨이라는 이름은 얼마 지나서 잊혀 지고 만다.


죽은 코벨을 되살려낸 편역자는 김유경(59)씨다.

언론인 출신인 김씨는 1980년대 초반 문화부 기자로 코벨의 글을 받아 1년간 신문에 연재했던 인연이 있다.

그로부터 20년도 더 지난 후에 코벨을 다시 기억해낸 이유가 뭘까?

김씨는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코벨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코벨은 100년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한 한국문화 해설자”라고 소개했다.

제3국학자라는 객관적 위치, 유물과 예술품을 통한 고고학적 접근, 누구나 읽기 쉬운 칼럼 형식 등 코벨의 미덕이다.

김씨가 코벨의 글을 수집하고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 1999년 출간된 ‘한국문화의 뿌리를 찾아-무속에서 신라 불교까지’(학고재)는 그 첫 결과물이었다.


김유경씨에 따르면 코벨의 연구에 대해 한국이 정부 차원에서 베푼 지원은 없었다고 한다.

코벨은 6개월마다 있었던 비자갱신 때 입출국을 하지 않고 한국에 머물 수 있게 되기를 바랐지만 그런 도움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코벨은 말년까지 “나는 한국의 가야사가 분명하게 확립되는 것을 볼 때까지 오래 살고 싶다”고 소망했다.

이 책의 출간은 그녀에게 빚진 마음을 다소 덜어준다.

 

쿠키뉴스 김남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