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열쇠구멍 무덤-주인공은 왜(倭)출신 백제 관료

한부울 2007. 11. 17. 16:10
 

열쇠구멍 무덤-주인공은 왜(倭)출신 백제 관료

[조선일보] 2007년 11월 16일(금) 오후 11:09

 

 

한·일 고대사를 바라보는 양국 고고·역사학자들의 시각은 대부분 자국 중심적이다. 서기 4세기 중반 백제 근초고왕 때 일본에 전한 칠지도(七支刀)가 그렇다. 똑같은 명문(銘文)을 두고 한국 학자들은 “왜왕에 하사한 것”으로, 일본 학자들은 “왜왕에 바친 것”이라고 해석한다


경북대와 오사카대학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박천수 경북대교수(고고학)가 이 책에서 취한 태도는 ‘변경인’, 혹은 ‘회색인’이다. 그는 최대한 객관적인 자세로 유물과 유적을 바라본다. 그는 백제의 선진 문물이 왜에 전파돼 문화 수준을 높였다면서도, 6세기 전반 왜의 군사 세력이 영산강 유역에서 활동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왜가 한반도 남부 일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이 책 6장 ‘영산강유역 전방후원분을 통해 본 백제와 왜’는 이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논거를 드러낸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은 위에서 볼 때 앞은 사각형이고 뒤는 동그랗게 보이는, 열쇠구멍 모양의 거대 고분을 말한다. 일본에서는 서기 4~6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 6세기 전반기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 무덤을 두고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유적이라는 주장이 일본에서 나왔음은 물론이다. 국내 고고학계에서는 그러나 “어느 지역에 전방후원분이 나왔는데 (일본 학자들이 좋아할까봐) 되 덮었다더라”라는 소문도 있었다.


저자는 전방후원분의 무덤 형태로 볼 때 왜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무덤에서 나온 백제의 위세품(威勢品)은 백제에 복속한 ‘왜계 관료’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유물이나 유적, 그리고 역사서 등을 종합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서기 475년 백제는 서울을 고구려에 빼앗긴 뒤 한반도 남부로 남하했다. 그 과정에서, 영산강 유역 최대 토착세력이 자리한 전남 나주 반남면 지역은 토착세력을 수장(首長)으로 삼아 ‘간접 지배’하고, 그 외곽은 전방후원분을 쓴 왜계 군사세력을 이용해 ‘직접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538년 웅진 사비 천도와 영산강 유역의 직접 지배, 그리고 왜계 관료들의 본토 귀향이나 ‘백제화’에 따라 전방후원분은 사라졌다.


[신형준 기자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