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세기 日왕실 지배 백제 곤지왕자 숭배
[대전일보] 2007년 11월 13일(화) 오후 08:50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
일본서기는 무령왕의 출생 설화를 이렇게 적고 있다.
“백제 개로왕은 아우 곤지를 왜에 보낼 때 임신한 부인을 아내로 삼아 보냈는데 일본으로 가던 중 각라도(各羅島·현재의 후쿠오카 북쪽 가카라시마 섬)에서 무령왕을 출산했다. 이로써 무령왕은 섬왕, 즉 사마왕이라 불렸다.”
또 무령왕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이가 태어나자 마자 배에 태워 백제로 다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곤지왕자 일행은 이 후 어디로 갔을까. 안타깝게도 이들의 자세한 행로는 어느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다.
일본에서 곤지왕자의 행적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오사카. 당시 ‘난파진’이라 불리웠던 큰 항구도시다. 오사카에는 백제 곤지왕자를 모시는 신사가 있는데 바로 이곳이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다.
그런데 일본 땅에 백제 왕자의 신사가 존재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서 잠깐 당시의 시대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4-5세기경 많은 백제인들은 일본으로 이주한다. 뱃길을 따라 대마도와 큐슈를 지나 일본 내해를 거쳐 종착지인 오사카(난파진)에 이른 것. 오오사카 박물관에 당시 백제 유물이 많은 것도 바로 이같은 역사 때문이다.
많은 사학자들은 5세기경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 일행의 항로도 이와 같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난 무령왕을 백제에 보낸 곤지 일행은 오사카에 도착해 일본에서 15년간 머문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곤지는 백제에서 왜 왕실로 건너가 왜의 새로운 지배자가 됐는데, 당시 곤지왕자의 왕실 가문 성씨(王姓)가 바로 아스카베였다. 곤지의 후손들 역시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이후 후손들은 조상인 곤지를 기리기 위해 3000평 가량의 터전에 신사를 지었다. 그곳이 아스카베신사다.
현재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이지만 원래의 이름은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였다. 특히, 지난 날에는 일본 황실에서 직접 제사지내는 이른 바 ‘식내대사(式內大社)’라는 대규모의 천황가 소속 신사였다.
이곳이 곤지를 모시는 곳임은 일본 왕실 사당에 관한 기록인 ‘신기지료(神祇志料)’에도 적혀있다. “곤지왕신사의 제신(祭神)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인 백제숙이의 조상인 곤지 왕자다.” 또 아스카베신사 안내판에도 백제의 왕을 모시는 신사임이 정확히 표기돼 있다.
그런데 일본 왕실 사당이었던 ‘곤지왕신사’가 언제부터 ‘아스카베신사’로 바뀌었을까. 많은 사학자들은 일제 치하에 들어서면서 부터라고 추측한다. 일제 위정자들이 오사카 한복판에 고대로부터 일본 왕실이 섬겨온 백제 곤지왕자의 사당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알려질까 두려워 명칭을 바꿨을 공산이 크다.
과거 꽤 규모가 컸던 아스카베신사는 현재 소규모의 신사로만 남아있다.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그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것. 옛날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나마 1998년에 지역 주민들의 헌금으로 새롭게 단장됐다.
현재 아스카베신사 주변에는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산위 쪽으로 올라가면 많은 백제의 횡혈식 고분들이 밀집해 있다. 최근 발굴된 이 아스카 무덤은 곤지신사 일대의 거대한 고분군 중 하나로 그 규모가 이층집의 크기와 비슷하다. 무덤의 주인이 큰 세력가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들 역시 일본고분에서는 출토되지 않는 백제식 토기로 백제고분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듯 일본에서 큰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백제의 곤지왕자 행적과 후손들의 흔적은 일본열도 여기저기에 남아있다. 1500여년의 장구한 세월을 지난 아스카베신사에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가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日 오사카=천지아 기자>
천지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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