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

조선의 며느리들도 제사가 싫었을까

한부울 2007. 9. 24. 12:33

 

조선의 며느리들도 제사가 싫었을까

[중앙일보] 2007년 09월 24일(월) 오전 02:03


[중앙일보]
지난해 이맘때쯤이다. ‘명절 스트레스가 이혼 주범?’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어느 일간지에 실린 적이 있다. 내용은 설날이나 추석을 전후한 시기에 이혼 신청 수가 현저히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때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남자보다는 여자 쪽이 많았으리라. 왜 여자들은 명절 다음에 이혼을 결심하는 걸까? 물론 이미 누적돼온 감정이 있었고, 다만 그것이 설이나 추석을 통해 표면화된 것뿐일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이 감정을 표면화시키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명절 제사가 있다고 본다.

“문밖 어머님 기제사였는데 조별좌가 오려고 하였으나 비 때문에 못 오시는가 싶다. 천남이를 데리고 띠를 띠우고 관을 씌워 제사를 지내니 슬프고 설운 정이 그지없다. 외손자라도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기 그지없다. 조카들도 하나도 못 오니 그런 섭섭함이 없다.”

조선 17세기 전반(1638년) 어느 대갓집 부인이 쓴 일기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문밖 어머니는 이 작자의 친정어머니다. 그러니까 이 부인은 친정어머니의 기제사(忌祭祀· 돌아가신 날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조카인 조별좌는 비 때문에 못 오고, 할 수 없이 천남이만 데리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 부인은 남편이 한성판윤(현 서울시장)까지 지낸 요즘 말로 하면 잘나가는 집안의 안주인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부인은 아들을 셋이나 낳아서 모두 일찍 잃고 말았다. 둘째 아들은 장가도 들고 초기 벼슬까지 했으나 무슨 일인지 25살에 죽었다. 며느리도 얼마 안 있다가 죽어서 그야말로 작자에게는 본인이 낳은 자식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니 제사 대상인 친정어머니에게도 외손자가 없다. 천남이가 있다고 하지만, 그는 첩의 자식이다. 자신의 아들이 없으니 천남이에게라도 관을 씌워 제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조카들은 남편 집안 조카들인데, 그들마저 아무도 못 왔다. 제사 장면이 참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하긴 해도 이 부인은 친정어머니 제사를 본인이 직접 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인에게 남자 형제들이 없었는가? 아니다. 조별좌는 오빠의 아들이다. 그렇다면 친정에 제사를 주관할 남자들이 없는 게 아니다. 실제로 이 부인의 친정아버지 제사는 오빠네 집에서 지내고 있다. 부인은 때때로 그 제사에 가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렇다면 더군다나 왜 이 부인은 친정어머니 제사를 본인이 지내고 있는 것인가?

조선시대인 17세기까지 이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 시기까지도 조선은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 속에 살았다. 혼인해서 남자가 여자 집에 오래 거주하는 형태다. 이 경우 딸과 사위가 제사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선 중기까지 이른바 전문용어로 윤회봉사(輪廻奉祀)니 분할봉사(分割奉祀)니 하여 딸들이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어느 집에서나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윤회봉사는 말 그대로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고, 분할봉사는 분담하는 것이다.

위의 조씨 부인이 친정어머니 제사를 지내는 것은 대표적인 분할봉사이다. 이 부인 집에서는 윤회봉사 형태도 지내고 있었다. “사직골 대기(大忌)에 제물을 차려서 보냈다. 닷젓골댁의 차례지마는 우리가 했다.” ‘사직골 대기’란 시아버지 제사이다. 시아버지 제사 제물을 이번에 둘째 동서인 닷젓골댁이 마련할 차례인데, 이 부인이 대신했다는 것이다. 둘째 집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여기서는 완전히 돌아가며 지내는 형태는 아니고 제사 자체는 큰집에서 하는데, 제물만 돌아가면서 준비하는 반(半)윤회로 보인다.

또 있다. “외조모님 기제일이다. 정랑댁 차례라고 해서 두하가 와서 지냈다.” 남편 외조모님 제사인데, 넷째인 정랑댁 차례라서 그 집 아들 두하가 와서 지냈다는 얘기다. 유난히 이 부인은 순서가 아닌데도 제사를 대신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건 아마도 남편 벼슬이 높아서, 즉 잘나가는 집이라서 그런 것 같다. 어쨌든 외조모님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것은 남편이 자신의 어머니 집안 제사를 챙기고 있다는 얘기다. 일종의 외손봉사(外孫奉祀)다. 17세기 전반 어느 양반 가문 제사 풍속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조선시대 제사 모습과는 영 딴판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선시대 여자들의 제사에 대한느낌은 오늘날 여성들이 느끼는 것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친정어머니 제사를 지내면서 그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을까? 현재 여자들이 명절 제사에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몸이 고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주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남자 집안 제사를 위해 나는 일만 한다는 생각이 여자들을 힘들게 한다. 그런데 내가 내 집 제사를 지낸다면, 얘기는 다르다. 또 제사가 온전히 어느 한 집 차지가 아니라고 해도 느낌은 다를 수밖에 없다. 17세기 이전 조선의 여성들은 제사에 그다지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조선의 제사 풍속은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았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좀 더 남자 집안 중심의 제사를 원하게 됐고 현실은 그렇게 변해갔다. “사위나 외손자는 제사에 빠지는 자가 많고 비록 제사를 지내더라도 준비가 정결하지 못하고 정성과 공경이 부족하니 이는 제사를 지내지 않은 것만 못하다”라는 부안 김씨 집안 상속문서 서문에서 그 변화가 읽힌다. 사위나 외손자가 정성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그랬을까? 딸이나 사위가 아닌 아들과 며느리 중심으로 가족관계가 움직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니까 그렇게 보였던 것은 아닐까?

제사가 여러 집으로 옮겨다니지 않고 한곳에 고정되면 그것을 전담하는 사람에게 힘이 생긴다. 조선은 점차 힘이 한곳에 집중되기를 원했다. 이른바 중국과 같은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로 옮겨가려고 한 것이다. 부계적인 가족제도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제도였다. 실제 빨리 부계적으로 변화해간 집안이 더 잘살고 더 번성했다.

이제 제사는 장남, 즉 종손에게 맡겨졌다. 장남(종손)과 맏며느리(종부)는 가문의 핵심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면 이 시기에 와서 조선의 맏며느리들은 본격적으로 제사 스트레스를 받게 됐을까? 아니라고 본다. 제사를 담당하는 종부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존재였다. “맏며느리는 모든 문제를 시어머니에게 의논하고, 다른 며느리들은 맏며느리에게 물어야 한다”라든가, “일반 며느리들은 맏며느리와 대적할 수 없으니… 맏며느리와 나란히 걸어서도 안 되고, 윗사람 명령을 똑같이 받아서도 안 되며 맏며느리와는 나란히 앉아서도 안 된다”라는 『예기』의 구절을 보면 맏며느리의 절대 권위가 느껴진다. 이런 정도의 권위라면 맏며느리 자리는 한번 해볼 만하지 않을까? 오늘날이야 워낙 해볼 만한 일들이 많아져서 아무리 대단한 맏며느리 자리라 하더라도 그다지 매력을 못 느끼지만, 집안일이 곧 사회적인 일이었던 조선사회에서는 다르다.

맏며느리는 제사를 맡아 해야 하는 막중한 의무를 지녔지만, 동시에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대단한 권한을 갖기도 했다. 조선 후기 장남과 맏며느리는 분명 다른 자식들보다 상속을 많이 받았다. 명예도 보장되었다. 의무에 권리가 따랐던 것이다. 여자들은 딸로서 자기 집안 제사에 관여하지는 않게 됐지만, 맏며느리로서는 또 다른 의미에서 제사의 주체였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맏며느리가 다른 며느리보다 재산을 더 많이 상속 받는가? 맏며느리의 권위가 서 있기는 한가? 훌륭하다는 명예라도 주어지는가? 권한이나 권리는 이미 사라졌다. 그런데 의무는 남아 있다.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일을 누가 기꺼워할 수 있겠는가? 결코 장남과 맏며느리들이 못돼져서 제사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이 바뀌었을 뿐이다.

요즘 결혼생활에서 여자 집안 역할이 얼마나 커졌는가? 더 이상 한 쪽 집안 중심의 가족제도로 우리의 가족 관계를 담아낼 수 없다. 그런데 제사가 여전히 남자 집안 중심이면 여자들이 만족감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추석을 잘 보내는 방법으로 ‘음식량을 줄여야 한다’, ‘남자들이 도와야 한다’라는 등의 안이 나오고 있다.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제사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올 수 없다. 제사가 바뀌어야 한다. 조선 중기 이전처럼 여자 집 제사도 지내든지 아니면 돌아가면서 해보든지, 제사 지내는 자식에게 모든 상속권을 주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제사를 축제로 만들어서 모이는 것 자체를 즐겁게 하든지.

제사는 변화될 수밖에 없다. 모두가 불편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명절 스트레스는 여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도 의무만 남아 있는 제사 때문에 아내와 불화하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불편하다면 변화는 올 수밖에 없다. 그 변화는 제사를 변형한 것일 수도 있고, 전혀 새로운 것일 수도 있고, 또 제사 자체가 없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제사가 없어진다 해도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다. 사실 조선 이전에는 지금 같은 제사는 없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제도와 관습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미 달라진 가족관계에 맞는 새로운 방식이 소리 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이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