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려도경 (徐兢)-번역본(1)

한부울 2007. 6. 1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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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도경 (徐兢)-번역본(1)

高麗圖經번역본


解 題

 

徐 兢(1091~1153)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이하?고려도경?이라 약칭함.) 40권은 그가 宋 徽宗이 파견한 고려에의 국신사(國信使) 일행에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송도에 다녀간 경과와 견문을 그림을 곁들여서 엮어 낸 사행보고서다. 서 긍이 송도를 다녀간 것은 선화 5년(고려 인종 1,1123)으로 북송이 금(金)에 멸망되기 4년 전이고 고려 예종(睿宗)이 훙거하고 인종(仁宗)이 즉위한 이듬해다. 서 긍의 평생은 본서에 부록된 장 효백(張孝伯)이 작성한 그의 행장에 극히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되풀이하지 않기로 하겠다. 다만 서 긍은 가학(家學)의 연원(淵源)도 있고 해서, 서화(書畵)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던 점은 간단하게나마 보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송대 초기에 중국에서 전자(篆字)를 잘 쓰기로 이름을 떨치고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던 徐 鉉(916~991)이 바로 긍의 조상이다. 서 긍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 鉉의 후신으로 인정을 받기도 하였고, 그 자신 서화에 취미가 있기도 해서 그 방면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는 휘종 앞에서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기세 좋게 휘호하여 탄상을 받고,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 내려져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로 발탁되어 장서학(掌書學)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탁월한 서예의 소지자로 그림에도 비범하여, 그의 그림은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간 것으로 칭송되었고 특히 산수와 인물 두 가지에 있어서는 당대에 으뜸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렇듯 서화에 있어 거장의 경지에 육박해 있던 서 긍이었으므로, 단시일의 사행 기간 중에 ?고려도경?같은 내용이 풍부하고 관찰이 예리한 보고서를 그림과 글씨로 편성해 낼 수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어부(御府)에 바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도경?의 원본은 그 내용을 차치하고서라도 하나의 드문 예술품이었을 것이다. ?고려도경?의 원본은 1126년 이른바 정강(靖康)의 난리로 금군(金軍)에게 북송의 수도가 유린되는 분란 속에서 가석하게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한 편 서 긍은 중국 고전의 학술적인 연구에는 취미가 없었으나 독서를 좋아하여, 고금의 전적을 거의 유루 없이 섭렵한 나머지 대단히 박식하여져서, 역사와 장고(掌故)에 밝아 매사를 보는 눈이 남달리 예리하였다. 그래서 그는 송도에서 1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체류하면서 공식적인 행사에 몰리고 행동에 제약을 받는 가운데서, ?고려도경?을 엮어 낼 만한 자료를 면밀 주도하게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는 사절단에 수행하는 동안 일기의 형태로 소묘(素描)와 비망기를 적어 두었으리라 짐작된다.

당시 중국 북방의 대부분의 지역은 금제국(金帝國) 치하에 있었으므로, 북송에서 고려에 사절단을 파견할 경우에 육로는 이용할 수 없고 해로로 황해(黃海가 아니라 黃河이다)를 건너가야 했었다. 그것도 산동 방면의 항구에서 떠나는 짧고 안전한 항로가 아니라, 지금의 절강성 연안의 항구에서 떠나 황해의 폭이 넓은 부분을 건너 전라남도 근해에 와서 다시 예성항까지 북상하는 우회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사실 지금 우리가 역사적으로 혼란을 느끼고 온통 잘못된 지리적 오해가 많은 것은 이제껏 한반도에 몰아넣는 주입식 역사교육 즉 반도사관으로 친일 학자들에 의하여 상식화되었기 때문에 민족역사가 대륙이 근거지란 사실에 대하여 잘 모를 수밖에 없다. 반도사관이 무조건 바다를 건넜다고 하면 황해를 건너 한반도로 향했다고 해석해 버리고 말았던 결과이기 때문이다. 현재 본 번역본도 번역자가 반도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번역이 되어 근본적인 역사흐름과 본질이 퇴색되면서 올바르지 못한 흐름도 많지만 고려도경의 근원지가 바로 잡혀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 바다를 건너면 黃해(東海)를 건너 한반도로 향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며 그것은 민족역사의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黃해가 黃河라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믿고 본 번역본을 읽다보면 역사의 참 진실을 자연스럽게 모두 공감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송 휘종은 본래 선화 4년(고려 인종 즉위년,1122) 3 월에 노 윤적(路允迪)과 부 묵경(傅墨卿)을 국신소의 정․부사로하여 사절단을 고려에 파견하기로 하였으나, 고려 예종의 훙거를 알게 되어 동년 9월에 제전(祭奠)․조위(弔慰)의 임무까지 그들에게 겸임시켰다.

노 윤적을 정사로 하는 고려행 사절단 일행은 그 이듬해 2월부터 사행 준비에 착수하여 3월 14일에 배편으로 수도 변경(변경 지금의 개봉(開封))을 떠나 5월 4일에 지금의 절강성 근현(근縣) 땅인 명주(明州)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사절단을 위해 특별히 건조한 관선(官船)인 신주(神舟) 2 척과 민간 소유 선박인 객주(客舟) 6 척, 도합 8 척으로 선단을 짜고 인마와 예물을 비롯하여 각종 장비와 물품을 적재하여 출항 준비를 했다. 이 사절단은 정․부사를 정점으로 하여 상․중․하 3절(節)로 구성되었고, 실지의 사무는 도제할관(都提轄官)이 관장하여 처리하였는데, 뱃사람들까지 합하면 2 백 인을 돌파하는 큰 규모의 것이었다.

이 사절단을 실은 선단이 명주를 떠난 것은 5월 16일이었고, 동 24일에 정식으로 바닷길로 나서서 28일에 큰 바다(대해, 황해에서 黃河)로 들어가, 7 일간의 거센 항해를 하여 6 월 6 일에 군산도(群山島)에 당도하였다. 다시 6 일간의 항행 끝에 예성항에 입항하여 6 월 12 일에 송도로 들어가 순천관(順天館)에 입주하였다. 그 후 약 1개월 동안 공식 행사를 끝내고 사절단은 7 월 13 일에 송도를 떠나 다시 배에 올랐는데, 풍세가 좋지 않아 42일 만에 명주로 돌아갔다. 명주를 떠났다가 명주로 돌아오는데 대략 3개월이 걸렸다. 다소의 과장이 없지는 않겠지만, 서 긍의 서술에 따르면 사절단 일행은 황해를 횡단 내왕하는 항해 중에 극심한 고생과 많은 위험을 겪어야 했다. 제 24권부터 29권까지의 5권은 ‘해도’(海道)라는 대제 하에 사절단 일행의 항해를 일지의 성격을 띠어 서술한 것이다.

?고려도경?을 어부(御府)에 바친 일이 언급된 서 긍의 자서(自序)는 선화 6년 8월 6일로 되어 있다. 그가 고려를 다녀간 후 약 1년만에 ?고려도경?의 저술을 완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림과 글씨를 다 서 긍 자신이 직접 그리고 쓰고 한 것이어서, 장 효백의 행장에 따르면, 그것을 열람한 휘종을 대단히 기쁘게 만들 수 있었고 또 그 일로 인해 서 긍의 지위와 관직이 다 올라가게 되었다 한다.

?고려도경?40권은 29류로 나누어져 있고, 그 아래에 3백여 목으로 세분되어 있다. 그리고 29류의 제하에는 그 내용을 해설하는 서문 형식의 글이 있고, 세목에 가서 역시 분제(分題)를 제시하고 설명을 달았다. 29류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 건국(建國) 2. 세차(世次) 3. 성읍(城邑) 4. 문궐(門闕) 5. 궁전(宮殿,2권) 6. 관복(冠服) 7. 인물(人物) 8. 의물(儀物,2권) 9. 장위(仗衛,2권) 10. 병기(兵器) 11. 기치(旗幟) 12. 거마(車馬) 13. 관부(官府) 14. 사우(祠宇) 15. 도교(道敎) 16. 석씨(釋氏, 도교․ 석씨는 1권) 17. 민서(民庶) 18. 부인(婦人) 19. 조례(早隷) 20. 잡속(雜俗,2권) 21. 절장(節仗) 22. 수조(受詔) 23. 연례(燕禮) 24. 관사(館舍) 25. 공장(供張,2권) 26. 기명(器皿,3권) 27. 주즙(舟楫) 28. 해도(海道,6권) 29. 동문(同文)

 

3백여 종에 달하는 세목에는 대체로 그림이 그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그렇다고 그 전부에 그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분명하게 그림은 생략한다고 말한 데가 몇 군데 있다. 이를테면 제 40권 ‘동문’(同文)의 서문 말미에 ‘그 그림은 생략한다.’[省其繪畵] 한 것이라든지, 제 17권 ‘사우’(祠宇)의 제 6목인 왕성내외제사(王城內外諸寺)의 설명문 끝에 ‘그 그림은 생략하고 그 이름들을 여기에 싣는다.’[略其圖而載其名焉] 한 것은 그 뚜렷한 예들이다. 그 밖에도 확실하지는 않으나 제 1권 ‘건국’(建國)의 시봉(始封), 제 2권 ‘세차’(世次)의 왕씨(王氏) 등 그 내용으로 보아 본래부터 그림이 없었던 곳도 없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 긍은 ?고려도경?의 부본을 한 부 만들어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으나, 한마을 사람 서 주빈(徐周賓)이라는 자가 그것을 1127년 초 정강의 난리 직전에 빌어 가서 반환하지 않은 채로 난리를 당해, 그 부본마저 소재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0년째 되던 해에 지금의 강서성(江西省) 남창현(南昌縣)의 땅인 홍주(洪州)에서 그 부본이 발견되었으나, 낙결(落缺)없이 그림과 글씨가 완전한 것은 단지 해도(海道) 부분의 2권뿐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어떤 경로로였는지는 몰라도 ?고려도경?의 문자 부분은 전사(傳寫)되어 세상에 유통하였던 것 같아서, 서 긍이 그의 장질(長姪)인 천(천)에게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이 남아있다. 내가 후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한 말이 건도본(乾道本) 발문에 보인다. 그러나 서 긍은 그림 그릴 비단을 펼쳐 놓고도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한 해가 지나가도 화필을 잡지 않는 성벽의 소유자여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음이 안 내켜서 였던지 그는 ?고려도경?의 그림을 다시 그려 놓지 않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 ?고려도경?은 서명에만 ‘도’(圖)자가 남아 있고 본제의 그림은 전연 전해지지 않게 되어 버렸다. 서 천은 그의 중부 긍(兢)이 세상을 떠난 지 13년 후인 건도(乾道) 3년(고려 의종 21,1167)에, ?고려도경?을 그 문자 부분이라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지금의 운남성(雲南省) 징강현(징江縣)의 땅인 징강군의 군재(郡齋)의 인화조씨소산당(仁和趙氏小山堂)에서 서 긍의 자서(自序)와 장 효백의 서긍행장 및 서 천의 발문을 붙인 40권본의 ?고려도경?을 판각해 냈다. 이것이 ?고려도경?의 송본(宋本)으로, 건도본이라고도 부른다. 이 건도본이 지금 전해지는 ?고려도경?으로서는 가장 오래되고 의거할 만한 판본이다. 그러나 이 건도본은 오랫동안 세상에 통행되지 않아, 청대 중기의 대장서가인 포 정박(鮑廷博,1728~1814)조차도 그 원본의 소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요행 건도본의 완질 하나가 청 고종, 즉 건륭제(乾隆帝,재위 1735~1795) 때 궁중 송․원․명 선본의 장서처인 천록임랑전(天祿임瑯殿)에 보존되어 내려왔다. 청실의 서화골동과 고완진보(古玩珍寶)를 인계, 관리하게 된 고궁박물원(古宮博物院)에서 천록임람총서의 하나로 민국 20년(1931)에 이 송 건도본 ?고려도경?의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그 후 이 영인본도 희귀해져서 대만으로 옮겨간 고궁박물원에서 민국 63년(1974)에, 다시 원장 장복총(蔣復총) 박사의 서문과 서지학자 창 피득(昌彼得) 교수의 발문을 추가하여 원본에서 새로 찍은 선명한 영인본을 발간하였다. 이 3책으로 된 영인건도본 ?고려도경?에는 ‘건륭어람지보’(乾隆御覽之寶)를 비롯한 7종의 홍색장서인이 각책마다 찍혀 있다.

고려본의 ?고려도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건륭 58년(정조 17,1793)에 포 정박이 그의 지부족재총서(知不足齋叢書)의 하나로 ?고려도경?을 간행하였다. 이 지부족재본은 포 정박의 가장본(家藏本)을 저본으로하여 명말에 해염(海鹽) 사람 정 휴중(鄭休中)이 낸 중간본과 참합(參合)한 것으로, 정의 중간본은 초록송본(초록宋本)과도 대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근세에는 이 지부족재본의 ?고려도경?이 널리 통행되었다. 이밖에 금세기 초엽에 일본에서 지부족재본을 저본으로하여 건도본을 참교한 근대식 활자본 ?고려도경?이 나와 광범하게 유통되었다. 그러나 이 활자본은 건도본과의 대교가 철저하지 않고 베풀어진 구두점에 착오가 적지 않다.

고려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자료가 풍부하지 못한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는, 북송 때의 중국인에 의해 저술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 ?고려도경?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서든 다행한 일이다. 당시 북송은 북쪽으로는 요(遼)와 금(金)의 무서운 압박을 받고 있었고 서남쪽으로는 서하(西夏)가 독립국으로 버티고 있어, 한족(漢族)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는 입장에는 놓여 있지 않았다. 그러하였기 때문에 휘종 치하의 북송에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고려의 지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휘종은 정화(政和) 연간(1111~1117)에 고려와의 교빙을 요와 대등한 국신(國信)의 수준으로 제고시켜, 그 업무를 국신소로 이관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유학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과명(科名)을 주어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한편, 서 긍이 보고 간 고려는 인종 치하에 있었기는 하나, 예종이 16년 동안 경영하여 안정시켜 놓은 데서 크게 변화하지 않은 상황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종은 육지로 연접해 있는 요와 금을 적절하게 조종해서 국내의 안정을 기하기를 꾀하고, 북송과 교빙하여 문치의 터전을 닦기에 힘써 볼만한 치적을 올렸다. 예종은 강성해지는 여진족을 초기에는 무력으로 제압하는 정책을 써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고, 완안 아골타(完顔阿骨打)가 칭제하여 금제국을 세우고부터는 그 세력이 강성하여지지 못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하기에 부심하였다. 예종은 글안의 요와 여진의 금이 힘의 형평을 이뤄서 북송을 포함한 네 나라가 균형을 유지하면서 공존하게 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북송의 휘종은 요에 대한 굴욕을 씻기 위해 신흥 세력인 금과 합력하여 요를 타도하려고 했다. 예종은 그 일을 알아차리고 그의 재위 말년(1122)에 중국의 의관(醫官)을 통해 휘종에게 요를 타도하려는 계획을 포기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휘종은 그 후 고려 예종의 종용을 무시하고 금과 함께 협공하여 요를 멸망시켰고, 또 그렇게 해서 강성해진 금에 의해 북송도 망국의 화를 입고, 휘종 부자는 북으로 잡혀가 버리는 참변을 당했다.

예종 11년(1116)부터는 고려에서는 요의 연호 사용을 중지하고 간지기년(干支紀年)을 실시하면서 송․요․금과는 그야말로 등거리 외교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상황하의 고려의 실정을 보고한 서 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를 마치 북송의 복속 국가를 다루는 듯한 어투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국력이 대단치 않고 점유한 영토도 퍽 작았던 북송은 당시 말로라도 허세를 부리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이것은 북송의 학자나 정치가들이 이른바 정통론(正統論)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짙은 낭만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심리가 작용한 소치라고 이해된다. 고려는 당시 15세의 소년 국왕인 인종 치하에 있었으나, 북송의 사절단을 맞이하는 규모와 방법이 극히 엄연하였고, 사절단을 극력 환대하면서도 사절 인원이 방자하게 굴지 못하도록 절도 있게 조종하였다.

서 긍은 고려에 와서 주로 송도에 머물러 있었고 또 송도는 고려의 수도였으므로, ?고려도경?에는 자연 송도를 중심으로 한 기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고려도경?첫머리에 ‘건국’과 ‘세차’ 두 권을 두어, 고려족의 건국전세(建國傳世)의 개략과 상고이래 중국과의 접촉 상황을 간단하게 적어서 전체의 실마리로 삼았다. 건국에 관한 기사는 제사(諸史)를 참고해서 작성하였다고는 하였으나 오늘날에 와서 본다면, 그 중에 참고 되는 부분이 전무하지는 않지만, 사실(史實)을 왜곡하였거나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고려를 고구려와 연결시켜 이해하려고 하여 혼동을 일으켰고, 삼국의 정립과 통일신라 내지는 후삼국 등에 관해서는 극히 무식하였음을 나타냈다. 다만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보고 고려와의 동족성 내지는 연계성을 의식하는 듯한 서술은, ?오대사?(五代史) 사이전(四夷傳)의 발해 부분을 적기한 것이기는 하나 다소간 시사를 던져 주는 점이 없지 않을 것 같다. 소년 국왕 인종을 성인(成人)의 풍도가 있어 동이(東夷)의 현왕(賢王)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주목을 끌기도 한다.

서 긍은 제 3권 ‘성읍’의 서문에서, ‘그 땅에 들어가면 성곽이 우뚝하여 사실 깔보기 어렵다.’ 라고 송도에 들어오면서 다소간 위압을 느낀 듯한 말을 했다. 그는 고려의 강토와 군읍(郡邑)에 언급하였으나 상세하지는 않고, 송도의 형세와 도성 및 황성의 성문․문궐(門闕)․궁전 등에 걸쳐 중점적으로 설명을 시도하였다. ?고려사? 지리지 등 우리의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규모가 완전히 파악되어 있지는 않으나, 직접 관찰한 기록이어서 우리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사실을 보존한 의의가 크다. 일례를 들면, 장령전(長齡殿)은 건덕전(乾德殿)의 동자문(東紫門) 안에 있는, 규모가 건덕전을 능가하는 전각인데, 거기서 중국 사신의 도착 통지의 서한을 받고 중국 상인들이 오면 역시 거기서 그들의 물품을 헌납 형식으로 받고, 그 가치를 따져서 방물(方物)로 그 가치의 수배에 상당하게 그들에게 보상해 준다는 것이다.

관부(官府)는 서 긍이 가 본 곳이 적어서였던지 창고․약국․감옥 등을 포함한 6종만을 기술했다. 다만 그 기사를 통해 관록(官祿)․의약․형벌 등에 관한 당시의 실제 상황을 추측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서 긍은 고려의 인물을 소개하는 데 있어, 서문에서 지전주(知全州) 오 준화(吳俊和)를 위시한 관원 57인을 직함과 함께 나열하고서, 이 자겸(李資謙)․윤 언식(尹彦植)․김 부식(金富軾)․김 인규(金仁揆)․이 지미(李之美) 5인을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이 5인은 당시 권문세가의 인물로, 이 자겸․지미 부자(父子)가 끼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이 자겸을 현신(賢臣)이라고 말해 넣고 그의 탐욕 치부하는 상황에 언급하여 가석하다고 맺었다. 그리고 김 부식을 당시의 고려에서 으뜸가는 문장으로 소개하였다. 서 긍에게 비친 당시 고려 인물의 면모라고 하겠다.

국왕의 관속과 의장 물건을 비롯하여, 황성을 중심으로 한 송도의 경비를 담당하는 근위부대의 규모와 무기 및 거마에 이르는 제반사항을 비교적 주도하게 기술하고 있다. ?고려사?의 여복지(輿服志)에 따르면 요․금․송에서 각기 국왕의 관복을 보내 주었다. 그러한 연유로 국왕의 관복은 자연 중국풍이 짙어졌던 것으로서, 긍의 기술에도 그 점이 지적되어 있다. 평시에는 국왕도 서민과 다름없이 조건백저포(早巾白紵袍), 즉 검은 두건에 흰 모시 웃옷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서 긍이 그 것을 목격하지는 못하고 전문을 기록한 데 불과하였을 것이다. 국왕의 의장물건 12종, 의장대 18종, 병기 8종, 기치 7종, 거마 7종이 각각 소개되어 있는데, ?고려사? 여복지의 의위(儀衛)에 열거되어 있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각종 의장 물건의 형제(形制)와 용도가 설명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당시 도성을 수비하는 근위부대의 병력이 상시 3만을 유지한다고 하였다. 당시의 인구나 국력으로 보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고려에서는 국가의 종교로 불교와 도교가 신봉되었었으나, 도교의 규모는 불교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송도에는 불교사원이 많았는데, 서 긍은 사원에 관심이 컸던 것 같아서 짧은 체류 기간 중에 28개소에 달하는 사원을 답사하였다. 그 중에서 정국 안화사(靖國安和寺)를 가장 상세하게 소개하였다. 안화사는 예종이 창건한 사원으로, 당시 고려에서 가장 웅장․미려한 것으로 알려졌고, 송 휘종도 이 절의 건립 소식을 듣고 사신을 시켜 건축비․불상․어서 전액(御書殿額)․채 경(蔡京)의 사명문액(寺名門額) 등을 보내 주기까지 하였다. 사절단은 이러한 송 휘종과의 인연도 있고 하여, 일행은 안화사를 찾아가 휘종의 글씨가 수장되어 있는 어서전(御書殿) 아래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고 복을 빌고 돌아갔다. 서 긍은 불승의 의복제도에 관해서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했다.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은, 법안종(法眼宗) 일파가 중국에서 동래하여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으로 말한 점이다. 법안종은 중국의 건업 청량사(建業淸凉寺)의 법안 문익(法眼文益)에 의해 전해진 선종(禪宗)의 일파로, 화엄초지(華嚴初地)중의 육상의(六相義)를 들어 삼계유심(三界唯心)과 만법유식(萬法唯識)을 종지로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법안종의 전래에 대한 역사적 구명은 한 가지 흥미 있는 과제라고 하겠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불승 중에 중국음으로 독경할 수 있는 자가 있어 서 긍이 그것을 똑똑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범패(梵唄)는 우리말이어서 그가 전연 알아듣지 못했다. 다만 지금도 불가의 독경은 현토하지 않고 한자음만을 절주에 맞춰 낭송하는 것으로 미루어서, 긍이 들은 중국음의 독경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의 한자음으로 읽는 독경도 절주가 중국 독경의 그것과 별차이가 없어서, 중국인도 대체로 알아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하여 볼 수 있다. 승려의 계급으로는 왕사(王師)를 정상으로 하여, 국사(國師)․삼중화상대사(三重和尙大師)․아사리대덕(阿사리大德)․사미비구(沙彌比丘)․재가화상(在家和尙) 여섯을 들었는데, 그 중 재가화상이 가장 주목을 끈다. 서 긍의 설명으로는 이들은 결코 승려가 아니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인 형여지역인(刑餘之役人)으로, 관가의 각종 노역에 복무하고 전시에도 출정하여 전투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품종(品從)이나 백정(白丁)을 두고 하는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도교에 관해서는 복원관(福源觀)과 도사의 복장에 관한 기술뿐이다. 서 긍은 서문에서 예종이 도록(道록)을 받아 도교에 정식으로 귀의해서 불교 대신 도교를 국가의 종교로 올려놓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는 말을 했다. 이것은 고구려 말년의 연개소문의 종교 정책을 연상하게 한다. 예종이 도교에 대해 관심이 컸던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고려 상하에 그런 말이 나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한편 또 서 긍의 이러한 말은, 도교 황제인 송 휘종에 대한 일종의 아유적인 언사로 풀이될 수도 있다. 그런데 예종이 훙거하자 그의 장자인 인종이 이 자겸의 힘으로 곧 즉위하였는데, 그해 12월에 예종의 도교정책과 관련이 깊었던 한 안인(韓安仁)과 이 중약(李仲若)은 왕권을 위요한 갈등에 말려들어 피살되었다. 이러한 일 등을 가지고 본다면, 또 예종 생전의 도교로의 경도(傾倒)가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도 여겨진다. 도불 이외에 각종 신사(神祠)에 관해서도 기술되어 있다.

서 긍은 서민과 그 생활 전반에 관해서도 널리 관찰하였고, 그것을 5권의 편목을 써서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당시는 8세기의 여의 과거였으나 오늘날과 유사한 성향 내지 풍습을 보여주는 예가 적지 않았다. 민간에 팽배한 교육열을 그 한가지 예로 들 수 있다. 제19권 ‘민서’(民庶)의 서문에서 ‘사민(四民)의 업 중에서 선비[儒]를 귀하게 여긴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는 글을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하였고, 제40권 ‘동문’(同文)의 유학(儒學)에서는 국자감 같은 국립 교육기관 이외에도 민간의 교육열의 대단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어,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은 무리 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운다.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병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한테서 글을 배우니, 아아, 훌륭하기도 하다.”

이러한 교육열은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살아야겠다는 의욕의 표현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반적으로 글을 모르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정도였으므로 당시의 교육열은 대체적으로 볼 때, 우리 겨레가 문화를 애중하는 성향을 나타낸 것이 극히 오래 전부터임을 말해 주는 사례로 이해되어야 마땅할 것 같다. 여자가 아기를 등에 업고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풍경을 당시에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려인들은 깨끗해서 목욕을 자주 하고 중국인이 때가 많은 것을 웃곤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오늘날과 조금 다른 점도 없지 않았다. 황성의 긴 행랑에는 10칸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서는, 큰 독에 숭늉을 채워 놓고 국자 따위를 마련하여 두어 오가는 사람이 귀천 없이 아무나 마시게 하고, 중이 그 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철저한 급수공덕의 실천이다. 물론 지금도 공원이나 유원지 같은 데에 수도가 마련되어 물을 마시게 해주고 있지만 그 작풍이 판이하다.

당시의 고려에서는 공예를 숭상해서 그 기술자 중에 뛰어난 자들은 복두소(복頭所)와 장작감(將作監)에서 일하게 하였고, 그들의 수입과 사회적 지위는 농민들이 따라가지 못했다. 공예품에 관해서는 제 28권부터 5권에 걸쳐 ‘공장’(工匠)․‘기명’(器皿)이라는 두 가지 제목 하에 수십 가지 종류를 소개하고 있다. 서 긍은 고려에서 청도기(靑陶器)를 소중히 여긴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곧 우리가 말하는 고려청자다. 그는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취색이라 한다 하였는데, 그 만듦새는 솜씨가 좋고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말했다. 고려청자로 된 기물은 대부분 중국의 것들과 형태가 같아 생략하고, 술준[樽]만은 같지 않아서 소개하였다. 그 술준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딘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청자 술준이다. 서 긍을 가장 감탄케 한 것은 청자 향로다. 그것은 산예출향(산猊出香)이라 하여 사자꼴로 된 청자 향로다. 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위에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맞이하는 연꽃이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오직 이 물건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의 고비색(古秘色)과 여주(汝州)의 신요기(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

이 산예출향으로 불리는 청자 향로도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청자공예는 이미 중국을 능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도경?에는 북송과 고려의 선박 구조가 소개되어 있다. 신주(神舟)로 부르는 중국의 관선(官船)은 그 구조에 관한 설명이 없으나, 민간 선박인 객주(客舟)의 구조는 비교적 상밀하게 되어 있어 참고가 된다. 이 객주는 목선으로, 길이 약 30m, 깊이 약 9m, 위폭 약 8m로 선창이 3분되어 위아래로 각종 시설이 베풀어져 있다. 신주는 물에 뜨면 산악같이 우뚝하다고 형용하고 고금에 그 유례가 없다고까지 하여, 객주보다 훨씬 거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고려의 선박은 4종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 구조가 간략하다. 서 긍이 소개한 고려의 선박들은 그가 목격한 연안을 항해하는 것들에 그치고 고려의 외항선은 볼 기회가 없어서 소개되지 않았을는지도 모른다.

사절단의 숙소는 순천관(順天館)으로 웅장하기가 왕궁을 능가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본래는 요의 사신을 유숙시키기 위해 건조하였던 것이다. 수백 명의 사절단 일행이 불편 없이 살 수 있을 정도였으니 그 규모를 상상할 수 있다. 서 긍은 순천관을 극히 면밀하게 구석구석까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순천관에서 사절단 일행에게 매일 3식을 계급에 따라 차 등을 두어 제공하고 차도 역시 매일 세 차례씩 끓여서 대접한다. 그리고 사절단이 순천관에 도착한 날에 베푸는 불진회(佛塵會)를 첫 번으로 하여 5일에 한 차례씩 사절단 전원에게 주연을 베푼다. 물론 사절단도 자체의 숙수들이 있어 가지고 온 식료품과 기명을 써서 주연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러한 순천관에서의 일상생활 이외에 국왕과의 사적(私적, 사적인 상면)․연음(燕飮)․헌수(獻酬) 등 연례(燕禮)가 있으나 다 극히 형식적이었다.

사절단의 공식 임무인 송 휘종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은 번잡한 절차를 취해 가며 절도 있게 거행되었다. 조서는 인종의 즉위에 붙여 송에의 협력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 주요한 것이고, 인종에게 문상(問喪)하는 내용의 조위 조서(弔慰詔書)는 부수적인 것이다. 예종에의 제전(祭典)에 쓰는 송 휘종의 어제 제문이 있다. 먼저 회경전(會慶殿)에서 조서를 받고, 수일 후에 장경궁(長慶宮)의 제실(祭室)에서 제전 예물을 진열해 놓고 휘종의 제문을 정사가 낭독하게 하여 제전 의식을 끝내고, 잠시 후에 다시 인종의 조위 조서를 정사로부터 받는다. 이렇게 해서 공식절차를 끝낸다. 이러한 조서를 받는 의식절차는 송 황제와 고려 국왕 및 주인과 빈객을 따지는 예법 상의 논리가 엄연하다.

이러한 서 긍의 ?고려도경?은 고려시대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당시의 국제 사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적이 보탬이 될 것이다.


차 주 환(車柱環) 씀


일 러 두 기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요령으로 엮었다.

1. 이 책의 국역 대본은 송징강본(宋澂江本)이다.

2. 번역은 원의(原義)에 충실을 기하였다. 단, 원문의 ?臣聞? 두 자글 번역 문에서는 생략하고 평서체로 번역하였다.

3. 원문은 구두(句讀)를 찍어 영인하여 붙였다.

4. 번역문의 체재는 대본을 따랐다.

5. 주석(註釋)은, 간단한 것은 ( ) 나 〔 〕 안에 간주(間註)하고 그 밖의 것은 각주(脚註)하였다.

6.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따르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7. 한자(漢字)는 이해를 돕기 위하여 넣었으며, 시(詩)에서는 원문을 병기 하였다.

8.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호를 사용하였다.

1) ( ) : 음과 뜻이 같은 한자를 묶는다.

2) [ ] : 음은 다르나 뜻이 같은 한자를 묶는다.

3)〈 〉: 보충역을 묶는다.

4)? ?: 대화 등의 인용문을 묶는다.

5)? ?: 재인용이나 강조 부분을 묶는다.

6)「 」: ? ?안의 재인용, 또는 책명을 묶는다.

7)《 》: 각주에서 출전을 밝힌다.

8) *) : 제목에서 각주를 표시한다.

9) ※) : 미상의 주석을 표시한다.


차 례


일러두기


해 제 解題 ………………………………………………… 차 주 환(車柱環) … 1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宣和奉使高麗圖經序 ………………………………………………… 1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一 卷

건 국 建國 …………… 19 시 봉 始封…………………… 1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 卷

세 차 世次 …………… 22 세 계 世系 ………………… 24

왕 씨 王氏 …………… 22 고려국왕 왕 해 高麗國王王楷 … 2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 卷

성 읍 城邑 …………… 25 민 거 民居 …………… 28

봉 경 封境 ……………… 25 방 시 坊市 …………… 28

형 세 形勢 ……………… 26 무 역 貿易 …………… 28

국 성 國城 ……………… 27 군 읍 郡邑 …………… 29

누 관 樓觀 ……………… 2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四 卷

문 궐 門闕 ……………… 30 승 평 문 昇平門 …………… 31

선 의 문 宣義門 ………… 30 동 덕 문 同德門 …………… 31

외 문 外門 …………… 30 전 문 殿門 …………… 32

광 화 문 廣化門 ………… 3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五 卷

궁 전 1 宮殿一 ………… 33 왕 부 王府 ………… 33

회 경 전 會慶殿 ………… 33 원 덕 전 元德殿 …………… 34

건 덕 전 乾德殿 ………… 34 만 령 전 萬齡殿 …………‥ 34

장 화 전 長化殿 ………… 3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六 卷

궁 전 2 宮殿二 ………… 36 임 천 각 臨川閣 …………… 39

장 령 전 長齡殿 ………… 36 장 경 궁 長慶宮 …………… 39

장 경 전 長慶殿 ………… 36 좌 춘 궁 左春宮 …………… 39

연영전각 延英殿閣 ……‥ 36 별 궁 別宮 …………… 4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七 卷

관 복 冠服 ………… 41 종 관 복 從官服 …………… 43

왕 복 王服 ………… 41 경 감 복 卿監服 …………… 43

영 관 복 令官服 ………… 41 조 관 복 朝官服 …………… 43

국 상 복 國相服 ………… 42 서 관 복 庶官服 …………… 43

근 시 복 近侍服 ………… 4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八 卷

인 물 人物 ………… 45 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富軾…47

수태사상서령 이 자겸 守太師尙書令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동지추밀원

李資謙 ……………………… 46 사 상주국 김 인규 館伴金紫光祿大夫守

접반 정 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 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47

어대 윤 언식 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 동관반 정의대부 수상서 병부시랑 상

國賜紫金魚袋尹彦植 ………… 46 호군 사자금어대 이 지미 同館伴正義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항 상호군 大夫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

사자금어대 김 부식 同接伴通奉大夫尙 李之美 ……………………………………4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九 卷

의 물1 儀物一 ……… 49 우 선 羽扇 …………… 50

반 리 선 盤縭扇 ………… 49 곡 개 曲蓋 …………… 50

쌍 리 선 雙縭扇 ………… 49 청 개 靑蓋 …………… 50

수 화 선 繡花扇 ………… 4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 卷

의 물2 儀物二 ……… 51 금 월 金鉞 …………… 51

화 개 華蓋 ………… 51 구 장 毬杖 …………… 51

황 번 黃幡 ………… 51 기 패 旂旆 …………… 52

표 미 豹尾 ………… 5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一 卷

장 위1 仗衛一 ……… 53 상육군좌우위장군上六軍左右衛將軍… 55

용호좌우친위기두龍虎左右親衛旗頭 53 상육군위중검랑장上六軍衛中檢郞將… 55

용호좌우친위군장龍虎左右親衛軍將 54 용호중맹군 龍虎中猛軍 ………… 55

신호좌우친위군 神虎左右親衛軍 54 금오장위군 金吾仗衛軍 ………… 55

흥위좌우친위군 興威左右親衛軍… 54 공 학 군 控鶴軍 …………………… 5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二 卷

장 위2 仗衛二 ……… 57 관부문위교위 官府門衛校尉 …… 58

천우좌우장위군 千牛左右仗衛軍 ‥ 57 육군산원기두 六軍散員旗頭 …… 58

신 기 군 神旗軍 ………………… 57 좌우위견롱군 左右衛牽攏軍 …… 58

용호상초군 龍虎上超軍 ………… 57 영군낭장기병領軍郎將騎兵 ………… 58

용호하해군 龍虎下海軍 ………… 57 영병상기장군 領兵上騎將軍 ……… 5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三 卷

병 기 兵器 ……… 60 의 극 儀戟 …………… 61

행 고 行鼓 ………… 60 호 가 胡茄 …………… 61

궁 시 弓矢 ………… 60 수 패 獸牌 …………… 61

관 혁 貫革 ………… 60 패 검 佩劍 …………… 61

등 장 鐙杖 ………… 6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四 卷

기 치 旗幟 ………… 62 상 기 象旗 …………… 62

응 준 기 鷹雋旗 ………… 62 태 백 기 太白旗 …………… 63

해 마 기 海馬旗 ………… 63 오 방 기 五方旗 …………… 63

봉 기 鳳旗 ………… 63 소 기 小旗 …………… 6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五 卷

거 마 車馬 ………… 65 왕 마 王馬 …………… 65

채 여 采與 ………… 65 사 절 마 使節馬 …………… 65

견 여 肩與 ………… 65 기 병 마 騎兵馬 …………… 65

우 거 牛車 ………… 65 잡 재 雜載 …………… 6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六 卷

관 부 官府 ………… 67 부 고 府庫 …………… 69

대 성 臺省 ………… 67 약 국 藥局 …………… 69

국 자 감 國子監 ………… 68 영 어 囹圄 …………… 69

창 름 倉廩 ………… 68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七 卷

사 우 祠宇 ………… 71 왕성내외제사 王城內外諸寺 … 74

복 원 관 福源觀 ………… 71 숭 산 묘 崇山廟 …………… 75

정국안화사 靖國安和寺 …… 72 동 신 사 東神祠 …………… 76

광통보제사 廣通普濟寺 …… 73 합굴룡사 蛤窟龍祠 ………… 76

흥 국 사 興國寺 ………… 74 오 룡 묘 五龍廟 …………… 76

국 청 사 國靑寺 ………… 7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八 卷

도 교 道敎 ……… 78 삼중화상대사 三重和尙大師 … 81

도 사 道士 ……… 79 아사리대덕 阿奢梨大德 …… 81

석 씨 釋氏 ……… 79 사미비구 沙彌比丘 ………… 81

국 사 國師 ……… 80 재가화상 在家和尙 ………… 8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十九 卷

민 서 民庶 ………… 83 공 기 工技 …………… 84

진 사 進士 ………… 83 민 장 民長 …………… 84

농 상 農商 ………… 83 주 인 舟人 …………… 8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 卷

부 인 婦人 ………… 85 귀 녀 貴女 …………… 87

귀 부 貴婦 ………… 85 여 자 女子 …………… 87

비 첩 婢妾 ………… 86 부 負 …………… 87

천 사 賤使 ………… 86 대 戴 …………… 8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一 卷

조 례 早隷 ………… 88 정 리 丁吏 …………… 89

이 직 吏職 ………… 88 방 자 房子 …………… 89

산 원 散員 ………… 88 소 친 시 小親侍 …………… 89

인 리 人吏 ………… 89 구 사 驅使 …………… 9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二 卷

잡 속1 雜俗一 ……… 91 치 사 治事 …………… 92

정 료 庭燎 ………… 92 답 례 答禮 …………… 93

병 촉 秉燭 ………… 92 급 사 給使 …………… 93

설 호 挈壺 ………… 92 여 기 女騎 …………… 93

향 음 鄕飮 ………… 9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三 卷

잡 속2 雜俗二 ……… 95 각 기 刻記 …………… 96

한 탁 澣濯 ………… 95 도 재 屠宰 …………… 96

종 예 種蓺 ………… 95 시 수 施水 …………… 96

어 漁 ………… 95 토 산 土産 …………… 97

초 樵 ………… 9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四 卷

절 장 節仗 ………… 99 첫째 신기대 神旗隊 ……… 99

다음 기병 騎兵 ………… 100 다음 조여 詔輿 …………… 101

다음 요고 鐃鼓 ………… 100 다음 충대하절充代下節 …… 101

다음 천우위 千牛衛 …… 100 다음 선무하절 宣武下節 …… 102

다음 금오위 金吾衛 …… 100 다음 사부 使副 …………… 102

다음 백희 百戱 ………… 101 다음 상절 上節 …………… 103

다음 악부 樂部 ………… 101 끝 중절 中節 …………… 104

다음 예물 禮物 ………… 10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五 卷

수 조 受詔 ………… 105 기 거 起居 …………… 106

영 조 迎詔 ………… 105 제 전 祭奠 …………… 107

도 조 道詔 ………… 106 조 위 弔慰 …………… 107

배 조 拜詔 ………… 10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六 卷

연 례 燕禮 ………… 109 하 절 석 下節席 …………… 111

사 적 私覿 ………… 109 관 회 館會 …………… 111

연 의 燕儀 ………… 110 배 표 拜表 …………… 112

헌 수 獻酬 ………… 110 문 전 門餞 …………… 112

상 절 석 上節席 ………… 110 서교송행 西郊送行 …………… 112

중 절 석 中節席 ………… 11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七 卷

관 사 館舍 ………… 113 정사와부사의 자리 使副位 … 115

순 천 관 順天館 ………… 113 도할․제할위 都轄提轄位 … 115

관 청 館廳 ………… 115 서장관위 書狀官位 …… 115

조 위 詔位 ………… 115 서 교 정 西郊亭 …………… 116

청 풍 각 淸風閣 ………… 115 벽 란 정 碧瀾亭 …………… 116

향 림 정 香林亭 ………… 116 객 관 客館 …………… 11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八 卷

공 장1 供張一 ……… 117 힐 막 纈幕 …………… 117

수 막 繡幕 ……… 117 단 칠 조 丹漆俎 …………… 118

수 도 繡圖 ………… 118 흑 칠 조 黑漆俎 …………… 118

좌 탑 坐榻 ………… 118 와 탑 臥榻 …………… 119

연 대 燕臺 ………… 118 문 석 文席 …………… 119

광 명 대 光明臺 ………… 118 문 유 門帷 …………… 11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二十九 卷

공 장2 供張二 ……… 120 화 탑 선 畵榻扇 …………… 120

수 침 繡枕 ……… 120 삼 선 杉扇 ……………… 120

침 의 寢衣 ………… 120 백 접 선 白摺扇 …………… 120

저 상 紵裳 ………… 120 송 선 松扇 …………… 121

저 의 紵衣 ………… 120 초 구 草屨 …………… 12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 卷

기 명1 器皿一 ……… 122 주 합 酒榼 …………… 123

수 로 獸爐 ……… 122 오 화 세 烏花洗 …………… 123

수 병 水甁 ………… 122 면 약 호 面藥壺 …………… 123

반 잔 盤琖 ………… 122 부 용 준 芙蓉尊 …………… 123

박 산 로 博山爐 ………… 123 제 병 提甁 …………… 124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1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一 卷

기 명2 器皿二 ……… 125 탕 호 湯壺 …………… 126

유 앙 油盎 ……… 125 백 동 세 白銅洗……………… 126

정 병 淨甁 ………… 125 정 로 鼎爐 …………… 126

화 호 花壺 ………… 125 온 로 溫爐 …………… 126

수 부 水釜 ………… 125 거 종 巨鐘 …………… 126

수 앵 水甖 ………… 12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2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二 卷

기 명3 器皿三 ……… 127 등 준 藤尊 …………… 128

다 조 茶俎 ……… 127 도 준 陶尊 ……………… 128

와 준 瓦尊 ………… 127 도 로 陶爐 …………… 128

식 조 食罩 ………… 128 수 옹 水瓮 …………… 129

등 비 藤篚 ………… 128 초 섬 草笘 …………… 129

죽 부 鬻釜 ………… 129 도 필 刀筆 …………… 129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3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三 卷

주 즙 舟楫 ………… 130 막 선 幕船 …………… 131

순 선 巡船 ………… 130 궤 식 饋食 ……………… 131

관 선 官船 ………… 130 공 수 供水 …………… 131

송 방 松舫 ………… 131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4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四 卷

해 도1 海道一 ……… 132 해 려 초 海驢焦 …………… 138

신 주 神舟 ……… 133 봉 래 산 蓬萊山 …………… 138

객 주 客舟 ………… 134 반 양 초 半洋焦 …………… 139

초 보 산 招寶山 ……… 135 백 수 양 白水洋 …………… 139

호 두 산 虎頭山 ………… 136 황 수 양 黃水洋 …………… 139

심 가 문 沈家門 ……… 137 흑 수 양 黑水洋 …………… 140

매 잠 梅岑 ………… 137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5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五 卷

해 도2 海道二 ……… 141 흑 산 黑山 …………… 142

협 계 산 夾界山 ……… 141 월 서 月嶼 ……………… 142

오 서 五嶼 ………… 141 난 산 도 闌山島 …………… 142

배 도 排圖 ……… 141 백 의 도 白衣島……………… 142

백 산 白山 ………… 141 궤 섬 跪笘 …………… 142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6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六 卷

해 도3 海道三 ……… 143 죽 도 竹島 …………… 143

춘 초 섬 春草笘 ……… 143 고 섬 섬 苦笘笘 …………… 143

빈 랑 초 檳榔焦 ………… 143 군 산 도 郡山島 …………… 144

보 살 섬 菩薩笘 ……… 143 횡 서 橫嶼 ……………… 14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7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七 卷

해 도4 海道四 ……… 146 아 자 섬 鵝子笘 …………… 146

자 운 섬 紫雲笘 ……… 146 마 도 馬島 …………… 146

부 용 산 副用山 ……… 146 구 두 산 九頭山 …………… 147

홍 주 산 洪州山 ……… 146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8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八 卷

해 도5 海道五 ……… 148 화 상 도 和尙島 …………… 148

당 인 도 唐人島 ……… 148 우 심 서 牛心嶼 …………… 148

쌍 녀 초 雙女焦 ……… 148 섭 공 서 聶公嶼 …………… 148

대 청 서 大靑嶼 ……… 148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9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三十九 卷

해 도6 海道六 ……… 150 합 굴 蛤窟 …………… 150

소 청 서 小靑嶼 ……… 150 분 수 령 分水嶺 …………… 150

자 연 도 紫燕島 ……… 150 예 성 항 禮成港 …………… 151

급 수 문 急水門 ……… 150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0 권 宣和奉使高麗圖經 第 四十 卷

동 문 同文 ……… 153 악 률 樂律 …………… 157

정 삭 正朔 ……… 153 권 량 權量 …………… 159

유 학 儒學 ……… 155

행 장 行將 ……………………………… 장 효 백(張孝伯) … 162

발 跋 …………………………………… 서 천(徐 蕆) … 170


선화봉사고려도경 서 宣和奉使高麗圖經序


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撰。
聞天子元正。大朝會畢。列四海圖籍于庭。而王公侯伯萬國輻湊。此皆有以揆之。故有司所藏。嚴毖特甚。而使者之職。尤以是爲急。在昔成周。職方氏掌天下之圖。以掌天下之地。辨其邦國都鄙,四夷,八蠻,七鬪,九貉,五戎,六狄之人民。周知其利害。而行人之官。駱驛道路。若賀慶槁襘之類。凡五物之故。莫不有治。若康樂厄貧之類。凡五物之辨。莫不有書。用以復命于王。俾得以周知天下之故。外史書之。以爲四方之志。司徒集之。以爲土地之圖。誦訓道之。以詔觀事。土訓道之。以詔地事。此所以一人之尊。深居高拱於九重。而察四方萬里之遠。如指諸掌。當沛公初入關。蕭何獨收秦圖書。及天下已定。而漢盡得知其阸塞戶口者。繄何之功。隋長孫晟之至突厥。每游獵。輒記其國土委曲。歸表聞於文帝。口陳形埶。手畫山川。卒以展異日之效。然則乘輶軒而使邦國者。其於圖籍。固所先務。矧惟高麗。在遼東。非若侯甸近服。可以朝下令而夕來上。故圖籍之作。尤爲難也。皇帝天德地業。畢朝萬國。乃眷高麗。被遇神考。益加懷徠。遴擇在廷。將命撫賜。恩隆禮厚。前未之有。時給事中臣允迪。以通經之才。超世之文。取甲科著宿望。中書舍人臣墨卿。學問高明。見於踐履。恪守忠孝。臨事不回。竝命而行。非獨其執節專對。不減古人之膚使。而風采聞望。自足以壯朝廷之威靈。聳外夷之觀聽。拜命未行。會聞王俁薨。遂以奠慰之禮兼往。臣愚猥承人乏。獲聯使屬之末。事之大者。固從其長。而區區得以專達者。又不足以補報朝廷器使之萬一。退而自訟曰。周爰咨詢。歌於皇華之詩。則徧問以事。正使者之職。謹因耳目所及。博采衆說。簡去其同於中國者。而取其異焉。凡三百餘條。釐爲四十卷。物圖其形。事爲之說。名曰宣和奉使高麗圖經。臣嘗觀崇寧中王雲所撰雞林志。始疏其說。而未圖其形。比者使行。取以稽考。爲補已多。今臣所著圖經。手披目覽。而遐陬異域。擧萃於前。蓋倣古聚米之遺制也。雖然。昔漢張騫出使月氏。十有三年而後歸。僅能言其所歷之國地形物產而已。臣愚雖才不逮前人。然在高麗纔及月餘。授館之後。則守以兵衛。凡出館。不過五六。而驅馳車馬之間。獻詶尊俎之上。耳目所及。非若十三歲之久。亦粗能得其建國立政之體。風俗事物之宜。使不逃乎繪畫紀次之列。非敢矜博洽。飾浮剽。以塵冕旒之聽。蓋摭其事實。以復于朝。庶少逭將命之責也。有詔上之御府。謹掇其大槩。爲之序云。宣和六年八月日。奉議郞,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賜緋魚袋臣徐兢。謹序。

 

천자가 정월 초하루에 큰 조회(朝會)를 갖는데, 뜰에다 사해(四海)의 도적(圖籍)을 다 늘어놓아 왕․공․후․백(王公侯伯)이 만국에서 모여들어도 그들을 다 헤아려 알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사(有司 도적을 관장하는 채임을 맡은 관원)가 그것들을 수장함이 특히 엄격하고 신중하며, 사신의 직책 중에서도 더욱이 이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옛날 주(周) 나라의 직방씨1)(職方氏)는 천하의 그림2)을 맡아 가지고 천하의 땅을 장리(掌理)하여 그 나라의 도비(都鄙 도회지의 변두리)와 사이(四夷)․팔만(八蠻)․칠민(七민)․구맥(九貊)․오융(五戎)․육적3)(六狄)의 인민을 분간하고 그 이해(利害)를 두루 알았던 것으로, 행인4)(行人)의 관권들이 도로에 연달아 있었다. 경축과 군대의 위문, 재앙의 불제(불除) 같은 따위의 행사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일5)치고 처리되지 않는 것이 없었으며, 안락과 재액․빈곤 같은 따위의 경우에는 무릇 다섯 가지 종류의 분간치고 참고할 책이 없는 것이 없어, 그것들을 가지고 왕에게 복명하여 천하의 일을 두루 알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외사6)(外史)는 그 일들을 써서 사방의 지(志 관계기록)를 만들었고, 사도7)(司徒)는 그것들을 모아 토지의 그림을 만들고 송훈8)(誦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살필 일을 일러 주고 토훈9)(土訓)은 그것들을 설명해서 토지의 일을 일러 주었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의 존귀함으로 구중궁궐에 깊숙이 있어 높이 팔짱끼고 지내면서도 사방 만리의 먼 곳을 손바닥 가리키듯이 환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패공(沛公 후의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처은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갔을 떄 소하10)(蕭何)는 혼자서 진(秦) 나라의 도서(圖書)를 거둬들였는데, 천하가 평정되기에 이르러 한(漢)에서 그 요해지와 호구를 남김없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소 하의 공로였다. 수(隋) 나라의 장손 성11)(長孫晟)이 돌궐(突厥)에 가서는 사냥 나갈 때마다 그 국토의 상세한 상황을 기록하곤 하였고, 돌아와 문제11)(文帝)에게 표문(表文)을 올리고서는 입으로는 그 형세를 말하고 손으로는 그 산천을 그리곤 하다가 마침내 그 일로 후일의 보람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니 유헌(輶軒 천자의 사자가 타는 수레)을 타고 다른 나라에 사신가는 자로서는 도적(圖籍)<의 수집 제작>이란 본래 먼저 힘써야 할 일이다. 하물며 고려는 요동(遼東)에 있어서, 아침에 명령을 내리면 저녁에 와서 바칠 수 있는 후전근복(候甸近服 가까이 있는 복속 지역) 같지 않기 때문에 도적의 작성은 더욱 어렵다. 황제는 천지와 같은 덕업(德業)으로 만국을 다 내조(來朝)하게하여 고려가 예우를 받도록 돌보았거니와, 신령하신 선왕12)께서는 더욱 따르게 만드시어 인재를 뽑아13) 조정에 있게하여 위무(慰撫)와 하사(下賜)의 어명을 받들게 하시었으니, 은혜의 융숭함과 예의 후함이 전례가 없었다.

이제 급사중(給事中) 신 윤적14)(允迪)은 경전에 통달한 재주와 세상에 뛰어난 문장으로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오랜 명망이 드러나 있고 중서사인(中書舍人) 신 묵경15)(墨卿)은 학문의 훌륭함이 행실에 나타나 충효를 근엄하게 지키고 일에 임해서 마음이 변하지 않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사명을 받들고 가게 되었으니, 이들은 비단 부절(符節)을 가지고 전대(專對 타국에 사신가서 제대로 전달 하는 것)하는 것이 옛날의 선량한 사신에 못지않을 뿐더러, 풍채와 명망도 조정의 위엄을 드높이고 외국인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임명을 받고서 아직 떠나기 전에 마침 왕 우16)(王俁)가 훙거하였음을 알게 되어 드디어 전제(典祭) 조위(弔慰)하는 예를 겸임하고 갔다.

나는 우매한데도 외람되이 결원에 충당되어 사신의 속관 말석에 끼게 되었다. 큰 일이야 물론 그 장(長)의 결정에 따라야 하겠지만, 단독으로 처리 할 수 있는 소소한 것은 또 조정에서 자격에 따라 시킨 일의 만분의 일도 보답하기에 부족하다. 물러나 스스로 생각하기를, ‘성실하게 찾아서 묻고 의논하라’고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에 노래되었으니17), 일을 두루 묻는 것은 정사(正使)된 사람의 직책일 것이다. 그래서 삼가 이목이 미치는 데 따라 널리 여러 설을 채택하여, 중국과 같은 것은 뽑아 버리고 중국과 다른 것들을 취하니 도합 3백여 조가 되었다. 이를 정리하여 40권으로 만들었는데, 물건은 그 형상을 그리고 일은 설명을 달아 「선화봉사고려도경」이라 명명하였다.

신이 숭녕(崇寧 송 휘종(宋徽宗)의 연호. 1102∼1106)연간에 왕 운18)(王雲)이 찬술한 「계림지」(鷄林志)를 본 적이 있느데, 처음에는 그 설19)(說)을 해설하였으나 그 형상은 그렇지 않았다. 근자에 사신 행차 때 그것을 가져다 참고하였는데 도움이 이미 많았다. 이제 신이 저술한 「도경」은 손으로 펼치고 눈으로 보고 하면 먼 이역땅이 다 앞에 모이게 되는데, 이는 옛날 쌀을 모아 지세의 모형을 만들던 유제20)(遺制)이다. 그렇기는 하나 옛날 한 대(漢代)의 장 건21)(張騫)이 월지(月지)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경우 월여를 머물렀을 뿐이요, 숙소가 정해진 귀에는 파수병이 지켜 문밖을 나가 본 것이 5~6 차례에 불과 하였다. 따라서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에 이목이 미쳐 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 건국(建國)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대충 터득할 수 잇어서, 그것들을 그림과 기록에서 빠지지 않게 하였다. 감히 박식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실들을 모아서 조정에 복명하여 명령받은 책임을 나소나마 면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어부(御府)에 바치라는 조명(詔命)이 있어 삼가 그 대강의 경위를 추려서 서문을 지었다.

 

선화 6년8월 6일

봉의랑(奉議郞) 충봉사고려국신소제할인선예물(充奉使高麗國信所提轄人船禮物) 사비어대22)(賜緋魚袋) 신(臣) 서 긍 근서(謹序)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 권


건 국 建國

 

臣聞夷狄君長。類以詐力自尊。殊名詭號。單于可汗。無足稱者。獨高麗自箕子之封。以德取侯。後世稍衰。他姓亦用漢爵。代居其位。上有常尊。下有等衰。故襲國傳世。頗可紀錄。今謹稽諸史。敍其歷代之王。作建國記云。


이적(夷狄)의 군장(君長) 등은 거개 속임수와 폭력으로 스스로를 높이되, 이름이나 호(號)를 별나고 괴상하게 하여 ‘선우’(單于)니 ‘가한’(可汗)이니 하나, 족히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오직 고려(高麗 우리나라의 범칭)는 기자(箕子)가 봉(封)해졌을 때부터 덕(德)으로 후(侯)가 되었는데 후대에 점점 쇠약했으며 타성(他姓 기자 이후의 여러 왕조를 뜻한다) 역시 한(漢)나라 작(爵)을 써서 갈음하여 그 자리를 차지아었으니, 위로는 떳떳한 높임이 있고 아래로는 차등이 있다. 그러모로 나라를 이어받고 재를 전하여 감에 있어 자못 기록할 만한 것이 있다.

이제 모든 사적을 고찰하고 그 억대의 왕을 서차(序次)하여 이 건국기(建國記)를 짓는다.

 

시 봉 始封


高麗之先。蓋周武王。封箕子胥餘於朝鮮。寔子姓也。歷周,秦。至漢高祖十二年。燕人衛滿亡命。聚黨椎結。服役蠻夷。浸有朝鮮之地而王之。自子姓有國八百餘年而爲衛氏。衛氏有國八十餘年。先是。夫餘王得河神之女。爲日所照。感孕而卵生。旣長善射。俗稱善射爲朱蒙。因以名之。夫餘人以其生異。謂之不祥。請除之。朱蒙懼逃焉。遇大水無梁。勢不能渡。因持弓擊水而呪之。魚鱉竝浮。因乘以濟。至紇升骨城而居。自號曰高句驪。因以高爲氏。而以高麗爲國。凡有五部。曰消奴部。曰絶奴部。曰順奴部。曰灌奴部。曰桂婁部。漢武帝滅朝鮮。以高麗爲縣。屬元菟郡。其君長賜之鼓吹伎人。常從郡受朝服衣幘。縣令主其名籍。後稍驕。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歲時受之。因名幘溝漊。溝漊者。高麗名城也。於是始稱王焉。王莽發其兵。以誅匈奴不至。降王爲侯。而麗人益寇邊。光武中興。罷遣邊吏。建武八年。遣使來朝。因復王號。列爲外藩。安帝以後。部衆滋熾。雖少鈔暴。旋卽賓服。初消奴爲王。旣衰。而桂婁伐之。至王宮。生而開目能視。國人惡之。及長壯勇。和帝時。頻掠遼東。傳至王伯固。伯固死。有二子。長曰拔奇者。不肖。次曰伊夷模。國人立焉。漢末。公孫康擊破伊夷模於其國九都山下。國人共立其子位宮。位宮亦有勇力。好鞍馬。以其祖宮。生而能視。今王亦然。句驪謂相似爲位。故名曰位宮。魏將毌丘儉屠之。追至肅 今上御名。刻石紀功而還。位宮五世孫劉。晉永嘉中。與遼西鮮卑慕容廆隣。廆不能制。康帝建元初。廆子皝帥師伐之。大敗。後爲百濟所滅。其後。慕容寶以其王高安爲平州牧。安孫璉。義煕中。遣長史孫翼。獻赭白馬。以爲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璉七世孫元。隋文帝時。率靺鞨寇遼東。唐太宗時。其東部大人蓋蘇文。賊虐不道。帝親征之。威震遼海。高宗又命李勣往平之。俘其王高藏。裂地而爲郡縣。建安東都護府於平壤城。以兵鎭守。後武后遣將。擊殺其王乞昆羽。而立其王乞仲象。亦病死。仲象子祚榮立。因有其衆四十萬。據于挹婁。臣于唐。中宗時。乃置忽汗州。以祚榮爲都督渤海郡王。其後。遂號渤海。初藏之俘也。其酋長有劍牟岑者。立藏外孫舜爲王。又命高偘討平之。都護府旣屢遷。舊城頗入新羅。遺民散奔突厥,靺鞨。高氏旣絶。久而稍復。至唐末。遂王其國。後唐同光元年。遣使來朝。國王姓氏。史失不載。長興二年。王建權知國事。遣使入貢。遂受爵以有國云。
 

고려의 선조는 대개 주 무왕(周武王)이 조선(朝鮮)에 봉한 기자(箕子)서여 (胥餘 기자의 이름)이니, 성은 자(子)이다. 주(周)․진(秦)을 지나 한 고조(漢高祖) 12년(箕準(기준) 26, B.C.195)에 이르러 연(燕) 나라 사람 위 만(衛滿)이 망명(亡命)할 때에 당(黨)을 모아 추결(椎結 상투를 가리킨다)하고 와서 오랑캐를 복속시켜 차차 조선 땅을 차지하고 왕 노릇을 하였다. 자성(子姓)이 나라를 차지한 지 8백여 년 만에 위씨(衛氏)의 나라가 되었고 위씨가 나라를 차지함이 80여 년이었다.

이에 앞서, 부여(夫餘)의 왕이 하신(河神)의 딸을 얻었는데 햇빛에 비추임을 받아 감응되어 임신하였으며 알(卵)로 낳았다. 자라서 활을 잘 쏘았는데, 세속에서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 하므로,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었다. 부여 사람들이 그위 출생이 이상했던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제거할 것을 청하였다. 주몽이 두려워서 도망하다가 큰 물을 만났는데 다리가 없어 건너지 못하게 되매 활을 가지고 물을 치면서 주문(呪文)을 외니, 물고기와 자라가 모두 떠올랐다. 그리하여 타고 건너가 흘승골성(紇升骨城 만주 흔강(흔江) 유역의 환인(桓仁)지방으로 비정(批定)된다.)에 이르러 살면서 그 곳을 스스로 ‘고구려’(高句麗)라고 부르고, 따라서 ‘고’(高)로 성씨를 삼고 나라를 고려(高麗)라 하였다.

모두 5 부족(部族)이 있었는데, 소노부(消奴部)․절노부(絶奴部)․순노부(順奴部)․관노부(灌奴部)․계루부(桂婁部)가 이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縣)으로 삼아 현도군(縣도郡)에 소속시키고, 그 군장(君長)에게 고취(鼓吹)와 기인(伎人)을 내려주었다. 고려는 늘 현도군에 가서 조복(朝服)․의복․책(幘 머리에 쓰는 건의 하나)을 받아왔고, 현령(縣令)이 명적(名籍 장부)을 맡아 보았다.

뒤에는 점점 교만하여져 다시 군(郡)에 나아가지 아니하니, 군에서 동쪽경계에 자그마한 성을 쌓고 세시(歲時)에 받아가게 하였다. 따라서 그 성을 ‘책구루’(幘溝漊)라고 이름하였는데, 고려 말로 성을 ‘구루’라 한다. 그리고 이 때에 와서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왕 망(王莽)이 고려 군사를 출동시켜 흉노(匈奴)를 치려고 했으나 가지 아니하매 왕을 낮추어 후(侯)로 삼으니, 이 때문에 고려 사람들이 더욱 그의 국경을 침범했다.

광무(光武 동한(東漢)의 시조 유수(劉秀))가 중흥하여 변방에 관원 보내는 것을 폐지하매, 건무(建武 광무의 연호) 8년(32)에 사신을 보내어 조회(朝會)하러 갔다. 따라서 왕호(王號)를 복구시켜 주고 외번(外藩)의 반열(班列)에 끼위 주었다.

안제(安帝 후한 제6대 임금) 이후에는 5부(部)의 민중이 번성하여 비록 다소 초포(鈔暴)함이 있었으나, 곧 되돌아서 빈복(賓服)하였다.

처음에는 소노부(消奴部) 출신이 왕이 되었었는데 쇠약하여지매, 계루부(桂婁部)가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그리하여 왕 궁(宮)에까지 이르렀는데, 궁(宮)은 태어나서 바로 눈을 뜨고 능히 봤으므로 나라 삶들이 미워했다. 궁은 장성하여 매우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화제(和帝 동한 제5대 임금) 때에 자주 요동(遼東)을 침략했다. 그리하여 백고(伯固)왕까지 전하여 갔고 백고가 죽자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인 발기(拔奇)는 불초(不肖)했기 때문에 동생인 이이모(伊夷模)를 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웠다.

한(漢) 나라 말기에 공손 강(公孫康 요동태수 공소 도(公孫道)의 아들)이 이이모를 그 나라 환도산(丸都山) 아래에서 격파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아들 위궁(位宮)을 세웠는데, 위궁 또한 용력(勇力)이 잇어 말타기를 좋아했다. 그의 선조(先祖) 궁(宮)이 출생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보았는데, 지금 왕도 역시 그러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은 것을 일러 ‘위’(位)라고 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한 것이다. 뒤에 위(魏) 나라 장수 관구검23)(毌丘儉)이 쳐들어와 무찌르고 숙신(肅愼 여진․말갈족의 전신)에까지 추격해 가서 공로를 돌에 새겨 기록하고 돌아갔다.

위궁의 5대손 유(劉)가 진(晉) 나라 영가(永嘉 회제(懷帝)의 연호 307~321) 연간에 요서(遼西)의 선비족(鮮卑族)인 모용 외(慕容廆 전연(前燕)의 무선제(武宣帝))와 이웃하였었는데, 모용 외도 억제하지 못하였다. 강제(康帝) 건원(建元) 초에 모용 외의 아들 모용황(慕容煌)이 군사를 거느리고 쳐들어가 크게 격파시켰는데, 뒤에 백제에게 멸망되었다.

그 뒤에 모용 보(慕容寶)가 고구려 왕 고 안(高安)으로 평주목(平州牧)을 삼았다. 안의 손자 연(璉)이 의회(義熙 동진(東晉) 안제(安帝)의 연호. 405~418) 연간에 장사(長史) 손익(孫翼)을 보내어 자백마(赭白馬)을 바치니, 영주목 고려왕 낙랑군공(榮州牧高麗王樂浪郡公)을 삼았다.

연(璉)의 7대손 원(元)이, 수 문제(隨文帝) 때에 말갈(靺鞨)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을 침범했고, 당 태종(唐太宗) 때에는 동부(東部 순노부(順奴部)) 대인(大人) 개소문(蓋蘇文)이 잔학하고 무도하므로, 태종이 친히 정벌하여 위엄이 요동에 떨쳤다.

고종(高宗 당 나라 제3대 임금)이 또한 이 적24)(李勣)을 명하여 가서 평정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왕 고 장(高藏)을 사로잡고 그 땅을 갈라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며, 안동 도호부(安東都護府)를 평양성(平壤城)에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지켰다.

뒤에 무후(武后)가 장수를 보내어 그 왕 걸곤우(乞昆羽)를 죽이고 걸중상(乞仲象)을 왕으로 세웠으나 또한 병으로 죽으매, 중상의 아들 조영(祚榮 대조영(大祚榮))이 즉위하였고 따라서 그민중 40만을 차지하여 읍루25)(挹婁)에 웅거하여 당 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중종(中宗 당 나라 제4대 임금)때에 와서 홀한주(忽汗州)를 설치하고 종영으로 도독 발해군왕(都督渤海郡王)을 삼으니, 그 뒤부터 드디어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다.

처음에 고 장(高藏)이 사로잡혔을 적에, 그 추장(酋長)에 검모잠26)(劍牟岑)이라는 자가 있어 고 장의 외손자 순(舜)을 왕으로 세우니, 또 고 간(高간)을 시켜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도호부(都護府)가 이미 누차 옮겨져 옛성이 신라(新羅)로 들어간 것이 많게 되매, 유민들이 돌궐(突厥)・말갈(靺鞨)에 분산되었다.

고씨(高氏)가 이미 멸망되었으나 오랜 뒤에는 점차 회복되어, 당 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드디어 그 나라에서 왕 노릇 하였고 후당(後唐) 동광(同光 장종(莊宗)의 연호) 원년(923)에는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었는데, 국왕(國王)의 성씨(姓氏)를 사관이 빠뜨리고 기재하지 않았다.

장흥(長興 후당 명종의 연호) 2년(931)에 왕 건(王建)이 나라 일을 권지(權知)하여 사신을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드디어 작위(爵位)을 받아 나라를 차지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 권

 

세 차 世次


臣聞史家之法。傳遠者略。而近者詳。高麗歷世之王。臣旣已槩敍之于前矣。若乃王氏建國累世。尊事本朝。至王俁與今王楷。又享禮加厚。不可不條著之。謹因其世次宗系。而嗣以楷之行事云。

 

사가(史家)의 방법이, 시대가 먼 것을 전하기는 간략하게 하고 가까운 것은 상세하게 한다고 한다. 고려(高麗)의 역대 임금은 이미 앞에 대략 서술하였거니와, 지금 왕씨(王氏)가 나라를 세워 여러 세대 동안 본조(本朝송나라말한다 )를 존대하여 섬겼고 왕 우(王우)와 지금 왕 해(楷)에 이르러서는 또한 대접하는 예(亨禮)를 더 후하게 하였으니, 조목조목 드러내지 않을 수 없기에, 그 세차(世次)와 종계(宗系)를 적은 다음에 이어서 해(楷)의 행적을 기록한다,

왕 씨 王氏


王氏之先。蓋高麗大族也。當高氏政衰。國人以建賢。遂共立爲君長。後唐長興三年。遂自稱權知國事。請命于明宗。乃拜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封高麗王。晉開運二年。建卒。子武立。漢乾祐末。武卒。子昭立。至皇朝建隆三年。太祖皇帝御極。奄有萬國。昭遣使來朝。賜以功臣之號。仍加食邑。開寶九年。昭卒。子伷立。遣使請命。封高麗國王。太宗皇帝卽位。改封大順軍使。太平興國七年。伷卒。弟治上章乞襲封。詔從之。淳化六年。契丹攻之。治畏懦無守。臣事北虜。遂闕朝貢。治卒。弟誦立。咸平三年。其臣朱仁紹入朝。具言國人思慕皇化。逼於强虜。未能如願。朝廷嘉之。賜詔褒諭。大中祥符七年。誦卒。弟詢權知國事。大破契丹。復謹修貢。且乞降尊號。班正朔。又求封冊。眞宗皇帝。初欲俯從。議者難之。遂寑止。從班詔而已。天聖中。使人屢與女眞。偕來貢方物。天子加恩。報禮優異。後詢卒。子隆立。優柔不斷。政荒力屈。憚於北虜。遂復臣事之。而貢使又絶。隆卒。私諡曰正。子德王欽。欽弟穆王亨。皆朝貢不通。而朝廷亦罷遣使。亨弟徽。煕寧四年。以權知國事。復修方貢。七年九年。使人荐至。神宗皇帝。嘉其忠藎。元豐元年。命左諫議大夫安燾。爲國信使。起居舍人陳睦副之。自明州定海。絶洋而往。時。徽病風痺。僅能拜命。且乞醫藥。上覽其奏從之。三年四年。連使來朝。六年。徽卒。立凡三十八年。諡曰文。世子勳立。百日卒。弟國原公運立。命左諫議大夫楊景略。爲祭奠使。禮賓使王舜封副之。右諫議大夫錢勰。爲弔慰使。西上閣門副使朱球副之。七年七月。自密之板橋。航海而往。八年。哲宗皇帝踐祚。使來奉慰。又遣使來賀。運立四年卒。諡曰宣。子堯立。未閱歲而以病廢。國人乃請其叔煕攝政。未幾而堯卒。諡曰懷。煕乃襲位。自元祐五年至元符元年。貢使再至。三年。遣使綏撫。遵元豐故事也。皇帝嗣位。遹追來孝。丕承先烈。薄海內外。無不臣妾。德被藩服。恩行海隅。迺者崇寧元年。命戶部侍郞劉逵,給事中吳栻。持節往使。禮物豐腆。恩綸昭回。所以加惠麗國。而褒寵鎭撫之。以繼神考之志。益大而隆。二年五月。由明州道梅岑。絶洋而往。時。煕避契丹嫌名。改煕曰顒。然自神考有作。務來遠人。天相睿謨。王徽襲爵。以承其旨。殆非偶然。徽忠順循理。知尊中國。館待使華。禮意勤厚。至遇賈人。亦有體貌。治尙仁恕。享國久長宜矣。崇寧二年。顒卒。年五十。世子俁立。自長興三年壬辰迨今宣和六年甲辰。王氏有國九世。凡十七人。合一百九十三年云。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려의 큰 씨족이다. 고씨(高氏)의 정사가 쇠퇴하게 되매,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군장(君長)으로 세웠다. 후당(後唐) 장흥(長興) 3년에 마침내 스스로 권지 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명종(明宗)에게 봉작(封爵)하여 주기를 청하니, 곧 왕건에게 원도주 도독(元도州都督)을 제수(除授)하고 대의군사(大義軍使)에 충임(充任)하여 고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진(晉)나라 개운(開運)2년에 왕건이 죽고 아들 무(武)가 즉위하였으며, 한(漢) 나라 건우(乾우) 말년에 무가 죽고 아들 소(昭)가 즉위하였다.

황조(皇朝) 건륭(建隆) 3년에 태조 황제(太祖皇帝)가 등극(登極)하여 만국(萬國)을 다 차지하매 소(昭)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러 왔으므로, 공신(功臣)의 호(號)를 내리고 이어 식읍(食邑)27)을 주었다.

개보(開寶) 9년에 소가 죽고 아들 주(주)가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봉작(封爵)을 청하므로 고려 국왕으로 봉하였고, 태종 황제(太宗 皇帝)가 즉위하여 대순군사(大順軍使)로 고쳐 봉하였다.

태평흥국(太平興國) 7년에 주가 죽으매, 아우 치(治)가 글을 올려 계승하여 봉작 받기를 원하므로 조칙(詔勅)을 내려 허락하였다. 순화(淳化) 6년에 글안(契丹)이 공격하자 치가 나약하여 지키지 못하고 북로(北虜)를 신하로 섬기면서 드디어 조공(朝貢)을 하지 않았다.

치가 죽고 아우 송(誦)이 즉위하였다. 함평(咸平) 3년에 그의 신하 주 인소(朱仁紹)가 조회하러 들어와 말하기를 ‘나라 사람들이 황제의 덕화(德化)를 사모하나, 강한 오랑캐에게 핍박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므로, 조정에서 아름답게 여겨 조서(詔書)를 내려 포상하고 효유(曉諭)하였다.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에 송이 죽고 아우 순(순)이 나라일을 권지(權知)하여 글안을 크게 깨뜨리고 다시 조공(朝貢)을 바쳤으며, 존호(尊號)를 내릴 것과 정삭(正朔)의 반사(頒賜)를 바랐고, 또한 봉책(封冊)을 청하였다. 진종 황제(眞宗皇帝)는 처음에 그대로 따르려고 하다가 의논하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므로 드디어 중지하고, 따라서 조서만 내렸다.

천성(天聖) 연간에 사신이 여려 번 여진(女眞)과 함께 와서 방물(方物)을 조공하므로, 천자가 은혜를 내려 보답하는 예(禮)를 특별히 두텁게 하였다.

순이 죽고 아들 융(隆)이 즉위했는데, 유약하고 결단성이 없어서 정사가 어지러워지고 힘이 모자라 북로(北虜)를 꺼리다가 드디어 다시 신하로 그들을 섬겼다. 그리하여 조공하는 사신이 끊어졌다. 융이 죽으매, 정(正)이라고 사시(私諡)28)하였다.

아들 덕왕(德王) 흠(欽)과 흠의 아우 목왕(穆王) 형(亨)도 모두 조공하러 오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사신 보내는 것을 폐지했다.

형의 아우 휘(徽)가 희령(熙寧) 4년에 권지국사(權知國事)로서 다시 방물(方物)을 조공하였고 7년과 9년에 사신이 거듭 왔으므로 신종 황제(神宗皇帝)가 그 충성을 아름답게 여겨, 원풍(元豊) 원년(元年)에 좌 간의대부(左諫儀大夫) 안도(安燾)로 국신사(國信使)를 삼고 기거사인(起居舍人) 진목(陳睦)을 부사(副使)로 임명하여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바다를 건너갔었다.

이때 휘(徽)는 풍병(風病)으로 마비되어 겨우 명령을 받았고, 또한 의약(醫藥)을 청하므로 상께서는 그가 아뢴것을 보고 그대로 따랐다. 3년과 4년에도 계속 사신이 와서 조회했다. 6년에 휘가 죽으니, 왕위에 있은 지 무릇 38년이었고 시호를 ‘문(文)’이라고 했다.

세자(世子) 훈(勳)은 즉위한 지 백일 만에 죽고 아우 국원공(國原公) 운(運)이 즉위했는데, 이때에 좌 간의대부 양 경략(楊景略)을 제전사(祭奠使)로, 예빈사(禮賓使) 왕 순봉(王舜封)을 부사(副使)로 임명하고, 우 간의 대부(右諫議大夫) 전협(錢협)을 조위사(弔慰使)로, 서상합문 부사(西上閤門副使) 주구(朱球)를 부사로 임명하여, 7년 7월에 밀수(密水) 판교(板橋)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8년에 철종 황제(哲宗皇帝)가 즉위하매, 위문하는 사신과 하례하는 사신을 함께 보내왔다.

운(運)이 즉위한지 4년만에 죽으니, 시호를 ‘선(宣)’이라고 했다. 아들 요(堯)는 즉위한 지 1 년도 못되어 병으로 폐위(廢位)되매, 나라 사람들이 그의 숙부(叔父) 희(熙)에게 섭정(攝政)하기를 청했다. 얼마 되지 않아 요가 죽으니, 시호를 ‘회(懷)’라고 했다. ]

희가 곧 왕위를 승습하여, 원우(元우) 5년에서 원부(元符) 원년까지에 공사(貢使)가 두번이나 왔다. 그래서 3년에 무마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이것은 원풍(元豊)때의 고사에 따른 것이다.

황제(皇帝)가 왕위를 이어받아 선대를 추모하여 효성을 이루고 거룩하게 선조들의 업적을 계승하매, 사해(四海)의 안팎이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 덕이 번복(藩服)에 덮이고 은혜가 사해에 퍼졌다.

그리하여 숭녕(崇寧) 원년에 호부 시랑(戶部侍郞) 유규(劉逵)와 급사중(給事中) 오식(吳식)을 명하여 절(節)을 가지고 사신가도록 하되, 예물(禮物)을 풍성하게 하고 은륜(恩綸)이 분명하였다. 이는 고려에 은덕을 내리어 상주어 신임하고 무마함으로써 신고(神考)의 뜻을 더욱 거룩하고 훌륭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2년 5월에 명주도(明州道) 매잠(梅岑)에서 바다를 건너갔는데, 이때 희(熙)가 글안(글안) 왕의 이름을 혐명(嫌名)하여 희(熙)를 고쳐 옹(옹)이라고 했다. 그러나 신고(神考) 때부터 시작하여 힘써 먼 나라 사람들을 오도록 하매, 하늘이 슬기로운 계책을 도와 주어 고려 임금 휘(徽)가 봉작(封爵)을 승습하고 그 뜻을 이어 받드니, 참으로 우연한 일이 아니다.

휘는 충순(忠順)하여 사리를 따르며 중국을 높일 줄 알고, 사신을 대접하는 예와 뜻이 근간하고 후하였으며 장사치를 대접하는 데 있어서도 역시 체모가 있었고 정사는 인자와 용서를 숭상하니, 나라를 장구하게 누림이 당연하다. 숭녕(崇寧) 2년에 옹(옹)이 죽으니 나이 50세였고, 세자 오(우)가 즉위하였다.

장흥(長興) 3년 임진(任辰)으로부터 금상(今上) 선화(宣化) 6년 갑진(甲辰)까지 왕씨가 나라를 차지한지 9세(世)인데, 무릇 17인으로서 합하면 1백 93년이다.

 

세계 世系


건(建)?? 무(武)??? 소(昭)??? 주

?? 치(治)

?? 송(誦)

?? 순(詢) ?? 융(隆)??? 흠(欽)

?? 형(亨)

?? 휘(徽) ???? 훈(勳)

?? 운 (運) ???? 요(堯)

??? 옹 ???? 우 ???? 해(楷)

 

고려국왕 왕 해 高麗國王王楷


楷。王俁之世子也。壬寅春三月。俁病革。召李資謙入議嗣事。夏四月。俁薨。資謙等乃立楷爲王。楷眉宇疏秀。形短而貌豐。肉勝於骨。性慧多學。亦甚嚴明。在春宮時。官屬有過。必遭譴辱。旣立。雖幼沖。國官頗畏憚之。迺者信使至彼。受詔拜表。行燕饗禮。升降進退。綽有成人之風。亦當爲東夷之賢王也。

 

해(楷)는 왕 우(王우)의 세자이다. 임인 봄 3월에 우가 병이 위독하매 이 자겸(李資謙)을 불러들여 후사(後嗣) 일을 의논했었는데, 4월에 우가 죽자 이 자겸 등이 곧 해를 세워 왕을 삼았다.

해는 용모가 준수하고 몸집은 작으나 얼굴이 풍후하며 살이 뼈보다 많다. 성격이 지혜로와 배운 것이 많으며 또한 매우 엄명하며, 동궁(東宮)에 있을때 관속(官屬)들이 과오를 범하면 반드시 꾸짖음을 당했고 즉위하여서는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나라 관원들이 자못 두려워하고 꺼렸다.

이번에 신사(信使)가 가매, 그가 조서(詔書)와 표문(表文)을 받고 연향(燕饗)하는 예를 거행하는데, 올라가고 내려감과 나아가고 물러감이 여유가 있어 성인(成人)의 풍토가 있으니, 역시 동이(東夷)의 어진 왕이 됨직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 권


성 읍 城邑


臣聞四夷之君。類多依山谷就水草。隨時遷徙。以爲便適。固未嘗知有國邑之制。西域車師鄯善。僅能築墻垣作居城。史家卽指爲城郭諸國。蓋誌其異也。若高麗則不然。立宗廟社稷。治邑屋州閭。高堞周屛。模範中華。抑箕子舊封。而中華遺風餘習。尙有存者。朝廷間遣使。存撫其國。入其境。城郭巋然。實未易鄙夷之也。今盡得其建國之形勢而圖之云。

 

사이(四夷)의 군장(君長)들이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다니기를 편리하게 여겼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역(西域)의 거사(居師)․선선(선善) 등 나라가 겨우 담장을 쌓아 거성(居城)으로 만들 줄 알았으므로, 사가(史家)들이 그것을 가리켜 ‘성곽 제국(城郭諸國)’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고려 같은 나라는 그렇지 아니하여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세우고, 읍(邑)에는 가옥(家屋)을 만들고 주(州)에는 마을문을 세웠고, 높은 성첩(城堞)을 둘러 쌓아 중화(中華)를 모방하였으니,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封爵)받은 옛땅이라서 중화의 전해 오는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조정에서 간간히 사신을 보내어 그 나라를 무마하기 위하여 그들의 지경에 들어가면, 성곽들이 우뚝우뚝하여 실로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이제 그 나라를 세운 형세를 모두 파악하여 그림으로 그린다.


봉 경 封境


高麗。南隔遼海。西距遼水。北接契丹舊地。東距大金。又與日本,流求,聃편001羅,黑水毛人等國。犬牙相制。唯新羅,百濟。不能自固其圉。爲麗人所幷。今羅州,廣州道是也。其國在京師之東北。自燕山道。陸走渡遼。而東之其境。凡三千七百九十里。若海道則河北,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皆可往。今所建國。正與登萊濱棣相望。自元豐以後。每朝廷遣使。皆由明州定海。放洋絶海而北。舟行。皆乘夏至後南風。風便。不過五日。卽抵岸焉。舊封境。東西二千餘里。南北一千五百餘里。今旣幷新羅,百濟。東北稍廣。其西北與契丹接連。昔以大遼爲界。後爲所侵迫。乃築來遠城。以爲阻固。然亦恃鴨綠以爲險也。鴨綠之水。原出靺鞨。其色如鴨頭。故以名之。去遼東五百里。經國內城。又西與一水合。卽鹽難水也。二水合流。西南至安平城入海。高麗之中。此水最大。波瀾淸澈。所經津濟。皆艤巨艦。其國恃此以爲天塹。水闊三百步。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南四百八十里。自遼已東。卽舊屬契丹。今虜衆已亡。大金以其地不毛。不復城守。徒爲往來之道而已。鴨綠之西。又有白浪,黃嵒二水。自頗利城行數里。合流而南。是爲遼水。唐正觀間。李勣大破高麗於南蘇。旣渡。怪其水淺狹。問之。云是遼源。以此知前古未嘗恃此水以爲固。此高麗所以退保鴨綠之東歟。

 

고려는,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소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글안 땅과 연속되고 동쪽은 금(金) 나라와 맞닿았다. 또한 일본․유구․탐라․흑수(黑水)․모인(毛人) 등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오직 신라와 백제가 스스로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合倂)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이것이다.

그 나라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로부터 육로(陸路)로 가다가 요수(遼水)를 건너 동쪽으로 그 나라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천 7백 90리이다.

만약 바닷길로라면, 하북(河北)․경동(京東)․회남(희南)․양절(兩浙)․광남(廣南)․복건(福建)에서는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내주(내州)․빈주(濱州)․체주(체州)와 서로 바라다보인다.

원풍(元豊) 이후부터 매양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려면, 언제나 명주(明州) 정해(定海)에서 출항(出航)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배 운행은 모두 하지(夏至)뒤에 남풍(南風)의 바람 편을 이용하는데, 5일이 못되어 곧 해안(海岸)에 닿는다.

옛적에는 봉경(封境)이 동서는 2천여 리, 남북은 1천 5백여 리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그 서북쪽은 글안(契丹)과 연속되었다.

옛적에는 대요(大遼)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와 경계를 했었는데, 뒤에 대요의 침벌을 받게 되매,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은 압록강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물 근원은 말갈(靺鞨)에서 나오는데, 그 물 빛깔이 오리의 머리빛깔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요동(遼東)에서 5백 리쯤 흘러가다 국내성(國內城)을 지나서 또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합류하여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려에서는 이 강물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그 나라에서 이를 천참(天塹)으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백 보(步)인데, 평양성(平壤城)에서 서북으로 4백 50리이고, 요수(遼水)에서 동남으로 4백 80리에 있다. 요수에서 동쪽은 옛날 글안에 소속되었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케 민중이 이미 멸망되었고, 금(金) 나라에서는 그 땅이 불모지(不毛地)이기 때문에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을 뿐이다.

압록강 서쪽에 또한 백랑(白浪)․황암(黃암)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요수(遼水)이다.

당(唐) 나라 정관(貞觀) 연간에 이 적(李勣)이 남소(南蘇)에서 고려를 크게 깨뜨리고, 강을 건너가신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遼水)의 근원’이라고 했다. 이로써 전고(前古)에는 일찌기 이 강을 믿어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고, 이래서 고려가 물러들어가 압록강의 동쪽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형 세 形勢


高麗素知書。明道理。拘忌陰陽之說。故其建國。必相其形勢。可爲長久計者。然後宅之。自漢末。徙九都山下。後魏至唐。皆居平壤。至李勣平其地。建都護府。則嘗遁寄稍東。不詳其所。唐末復國。當是今所都地。蓋嘗爲開州。今尙置開成편001。其城北據崧山。其勢自乾亥來。至山之脊。稍分爲兩岐。更相環抱。陰陽家謂之龍虎臂。以五音論之。王氏商姓也。西位欲高則興。乾西北之卦也。來崗亥落。其右一山屈折。自西而北轉。至正南。一峯特起。狀如覆盂。因以爲桉。外復有一桉。其山高倍。坐向相應。賓主丙壬。其水發源。自崧山之後。北直子位。轉至艮方。委蛇入城。由廣化門。稍折向北。復從丙地流出巳上。蓋乾爲金。金長生在巳。是爲吉卜。自崧山之半。下瞰城中。左溪右山。後崗前嶺。林木叢茂。形勢若飮澗蒼虯。宜其保有東土。歷年之久。而常爲聖朝臣屬之國也。

 

고려는 본디 글을 알아 도리에 밝으나 음양설(陰陽說)에 구애되어 꺼리기 때문에, 그들이 나라를 세움에는 반드시 그 형세를 관찰하여 장구한 계책을 할 수 있는 곳인 연후에 자리잡는다.

한(漢) 나라 말엽(末葉)부터는 환도산(丸都山) 아래로 옮겼고, 후위(後魏)부터 당 나라 때까지는 모두 평양(平壤)에 있다가, 이 적(李勣)이 그 곳을 평정하고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함에 이르러서는, 도망하여 점점 동쪽으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그 곳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당 나라 말엽에 나라를 복구한 데가 곧 지금 도읍한 곳에 해당되는데, 대개 전에 개주(開州)이던 곳으로, 지금도 오히려 개성부(開城府)가 설치되어 있다.

그 성(城)은 북쪽으로 숭산(崧山)에 의지했는데, 그 형세가 건해방(乾亥方)에서 뻗어내려오다가 산 등성이에 이르러서는 점차 나뉘어 두 줄기가 되어 다시 서로 감고 돌았으니, 음양가들이 말하는 청룡(靑龍)과 백호(白虎)줄기이다.

오음(五音)으로 논한다면, 왕씨(王氏)는 상(商)에 해당하는 성이니, 서편이 높게 보이면 흥하는데, 건(乾)은 서북에 해당하는 괘(卦)이다. 뻗어내린 등성이가 해방(亥方)으로 나갔는데, 그 오른쪽에서 산 하나가 꺾어져서 서쪽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다시 정남(正南)으로 돌아나와 봉우리 하나가 우뚝 솟아 형상이 동이를 엎어놓은 것 같고, 따라서 안산(案山)이 되었다.

그 밖에 또 안산 하나가 있어 그 높이가 배나 되는데, 좌향(坐向)이 서로 호응하여 객산(客山)은 남방(丙)에 있고 주산(主山)은 북방(壬)에 있다. 물은 숭산(崧山) 뒤에서 발원(發源)하여 북쪽으로 곧게 북쪽(子位)으로 흐르다가 돌아서 동북쪽(랑)에 이르러 꾸불꾸불하게 성으로 들어와 광화문(廣化門)에서 조금 꺾어져 북으로 향하다가 다시 남쪽(丙地)으로 흘러나간다.

이상은 대개 건괘(乾卦)는 금(金)이 되고 금의 장생방(長生方)은 동남쪽(巳方)에 있는 것이니, 이는 길한 자리가 되는 것이다.

숭산 중턱에서 성안을 내려다보면, 왼쪽에는 시내, 오른쪽에는 산, 뒤는 등성이, 앞에는 고개인데, 숲이 무성하여 형세가 ‘시냇물을 마시는 푸른 용’과 같으니, 그 자리가 동토(東土)에서 역년(歷年)을 오래도록 보유하면서, 항시 성조의 속국이 됨직하였다.

 

국 성 國城


高麗。自唐以前。蓋居平壤。本漢武帝所置樂浪郡。而唐高宗所建都護府也。以唐志考之。平壤城乃在鴨綠水東南。唐末。高麗君長懲累世兵革之難。稍徙而東。今王城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矣。其城周圍六十里。山形繚繞。雜以沙礫。隨其地形而築之。外無濠壍。不施女墻。列太上御名延屋。如廊廡狀。頗類敵樓。雖施兵仗。以備不虞。而因山之勢。非盡堅高。至其低處。則不能受敵。萬一有警。信知其不足守也。外門十二。各有摽名。舊誌纔知其七。今盡得之。正東曰宣仁。 舊不見名。止曰東大門。曰崇仁。 舊曰東門 曰安定。 舊曰須恤。乃麗人方言也。 東南曰長霸。正南曰宣華。 舊不見門 曰會賓。曰泰安。 舊名貞觀。今易此名。 西南曰光德。 舊曰正州。亦通其路耳。州郡非門名所宜。 正西曰宣義。曰狻猊。正北曰北昌。 舊名崧山。特登山之路。非本名也。東北曰宣祺。 舊名金郊。今易此。 西南隅。王府宮室居之。其東北隅。卽順天館。極加完葺。西門亦壯麗。蓋爲中朝人使設也。自京市司至興國寺橋。由廣化門以迄奉先庫。爲長廊數百間。以其民居隘陋。參差不齊。用以遮蔽。不欲使人洞見其醜。東南之門。蓋溪流至巳方。衆水所會之地。其餘諸門。官府,宮祠,道觀,僧寺,別宮,客館。皆因地勢。星布諸處。民居十數家。共一聚落。井邑街市。無足取者。總其建國大槩而圖之。其餘則互見於別篇

 

고려는, 당 나라 이전에는 대개 평양(平壤)에 있었으니, 본래 한 무제(漢武帝)가 설치했던 낙랑군(樂浪郡)이며, 당 고종(唐高宗)이 세운 도호부(都護府)이다. 「당지」(唐志)를 상고하여 보면 ‘평양성은 바로 압록강 동남쪽에 있다’ 하였는데, 당 나라 말엽에 고려의 군장(君長)들이 여러 대를 겪은 전란을 경계하여 점점 동쪽으로 옮겨갔다. 지금 왕성(王城)은 압록강의 동남쪽 천여리에 있으니, 옛 평양이 아니다.

그 성은 주위가 60리이고, 산이 빙 둘려 있으며 모래와 자갈이 섞인 땅인데, 그 지형에 따라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밖에 참호(塹壕)와 여장(女墻)을 만들지 않았으며, 줄지어 잇닿은 집은 행랑채와 같은 형상인데 자못 적루(敵樓)와 비슷하다. 비록 병장(兵仗)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을 대비하고 있으나, 산의 형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전체가 견고하거나 높게 되지 않았고, 그 중 낮은 곳에 있어서는 적을 막아낼 수 없었으니, 만일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지켜내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열 두 외문(外門)에 각각 표시한 이름이 있었느데, 옛 기록에는 겨우 그 중 7곳을 말했으나 지금은 다 알 수 있다. 정동(正東)에는 선인(宣仁) 숭인(崇仁) 안정(安定)이 있고, 동남에는 장패(長覇)가 있고, 정남에는 선화(宣華) 회빈(會濱) 태안(泰安)이 있고, 서남에는 광덕(光德)이 있고, 정서에는 선의(宣義), 산예(산猊)가 있고, 정북에는 북창(北昌)이 있고, 동북에는 선기(宣祺)가 있다.

서남 모퉁이에는 왕부(王府), 궁실(宮室)이 있고, 그 동북 모퉁이에 있는 것이 곧 순천관(順天館)인데 매우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으며, 서문(西門)도 또한 웅장하고 화려하니, 대개 중국에서 사신 오는 사람을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경시사(京市司)에서 흥국사(興國寺) 다리까지와, 광화문(廣化門)에서 봉선고(奉先庫)까지에 긴 행랑집 수백 간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민중들의 주거가 좁고 누추하며 질서가 없고 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으로 가리워 사람들에게 그 누추함을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동남쪽의 문은, 대개 시냇물이 동남쪽(巳方)으로 흐르니 모든 물이 모이게 되는 곳이요, 그 나머지 모든 문과 관부(官府), 궁사(宮祠), 도관(道觀), 승사(僧寺), 별궁(別宮), 객관(客館)도 모두 지형에 따라 여러 곳에 별처럼 널려 있다.

백성들의 주거는 열 두어 집씩 모여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고, 정읍(井邑)과 시가(市街)에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상으로 건국(建國)의 대략을 총괄하여 그렸고, 그 나머지는 딴 편(篇)에 간간이 나와 있다.


누 관 樓觀


王城。昔無樓觀。自通使以來。觀光上國。得其規模。稍能 太上御名 治。初惟王城宮寺有之。今官道兩旁。與國相富人。稍稍僭侈。入宣義門。每數十家則建一樓。俯近興國寺。二樓相望。左曰博濟。右曰益平。王府之東。二樓臨衢。不見摽牓。簾幙華煥。聞皆王族游觀之所。人使經由。則有婦女。窺覘於其間。衣服之飾。不異民庶。或云王每出游。則其族始易錦繡也。

왕성(王城)은 과거에는 누관(樓觀)이 없다가 사신이 상통한 이래로, 상국(上國)을 관광(觀光)하고 그 규모를 배워 차차 만들게 되었다. 당초에는 오직 왕성의 왕궁이나 절에만 있었는데, 지금은 관도(官道) 양쪽과 국상(國相), 부자들까지도 두게 되어 점점 사치해졌다. 그래서 선의문(宣義門)을 들어가면 수십 집 가량에 누각(樓閣) 하나씩이 세워져 있다.

흥국사(興國寺) 근처에 두 누각이 마주 보고 있는데, 왼쪽것은 ‘박제(搏濟)’라 하고 오른쪽 것은 ‘익평(益平)’이라 한다. 왕부(王府)의 동쪽에도 누각 둘이 거리에 임해 있어, 간판은 보이지 않으나 발과 장막이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들으니, 모두 왕족들이 놀이하는 곳이라고 했다.

사신이 지나가게 되면, 부녀자들이 그 속에서 내다보는데 의복 꾸밈새가 서민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이 눌러 올 때면 그 안의 왕족들이 비로소 비단 옷으로 바꾸어 입는다’고 했다.


민 거 民居


王城雖大。磽确山壟。地不平曠。故其民居。形勢高下。如蜂房蟻穴誅茅爲蓋。僅庇風雨。其大不過兩椽。比富家稍置瓦屋。然十纔一二耳。舊傳唯倡優所居。揭長竿以別良家。今聞不然。蓋其俗淫祠鬼神。亦厭勝祈禳之具耳。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전에는 전하기를 ‘창우(倡優)들이 사는 집은 긴 장대를 세워 양가(良家)와 구별한다’ 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지나치게 귀신을 받들고, 또한 기양(祈禳)하는 기구를 더없이 좋게 하는 것뿐이었다.


방 시 坊市


王城本無坊市。惟自廣化門至府及館。皆爲長廊以蔽民居。時於廊間。榜其坊門。曰永通。曰廣德。曰興善。曰通商。曰存信。曰資養。曰孝義。曰行遜。其中實無街衢市井。至有斷崖絶壁。蓁莽繁蕪。荒墟不治之地。特外示觀美耳。

 

왕성(王城)에는 본래 방시가 없고, 광화문(廣化門)에서 관부(官府) 및 객관(客館)에 이르기까지, 모두 긴 행랑을 만들어 백성들의 주거를 가리웠다. 때로 행랑 사이에다 그 방(坊)의 문을 표시하기를, ‘영통’(永通), ‘광덕’(廣德), ‘흥선’(興善), ‘통상’(通商), ‘존신’(存信), ‘자양’(資養), ‘효의’(孝義), ‘행손’(行孫)이라 했는데, 그 안에는 실제로 가구(街구)나 시정(市井)은 없고, 적벽에 초목만 무성하며, 황폐한 빈터로 정리되지 않은 땅이 있기까지 하니, 밖에서 보기만 좋게 한 것 뿐이다.


무 역 貿易


高麗故事。每人使至。則聚爲大市。羅列百貨。丹漆繒帛。皆務華好。而金銀器用。悉王府之物。及時鋪陳。蓋非其俗然也。崇寧大觀。使者猶及見之。今則不然。蓋其俗無居肆。惟以日中爲虛。男女老幼官吏工技。各以其所有。用以交易。無泉貨之法。惟紵布銀鉼。以准其直。至日用微物。不及疋兩者。則以米計錙銖而償之。然民久安其俗。自以爲便也。中間朝廷賜予錢寶。今皆藏之府庫。時出以示。官屬傳玩焉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오게 되면 사람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物貨)를 나열하느데, 붉고 검은 비단은 모두 화려하고 좋도고 힘쓰고, 금과 은으로 만든 기용(器用)은 모두 왕부(王府)의 것을 때에 맞추어 진열하나, 실제로 그 풍속이 그런 것은 아니다. 숭녕(崇寧)이나 대관(大觀) 때의 사자는 이런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대개 그 풍속이 거사(居肆)는 없고 오직 한낮에 시장을 벌여, 남녀, 노소, 관리, 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交易)하고, 천화(泉貨)를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紵布), 은병(銀甁)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일용(日用)의 세미한 것으로 필(疋)이나 냥(兩)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쌀로 치수(치銖)를 계산하여 상환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중간에 조정에서 전보(錢寶)를 내려 주었는데, 지금은 모두 부고(府庫)에 저장해 두고 때로 내다 관속(官屬)들에게 관람시킨다 한다.


군 읍 郡邑


州,縣之建。實不副名。特聚落之繁處。自國之西北。與契丹,大金接境。粗有壘壍。其東南濱海。亦有建於島嶼者。惟西京最盛。城市略如王城。又有三京四府八牧。又爲防禦郡一百一十八。爲縣鎭三百九十。爲洲島三千七百。皆設守令監官治民。惟牧守都護。公廨數楹。令長則隨所在。舍於居民。夷政租賦之外。無健訟在官者。公田不足以資用。則亦仰給於富民云。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三

 

주현(州懸)의 설치는 명칭이 맞지 않고, 취락(聚落)이 번성한 곳일 뿐이다. 나라의 서북(西北)으로부터 글안(글안), 대금(大金)의 접경(接境)에 이르기까지 간간이 보루(堡壘)와 참호가 있고, 그 동남쪽은 해변에 닿았는데 섬에도 설치한 것이 있다.

오직 서경(西京)이 가장 번성하여 성과 시가가 대략 왕성(王城)과 같다. 또한 3경(京), 4부(府), 8목(牧)이 있고, 또 방어하는 군(郡) 1백 18과 현진(縣鎭) 3백 90과, 주도(洲島) 3천 7백을 설치하고 모두 수령(守令), 감관(監官)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그런데 목(牧), 수(守), 도호(都護)의 공해(公해)만은 여러 간이고, 영장(令長)은 소재에 따라 거주하는 백성들의 집에 거처한다.

고려의 정사는 조부(組賦)이외의 송사는 없다. 관직에 있는 사람이 공전(公田)으로 비용을 충당할 수 없으면, 부유한 백성에게서 공급받게 된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 권

 

문 궐 門闕

 

臣聞黃帝,堯,舜。尙象於豫。乃設重門擊柝。以待暴客。後世聖人。又差尊卑而爲之等。故天子之門。曰皐曰庫曰雉曰應曰路凡五。諸侯則去其二焉。曰庫曰雉曰路而已。魯爲周公後。而新作雉門兩觀。且不逃春秋之譏。況其他侯乎。高麗門闕之制。亦頗遵古侯禮。雖其屢聘上國。亦頗效顰學步。然材乏工拙。終以朴陋云


황제(黃帝 중국 전설상의 제왕)와 요․순(堯舜)은 예방하기를 숭항하여 겹문을 설치하고 딱다기를 쳐서 폭객(暴客 도적)을 대비했고, 후세의 성인들은 또 존비(尊卑)를 나누어 등급을 만드었기 때문에, 천자(天子)의 문(門)은 고문(皐門)․고문(庫門)․치문(雉門)․응문(應門)․노문(路門)이라하여 모두 다섯문이고, 제후(諸侯)들은 이 중 두문을 없애고 고문․치문․노문이라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노(魯)나라는 주공(周公)의 후손으로서도 치문(雉門)에 새로 두 누관(樓觀)을 지었다가 「춘추」(春秋)의 꾸지람을 면하지 못하였기거든, 더구나 그 나머지 제후들이겠는가?

고려의 궐문(闕文) 제도는 자못 옛 제후의 예(禮)를 따랐다. 비록 그들이 누차 상국에 빙문다니며 본떠다가 모방한 것이나, 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재목이 모자라고 기술이 졸렬하여 결국 투박하고 누추했다고 한다.


선의문 宣義門


宣義門。卽王城之正西門也。西爲金方。於五常屬義。故以名之。其正門二重。上有樓觀。合爲瓮城。南北兩偏。別開門相對。各有武夫守衛。其中門不常開。唯王與使者出入。餘悉由偏門也。自碧瀾亭。以至西郊。乃過此門。而後入館。王城之門。唯此最大且華。蓋爲國朝人使設也。

선의문은 곧 왕성의 정서쪽 문인데, 서(西)는 금방(金方)으로서 오상(五常 인․의․예․지․신)에선 의(義)에 속하기 때문에 이름하게 된 것이다. 정문은 이중으로 되었고, 그 위에 누관이 있는데, 합쳐 옹성(瓮城 큰 성문 밖 작은 성)이 되어 있고, 남․북 양편에 따로 문을 내어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각각 무부(武夫)가 수위하고 있다.

중문(中門)은 늘 열어놓지 않고 오직 왕이나 사자가 출입할 떄만 열고 나머지는 모두 편문(偏門)으로 다닌다.

벽란정(碧蘭亭)에서 서교(西郊)에 이르기까지 바로 이 문을 지나야 관(館)에 들어 갈 수 있는데, 왕성의 문으로는 오직 이 문이 가장 크고도 화려하다. 그런데 이 문은 국조(國朝 송나라 조정) 사신을 위해 설치한 것이다.

외문 外門


王城諸門。大率草創。唯宣義門。以使者出入之所。北昌門。爲使者回程祠廟之路。故極加嚴飾。他不逮也。自會賓,長霸等門。其制略同。唯當其中爲兩戶。無尊卑。皆得出入。其城皆爲夾柱。護以鐵筩。上爲小廊。隨山形高下而築之。自下而望崧山之脊。城垣繚繞。若蛇虺蜿蜒之形。長霸門通安東府。光德門通正州。宣仁門通楊,全,羅三州。崇仁門通日本。安定門通慶,廣,淸三州。宣祺門通大金國。北昌門通三角山。薪炭松子布帛所出之道也。

 

왕성의 모든 문은 거개 초창기(草創期)에 만든 것인데, 선의문(宣義門)은 사자(使者)가 출입하는 곳이고, 북창문(北昌門)은 사자가 회정(回程 돌아가는 길)하거나, 사묘(祠廟)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아주 엄숙하게 꾸며져 다른 문은 이에 미치지 못한다.

회빈문(會賓門)․장패문(長覇門) 등부터는 그 제도가 대략 같은데, 오직 그 한가운데에 쌍문을 만들어 존비(尊卑)에 구애없이 모두 출입할 수 있게 했다.

성은 모두 양쪽을 나무로 받치고 철통(鐵筩)으로 보호하였으며, 위에는 작은 행랑집을 지었는데 산 지형의 높고 낮은 대로 쌓았다.

아래서 숭산(崧山) 등성이를 바라보면, 성의 담장을 빙 두른 것이 마치 뱀이 꿈틀거리는 형상과 같다.

장패문은 안동부(安東府)로 통하고, 광덕문(光德門)은 정주(正州)로 통하고, 선인문(宣仁門)은 양주(楊州)․전주(全州)․나주(羅州) 등 3주로 통하고 숭인문(崇仁門)은 일본으로 통하고, 안정문(安定門)은 경주(慶州)․광주(廣州)․청주(淸州) 등 3주로 통하고, 선기문(宣祺門)은 대금국(大金國)으로 통하고, 북창문은 삼각산(三角山)으로 통하는데, 신탄(薪炭 땔나무와 숯)․잣[松子]․포백(布帛)이 나는 지방이다.

 

광화문 廣化門


廣化門。王府之偏門也。其方面東。而形制略如宣義。獨無瓮城。藻飾之工過之。亦開三門。南偏門榜儀制令四事。北門榜周易乾卦繇辭五字。仍有春貼子云。雪痕尙在三雲陛。日脚初升五鳳樓。百辟稱觴千萬壽。衮龍衣上瑞光浮。

 

광화문은 왕부(王府)의 편문(偏門)인데, 동쪽으로 향했고, 모양과 제도는 대략 선의문과 같은데, 유독 옹성(瓮城)이 없고, 문채나게 꾸민 공력은 더했다.

역시 3문을 냈는데, 남쪽 편문에는 의제령(儀制令) 4가지 일을 방시(榜示)했고, 북쪽 문에는 건괘(乾卦)의 요사(繇辭) 5글자 건(乾)․원(元)․형(亨)․이(利)․정(貞)을 방시했으며, 또한 춘첩자(春帖字 입춘날 대궐 안 기둥에 써 붙이는 주련(柱聯))가 있는데,


눈 자취 아직도 삼운폐에 있는데,

햇살이 비로소 오봉루에 오르네.

제후들 잔 올려 축수하니,

곤룡포 자락에 서광이 어렸도다. 袞龍布上瑞光浮

라고 했다.

 

승평문 昇平門


昇平門。卽王宮之正南門也。上爲重樓。旁起兩觀。三門並列。制益宏大。四阿。各有銅火珠爲飾。自門之內。左右分爲兩亭。皆曰同樂。矮牆。幾百堵相屬。以至神鳳門。而門之制。又壯大於昇平矣。東曰春德。通世子宮。西曰太初。通王居備坐。又十餘步。卽閶闔門。乃王奉迎詔書之所也。左右兩挾有承天門。自是而上。山勢稍逼。中庭隘狹。去會慶殿門。不過數丈耳。昇平,神鳳,閶闔三門。制度文采。大抵相類。而神鳳爲冠。題牓之字。金書朱地。有歐率更之體。大抵麗人多法古。不敢以臆說己見而妄爲俗體也

승평문은 곧 왕궁(王宮)의 정남문이다. 위에는 겹으로 누각을 만들고 곁에 두 누관을 세웠으며, 3문을 죽 늘어세워 제도가 더욱 굉장하고 웅대한데, 문의 네 모서리는 각각 동화주(銅火珠 문짝에 붙이는 장식)로 장식이 되어 있다.

문 안에서부터 좌우로 나누어 두 개의 정자를 만들고 모두 ‘동락정’(同樂亭)이라고 했다. 작은 담장 몇 백이 서로 연속되어 신봉문(神鳳門)까지 이르렀는데, 문의 제도는 승평문보다도 웅장하고 컸다. 동쪽 문에는 ‘춘덕’(春德)이라고 편액했는데 세자궁(世子宮)으로 통하고, 서쪽 문은 ‘태초’(太初)라고 했는데, 왕이 거처하는 비좌(備坐)와 통한다.

또 10여 보(步)쯤 가면 창합문(閶闔門)이 있는데, 이는 왕이 조서(詔書)를 받는 곳이다. 좌우 양쪽에 승천문(昇天門)이 있고, 여기서부터 위로는 산세가 점차 급하고 뜰이 좁고, 회경전 문과의 거리가 두어 장(丈)에 지나지 않는다.

승평․신봉․창합 3문의 제도와 채색은 대개 서로 비슷한데, 신봉문이 으뜸이다. 제방(題榜)의 글씨는 붉은색 바탕에 금자(金字)로 씌여 있는데, 구 솔경(歐率更)의 글씨체이다. 대개 고려 사람들은 거개 옛 체를 법받았고, 감히 억설(臆說)이나 자기 소견을 가지고 망령되어 속체(俗體)를 쓰지 않는다.


동덕문 同德門

 

同德。左右二門相對。其中卽昇平門也。形制略似殿門而極高。唯無臺觀。昌德,會賓,春宮,承休。其制與同德不異。特閤門與承天二門差褊爾。


동덕문은 좌우로 두 문이 서로 마주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것이 곧 승평문이다. 모양과 제도는 대략 전문(殿門)과 같아 매우 높으나, 대관(臺觀)이 없다.

창덕(昌德)․회빈(會賓)․춘궁(春宮)․승휴문(承休門)은 그 제도가 동덕과 다르지 않은데, 특히 합문(閤門)․승천(承天) 두 문이 조금 좁을 뿐이다.

 

전문 殿門


會慶殿門。在山之半。石梯隥道。高可五丈。蓋正殿之門也。並列三門。中間唯詔書得入。王與人使。分左右而行。門外列戟二十四枝。甲冑之士。執其儀衛。守衛甚衆。特嚴於它門爾。

 

회경전(會慶殿)의 문은 산 중턱에 있고 돌사닥다리 높이가 5장(丈) 가량인데, 이것이 정전(正殿)의 문이다. 3문을 나란히 세웠는데, 중간 문은 오직 조서를 가진 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왕과 사신은 좌우로 나누어 통행한다.

문밖에 창 24자루를 늘어 세웠고, 갑주(甲冑)를 입은 군사가 의위(儀衛)를 담당하고 수위병이 매우 많아서, 다른 문보다도 특히 엄중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5 권


궁 전 1 宮殿一

 

신종황제(神宗皇帝)가 크게 문교(文敎)를 펴 먼 나라까지 미치매, 보물을 바치고 알현(謁見)하려는 사람이 바다를 건너 답지하였다.

그 가운데 고려에게만 더욱 예우(禮遇)하여 주고, 따라서 근시(近侍)를 사신으로 보내어 무마하였으며, 일찍이 예지(睿旨 황제의 분부)를 내렸다.

무릇 접견하는 궁전 이름과, 대마루 끝 기와에 솔개 꼬리 장식하기를 거리낌없이 했으니, 여기서 성상의 계책이 크고 원대하여 오랑캐를 작은 일을 가지고 책망하지 않고, 그들의 충성하고 순종하는 큰 의리만 아름답게 여김을 알았다.

하동(夏童)이나 북로(北虜)들은 털가죽으로 만든 천막을 가지고 사철 물과 풀이 있는 온화하고 시원한 곳을 따라 옮겨다니고, 처음부터 일정한 도읍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는, 전대(前代)의 역사에 이미 기록되어 있는데,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농지가 작아 힘써 지어도 자급(自給)할 수 없으며 그 풍속은 음식을 절제하고 궁실(宮室)을 수축(修築)하기 좋아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왕이 거처하는 궁궐의 구조는 둥근 기둥에 모난 두공(頭工)으로 되었고, 날아갈 듯 연이은 대마루는 웃긋불긋 문채나게 꾸며져 바라보면 담담(潭潭 깊고 넓은 모양)한 듯하고, 숭산(崇山) 등성이에 의지하여 있어서 길이 울퉁불퉁하고 걷기 어려우며, 고목(古木)이 무성하게 얽히어 자못 악사(嶽祠)․산사(山寺)와 같다.

지금 그 형상과 제도를 그리고, 그 명칭은 그대로 써 둔다.



왕부 王府



왕부에는 내성(內城)이 둘려 있고, 열 세 군데의 문에는 각각 편액(扁額)이 걸렸는데, 방향에 다라 의의를 나타내었다. 광화문(廣化門)이 정동(正東)의 문으로 긴 거리와 통했고, 전문(殿門)은 15개인데 신봉문(神鳳門)이 가장 화려하다.

내부(內部)는 16부인데 상서성(尙書城)이 우두머리가 된다. 아홉 궁전은 모양이 같지 않은데 회경전(會慶殿)이 정침(正寢)이고, 세 각(閣)이 대치해서 있는데, 청연각(淸燕閣)이 웅장하고 화려하다. 또 작은 전(殿)이 있어 연거(燕居 한가로이 거처하는 곳)하는 곳으로 쓴다.

날마다 편좌(便坐)에서 정사(政事)를 보는데, 오직 인욕(茵褥)을 탑(榻)위에 깔았다. 국관(國官)이나 친시(親侍)들이 그 곁에 꿇고 늘어 앉아 왕의 분부를 받아 차례로 전달한다.

대신은 5일에 한 번씩 알현(謁見)하는데 따로 정사를 의논하는 당(堂)이 있고, 나머지 관원들은 매달 1일과 15일 이외에 4차례 왕에게 알현하여 분부를 받는다. 분부 받을 일이 있으면 상주관(上奏官)이 문에 서서 받는데, 섬돌에 올라갔다 자리로 돌아갈 때는 언제나 신을 벗고 무릎 걸음으로 나아가고 물러가며, 궁정(宮廷)에서 추창(趨蹌 예도에 맞도로 허리 굽혀 빨리 걷는 것)할 때에는 반드시 왕을 향하여 절을 하니, 그 조심함이 이와 같다.

나머지 옥우(屋宇)에 있어서는 모두 초창(草創)한 것으로서 이름이 실재보다 과하여 상세히 기록할 것이 못되므로 가려서 그렸는데, 여타의 편(篇)에 섞여 보이기도 한다.



회경전 會慶殿



회경전은 창합문(閶閤門) 안에 있는데, 따로 전문(殿門)이 있고, 규모가 매우 웅장하다. 터의 높이는 5장(丈)이 넘고, 동․서 양쪽의 섬돌은 붉게 칠하고, 난간은 동화(銅花 구리로 꽃무늬를 만든 것)로 꾸몄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여 모든 전(殿) 중에 제일이다.

양쪽 행랑은 모두 30간이고, 뜰안은 벽돌로 깔았는데 견고하지 못하여 다니면 소리가 난다.

상례(常禮 보통의 예법) 때에는 감히 거처하지 않고 오직 사신(使臣)이 오게 되면 뜰아래에서 조서(詔書)를 받고 표문(表門)도 받는다. 연회(燕會) 때에는 정사와 부사의 자리를 전(殿)의 서영(西楹)에 동으로 향하여 차리고, 상절(上節)들은 동서(東序), 중절(中節)은 서서(西序), 하절은 문의 양쪽 행랑에 자리하여 북으로 향한다.

나머지 예식(禮式)은 딴 전(殿)에서하여 구별한다.



건덕전 乾德殿



건덕전은 회경전의 서북쪽에 있는데, 따로 전문(殿門)이 있고, 그 제도는 5간으로 되어 회경전과 비하여 조금 작다.

예전에는 사신이 거기에 가면, 제3차 연회 때에 왕의 예(禮)가 더욱 근간하여 특별히 궁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고 그 속에서 잔치를 하였다 한다. 이번에 갔을 때에는 해(楷 인종의 이름)가 의복제도에 구애되어 시행하지 아니하고, 오직 회경전에서와 같이 수작(酬酌)하고 그쳤다.

만약 중국에서 보낸 자이면, 조정에서 보낸 사신이 아니고 군리(郡吏)로서의 사신이 통첩(通牒)을 가지고 가 명령을 전하더라도 역시 이 전에서 잔치하나, 다만 예의 절차에 차등이 있을 뿐이다.



장화전 長和殿



장화전은 회경전 뒤 북으로 뻗은 하나의 멧부리에 있는데, 지형이 높고 험준하며, 모양과 제도가 더욱 좁아 건덕전만 못하다.

양쪽 행랑은 모두 탕장(帑藏 왕실의 창고)인데, 동쪽 행랑에는 성조(聖朝 송나라를 말한다)에서 내린 내부(內府)의 보물을 저장하고, 서쪽 행랑에는 그 나라의 금백(金帛) 따위를 저장한다. 경비하는 병졸이 다른 곳보다 더 많다.



원덕전 元德殿



원덕전은 장화전 뒤에 있다. 지형이 더욱 높고 만듦새가 초라하다. 듣건대, 그 왕이 늘 거처하지 않고, 오직 이웃나라가 침범하거나 변방이 시끄러우면, 거기로 나아가 장수에게 명하여 군사를 출동시키게 하고 만약 중요한 인사(人士)를 죽이려면 친밀한 근신(近臣) 1~2인과 여기에서 의결(議決)한다고 한다.



만령전 萬齡殿



만령전은 건덕전 뒤에 있는데, 터와 구조가 조금 작으나 문채나게 꾸며 화려하니, 이것이 침실이다. 비빈(妃嬪)과 시녀들이 양편 행랑에 방을 잇대어 빙 둘러 거처하는데, 숭산(崧山) 중턱에서 그 방안을 내려다보니 또한 그다지 넓지 않았다. 생각건대, 그 궁녀가 시녀의 수도 역시 그 방의 수와 같은 듯 싶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6 권



궁 전 2 宮殿二



장령전 長齡殿



장령전은 건덕전 동쪽 자문(紫門) 안에 있고 그 제도는 3간인데, 비록 화려함은 만령전(萬齡殿)만 못하나 규모는 크다.

매양 중국에서 사자가 고려에 가려면, 기일에 앞서 반드시 먼저 보내는 소개서(紹介書) 가 있는데, 그 연락이 오면 여기에서 받는다. 고인(賈人)이 국경에 이르면 관원을 보내어 맞아 위로하고, 사관(舍館)이 결정된 뒤에 장령전에서 그가 바치는 것을 받고서 그 값어치를 계산하여 방물(方物)로 두 배쯤 되게 보상한다.



장경전 長慶殿



장경․중광(重光)․선정(宣政) 3 전(殿)은 옛 기록에 비록 그 이름이 실려있으나 지금 듣건대, 중광전․장경전을 중수하여 딴 전(殿)으로 바꾸었다 하니, 아마도 지금 전각(殿閣)을 세운 곳이 선정전으로서 곧 외조(外朝 군왕이 국정을 듣는 곳)인 것 같고, 이곳에서 세시 (歲時)에 그 신하들과 모여서 연회를 베푼다. 왕의 탄일(誕日)에도 명절 이름을 붙였으니, 왕 우(王俁)가 8월 17일 출생했으므로, 그 날을 ‘함녕절’(咸寧節)이라고 부른다.

그 날은 공족(公族)․귀신(貴臣)․근시(近侍)들을 장경전에 크게 모으고, 중국 고인(賈人)으로 사관에 있는 사람에게도 역시 관원을 보내어 자리를 마련하되, 화․이(華夷 중국과 고려) 두 가지 음악을 쓰며 또한 치어(致語 임금에게 올리는 송덕문(頌德文))가 있다.

그들이 노래 부른 것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 궁궐 숲에 서기 비치어 宮時端色照宮林

무르녹은 화기에 쌓인 음기 걷히었네 和氣濃濃破積陰

집집마다 향불 피워 국운을 빌고 香火千家祈國壽

두 나라 음악에 손인 마음 즐거우리 笙歌二部樂賓心

취기 돌자 햇살 주렴에 옮겼고, 興酣日影移珠箔

춤을 끝낸 기생 머리 옥비녀가 삐딱. 舞罷花枝倒玉簪

부디 좋은 때 실컷 즐겨야 하니 須盡淸歡酬美景

술잔 크다 말고 조용히 드세. 慫容莫訴酒杯深



연영전각 延英殿閣



연영전각은 장령전(長齡殿) 북쪽에 있다. 제도와 대소(大小)는 대략 건덕전(乾德殿)과 같은데, 왕이 여기에서 진사(進士)들을 친히 시험 보인다. 그 북쪽의 것을 또 자화전(慈和殿)이라고 하는데, 역시 연회하는 곳이다.

앞에 3각(閣)을 세웠는데 ‘보문각’(寶文閣)이라고 하는 곳에는 열성(列聖 중국의 여러 임금들)이 내린 조서(詔書)를 간직했고, 서쪽 것은 ‘청연각’(淸燕閣)이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사기와 자․집(子集 제자(諸子)와 백가(百家)의 문집)을 간수했다. 일찌기 그 청연각의 기문(記文 문체의 하나로서 그 건물의 사적이나 경치를 적은 글)을 구득했는데, 그 글은 이러하였다.

개부의동삼사 수태보 겸문하시랑 감수국사 상주국 강릉군개국후 식읍일천삼백호 식실봉삼백호(開府儀同三司守太保兼門下侍郞監修國史上柱國江陵郡開國候食邑一千三百戶食實封三百戶) 신(臣) 김 연(金緣)은 봉교(奉敎)하여 찬(撰)하고, 통봉대부 보문각학사 좌산기상시 상호군 당성군개국남 식읍삼백호 사자금어대(通奉大夫 寶文閣學士 左散騎常侍 上護軍 唐城郡開國男 食邑三百戶 賜紫金魚袋) 신(臣) 홍 관(洪灌)은 봉교하여 비문(碑文)을 쓰고 아울러 전액(篆額)했다.

왕께서는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독실하고 빛난 덕으로, 유술(儒術)을 숭상하고 화풍(華風 중화풍속)을 흠모하기 때문에, 대내(大內)의 옆과 연영서전(延英書殿)의 북쪽과 자화전(慈和殿)의 남쪽에 따로 보문․청연 두 각(閣)을 지어 송(宋)나라 황제(皇帝)의 어제(御製 임금이 지은 글)․조칙(詔勅)․서화(書畵)를 모셔 놓고, 계시하여 훈칙으로 삼았으며 반드시 용의(容儀)를 엄숙하게 한 뒤에 절하고 우러러보았다.

한결같이 주공(周公)․공자․맹자․양웅(揚雄)이래의 고금 서적을 모아놓고 날마다 노사(老師)․숙유(宿儒)들과 선왕(先王)의 도를 토론하여 부연하며 배우고 닦고 익히니, 집[堂] 밖을 나갈 것도 없이 삼강(三綱)․오상(五常)의 교화와 성명(性命)․도덕의 이치가 사방에 흘러 퍼졌다.

그리하여 금년(고려 예종12 1117) 여름 4월 갑술일에 특별히 수태부 상서령 대방공(守太傅尙書令帶方公) 신(臣) 보(俌), 수태부 상서공 태원공(守太傅尙書公太原公) 신 효(효), 수태보 제안후(守太保 齊安候) 신 서(서), 수태부 통의후(守太傅通義候) 신 교(僑), 수태보 낙랑후(守太傅樂浪候) 신 경용(景庸)․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위(偉), 문하시랑(門下侍郞) 신 자겸(資謙)․신 연(緣), 중서시랑(中書侍郞) 신 중장(仲璋), 참지정사(參知政事) 신 준(晙), 수사공(守司空) 신 지화(至和), 추밀원사(樞密院使) 신 궤(軌), 지추밀원사(知樞密院使) 신 자지(字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 신 안인(安仁) 등을 불러, 청연각에서 성대한 모임을 차리고서 조용히 이르기를,

“돌아보건대, 덕이 부족한 몸인데 하늘이 내린 태평을 힘입어 종묘와 사직에 복이 쌓이고 3면의 변방에 병란(兵亂)이 일지 않고, 글과 법이 중하(中夏)와 같게 되었다. 무릇 정책을 세워 일을 하여감과 대소간(大小間)의 행사를 중국에 자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숭녕(崇寧 송나라 휘종의 연호)․대관(大觀 송나라 휘종의 연호) 이래로 시행하고 주조(注措)하는 방법과 보문각(寶文閣) 경연(經筵)에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선화(宣化 송나라 휘종의 연호) 때 제도를 따른 것이요, 깊숙한 궁궐 조용한 자리에 재상들을 인견(引見)함은 태청(太淸 양무제(梁武帝)의 연호)의 연회를 법받은 것이니, 비록 예(禮)는 차등이 있다 하더라도, 어진 사람을 우대하고 재능있는 사람을 높이는 뜻은 한가지다.

지금 입조(入朝 송나라에 조회하러 가는 것)했던 진공사(進貢使) 자량(資諒)이, 계향(桂香)․어주(御酒)․용봉(龍鳳)․명단(茗團 송나라 차[茶])․진과(珍菓) 보명(寶皿)을 가지고 돌아왔기로, 아름답게 여겨 경들과 함께 이 훌륭하고도 아름다움을 즐기고자 하노라.“

하니, 신하들이 모두 황송하고 송구스러워 섬돌에 몰려가 엎드리며,

“고루(固陋)한 몸이라 감히 훌륭한 예에 참여할 수 없읍니다.”

하고 사양하니, 왕이 곧 도로가 앉도록 하고, 온화한 안색으로 대접하며 각가지 음식을 갖추어 먹였는데, 거기에 차려놓은 그릇과 잔이나 접시에 담긴 음식과 각가지 과일은,29) 육상(六尙)의 이름난 진품과 사방의 맛좋은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상국(上國)의 파리(玻璃 유리)․마노(瑪瑙 보석)․비취(翡翠)․서시(犀兕 무소의 뿔이나 가족을 말한다)와 기괴하여 애완(愛玩)스러운 물건들을 상 위에 진열하여 놓고 훈(壎)․지(篪)․강(椌)․갈(楬)․금슬(琴瑟)․종(鍾)․경(磬)의 즐겁고 단아한 곡조로 당(堂) 아래서 합주(合奏)하도록 하고, 왕이 잔을 들고서 근신(近臣)을 시켜 권하며 이르기를,

“군신의 사이는 오직 지성으로 하여야 하는 것이니, 각기 양대로 사양하지 말고 마셔라.”

하니, 좌우 신하들이 재배(再拜)하면서 감사함을 아뢰고 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잔을 올리기도 하고 혹은 받기도 하여 화락한 즐거움이 매우 흡족하였다.

술잔이 9번 돌게 되자, 잠시 물러가 쉬도록 하였다가, 이어서 궁중 귀인(貴人)들로 습의(襲衣)와 보대(寶帶)를 가져다가 내리도록 하여, 그 후의(厚意)를 표시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시 불러 자리에 앉기를 재촉하고, 음식 먹고 행동하기를 각기 편리한 대로 하도록 하므로, 더러는 마음을 터놓고 담소하기도 하고 더러는 눈망울을 굴려 관람하기도 하였다. 난간 밖에는 돌을 쌓아 산을 만들고 뜰가에는 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었는데, 오만 가지로 우뚝우뚝한 산과 사방에 고여 있는 맑은 물은 동정호(洞定湖)와 오(吳)나라 회계산(會稽山) 같은 그윽한 흥취를 불러일으키니, 잔치가 끝나도록 더위를 잊고 취하도록 몹시 마시다가 밤이 깊어 파했다.

이에 진신(搢神)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흔연(欣然)하게 기쁜 기색을 띠며 서로 말하기를,

“우리 왕께서는 인자와 검소를 보배로 삼고 넘치는 행동이 없으며, 옷은 문수(文繡)를 입지 않고 그릇은 조각한 것을 쓰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곳을 얻지 못하고, 한 가지 일이라도 법도에 맞지 않을까 하여, 날마다 소의간식(宵衣旰食)30)하는 중에도 노심 초사하여 가엾게 여기고, 반대로 군신(群臣)과 귀한 손님에게 잔치 대접함에 있어서는, 내부(內附)에 간수했던 진귀한 것과 상국(上國)에서 특별히 은사(恩賜)한 것까지 다 털어, 하루가 다 가도록 놀고 밤에까지 계속하고도 오히려 만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니, 어진이를 존대하고 예를 중하게 여기며 선(善)을 좋아하고 권세를 망각하는 마음이, 실로 역대의 왕들보다 뛰어나게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하였다.

듣건대, 옛날 노(魯)나라 임금이 천자의 예악으로 풍속을 교화하였기 때문에, 반궁(泮宮)에서 선생(先生)과 군자(君子)가 같이 즐겼는데, 그 시(詩)에 이르기를 ‘노후가 와서 반궁에서 술을 마시누나! 이미 좋은 술 마셨으니 길이 장수하리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고, 노침(路寢 임금이나 제후가 정사를 보던 곳)에서 잔치하면서는 대부(大夫)와 서사(庶士)가 같이 서로 즐겼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노후가 잔치차려 기뻐하니 대부와 서사도 즐거워하는구나! 나라를 가지고 있으니 이미 많은 복을 받음이로다.’ (「시경」 노송(魯頌)에 있다)하였다 한다.

지금 우리 임금께서도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은의(恩意)를 받들어, 신하들을 총애로 대우하였다. 그러므로 공경대부(公卿大夫)들은 천보31)시(天保詩)와 같이 임금에게 보답할 뜻을 갖고, 언어(言語 왕의 측근 관리)․법종(法從)은 ‘아유가빈’(我有嘉賓)32)의 시(詩)를 부(賦 노래부름)하고, 고사(瞽史) ․ 가공(歌工)은 군신(君臣)이 같이 즐기는33) 음악을 연주하여, 환희(歡喜)가 서로 교환되고 예의가 법도에 맞게 되었다.

이때에 있어, 사람과 신령의 화락함, 천지의 아름다운 감응, 상하가 베풀어 주고 보답하는 것, 풍속을 교화시키는 근본이 모두 화락하게 음식을 들며 담소(談笑)하는 속에서 나오게 되었으니, 어찌 길이 늙지 않고 많은 복을 받는 다는 것에 그칠 뿐이겠는가? 반드시 억만년토록 태평한 복을 누리며, 천자(天子 송나라 임금을 말한다)의 한없는 아름다움을 대양(對揚 천자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칭양하는 것)할 것이다.

신은 우매하고 졸렬한데도 만행(萬幸)한 때를 만나 변변치 못한 재능으로 재부(宰府)를 맡고 있는데, 신을 못났다 아니하고 특별히 글을 지으라는 명령이 잇기에 사양했으나 허락하여 주지 않으므로 삼가 머리 조아리고 두 번 절하며 억지로 ‘기’(記)를 짓는다.



임천각 臨川閣



임천각은 회경전(會慶殿) 서쪽, 회동문(會同門) 안에 있다. 집은 네 기둥으로 되었고 창문이 툭 트였으나 밖이 겹처마로 되어 있지 않아 자못 대문(臺門)과 같은데, 연회하는 곳이 아니다. 그 안에는 서책 수만 권이 간직되어 있을 뿐이다.



장경궁 長慶宮



장경궁은 왕부(王府) 서남쪽 유암산 등성이에 있다. 두 개의 조그만 길이 있는데 북으로는 왕부와 통하고 동으로는 선의문(宣義門)과 통하며 긴 거리에는 낡은집 몇 채가 있다. 왕옹(王顒)의 여러 자매가 그 속에서 살았는데, 뒤에 시집가고 드디어 그 곳을 비워 두었으므로 황폐가 더욱 심했다. 왕우(王俁)가 병이 위독하여 거기에 가 치료했는데, 마침내 치유하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따라서 제사 모시는 사당으로 삼았다. 왕 우를 모시던 궁녀와 그 의 옛 관속 수십 인이 지킨다.



좌춘궁 左春宮



좌춘궁은 회경전의 동쪽 춘덕문(春德門) 안에 있다. 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처음으로 책봉(冊封)되면 세자(世子)라 하고, 관례(冠禮 성인이 되는 예식)를 하고 난 뒤에는 여기에 거처하는데, 옥우(屋宇)의 제도는 왕궁(王宮)만 못하다.

대문의 편액은 ‘대화’(大和)라고 했고, 다음은 ‘원인’(元仁), 그 다음은 ‘육덕’(育德)이라고 했다.

일 보는 집은 편액이 없고, 들보와 기둥은 길고 크며, 병풍 위에는 ?문왕세자편?(文王世子篇)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관속(官屬) 십수 인을 두었다.

우춘궁(右春宮)은 승평문(昇平門) 밖 어사대(御史臺) 서쪽에 있는데, 왕의 자매와 여러 여인이 거처한다.



별궁 別宮



왕의 별궁 및 그 자제들이 거처하는 곳을 모두 궁이라 한다. 왕의 모․비(母妃)와 자매 중에 따로 사는 사람은 궁(宮)과 전토(田土)를 받으며, 탕목(湯沐)도 받는데, 더러는 비워 두고 거처하지 아니하며, 민간에게 이득을 보게 하여 세금을 바치도록 한다.

계림궁(鷄林宮)은 왕부(王府) 서쪽에 있고 부여궁(拊餘宮)은 유암산(由巖山) 동쪽에 있으며, 또한 진한(辰韓)․조선(朝鮮)․상안(常安 타본에는 장안(長安))․낙랑(樂浪)․변한(卞韓) 등 6궁이 성안에 나뉘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왕의 백숙(伯叔)․곤제(昆弟)가 거처하는 곳이다. 왕의 계모(繼母)가 거처하는 궁을 적경궁(積慶宮)이라 한다.

지금 공족(公族)으로는 현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볼 수 없고, 별궁은 10채에 9채는 비어 있다. 그 전토를 과거는 수창궁(壽昌宮)에서 관할했는데, 지금은 모두 왕부에 소속되었고 또한 관원을 두어 관장하게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7 권



관복 冠服



동이(東夷)의 풍속은 머리를 자르고 문신(文身)하며, 이마에 문신34)하고 발이 교차한다35)[雕題交趾]고 한다. 그런데 고려는 기자(箕子)를 봉했을 때부터 이미 밭갈이와 누에치기의 이로움을 가르쳤으므로 마땅히 의관(衣冠)의 제도가 있었을 것이다.

한사(漢史)에, 그 공회(公會)할 때의 의복은 다 비단에 수놓고 금과 은으로 이를 장식하되, 대가(大加)․주부(主簿)는 책(幘)을 쓰는데 관(冠)과 같고, 소가(小加)는 절풍건(折風巾)을 쓰는데 변(弁)과 같다고 하였으나, 이것이 어찌 상(商 중국 고대 은나라의 처음 이름)이나 주(周)의 관(冠)과 변(弁)의 제도를 모방해서 그렇겠는가? 당(唐) 나라 초에 차츰 오채(五采)의 옷을 입어 백라관(白羅冠)을 쓰고, 혁대(革帶)에는 다 금이나 옥으로 장식하였더니, 우리 송 나라에 이르러 해마다 신사(信使)를 보내므로 자주 왕이 옷을 내려 점차 우리 중국풍에 젖게 되고, 천자의 총애를 입어 의복의 제도가 크게 갖추어지고 우리 송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으니, 다만 변발(辮髮)을 풀고 좌임(左袵)을 덜었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관직명이 일정하지 않고 조정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이 혹, 우리 송의 제도와 다른 것이 있으므로, 이를 들어 관복도(冠服圖)36)를 그린다.



왕복 王服



고려왕은 상복(常服)에는 높은 오사모(烏紗帽)에 소매가 좁은 상포(緗袍 담황색(淡黃色) 포)를 입고, 자라(紫羅)로 만든 넓은 허리띠37)[勒巾]를 띠고 이 허리띠는 사이사이에 금실과 푸른 실로 수를 놓았다. 나라의 관원(官員)과 사민(士民)이 모여 조회(朝會)할 때에는 복두(幞頭)를 쓰고 속대(束帶)를 띠며, 제사지낼 때에는 면류관(冕旒冠)을 쓰고, 옥규(玉圭)를 든다. 다만, 중국의 사신이 가면 자라(紫羅)의 공복(公服)을 입고, 상아(象牙)로 만든 홀(笏)을 들고 옥대(玉帶)를 띠고, 행례의 범절이 아주 신절(臣節)에 조심한다. 혹 평상시 쉴 때에는 검은 건[烏巾]에 흰 모시[白紵] 도포를 입으므로 백성과 다를 바 없다 한다.



영관복 令官服



고려의 관제는 당(唐)나라 무덕(武德 당(唐) 고조(高祖)의 연호) 연간에 아홉 등급[九等]이 있었다. 첫째는 대대로(大對盧)인데 나라 일을 총괄하고, 다음이 태대형(太大兄), 다음이 울절(鬱折), 다음이 태대부인사자(太大夫人使者), 다음이 의두대형(衣頭大兄)으로 기밀을 맡고 정사(政事)를 논의하여 병마를 보내는 일과 관작(官爵)을 주는 일을 맡았고, 다음이 대사자(大使者), 다음이 대형(大兄), 다음이 사자(使者), 다음이 상위사자(上位使者), 다음이 소형(小兄), 다음이 제과절(諸過節), 다음이 선인(先人)이며, 또 빈객(賓客)을 맡는 이가 있어 중국의38) 홍로경(鴻矑卿)에 비할 수 있으니, 대부사자(大夫使者)로써 그 관리를 삼고, 또 국자감박사(國子監博士 정 7품벼슬), 통사사인(通事舍人 각문(閣門)의 정 7품벼슬) 전서객(典書客)이 있는데, 다 소형(小兄) 이상으로 관리를 삼는다. 또 여러 큰 성에는 욕살(傉薩)을 두었는데, 중국의 여러 독부(督府)39)에 비할 수 있으며, 여러성에는 처려근지[處閭近支]를 두었는데, 이는 중국의 자사(刺史)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또는 도사(道使)40)라고도 이르고 무관(武官)에는 대모달(大摸達)이 있는데 이는 위장군(衛將軍)에 비할 수 있는 것으로 조의 두대형(皀衣頭大兄) 이상이라야 될 수 있으며, 다음은 말객(末客)인데 중랑장(中郞將)에 비교되는 것으로 대형(大兄) 이상으로 그를 삼고, 그 다음은 영천인(領千人)인데 이하 각기 등차(等差)가 있다. 이제 그 관(官)의 이름이나 공훈[勳秩]의 품계가 혹 중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누가 그 사유를 물으면 곧 개원(開元 당 현종의 연호) 고사(故事)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 의관(衣冠)에 있어서도 또한 혹 비슷한 것이 있다. 전세(前世) 고구려의 신하의 복식이 청라(靑羅)로 관을 하고 강라(袶羅 붉은 나)로 이(珥 원래는 귀걸이이지만, 여기서는 귀를 싸는 장식)를 하고 새깃[鳥羽]으로 장식하더니, 요즈음은 나라의 관원들이 거의 다 자주 무늬가 있는 엷은 나의 포[紫文羅袍]를 입고 비치는 깁으로 만든 복두(복두)를 쓰며, 허리에는 옥띠[玉帶]를 띠고, 금어(金魚)41)를 차되, 관이 태사(太師)․태위(太尉)․중서령(中書令)․상서령(尙書令)인 자가 입는다.



국상복 國相服



국상(國相)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둥근 문양이 있는 금띠[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시중(侍中), 태위(太尉), 사도(司徒), 상서(尙書)・중서문하시랑(中書門下侍郞 정2품)・평장사(平章事)・참지정사(參知政事 종2품)・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정당문학(政堂文學)・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추밀사(樞密使 종3품)・동지원주사(同知院奏事) 등의 관원들도 모두 이를 입는 것을 허락해 준다.



근시복 近侍服



근신[近侍]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구문금대(毬文金帶)를 띠고 이에 금어대(金魚帶)를 차는데, 좌우상시(左右常侍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정3품 벼슬)・어사대부(御使大夫), 좌・우승42)(左右丞), 육상서43)(六尙書)․한림학사(翰林學士 한림원(翰林院)의 학사(學士), 정3품 벼슬)․승지학사(한림원의 학사승지(學士承旨), 정3품 벼슬) 이상 및 지대국조사명 접반관(祗待國朝使命接伴官)과 관반관(館伴官) 등이 다 입는다.



종관복 從官服



종관의 복색은 자문나포(紫文羅袍)에 어선금대44)(御仙金帶)를 띠니, 어사중승(御史中丞 어사대(御史臺)의 중승, 종4품)․간관(諫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좌․우 간의대부, 정4품)․급사(給事 종4품)․시랑(侍郞 육부(六部)의 정4품 벼슬), 주(州)․목(牧)의 유수(留守)와 사(使)․부사(副使)․합문집찬(閤門執贊 합문의 집찬벼슬, 종4품)․육상직관(六尙直官)․도지병마45)(都知兵馬)․사부호사46)(四部護使) 등과 특별한 은수(恩數 훈공에 의하여 왕의 특별한 은영(恩榮)을 입는것)를 입은 자가 다 입으며, 왕의 세자(世子) 및 왕의 형제도 또한 그러하다.



경감복 卿監服



경감의 복색은 비문나포(緋文羅袍)에 붉은 가죽 바탕의 무소 뿔의 띠[紅鞓犀帶]를 하고, 이에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육시경이47)(六寺卿貳)․성부승랑(省部丞郞 상서도성(尙書都省)과 육부(部)의 승과 낭(郎))․국자유관(國子儒官 국자감(國子監)의 유관이 사업(司業))․비서전직(秘書典職 비서성(秘書省)의 감(監)․소감(少監) 등)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조관복 朝官服



조관의 복색은 비문나포를 입고 흑정각대(黑鞓角臺)를 띠고, 은어대(銀魚帶)를 차니, 사업박사(司業博士 국자감(國子監)의 종4품 벼슬․사업(司業))와 사관교서(史館校書 직사관(直士館)(정9품)벼슬), 태의(太醫)․사천(司天)의 두 성(省)의 녹사(綠事 정9품) 이상은 다 이를 입는다. 그 계(階)나 관(官)은 또한 햇수를 따지며, 반드시 그 계나 관을 옮긴 뒤에야 갈아 입는다. 관반(館伴 사신의 접대관)이 중국의 사신을 관(館)에서 뵐 때에는 각기 두 사람의 비포(紕袍)를 입은 자를 두어 앞을 인도하게 하는데, 다만 어대(魚袋)를 차지 않으니, 마땅히 이것은 중국의 주의쌍인(朱衣雙引 향도(嚮導)하는 관원은 붉은 옷을 입었으므로 주의리(朱衣吏)라고도 한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라 생각된다.



서관복 庶官服



서관(庶官 6품(六品) 이하의 하급관원)의 복색은, 녹의(綠衣 서관의 옷은 포(袍)라 하지 않고 의(衣)라 하였다)에 목홀(木笏)을 들고, 복두(幞頭)를 쓰고, 검은 가죽띠[烏鞓]를 띠니, 진사(進士)로 입관(入官)한 때로부터 성조(省曹)의 보리(補吏)나 주현(州縣)의 영위48)(令尉)․주부(主簿 각 관아의 종7품 종8품의 주부(注簿) 벼슬인 듯함.)․사재(司宰 사재감(司宰鑑)의 벼슬인듯함.) 등이 다 이를 입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8 권



인 물 人物



동남쪽의 이적(夷狄)들 중에는 고려의 인재(人材)가 가장 왕성하다. 나라에 벼슬하는 자라야 귀신(貴臣)이 되며 족망(族望)으로 서로 겨루고, 나머지는 혹 진사(進士)를 하여 뽑히거나 혹 재물을 바치고 되기도 하는데, 세록(世祿)49) 받는 이직(吏職)까지도 등급이 있으니, 그러므로 직(職)이 있고 계(階)가 있고 훈(勳)이 있고 사(賜)가 있고 검교(檢校)가 있고 공신(功臣)이 있고 여러 위(衛)가 있다.

이것은 본조(本朝)의 괸제를 고찰하여 본받되 개원(開元 당 나라 현종(玄宗)의 연호)의 예(禮)를 참작하여 한 것이다. 그러나 명실(名實)이 맞지 않고 청탁(淸濁)이 혼동되어 한갓 형식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자가 국경에 들어가매, 모든 신하들 중에 현명하고 민첩한 자들을 가리어 영접하는 예절을 맡겼는데, 주목(州牧) 중에는 형부시랑 지전주(刑部侍郞知全州) 오 준화(吳俊和), 예부시랑 지청주(禮部侍郞知靑州) 홍 약이(洪若伊)․호부시랑 지광주(戶部侍郞知廣州) 진 숙(陳淑)이 맡았고, 맞아 위로하고 전송하는 일은, 은청 광록대부 이부시랑(銀靑光祿大夫吏部侍郞) 박 승중(朴昇中),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중서시랑 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中書侍郞中書門下平章事) 김 약온(金若溫),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事守太保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최 홍재(崔洪宰), 개부의 동삼사 수태보 문하시랑 겸중서문하평장사(開府儀同三司守太保門下侍郞兼中書門下平章事) 임 문우(林文友),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척 준경(拓俊京)․이 자덕(李資德)이 맡았었는데, 이들은 모두 왕의 근신이다.

왕부(王府)에서의 4차례 연회를 제한 외에는 이들과 같이 잔치하며 담소하였는데 화락한 분위기였다.

사적(私적 사사로이 임금과 만나는 것)과 송유(送遺 선사)는, 호부시랑(戶部侍郞) 양 인(梁鱗)과 김 유간(金惟揀), 형부시랑(刑部侍郞) 임 경청(林景淸), 공부시랑 노 영거(盧令거), 중시대부(中侍大夫) 황 군상(黃君裳), 공부낭중(工部郎中) 정 준(鄭俊), 좌사낭중(左司郎中) 이 지보(李之甫), 전전승지(殿前承旨) 임 총신(林寵臣), 조산랑 비서승(朝散郞秘書承) 김 단(金端), 합문사(閤門使) 김 보신(金輔臣),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이 영지(李潁之)와 조 기(曹祺), 내전숭반(內殿崇班) 호 인영(胡仁潁), 인진사(引進使) 왕 의(王儀), 합문지후(閤門祗候) 고 당유(高唐愈)와 민 중형(閔仲衡),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점(李漸)과 양 문구(梁文矩), 중위랑(中衛郞) 유 급(劉及), 중량랑(中亮郞) 팽 경(彭京), 충훈랑(忠訓郞) 왕 승(王承), 성충랑(成忠郞) 이 준기(李俊琦)와 김 세안(金世安), 보의랑(保義郞) 이 준이(李俊異), 승절랑(承節郞) 허 의(許宜)․하 경(何景)․진 언경(陣彦卿)이 맡았으며, 전명(傳命)하고 찬도(찬導 안내)함은, 정의대부 예부상서(正議大夫禮部尙書) 김 부일(金富佾), 통의대부 전중감(通議大夫殿中監) 정 담(鄭覃), 상서(尙書) 이 도(李도), 중량대부 지합문사(中亮大夫知閤門事) 심 안지(沈安之), 중량대부 합문부사(中亮大夫閤門副使) 유 문지(劉文志), 합문인진사(閤門引進使) 김 의원(金義元),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 심 기(沈起)․왕 수(王 洙)․김 택(金澤)․이 예재(李銳材)․김 순정(金純正)․황 관(黃觀)․이 숙(李淑)․진 적(陳迪), 합문지후(閤門祗候) 윤 인용(尹仁勇)․박 승(朴承)․정택(鄭擇)․진 칭(陳칭), 통사사인(通事舍人) 이 덕승(李德承)․오 자여(吳子璵)․탁 안(卓安)이 하였는데, 모두 재능(才能)과 언변과 박식으로 뽑혀 이 일을 맡았다.

상면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같이 서로 연락(燕樂)하고 유관(游觀)하였는데, 그들의 읍손(揖遜 인사범절)하는 거동이 절차있고 화락하여 볼만한 데가 있었다.

지금 우선 이 자겸(李資謙) 이하부터 그형상을 그린 것이 5사람인데, 아울러 그 족망(族望)까지 설명을 하겠다.



수태사상서령 이 자겸 守太師尙書令李資謙



고려는 본래부터 족망(族望)을 숭상하고 국상(國相)은 거개 훈척(勳戚 나라에 공이 있는 임금의 친척)을 임용한다. 왕 운(王運)으로 부터 이씨(李氏)의 후손에게 장가 들었는데, 왕 우(王俁)도 세자(世子) 때에 또한 이씨의 딸을 맞아 비(妃)로 삼았다.

이로 말미암아 문호(門戶)가 빛나고 드러나기 시작하여, 자겸의 형 자의(資義)가 전대(前代) 왕 때에 이미 국상이 되었다가 일에 연좌되어, 유찬(流竄 귀양보내는 것)되었기 때문에 자겸이 형의 일을 경계삼아 매양 스스로 조심하였으므로, 왕 우가 깊이 신임하고 중히 여겨 춘궁(春宮 세자)의 스승이자 벗을 삼았다.

이때 왕 해(王楷)가 아직도 어렸지만, 자겸이 박식하고 견문이 많은 선비 8인을 선발하여 지도하게 하였다. 이를테면 김 단(金端) 같은 무리는 그 무렵 본조(本朝)로부터 사제(賜第 임금의 명령으로 특별히 급제한 사람과 똑 같은 자격을 주는것)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바로 이 선발에 참예되었다.

임인년(고려 예종(睿宗) 17, 1122) 여름 4월에 왕 우(王俁)가 죽으매, 여러 아우들이 다투어 서려고 했다. 이에 앞서 왕 옹(王옹)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왕 우가 맏이었다.

자겸이 이미 왕 해를 세웠는데, 중부(仲父) 대방공(帶方公) 보(보)가 그 왕위를 탈취하려고 하여 드디어 문하시랑(門下侍郞) 한 교여(韓교如)․추밀사(樞密使) 문 공미(文公美)와 더불어 불궤(不軌반역)를 음모하니, 예부상서(禮部尙書) 이 영(李永)․이부시랑(吏部侍郞) 정 극영(鄭克永)․병부시랑(兵部侍郞) 임 존(林存) 등 10여 인이 내응(內應)하기로 했었었는데, 미처 거사하기 전에 음모가 누설되매, 곧 체포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자겸이 이에 왕에게 풍간(諷諫)하여 보를 해도(海島)에 추방하고 여러 악인들을 베었으며 여당(餘黨) 수백 인을 잡아들였기 때문에, 변란을 안정시킨 공으로 태사(太師)로 승진시키고 식읍(食邑)과 채지(采地)를 더 주었으며 벼슬이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렀다.

자겸은 풍모(風貌)가 의젓하고 거동이 화락하고 어진이를 좋아하고 선(善)을 즐겁게 여겨, 비록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면서도 자못 왕씨(王氏)를 높일 줄 알아서, 이적 중에서는 능히 왕실을 부장(扶獎)하는 자이니, 역시 현신(賢臣)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참소를 믿고 이득을 즐기며 전토(田土)와 제택(第宅)을 치장하여 전답이 연달아 있고 집 제도가 사치스러웠고, 사방에서 궤유(饋遺 선물)하여 썩는 고기가 늘 수만 근이었는데, 여타의 것도 모두 이와 같았다. 나라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루하게 여겼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접반 정봉대부 형부상서 주국 사자금어대 윤 언식 接伴正奉大夫刑部尙書柱國賜紫金魚袋尹彦植


윤씨는 원래 유학(儒學)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윤 관(尹瓘)이 왕 우(王우) 때에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어 일찌기 조공하러 중국에 왔었는데, 언식은 곧 그의 아들이다. 대대로 이씨(李氏)들과 혼인했고, 또한 이자겸(李資謙)과 퍽 좋게 지냈다. 왕 해(王楷)가 세자로 있을 때 언식도 역시 인익(引翼 인도하고 보익하다)의 반열(班列)에 참여하였었기 때문에, 왕 해가 즉위한 뒤 높고 귀한 벼슬에 승진되었다.

언식은 풍채가 아름답고 자질이 훤칠하여 완연(宛然)히 유자(儒者)의 기풍이 있어, 오랑캐로 대할 수 없었다.


동접반 통봉대부 상서예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김 부식 同接伴通奉大夫尙書禮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金富軾


김씨는 대대로 고려의 큰 씨족이 되어 전사로부터 이미 실려 오는데, 그들이 박씨(朴氏)와 더불어 족망(族望)이 서로 비등하기 때문에, 그 자손들이 문학(文學)으로써 진출된 사람이 많다.

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석대한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 일을 잘알아, 학사(學士)들에게 신임과 복종을 받는 것이 능히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그의 아우 부철(富轍)은 또한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다. 일찌기 그의 형제들의 이름 지은 뜻을 넌지시 물어 보았는데, 대개 사모하는 바가 있었다.


관반 금자광록대부 수사공동지추밀원사 상주국 김 인규 館伴金紫光祿大夫守司空同知樞密院事上柱國金仁揆


김 경융(金景融)은 왕 옹(王옹) 때의 태부 수중서령(太傅守中書令)이니, 인규는 곧 그의 아들이다. 옹의 아버지 휘(徽)가 일찌기 김씨의 딸을 맞이하였으니, 왕 해(王楷)가 인규를 원구(元舅)로 존대할 분의가 있다.

한 교여(韓교如) 등이 반역하였을 때, 이 자겸(李資謙)이 왕 해를 도와 여러 반역 도당을 베었는데, 인규가 참여하여 공력이 있었기 때문에, 사공(사空)으로 벼슬을 올리고 중추부(中樞府)에 있도록 했다.

인규는 늘씬하고 수염이 아름답고 모습이 훤칠하고 준수하며, 행동도 단정하고 장중하므로, 선발하여 사신을 접대하게 한 것이다.


동관반 정의대부 수상서 병부시랑 상호군 사자금어대 이 지미 同館伴正義大夫守尙書兵部侍郞上護軍賜紫金魚袋李之美


고려는 매양 중조(中朝)에서 사신이 가게 되면 반드시 인재(人材)를 선발하거나 혹은 조공(朝貢)갔던 사람으로 관반(館伴)을 삼는다.

지미는 곧 자겸의 아들인데, 풍채와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답다. 언젠가 일찌기 천궐(天闕)에 입근(入覲)하고 관(館)에 머무는 여러 달 동안 관중에서 일어났언 모든 일을 지미가 처결하였는데 예(禮)에 맞지않게 하는 것이 없었고, 동작이 찬찬하고 단아하여 여유 작작하게 중화(中華)의 풍도(風度)가 있었으며, 매양 조정(朝廷) 일에 언급되면 반드시 권권(眷眷 마음이 늘 쏠리는 것)하게 쏠리는 뜻이 있었으니, 그의 충성이 또한 가상하다고 할 만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9 권



의 물 1 儀物一



여러 오랑캐 나라는 비록 임금이 있으나, 그 출입에는 정(旌 장목을 단 기)과 전(전 자루 위가 굽은 기) 십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붙이들과 거의 뚜렷한 분별이 없다. 다만, 고려는 본래 조빙(朝聘)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므로, 그 군신 상하가 거동할 적에 예문(禮文 예법의 명문)이 있으니, 왕의 순행(巡行)에 각기 의물(儀物)과 신기(神旗)가 있어, 선구(先驅)하는 갑사(甲士)가 사람이 오가지 못하게 길을 막고, 육위(六衛)50) 의 군대가 각기 그 의물을 잡고 가니, 비록 다 전례(典禮)에 맞지는 않으나, 다른 여러 오랑캐에 비하면 찬연히 빛나 볼 만하다. 이것이 공자(孔子)가 살고 싶다 하고 더럽다 하지 않은 이유이다. 더구나, 고려는 기자(箕子)의 나라인데다가 성조(聖朝 송을 일컬음)의 권회(眷懷)함이 두터운 터이니 더욱 말할나위 있겠는가? 이제 아울러 그 의물을 아래에 그린다.



반리선 盤리扇



반리선이 둘이니, 강라(絳羅 붉은 비단)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을 하고, 가운데에 단리(單리 한 마리의 작은 용)가 꾸불꾸불 굼틀거리는 그림을 수놓았는데, 그 제도가 뿔은 하나요 비늘은 없고, 그 모습은 용(龍)과 비슷하되, 대개 도롱뇽[蛟]이나 뿔 없는 용[ ]의 붙이이다. 왕이 행차할 때면 앞에 서서 금포(錦袍)를 씌워 바람을 막는데, 친위군(親衛軍)51)이 이를 잡고, 잔치할 때는 뜰 가운데에 세우되, 예(禮)가 끝나면 거둔다.



쌍리선 雙리扇



쌍리선은 넷이다. 그 빛깔과 장식은 대략 단리(單리)와 비슷한데, 다만 수놓은 모양이 줄로 벌렸고, 예를 행할 때는 친위군이 이를 잡는다.



수화선 繡花扇



수화선은 둘이다. 붉은 나[絳羅]로 만들어 붉은 자루[朱柄]에 금색으로 장식하고, 가운데에 모란 꽃 둘을 수놓았는데, 부채의 모습은 이문선(이文扇)에 비하면 그 위가 조금 패어, 예를 행할 때는 이선(이扇)의 다음에 벌여 세우는데, 친위군이 잡는다. 삼색선(三色扇)은 그 너비가 2척이요, 높이가 4자요, 그 자루의 길이는 각각 10자가 된다고 한다.



우선 羽扇



우선은 넷이다. 그 제도는 푸른깃[翠羽]을 모아 차차 엮어내려 아래를 은으로 장식하였는데, 모양이 문금(文禽) 같다. 여기에 황금(黃金)을 칠하여, 자못 화려한 문채가 나지만 다루기가 어렵고, 오래 되면 깃이 빠져 그 형상이 위가 모[方]지게 된다. 이제 그 완전한 형상을 그렸는데, 처음의 모습에서 오래되지 않은 것과 같으니, 거의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제도는 자루의 길이가 10자요, 부채의 너비가 1척 5촌, 높이가 2자다. 예를 행할때는, 금화곡각(金花曲脚)52)으로 장식한 복두와 비단옷[錦衣]을 입은 친위장군(親衛將軍)이 이를 잡게 한다.



곡개 曲蓋



곡개(曲蓋)53)는 둘이다. 그 모양은 6모지고, 각기 유소(流蘇 내려뜨리는 장식물)가 있고, 붉은 나〔絳羅〕로 장식하고 위에 명주(明珠)와 금은을 섞어 장식하고 그 자루는 조금 굽었다. 왕이 출입할 때 그것을 받치지 않고 다만 위군(衛軍)이 이를 잡혀서 보(步) 앞에 가게 하는 것으로 의식을 삼는다. 그 만듦새는 높이 12자요, 너비 6자이다.



청개 靑蓋



청개의 만듦새는 거의 중국과 같다. 안쪽은 붉은 나〔絳羅〕로 만들고, 넓은 폭을 아래로 늘이고, 또 노란 실로 짠 끈으로 장식했다. 듣건대, 보통 때는 다홍〔紅〕을 쓰나, 중국 사신이 오면 청라(靑羅)로 위를 가린다 한다. 대개 고려인은 다홍을 가장 귀히 여겨 국왕(國王)이 아니면 쓰지 못하는데, 이제 위를 덮는 것은 또한 중국 조정에 공순하여 사절(使節)에게 겸손하는 일단인가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0 권



의 물 2 儀物二



화개 華蓋



화개의 제도는 문라(文羅)에 그림과 수(繡)를 섞어 꾸미고, 위는 육각(六角)이요 각기 유소(流蘇)가 나왔는데, 그 모양이 패환(佩環 패옥(佩玉)의 고리)과 같으며, 오채(五采 오색의 비단)로 드림을 가지런히 내렸는데 여기서 방울소리를 낸다. 그 뚜껑[蓋]은 세로가 세 자요 가로가 여섯 자요 길이가 25척이니, 대례(大禮)인즉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 8위(衛)의 하나)이 이를 잡고, 창합문(창闔門)밖에 서 있다.



황번 黃幡



황번의 제도는 문양 있는 나[文羅]로 만들고, 위에 상운(祥雲 상서로운 구름)을 수놓고, 그 형상이 위를 뾰족하게 하고, 두 귀에 유소(流蘇)를 내렸는데, 흔들면 소리가 난다. 번(幡)의 머리에서 끝가지 길이가 9척이요, 넓이가 1척 5촌이요, 자루의 길이가 1장 5척이며, 대례(大禮) 때에는 화개(華蓋)와 나란히 세우는데 그것을 잡고 선 군인의 복식(服飾)도 한가지이다.



표미 豹尾



표미54)의 제도는 창[矛]위에 꽂아 크고 작기가 같지 아니하며, 그 표범의 꼬리 모양에 따라 이를 취하니, 조서[詔]를 맞을 때는 천우위군(千牛衛軍)이 이를 잡고 앞에 섰으며, 문(門)에 이르면 동덕(同德)․승평(昇平) 두 문 사이에 세운다.



금월 金鉞



금도끼의 제도는, 주부(住斧)와 비슷하되 장대의 끝에 나는 난조(鸞鳥)를 한 마리 세워, 갈 적에는 움직여 치켜오르는 형상을 하니, 왕이 거둥하면 용호친위군장(龍虎親衛軍將) 한 사람이 이를 잡고 뒤에 따른다.



구장 毬杖



구장55)의 제도는 나무를 깎아 만들고, 은[白金]으로 이를 감싸되, 가운데에 조금 좋은 것은 구멍에 채수(采綬)를 꿰어 늘어뜨렸다. 대례(大禮)에는 산원교위(散員校尉) 10명이 이를 잡고, 회경전(會慶殿) 양쪽 층계 밑에 서 있다.



기패 旂旆



기패의 제도는 강라(絳羅 붉은 깁)호 이것을 만들고, 서로 잇대어 대[竿]위에 서 맺어 내려뜨리며, 또는 그 꼭대기에 흰깃[白羽]으로 장식을 하는 것도 있다. 군산도(群山島)부터 이미 보이며, 다만 영군(領軍)이나 집사(執事)하는 이에게 각기 내려준다. 대개 이를 빌어 지휘하는 물건이므로 위군(衛軍)은 기패를 소중한 물건으로 여기고 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1 권



장 위 1 仗衛一



고려 왕성(王城)의 장위는 다른 군(郡)에 비하여 가장 성대하고, 날랜 군사가 모두 모였으며, 중구의 사절이 이르면 이들을 모두 내어 영예로운 모양을 보인다.

그 제도는 인민이 16세 이상이면 군역(軍役)에 충당되는데, 그 육군(六軍 육위六衛)의 상위(上衛)는 항상 관부(官府)에 머무르고, 나머지 군사는 모두 전지[田]를 지급하여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가, 경(警 외국의 침입등 국가의 비상사태)이 있으면 무장을 하고 적지에 달려가고, 일을 맡게되면 또 그일에종사하며, 일이 끝나면 다시 전묘(田苗久)에 복귀하니, 우연하게도 옛날의 향민제도[鄕民之制]56)에 부합된다.

처음 위 나라 때[魏世]의 고려(高麗 즉 고구려) 호수는 3만에 불과하더니, 당나라 고종(高宗 649∼683)이 평양(平壤)을 함락시켰을 때 수합한 군사가 30만이었고, 지금은 전세(前世) 에 비해 또 배가 증가되였다.

왕성에 머물러 숙위(宿衛)하는 군사는 항상 3만이며, 이들이 교대로 번(番)을 나누어 수비한다. 군사를 제어하는 방략57)은, 군(軍)에는 장(將)을 두고, 장에는 영(領)을 두고, 대오(隊伍)에는 정보(正步)를 두었으며 열(列)에는 등(等)을 두었다. 열은 육군(六軍)으로 되었는데 용호(龍虎)․신호(神虎)․흥위(興衛)․금오(金吾)․천우(千牛)․공학(控鶴)이며, 이를 나누어 양위(兩衛)를 만드니 좌위(左衛) 우위(右衛)이며, 이를 또 3등으로 구별하여 초군(超軍) 맹군(猛軍) 해군(海軍)이라 한다.

경묵(黥墨 묵형(墨刑), 즉 먹물로 살갗을 뜨는 형벌) 하는 제도나 영둔(營屯)하는 거처는 없고, 오직 공적인 일에 사역되면 의복으로 구별할 뿐이다. 투구와 갑옷[鎧甲]은 아래위가 붙어 있는데 그 제도는 봉액(逢掖)58)과 같아서 형상이 궤이(詭異)하다. 금화 고모(金化高帽 모자위에 금화로 꾸민 戰帽)는 거의 2자[尺]이나 되고, 비단 옷과 푸른 도포[錦衣靑袍]에 헐렁하게 맨 띠[帶]는 사타구니[袴]에까지 드리우니, 대개 그 나라 사람은 키가 작아서 특별히 높은 모자와 비단옷[錦衣]을 입어 그 모양을 장하게 한 것이다. 이제 그림을 그려서 각각 그 명색(名色)을 뒤에 나열한다.



용호좌우친위기두 龍虎左右親衛旗頭



용호좌우친위기두59)는 구문 금포(毬文錦袍 환상(環狀)무늬가 있는 비단도포)를 입고, 도금(塗金)한 띠를 띠며, 전각 복두(展脚幞頭 복두의 일종. 후면에 좌우 양 뿔이 있는 것)를 쓰니 대략 중국의 복식(服飾) 제도와 같다. 작은 깃발[小旗]을 가지고 육군(六軍)을 호령하니 이것이 군위(軍衛)의 대장(隊長)이다. 왕부(王府) 안에는 지키는 자가 두 사람뿐인데, 사자(使者 중국사신을 가리킴)가 오게 되면 한 사람을 병장(兵仗) 안쪽에 배치하여 말을 타고 앞서서 인도하게 한다. 이것은 사신을 대우하려고 공급하는 것으로서, 왕을 모시는 사람을 거둔 것이니, 예의가 이 정도면 가히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신호좌우친위군장 神虎左右親衛軍將



신호좌우친위군장도 또한 구문금포(毬文錦袍)에 도금한 띠를 띠며, 모두(帽頭)의 뿔을 꺽어 올려서 오른쪽으로 조금 굽게 구부렸는데, (즉 절각복두(折脚幞頭)를 말함) 금화(金化)로 장식하였다. 왕이 출입할 때에는 10여 인이 우선(羽扇 새깃으로 만든 부채.의장의 하나)과 금월(金鉞 금도끼. 의장의 하나)을 잡고 시종한다.



신호좌우친위군 神虎左右親衛軍



신호좌우친위군도 구문 금포에 도금한 띠를 띠며 금화 대모(錦化大帽 금화로 장식한 큰 모자)를 썼는데, 붉은 띠를 더하여 턱 아래에 맨 것이 갓끈[紘纓] 등속과 같다. 그 만듦새는 매우 높아 바라보기에 우뚝하다. 옛날 제(齊) 나라 영녕(永寧)60) 연간에 고려 사신이 왔을 때 궁고(窮袴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거풍(拒風)을 썼었다. 중서랑(中書郞) 왕융(王融)61)이 이를 히롱하여 말하기를, ‘의복이 맞지 않는 것은 몸의 재앙이다. 머리에 쓴 것은 무슨 물건이오?’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옛날 고깔[弁]의 유상(遺像)이오.' 하였다. 지금 높은 모자의 제도를 보니, 그 거풍의 풍속은 아직도 그런가보다.



흥위좌우친위군 興威左右親衛軍



흥위좌우친위군은 분홍 무늬의 비단을 입었는데, 옷깃에 점점이 오색 모양의 꽃송이로 장식하였으며, 금화 대모를 쓰고, 흑서속대(黑犀束帶 검은 물소뿔로 만든 띠)를 띠었다. 왕의 좌우에 20여 인이 있는데 출동할때에는 이문 수화(螭文繡化 뿔 없는 용 무늬와 수 넣은 꽃 무늬)의 대선(大扇 의장의 하나)과 곡개(曲蓋 자루가 굽은 일산(日傘). 의장의 하나)를 잡고 전후에서 호종한다. 평상복은 용호・신위 이하 모두가 보라색 모자[紫帽]를 썼는데 금식(금식)이 없다. 여러 위(衛) 가운데 이들의 인품만이 조금 헌칠하다.



상육군좌우위장군 上六軍左右衛將軍



상육군좌우위장군은 개주(介冑 갑주(甲冑) 즉 갑옷과 투구)를 입었는데, 검은 가죽과 쇠로 만들었으며, 무늬 있는 비단으로 꽤매어 서로 붙어 있게 하였다. 허리 아래에는 10여개의 띠를 드리웠는데 오색 수 놓은 꽃무늬[五采繡化]로 장식하였고,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찼다. 손을 마주 끼고 국궁(鞠躬 몸을 굽히는 것)하여 궁전 문 위에 서 있는데, 수조(受詔 천자의 조서를 받는 것)를 하거나 배표(拜表 천자에게 올리는 표(표)를 절하고 보내는 것)하는 날에는 회경전(會慶殿) 중문에 6인, 양쪽 곁문[偏門]에 각각 4인이 우뚝하게 산처럼 서있는 것이 흙이나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다. 공손하고 엄숙한 모습이 또한 가상스럽다.



상육군위중검랑장 上六軍衛中檢郞將



상육군위중검랑장은 궁금(宮禁 왕궁)에 공이 있는 사람을 차례로 옮겨 보직을 하니, 왕이 친신(親信)하여 이들의 힘을 입어 내외를 보전하고 막는 것이다. 평상복은 모두 보라색 옷과 복두(幞頭)이며, 대례(大禮 국경의례)와 재제(齋祭 불교의식과 유교의식)・수조・배표에는 갑옷과 투구를 입고 나오는데 투구[兜鍪]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다 진다. 보라색 무늬 비단건[紫文羅巾]을 썼는데 이것은 구슬[珠具]로 장식하였다. 왼쪽에는 활과 칼을 차고 손에는 탄궁(彈弓 탄환을 쏜는 활)을 들었다. 왕이 출행할 때는 그 앞에 있으면서 훤화(喧嘩 큰 소리로 떠들썩한 것)가 있으면 시위를 당기는데 발사하지는 않고 경계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숙연해지게 한다. 새가 지나가면 탄환으로 쏘고, 밤에는 횃불을 들고 가면서 순시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전에 탄궁을 든 뜻이 의심스러워 까닭을 물으니, ‘어사를 탄핵하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용호중맹군 龍虎中猛軍



용호중맹군은 푸른 베로 만든 좁은 저고리[靑布窄衣]와 흰 모시로 만든 좁은 바지[白苧窮袴]를 입고, 다시 투구와 갑옷을 덧입었는데, 오직 부박(覆膊 어께를 가리는 것)만이 없다. 투구는 머리에 쓰지 않고 등에 지고 다닌다. 각각 작은 창을 들고 창 위에 흰 기를 달았는데, 큰기는 한자가 안되며, 구름무늬를 그려 장식하였다. 조서를 맞이하기 위해 성에 들어가 수조(受詔)하고 배표(拜表)할 때는 여러 의장군 뒤에서 길을 끼고 전진하며, 부(府)에 모일 때와 유관(遊觀)을 할 때는 투구와 갑옷을 착용하지 않는다. 병장(兵仗) 가운데 이 군사가 가장 많아 약 3만 인이나 된다.



금오장위군 金吾仗衛軍



금오장위군은 자관수삼(紫寬袖衫 자색 넓은 소매의 적삼)을 입었으며, 복두를 말아 썼는데 [著] 색동[采]으로 위를 묶어서, 각각 그 방위의 빛깔을 따라 한 방위가 한 대(隊)가 되고 한대가 한 빛깔이 되며, 간간이 둥근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다. 번개(幡蓋 번은 기치, 개는 청개(靑蓋). 황개(黃蓋) 등 의장의 한가지) 등 의물(儀物)을 들고 창합문(閶闔門) 밖에 섰다.



공학군 控鶴軍



공학군(숙위 근시(宿衛近侍)하는 군사)은 자문나포(紫文羅袍)를 입었는데, 오색으로 간간이 크고 둥가나 꽃을 수놓아 장식하였고 절각복두(折脚幞頭)를 썼다. 무릇 수십인이 조여(詔與 조서를 실은 가마)를 받들며, 왕이나 사신이 사사로이 보러 왕래할때는 상비(箱篚 상자와 대그릇)를 받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2 권



장 위 2 仗衛二



천우우장위군 千牛右仗衛軍



천우우장위군은 붉은 착의(窄衣 좁은 옷)를 입고 피변(皮弁 가죽으로 만든 고깔)을 썼으며, 검은 뿔로 만든 띠[黑角束帶]를 띠었다. 허리에는 두쪽의 옷 가리개가 있는데, 짐승 무늬로 장식하였고, 손에는 작은 창[小戈]을 들었는데 창위에 한개의 북을 꿰어 다니 그 제도가 <중국의> 도(鞉 작은 북)와 같다. 화극(畵戟 그림을 그려넣은 창)‧등장(鐙杖)‧표미(豹尾 표범 꼬리로 장식된 의장물(儀仗物))등속을 든 사람도 있는데 복식은 모두 한 모양이다.



신기군 神旗軍



신기군(고려 금군(禁軍)의 일종)은 가죽으로 머리를 덮었는데, 상부에 목비(木鼻)를 만들어 짐승의 이마 모양이 되게 한 것은 용맹스러움을 표시한 것이다. 붉은 저고리는 짧고 뒤에 또 두 쪽의 옷가리개를 덮붙이고 있는데, 이는 짐승 무늬로 장식이 돠어 있다. 조서(詔書)를 받거나 예(禮)를 받을 때는 앞에 진열하여 오방대신기(五方大神旗)를 펼쳐 수레에 싣고 향하는 곳을 따라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수레마다 10여 인씩 탄다. 산길이 험난하고 높은데다 마침 큰 더위에 땀이 흘러 등을 흠뻑 적시니, 다른 장위군에 비하여 가장 수고가 많다.



용호상초군 龍虎上超軍



용호상초군(용호위의 한 군)은 푸른 착의를 입고, 문라두건(文羅頭巾 무늬 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을 썼다. 앞깃과 등에 모두 단호(團號 둥근표시)가 있는데, 그 제도는 한결 같지 않다. 왕궁의 사령(使令)은 모두 용을 그린 무늬[龍文]로 하고, 나머지는 서려있는 꽃무늬[盤化]로 하였는데 모두가 금박을 먹이고 간간이 수 놓은 것도 섞였는데 그 제작이 정교하다. 관중(館中 사신이 머물러 있는 객사)의 삼절(三節)62)이 있는 자리 곁에 두서너 사람을 배치하고 순라(巡邏)라 이름하니, 이는 실로 비상사태를 살피는 것이다. 사신이 출입할 때는 또 사령을 지급하는데, 상절(上節)에게는 10 인이고 나머지는 등급에 따라 강쇄(降殺)한다.



용호하해군 龍虎下海軍



용호하해군은 청포 착의를 입었는데, 맴도는 소리개[盤鵰]를 누렇게 수놓았으며 붉은 가죽과 구리로 만든 장식을 띠고 붉은 채찍을 들었다. 순천문(順天門)의 수위(守衛)가 20여 인인데, 매향 관회(館會)에 이르면, 뜰 가운데 벌여 있다가 술잔이 돌면 ‘예' 하고 물러나 동서 두 줄로 엇갈려 돌아가며 다시 문밖으로 나간다.



관부문위교위 官府門衛校尉



관부문위교의는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 보라색 무늬의 비단으로 만든 좁은 옷)를 입고 전각복두(展脚幞頭)를 썼으며, 오른쪽에 장검(長劍)을 차고서 손을 마주끼고 섰다. 그 맡은 직책을 보면 군사의 계급을 총할하며, 전진(戰陣)에서 적진의 수급(首級)을 노획하고서도 은자(銀子)의 하사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차레로 여기에 보직되어 왕부(王府)에 머무르면서 여러 문들을 수위한다. 회경문(會慶門)에서부터 좌・우친위장군(左右親衛將軍)을 배치하였는데, 그 밖에는 안은 광화문(廣化門)과 밖은 선의문(宣義門) 등 여러 문에 모두 있으며 사관(寺觀 불사와 도관(道觀))이나 관부(官府)에서도 또한 쓴다. 그러나 복식과 인재가 모두 앞의 것에 미치지 못하고, 한때에 임시로 배치하였다가 다른 명색(名色)의 사람으로 충당하는데, 이는 일등 품질(品秩)이 아니다.



육군산원기두 六軍散員旗頭



육군산원기구는 자연도(紫燕島 인천항 서쪽 27리에 있음)에서 처음으로 보았는데, 이 또한 군중(軍中)의 총령자(總領者)이다. 전각복두를 쓰고 자문라착의(紫文羅窄衣)에 속대를 띠고 가죽신을 신었으며, 손에는 기패(旗旆)등 장위의물(仗衛儀物)을 들었다. 영군집사(領軍執事)는 대(隊)마다 각각 한 사람인데 행렬의 진퇴는 이들을 보고 표준을 삼으니 바로 중국의 인원(員人)과 같은 유이다.



좌우위견롱군 左右衛牽攏軍



좌우위견롱군은 자색착의(紫色窄衣)를 입으니 연작문금(練鵲文錦 까치 무늬가 든 누인비단)이다. 검은 깁[烏紗]을 연결하여 만든 연모(軟帽)를 쓰며, 베적삼에 짚신을 신고 많은 말을 어거한다. 오직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와 상절관(上節官)에게만 있고, 나머지는 모두 용호초군으로 대신하였다.



영군랑장기병 領軍郞將騎兵



영군랑장기병은 복식의 등급이 한결같지 않다. 무릇 자색 비단 전포[戰袍]를 입고 흰 고의[白袴]에 검은 짚신과 무늬있는 비단으로 만든 두건에 구슬로 장식한 것은 모두 고려 사람이었다. 그리고 청록긴사대화전포(靑綠緊絲大花戰袍 청록색 촘촘한 실로 짠 옷감에 큰 꽃무늬가 있는 전포)를 입었으며, 바지가 자색․황색 또는 검은 빛인 것과, 머리를 깍고 두건이 길지 않으며 정수리에 딱 붙게 쓴 것은, 듣건데 글안(契丹)의 항졸(降卒)이라 한다. 사부(使副)가 왕부(王府)에서 화합하고 봉선고(奉先庫 선왕의 제사때 쓰는 곡식등 제물을 두는 곳집)앞 언덕 위에 돌아왔을때 앞에서 인도하는 전구(前驅) 수십 기(騎)를 보았는데, 말방울을 울리며 치닫고 안장과 등자(革登子) 사이에서 날뛰는 것이 경쾌하고도 민첩하였다. 이것은 무술을 자랑하려는 것이다. 도이(島夷 고려를 말함)가 편벽되고 먼곳에서 우연히 경졸(勁卒)을 만나 님이 알아주기를 바라기에 급급한 것을 보니 또한 가소로왔다.



영병상기장군 領兵上騎將軍

영병상기장군은 자색 비단 착의[紫羅窄衣]를 입고, 전각복두를 썼으며, 오른쪽에는 호창(虎韔 호랑이를 그린 활집)을 띠고 왼손에는 활과 살을 들었다. 병장(兵仗)안에 무릇 1백여 인을 세워 두는데, 이를 양대(隊)로 나누어, 매양 인사(人使)가 나갈 때는 앞에 있다가 광화문에 이르면 말에서 내려 정지하고 들어가지 않는다. 귀관(歸館)하면 다시 순천문의 외문(外門)에 서 있는다. 행렬이 극히 정제하고 기율이 있어 낭기(郎騎)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3 권



병 기 兵器



범엽서63)(范曄書 후한서)에 이르기를 ‘이(夷)는 뿌리[柢]이니, 어질어서 생육하기를 좋아함[仁而好生]을 말하는 것이니, 만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것이므로 그 천성이 유순하다.' 하였다. 따라서 서융(西戎)이 싸움을 좋아하는 것과는 같지 않은 것이다. 고려는 본래 기자(箕子)가 팔조(八條)로 교화한 땅이지만, 그러나 그 병기가 매우 간단하고 성긴 것이 어찌 그 성품에 근원하여 그런 것이겠는가? 병법에 이르기를 ‘병기가 견고하지 못하면 맨손으로 치는 것과 같다' 하였다. 고려 사람의 병기가 성기고 간단한 것은 여러 차례 흉노(匈奴)에게 곤액(困扼)을 당하여 능히 더불어 겨루지 못한 까닭이다. 그러나 습속이 다른 병기라 해도 각각 베푸는 바가 있는 것이니, 알아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그 명물(名物)을 갖추어 완쪽에 그린다.



행고 行鼓



행고의 모양은 아악(雅樂)의 작은 북[搏拊]과 약간 닮았는데 중강(中腔 북의 불룩한 부분)이 조금 길고 구리 고리로 장식하였으며, 보라색 띠로 죄어 허리 아래 매었다. 군대가 행진하면 앞에서, 쇠징[金 ]과 간격을 두고 치는데 그 음절이 자못 느리다. 쇠징의 모양은 중국의 제도와 다르지 않으므로 생략하고 그리지 않는다.



궁시 弓矢



궁전(弓葥)의 제도는 형상이 간략하여 탄궁(彈弓)과 같다. 몸집의 전 길이가 5자이며, 화살은 대를 사용하지 않고 버드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더 짧고 작다. 화살을 쏠 때는 시위가 가득히 당기어지기를기다리지 않고 온 몸을 들어 쏘아 보내니, 화살이 비록 멀리 나가기는 해도 힘은 없다. 전문수위(殿門守衛)와 장위군 내의 기병 및 중검랑장(中檢郞將)이 모두 호창(虎韔 활집이름)에 살을 끼고 있으니, 이는 뜻하지 않은 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관혁 貫革


과녁의 모양은 대략 도고(鞉鼓)와 같은데, 양변에 모두 가죽으로 만든 귀가 있어서 움직이면 소리가 나며, 창[矛] 위에 꾀어 달았다. 대(隊)마다 약 20여 인이고, 대례(大禮)에는 천우좌우장위군(千牛左右仗衛軍)으로 잡게 한다.


등장 鐙杖



등장은 국왕이 조서를 받을 때마다 베푸는데, 위는 말둥자를 만들고, 대[竿]에는 붉은 칠을 하였다. 사자가 앞으로 나갈 때 천우위군(千牛衛軍) 수십인이 이를 잡고, 왕의 행차에는 앞에 있는데, 등자는 도금으로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제도는 모두 쇠로 만들었다.



의극 儀戟



의극(의장에 쓰는 창)은 두 가지 등급이 있다. 회경문(會慶門) 안에 각각 12개를 진열하고, 상하를 금동(金銅)으로 장식하였는데 형체가 매우 크다. 조서를 맞고 연회를 베풀 때는 병장(兵仗) 안에 진열된 것은 크기가 겨우 6자쯤 되는데, 대체로 중국과 대략 같으나 제작의 대소가 같지 않을 뿐이다.



호가 胡笳



호가의 제도는 위가 빨고 아래는 굵으며, 그 모양이 약간 짧다. 사자가 군산도(群山島)에 처음 이르렀을 때 순위장(巡尉將 순시하는 위의 장수)이 주졸(舟卒 수병)을 맞아 푸른 옷을 입고 이를 부는데, 그 소리가 오열하는 듯 곡조를 이루지 않고 오직 무리로 시끄럽게 더들썩함이 문맹(蚊虻모기와 등에)의 소리처럼 들렸을 뿐이다. 조서를 맞을 때는 앞에서 행진하며, 매양 수십 보마다 문득 조금 물러나 조여(詔輿)쪽으로 얼굴을 돌려 불고, 소리가 그쳐야 행진을 하는데, 그런 뒤에야 징과 북을 쳐서 박자를 맞춘다.



수패 獸牌



수패(방패의 일종)의 제도는, 몸체는 나무이고 그 뒤에 가죽을 덮었으며 산예(狻猊 사자) 모양을 그렸다. 위에 다섯 개의 칼을 꼿고 꿩 꼬리로 가리웠는데, 그것은 자신을 보호하고 또 능히 상대방을 찌를 수 있으나, 그 견고하고 예리함을 남에게 훤히 보이지 않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다만 여러가지 유희하는 아이가 가지는 물건 같으니, 족히 시석(矢石)을 막아내지 못할 듯하다. 지금 고려의 병장 가운데는 두 가지가 모두 있으나 작고 큰 차가 있을 뿐이다.



패검 佩劍



패검의 장식은 모양이 길고 날이 예리하여 백금(白金)과 오서(烏犀 검은 물소뼈)로 섞어 만들었다. 해사어피(海沙魚皮 바다상어 가죽)로 칼집을 만들고, 곁에 환뉴(環紐 칼집 둘레에 고리를 달아 매는 것)를 만들어 색 끈으로 꿰거나, 혹은 혁대(革帶)상옥체(象玉王彘)봉필(琫珌 칼의 장식, 즉 위의 장식은 봉, 아래 장식은 파이다.) 등속으로 하니, 역시 옛날의 유제(遺制)이다. 문위교위(門衛校尉)와 중검랑기(中檢郞騎)가 모두 찼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4 권



기 치 旗幟



고려의 의장제도[制度]는 매양 재제(再製)와 사천(祀川)할 때는 10면에 큰기를 세우며, 각각 그 방위의 빛깔에 따라 신물(神物)을 그리고 이를 ‘신기’(神技)라 하니, 그 제도가 매우 넓다. 기마다 비단 몇 필(匹)을 쓰는데, 아래에는 바퀴를 달아 수레를 만들고, 수레마다 붉은 옷 입은 장위군(仗衛軍) 십수 인이 끌고 가다가 왕이 있는 곳을 따라 차례로 서 있게 마련이다. 사면에는 각각 큰 새끼줄을 달아 풍세(風勢)에 대비하는데, 높이가 10여 장(丈)이다. 나라 사람들은 신기를 세운것을 바라보면 감히 그곳을 향하여 가지 못한다. 오직 조서가 처음 입성하여 예를 받을때까지 만 모두 특별히 사용하니 이는 송 나라 황제의 명령을 존중하는 것이다. 이밖에 오방(五方) 중기(中旗)가 있으니, 군산도 (群山島)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보았는데, 오직 홍기(紅旗)에만 용호(龍虎)를 장식하였고 맹군 갑사(甲士)가 잡고 있었다. 또 작은 백기(小白旗)가 있는데, 크기가 손바닥에도 차지 않으며, 창에 매단 것이 아이들 장난과도 같다. 지금 아울러 그림에 나열한다.



상기 象旗



상기(코끼리를 그린 기, 남방의 상징)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旒)이 모두 검으니 이는 수수(水數 즉 북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그렸는데, 앞에 한 호아 (胡兒 동호[東胡]아이, 즉 굴안 사람)가 한 자루의 금과(金戈)를 들고, 다시 큰 새끼줄로 그 머리를 끌어 잡아당기니 왼쪽을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행진할 때는 그 뒷 멍에에 달고 지세(地勢)에 따라 붙둘고 전진하며, 예를 행할 때가 되면 방향에 의하여 세우는데, 상기의 위치는 검은것을 우선으로 한다. 「예경」(禮經 예기)을 살피건대, ‘무거’(武車)는 깃발을 펴고, 덕거(德車)는 깃발을 맨다.64) 하였으니, 수레에 기를 세우는 것은 예로부터 이미 그린 것이요, 특별히 동이(東夷)만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겠다.



응준기 應集旗



응준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旒]이 모두 붉으니, 이는 화수(火數 즉 남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새와 새매가 날아 오르는 모양을 그리니, 빠르고 속한 의취가 있다.

「주관」 (周官 「주례」<周禮>에 ‘새매로 기를 만든다’65) (鳥集爲旗)하였으니, 지금 이 붉은 기에 새매를 쓴 것도 또한 우연히 옛 제도에 부합한다. 그 항렬은 상기의 다음에 있다.



해마기 海馬旗



마기(馬旗)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푸르니, 목수(木數 즉 동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 한 마리의 말을 그렸는데, 앞 어깻죽지에 갈기가 있어 마치 불이 치솟는 것 같으니, 대개 말은 화축(火畜 불기운을 지닌 가축)이기 때문이다. 푸른 기에 그려서 나무와 불이 상생(相生)하는 것을 상징하고 위치는 청룡(靑龍 동방의 별자리 이름)과 주작(朱雀 남방의 별자리 이름) 두 신(神)을 응하였다. 그 항렬은 응기(應旗)의 다음이다.



봉기 鳳旗



봉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누르니, 토수(土數 즉 중앙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 나는 봉(鳳)을 그리니, 봉의 물건됨이 몸에 오채(五彩)를 띠었고, 위치는 중궁(中宮)을응하였다. 대개 오행(五行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은 흙[土]이 아니면 나지 못하는데, 다섯 방위의 빛깔이 우모(羽毛 봉황새의 털)에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형상을 취한 것이다. 그 항렬은 태백기(太白旗) 다음에 있다.



태백기 太白旗



태백기는 둘이며, 그 제도는 몸체와 술이 모두 희니 금수의 수[金數 즉 서방의 수)를 상징한 것이다. 가운데에는 사람 하나를 그렸는데, 금관을 쓰고 규옥(圭玉)을 들었으며, 누런 옷에 초록 겉옷을 걸쳤는데, 이는 태백신(太白神)을 상징한 것이다. 한 마리의 거북을 탔는데, 거북은 뱀의 머리가 있어, 그 합한 모양을 취하였다. 대개 금(金)은 수(水)의 모체가 되고 수는 능히 금을 생(生)하는 것이니 위치는 백호(白虎 서방의 신)와 진무(眞武)66)의 두 신에 응한다. 「예경」(禮經)에 ‘국군(國君)의 행차에는 앞에 주작(朱雀)이 있고 뒤에 진무(眞武)가 있으며, 왼쪽에 청룡, 오른쪽에 백호가 있다’ 하였으니, 두 기에 서로 나타난 것이 자뭇 고제 (古制)에 부합한다. 그 항렬은 마기(馬旗)의 다음에 있다.



오방기 五方旗



북방의 기는 흑색의 한 술[一旒]로 된 것이며 그 너비는 두 폭인데, 그림이나 수놓은 무늬가 없다. 사신이 처음 국경에 이르면서 부터 임성할 때까지 여러 기와 더불어 전도(前導)가 되며, 항렬은 차례가 없고 세워 놓은 것도 무수한데 푸른 옷 입은 군사로 이를 잡게 한다 . 처음에 국신 사부(國信使副 국신을 가지고 가는 사행(使行)의 정사와 부사)가 구례(舊例)에 의하여 금수(錦繡)로 된 사이사이에 번쩍이는 광택이 있는 기 40면(面)을 주었다가, 조서가 처음 입성할 때 주인(舟人 뱃사람)을 시켜 들고 전도하게 하였는데, 들판이 휘황하게 비치니, 고려 사람들이 놀라 구경하면서 자못 스스로 그 비루한 것을 부끄러워 하였다.

남방의 기는 붉은 색 한 술[赤色一旒]로 된 것으로, 가운데에 신인(神人)을 그렸는데, 손에 나무 채찍을 들어 다른 것들과 차이가 있다. 오방의 기 가운데 홀로 붉은 기만이 많았다.

동방의 기는 푸른색 한 술로 된것인데, 가운데에 그림과 수가 없다. 넓고 좁은것, 또는 많고 적기가 여러 기들과 비슷하다.

서방의 기는 흰색 한 술로 된것으로 역시 그림과 수가 없으며, 여러 기에 비하여, 숫자가 약간 적었다.

중앙의 기는 황색 한술로 된 것이며, 역시 그림과 수가 없다.

오직 군산도(群山島)와 자연도(紫燕島)에서 신사(信使)를 맞이하여 해안에 진열했을 때에만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여러 채색이 섞인 가운데 번적이는 광택이 나는데, 네 모퉁이에 운기(雲氣)를 그린 것이 있는데, 이는 여러 고을의 순위(巡尉)와 전선(戰船)의 나병(邏兵)이 들고 있었다.



소기 小旗



소기의 제도는 붉은 술에 흰 바탕으로 되고, 위에 초록색 구름을 그렸다.

사신이 입성하고 국왕이 조서를 맞이할 때 용호군(龍虎軍) 수만 인이 갑옷을 입고 기를 잡고 길 양편으로 행진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5 권



거 마 車馬



나라가 있으면 반드시 군사가 있는데, 군사는 수레로 운송하며 수레는 말로 끌게 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나라를 제정할 때에 반드시 수레의 수를 보아 그 크고 작음의 차등을 두었으니, 「시」(詩 모시 毛時)의 송(頌)에 노(魯)와 위(衛)의 부(富)를 칭송함도 모두 말(馬)로써 말한것이다. 고려는 비록 해국(海國)이나, 무거운 짐을 끌고 먼 곳을 가는 데는 거마를 폐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토지가 낮고 좁으며 도로에는 모래와 자갈이 많아 중국과 비교되지 않으므로 수레의 제도와 말을 어거하는 방법도 또한 다르다.



채여 采輿



채여는 셋인데, 하나는 조서를 봉안하고, 또 하나는 어서(御書)를 봉안하며, 앞의 한 채여에는 대금향구(大金香毬)67)를 담았다. 그 제도는 오색 무늬의 비단을 쓰고 사이사이 금수(錦繡)를 섞어 맺었으며, 위엔 나는 봉[飛鳳]을 만들고 네 모퉁이에는 연꽃이 보이는데 행진하면 흔들린다. 아래에는 붉게 칠한 좌석을 앉히고, 네개의 대[竿]에는 용머리[龍首]를 만들어, 강학군(控鶴軍) 40인으로 이를 메게 한다. 앞에서는 두 사람이 의장을 잡고 맞이하여 인갈(引喝 벼슬아치가 행차할 때 앞에서 행인이 비키도록 소리치는 것) 하니, 행동이 매우 엄숙하다. 왕세자(王世子)와 고려의 관리들이 조서를 맞아 길목에서 채여를 바라보고 절하였다.



견여 肩與



견여의 제도는 대략 호상(胡床)과 같은데, 등(藤)으로 상란(翔鸞 나는 난새)을 꿰고, 꽃무늬로 붉게 칠했으며, 사이사이 금을 칠하여 꾸몄다. 위에는 비단방석을 깔고, 네 개의 대에는 각각 채색 실을 싸매었다. 군산도로부터 입성할 때까지 매양 사관을 나서면 반드시 견여로 받드니, 사부(使副 정사와 부사)가 참람된 예라 하여 감히 타지 못하고, 오직 전장(前丈 얖선 장위군) 가운데 행진하여 의식을 삼았을 뿐이었다.



우거 牛車



우거의 시설은 제작이 간략하여 아주 법도가 없다. 아래에 두 개의 수레바퀴가 있고, 앞의 멍에에 소를 매어 끌게 하는데, 매양 그 위에 물건을 싣고는 반드시 새끼줄로 꿰매어야 비로소 기울어 엎어짐을 면할 수가 있다. 더구나 그 나라는 거개가 산길이어서, 행진하면 울퉁불퉁 흔들리니, 다만 예를 갖춘 도구일 뿐이다

왕마 王馬



왕이 타는 말은 안장이 매우 화려하여, 혹은 금 혹은 옥으로 되었으니, 모두 조정(朝廷 증국을 지칭)에서 내린 것이다. 평상시 탈 때에는 말에 갑옷을 입히지 않고, 오직 팔관재(八關齋)와 조서를 받는 큰 예식이 있을 때에만 마갑(馬甲)위에 다시 안장과 고삐를 더하고, 수놓은 휘장(繡장)을 씌우며, 혁대와 번영(繁纓 여러 가닥의 끈)에 모두 난성(鸞聲 방울소리)이 어울려 또한 매우 화려하다. 다만 중국에 비하여 안장 뒤에 다시 수놓은 방석을 더하였으니, 또한 시종관(侍從官)이 융좌( 융坐 융가죽으로 만든 방석, 융은 짐승이름 )를 까는 것과 같다.



사절마 使節馬



고려는 대금(大金 여진족이 세운 나라 이름)과의 거리가 멀지 않으므로 그 나라에는 준마(駿馬)가 많다. 그러나 말 기르는 사람[ 人]이 길들이기를 잘못하여, 그 걸음이 빠른 것은 모두 천연적인 것이요, 사람의 힘을 빌어서 그런것이 아니다. 안장의 제도는 오직 왕이 타는 것만이 붉은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금옥 장식을 더한 것이고, 대신들은 보라색 비단에 수놓은 안장에다 은으로 장식을 하였다. 나머지는 글안의 풍속과 같이 또한 등급이 없다. 처음 사신이 사관에 도착하면 날을 가려 조서를 받는데, 받드는 안마(鞍馬 안장 갖춘 말 )가 대략 왕의 제도와 같았다. 그래서 사자가 참람되고 사치하다고 굳이 사양하기를 여러 차례 한 뒤에야 고려 관원이 타는 것과 같은 다른 말로 바꾸었다. 상절(上節)이 탄것은 사부(使副)의 것보다 한 등급 내리고, 중절(中節)은 등급에 따라 강쇄하였다.



기병마 騎兵馬



기병이 탄 안장은 매우 정교하다. 나전으로 안장을 만들고, 안장의 끈과 고삐는 백지(栢枝)와 마노석(瑪瑙石 보석의 일종)으로 만들었는데, 사이사이 황금과 오은(烏銀)을 섞어 장식하였다. 양쪽 원( 수레의 뒤를 누르는 장치)에는 거위 목을 그렸는데 몸의 배나 되며, 고려 사람은 이를 ‘천아’(天 )라 한다. 가죽 고삐와 방울 울리는 것도 또한 옛 뜻이 있다.



잡재 雜載



고려는 산이 많고 도로가 험하여 수레로 운반하기가 불리하다.

또 낙타(駱駝)로 무거운 것을 끄는 것도 없으며 사람은 매우 가벼운 것이나 지고 간다. 그래서 이것저것 싣는 데는 말을 많이 쓴다. 그 제도는 두개의 그릇을 좌우에 장치하고 말 등에 옆으로 걸쳐 놓은 다음 물건들을 모두 그 그릇 속에 넣어둔다. 머리를 얽고 가슴을 매는 것은 승기(乘騎 타는말)의 제도와 같으며, 앞에서 끌고 뒤에서 모는데 그 걸음이 자못 빠르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6 권



관 부 官府



당・우(唐虞) 때에는 백 명의 관원을 두었고 하・상(夏常) 때는 관원이 늘어났으나 그것만으로도 잘 다스릴 수 있었다. 주(周) 나라에 이르러서는 상세하게 갖춰져, 천지(天地)와 사시(四時)를 위로 관찰하고 아래로 살피어 도(道)에 맞게 운영(運營)하여 정사가 잘 거행되었으니, 어찌 형식만 갖추어 실지와 맞지 않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고려는 초기에 12등급의 관원을 두고 오랑캐의 언어로 명칭을 붙이고서 다시 정화(淨化)하지 않다가, 황화(皇化 송나라 황제의 교화)를 입게 되면서부터 관(官)을 설치하고 부(府)를 두어 중화를 모방하여 부르기는 하였으나, 직(職)에 임하여 일을 처리할 적에는 오히려 이풍(夷風)을 그대로 따르므로 이따금 형식만 갖추고 실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의리를 사모하는 뜻은 역시 가상하다고 할만하다.



대성 臺省



관부(官府)의 설치는 대개 모두 조정(朝廷)의 아름다운 명칭을 모방하였으나 그 직(職)을 맡기고 벼슬을 제수함에 이르러서는 실지가 이름과 맞지 아니하여, 한갖 형식만 갖춘 것이고 보기에만 좋을 뿐이다.

상서성(尙書省)은 승휴문(承休門)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고 양쪽의 행랑은 10연 간씩이며, 중앙에 당(堂) 3간을 만들었는데 곧 관원들이 일을 보도록 한 곳으로서, 정사가 여기에서 나온다.

상서성 서쪽과 춘궁(春宮) 남쪽 앞에 문 하나가 트였고 안에 3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는데, 중앙의 것이 중서성(中書省)이고 왼편의 것이 문하성(門下省)이고 윗편의 것이 추밀원(樞密院)이니, 곧 국상(國相)・평장사(平章事)・지원사(知院事)가 정사를 처리하는 곳이다.

예빈성(禮賓省)은 건덕전(乾德殿) 앞쪽 옆에 있는데 사방 이웃 나라의 빈객(賓客)을 관장하는 곳이고, 팔관사(八關司)는 승평문(昇平門) 동쪽에 있는데 재제(齋祭)의 일을 맡은 곳이고, 어사대(御史臺)는 좌동덕문(左同德門)안에 있는데 풍헌(風憲 풍교와 헌장)을 펴는 소임을 맡은 신하들이 거처하는 곳이고, 상승국(尙乘局)은 거마(車馬)를 저장하는 하는 곳이고, 군기감(軍器監)은 갑장(甲仗)을 간수 하는 곳이다.

빈성(賓省)은 예의(禮儀)를 맡고, 합문(閤門)은 찬도(贊導)를 맡아 보고, 대영창(大盈倉)은 보화(寶貨)를 저장는 내탕(內帑)이고, 우창(右倉)은 곡식을 축적(蓄積)하는 곳인데, 이것들은 모두 왕이 거처하는 내성(內城)에 있다.

광화문(光化門) 밖으로 말하면 관도(官道)의 북쪽에 있는 것은 상서호부(尙書戶部)요, 또 그 동쪽의 것은 공부(工部)・고공(考功)・대악국(大樂局)・양온국(良瑥國)으로 네개의 문이 모두 북으로 열지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각각 이름이 표시되어 있다.

관도의 남쪽에는 병・형・이(兵形吏) 삼사(司三)가 있는데, 그 문은 남쪽에 열지어 북쪽을 향하였고, 또 동남쪽으로 수십 보쯤에 있는 것은 주전감(鑄錢監)이고 조금 북쪽의 것은 장작감(獎作監)이다.

감문(監門)・천우(千牛)・금오(금오) 3위(가)는 북문(북문) 안에 있는데 금오가 조금 동쪽에 가까이 있는것은 호위의 임무를 맡고 있기 때문이다.

대시(大市)・경시(京市) 2사(司)는 남쪽 큰 거리에 있는데 동.서로 마주하고 있으니, 관시(關市)의 정사를 균형 있게 하기 위한 때문이다.

관현(管絃악기) 같은 것에 있어서도 방(坊)이 있고 궁전(弓前)은 사(司)가 있으며 복두(僕頭)는 소(所)가 있고 점천(占天 관상하는것)은 대(臺)가 있으니, 무릇 이들은 모두 외성(外城) 안에 있다.

또한 개성부(開成府)가 성(城)과 40리 거리에 있는데, 모든 백성들의 혼인.전답.투송(鬪訟)하는 일을 관리한다.



국자감 國子監



국자감은 전에 남쪽 회빈문(會賓門) 안에 있다. 앞에 대문이 있는데 편액을 ‘국자감’이라고 했다. 중앙에 선성전(宣聖殿)을 세우고 양쪽 향랑( )에 재사(齎舍)를 설치하여 제생(諸生)들을 거처하게 했다. 전의 제도는 지극히 좁았는데 지금은 예현방(禮賢坊)으로 옯겼으니, 학도가 많이 불어났기 때문에 그 제도를 키운 것이다.



창름 倉廩



창름의 제도는 관약(關 빗장이나 자물쇠)을 걸지 아니하고 밖에 담장[牆垣]을 쌓되 오직 문 하나를 내어 도적을 막는다. 내성(內城) 안에 3창(倉)이 있었는데,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우창(右倉) 뿐이다.

선의문(宣義門) 밖에 있는 창고는 ‘용문창’(龍門倉)이요 홍주(洪州) 산중(山中)에 있는 창고는 ‘부용창’(富用倉)이니, 세속에 전하기를 ‘부용창’(富用倉)이라 함은 잘못이다.

대의창(大義倉)은 전에는 서남문 (西南門)에 있었는데 쌀 3백만을 쌓았었다. 화재를 만나 모두 타 버리게 되자 드디어 장퍠문(長覇門)으로 옮겼으니, 고려 사람들이 여러 물이 모이는 곳이므로 화재를 예방할 수 있따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해염(海鹽)・상평(常平) 2창(創)이 있는데, 서로 거리가 수백 보쯤 된다. 오직 부용창과 우창은 평상시에는 풀지 아니하고 전쟁・수재・한재에 대비하는 것을 저장하는데 그 쌓은 모양이 둥근 집과 같으니, 바로「시경」(詩經)에 이른바 ‘또한 큰 창고가 있도다’ 한 것이 이것이다. 바닥에다 훍으로 대를 쌓았는데 그 높이가 두 자「尺」쯤 되며 풀을 엮어 멱서리[ ]을 만들어 그 속에 미곡 한 섬씩을 담아 쌓아 올렸는데, 그 높이가 두어 길[丈]이나 되어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그리고 그 위를 다시 풀로 덮어 비바람을 막는다.

대개 쌀은 기운이 소통되지 아니하면 부패하게 되는데, 지금 고려의 창름에는 비록 두어 해가 된 쌀이라도 새로운 것은 멱서리로 쌓는 법을 써서 다소 그 기운이 소통하기 때문이다.

국상(國相)에게는 해마다 쌀 4백 20멱서리를 주되, 치사(致仕 지금의 정년퇴임과 같다)하면 반으로 주고, 상서(尙書). 시랑(侍郞)이하는 2백50멱서리, 경(卿). 감(監). 낭관(郎官)은 1백50멱서리, 남반관(南班官)은 45멱서리, 제군(諸軍)의 위(衛). 녹사(錄事)는 19멱서리인다, 그중 무신(武臣)은 이등급에 비교하여 문관(文官)과 서로 비등하게 올려준다.

내・외직(內外職)의 현임(現任)으로서 녹을 받는 관원이 3천여 명이고, 산관 동정(散官同正)으로서 녹은 없이 전토(田土)를 급여(給與)받은 사람이 또한 1만 4천여 명인데 그 전토는 모두 지방 고을(外州)에 있으며, 전군(佃軍)이 농사지어 시기에 맞추어 가져다 바치면 나누어 급여해 준다.



부고 府庫



봉선고(奉先庫)는 광화문(廣化門) 동쪽과 순천관(順天館)의 관도(官道) 북쪽에 있다. 앞문이 2간인데 조금 동쪽으로 문을 냈고 왼쪽에 집 하나가 있는데 그 제도가 지극히 높아 담장 밖으로 솟아 있다.

오른쪽에 누각(樓閣) 하나가 있는데 동쪽면에는 창문을 내지 않았고 오직 그 기둥에 방시(방示)하기를 ‘저수 방화’(貯水防火)라고 하였다. 대개 그 안에 저장한것은 바로 선왕(先王)을 받드는 제기(祭器)와 생뢰(牲牢 제물)요, 또한 국기(國忌 왕이나 황후의 제삿날)에는 재료(齋料)를 여기에서 지급하여 모든 절(寺) 에 풀어 준다.



약국 藥局



고려의 옛 풍속은 사람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아니하고 오직 귀신을 섬길줄만 알아, 저주(詛呪) 하여 이겨내기를 일삼는다. 왕 휘(王徽)때 사신을 보내어 입공(入貢)하고 의술(醫術)을 구해 간 뒤로부터 사람들이 점차로 배워 익혔으나, 그 방술에 정통(精通)하지는 못했다.

선화(宣化) 무술년(고려 예종<睿宗> 13.1118) 에 사신이 와서 소장( 소章)을 올려, 의직(醫職)을 내리어 가르쳐 주기를 청하므로, 상(上)이 그 건의를 허락하여 드디어 남줄(藍茁) 등을 고려로 보냈는데, 그런 지 두 해 만에 돌아왔다.

그 뒤부터 의술을 통한 자가 많아져서, 보제사(普濟寺) 동쪽에 약국(藥局)을 세우고 3등급의 관원을 두니, 첫째는 ‘태의’(太醫), 둘째는 ‘의학’(醫學), 세째는 ‘국생’(局生)이라 하여, 푸른 옷에 나무 홀(笏 벼슬아치가 조정에 들어갈 때 조복에 갖추어 손에 쥐는것) 차림으로 날마다 그 직에 임했다.

고려는 다른 물화는 모두 물건으로써 교역(交易) 했으나, 오직 약을 사는 것은 간혹 전보(錢寶)로써 교역하였다.



영 어 囹圄



영어의 만듦새는 그 담장이 높아 모양이 환도(環도)와 같고 중앙에 집이 있으니, 대개 옛날의 원토(園土 감옥)와 같이 만든 것이다. 지금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어 형부(形部)와 마주하고 있다.

가벼운 죄인은 형부로 보내고 도둑 및 중죄인은 옥(獄)으로 보내는데, 포승으로 잡아매어 한 사람도 도망갈 수 없고, 또한 가추(枷 )를 채우는 법도 있다. 그러나 지체시키기만 하고 판결을 내리지 아니하여 철을 넘기고 해를 지나게 되기까지 하는데, 오직 금(金)으로 속바쳐야만 풀려나게 된다.

무릇 장형(仗形)을 집행하는 법은, 하나의 큰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두손을 그 위에 묶어 땅에 엎드리게 한 다음에 치는데, 태장(笞杖)은 매우 가벼워 백에서 열까지를 그 경중에 따라 가감(加減)한다.

오직 대역(大逆)과 불효(不孝)죄는 참형(斬刑)하고, 다음은 뒤로 결하여 비골( 骨 넓적다리뼈)과 가슴이 서로 닿도록 하여 피부가 터지게 되어야 그만두니, 또한 거열(車裂)과 같은 유이다. 외방 고을에서는 형살(刑殺)을 시행하지 아니하고 모두 칼을 쉬워 왕성(王城)으로 보내는데, 해마다 8월에 여수(廬囚 죄상을 참작하여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는 것) 한다.

오랑캐들의 성격이 본디 인자하여, 죽을 죄라도 거의 용서하여 산골이나 섬으로 유배(流配)하고, 사면해 주는 것은 세월의 다소와 죄의 경중을 헤아려 용서하여 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7 권



사 우 祠宇



고려는 본래 귀신을 두려워하여 믿고 음양(陰陽)에 얽매여, 병이 들면 약은 먹지 않고 부자(父子) 사이 같은 아주 가까운 육친이라도 서로 보지 않고 오직 방자와 압승68)(壓勝)을 알 따름이다.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그 풍속이 음란해서 저녁이 되면 으례 남녀가 떼지어 난잡한 노래를 하고 귀신⋅사직⋅영성69)(靈星)을 제사하고, 10월에 하늘을 제사하기 위해 큰 모임을 갖는데 그 것을 동맹(東盟)이라 부른다. 그 나라 동쪽에 굴이 있는데 수신(수神)이라 부르고, 역시 10월에 맞아다가 제사한다.70)’ 하였다. 왕씨(王氏)가 나라를 차지한 이후 산에 의지하여 나라 남쪽에 성을 쌓고 건자월(建子月 북두성의 자루 끝이 자(子)의 방향을 가리키는 달)에 관속들을 거느리고 의장물(儀物)을 갖추고 하늘에 제사한다. 후에 글안(契丹)의 책명(冊命)을 받을 때와 그들이 세자(世子)를 세울 때에는 역시 거기서 예식을 거행하였다. 그들이 10월에 동맹하는 모임은, 지금은 그 달 보름날 소찬을 차려놓고 그것을 팔관재(八關齋)라하는데 의식이 극히 성대하다. 그 조상의 종묘는 나라의 동문 밖에 있는데, 왕이 처음 습봉(襲封 왕위의 계승을 말함) 할때와 3년에 한 번씩 하는 큰 제사 때에만 거복(車服)과 면규(冕圭)를 갖추고 친히 제사하고 그 나머지는 관속들을 나누어 파견한다.

원단(元旦)과 매달 초하루와, 춘추와 단오에 다 조상의 신주에 제향을 드리는데, 부중(俯中)에 그 화상을 그려 놓고 중들을 거느리고 범패(梵唄)를 노래하여 밤낮을 계속한다. 또 일반이 부처를 좋아하여 2월 보름에는 모든 불사(佛寺)에서 촛불을 켜는데 극히 번화하고 사치스럽다. 왕과 비빈이 다 가서 구경하고 나라 사람들은 도로를 시끄럽게 메운다. 그들이 신사(神祀)로 백리 안에 있는 것에는 사시에 관원을 보내어 태뢰(太牢 제물로 쓰는 소) 로 제사하게 한다. 또 3년에 한 차례씩 있는 큰 제사는 그 경내에 두루 다 베풀어 진다. 그러나 기일이 되어 신을 제사한다는 명목으로 분담시켜 백성의 재물을 거둬들여 백금(白金 은을 말함)1천냥을 모으고, 나머지 물건들도 이와 맞가는 데 그것들을 신하들과 함께 나누어 갖는다.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왕이 거처하는 궁실 말고는 오직 사우(祠宇)의 만듦새만이 화려하다. 여러 사찰 중에서 안화사(安和寺)가 으뜸인데, 그것은 거기에 신한(宸翰 임금이 쓴 글을 말함)을 봉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곳에서의 일로 도로에서 지내온 것과 재사(齋祠)를 가 보고서 이목에 접한 것들을 취해서 그림으로 그리고, 그 나머지 보지 못한 제도는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복원관 福源觀



복원관71)은 왕부(王府 왕궁을 말함) 북쪽 태화문(太和門) 안에 있는데 정화(政和 송 휘종(宋 徽宗) 연호. 1111∼1117) 연간에 세워진 것이다. 앞 방은 ‘부석지문’72)(敷錫之門)이라 하였고 다음 방은 ‘복원지관’(福原之觀)이라 하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전내(殿內)에 삼청상73)(三淸像)을 그렸는데 혼원황제(混元皇帝)의 수염과 머리털이 다 감색이어서 우연히 성조(聖朝)께서 진성(眞聖)74)의 모습을 그린 뜻과 합치한다니 또한 가상하다. 예전에는 나라 사람들이 허정(虛靜)의 가르침(도교를 말함.)을 듣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사람마다 다 귀의하여 신앙할 줄 안다고 한다.



정국안화사 靖國安和寺



안화사는 왕부의 동쪽에서 산길을 3∼4리 가면 점차로 수풀이 깨끗하고 우거진 산록이 험악한 것이 보인다. 관도(官道)의 남쪽에 있는 옥륜사(玉輪寺)에서 수십 보를 지나가면 작은 길이 구불구불 얽혀 있고 높은 소나무가 길을 끼고 있는데, 삼엄하기가 만 자루의 미늘창을 세워놓은 듯하다. 맑은 물이 여울져 뛰어오르며 놀란 듯 달려가 돌을 씻어내는 것이, 쇠를 울리고 옥을 부수는 것 같다. 시내를 가로질러 다리를 놓았고 건너쪽 강언덕에 세운 두 개의 정자가 여울 돌무더기에 반쯤 잠겨 있는데, 청헌정(淸軒亭)・연의정(連의亭)이 그것들로 서로간의 거리는 수백 보가 된다. 다시 깊은 골짜기 속으로 들어가서 산문각75)(山門閣)을 지나 시냇물을 끼고 몇 리를 가 안화문(安和門)으로 들어가고, 다음에 정국안사로 들어간다. 절의 액자는 곧 지금의 태사(太師) 채경76)(蔡京)의 글씨이다. 문의 서쪽에 정자가 있는데 방(榜)이 ‘냉천’(冷泉)으로 되어 있다. 또 좀 북쪽으로 가면 자취문(紫翠門) 으로 들어가고, 다음에는 신호문(神護門)으로 들어간다. 문 동쪽 월랑에 상(像)이 있는데 그것은 제석77)(帝釋)이다. 서쪽 월랑의 대청을 ‘향적’(香積)이라 하며, 가운데에는 무량수전78)(無量壽殿)이 세워져 있고, 그 곁에 두 누각이 있는데 동쪽의 것을 ‘양화’(陽和) 라하고 서쪽의 것을 ‘중화’(重華)라 한다. 여기서부터 뒤에는 세 문이 늘어서 있는데 동쪽 것을 ‘신한’(神翰)이라하며, 그 뒤에 전각이 있는데 ‘능인’79)(能仁)이라고 한다. 전각의 두 액자는 실로 금상 황제께서 내린 어서(御書)이다. 중문은 ‘선법’(善法)이라 하는데 그 뒤에 선법당80)(善法堂)이 있고, 서문은 ‘효사’(孝思)라 한다. 뜰 뒤에 전각이 있는데 그것을 ‘미타당’(彌陀堂)이라고 한다. 전각 사이에 두 곁채가 있는데 그 중 하나에는 관음81)(觀音)을 봉안하였고 또 하나에는 약사82)(藥師)를 봉안하였다. 동쪽 월랑에는 조사상83)(祖師像)이 그려져 있고 서쪽 월랑에는 지장왕84)(地藏王)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는 승도(僧徒)의 거실이다.

그 서쪽에 재궁85)(齋宮)이 있는데, 왕이 그 절에 오면 심방문(尋芳門)으로 해서 그 위(位)를 들러 간다. 앞문은 ‘응상’(凝祥), 북문은 ‘향복’(嚮福)이며, 가운데는 인수전(仁壽殿)이고 뒤는 제운각(齊雲閣)이다. 샘이 산 중턱에서 나오는데 달고 깨끗하여 사랑스럽다. 그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방(榜)이 역시 안화천(安和泉)이다. 화훼(花卉)・죽목(竹木)・괴석(怪石)을 심어서 놀고 쉬는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 토목과 분식(粉飾)이 은근히 중국 제도를 모방하였을 뿐 아니라 경치가 맑고 아름다와 병풍 속에 있는 듯하다. 고려인들은 규장(奎章 천자의 글을 말함)과 예조(睿藻 왕의 글을 말함)가 거기에 있기 때문에 더욱 엄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가서 삼절(三節)의 관속과 종리(從吏)를 거느리고 어서전(御書殿) 아래에서 배례하고서 불승들을 공양하여[飯僧] 복을 빌고 날이 저물어서 관사로 돌아가니, 실로 선화(宣和) 5년(123) 7월 2일 계축이었다.



광통보제사 廣通普濟寺



광통보제사는 왕부의 남쪽 태안문(泰安門) 안에서 곧장 북쪽으로 백여 보의 지점에 있다. 절의 액자는 ‘관도’(官道) 남향쪽에 걸려 있고, 중문의 방은 ‘신통지문(神通之門) 이다. 정전(正殿)은 극히 웅장하여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데 그 방(榜)은 ‘나한보전’(羅漢寶殿)이다. 가운데에는 금선(金仙)‧문수(文殊)‧보현(普賢) 세상이 놓여 있고86), 곁에는 나한 5백 구를 늘어놓았는데 그 의상(儀相)이 고고(古高)하다. 양쪽 월랑에도 그 상이 그려져 있다. 정전 서쪽에는 5층 탑이 있는데 높이가 2백 척이 넘는다. 뒤는 법당이고 곁은 승방인데 1백 명을 수용할 만하다. 맞은편에 거대한 종이 있는데 소리는 가라앉아 시원하지 못하다. 전례에 따라 예물의 나머지 말과 고려에서 정사와 부사에게 준 것 도합 2필에 백금 2근을 더해 향화(香花)와 과속(果속 과일과 채소)의 비용으로 주고, 불사(佛事)를 하고 불승을 공양하였다. 정사와 부사는 몸소 가지 않고 다만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하 삼절을 보내어 의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흥국사 興國寺



흥국사는 광화문(廣化門) 동남쪽 길 끝에 있다. 그 앞에 시냇물 하나가 있는데, 다리를 놓아 가로질러 넘어간다. 대문은 동쪽을 면하고 있는데 ‘흥국지사’(興國之寺)라는 방이 있다. 뒤에 법당과 정전이 있는데 역시 매우 웅장하다. 뜰 가운데 동(銅)으로 부어 만든 번간(幡竿 표기를 다는 장대)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 지름이 2척, 높이가 10여 장(丈)이고, 그 형태는 위쪽이 뾰쭉하며 마디에 따라 이어져 있고 황금으로 칠을 했다. 위는 봉새 머리[鳳首]로 되어 있어 비단 표기[錦幡]를 물고 있다. 다른 절에도 혹 있으나, 다만 안화사의 것에는 ‘대솔황제성수만년’(大宋皇帝聖壽萬年)이라 씌어져 있다. 그 들이 마음을 기울여 송축하는 뜻이 성심에서 나왔음을 보니, 그들이 성조(聖朝)께서 총애 회유하심을 후히 받는 것도 마땅한 일이다.



국청사 國淸寺



국청사는 서교정(西郊亭) 서쪽 3리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긴 낭하와 넓은 곁채에 높은 소나무와 괴석이 서로서로 비치며 둘러 있어 경치가 맑고 수려하다. 곁에 석관음(石觀音)이 벼랑 밑에 높이 서 있다. 근자에 사절이 지나가는데 국청사의 문을 경과할 때 그 곳 치의(緇衣) 차림의 승도(僧徒) 1백여 명이 떼지어 나와 구경을 하였다.



왕성내외제사 王城內外諸寺



흥왕사(興王寺)는 국성(國城) 동남쪽 한구석에 있다. 장패문(長覇門)을 나가 2리 가량을 가면 앞으로 시냇물에 다가 있는데 그 규모가 극히 크다. 그 가운데에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1018∼1085)연간에 내린 협저불상87) (夾紵佛像)과 원부(元符 1098∼1100) 연간에 내린 장경(藏經 대장경 또는 불경을 말함)이 있고, 양쪽 벽에는 그림이 있는데, 왕옹(王옹 고려숙종) 이 숭녕(崇寧 송 휘종 연호 1102∼1106)때의 사자(使者) 유규88) (劉逵) 등에게, ‘이것은 문왕(文王 고려 문종을 말함)께서 사신을 보내어 신종황제(神宗皇帝)께 고해 상국사89)(相國寺)를 모방해 만든 것으로, 본국인들이 우러러볼 수 있게 되었읍니다. 우러러 황은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것입니다.’ 하고 말한 적이 있었다.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홍원사(洪圓寺)이고, 장패문으로 들어가 시내의 북쪽은 숭화사(崇化寺)이며 남쪽은 용화사(龍華寺) 이다. 뒤로 작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타(彌陀)・자씨(慈氏) 두 절이 있다. 그러나 그리 완전하게 수리되어 있지는 않다. 숭교원(崇敎院)은 회빈문(會賓門)안에 있고, 보제(普濟)・도일(道日)・금선(金善) 세 절은 태안문(太安門)안에 있는데 정족(鼎足)을 이루고 솟아 있다.

관도(官道)의 북쪽 유암산(由암山)을 사이에 두고 또 봉선(奉先)과 미륵(彌勒) 두 절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조금 서쪽으로 가면 곧 대불사(大佛寺)이다. 왕부(王府)의 동북쪽으로 가면 춘궁(春宮 태자가 거처 하는 궁전)과 상거가 멀지 않은 곳에 두 절이 있는데 하나는 ‘법왕’(法王)이고 다음은 ‘인경’(印經)이다. 태화북문(太和北門)으로 해서 들어가면 구산(龜山)과 옥륜(玉輪) 두 절이 있는데, 그것은 안화사(安和寺)로 가는 길에 있는 절이다. 광진사(廣眞寺)는 장작감90)(將作監) 동쪽에 있고, 보운사(普雲寺)는 장경궁(長慶宮) 남쪽에 있다. 숭인문(崇仁門)에서 동쪽으로 나가면 곧 홍호사(洪護寺)이고, 또 동북쪽으로 안정문(安定門)을 나가면 귀법(歸法)・영통(靈通) 두 절이 있다. 순천관(順天館 송의 사절 일행이 묵는 관사) 북쪽에 작은 집 수십 간이 있는데 ‘순천사’(順天寺)라는 방이 붙어 있다. 사절이 관사에 와서부터 한 달 동안은 승도들이 계속 범패를 불렀으며, 방에는 ‘이기국신사부일행평선’91)(以祈國信使副一行平善)이라 하였다. 대체로 충심에서 우러난 진실이지 일시적인 거짓이 아니다.

또 자연도(紫燕島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에는 제물사(濟物寺)가 있고 군산도(群山島)에는 자복사(資福寺)가 있는데, 정전과 문과 월랑 이외에는 대청이나 방이 없고 그 승도는 2∼3인뿐이다. 이상의 모든 절들은 그 건물이 좁고 누추한데다 또 수효가 많아 그 그림은 생략하고 그 이름만 적어 둔다.



숭산묘 崧山廟



숭산신사(崧山神祠)는 왕부의 북쪽에 있다. 순천관에서 나가 병부(兵部)까지 가서 곧장 북쪽으로 시내를 따라 가다가 구산사와 복원관을 지나고, 북창문(北昌門)을 나가 5리 가량을 가면 산길이 험악하고 높은 소나무가 울창한데 성중을 굽어보면 손바닥을 가리키듯이 환하다. 그 신(神)은 본래 고산(高山)이라고 했었다. 나라 사람들이 전하기로는, 상부(祥符 곧 대중상부(大中祥符). 1008∼1016) 연간에 글안(契丹 요(遼)를 말함)이 왕성으로 침입해 다가오자92), 그 신이 밤중에 소나무 수만 그루로 변화하여 사람 소리를 내매, 오랑캐들은 원군이 있는가 의심하고 곧 철퇴하였으므로, 후에 그 상을 봉해서 숭(崧)이라 하고 그 신을 제사드려 받들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재난이나 질병이 생기면 옷을 시주하고 좋은 말을 바치며 기도를 한다. 근자에 사신이 와서 6월 26일 정미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사당이 멀어서 산중턱까지만 가서 주찬을 진설하고 배례하였다. 이것은 구법[舊典]에 따른 것이다.



동신사 東神祠



동신사는 선인문(宣仁門) 안에 있다. 땅이 좀 평평하고 넓은데, 정전의 집이 낮고 누추하며 행랑과 월랑 30간은 황량하게 수리하지 않은 채로 있다. 정전에는 ‘동신성모지당’(東神聖母之堂)이란 방이 붙어 있고 장막으로 가려 사람들이 신상(神像)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나무를 깎아 여인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여(夫餘)의 처인 하신(河神)의 딸이라고 한다. 그녀가 주 몽(朱蒙)을 낳아 고려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는 것이다. 전부터 사자(使者)가 오면 관원을 보내어 전제(奠祭)를 마련하는데 그 생뢰(牲牢 제물로 바치는 희생)와 작헌(酌獻 잔을 드림)은 숭산신에 대한 법식과 같다.



합굴룡사 蛤窟龍祠



합굴룡사는 급수문(急水門)의 위쪽 공지에 있다. 작은 집이 두어 간 있는데 그 가운데에 신상(神像)이 있다. 뱃길로는 물이 얕아 접근할 수 없고, 다만 뱃사공들이 작은 배로 맞아다가 제사할 뿐이다. 근자에 사자가 그 곳에 가서 제물을 차려 제사하였더니 그 이튿날 작은 뱀 한 마리가 나왔는데 푸른 색이었다. 이를 보고 다들 신의 화신이라 하니, 역시 팽려93)(彭려)를 순풍으로 건너게 한 이적과 같았다. 그래서 신물(神物)이란 없는 데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조정의 영검한 위력이 가는 곳이면 만맥(蠻貊)의 나라라도 통하는 것이다.



오룡묘 五龍廟



오룡묘는 군산도(群山島)의 객관(客館) 서쪽 한 봉우리 위에 있다. 전에는 작은 집이 있었다. 그 뒤 두어 걸음 되는 데에다 지금 홀로 두 기둥이 있는 한 채의 집만을 새로 지었을 뿐이다. 정면에 벽이 서 있고 거기에 오신상(五神像)이 그려져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퍽 엄숙하게 제사한다. 또 서남쪽 큰 수풀 가운데 작은 사당이 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숭산신(崧山神)의 별묘(別廟)라 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8 권



도 교 道敎



고려는 땅이 동해에 접해 있어서 틀림없이 도산(道山)・선도(仙島)와는 상거가 멀지 않을 것이다. 그 백성들이 장생불사하는 가르침을 사모할 줄 몰랐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나, 다만 중원(中原)에서는 앞서 대부분 정토(征討)를 일삼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도로 교화시킨 자가 없었던 것이다. 당실(唐祚)이 일어나는 혼원시조94)(混元始祖)를 섬겼다. 그래서 무덕(武德 당 고조의 연호.618∼626) 연간에 고려(고구려를 말함.)에서 사신을 보내어, 도사가 그 곳에 가서 오천언(五千言 노자의 도덕경을 말함.)을 강론하여 현미(玄微 심오한 이치)를 풀이해 주기를 간청하였던 것이다95). 고조(高祖 당 고조를 말함.618∼626재위)는 성군이었는지라 그것을 기틀하게 여겨 그 청을 다 들어주었다. 그때부터 비로소 도교를 숭상함이 불전(佛典)을 능가하였다.

대관(大觀) 경인년(고려 예종5, 1110)에 천자께서 저 먼 고장에서 묘도(妙道)를 듣기를 원함을 돌보시어서 신사(信使)를 보내시고 우류(羽流 도사를 말함)2인을 딸려 보내어 교법(敎法)에 통달한 자를 골라 훈도(訓導)하여 주게 하였다96). 왕 우(王俁 고려 예종(睿宗))는 신앙이 돈독하여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1111∼1117)연간에 비로소 복원관(福原觀)을 세워 도의 터득이 높고 참된 도사 10여인을 받을었다. 그러나 그 도사들은 낮에는 재궁(齋宮)에 있다가 밤에는 집으로 돌아가고는 하였다. 그래서 후에 간관(諫官)이 지적 비판하여서 다소간 법으로 금하는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간혹 듣기로는, 우(우)가 나라를 다스렸을 때는 늘 도가의 도록(圖錄 도가의 서적)을 보급하는 데 뜻을 두어 기어코 도교로 호교(胡敎 곧불료)를 바꿔 버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해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97).



도사 道士



도사의 복장은 우의(羽衣 새털로 짜서 민든 도가의 옷)를 사용하지 않고, 백포(白佈)로 만든 갖옷에 조건(早巾 검정색 두건)과 사대(四帶 네 줄이 늘여 뜨려진 의대)를 입는데 평민의 의복과 비료하면 다만 그 소매가 좀 큼직할 따름이다.



석 씨 釋氏



부처의 가르침은 천축(天竺 인도의 고칭.)에서 처음 나와 드이어는 사방의 이족(夷簇)들에 전파되어 그 법이 성하여졌다. 고여는 지록 바다 동쪽에 있기는 하나 듣기로는 청량법안98)(淸凉法眼)의 한 차가 동쪽으로 건너온 후에 승도들이 성리(性理)를 꽤 알게 되었다 한다. 한 번은보제사(普濟寺)의 승당(僧堂)에서 방을 걸어[葛榜] 대중에게 보이는 글을 본 일이 있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다.

“말[言]이 도를 싣기에 부족한 지가 오래 되었다. 대천경권(大千經卷무수한 북교경전을 말함)은다 병을 고쳐 주는 설이기는 하나 정법안장99)(正法眼藏)을 부촉(付囑)할 데가 없는지라, 세존(世尊)이 이에 꽃을 들어 보여 주었더니, 미소하는 자가 있었다100). 그런데 자손들에 내려와서는 언변으로 서로 나타내는 것을 담선(談禪 선을 이야기함)이라고들 부르니 망령되지 아니한가?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는 오직 가섭(迦葉) 하나뿐이었으니 그런 깨달음을 뭇사람들에게 쉽사리 기대할 수가 있겠는가? 옛사람조차도 양(羊)을 남기기를 좋아하여서 예(禮)의 큰 뜻을 잊지 않았거든101), 하물며 말[言說]이라는 도구는 족히 그 뜻을 얻을 수 있겠는가. 듣건데, 시를 설명하는 것은 그 생각으로 시의 뜻을 맞나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102) 우리 교종(敎宗) 역시 그러하다. 대체로 말로서는 생각을 찾지마는 생각이 따르는 곳을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또한 잠자코 있으면서도 그것은 아는 법이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과 말 같은 말단적인 것에 급급할 것인가?”

이 수백 마디를 보니 깊이 종지(宗旨)를 터득하고 있다. 북상과 공구(供具 제물.향화 따위를 괴어 놓는 제구)가 모두 다 깨끗하고 표기의 장식과 비단 천개(天蓋 불상위 같은 데 설치 하는 덮개)는 질서가 정연하다. 대경(大經)으로는 화엄(華嚴)과 반야(般若)103)가 있고 작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또 본래 중국에서 연구하여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자도 있어서, 낭송시켜 보았더니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의 범패(梵唄)로 말하면 또 사투리여서 전연 분간할 수가 없다. 그들의 요발(饒跋 불가에서 쓰는 악기 이름.)은 생김새가 작고 소리가 시름겹고, 그들의 소라 소리는 호통을 치듯 매우 크다.

앞서 원풍(元豊 송 신조의 연호. 1078-1085) 연간에 상절(上節)의 사신 송 밀(宋密)이 자연도(紫燕島)에서 죽었는데104), 그 후부터는 사신이 오면 반드시 제물사(濟物寺)에서 불승의공양과 함께 제사를 드리고, 상절이 차례에 따라 무덤 아래에 둘러서서 베례하였다. 근자에 어명을 받들고 그곳에 가서도 역시 전례에 따랐다. 비록 생존자와 사망자 사이의 은의(恩義)는 물론 그럴 것이라고 하겠으나 사람의 마음이란 처음 이국에 가면 멀리 고향을 생각하게 되는지가, 느닷없이 객사한 무덤을 보고서는 문물을 뿌리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된다. 대체로 이역 땅에 사신을 가는 데는 요동이 가장 어려우니, 해양이 막혀 있어 위험이 오만 기지인데, 온전히 끝마치고 조종에 복명할 수 있게됨이 어찌 다행하지 읺겠는가? 본래 왕의 위령에 의지함이 아니라면 교룡과 조개의 뱃속에 장사지내지 않을 자가 극히 드물 것이니, 어씨 부처가 오로지 보호해 줄 수가 있겠는가? 이제 그 의복 제도를 그려서 이동(異同)을 고찰하여 보기로 하겠다.



국사 國師



국사의 칭호는 대체로 중국에 승직의 강유(綱維)105)가 있는 것과 같다. 그 위의 한 등급은 왕사(王師)라고 하는데 왕이 만나면 그에게 배례를 한다. 다 산수납가사(山水衲袈裟)106)와 긴 소매의 편삼107)(偏衫)과 금발차108)(金跋遮)를 착용하고, 아래에는 자상(紫裳)과 오혁검리109)(烏革鈐履)가 있다. 인물과 의복은 비록 대략은 중국과 같지마는 고려인은 대개 머리에 침골(枕骨 후두부에 돌출한 뼈.)이 없으나 중이 되어 머리를 깍아 버리면 그것이 보이는데 퍽 놀랍고 이상하다. ‘진사’(晉史)에는, ‘삼한(三韓)’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곧 돌로 그 머리를 줄러 넙적하게 만든다고 하였으나 옳지 않다. 대체로 종류와 타고난 자품에 그렇게 되는 것이지 반드시 돌 때문에 넙적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삼중화상대사 三重和尙大師



삼중화상 장도(張度)는 율사110)(律師)의 종류이다, 자황첩상복전가사111)(紫黃貼相福田袈裟)와 긴 소매의 편삼을 입고, 아래는 역시 자상(紫裳)이다. 지위는 국사 아래에 있고 경론(經論)을 강설하며 성종112)(性宗)을 전습시킨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언변이 좋고 박식한 이를 택해서 그 일을 시킨다.



아사리대덕 阿闍梨大德



아사리113)대덕은 삼중화상보다 한 등 떨어진다. 교문(校門)의 직무를 분답하는데, 그 옷은 짧은 소매의 편삼(偏衫)과 괴색(壞色 진한 고동색) 괘의114)(掛衣)에 오조115)(五條)이고, 아래는 황상(黃裳)이 있다. 국사와 삼중은 몇 사람에 불과하고 아사리 한 등급은 사람수가 극히 많은데 그 취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미비구 沙彌比丘



사미비구116)는 어려서부터 출가(出家)하여 수구117)(受具)를 거치지 않은 자이다. 괴색의 포의(布衣)로 역시 첩상(貼相 첩상가사를 말함)이 없다. 계율이 높아져야 비로소 자복(紫服)으로 바꾸고, 차례에 따라 옮겨지고 올라가고 한 뒤에야 납의(衲衣)를 갖게 된다. 대체로 고려의 승복은 마납118)(磨衲)만을 가장 존중한다.



재가화상 在家和尙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으로 허리를 붂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기는 하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글안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실 형벌을 받은 복역자들인데, 이족(夷簇)의 사람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린 것을 가지고 화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19 권



민 서 民庶



고려는 땅이 넓지 못하나, 백성이 매우 많다. 사민(四民)의 업(業) 중에 유(儒 선비)를 귀히 여기으로, 그 나라는 글을 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산림이 지극히 많고 땅이 넓고 평평한 데가 적기 때문에, 경작하는 농민이 공장이를 따르지 못한다. 주(州)나 군(郡)의 토산(土産)은 다 관가의 공상(公上)에 들어가므로, 장사치는 멀리 나들이하지 않는다. 다만 대낮에 고을에 가서 각각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서로 바꾸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은혜를 베푸는 일이 적고 여색[色]을 좋아하여, 분별 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119),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 지금 그 나라의 백성을 그림으로 그리되 진사(進士)를 편(篇) 머리에 둔다.



진사 進士



진사의 이름도 하나가 아니어서 왕성(王城) 안에서는 토공(土貢)이라 하고, 군읍(郡邑)에서는 향공(鄕貢)이라 한다. 국자감(國子監)에 모여서 거의 4백명을 합시(合試)한 뒤에 왕이 친시하여, 시(時)・부(賦)・논(論) 세 제목을 시험보여 합격하는 이에게 벼슬을 준다. 정화(政和) 연간에 학생(學生) 김단(金端) 등을 입조(入朝)케 하매 은사과(恩賜科)에 합격하니, 이로부터 선비를 뽑을 때 경술(經術)과 시무책(時務策)으로, 그 고부를 견주고 우열(優劣)을 시합하여 고하(高下)를 정하였으므로, 이제 유(儒)를 업(業)으로 하는 자가 더욱 많아지니,이는 중국을 향모(向慕)하는 바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지사의 복식은 사대문라건(四帶文羅巾)을 쓰고, 검은 주[筽紬]로 웃옷[衣]을 하고 검은 띠에 가죽신을 신고, 공(貢)에 들면 모자를 더 쓰고120), 급제하면 청개(靑蓋)와 복마(僕馬)를 주어 성안에 크게 놀아 영관121)(榮觀)을 삼는다 한다.



농상 農商



농상의 백성은, 농민은 빈부할 것 없이, 장사치는 원근할 것 없이 다 백저포122)(白紵袍)를 만들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별한다. 나라의 벼슬아치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頭巾)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향리(鄕吏)나 백성리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공기 工技



고려는 공장이의 기술이 지국히 정교하여, 그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는 다 관아(官衙)에 귀속되는데, 이를테면 복두소123)(僕頭所)・장작감124)(將作監)이 그 곳이다. 이들의 상복(常服)은 흰 모시 도포에 검은 건이다. 다만 시역을 맡아 일을 할 때에는 광에서 붉은 도포[紅袍]을 내린다. 또 듣자니, 글안(契丹)의 항복한 포로 수만 중에 고당이가 열 중에 하나는 있는데. 그 정교한 솜씨를 가진 이를 왕부(王府)에 머물게 하여, 요즈음 기복(器服)이 더욱 공교하게 되었으나, 다만 부화스럽고 거짓스러운 것이 많아 전날의 순박하고 질박(質朴)한 것을 회복할 수 없다.



민장 民長



민장의 명칭은 중국의 향병(鄕兵)이나 보오(保伍)의 장과 같다. 즉 백성 가운데 부족(富足)한 자를 뽑아 시키되, 그 마을의 큰 일이면 관부(官府)에 가되 작은 일이면 곧 민장에게 속하므로 거기 사는 세민(細民)들이 자못 존중하고 섬긴다, 그 복식은 문라(文羅)로 건(巾)을 하고 검은 주(紬)로 갖옷을 하고 혹각 대를 띠고 검은 가죽의 구리125)(句履)를 신으니, 또한 아직 공(貢)에 들지 않은 진사(進士)의 복식과 서로 닮았다.



주인 舟人



고려의 두건126)(頭巾)은 다만 문라(文羅)를 중히 여겨 한 건의 값이 쌀 한 섬[石] 값이 되어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밑천은 없고, 또 알상투를 하여 죄수(罪囚)와 다름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죽관127)(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존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짧은 갈(褐 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배마다 10여인이 밤에는 갑판을 올리고 삿대를 뚜드리며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여 시끄럽가가 거위와 따오기의 무리가 우는 것 같아 조금도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으니 대개 그 풍속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