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요동으로 가지마라

한부울 2007. 5. 29. 22:44
 

요동으로 가지마라

[문화일보] 2007년 05월 29일(화) 오후 01:48


“요동으로 가지마라, 개죽음 당하리라(無向遼東浪死歌)”.

7세기초. 수나라에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를 한 뒤 이 같은 노래가 유행했다. 추평(鄒平)현의 왕박(王薄)이라는 인물이 지은 노래다

611년 6월 수양제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전쟁준비에 들어갔다. 신채호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따르면 300여척의 배와 수군 7만 명이 보강됐다. 연대(煙臺) 주변 강과 바다에는 배들이 언제나 1000여리 늘어서 있었다. 수나라의 고구려 침범은 출병기간만 40여일이 걸렸다. 전투병이 113만3800명, 군량과 군수물자 운송병까지 합하면 400만 명이나 되었다.

수나라의 전략은 수군을 통해 보급품을 지원받으면서 지구전을 펼친다는 것이었다. 수양제의 주력부대는 요동으로, 육군대장 우문술(宇文述)은 평양으로 진격했다. 이에 따라 해군총사령관 래호아(來護兒) 부대는 보급품을 싣고, 창해(滄海·발해)를 건너 패강(浿江·대동강)입구 향했다.

영양왕의 동생 고건무의 전략은 기발했다. 대동강 하구에 수군을 숨겨놓고, 평양성 아래의 인가에는 재물 등 보물을 떨어뜨려 놓았다. 평양성으로 향하던 정예명 4만 명의 래호아 병사는 보물에 눈이 멀었다. 이때 고건무의 결사대는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래호아는 병사를 모두 잃고 겨우 단신으로 배를 타고 도망쳤다. 수나라는 이미 598년 1차 임유관 전쟁에서도 참패를 했다. 수서(隋書)에는 “수나라 해군 장수 주라후(周羅候)군대가 요동에 가던 중 장마와 풍랑을 만나 퇴각할 때 10명 중 9명이 죽었다”고 기록했다.

우문술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평양성을 포위,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을지문덕 장군은 “항복하겠다. 항복하려면 토지와 인구관련 문서를 정리해야 하므로 큰 나라 군사는 성밖에서 5일만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10일이 지나도 항복소식이 없었다. 뒤늦게 속았음을 안 우문술은 총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성 밖 공동화(사람과 곡식을 모두 성안에 집결)작전으로 굶기를 밥 먹듯이 한 수나라 군사는 싸울 기력이 없었다.

을지문덕은 “너희 군량선이 바다에 잠기었고, 평양성은 높고 튼튼하니 이제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고 외쳤다. 결국 우문술은 퇴각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수나라 군사에게는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수대첩이다. 요동성에 이르렀을 때 살아서 돌아온 병사는 30만5000명중 겨우 2700명이었다.

수양제가 이끄는 요동의 오열홀 대첩은 더욱 비참했다. 당태종의 조서에는 요택매골( 遼澤埋骨·요택에 전사들을 묻다) 기록이 나온다. 당시 수의 24개 군 수백만명이 전멸당하고, 수천명의 군사만이 수양제를 호위, 도주했다.

645년. 당태종은 수의 패전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10년 동안 양성한 정예병 20만명을 뽑아 평양보다는 요동을 쳤다. 수군 4만3000명을 동원, 보급품을 지원받는 방식도 똑같았다. 연개소문 역시 을지문덕의 보급로 차단과 공동화작전를 구사했다. 당나라 수군은 발해만에서 고구려 수군에 의해 모두 수몰당하고 만다. 신당서 고구려전과 자치통감에 따르면 ‘요수의 범람을 만나 군사를 돌렸다’ 는 기록이 나온다. 당태종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소, 양, 말 등 가축을 총동원했다. 급하면 이를 잡아먹는다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가을과 겨울이 되면서 가축들이 먹을 풀이 없어지고 강물도 말라버렸다. 결국 게임은 끝났다.

최근 이 발해만에서 골든로즈호 사건이 발생했다. 중국측의 화물선이 골든로즈호를 들이받고 도망가는 사건으로 16명의 선원이 죽은 것이다. 발해만의 아픈 역사가 생각난다.

오창규 / 전국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