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고려도경 (徐兢)-번역본(2)

한부울 2007. 6. 10. 13:55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0 권



부 인 婦人



삼한(三韓)의 의복 제도는 염색(染色)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使)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를 넣은 비단과 꽃부늬를 넣은 비단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모시 노랑치마인데, 위로는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얼마 전에 세공(歲貢) 사신이 중국 궁궐에 이르러 조정에서 내리는 십등관복(十等冠服)을 얻어와 드디어 이를 본받아128), 지금은 왕부(王府)와 국상(國相)의 집에도 자못 중국풍이 있으니, 다시 세월이 지나가년 다 중국풍이 될 것 같다. 이제 잠깐 그 중국과 다른 것만 골라, 이를 그림으로 그린다.



귀부 貴婦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129)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모시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너른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攬)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釋]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으로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恃妃)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다 하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비첩 婢妾



궁부(宮府)에는 후궁(後妾)이 있고, 관리에게는 첩(妾)이 있는데, 백성의 처나, 잡역에 조사하는 비자(婢子)도 복식이 서로 비슷하다. 그들은 일을 하고 구실을 들기 때문에 너울을 아래로 내려뜨리지 아니하고, 머리 정수리에 접어올리며130) 옷을 걷고 다니며, 손에는 부채를 잡았으나 손톱 보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많이들 붉은 한삼으로 손을 가린다.



천사 賤使



부인의 머리는 귀천이 한가지로 오른 쪽으로 드리우고, 그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뜨리되 붉은 깁으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는다.131) 가난한 집에서는 다만 너울이 없으니, 대개 그 값이 은(銀) 한근과 맞먹어 살 힘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며, 금제(禁制)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또 두르눈 치마를 입되 8폭으로 만들어 겨드랑이에 높이 치켜 입는데, 주름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 그 부귀한 자 처첩들의 치마는 7∼8필을 이은 것이 있으니132), 더욱 우스운 일이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종신(從臣) 유 규(劉逵)와 오 식(吳拭) 등이 사명을 받들고 고려에 갔을 적에 칠석(七夕)을 만났다. 마침 관반사(館伴使). 유신(柳伸) 이 무악(舞樂)하는 기녀[女倡]를 돌아보며 정사・부사에게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머리를 빗어 늘어뜨리니, 필시 옛 추마계133)(墜馬磎)인가 합니다.”

하매, 유 규 등이 대답하기를,

“추마계는 동한(東漢) 양 기(梁冀)의 처 손 수(孫讐)가 한 것이니,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는 것 같소이다.”

하니, 신(伸) 등이 그렇게 여겼다 한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를 고치지 못하니, 아마 이는 그 옛풍속의 퇴결134)(堆結)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귀녀 貴女



만이(蠻夷)의 옷이 비록 거의 같은 종류이나, 또한 정한 제도가 없는 것 같다. 사신이 처음에 성(城)에 등어갈 적에 길옆 누관(樓觀) 사이에 난간에 의지하고 있는 귀녀를 가끔 보았다. 이는 아직 시집가지 않은 겨우 열살 남짓한 여자였는데도 머리를 풀지 않았고, 황의(黃衣)는 또한 여름 복식으로는 마땅한 것이 아니기에, 시험삼아 이를 힐문하였으나 끝내 이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떤 이가 ‘왕부(王府) 소아의 옷이다.’하였다.



여자 女子



서민(庶民)들의 딸은 시집가기 전에는 붉은 깁[紅羅]으로 머리를 묶고 그 나머지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남자도 같으나 붉은 깁을 검은 노[黑羅]로 대신할 뿐이다.



부 負



고려의 법이 관비(官婢)를 두어 대대로 물려오기 때문에 왕부(王府)로부터 국리나 도관(道觀)이나 사찰(寺刹)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들을 주어 구실들게 하였다. 그들이 일할 적에 어깨에 멜 힘이 없으면 등에 지는데, 그 행보가 빨라 남자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이다.



대 戴



지고 이는 일이 그 노고는 한가지다. 물이나 쌀이나 밥이나 마시는 것이나 다 구리항아리에 답았으므로 어깨에 메지 않고 머리 위에 인다. 항아리에는 두 귀가 있어 한 손으로는 한 귀를 붙들고 한 손으로는 옷을 추키고 가는데,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경서(經書)를 상고하면 ‘머리 희뜩희뜩한 자가 도로에 지고 이지 않는다.’함은, 그 힘을 쓰는 것이 진실로 근골에 고통을 주는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마저 등에 업었으니, 소위 그 아이를 포대기에 싸업고 살기 좋은 곳으로 찾아온다는 것인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1 권



조 례 早隷



여러 만이(蠻夷)의 나라들이 이마를 파서 물들이고 다리를 꼬아 앉고 머리를 풀고 몸에 환을 그리고, 승냥이와 이리와 같이 살고 사슴과 더불어 논다 하니, 어찌 또 관원과 서리를 두는 법을 알겠는가? 오직 고려는 그렇지 않아, 의관(衣冠)과 예의(禮儀)며 군신 상하에 찬연히 법도가 있어서 그것으로 상접(相接)한다. 안으로 대․성․원․감(臺省院監)을 두고 밖으로 주․부․군․읍(州府郡邑)을 두어 직(職)을 나누고 서리[吏]를 뽑아135) 일을 맡기고, 위에서 그 강목(綱目)만을 들 뿐이고, 아래에 있는 자는 번다스럽고 어려운 일을 맡으니, 비록 나라의 일이라도 간략하고 이치에 닿아, 적을 치고 도적을 잡으려 백성을 부르면, 다만 편지(片紙) 몇 자면 백성이 모이는 기한을 어기지 않는다. 고로 중서급사(中書給事) 중추당관(中樞堂官)으로부터 그 민장(民長)에 이르기까지 감히 태만할 수 없다. 그 나라의 관리(官吏)를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꾸부려 무릎 꿇고 절하고 국공(鞠恭)을 한다. 언사(言事)가 있으면 무릎걸음으로 꾸부리고 나아가서 손을 위로 하고 얼굴을 낮추어 듣고 이를 받드니, 오랫동안의 중국의 영향이 없으면 능히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이제 이직(吏職)으로부터 구사(驅使)에 이르기까지 아울러 아래에 그림을 벌여 그린다.



이직 吏職



서리(胥吏)의 복색은 서관(庶官)의 복색과 다를 바가 없다. 다만 녹의136)(綠衣)에 때로 진하고 엷은 것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에는, ‘고려는 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푸른[碧] 옷을 입는다’ 하나, 이제 물어 보니 틀린다.

그게 그 대개 나라는 백성이 가난하고 그 풍속이 검약하여 도포[袍] 하나의 값이 거의 은[白金] 한 근(斤)이나 되매, 항상 빨아서 다시 물들이니 색이 진하여 푸른 것 같을 뿐이요, 한 복색이 아니라 한다. 그러나 성부(省府)의 보리(補吏)는 유품(流品)에 한하지 않고 귀가(貴家)의 자제도 때로는 이것이 된다. 지금이 청복(靑服)은 곧 서리(胥吏)의 세습하는 자만이 입는다.



산원 散員



산원의 복장은 붉은 깁의 소매 좁은 옷137)[紫羅穿衣]을 입고 복두에 가죽신을 신는데, 중국의 반직(班直)이나 전시(殿侍) 따위와 같은 것이다. 무신(武臣)의 자제로서 병위(兵衛)에 구실든 자로 이를 보한다. 중국 사신이 이를 때마다 소반을 받들고 술잔을 들이며 옷을 들고 수건을 받드는 데 다 이들을 쓴다.



인리 人吏



인리의 칭(稱)은 성부(省府)의 직에 비할 바 아니다. 대개 창름사(倉름司)는 주현(州縣)에 속하여 금곡(金穀)이나 포백(布帛)같은 것을 출납(出納)하는 자로서 검은 옷[皁衣]에 복두를 쓰고 검은 가죽의 구리(句履)를 신는다. 때로는 시가(市街)의 많은 사람이 있는 데서 이를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관부(官府)에 들어갈 때는 간혹 색의(色衣)로 갈아입는 자가 있다고 한다.



정리 丁吏



정리는 정장(丁壯)한 사람을 처음으로 서리(胥吏)에 둔 자들이다. 옛 설에 의하면 전(轉)하여 ‘정례’(頂禮)라 하였다는데, 대개 이것은 어음(語音)이 잘못된 것이다. 이로부터 뽑아 올려 서리로 삼고, 이 서리를 거친 뒤에 관직을 준다. 높은 관으로부터는 각각 정리(丁吏)를 주어 심부름을 시키는데, 관품(官品)에 따라 많고 적은 차이를 두었다. 그들이 보통 일을 볼 때는 문라(文羅)의 두건을 쓰되, 중국 사신이 오면 여기에 책(巾責)을 보태어 쓴다. 높은 신하마다 따르는 자가 한두 명이니, 다만 반관(伴官)이나 굴사(屈使)에 시중드는 자나 정사(正使)나 부사(副使)에 내리는 자나 같은 복색을 하고 있다.



방자 房子



방자는 사관(使館)의 심부름을 하는 자들이다. 각방에 사신과 부사로부터 관의 높낮음에 따라 많고 적고의 차이가 있다. 그 복색은 문라(文羅)의 두건에 붉은 옷[紫衣]에 각대138)(角帶)와 검정신[皁履]을 신는데, 응대를 잘하는 자만을 선택하여 방자를 삼는다. 그 몸가짐을 보니 매우 근직하게 법을 시키고 또 붓글씨를 잘 쓴다. 고려의 봉록(俸祿)이 지극히 박해서 다만 생쌀과 채소를 줄 뿐이며 또 상시에 고기를 먹는 일이 드물어서, 중국 사신이 올 때는 바로 대서(大暑)의 계절이라 음식이 썩어 냄새가 지독한데, 먹다 남은 것을 주면 아무렇지 않게 먹어 버리고 반드시 그 나머지를 집으로 가져간다. 접대례를 마치고 관(館)을 물러날 때에는 몇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니, 대개 고려 사람이 중국에 대하여 동경심이 있어 그 정이 두텁기 때문에 방자라도 그렇게 떨어지기 섭섭해 한다.



소친시 小親侍



소친시는 붉은 옷[紫衣]에 두건을 쓰고, 또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렸는데, 대개 궁중에서 부리는 아이들이다. 왕의 귀척(貴戚)이나 종신(從臣)에게도 때로 내려 준다. 고려 사람이 대개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는 다 건[巾]으로 머리를 싸고 뒤에 머리를 내려뜨리다가 장가든 뒤에 속발(束髮 머리를 묶고 한 가닥을 내려뜨리는 것)을 하는데, 소친시는 다 겨우 여남은 살이기 때문에, 조금 자라면 궁을 나간다 한다139).



구사 驅使


구사란 선랑(仙郞)과 비슷한데, 대저 다 아직 장가들지 않은 자들이다. 귀한 집에 있는 자제들은 이를 ‘선랑’(仙郞)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옷은 사(紗)나 나(羅)인데, 모두 검정색[皁]이다. 또 같은 것이 있는데 삼수(삼袖 소매의 중도막에서 다른 천을 대어 만든 넓은 소맷부리)가 달린 옷을 입고 검은 건을 썼으니, 곧 서관(庶官)이나 소리(小吏)의 노자(奴子)인데 이름하여 구사(驅使)라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2 권



잡 속 1 雜俗一



왕제(王制)에 넓은 들과 큰 내로도 제도(制度)를 달리하고, 백성이 그 사이에 생활하여 풍속을 달리한다 하였으니, 그 이른바 넓은 들과 큰 내는 애초부터 반드시 먼 지방이나 절원한 지역이 아닐 것이다. 특히 중국의 땅이라도, 내[川]의 풍속도 혹 다르면, 습속이 각기 달라서 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인데, 하물며 만이(蠻夷)의 한계가 바닥 밖에 있으니, 그 풍속이 한 가지일 수 있겠는가? 고려는 여러 이적(夷狄)의 나라 가운데서 문물 예의(文物禮義)의 나라라 일컫고 있다. 그 음식은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문자는 해서(楷書)와 예서(隸書)에 맞춰 쓰고, 서로 주고받는 데 절하고 무릎을 꿇으니 공경하고 삼가는 것이 족히 숭상할 만한 것이 있다. 그러나 그 실제로는 풍속이 박잡하여 오랑캐 풍속을 끝내 다 고치지 못했다. 관혼상제140)(冠婚喪祭)는 예(禮 예기(禮記))에 말미암은 것이 적고, 남자의 건책(巾巾責)은 조금 당제(唐制)를 본받고 있으나 부인의 딴 머리를 아래로 내려뜨리는 것은 아직 완연히 좌수(좌首) 변발(변髮)의 모습이 있고, 귀인이나 선비 집안에서는 혼가(婚嫁)에 대략 빙폐(聘幣)를 쓰나 백성에 이르러서는 다만 술이나 쌀을 서로 보낼 뿐이다. 또 부가(富家)에서는 아내를 3~4인이나 맞이하되 조금만 맞지 않아도 바로 이혼하고, 아들을 낳으면 딴 방에 거처하고, 병을 앓을 때는 비록 가까운 가족이라도 약을 들이지 않으며, 죽어 염(殮)할 때 관에 넣지 않는다. 비록 왕이나 귀족에 있어서도 그러니, 만약 가난한 사람이 장사지내는 기구가 없으면 들 가운데 버려 두어 봉분도 하지 않고 비도 세우지 않으며 개미나 까마귀나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되141), 다 이를 그르다고 하지 않는다.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고 부도(浮屠)를 좋아하며, 종묘(宗廟)의 사당에도 중을 참배시켜 가패(歌唄)를 부르고 말을 하는데 통하지 않는다. 욕심이 많고 회뢰(賄賂)가 성행하며, 길을 다닐제 달리기를 좋아하고 섰을 적에는 허리 뒤에 손을 얹는 자가 많으며, 부인이나 승니(僧尼)가 다 남자의 절을 하니, 이런 것들은 가히 해괴(駭怪)한 것들이다. 자질구레한 것의 도리에 맞지 않은 것을 들려면 한두 가지가 아니로되, 지금 잠깐 귀로 듣고 눈으로 본 바를 모아 그림으로 그리고 아울러 토산(土産)과 자양(資養)의 물건을 아래에 붙인다.



정료 庭燎



고려의 풍속이 밤에 술마시는 것을 좋아하며, 더우기 사신 접대하기를 더욱 삼가한다. 항상 잔치가 파하면 한밤중을 넘어 산이나 섬․주․군의 교․정․관․사에는 모두 뜰 가운데 홰를 묶어 불을 밝히고, 산원(散員)들이 이 홰를 잡고 사신이 숙관(宿館)에 돌아갈 때면 앞에 나열하여 서로 나란히 간다.



병촉 秉燭



왕부(王府)의 공회(公會)에 옛날에는 촛불을 쓰지 못하였으나, 요즈음은 차차 잘 만들어 큰 것은 서까래와 같고 작은 것도 길이가 2척에 이르나 끝내 시원히 밝지는 못하다. 회경(會慶)이나 건덕(乾德)에서 잔치를 할 때는 뜰 가운데 홍사(紅紗)의 초롱[燭籠]을 마련하고 녹색(綠色)의 옷을 입은 이가 띠와 홀(笏)을 잡고 있다. 이를 물어보니 말하기를, ‘새로 입사(入仕)한 사람이라.’ 한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새로 급제한 사람이라.’ 하였으나 이제야 다 같은 유품142)(流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설호 挈壺



설호의 직은 그 명칭과 구실이 옛날과 비슷하다. 이들은 시각(時刻)을 따라 북을 치는 것으로 시간을 알리는데 중정(中庭)에 기둥을 세우고서 패를 건다. 매시 정각에 한 붉은 옷[紫衣]를 입은 자가 시각 패를 받들고 왼편에 서고, 한 녹의(綠衣)를 입은 자가 몸을 구부려 ‘···시’라고 알린 뒤에 기둥으로 가서 패를 바꿔 놓고 물러간다.



향음 鄕飮



고려의 풍속이 술과 단술을 중히 여긴다. 공회 때에는 다만 왕부(王府)와 국관(國官)만이 상탁(牀卓)과 반찬(盤饌)이 있을 뿐, 그 나머지 관리와 사민은 다만 좌탑143)(坐榻)에 앉을 뿐이다. 동한(東漢)에서는 예장태수(豫章太守) 진 번(陳蕃)이 서 치(徐稚)를 위하여 한 탑(榻)을 마련하였을 뿐인즉 전고(前古)에도 이 예법(禮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고려인은 탑 위에 또 소조(小俎 작은 소반)를 놓고, 그릇에는 구리[銅]를 쓰고 숙석(魚肅月昔)과 어채(魚菜)를 섞어서 내오되 풍성하지 않고, 또 주행(酒行 순배(巡杯))에도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 탑마다 다만 두 손[客]이 앉을 뿐이니, 만약 빈객이 많이 모이면 그 수에 따라 탑을 늘려 각기 서로 마주 앉는다. 나라 안에 밀이 적어 다 장사치들이 경동도144)(京東道)로부터 사오므로 면(麵)값이 대단히 비싸서 큰 잔치가 아니면 쓰지 않는다. 식품 가운데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있으니, 이 또한 웃을 만한 일이다.



치사 治事



고려의 정사(政事)가 간편한 것을 숭상하므로 소송의 문서 같은 것은 간략하게 하여 글로 기록하지 않는다. 관부에서 일을 다스릴 적에도 앉아서 책상에 의지하지 않고, 다만 걸상에 앉아서 지휘할 따름이다. 아전이 안독145)(按牘)을 받들어 무릎꿇고 앞에서 아뢰면, 웃사람은 듣고 즉시 비결146)(批決)하되, 뒤에 상고하기 위하여 남겨 놓는 일이 없고 일이 끝나면 버리고 문서고[架]를 마련하지 않는다. 다만 중국의 조명(詔命)이나 신사(信使)의 글은 왕부의 창고에 잘 간수하여 비검(備檢 상고를 위한 검사)거리로 삼는다. 음식을 공궤하고 세숫물을 받들 적에는 머리를 숙이고 무릎걸음으로 가며 높이 손을 받들어 이를 바치니, 그 위의가 매우 공손하다. 이적(夷狄)으로 능히 그러니 가상한 일이다.



답례 答禮



고려의 풍속은 관리(官吏)나 병졸이 기율이 엄하기는 하나 평소에는 자질구레한 예를 일삼지 않는것 같다. 무릇 국상(國相)이나 종관(從官)도 자기 소속이 왕래하다가 서로 만나면, 반드시 얼굴을 가다듬고 기립한다. 통할이 없는 나머지 관원이나 이졸(吏卒)들이 오래 서로 보지 못했으면 비록 네거리나 궁정에서라도 반드시 배례를 하는데 관(官)에 있는 자도 역시 구부렸다가 펴서 답배(答拜)하는 시늉을 한다. 대저 남에게 예하되 답하지 않으면 공경했는가를 반성해 보라. 예를 잃으면 이를 야(野)에 구하라 하였으니, 대략 여기에서 볼 수 있다.



급사 給使



급사(給使) 같은 천인도 관품에 따라 많고 적음의 숫자가 다르다. 국상(國相)에는 정리(丁吏)가 4인이요, 구사(驅使)가 30인이요, 영관(令官)은 이의 배이다. 앞에는 청개(靑蓋)가 있는데 이를 가지고 수십 보 밖에 있다. 승마(乘馬)에는 두 사람으로 고삐를 잡게 한다.

국상 이하는 그 수가 줄어지며, 앞에 청개를 베풀지 아니하고, 말을 타되 두 사람으로 고삐 잡히지 못한다.

백성은 말을 타되 오직 자기 스스로 고삐를 잡을 뿐이다.

정리는 대개 전구가 되고 급사는 수건이나 병에 딸린 물건을 가지고 뒤에 따른다. 열경147)(列卿) 이상은 정리가 3인, 구사가 20인이요, 정랑(正郞)은 정리가 2인, 구사가 15인이요, 원랑148)(員郞) 이상은 정리가 1인, 구사가 10인이요, 초품(初品)은 같이 3인을 내리되 다 관노예(官奴隸)이며 대대로 물려받는다.



여기 女騎


부인의 출입에도 역시 말과 노복과 청개(靑蓋)를 공급하는데, 이는 공경(公卿)이나 귀인의 처이고 따르는 종자가 2~3인에 지나지 않는다. 검은 깁으로 너울을 만들어 쓰는데 끝이 말 위를 덮으며, 또 갓을 쓴다.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다만 다홍으로 장식을 하되 거여(車輿)는 없다. 옛 당(唐)나라 무덕(武德 618~626)․정관(正觀 627~649) 연간에 궁인이 대개 말을 타고 너울을 하고 전신을 가렸다고 하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을 보니 너울의 제도가 어찌 당 나라 때 멱라(冪羅)의 유법이 아니겠는가?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3 권



잡 속 2 雜俗二



한탁 澣濯



옛 사서에 고려를 실었는데 그 풍속이 다 깨끗하다 하더니, 지금도 그러하다. 그들은 매양 중국인의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하고 문을 나서며, 여름에는 날마다 두 번씩 목욕을 하는데 시내 가운데서 많이 한다. 남자 여자 분별없이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구비 따라 몸을 벌거벗되,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의복을 빨고 깁이나 베를 표백하는 것은 다 부녀자의 일이어서 밤낮으로 근로해도 어렵다고 하지 않는다. 우물을 파고 물을 깃는 것도 대개 내에 가까운데서 하니, 위에 도롱태[鹿車盧]를 걸어 함지박으로 물을 깃는데, 그 함지박의 모양이 배의 모양과 거의 같다.



종예 種蓺


나라의 강토가 동해에 닿아 있고 큰 산과 깊은 골이 많아 험준하고 평지가 적기 때문에 밭들이 산간에 많이 있는데, 그 지형의 높고 낮음에 따랐으므로 갈고 일구기가 매우 힘들며 멀리서 바라다보면 사다리나 층층계와도 같다. 그 국속이 감히 사전(私田)149)을 가질 수 없고, 대략 구정(丘井)의 제도같은 것이 있는데 관리(官吏)나 민병(民兵)에게 등급[秩序]의 고하에 따라 나라에서 내려준다. 국모(國母)⋅왕비(王妃)⋅세자(世子)⋅왕녀(王女)에게는 다 탕목전(湯沐田)150)이 있는데, 1백 50보(步)를 1결(結)이라 한다. 백성이 8세가 되면 관에 문서를 내어 전(田)을 분배받되 결수에 차이가 있고 국관(國官)이하 병리(兵吏)⋅구사(驅使)⋅진사(進士)⋅공기(工技)에 이르기까지 일이 없으면 밭[田]에 일하게 하고, 변방의 수자리에는 쌀을 대어준다. 그 땅에 황량(黃梁)⋅흑서(黑黍)⋅한속(寒粟)⋅참깨[胡麻]⋅보리⋅밀 등이 있고, 그 쌀은 멥쌀이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소 쟁기나 농구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



어 漁



고려 풍속에 양과 돼지가 있지만 왕공이나 귀인이 아니면 먹지 못하며, 가난한 백성은 해산물을 많이 먹는다. 미꾸라지[鰌]⋅전복[鰒]⋅조개[蚌]⋅진주조개[珠母]⋅왕새우[蝦王]⋅문합(文蛤)⋅붉은게[紫蟹]⋅굴[蠣房]⋅거북이다리[龜脚]⋅해조(海藻)⋅다시마[昆布]는 귀천없이 잘 먹는데, 구미는 돋구어 주나 냄새가 나고 비리고 맛이 짜 오랜즉 싫어진다. 고기잡이는 썰물이 질때에 배를 섬에 대고 고기를 잡되, 그물은 잘 만들지 못하여 다만 성긴 천으로 고기를 거르므로 힘을 쓰기는 하나 공을 보는 것은 적다. 다만 굴과 대합들은 조수가 빠져도 나가지 못하므로, 사람이 줍되 힘을 다하여 이를 주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초 樵



나뭇군은 원래 전업이 없고 다만 일의 틈이 있으면 소년이나 장년이 힘에 따라 성밖의 산에 나가 나무를 한다. 대개 성 부근의 산은 음양설에 의해 사위가 있다하여 나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아니한다.151) 그러므로 그 가운데에는 아름드리 큰 나무가 많아 푸른 그늘이 사랑할 만하다. 사신이 관에 머물러 있는 동안이나 배에 오르더라도 다 공급을 맡은 자가 있어 때고 끓이는 나무를 대는데, 어깨에 메는 것은 잘하지 못하고 등에 지고 다닌다.



각기 刻記



고려의 풍속에 주산(籌算)이 없어 관리가 돈이나 천을 출납할 때, 회계리는 조각나무에 칼을 가지고 이를 그으니, 한 물건을 기록할 때마다 한 자국을 긋고 일이 끝나면 내버리고 쓰지 않으며, 다시 두었다가 계고(稽考)를 기다리지 아니한다. 그 정치가 매우 간단한 것은 또한 옛 결승(結縄)이 끼친 뜻인가 한다.



도재 屠宰



고려는 정치가 심히 어질어 부처를 좋아하고 살생을 경계하기 때문에 국왕이나 상신(相臣)이 아니면, 양과 돼지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또한 도살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다만 사신이 이르면 미리 양과 돼지를 길렀다가 시기에 이르러 사용하는데, 이를 잡을 때는 네 발을 묶어 타는 불 속에 던져, 그 숨이 끊어지고 털이 없어지면 물로 씻는다. 만약 다시 살아나면, 몽둥이로 쳐서 죽인 뒤에 배를 갈라 장위(腸胃)를 다 끊고, 똥과 더러운 것을 씻어낸다. 비록 국이나 구이를 만들더라도 고약한 냄새가 없어지지 아니하니, 그 졸렬함이 이와 같다.



시수 施水


왕성(王城)의 장랑(長廊)에는 매 10간(間)마다 장막을 치고 불상을 설치하고, 큰 독에 멀건 죽을 저장해 두고 다시 국자를 놓아 두어 왕래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마시게 하되, 귀한 자나 천한 자를 가리지 않는다. 승도(僧徒)들이 이 일을 맡아 한다.



토산 土産



고려는 산을 의지하고 바다를 굽어보며 땅은 토박하고 돌이 많다. 그러나 곡식의 종류와 길삼의 이(利)와 우양(牛羊) 축산의 좋음과 여러 가지 해물의 아름다움이 있다. 광주(廣州)⋅양주(楊洲)⋅영주(永住) 등 3주에는 큰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두 종류가 있는데, 다만 다섯 잎이 있는 것만이 열매를 맺는다. 나주도(羅州道 지금의 전라도)에도 있으나, 삼주(三州)의 풍부함만 못하다. 열매가 처음 달리는 것을 솔방[松房]152)이라 하는데, 모양이 마치 모과[木瓜] 와 같고 푸르고 윤기가 나고 단단하다가, 서리를 맞고서야 곧 갈라지고 그 열매가 비로소 여물며, 그 방(房)은 붉은 색[紫色]을 이루게 된다. 고려의 풍속이 비록 과실과 안주와 국과 적에도 이것을 쓰지만 많이 먹어서는 안 되니, 사람으로 하여금 구토하여 멎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인삼의 줄기[幹]는 한 줄기로 나는데 어느 지방이고 있으나, 춘주(春州) 것이 가장 좋다. 또 생삼(生蔘)과 숙삼(熟蔘) 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빛이 희고 허(虛)하여 약에 넣으면 그 맛이 온전하나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쩌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그 모양이 평평한 것은 고려 사람이 둘로 이를 눌러 즙을 짜내고 삶는 때문이라 하였지만, 이제 물으니 그것이 아니다. 삼의 찐 것을 뿌리를 포개서 만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 다리는 데에도 의당한 법이 있다. 관에서 매일 내놓는 나물에 또한 더덕이 있으니, 그 모양이 크고 그 살이 부드럽고 맛이 있는데 약으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또 그 땅에 솔이 잘 자라 복령(茯笭)이 나고, 산이 깊어서 유황(流黃)이 나며, 나주(羅州)에서는 백부자(白附子)⋅황칠(黃漆)이 나는데 모두 조공품[土貢]이다.

고려는 모시[紵]와 삼[麻]을 스스로 심어, 사람들이 많이 베옷을 입는다. 제일 좋은 것을 이(糸㐌)라 하는데, 깨끗하고 희기가 옥과 같고 폭이 좁다. 그것은 왕과 귀신(貴臣)들이 다 입는다. 양잠(養蠶)에 서툴러 사선(絲糸戔)과 직임(職紝)은 다 장사치를 통하여 산동(山東)이나 민절(閩浙)153)지방으로부터 사들인다. 극히 좋은 문라화릉(文羅花綾)이나 긴사(緊絲 매듭에 쓰는 실 같은 것)나 비단[錦]이나 모직물[罽]을 짜는데, 그동안 여진[北虜]의 항복한 졸개에 공장이[工技]가 많았으므로 더욱 기교(奇巧)하고, 염색(染色)도 그 전보다 나았다.

땅에 금은(金銀)이 적고 구리가 많이 난다. 그릇에 옷[漆] 칠하는 일은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나전(螺鈿)일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만하다.

송연묵(松煙墨)은 맹주(猛州 평안북도 맹산(孟山))것을 귀히 여기나 색이 흐리고 아교가 적으며 모래가 많다.

황호필(黃毫筆 족제비의 털로 만든 붓)은 연약해서 쓸 수가 없다. 예부터 이르기를 성성(猩猩 원숭이의 일종)의 털이라고 하나 반드시 그렇지 않다.

종이는 전혀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등나무를 간간히 섞어 만들되, 다듬이질을 하여 다 매끈하며, 좋고 낮은 것의 몇 등급이 있다.

그 과실 중에 밤의 크기가 복숭아만한 것이 있으며 맛이 달고 좋다. 옛 기록에 이르기를 ‘여름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 연고를 물으니 ‘질그릇에 담아서 흙 속에 묻으면 해를 넘겨도 상하지 않고 6월에 또 함도(含桃)가 있으나 맛이 시어 초와 같고, 개암[榛]과 비자[榧子]가 가장 많다’고 한다. 외국에서 오는 것도 있으며, 능금[來禽]⋅청리(靑李)⋅참외[瓜]⋅복숭아⋅배⋅대추 등은 맛이 적고 모양이 작으며, 연근(蓮根)과 화방(花房)은 다 감히 따지 않으니, 국인이 이르기를 ‘ 그것은 불족(佛足)이 탔던 것이기 때문이라’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4 권



절장 節仗154)



“춘추(春秋)의 법으로는 왕이 보낸 사람은 지위가 비록 보잘것없다 하더라도 그 서열은 제후(諸侯) 위에 있도록 되어 있다.” 하니 이것은 왕의 명령을 존중하기 때문일 것이다.155) 그런데 그 때에는 주실(周室)의 기강이 무너지고 제후가 강대해져서 왕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져 공자(孔子)가 빈 말을 가지고 천하 후세의 신하로서 지켜야 할 법을 마련하였는데도 이토록 간곡하였다. 하물며 태평성세에 친히 왕의 사람을 파견하여 멀리 외국으로 사신을 보내시었으니, 그 곳에서 받드는 예절을 어찌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였겠는가? 생각건대, 송(宋)이 천하를 차지한 지는 2백년이 되어 가고 전쟁은 점차로 그쳐, 이족(異族)의 군장(君長)들이 조서(詔書)로 일러줌을 기다리지 않고 믿고 순종하는 성의는 금석(金石)같이 굳으니, 대체로 용성씨(容成氏)의시대 이래로 이토록 대단한 태평은 있어 본 적이 없었다.156) 제후들이 왕이 보낸 사름을 높이 추대하고 그 예문(禮文)이 번거로움은 당연한 일이다. 근년에 사신이 고려국에 갈 때마다 의장이 화려함과 호위하는 군사의 많음을 있는 대로 갖추어 조서를 맞이하고 모절(旄節)을 인도하고 하는 예의가 심히 근실하고 지성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의 행차는 마침 왕 우(王俁)의 상기(喪期)가 끝나지 않아, 북과 피리 등속은 다 잡고만 있고 울리지 않았으니, 이 또한 예(禮)를 알고서 하는 일이라 말할 수 있겠다.



첫째 신기대 初 神旗隊



신주(神舟)가 예성항(禮成港)157)에 도달하고 나서 닻을 내리는 일이 끝나면 고려인이 채색을 베푼 배를 가지고 와서 맞이한다. 사자(使者)가 조서를 받들고 상륙하면 삼절(三節)158)이 걸어서 따라가 벽란정(碧瀾亭)159)에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 물러가 묵는 곳에서 쉰다. 이튿날 새벽에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이 조서를 마주 받들고 채색 가마에 들어가면 군대의 의장이 앞에서 인도하는데 여러 의장 가운데서 신기가 먼저이고, 서교정(西郊亭)160)에서부터 미리 관전(館前)에 세웠다가 조서가 당도하는 것을 기다려서 나머지 의장들과 연접해 가지고 인도 호위하여 성으로 들어간다. 신기대의 기는 10면(面)이 늘어서서 수레에 실려서 가는데 수레마다 10여인이 탄다. 이 때부터는 조서를 받고 표문(表文)을 바치고 할 때는 다 신기대를 군대의 의장 앞에 설치한다. 청의용호군(靑衣龍虎軍)161)은 갑옷과 과모(戈矛)를 들었는데 거의 1만 군졸에 이르는 것이 두 갈래로 나누어서 길을 끼고 행진한다.



다음 기병 次 騎兵



신기 다음에는 금의용호친위(錦衣龍虎親衛)가 있다. 기두(旗頭) 한 명이 말을 타고 앞에서 달리는 데 작은 붉은 기를 잡고 있다. 그 다음은 영병상장군(領兵上將軍)이고, 그 다음은 영군랑장(領軍郞將)인데 다 기병들이다. 활과 화살을 가졌고 칼을 찼으며, 말을 장식한 제구에서는 다 방울 소리가 나고 달려가는 것이 심히 빠르며 자못 보란 듯이 뽐낸다.



다음 요고 次 鐃鼓



기병 다음에는 초금[茄] 부는 군사들이 오고, 징과 북을 치는 군사들이 또 그 다음에 온다. 1백여 보마다 초금 부는 군사들은 반드시 물러서서 조서 가마를 마주보면서 합주하는데 그 소리가 멎으면 징과 북을 쳐서 그 절주를 맞춘다.



다음 천우위 次 千牛衛162)



북과 호각 다음에는 곧 의장물[儀物]이 있는데 관혁등장(貫革鐙杖)163)을 천우군위(千牛軍衛)가 잡고 같이 서서 행진한다.



다음 금오위 次 金吾衛



천우위 뒤에는 금오장위군(金吾仗衛軍)164)이 오는데, 황색 깃발과 표미(豹尾)․의극(儀戟)165) 및 화개(華蓋)166)를 잡고 약간씩 사이를 두고 행진한다.



다음 백희 次 百戱



금오장위 뒤에는 백희 소아(百戱小兒)167)가 오는데 복식의 종류는 대략 중국 풍습과 같다.



다음 악부 次 樂部



가공(歌工)과 악색(樂色) 역시 세 등급의 복색이 있고, 가지고 있는 악기는 어쩌다 약간 다른 것들이 있다. 그 행렬은 소아대(小兒隊) 뒤에 있다. 근자에 사자(使者)가 그 곳에 갔을 때는 마침 우(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서, 악부에서 모두 그 악기를 잡고 있으면서도 연주는 하지 않았었다. 단지 조명(詔命)을 받들기 때문에 감히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 예물 次 禮物



예물의 갑(匣)은 그 크기가 같지 않다. 그 표면은 하사한 물건의 이름을 표제로 쓰고 황제의 신보(信寶)로 봉하였다. 고려인은 총애를 높이 받들므로 들것에 올려놓고 황색 보를 덮는다. 그리고 들것마다 공학군(控鶴軍)168) 4인씩을 쓰는데, 자주색 수의 무늬가 든 웃옷을 입고 절각복두(折脚幞頭)169)를 썼다. 그 행렬은 악부 다음에 섰다.



다음 조서의 가마 次 詔輿



채색 가마의 시설은, 수놓아진 무늬 비단에 오색이 뒤섞여 있는데, 만듦새가 화려하고 정교하다. 앞의 한 가마에는 큰 쇠 향로를 놓았고, 다음 것에는 조서와 왕 우(王俁)를 제사하는 글을 받들고, 그 다음 것에는 어서(御書)를 받들었는데 역시 공학군(控鶴軍)이 들고간다. 표문(表文)을 배(拜)하고 관(館)으로 돌아가면 그 가운데의 한 가마는 쓰지 않는다.



다음 충대하절 次 充代下節170)



국조(國朝 즉 송(宋)을 말함)의 구례(舊例)로는 고려의 사행 하절(下節)은 다 군졸들이었으나, 근년에는 벼슬을 가진 선비와 예술을 하는 기술자로 그 인원을 대체하도록 약간씩 허락하였다. 이번 사자의 행차에는 사람마다 성상(聖上)의 회유하시자는 뜻을 체득하여, 그 일을 담당해서 이역의 풍속을 살피기를 원하였었다. 하물며 또 어전을 하직하던 날 성상의 말씀으로 간곡하게 타일러 주심을 직접 받들었으므로, 사람들은 다 감읍하여 바다에서의 생사를 근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일행 중에는 성출랑(成忠郞)171) 주 통(周通), 승신랑(承信郞)172) 조 개(趙漑), 등사랑(登仕郞)173) 웅 저년(熊樗年)․윤 경(尹京), 문학(文學)174) 강 대형(江大亨)․이 훈(李訓)․당 준(唐浚), 한림 의학(翰林醫學)175) 양 인(楊寅)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고, 진사(進仕)176)로는 조 정지(晁正之)․서 형(徐亨)․황 대본(黃大本)․섭 언자(葉彦資)․석 역(石懌)․진 흥조(陣興祖)․도 정(陶挺)․맹 휘(孟徽)․고 백익(高伯益)․이 예(李銳)․최 세미(崔世美)․고 대범(顧大範)․김 안지(金安止)․왕 거인(王居仁)․유 집희(劉緝熙) 같은 사람들이 들어 있고, 부위(副尉)177)로는 이 휘(李暉)․왕 택(王澤)․여 점(呂漸)․서 공(徐珙)․서 가언(徐可言)․시 우종(施祐鍾)․우 공(禹功)이 있고, 성(省)․부(府)․시(寺)․감(監)의 서리(胥吏)로는 동 기(董琪)․우 민년(牛敏年)․담 공(郯恭)․진 좌(陳佐)․양 대동(楊大同)․양 환(楊渙)․유 종무(劉宗武)․손 순(孫洵)․왕 우(王祐)․윤 공립(尹公立)․손 완(孫琬)․조 유(曹裕)․왕 백전(王伯全)․진 유개(陳惟漑)․왕 도심(王道深)․양 혁(楊革)․장 우계(張雩桂)․임 범(林范)․민 구(敏求)․서 장(舒障)․추 종지(鄒琮志)․장 약박(張若朴)․범 영지(范寧之)․주 언강(朱彦康)․유 절(劉楶)․호 윤승(胡允升)․주 욱(周郁)․담 백성(郯伯成)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복색은 자주 깁의 좁은 옷에 오사모(烏紗帽)와 도금쌍록대(塗金雙鹿帶)178)를 하고 양쪽으로 갈라 서서 조서 가마[詔輿]를 따라 행진한다.



다음 선무하절 次 宣武下節179)



선무하군(宣武下軍)은 명주(明州)180)의 토병(土兵)으로 도합 50인이다. 복식은 충대(充代)와 다르지 않으나, 다만 아래 옷을 처들고 가면서 수무늬 비단이 뚜렷이 나타나게 한다. 사자가 처음 <송의> 도성 문을 나가면 도금기명(塗金器皿 금칠한 그릇)과 딸린 물건을 내려 주고, 또 계속 나갈 때마다 절(節)181)을 공급하는데, 사람마다 각각 앞에서 잡고 있어 찬란한 빛이 눈부신데 이것은 외국에 영광스러움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다음 사부 次 使副



국신사(國信使)와 부사가 조서(詔書)를 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고, 공식 회견에 가고 하는 데는 다 두 필의 말이 함께 달린다. 그의 복색은 자주색 옷에 어선화금대(御仙花金帶)182)이고 또 금어대(金魚袋)를 패용한다. 고려의 반사(伴史 외국 사신을 접반하는 관원)는 말을 타고 부사 오른쪽 몇 걸음 떨어진 데서 어깨를 나란히 하여 행진하고 굴사(屈使)183)가 또 그 다음에 온다.



다음 상절 次 上節



상절은 다음과 같다. 도할관(都轄官)인 무익대부(武翼大夫) 충주자사 겸합문선찬사인(忠州刺史兼閤門宣贊舍人)184) 오 덕휴(吳德休)는 그 복색이 자주색 옷에 금색 띠이고 정사(正使) 뒤에서 말을 타고 갔다. 제할관(提轄官)인 조봉대부(朝奉大夫) 서 긍(徐兢)은 붉은색 옷에 어대(魚帶)를 패용하고 부사(副使) 뒤에서 말을 타고 갔다. 법록도관(法籙道官)인 태허대부(太虛大夫) 예주전교적(蘂珠殿校籍)185) 황 대중(黃大中)과 벽허랑(碧虛郞) 응신전교적(凝神殿校籍)186) 진 응상(陳應常)은 자주색 옷에 푸른색 옷단으로 금방부(金方符)187)를 패용하였다. 서장관(書狀官)은 선교랑(宣敎郞)188)인 등 무실(滕茂實)과 최 사도(崔嗣道)로 제할관의 복색과 같았다. 수선도순검(隨船都巡檢)189)인 오 창(吳敞)과, 지사 겸순겸(指使兼巡檢)인 노 윤승(路允升)․노 규(路逵)․부 숙승(傅叔承)․허 흥문(許興文), 관구주선(管勾舟船)190)인 왕 각민(王覺民)․황 처인(黃處仁)․갈 성중(葛成仲)․서 소필(舒紹弼)․가 원(賈垣), 어록지사(語錄指使)191)인 유 소경(劉昭慶)․무 완(武忨)․양 명(楊明), 의관(醫官)인 이 안인(李安仁)․학 수(郝洙), 서장사신(書狀使臣)192)인 마 준명(馬俊明)․이 공량(李公亮)은 그 복색이 자주빛 옷에 도금어선화대(塗金御仙花帶)였다. 인접(引接)193)인 형 순(荊珣)과 손 사흥(孫嗣興)은 초록색 옷을 입었다. 이들은 각각 관직의 서열에 따라 말을 타고 조서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갔다. 시사부행(侍使副行)194)은 초모(草帽)를 쓰고 채찍을 잡았으며, 전견행례(專遣行禮) 역시 푸른 우산을 펴 들었다. 저 나라에서는 그 나름으로 반관(伴官)195)이 있어 배동(陪同)하는데, 대부분 인진관(引進官)196)으로 그 일을 시킨다.



끝 중절 終 中節



중절(中節)은 다음과 같다. 관구예물관(管勾禮物官)인 승직랑(承直郞)197) 주 명발(朱明發), 승신랑(承信郞) 누 택(婁澤)․범 민(范白民), 적공랑(迪功郞) 최 사인(崔嗣仁)․유 숙(劉璹), 장사랑(將仕郞)198) 오 구(吳構), 행견적공랑(行遣迪功郞) 왕침(汪忱)․진사 왕 처인(王處仁)과, 점후풍운관(占候風雲官)199)인 승신랑 동 지소(董之邵)․왕 원(王元), 서부금주(書符禁呪)200)인 장 순인(張洵仁), 기술(技術)인 곽 범(곽範)․사마 관(司馬瓘), 사부친수(使副親隨 친수는 개인 비서)인 서 굉(徐閎)․장 호(張皓)․이 기(李機)․허 흥고(許興古), 친종관(親從官)인 왕 근(王瑾)․노 준(魯蹲), 선무십장충대(宣武十將充代)인 조 우(趙祐), 정명(定名)인 정 정(程政), 도할친수인리(都轄親隨人吏)인 왕 가빈(王嘉賓)․왕 자(王仔)는 그 복색이 복두(幞頭)와 자주빛 좁은 옷에 도금보병대(塗金寶甁帶)201)고 이들이 말타고 가는 것은 상절 다음이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5 권



수 조 受詔



주(周) 나라에서 재공(宰孔)을 시켜 제후(齊侯)에게 제육(祭肉)을 내렸을 때에202) 제후가 하배(下拜 대청 아래로 내려서서 배례하는 극도로 공손한 예)하려 하니 공이 이르거늘, ‘또 뒤따르는 어명이 있습니다. 천자께서는 백구(伯舅 주 나라 때 천자가 이성(異姓) 제후를 부를 때 쓴 말임)가 연로하여서 위로하시어 한 급(級 층계의 한급을 말함)을 하사하셨으니203) 하배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하늘의 위엄이란 얼굴 앞 지척에서도 어김이 없는 것인데 나 소백(小白 제환공(齊桓公)을 이름)이 감히 천자의 총명(寵命)을 믿고 마구 굴겠습니까? 아래에서 예법을 실추시켜 천자께 수모를 끼칠까 두렵습니다. 감히 하배하지 않겠습니까? ’ 하고 하배한 다음 올라와 제육을 받았다. 주실(周室)이 쇠미해져서 예법은 본래의 법전에서 벗어나 버리고 간신히 남아 있었는데, 제후(齊侯)는 패자(覇者)였음에도 감히 예를 폐하지 않았다. 지금은 천자의 존엄하신 힘이 미쳐나가 해외에서까지 두려워하여 떨고 있는데 거기다 위무하시는 뜻이 내용과 형식에 걸쳐 후하고 번화하니, 고려인이 뚜렷하신 명령을 삼가 받듦을 하늘 끝을 바라보듯이 하고, 감히 조금이라도 게을리하여 예법을 실추시킬까를 근심하게 하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그들이 일을 다루고 예를 집행하는 근실함을 그려서 관찰하시는 데 대비하는 바이다.



영조 迎詔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받들고 순천관(順天館)204)으로 들어가면 10일 이내에길일(吉日)을 택해 국와이 조서를 받는데, 기일 하루 전에 먼저 설의관(設儀官)205)을 보내어 정사와 부사를 만나게 한다. 다음 날 굴사(屈使) 하나가 순천관에 당도하여 도할관과 제활관이 저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 안으로 들어가면, 의장과 병갑이 맞이하여 인도하며 앞에서 가고, 정사・부사・관반 및 굴사가 동시에 말에 오르고, 하절(下節)이 그앞에서 걸어서 가며, 상・중절은 말을 타고 뒤에서 따라간다. 고려국의 관원들이 먼저 순천관 문 밖에서 줄지어 서서 조서가 순천관을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길을 막고 재배(再拜)가 끝나면, 말을 타고 앞에서 인도하여 왕부(王府)에까지 간다. 광화문(廣化門)으로 들어간 다음 좌동덕문(左同德門)으로 들어가 승평문(昇平門) 밖에까지 가서는 상・중절이 말에서 내리고 인접(引接)・지사(指使) 등이 말 앞에서 걸어가는데 상절은 뒤에서 따라간다. 신봉문(神鳳門)으로 들어가 창합문(閶闔門) 밖에 다다라 정사와 부사가 말에서 내리면, 국와과 나라의 관원이 차례로 조서를 맞이하여 재배가 끝나면 채색 가마가 들어가 회경전(會慶殿) 문 밖에 멎는다.



도조 導詔



채색 차마가 들어가 회경전 문 밖에 멎으면 도할관계과 제활관이 가마 속에서 조서를 받들고 나와 막위(幕位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을 의한 장막안의 조서를 놓도록 마련한 자리.)에 봉안하고 정사와 부사가 잠시 쉰다. 국왕이 다시 문 아래로 내려와 서쪽을 향해서면 정사와 부사는 국왕과 나란히 가면서 중문으로 인도해 들어가고, 상절(上節)․예물 등은 양편으로 나뉘어 회경전 아래로 들어가서 국왕이 조서를 받기를 기다린다.



배조 拜詔



국왕이 조서를 인도하여 회경전으로 들어가면 궁정 아래 향안(香案 상위에 놓은 향료)이 마련되어 있는데, 국왕은 서쪽을 면해 서고 정사와 부사는 북쪽 위에 자리잡고 남쪽을 면해 선다. 상절(上節)의 관원들은 차례에 따라 정사와 부사 뒤에 서고 나라의 관원들은 왕의 뒤에 선다. 왕이 재배하고 몸소 성체(聖體 북송의 휘종황제를 두고한 말)의 안부를 묻고서는 자리로 돌아가서 무도(舞蹈 손을 휘젖고 말을 구르는 임금에 대한 예의)와 재배가 끝나면, 나라의 관원들이 무도 재배를 왕이 한 의례와 같이 한다. 국신사(國信使)가 조칙이 있음을 말하면 국왕은 재배하고 일어나 입으로 이르는 말을 몸소 듣고서는 홀(笏)을 띠에 꽂고 꿇어 앉는다. 부사가 조서를 정사에게 주면 정사는 조서를 와에게 주는데, 조서는 이러하다. “고려국왕 왕 해(王楷)시어, 멀리서 듣기로는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아 삼가 나라를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하시었다 하니, 진실로 즉위 초에 왕통을 잊는데 부친 여망에 부응하도록 힘쓰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급작스레 변고를 겪으셔서 슬픔이 대단하실 것입니다. 이제 서둘러 사자에게 명하여, 왕위를 계승하신 분에게 총애를 가서 알려드리도록 하고, 풍성한 예물과 함께 슬퍼하고 축하하는 뜻을 표하오니, 왕의 존엄한 힘(송 휘종 자신을 두고 한 말임)에 삼가 복종하시어 제후로서의 절도를 영원히 지키도록 하소서. 이제 통의대부(通議大夫) 수상서예부시랑(守尙書禮部侍郞) 원성현개국남 식읍삼백호(元城縣開國男食邑三百戶) 노 윤적(路允迪)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청하현개국백 식읍구백호(淸河縣開國伯食邑九百戶) 부 묵경(傅墨卿)을 정사와 부사로 보내어 경(卿)께 나라의 신서(信書)와 예물 등을 내리거니와, 별록(別錄)과 같이 갖추었사오니 받아주도록 하소서. 그래서 이에 조서로 일러 드리오니 잘 아시게 되리라 쟁각합니다. 봄철 따뜻한데 경께서는 요즈음 평안하시겠지오. 이만 줄입니다.”

왕이 조서를 받아서 나라 관원에게 주고는 홀을 꺼내 들고 무도함이 처음의 의례와 같았고, 나라의 관원들 역시 그렇게 하였다.



기거206) 起居



정사와 부사가 조소를 인도하여 궁정에 당도하고 나면 왕이 재배하고 일어나 자리에서 피해 서서 몸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묻는다. 정사역시 자리에서 피해 서서 몸소 대답하기를, ‘근자에 대궐을 떠났는데 황제의 성궁(聖躬)은 만복을 누리고 계십니다.󰡑하고는 각각 자리로 돌아가 재배 무도함이 조서를 받을 때의 의례와 같다. 이에앞서 전주(全州)에서 광주(廣州)에 이르는 3주(전주・청주 및 광주)의 수령들이 성체의 안부를 왕이 한 의례 같이 하여 묻고, 영접 전송하는 관반관(館伴官)들이 만날 때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제전 祭奠



임인년(1122 고려 인종 즉위년) 봄 2월에 정사와 부사는 성지(聖旨 송 휘종의 명령을 두고 한 말)를 받고 국신사의 직무를 가지고 떠나가려 하였더니, 여름 4월에 우(俁 고려 예종의 휘)가 훙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제전(祭奠)과 조위(弔慰)의 임무를 겸하게 되었다. 이는 원풍(元豊 송 신종(宋神宗)의 연호. 1078∼1085)의 제도에 따른 것이다. 계묘년(고려 인종 1. 1123) 6월 13일 갑오에 정사와 부사가 순천관에 도달하고, 왕이 조서를 받고 나서 이틀이 지나자, 왕이 먼저 사람을 보내어 도할관 오 덕휴(吳德休)에게 가서, 불사(佛事)를 바칠 차비가 되었음을 고하였다. 다음날 제할관(堤轄官) 서긍(徐兢)이 하사할 제전(祭奠)의 예물을 가져다 앞에 진열하였다. 날이 새자 정사・부사 및 삼절(三節)의 관리가 조서 가마를 받들고 장경궁(長慶宮)에 이르러 삼절은 자리에서 쉬고, 정사와 부사는 오서대(烏犀帶)로 띠를 바꿔 띠고 가서 때가 오기를 기다려 제실(祭室)로 들어 갔다. 왕 해(王楷)는 소복으로 동쪽 기둥에 서고 정사와 부사는 재배하고 일어났다. 정사가 꾾어 앉아서 다음과 같이 어제 제문(御製祭文)을 읽었다.

“선화(宣和) 5년 세차(歲次) 계묘 4년 갑인삭 14일 정묘에 황제는 사신 통의대부(通議大夫) 수상서예부시랑(守尙書禮部侍郞) 원성현개국남(元城縣開國男)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 노 윤적(路允迪)과 태중대부(太中大夫) 중서사인(中書舍人) 청하현개국백(淸河縣開國伯)식읍구백호(食邑九百戶) 부 묵경(傅墨卿)을 보내어 고려국왕의 영에 제사를 드립니다. 생각하건대 왕(훙거한 고려 예종을 말함)께서는 몸소 한결같은 덕을 지니시고, 이 동쪽 땅의 왕위를 이어 효성과 우애가 숙경 공손하였고, 신령(조상의 신령을 말함)과 백성을 은혜롭게 이끌며, 전대의 예문(禮文)과 인민을 계승하여 사방의 나라들이 모범으로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충성이 일찍부터 드러나시며, 돈독한 의(義)로 왕(송의 황제를 말함)을 근실하게 섬기셨고, 보내신 자제들이 조정에 있어 명령에 복종함이 근엄하였습니다. 짐(朕)이 생각하건대 왕께서는 의지 바다 한모퉁이에 있으면서도, 헌상(獻上)하는데 마음을 쓸 수 있으셨으니, 마음이 왕실에 있지 않은 적이 없으셨습니다. 큰 공적을 가상히 여겨 잊지 않고 돌보며 바야흐로 차비를 차려 사람을 시켜 짐의 뜻을 가서 알려 그대 나라를 잘 진무(鎭撫)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생각하였겠습니까? 하늘이 남겨두지 않아 급작스레 큰 변고가 나 나라가 고통속에 빠졌음을 듣게 되어, 가슴속이 놀라고 슬퍼졌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휼전(恤典)207)을 내려 그것으로 뚜렷하신 덕을 찬미하여서 그대의 나라를 안녕하게 하는 터입니다. 바라건대 오셔서 내가 신령을 총애함을 받아들여, 그대의 후대 사람들에게 영윈히 복을 드리워 끝없이 아름다움을 누리게 하소서. 상향(尙饗).”



조위 弔慰



이날 제전의 예가 끝나고 잠시 물러나 있다가 조위(弔慰)의 예를 거행하였다. 먼저 궁정 안에다 향안(香案)을 마련하고 서쪽으로 천자의 궁궐을 바라보았다. 왕 해(王楷)는 소복으로 서쪽을 면해 서고, 정사는 남면하여 서쪽 웃자리에 자리잡고, 부사는 또 그 다음에 자리잡았다. 부사가 조서를 정사에게 주니 정사는 이를 왕에게 주었다. 왕은 허리를 깊이 굽혀 국궁하고 재배하고서 꿇어앉아 그것을 받았다. 조서는 이러하다.

“고려국왕 왕 해시여, 생각하건대 그대의 선왕(先王)께서는 밝은 덕을 근신하게 지키시어 그 왕위를 보전하여 나 한 사람을 돕기에 어울리셨습니다. 천명(天命)이란 믿기 어려운지라 급작스레 부음(訃音)을 알려 왔습니다. 멀리 생각하거니와 그지없이 사모하시니라 진실로 슬픔이 대단하실 것입니다. 즉위 초에 덕을 닦아 실천에 옮기기를 부탁 드리거니와 힘써 슬픔을 억누르시어 나의 권고(眷顧)하는 생각에 부응하도록 하소서. 이제 국신사(國信使) 통의대부 수상서 예부시랑 원성현개국남 식읍삼백호 노 윤적과, 부사(副使) 태중대부 중서사인 청하현개국백 식읍구백호 부 묵경을 보내어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겸임시키고, 아울러 제전.조위.예물 등을 별록과 같이 내리오니 받아 주소서. 그래서 이에 조서로 일러 드리오니 잘 아시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봄철 따뜻한데 경께서는 요즈음 평안하시겠지오. 이상으로 줄입니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6 권



연 례 燕禮



선왕(先王 여기서는 고대의 명철했던 임금)의 연향(燕饗)208)하는 예는 거기에 참석한 자들의 작위의 등급에 따라 높이고 줄이고 하는 절도를 삼아, 술 부어 올리는 데는 횟수가 있고 받은 잔을 돌리는 데는 의례가 있다. 본조(本朝 송조(宋朝)를 말함)에서는 그것을 상세히 따져서 옛것을 스승으로 삼고 지금에 편리하게하여 선왕의 의도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의 제도는 잔을 잡고 술을 따라서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오는데, 이것은 빈객에게 술을 드리는 방법으로 옛사람의 유풍(遺風)이 있는 것이다. 이는 정녕 사신에게 더 후하게 하여서 왕자가 보낸 사람을 높이는 것일 것이고, 자기 나라에서 행하는 것은 반드시 다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 그림에 넣어서 그들이 중국을 사모하는 뜻을 기록하여 두기로 한다.



사적209) 私覿



왕이 조서를 받고 나면 왕과 정사. 부사는 자리에서 잠시 쉰다. 왕은 동쪽, 정사와 부사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찬자(贊者 의식의 절차 진행을 돕는 자)가 정사와 부사의 기거상황을 왕에게 고하면 왕은 개(介 의식에서 주인과 빈객사이를 연락하는 사람. 찬자(贊者)를 돕는 사람)를 보내어 복명한다. 그리고 인접관(引接官)들은 좌우로 나뉘어 왕과 정사.부사를 인도하여 회경전(會慶殿)의 전정으로 나가서게 한다. 마주보고 읍(揖 두 손을 마주잡고 상반신을 약간 굽히는 경례)하는 일이 끝나면 왕은 동쪽 기둥에 서고 정사와 부사는 서쪽 기둥에 서는데, 각자 욕위(褥位 요를 깔아 앉을 수 있게 만든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왕과 정사가 서로 향해서 재배가 끝난 다음 각각 몸을 좀 앞으로 내어 문안의 교환을 끝내면 다시 재배하고 정사는 조금 물러선다. 부사는 정사의 자리에 서서 왕과 마주 배례하는 것을 처음의 예(禮)와 같이 하고 각각 자리로 돌아간다. 그렇게 한 뒤에 각각 잡았던 자리로 가서 그 곁에 선다. 상절관(上節官)들은 방자(榜子)210)를 내고 참례하는데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이하는 배례하지 않고 다만 몸을 굽혀 왕에게 읍하고 왕 역시 몸을 굽혀 그것에 답하면 물러나 동쪽 행랑에 선다. 다음은 중절(中節)을 인도하여 뜰 아래에서 참례시키는데, 네 번 배례하면 왕은 몸을 조금 움직여 읍으로 답례하고 그것이 끝나면 물러나서 서쪽 행랑에 선다. 왕과 정사・부사는 좌석으로 가서 앉고 상절과 중절 역시 그렇게 한다. 다음은 하절(下節)을 뱃사람들과 함께 인도해오는데 역시 뜰아래에서 여섯 번 배례하고 문의 동서 두편으로 나뉜 차례에 따라 북쪽을 면해 앉는데, 동쪽이 상석이다. 그렇게 한후에 술이 돌아간다. 헌수(獻酬 술을 드리고 회례함을 말함)의 예는 별편(別篇)에 나온다.(헌수조 참조)



연의 燕儀



연음의 예에 쓰이는 장식과 장막 등속은 다 광채가 나고 화려하다. 매청위에 비단보료를 펴 놓았고 양쪽 행랑에는 단을 두른 자리를 깔았다. 그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은데, 사람을 취하게 하지는 못한다. 과일과 채소는 풍성하고 살졌는데 대부분 껍질과 씨를 제거하였고 안주에는 양육(羊肉)과 제육이 있기는 하지마는 해물이 더 많다. 탁자 표면에는 종이를 덮었는데, 이는 정결함을 취한 것이다. 기명(器皿)은 대부분 금칠한 것을 썼고 혹 은으로 된것도 있으나, 푸른색 도기(陶器)를 갑진 것으로 친다. 헌수의 의례는 빈객과 주인이 백번이고 배례하여 감히 예법을 버리지 않는다. 영관(令官 삼성(三省)의 장관)・국상(國相 재상들)・상서(尙書 각부의 장관)이상은 궁전 동쪽 처마 끝에 서서 왕의 뒤에 서고 나머지 관원들은 문무가 동서 양편으로 나뉘어 뜰 가운데 서고 가운데에 푯말을 하나 세워서 시각을 나타낸다. 곁에는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신분이 비천한 궁중의 선역인)이 띠에 홀(笏)을 꽂고 붉은 천으로 된 초롱을 잡고 백관(百官)앞에 서고 또 위군(衛軍)을 시켜 각각 의장물들을 잡고 그 뒤에 서게 있게 한다.

고려인들은 왕을 받드는 것이 매우 엄해서 연락(燕樂)으로 예를 행할 때마다 늘어선 관리와 병위(兵衛)는 비록 뜨거운 햇빛과 급작스런 비 속에서라 할지라도 산같이 서있고 움직이지 않으며 결코 얼굴빛을 바꾸는 법이 없으니 그들의 엄숙 공손함이 가상하다.



헌수 獻酬



왕과 정사・부사가 자리에 가서 앉고 나면 왕이 개(介)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몸소 일어나 술을 따라 권해 드리고자 합니다.’ 하고 고하게 하는데, 사자(使者)는 재삼 고사하고 나서야 그 말에 따른다. 각각 자리에서 물러나 일어서서 마주 읍하는 일이 끝나면 집사자(執事者)가 정사의 술잔을 가지고 왕 앞에까지 온다. 왕이 꿇어 앉아 술준(준)을 잡고서 술을 따르게 하면 집사자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가져오고 정사 역시 꿇어앉아 술잔을 받는다. 끝나면 다시 잔을 집사자에게 주고 각각 자리로 돌아간다. 자리잡고 앉고 나서 마시는 일이 끝나면 일어나 몸을 굽혀 마주 읍하고 간단히 사의(謝意)를 표한다. 왕이 또 친히 부사에게 술을 따라 주는데, 그예는 정사의 경우와 같다. 정사와 부사가 왕의 잔을 받는 일을 끝내고 나서는 다시 친히 술을 따라서 왕에게 회례하기를 처음의 예와 같이 하는데, 술이 세 차례 돌고서야 통상의 의례와 같이 한다. 술이 15차례 돌고서는 차(次 임시로 머물게 마련해 놓은 자리)에서 중간 휴식을 취하고 잠시 후에 다시 자리에 나가 앉는다. 정사와 부사부터 그 아랫 사람들에게 까지 습의(襲衣)211)와 금은대(金銀帶)를 각각 차등을 두어 선사하고 술이 다시 10여 차례 돌고 밤중이 되어서야 파하는데, 왕은 정사와 부사가 문밖으로 나갈 때까지 전송한다. 삼절(三節)의 사람들은 차례에 따라 말을 타고 관사(館舍)로 돌아간다.



상절석 上節席



상절의 좌석은 서쪽을 향해 앉는데 북쪽이 상석이다. 기물은 금색을 칠했고 예법은 정사와 부사에 대한 것과 같은데 좀 간략하다. 그리고 왕이 친히 술을 따르지 않고 단지 상서랑(尙書郞 각부 낭관(郞官)의 통칭)이나 혹은 경감(卿監 각사(寺)의 장)을 보내서 대신하게 한다. 먼저 그 예(禮)를 왕에게 고하고 왕이 그 말을 좋다고 하면 재배하고 물러나서는 부리는 사람에게 ‘임금께 모관(某官)을 보내어 상절에게 술을 권하게 하였읍니다.’라고 말하게 하면 도할관과 제할관이하가 몸을 굽혀 그것에 답한다. 처음 앉아서는 두 차례 권하고, 저녁 연음에 다시 자리에 나가 세 번째 권하기를 이르러서는 다 거굉(巨觥 거대한 뿔모양의 술잔)으로 바꾸고 술이 다 없어지면 물러난다. 보내왔던 관원은 다시 궁전 뜰에서 왕에게 재배하고 물러간다.



중절석 中節席



중절의 좌석은 동쪽을 향하는데 북쪽이 상석으로 상절과 마주본다. 그 과일・안주・기명은 또 상절보다 한등이 떨어진다. 관원을 보내어 술을 권하는 것은 대략 상절에 대한 의례와 같다.



하절석 下節席



하절의 좌석은 궁전 문 안에 있고 북쪽을 면하는데 동쪽이 상석이다. 그 좌석에는 상과 탁자는 마련하지 않고 단지 작은 걸상을 땅에 놓고 앉는다. 기명은 백금(白金 은을 말함)을 쓰고 과일과 안주는 간략하며, 술 돌리는 수는 좀 드물어 중절보다 훨씬 떨어진다.



관회 館會



사자(使者)가 관사에 들어가고 나면 왕이 관원을 보내어 연회를 열게 하는데, 그것을 불진회(拂塵會)라고 한다. 이때부터는 5일에 한 번씩 연회를 차리는데, 절서(節序 15일에 한차례씩 바뀌는 절후를 말함)를 만나면 예(禮)가 좀 더해진다. 정사와 부사가 그 가운데 있어 자리가 좌우로 나뉘고 나라의 관원과 반연(伴筵) 및 관반(館伴)은 동서로 나뉘어 객위(客位)에 있고 도할관과 제할관이하는 동서서(東西序)에 나뉘어 앉고 중・하절은 차례에 따라 양쪽 행랑에 앉는다. 술은 15차례 돌리는데 그치며, 밤중에 파한다. 뜰안에는 초롱은 마련하지 않고 단지 횃불은 마련할 따름이다.

또 과위(過位)의 예(禮)가 있는데 관반이 서신으로 정사와 부사를 그 위(위)로 초청하여 연음(燕飮)의 예와 같이 한다. 이때 삼절(三節)은 함께 가지 않고 단지 인접(引接)・지사(指使)・등속만을 데리고 가서 심부름에 대비한다. 며칠후에 정사와 부사는 관반관(館伴官)을 그들이 묶고 있는 낙빈정(樂賓亭)으로 초청한다. 이 때 숙수를 쓰는데, 과일・안주・기명은 다 어부(御府)에서 준것들이다. 사방의 좌석에는 보완(寶玩 값나가는 노리개)・고기(古器)・법서(法書 글씨본)・명화(名畵)・이향(異香 보기 드문 좋은 향기)・기명(奇茗 진기한 좋은 차)을 늘어놓는데, 오만가지로 진귀하고 정채로움이 눈길을 끌어 고려인들 치고 경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술이 한창일 때 좋아하는 것에 따라 원하는대로 집어서 주었다.



배표212) 拜表



사자(使者)는 선명례(宣命禮 휘종의 조서를 전달하는 의식을 말함)가 끝나면 ‘천녕절(天寧節 휘종의 생일, 음력 10월 10일)에 대어 가서 상수(上壽 술을 올리고 축수함을 말함)하려 한다.’는 뜻을 서신으로 한다. 왕은 개(介)를 보내어 서신을 전달하여 간곡히 만류하나 사자는 이를 굳이 사양한다. 왕은 날을 잡아 서신으로 표장(表章 휘종에게 보내는 글을 말함)을 바칠 것을 고한다. 그날이 되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을 거느리고 왕부(王府)에까지 들어가면 왕은 영접하여 읍을 하고 회경전(會慶殿)에까지 간다. 뜰 가운데는 안열(案列 상을 줄지어 늘어 놓은 것을 말함)과 褥位(褥位 요를 깔아 마련한 왕과 정・부사의 자리를 말함)를 마련한 것이 조서를 받을 때의 의례와 같다. 왕이 궁궐을 바라보고 재배가 끝나면 홀(笏)을 띠에 꽂고 꿇어앉는다. 집사관이 표(表)를 왕에게 주면 왕은 표를 받고서 무릎으로 가서 정사에게 바친다. 정사는 꿇어 앉아서 받고, 그것이 끝나면 표를 부사에게 준다. 부사는 표를 인접관(引接官)에게 준 뒤에 좌석으로 간다. 모임이 파할 때에 가서 표를 담은 갑(匣)을 채색 가마 속에 놓고, 의장병이 인도하여 앞에서 가는 것을 따라 관사로 돌아간다.



문전 門錢



배표연(拜表宴 표문을 바치는 의식에 뒤따르는 잔치)이 파하면 신봉문(神鳳門)에 장막을 치고 빈객과 주인이 자리를 마련한다. 왕은 정사와 부사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작별하는 일이 끝나면 좌석 곁에 선다. 먼저 상절을 인도하여 앞에 서게 하면 왕이 친히 거굉(巨觥)에 이별주를 따라 주고 상절은 하직 인사를 하고 물러난다. 다음에는 중절을 인도하여 층계에 세우고 하절은 층계 아래에 세우고 술을 권하는데 이 때의 예는 상절과 같다. 물러나 문밖으로 나가 정사와 부사가 말에 오르기를 기다려 삼절이 차례로 따라서 관사로 돌아간다.



서교송행 西郊送行



정사와 부사가 귀로에 오를 때는 이날 일찍이 순천관을 떠나 얼마 안 가서 서교정(西郊亭)에 당도하는데, 이 때 왕은 국상(國相)을 보내어 그 안에 술과 안주를 갖추어 놓게 한다. 상.중절은 동서(東西)의 행랑에 자리잡고 하절은 문밖에 자리잡으며 술이 15차례 돌고서 파한다. 정사와 부사는 관반(館伴)과 문밖에서 말을 세우고 작별 인사를 하고, 관반은 말위에서 친히 술을 따라 사자(使者)에게 권한다. 마시는 것이 끝나면 각각 헤어진다. 이보다 앞서 접반관 및 송반관(送伴官)과는 관사에 도달하자 곧 헤어지는데, 귀로에 오르게 되면 이곳에서 다시 함께 가게 되어, 군산도(群山島)에서 바다로 나갈 때까지 같이 간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7 권



관 사213) 館舍



자산(子産)이 정백(鄭伯)의 재상으로 진(晉) 나라에 갔었는데, 진 나라에서는 노(魯)의 국군(國君)이 죽었다는 이유로 그를 만나 주지 않았다.213) 자산은 그가 든 관사의 담을 깡그리 허물고 거마(車馬)를 거기에다 들였다. 진 나라 사람이 그를 나무라자 이렇게 대답하였다.

“문공(文公)214)께서 맹주(盟主)가 되었을 적에는 궁실은 낮았고 바라볼 누대와 정자가 없었으나, 제후의 관사를 높여 국군의 노침(路寢 국군이 정사를 듣는 정전(正殿))같이 지었고, 창고와 마굿간을 수리하여 거마를 둘 데가 있었고, 빈객에게 대령시킨 하인들이 있었으니, 빈객이 오면 자기 집으로 돌아온 듯하였습니다.”

진 나라에서는 부끄러워져 불민함을 사과하였다. 그런즉 제후의 나라에서 사방에서 오는 빈객을 접대하는 방법조차도 관사를 두는 것을 먼저할 일로 삼았었거든, 하물며 외이 번복(外夷藩服)이, 왕자가 보낸 사람에 대해서야 더할 나위가 있겠는가? 생각건대, 고려 사람은 본래부터 공손하였고 또 조정에서 위무함이 체모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사를 건립한 것에는 제도의 사치스러움이 왕의 거처를 능가하는 점이 있다. 나는 그것을 가상히 여겨 관사도(館舍圖)를 만든다.



순천관 順天館



정사와 부사가 조서를 받들고 성(城)의 선의문(宣義門)으로 들어가서는, 곧장 북으로 3리 가량을 가서 경시사(京時司 본서 제 40권 악률(樂律) 조 참조)에 이르고, 또 북으로 돌아 5리 가량을 가 광화문(廣化門)에 이르러 다시 서쪽으로 돌아 2리를 가서 매우 높은 산등성이 하나를 지나 좀 북쪽으로 향해 2리를 가면 곧 순천관(順天館)에 다다른다. 바깥 문에는 방(榜 글씨를 쓴 나무 판)이 있고, 중문은 청수의용호군(靑繡衣龍虎軍)이 지키는데, 다만 상․중절이 말에 오르고 내리고 하는 곳으로 쓸 뿐이다. 정청(正廳 중간의 본채)은 9영(楹)인데 규모가 장대하고 건축이 임금의 거처를 능가한다. 외랑(外廊)은 30간인데 다른 물건은 두지 않고, 단지 관회(館會) 때에만 중․하절의 술마시는 자리를 거기에 늘어놓을 뿐이다. 뜰 가운데에는 작은 정자 둘이 있고, 그 중간에 막집[幕屋] 3간을 만들었는데, 전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곳이었으나 지금은 왕 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아 전연 볼 수 없었다.

정청 뒤에 지나 다니는 길이 있고 그 간운데에 낙빈정(樂賓亭)이 세워져 있는데 좌우 두 자리를 정사와 부사의 거실로 하였다. 내랑(內廊)은 각각 12자리인데 상절이 나누어 거처한다. 서쪽 자리의 남쪽이 관반관(館伴官)의 자리이고 그 북에다 조서를 봉안하였다. 양쪽 곁채에는 도관(道官)을 거처시킨다. 동쪽 자리에 당(堂)이 있는데 도할관과 제할간의 자리이고, 또 그 동쪽은 서장관(書狀官)의 자리이다. 역시 낭옥(廊屋)이 있는데 심히 넓어 중․하절이 차례에 따라 거처하고 뱃사공도 거기에 거처한다. 북쪽을 상석으로 하여, 정사와 부사 이하에 각각 방자를 주어 심부름에 대비시켰다. 동쪽 자리의 남쪽 복판에는 청풍각(淸風閣)을 지었고 서쪽 자리의 북쪽에는 산세(山勢)에 기대어 향림정(香林亭)을 지었는데, 다 창을 열면 산을 대하게 되고 맑은 물이 감돌며 높은 소나무와 이름 있는 화훼(花卉)가 울긋불긋 서로 그늘지우고 있다. 시설물과 기명은 하나도 갖추어지지 않은 게 없다. 앞서 왕 휘(王徽 고려 문종(文宗))가 이것을 세워서 별궁으로 썼는데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1078∼1085) 연간에 조공을 바친 뒤부터는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곳이 없기 때문에 고쳐서 관사로 하고 ‘순천’(順天)이라 명명하였다.



관청 館廳



정청은 5간이고, 양쪽 곁방은 각각 2간씩이고 창문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데, 통틀어 9영(楹)이다. 방(榜)에는 ‘순천지관’(順天之館)이라 씌어 있다. 동서 양쪽 층계에는 다 난간이 만들어져 있고, 그 위에는 비단 수로된 장막이 쳐져 있는데, 그 무늬는 대부분 나는 난새[翔鸞]와 둥근 꽃이다. 사면에는 온통 꽃을 수놓은 그림 병풍을 쳤고, 좌우에는 팔각빙호(八角氷壺)가 놓여져 있다. 오직 나라의 관원과만 여기서 만나고, 관사 안에서 연회를 할 적에는 정청으로 올라간다. 정사와 부사가 그 가운데 있고 그 나머지 빈객과 주인과 나라의 관원은 동서로 나뉘어 모시고 앉을 따름이다.



조위 詔位



조위는 낙빈정(樂賓亭) 서쪽 관반 자리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전각(殿閣)은 5간인데 그림과 장식이 화려하게 빛난다. 양쪽 행랑은 전에는 압반(押班)215)과 의관(醫官)의 방이었는데, 지금은 두 도관(道官)의 각각 관직의 서열에 따라 나뉘어 거처한다. 정사와 부사가 관사에 들어가서는 먼저 전각에 조서를 봉안하고 왕이 길일(吉日)을 잡아 조서 받기를 기다린다. 그날에는 삼절(三節)의 관원을 거느리고 뜰에서 배례하고, 도할관과 제할관이 마주 받들고, 상절이 앞에서 인도하여 관사를 나가 채색가마속에 놓고 차례대로 따라간다.



청풍각 淸風閣



청풍각은 관사의 정청 동쪽, 도할관과 제할관의 자리 남쪽에 있다. 그 건제(建制)는 5간이고, 아래에는 기둥을 쓰지 않고 단지 공두(栱斗)216)를 포개 쌓아 올려서 이루어졌고 휘장은 치지 않았다. 그러나 아로새기고 채색 단장한 것이 울긋불긋 화려하고 사치한 것이 다른 곳들에 비해 월등하다. 다만 하사하는 예물을 저장할 뿐이다. 숭녕․대관 연간에는 ‘양풍’(凉風)이라는 이름을 내걸었었으나, 지금은 이 이름으로 바뀌었다.



향림정 香林亭



향림정은 조서전(詔書殿) 북쪽에 있다. 낙빈정 뒤에서부터 길이 나서 산으로 올라가, 관사에서 1백보 가량 되는 산 중턱의 등에 세워져 있다. 그 건제(建制)는 사릉(四稜 네 모서리가 뚜렷하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것)이고, 화주(火珠 유리로 된 둥근 구슬)의 정수리이고, 8면에 난간이 만들어져 있어 기대어 앉을 수 있다. 누운 소나무와 괴석에 여라(女蘿)와 칡덩굴이 서로 어울리고, 바람이 불면 서늘하여 더위를 느끼지 않게 된다. 정사와 부사는 여가 있는 날에는 언제나 상절의 관속들과 차를 끓이고 그 위에서 바둑을 두며 종일토록 담소하니, 이는 마음과 눈을 유쾌하게 하고 무더위를 물리치는 방편이었다.



사부위 使副位



정사와 부사의 자리는 정청(正廳) 뒤에 있는데, 가운데에 큰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 건제(建制)는 사릉(四稜)에 위는 화주(火珠)이고, 방(榜)에는 ‘악빈’(樂賓)이라 씌어져 있다. 정사의 자리는 동쪽에 있고 부사의 자리는 서쪽에 있는데 각각 3간씩을 차지했고, 중간에는 금칠한 기명을 늘어놓고 비단 수를 펼쳐 놓았으며 방장[帷幄]이 심히 성대하다. 뜰 가운데에는 화훼가 넓게 심어져 있다. 정북(正北)에 있는 한 문으로 해서 산에 오를 수 있는데 그것이 곧 향림정의 길이다.



도할․제할위 都轄提轄位



도할관과 제할관은 한 당(堂)에 함께 거쳐한다. 그 건제는 3간으로 마주 틔어진 두 방에서 각각 관직 서열에 따라 나뉘어 거처한다. 그 가운데는 회식하고 객을 만나고 하는 장소로 쓴다. 앞에는 푸른색 휘장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 모양이 술집의 방장과 유사하다. 방 안에는 각각 무늬 있는 깁의 붉은 막이 베풀어져 있는데, 전에는 방장을 사용하지 않았었지만 지금은 역시 그것이 있다. 평상 위에는 비단 보료를 깔았고 다시 큰 자리를 올려 놓았는데 비단으로 단이 둘려져 있다. 방 안의 기명은, 향렴(香奩 이 경우는 향을 넣어두는 그릇)․주합(酒榼 술을 담는 그릇)․타구․식야(食匜 음식을 담는 그릇) 같은 것들이 다 백금(白金 은을 말한다)으로 되어 있고, 물을 담는 제구는 다 동을 썼고, 물건들이 다 갖추어져 있다. 당(堂) 뒤에는 돌을 쌓아 못을 만들었는데, 시냇물이 산에서 내려와 그 못으로 들어간다. 가득차면 서장관의 자리로 끌어내어지는데, 콸콸 소리가 난다. 수행하는 사람은 정사나 부사보다 한등 낮고, 나머지 물건들도 거기에 맞춘다.



서장관위 書狀官位



서장관의 자리는 도할관과 제할관 동쪽에 있는데, 그 당(堂)은 3간이고 그 건제는 약간 떨어진다. 역시 관직의 서열로 나누어 거처한다. 뒤에 못이 하나 있어 서쪽과 서로 통하고, 나머지 물은 동쪽으로부터 관사 밖으로 나가 시냇물과 합쳐진다. 방 안의 발․장막 등속은 도할관과 제할관의 그것들과 대략 같으나, 다만 은이 동(銅)으로 바뀔 뿐이다.



서교정 西郊亭



서교정은 선의문(宣義門) 밖 5리 가량에 있다. 추녀끝이 높기는 하지마는 갓 지어져서 침실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오직 식사 도구가 갗추어져 있고, 사자가 처음 도착하고 귀로에 오르고 할 때 여기서 환영․위로하고 술로 전송하고 한다. 하절(下節)과 뱃사공은 다 들이지 못하므로, 문 맞은쪽에 큰 장막을 치고 죽 앉혀 놓고 술을 먹인다.



벽란정 碧瀾亭



벽란정은 예성강(禮成江)의 강언덕에 있는데, 왕성(王城)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신주(神舟 조서를 실은 사신의 배)가 강언덕에 닿으면 수위병이 징과 북으로 환영하고 조서를 인도하여 벽란정으로 들어간다. 벽란정은 두 자리가 있으니 서쪽을 우벽란정(右碧瀾亭)이라 하여 조서를 봉안하고, 동쪽을 좌벽란정(左碧瀾亭)이라 하여 정사와 부사를 접대한다. 양편에 방이 있어 두 절(節)의 인원을 거처케 하는데, 갈 때와 올 때에 각각 하루씩 묵고 간다. 똑바로 동서로 도로가 있는데, 왕성으로 통하는 길이다. 그 좌우에 10여 호의 주민이 살고 있다. 사절이 성으로 들어가 버리면 뭇 배들은 다 항내에 정박하므로, 뱃사공이 순번을 정해 이곳에서 감시한다.



객관 客館



객관의 시설은 일정하지 않다. 순천관 뒤에는 10여 간 되는 작은 관사가 있어, 심부름 보내고 소식을 전달시키고 하는 사람들을 접대한다. 영은관(迎恩館)은 남대가(南大街)의 흥국사(興國寺) 남쪽에 있다. 인은관(仁恩館)은 영은관과 나란히 있는데 전에는 ‘선빈’(仙賓)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이 이름으로 고쳤다. 이것들은 다 이전에 글안(契丹 요(遼)를 말한다)의 사신을 접대하던 곳이다. 영선관(迎仙館)은 순천사(順天寺) 북쪽에 있고, 영은관(靈隱館)은 장경궁(長慶宮) 서쪽에 있는데, 적인(狄人 북방의 미개인이라는 말)인 여진(女眞 금(金)을 말한다)을 접대한다. 흥위관(興威館)은 봉선고(奉先庫) 북쪽에 있는데, 전에 의관(醫官)을 접대한 일이 있던 곳이다217). 남문 밖에서부터 양랑(兩廊)까지에 관사가 도합 넷이 있으니, 청주(淸州)․충주(忠州)․사점(四店)․이빈(利賓)이 그것으로, 다 중국의 상인과 여행자를 접대하는 곳들이다. 그러나 누추하고 허술하여 순천관과는 비교가 안 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8 권



공 장 1 供張一



주관(周官 즉 「주례」(周禮))의 장차(掌次)는 왕의 위차(位次 행사나 의례로 나가서 머무는 장소)의 법도를 관정하여서 장막을 치는 일에 대비한다218). 제후의 조근(朝覲)과 회동(會同)에는 대차(大次)와 소차(小次)를 치고, 사전(師田 군대의 이동과 사냥)에는 막을 치고 상을 마련해 놓는다. 왕자(王者)가 제후를 접대하는 것은 그 예를 간략하게 하여도 좋을 게 아닌가 하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조근․회동․사전을 거행할 때에 머물러 있을 곳을 시설하기를 이토록 철저하였는데, 하물며 해외의 작은 제후가 왕이 보낸 사람을 높이 받들 경우 시설하고 마련해 놓고 하는 일을 어찌 구차스럽게 할 수 있으랴! 고려(여기서는 한인의 고장을 일반적으로 가리켜서 한 말이다)는 왕씨(王氏) 이래로 대대로 본조(本朝)의 번병(藩屛)이 되어 왔고, 주상께서 진무하신 은덕이 심히 후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사절이 그 곳에 가면 시설하는 제구가 극히 화려하고 찬란하였다. 은택이 사해에 미쳐감을 쓴 요소(蓼蕭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이다)의 시에, ‘고삐 끝 드리워져 있고, 방울 소리 절렁인다.219)’ 한 것은 곧 그 의물(儀物 의장으로 쓰여진 물건들)이 예에 맞음을 말한 것으로 그들이 임금을 즐겁게 하려는 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삼가 고려인이 중국의 사절을 공경스럽게 접대한 것을 서술하여 공장도(供張圖)를 만든다.



힐막 纈幕



힐막은 옛 제도는 아니다. 선유(先儒)들의 말로는, 비단을 이어서 물들여 도안을 만든 것을 ‘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고려의 습속은, 지금 힐을 만드는 것이 더욱 정교하다. 그 바탕은 본래 무늬 깁이고 도안의 빛깔은 곧 황색과 백색이 서로 섞인 것이어서 찬란하여 볼만하다. 그 도안의 위는 화주(火珠)이고 사방 끝에 보망(寶網)을 드리웠고, 아래는 연대화좌(蓮臺花座)가 있는대 불가에서 말하는 부도(浮屠) 형상과 같다. 그것은 그래도 귀인이 쓰는 것은 아니고 강가의 정자나 객관(客館)의 속관(屬官) 자리에 설치한다.



수막 繡幕



수막의 장식은 오색이 뒤섞여서 이루어진 것으로, 가로로 꿰매지 않고 한 폭씩을 위에서 아래로 드리웠다. 여기에도 원앙새․나는 난새․꽃떨기 등의 문양(紋樣)이 있는데 홍색과 황색이 강하고, 그 바탕은 본래 무늬 있는 붉은 깁이다. 오직 순천관의 조전(詔殿)․정청․정사와 부사의 자리 및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에만 설치한다.



수도 繡圖



수도는 붉은 바탕에 초록색 단을 둘렀고 오색이 뒤섞여 있으며, 산꽃과 노는 짐승의 정교함이 수막을 능가한다. 화죽․영모(翎毛 조류를 말한다)․과실 따위도 있는데 각기 다 생기가 있다. 이 나라의 습속으로는, 장막을 10여 폭 칠 때마다 그림 하나씩을 걸어서 사이를 듸우는데, 그것이 대청 속 복판을 차지하게는 하지 않는다.



좌탑 坐榻



좌탑의 제도는 네 모서리에 장식이 없고, 그 위에 푸른색 단을 두른 큰 자리를 깐다. 그기고 그것을 관사 안의 지나 다니는 길 사이에 설치하는데, 이는 관속과 수종 관리가 쉬는 제구이다.



연대 燕臺



연대(좌석 앞에 놓는 상)의 모양은 중국의 궤안(几桉)과 같다. 네 모서리는 예각을 업애고 백색의 등넝쿨이 꽃을 뚫고 나가 있다. 대면(臺面)은 네 군데로 나뉘어져 붉은 칠로 단장되었고 금칠한 장식못이 붙어 있다. 다시 붉은 비단 휘장[繡幃]이 둘려 있는데, 사면에 띠가 드리워져 그것들이 서로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날개와 같다. 다만 왕 해(王楷 고려 인종의 이름)가 우(俁 고려 예종(睿宗)의 이름)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다 해서 붉은색을 자주색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좌상(坐床)의 제도는 중국의 그것과 같으나 높이와 크기가 3분의 1이 더 하다.



광명대 光明臺



광명대는 등불과 촛불을 받치는 제구이다. 아래에 세 발이 있고 가운데 한 줄기가 있는데, 형상이 대나무와 같아 마디 하나씩으로 이어진다. 위에는 쟁반이 하나 있고, 그 가운데 사발 하나가 놓여 있고, 그 사발에는 받침이 있어 촛불을 켤 수 있게 하였다. 등불을 켜려면 구리 항아리로 바꿔서 기름을 담고 심지를 세워 작은 흰 돌로 눌러 놓고서, 붉은 사포(紗布)로 덮어 씌운다. 높이는 4척 5촌이고 쟁반의 넓이는 1척 5촌이고 삿갓은 높이가 6촌이고 넓이가 5촌이다.



단칠조 丹漆俎



단칠조(붉은 칠을 한 적대)는 왕궁(王宮)에서 평일에 사용하는 것이다. 평상 위에 앉아서 기명을 적대에 올려놓고 그 앞에서 먹기 때문에, 음식을 적대의 수효와 다과로 존비가 나뉘어진다. 정사와 부사가 관사에 들면 매일 세 끼씩을 공급하는데, 한 끼는 다섯 적대씩이고, 그 기명은 다 황금이 칠해져 있다. 적대의 넓이는 세로가 3척, 가로는 2척, 높이는 2척 5촌이다.



흑칠조 黑漆俎



식사용 적대의 제도는 크기가 같으나 단지 붉고 검은 차이가 있을 뿐이다. 도할관(都轄官)과 제할관(提轄官) 및 상절(上節)에게는 관사 안에서는 매일 세 끼씩을 공급하는데, 한 끼는 세 적대씩이고 중절은 두 적대씩이다. 하절은 상을 붙여놓고 다섯 사람씩 한자리에서 식사를 한다.



와탑 臥榻



와탑(침상) 앞에는 또 낮은 평상 세 틀이 놓여 있고 난간이 세워져 있는데, 각각 무늬비단 보료가 깔려 있다. 또 큰 자리가 놓여 있는데 돗자리의 편안함은 전연 이풍(夷風 오랑캐 풍속)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국왕과 귀한 신하에 대한 예(禮)이고 아울러 그것으로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일 뿐이다. 서민들은 대부분 흙 침상이며,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고려는 겨울철이 극히 춥고, 또 솜 등속이 적기 때문이다.



문석 文席



문석은 곱고 거칠고 한 것이 일정하지 않다. 정교한 것은 침상과 평상에 깔고 거친 것은 땅에 까는 데 쓴다. 짠 풀은 부드러워서 접거나 굽혀도 망가지지 않는다. 흑․백 두 색이 서로 섞여서 무늬를 이루고, 청자색으로 단을 둘렀는데 본래 일정한 제도가 없다.



문유 門帷



문유의 제도는 푸른 비단 세 폭인데, 위에 거는 고리가 있어 거기에 가로 나무를 꿴다. 모양은 술집의 깃발과 같다. 궁실 안에서 부인들이 가리는데 쓰는 제구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29 권



공 장 2 供張二



수침 繡枕



수침의 형태는, 흰 모시로 자루를 만들어 그 속을 향초(香草)로 채우고, 양쪽 끝을 금색 마구리에 실로 놓은 꽃이 있는 것으로 마무렸는데, 무늬가 극히 정교하다. 또 붉은 깁으로 장식한 것이 연잎 형상과 같다. 삼절(三節)에 공급되는데, 그 제도가 같다.



침의 寢衣



침의의 제도는, 홍황색으로 거죽을 하고 흰 모시로 안을 댔는데, 안이 거죽보다 크고 네 변두기가 각각 1척이 넘는다.



저상 紵裳



저상의 제도는, 거죽과 안이 6폭인데, 허리에는 가로 두른 깁을 쓰지 않고 두 개의 띠가 매어져 있다. 삼절의 자리마다 각각 저의(紵衣)와 함께 마련하여 놓게 해서 목욕할 때 쓰도록 한다.



저의 紵衣



저의는 곧 속에 입는 훗옷이다. 이속(夷俗)은 준(純 가장자리에 두른 선)과 영(領 옷깃)을 쓰지 않고, 왕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 없이 다 저의를 입었다.



화탑선 畵搨扇



화탑선은 금은을 칠해서 장식하고 거기다 그 나라의 산림(山林)․인마(人馬)․여자(女子)의 형태를 그렸다. 고려인들은 만들지 못하고 일본에서 만든 것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그린 의복을 보니 정말 그러했다.



삼선 杉扇



삼선은 그리 잘 만들지 못한다. 단지 일본의 백삼목(白杉木)을 종이같이 쪼개어서 채색 실로 꿰어 깃과 같이 이어나간 것으로, 역시 바람을 낼 수 있다.



백섭선 白摺扇



백섭선은 대를 엮어서 뼈대를 만들고 등지(藤紙)를 말라서 덮어씌우는데, 간혹 은․동의 못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대의 수효가 많은 것을 좋은 것으로 친다. 심부름을 하거나 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가슴이나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데, 쓰기가 퍽 간편하다.



송선 松扇



송선220)은 소나무의 부드러운 가지를 가져다가 가늘게 깎아서 줄을 만들고, 그것을 두드려 실로 만든 후에 짜낸 것이다. 위에는 꽃무늬가 있는데 꽃을 뚫고간 등221)의 기교[穿藤之巧]에 못지 않다. 다만 왕부(王府)에서 사자(使者)에게 준 것이 가장 잘 만들어졌다.



초구 草屨



초구(짚신)의 형태는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아 그 모양이 괴이하나, 전국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신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0 권



기 명 1 器皿一



전대의 역사에 이르기를, ‘동이(東夷)는 그릇에 적대를 쓴다.’고 하였는데, 이제 고려의 토속(土俗)도 여전히 그러하다. 만듦새를 보면 예사스럽게 소박함이 자못 사랑스럽고, 다른 식기들도 왕왕 준이(尊彛)222)와 보궤(簠簋)223)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연음(燕飮) 때의 시설에도 또 완점(莞簟)224)과 궤석(궤席)225)과 유사한 것들이 많다.226) 이는 대체로 기자(箕子)의 아름다운 교화에 물들어서 삼대(三代)의 유풍에 방불해진 것이다. 그 개략을 모아서 그림으로 보인다.



수로 獸爐



자모수로(子母獸爐 짐승 모자의 형상으로 된 향로)는 은으로 만드는데, 깎고 아로새기고 하여 만듦새가 정교하다. 큰 짐승이 쭈그리고 앉아 있고 작은 짐승은 움켜 쥐는 형상으로 뒤돌아보며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입으로 향기를 낸다. 오직 회경전(會慶殿)과 건덕전(乾德殿)의 공회(公會) 때에만 두 기둥 사이에 놓는 것으로 영조(迎詔) 떄에는 사향을 피우고, 공회 때에는 독누(篤耨)227), 용뇌(龍腦)228), 전단(旃檀)229), 침수(沈水)230) 등속을 태우는데, 그것들은 다 어부(御府)에서 하사한 향이다. 하나에 은 30근을 썼고, 짐승의 형태가 받침에 연결되어 있는데, 높이가 4척이고 너비가 2척 2촌이다.



수병 水甁



수병의 형태는 대략 중국의 주주(酒注 술 주전자)와 같다. 그것을 만드는데는 은 3근을 쓰며, 정사, 부사, 도할관, 제할관의 자리에 설치한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7촌, 용량은 6승이다.



반잔 盤琖



반잔(술받침대가 있는 술잔)의 만듦새는 다 중국의 것과 같다. 다만 잔은 깊고 테두리가 오무라 들었고, 주(舟 담기는 부분)는 작고 발이 높다. 은으로 만들고, 간혹 금으로 칠하기도 하고 꽃을 아로새긴 것이 재치가 있다. 권주(勸酒)할 때마다 다른 술잔으로 바꾸는데, 다만 용량이 약간 많을 뿐이다.



박산로 博山爐



박산로는 본래 한대(漢代)의 기물이다. 바다 안에 박산이란 이름의 산이 있는데, 그형상이 연꽃 같기 때문에 향로에 그 형상을 본따 쓴 것이다. 아래의 분(盆)이 있는데, 거기에 산과 바다에 파도치고 물고기와 용이 출몰하는 형상을 만들어서 끓는 물을 담아 옷에 향기를 쏘이는 용도에 쓴다. 그것은 습기와 향기가 서로 붙어서 연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 사람이 만든 것은 그 꼭대기는 비록 박산의 형상을 본떴다고는 하지만 그 아래는 세 발이어서 원래의 만듦새와는 아주 다르다. 다만 재치있는 솜씨는 취할 만하다.



주합 酒榼



주합(술 그릇의 일종)은 들고 다니는 기물이다. 위는 뒤집어씌운 연잎으로 되고 양쪽 귀에는 고리사슬로 된 드는 끈이 있는데, 금으로 간혹 칠했다. 권주(勸酒)의 절차에만 쓰고 술은 빛깔과 맛이 다 좋다. 그 만듦새는 높이가 1척, 너비가 8촌, 드는 고리의 길이가 1척 2촌, 용량이 7승이다.



오화세231) 烏花洗



은 꽃무늬의 것은 늘 사용하지는 않고 단지 정사와 부사의 사적(私覿)232) 때에만 있다. 약을 찍어서 꽃을 아로새겼고 검정 무늬에 횐 바탕인데 무게는 같지 않다.면의 너비는 1척 5촌이고 용량은 1두 2승이다.



면약호233) 面藥壺



면약호는 오직 정사・부사, 도할관, 제할관의 자리에만 은제(銀製)를 사용하고 나머지는 동으로 만들었다. 둥근 배에 긴 목으로 되어 있는데, 뚜껑의 형태는 좀 뾰족하다. 높이는 5촌, 배의 지름은 3촌 5푼, 용량은 1승이다.



부용준 芙蓉尊



부용준의 형상은 위에 뚜껑이 있는데, 부용꽃이 막 봉우리진 것 같다. 간혹 금으로 칠해 장식하였고, 긴 목에 넓은 배를 하고 있다. 높이는 2척이고 용량은 1두 2승이다.



제병 提甁



제병(들고 다니는 물 그릇)의 형상은, 머리가 길고 위가 뽀족하고 배가 크고 바닥이 평평하다. 그 만듦새는 여덟 모서리로 간혹 도금한 것을 쓴다. 속에는 숭늉이나 끓인 물을 넣는다. 나라의 관원과 존귀한 사람은 언제나 가까이 시중하는 자를 시켜 그것을 들고 따라다니게 한다. 크기는 같지 않고, 큰 것은 2승이 들어간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1 권



기 명 2 器皿二



유앙 油盎



유앙(기름병)의 형상은 대략 술준과 같다. 백동(白銅)으로 만들었는데, 위에 뚜껑이 없다. 쓰러질까 염려하여 나무쐐기로 밑을 막는다. 배의 지름은 2촌, 용량은 3승이다.



정병 淨甁



정병의 형상은 긴 목과 넓은 배의 곁에 부리가 하나 있고 중간은 두 마디로 되어 있으며 테가 있다. 뚜껑 목 중간에 턱이 있고 턱 위에 다시 작은 목이 있는데, 잠필(簪筆)의 형태를 본떴다. 존귀한 사람과 나라의 관원과 관사(觀寺 도관과 사찰), 민가에서 다 쓰는데 다만 물을 담을 수 있을 뿐이다. 높이는 1척 2촌, 배의 지름은 4촌, 용량은 3승이다.



화호 花壺



화호의 만듦새는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둥글어, 대략 달아맨 쓸개와 같다. 역시 네모난 받침이 있고, 사시 물을 담아 꽃을 꽂는다. 전에는 잘 만들지 못했지만 근래에는 꽤 잘 만든다. 전체 높이가 8촌, 배 지름이 3촌, 용량이 1승이다.



수부 水釜



수부의 만듦새는, 형상이 격정(鬲鼎 세발솥을 총칭한 말) 같은데 동(銅)으로 주조하였다. 두 개의 짐승꼴 고리가 있어 거기에 나무를 꿰면 짊어질 수가 있다. 고려인의 방언으로는 큰 것 작은 것을 막론하고 다 요복야(亻幼僕射)234)라 하는데, 관사안의 여러 방에 다 공급한다. 높이는 1척 2촌, 너비는 3척,용량은 1석 2두이다.



수앵 水甖



수앵(물통)은 수부의 형태와 같으나 약간 작고, 또 동제 뚜껑이 있다. 그것을 써서 물을 긷는 것으로 중국의 수통(水桶)을 본뜬 것이다. 위에 두 개의 귀가 있어서 쳐들 수 있다. 고려의 풍속은 지고 이고 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그릇이 가장 많다. 높이는 1척, 용량은 1두 2승이다.



탕호 湯壺



탕호(더운 물을 담는 그릇)의 형태는 화호(花壺)와 같으면서 약간 납작하다. 위에는 뚜껑을 하고 아래는 받침을 하여 더운 기운이 새나가지 않게 하였으니, 역시 옛 온기(溫器)의 부류이다. 고려인이 차를 끓일 때 많이들 이 호(壺)를 마련한다. 전체 높이는 1척 8촌, 배의 지름은 1척8촌, 용량은 2두이다.



백동세 白銅洗



백동세(백동으로 만든 대야)의 형태는 오화세(烏花洗), 은화세와 흡사하나 단지 문채가 없다. 고려인은 그것을 빙분(氷盆)이라 한다. 또 한등 낮은 적동(赤銅)으로 된 것이 있는데 만듦새가 약간 졸렬하다.



정로 鼎爐



정로의 만듦새는 대략 박산로와 같은데, 위에 꽃모양의 뚜껑이 없고 아래에는 세 발이 있다. 단지 도관(道觀)과 신사(神祠)에서만 그것을 쓴다. 높이는 1척, 꼭대기의 너비는 6촌, 아래의 쟁반은 너비가 8촌이다.



온로 溫爐



온로의 형태는 정(鼎)과 같은데 전이 있고, 배 아래의 세 발은 짐승이 물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것에 물을 담아서 궤안(几案)에 놓아 두는데, 이는 겨울철에 손을 데우는 기물이다. 면의 너비는 1척 2촌이고, 높이는 8촌이다.



거종 巨鐘



큰 종은 보제사(普濟寺)235)에 있는데, 형체는 크나 소리는 시원하지 않다. 위에는 이뉴(螭紐 이무기 꽃을 한 종을 매다는 부분)가 있고, 중간에는 한쌍의 비선(飛仙)이 있다. 각명(刻銘)은, ‘갑술년주 용백동 1만 5천 근’(甲戌年鑄用白銅一萬五千斤)이라고 되어 있다.236) 고려인이 말하기를, ‘전에는 중루(重樓 이중의 높은 전각)에 설치했었는데, 소리가 글안(契丹)에까지 들리므로 선우(單于 본래는 흉노(匈奴)의 군장, 여기서는 물론 요(遼)의 군주를 말하는 것이다.)가 싫어하여 지금은 이곳에 옮긴 것’이라고 한다. 틀림없이 과장한 말로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2 권



기 명 3 器皿三



다조 茶俎



토산다(土産茶)는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고, 오직 중국의 납다(蠟茶)237)와 용봉사단(龍鳳賜團)238)을 귀히 여긴다. 하사해 준 것 이외에 상인들 역시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자못 좋아하여 더욱 차의 제구를 만든다. 금화오잔(金花烏盞)239), 비색소구(翡色小甌)240), 은로탕정(銀爐湯鼎)241)은 다 중국 제도를 흉내낸 것들이다. 무릇 연회 때면 뜰 가운데서 차를 끓여서 은하(銀荷 은으로 만든 연잎 형상을 한 작은 쟁반)로 겊어가지고 천천히 걸어와서 내놓는다. 그런데 찬자(贊者)가 ‘차를 다 돌렸소’하고 말한 뒤에야 마실 수 있으므로 으례 냉차(冷茶)부터 마시게 마련이다. 관사 안에는 홍조(紅俎)를 놓고 그 위에다 차의 제구를 두루 진렬한 다음 홍사건(紅紗巾 붉은 색의 사포로 만든 상보)으로 덮는다. 매일 세 차례씩 내는 차를 맛보게 되는데, 뒤어어 또 탕(湯 끓인 물)을 낸다. 고려인은 탕을 약(藥)이라고 하는데, 사신들이 그것을 다 마시는 것을 보면 반드시 기뻐하고, 혹 다 마셔내지 못하면 자기를 깔본다고 생각하면서 불쾌해져서 가버리기 때문에 늘 억지로 그것을 마셨다.



와준 瓦尊242)



고려에는 찹쌀은 없고 멥쌀에 누룩을 섞어서 술을 만드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속히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양온(良醞)243)이라고 하는데 좌고(左庫)244)의 맑은 법주(法酒)245)이다. 거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와준(瓦尊)에 담아서 황견(黃絹)으로 봉해둔다. 대체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지만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다. 서민의 집에서 마시는 것은 맛은 싱겁고 빛깔은 진한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마시고 다들 맛있게 여긴다.



등준 藤尊



등준은 산과 섬의 주군(州郡)에서 진상하는 것이다. 속은 역시 와준이고 바깥은 등(藤)으로 두루 감았다. 배(舟)속이 울렁거려 서로 부딪혀도 깨지기 않으며 위에는 봉함이 있는데 각각 주군의 인장 글씨가 찍혀져 있다.



도준 陶尊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하는데, 근년의 만듦새는 솜씨가좋고 빛깔도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오이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는 것이 연꽃에 엎딘 오리의 형태를 하고 있다. 또 주발, 접시, 술잔, 사발, 꽃병, 탕잔(湯琖)도 만들수 있었으나 모두 정기제도(定器制度)246)를 모방한 것들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그리지 않고, 술그릇만은 다른 그릇보다 다르기 때문에 특히 드러내었다.



도로 陶爐



산예출향(狻猊出香 사자 꼴을 한 도제 향료의 이름) 역시 비색(翡色)인데, 위에는 쭈그리고 있는 짐승이 있고 아래에는 앙련화(仰蓮花)가 있어서 그것을 받치고 있다. 여러 기물들 가운데 이 물건만이 가장 정절(精絶)하고, 그 나머지는 월주(越州)247)의 고비색(古秘色)248)이나 여주(汝州)249)의 신요기(新窯器)250)와 대체로 유사하다.251)



식조 食罩252)



공회(公會)에서 음식을 낼 때 아래는 쟁반으로 받치고 위에는 푸른 덮개를 놓는다. 왕과 정사. 부사의 것에는 적황색의 장식을 가하는데 음식의 정갈하고 거친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다.



등비 藤篚



옛날의 폐백(幣帛)에는 상자와 광주리를 사용하였는데 지금 고려의 풍속에서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 광주리는 백등(白藤 표피를 제거한 등을 말함)으로 짜서 만들며 위에는 뒤섞인 무늬가 있는데, 화목(花木)과 조수(鳥獸)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안은 적황색의 무늬 능직을 대며 큰 것과 작은 것을 합친 것을 한 벌이라고 한다. 그 값은 백금(白金 은을 말함.) 1근과 맞먹는다. 왕부(王府)에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그것들은 군읍(郡邑)의 진상품이다. 나머지 관원과 서민들이 사용하는 것들은 만듦새가 어성하니 이는 예(禮)에 맞춰서 쓰는 것일 따름이다.



죽부 鬻釜



죽부는 삶는 기물인데 철로 만든다. 위에는 뚜껑이 있고 배 아래에는 세발이 있다. 소용돌이 모양의 무늬는 가늘기가 털오라기 같다. 높이는 8촌, 너비는 1척 2촌, 용량은 2승 5작이다.



수옹 水瓮



수옹(물독)은 도기이다. 넓은 배에 오그라든 목을 했는데 그 입이 약간 넓다. 높이 6척, 너비는 4척 5촌인데, 3석 2승이 들어간다. 관사 안에서는 동옹(銅瓮)을 쓰고, 산과 섬과 바닷길에서 배로 물을 실어 나를 때 이 수옹을 사용한다.



초점 草苫



초점의 용도는 중국에서 포대를 쓰는 것과 같다. 그 형태는 망태기 같은데 풀을 엮어 만든다. 무릇 쌀, 밀가루, 땔나무, 숯 등속은 다 그것을 가지고 담는다. 산길을 갈 때 수레가 불편하면 흔히 그것에 담은 것을 마필에 싵고 간다.



도필 刀筆



칼과 붓의 집은 나무를 깎아서 만든다. 그 만듦새는 세 칸인데, 그 중의 하나는 붓을 꽂고 그 중의 둘은 칼을 꽂는다. 칼은 튼튼하고 잘 들게 생겼는데, 칼 하나는 약간 짧다. 산원(散員 일정한 임무가 없는 관원) 이하의 관리와 지응(祗應)253), 방자(房子), 친시(親侍)가 그것을 찬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3 권



주 즙 舟楫



바람이 물위를 가는 것이 괘(卦)에 있어서는 환(煥)인데, 배를 이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을 건네주는 것은 이 괘에서 그 법상을 취한 것이다.254) 그런데 후세에 성지(聖知)를 지은 이가 교대로 나오고 백공(百工)이 장식을 더했기 때문에, 용의 무늬와 익새 머리를 한 선박이 바람을 타고 물결을 헤치며 하루에 천리를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반드시 장강과 황하를 가로질러 가는 것이 평지를 밟고 가듯 하게 하여, 비단 나무를 쪼개어 쓰는 간단함에 그치지 않게 되었다.

고려인으로 말하면 해외에서 생장하여 툭하면 고래같은 파도를 타게 되니 본래 선박을 앞세우는 것은 의당한 일이다. 이제 그 제도를 살펴보니, 간략하고 그리 정교하지 않으니 그들이 본래부터 물을 편안하게 여기고 그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누추한 대로 간략하게 다루고 노둔 졸렬하면서도 고치지 않는 것일까? 이제 본 것을 가지고 그림에 늘어놓기로 하겠다.



순선 巡船255)



고려는 땅이 동해(東海 우리의 서해를 말하는 것이다.)에 접해 있는데도, 선박 건조의 기술이 간략하기기 특히 심하다. 중간에 돛대 하나를 세워놓고 위에는 다락방이 없으며, 다만 노와 키를 마련하였을 따름이다. 사자(使者)가 군산(群山)으로 들어가면 문(門)에 이러한 10여 척이 있는데, 다 정기(旌旗)를 꽂았고, 뱃사공과 나졸(邏卒)은 다 청의(靑衣)를 착용하고 호각을 올리고 징을 치고 온다. 각각 돛대 끝에 작은 깃발 하나씩을 세우고 거기에, 홍주도순(洪州都巡), 영신도순(永新都巡), 공주순검(公州巡檢), 보령(保寧), 회인(懷仁), 안흥(安興), 기천(曁川), 양성(陽城), 경원(慶源) 등의 글씨를 썼다. 그리고 ‘위사’(尉司)라는 글자가 있으나 실은 포도관리(捕盜官吏)들이다. 입경(入境)해서부터 회정(回程)할 때 까지 군산도에서 영접하고 전송하고 하는데, 신주(神舟 중국사절의 배를 말한다)가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고서야 자기 나라로 돌아간다.



관선 官船



관선의 만듦새는, 위는 띠로 이었고 아래는 문을 냈으며,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가로지른 나무를 꿰어 치켜올려서 다락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전체가 판책(板簀)은 쓰지 않았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았을 뿐이다. 앞에 정륜(矴輪 닻줄을 감는 제구)이 있고, 위에는 큰 돛대를 세웠고, 포범(布帆 천으로 만든 돛) 20여 폭이 드리워져 있는데, 그중 5분의 1은 꿰매지 않고 펼쳐진 채로 두었다, 이것은 풍세(風勢)에 거스를까 두려워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접반(接伴), 선배(先排), 관구(管勾), 공주(公廚) 등256) 모두 10여척의 배가 크기가 같고, 다만 접반의 배에만 시설과 장막이 있을 뿐이다.



송방 松舫



송방은 군산도의 배이다. 선수(船首)와 선미(船尾)가 다 곧고 가운데에 선실 5칸이 마련되어 있고 위는 띠로 덮었다. 앞뒤에 작은방 둘이 마련되어 있는데, 평상이 놓여지고 발이 드리워져 있다. 중간에 트여있는 두칸에는 비단보료가 깔려 있는데 가장 찬란하다. 오직 정사,부사 및 상절(上節)만이 거기에 탄다.



막선 幕船



막선의 준비는 세섬에 다 되어 있어, 그것으로 중・하절(中下節)의 사절들을 태운다. 위는 푸른천으로 방을 만들고 아래는 장대로 기둥을 대신하고 네 귀퉁이는 각각 채색 끈으로 매었다.



궤식 饋食



사자(使者)가 경내로 들어가면, 군산도의 자연두(紫燕洲)257) 세 주(州)에서 다 사람을 보내어 식사를 제공한다. 서찰을 가진 관리자는 자주옷에 복두(幞頭) 차림이고, 그 다음 관리는 오모(烏帽 검정색 모자) 차림이다. 식품은 10여 종인데 국수가 먼저이고 해물은 더욱 진기하다. 기명은 금, 은을 많이 쓰는데, 청색 도기도 섞여 있다. 쟁반과 소반은 다 나무로 만들었고 옷칠을 했다. 신주(神舟)가 정박하고 섬에 가까이 가지 않으면, 반드시 개(介)를 보내어 배를 타고 사자(使者)에게 음식을 드리게 한다. 구례(舊例)로는 3일동안 보내며, 만약에 기간이 지나도 바람에 막혀 떠나지 못하게 되면, 식사의 공급이 더이상 오지 않는다.



공수 供水



바닷물은 맛이 심히 짜고 써서 입에 댈수 없다. 무릇 선박이 큰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면 반드시 물독을 마련하여 샘물을 비축해서 식음에 대비한다. 대체로 큰 바다 가운데서는 바람은 그리 심하지 않고 물의 유무로 생사가 판가름난다. 중국 사람들이 서쪽에서부터 큰 바다를 횡단하고 오느라 이미 여러날이 되었으므로, 고려인은 중국인의 샘물이 반드시 다 없어졌으리라 짐작하고서, 큰 독에다 물을 싣고 배를 저어와 맞이하는데, 각각 차와 쌀로 갚아준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4 권



해 도 海道



바다는 온갖 물의 모체여서 천지와 더불어 똑같이 극한이 없기 때문에, 그 양은 천지를 측량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밀물과 썰물의 왕래로 말하면 시기에 맞춰 어긋나지 않아 천지간의 지극한 미더움이다. 옛사람들이 일찌기 그것을 논하였다. 「산해경」(山海經)에서는 해추(海鰌)가 굴에 들고 나는 도수(度數)라 하였고258), 부도서(浮圖書 불가의 책을 말함)에서는 신룡보(神龍寶)259)의 변화라고 하였다. 두 숙몽(竇叔蒙)의 「해교지」(海嶠志)에서는 물이 달의 차고 기울고 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노 조(盧肇)260)의 해조부(海潮賦)에서는 해가 바다에 출입하여 충격을 주어 이루어 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왕 충(王充 후한 때 사람)의 「논형」(論衡)에서는, 물이란 천지의 혈맥이어서 기운의 진퇴에 따라 그렇게 된다고 하였다. 모두가 다 억설을 내세우고 편견을 고집하는 것으로 생각은 근사하나 미진하다.

대체로 하늘은 물을 싸고 있고 물은 땅을 받들고 있는데, 큰 기원의 기운이 태공(太空) 안에서 오르내린다. 땅은 물의 힘을 받아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또 원기의 오르내림과 더불어 서로 내렸다올랐다 하지마는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그것은 또 배 안에 앉아 있는 자가 배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과도 같다. 기운이 올라가고 땅이 가라앉을 때에는 바닷물이 넘쳐올라서 밀물이 되고, 기운이 내려가고 땅이 뜰 때에는 바닷물이 줄어 내려가서 썰물이 된다. 하루의 12시를 헤아려 보면, 자시(子時)에서 사시(巳時)까지는 그 기운이 양(陽)인데, 양의 기운은 또 그 나름으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낮에 움직인다. 오시에서 해시(亥時)까지는 그 기운이 음(陰)인데, 또 그나름으로 오르내림이 있어서 밤에 움직인다. 하룻낮 하룻밤은 음양의 기운을 합치면 도합 두번 오르고 두번 내린다. 그래서 하루사이에 밀물과 썰물이 다 두차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낮과 밤의 시간은 해의 오르내림의 수에 달려 있고 달에 호응한다. 달이 자(子)에 오면 양기가 비로소 오르고, 달이 오(午)에 오면 음기가 비로소 오르기 때문에 밤 밀물때는 달은 다 자에 오르고 낮 밀물 때는 달은 다 오에 온다. 또 해의 운행은 느리고 달의 운행은 빠르다. 빠른 것을 가지고 느린 것에 응하자니까 29도와 반(半)도를 지날때 마다 달의 운행이 따라 간다. 해와 달의 만남을 합삭(合朔)261)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월삭(月朔 음력으로 매달 초하루를 말함)의 밤 밀물 때는 해 역시 자(子)에 오고, 월삭의 낮 밀물 때는 해 역시 오(午)에 온다. 또, 낮은 하늘 위에서 말하자면, 천체는 서쪽으로 돌아가고 해와 달은 동쪽으로 운행하므로 초하루부터 이후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동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며, 오시(午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고 밀물 역시 그것에 호응한다. 낮에는 느리기 때문에 낮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례로 차가 생겨 밤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초하루는 오시이고, 2일은 오시 말(末)이고, 3일은 미시(未時)이고, 4일은 미시 말이고, 5일은 신시이고, 6일은 신시 말이고, 7일은 유시이고, 8일은 유시 말이 되는 것이다. 밤은, 바다 아래서 말하자면, 천체는 동쪽으로 굴러가고 해와 달은 서쪽으로 운행한다. 초하루부터 이후는 달이 빨리 가는 것이 서쪽으로 점점 기울어지며, 자시(子時)에 이르러서는 점점 느려지고 밀물역시 그것에 호응한다. 밤에 느리기 때문에 밤 밀물은 초하루 이후에는, 차례로 차가 생겨 낮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초하루는 자시이고, 2일은 자시 말이고, 3일은 축시이고, 4일은 축시 말이고, 5일은 인시이고, 6일은 인시 말이고, 7일은 묘시이고, 8일은 묘시 말이 되는 까닭이다.

거기다 더해서 철에는 차례에 따른 변화가 잇고 기운에는 성쇠가 있어, 밀물이 밀려오는 것도 역시 그로 말미암아 크거나 작아진다. 묘(卯), 유(酉)의 달이 되면 음양이 교대하는데, 기운은 교대 때문으로 해서 세차게 나온다. 그래서 밀물의 대단함이 유독 나머지 날들과는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바다 속에는 물고기와 짐승이 있어, 그것들을 잡아서 가죽을 벗겨 말리면, 밀물이 들 때가 되면 털이 다 일어서니, 이것이 어찌 기운을 느껴 물류(物類)가 호응하는 이치에 따라 절로 그렇게 되는데 근본을 둔 현상이 아니겠는가?

물결이 흘러서 소용돌이 치는 것, 모래와 흙이 엉기는 것, 산과 돌이 치솟는 것으로 말하면 또 각각 그 형세가 있다. 이를테면 바다 가운데 땅으로 촌락을 이룰수 있는 것을 주(洲)라고 하는데 십주(十洲) 따위가 그것이다. 주 보다 작으나 역시 살 수 있는 것은 도(島)라고 하는데 삼도(三島) 따위가 그것이다. 도 보다 작으면 서(嶼)라고 하고 서보다 작으면서 초목이 있으면 섬(苫)262)이라고 하고 섬과 서같으면서 그 바탕이 순전히 돌이면 초(焦 암초를 말함)라고 한다.

무릇 선박의 운행이란 해문(海門)을 나가 버리면 하늘과 땅이 잠겨 버려 위아래가 하나같이 푸르르고, 곁에는 구름이나 먼지가 없으며, 천지가 갤때를 만나면 밝은 해가 하늘 복판에 뜨고, 움직이는 구름이 사방으로 들어가 버려, 황홀한 것이 육허(六虛 상하 사방의 극한을 포괄하는 우주의 공간)의 밖을 노니는 듯하여 이미 말로 설멸할 수 없어진다. 바람과 파도가 간간이 일어나고 우뢰와 비로 캄캄해지고, 교룡과 이무기가 출몰하고, 신령한 물건이 변화를 일으키기에 이르면, 가슴이 뛰고 담기가 없어져 말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중 기록할 수 있는 것이란 단지 산의 형태와 밀물의 징후 뿐일 따름이다.

또 고려의 해도(海道)는 옛날도 지금과 같았다. 옛부터 전해지는 것을 알아보면 지금은 혹 보이지 않는 것도 있고, 지금 기재한 것은 혹 예사람이 말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그것이 본래부터 달랐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항해하는 선박이 통하는 곳은 언제나 비바람의 항해를 보고 조절하는 것으로, 바람이 서쪽에서 끌어당길 때에는 동쪽에 있는 주도(洲島)들은 볼 수 없고 남쪽과 북쪽의 경우 역시 그러하다. 이제 밀물 징후의 대개를 이미 앞에 상세하게 논하였으므로 삼가 신주(神舟)가 경과한 도주(島洲)와 섬서(苫嶼)를 늘어놓아 그림으로 그린다.



신주 神舟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고려로 사신을 보내실 적에 유사(有司)에게 조명(詔命)을 내려 거대한 함정 두척을 건조시킨 적이 있었다. 하나는 ‘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神舟)263)이고 하나는 ‘영비순제신주’(靈飛順濟神舟)264)인데, 그 규모가 심히 웅장하였다. 황제께서 제위를 계승하신 뒤에는 <부황 신종황제를> 앙모하시는 효심이 지극하였으니, 고려인들에게 은혜를 더 베푼 까닭은 실로 희풍(熙豊 희령(熙寧)과 원풍(元豊), 신종의 연호 1068~1084)의 치적(治績)을 확대시켜 나간 것이다.265) 숭녕(崇寧, 휘종의 연호, 1102~1105)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자주 사신을 보내어 위무하는 은혜가 융숭하고 예가 후하거니와, 또 유사(有司)에게 조명을 내려 다시 배 두척을 건조케 하였다.

이에 그 전체를 확대하고 명칭을 크게 하니, 하나는 ‘정신이섭회원강제신주’(鼎新利涉懷遠康濟神舟)266)이고 하나는 ’순류안일통제신주‘(循流安逸通濟神舟)267)이다. 높기가 상악같은데 물결위에 떠 움직이면 비단 돛에 익새선수는 교룡과 이무기를 굴복시키니, 이는 휘황한 사신이 이적(夷狄)에게 위엄을 보이는 것으로 고금에 으뜸이다. 따라서 고려인들이 조서를 맞이하던 날 나라를 기울여 구경하고 환호 감탄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객주 客舟



구례로는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하면 언제나 출발 기일에 앞서 복건(福建)과 양절(兩浙)268)의 감사에게 위촉하여 객주를 모집 고용하게 하고, 또 명주(明州)269)에서 장식(裝飾)을 하게 하는데 대략 신주와 같다. 형체는 갖췄으나 크기가 작아, 그 길이가 10여 장(丈)이고 깊이는 3장, 넓이는 2장 5척이며, 2천 곡(斛)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 그 만듦새는 다 통나무와 박달나무를 섞어 포개서 이루어 진 것으로, 위의 평평함은 저울대 같고 아래의 기울어짐은 칼날 같은데 그것이 물결을 헤치고 갈 수 있어서 가치가 있다. 그 가운데는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의 한 선창에는 황판(艎板 배에 까는 나무 판자)를 놓지 않고 다만 바닥에 화덕과 물덕을 놓는데, 그 곳은 바로 두 돛대의 사이에 해당된다. 그 아래에는 곧 무기를 넣어두는 헛간이다. 그 다음의 한 선창은 네개의 방으로 꾸몄다. 그 뒤의 한 선창은 교옥(교屋 높은 집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높이가 1장여나 되고 사면의 벽에 창문이 마련되어 있는 것이 가옥의 만듦새 같다. 위에 난간이 베풀어져 채색 그림이 화려 찬란한데 휘장을 써서 장식을 더하였다. 사자(使者)들의 관속들이 계급의 서열에 따라 나눠서 거처한다. 위에는 대나무 뜸이 있는데, 평상시에는 포개 쌓아두고, 비를 만나면 두루 촘촘하게 펼쳐 덮는다. 그러나 뱃사공들은 교옥이 높아지는 것을 극히 두려워 하는데, 그것이 바람을 막아서 전대로 있는 것의 편리함만 못하기 때문이다.

뱃머리의 양쪽 곁 기둥 가운데에 수레바퀴가 있고 그 위에 등으로 꼰 동아줄을 매었는데, 그 크기가 세까래 같고 길이는 5백 척이며, 아래는 닻돌을 달아 매었고 돌 양 곁은 두개의 나무 갈고리가 끼고 있다. 배가 큰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산에 근접해서 정박하게 되면, 닻을 풀어놓아 물 바닥에 닿게 하고 뱃줄 등속을 당겨 놓으면 배는 가지 않는다. 만약에 풍랑이 다급하면 유정(遊矴 보조로 쓰는 닻)을 보태는데 그 작용은 큰 닻과 같으며 그 양 곁에 있다. 갈 때가 되면 그 바퀴를 감아서 거둬 들인다. 뒤에는 정타(正柁 주되는 키)가 크고 작은 두 등급의 것이 있어 물의 얕고 깊음에 따라 바꿔 쓴다. 교옥 뒤에 위에서부터 아래러 꽂은 두 개의 노를 삼부타(三副柁)라고 하는데 이것은 오직 큰 바다에 들어가야만 쓴다.

또 주복(舟腹) 양쪽 곁에다 큰 대나무를 묶어 자루를 만들어서 물결을 맊는데, 그것을 장치하는 법은, 물이 자루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경중(輕重)의 도수를 삼는다. 그리고 수붕(水棚 곁노들을 설치한 의지간(倚支間))이 대나무 자루 위에 있다. 배마다 열개의 곁노가 있어 산을 헤치고 항구로 들어가고 밀물을 따라 문(門)270)을 지나가고 하는데는 다 곁노를 울려 저으며 가는데, 이때 뱃사공들이 올라뛰고 외치고 하며 힘쓰는 것이 대단하여도 배 가는 것은 결국 바람을 타고 가는 것만큼 빠르지 못하다. 대장(大檣)은 높이가 10장이고 두장(頭檣)은 높이가 8장이다. 바람이 빠르면 첫돛 50폭을 펼치고 좀 치우치면 움직이는 뜸을 써서 좌우에 날개같이 펼쳐서 풍세(風勢)를 잡아준다. 대장 꼭대기에 또 작은 돛 10폭을 다는데 그것은 야호범(野狐颿)271)이라고 하며, 바람이 멎으면 그것을 쓴다.

그러나 바람에는 8면이 있는데, 오직 정면에서 불어올 때만 갈 수가 없다. 장대를 세워 새깃으로 바람의 방향을 알아보는데 그것을 오량(五兩)272)이라고 한다. 대체로 바른 바람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에, 포범(布帆)을 사용하는 것은 이봉(利蓬 움직이는 뜸)을 접었다 펼쳤다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맞게 할 수 있는 경우만은 못하다. 바당에서의 항행은 깊은 것은 두렵지 않고 다만 얕은 곳에 박히는 것을 두려워한다. 배의 바닥이 평평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에 밀물이 빠지면 기울어 쓰러지고 구제할 수 없다. 그래서 늘 노끈으로 납추를 드리워서 제어 본다, 배마다 뱃사공과 수부가 60인 가량이나 되는데, 다만 그 수령(首領)이 해도(海道)를 익히 알고 하늘의 때와 사람의 일을 잘 헤아려서 여러사람의 마음을 잡는 것을 믿을 뿐이다. 그래서 창졸간의 어려움이 생겨도 수미가 한 사람같이 서로 호응하면 구제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신주의 길이, 넓이, 높이, 크기와 집물기구, 인원수로 말하면 다 객주보다 3배나 된다.



초보산 招寶山273)



선화(宣和) 4년 임인(고려 예종 17) 봄 3월에 조명을 내려 급사중 노 윤적(路允迪)과 중서사인 부 묵경(傅墨卿)을 국신사와 부사에 충임하여 고려로 가게 하였다. 가을 9월에 국왕과 왕후가 흥거하였기 때문에 특지를 받고 제전과 조위의 임무를 겸임하고 갔으니,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연간의 고사를 따른 것이다. 5년 계묘 봄 2월 18일(임인)에 장비를 재촉하고 배를 꾸몄으며, 24일에는 조명을 내려 예모전(睿謨殿)에 가서 예물을 선시(宣示)하였고, 3월 11일(갑자)에는 동문관(同文館)에 가서 계유(誡諭)를 들었고, 13일(병인)에는 황제께서 숭정전(崇政殿)에 납시어 평대(平臺)에 자리잡고 친히 보내며 전지(傳旨)를 선유(宣諭)하시었고, 14일 (정묘)에 영녕사(永寧寺)에서 석연(錫宴 황제의 명의로 전송하는 잔치)하시었다. 이날 배를 풀어 변경(汴京 당시 북송의 수도, 지금의 하남성 개봉)을 나갔다. 여름 5월 3일(을묘)에 배가 사명(四明)274)에 머물렀다. 이에 앞서 특지를 얻어 두 척의 신주(神舟)와 6척의 객주(客舟)로 같이 가게되어 13일(을축)에 예물을 받들어 8척의 배에 넣었다. 14일(병인)에 공위대부(拱衛大夫) 상주관찰사직예사전(相州觀察直睿思殿)275) 관 필(關弼)을 보내 조명의 취지를 말하고, 명주(明州)의 청사당(廳事堂)에서 석연하였고, 16일(무진)에 신주가 명주를 떠나 19일(신미)에 정해현(定海縣)276)에 도달하였다.

이 기일에 앞서 중사(中使)277)인 무공대부(武功大夫)278) 용 팽년(容彭年)을 보내어 총지원(總持院)279)에서 7주야 동안 도량(道場)을 가졌고, 또 어향(御香)을 내려 현인조순연성광덕왕사(顯仁助順淵聖廣德王祠)280)에 선축(宣祝)하니 신물(神物)이 나타났는데 그 형상이 도마뱀 같았다. 이는 실로 동해의 용군(龍君)인 것이다. 그 사당앞 10여 보 지점에 근강(堇⻏江)이 끝나는 곳에 산 하나가 높다랗게 바다가운데 나와 있는데 그 위에 작은 탑이 있다. 전부터 전해지기로는 바다를 향하는 배가 이 산을 바라보면 그것이 정해(定海)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보(招寶)라고 명명한 것이다.

이 곳에서부터 비로소 바다로 나가는 입구라고 하게 된다. 24일(병자)에 배에 들어가 징과 북을 울리고 기치를 펼치고서 차례에 따라 배를 풀고 떠났다. 중사관 필은 초보산에 올라가 어향을 피우고 큰 바다를 바라보며 재배(再拜)하였다. 이 날은 날씨가 쾌청하였다. 사각(巳刻)에 동남풍을 타고 뜸을 펼치고 곁노를 저었는데, 수세(水勢)가 매우 급해서 꿈틀거리며 갔다. 호두산(虎頭山)을 지나가니 물이 항구의 입구에 있는 칠리산(七里山)에 가득하였다. 호두산은 그 형태가 유사하여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그곳을 헤아려 보니 이미 정해에서 20리나 떨어져 있었다. 물의 색깔은 근강과 다르지 않았으나 다만 맛이 좀 짤 뿐이었다. 대체로 온갖 냇물이 모이는 곳이라 이곳까지 왔는데도 여전히 맑아지지 않았다.



호두산 虎頭山



호두산을 지나 수십리를 가면 곧 교문(蛟門)에 이른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 산이 대치하고 있고 그 사이에 물길이 있어, 배가 통할 수 있는 것이면 다 문이라고 한다. 교문은 교룡이 사는 곳이라고 하는데 삼교문(三交門)이라고도 한다. 그 날 신각(申刻) 말에 멀리 크고 작은 두 사산(謝山)281)을 바라보며 송백만(松柏灣)을 지나 노포(蘆浦)에 당도하여 닻을 던지고 8척의 배가 같이 정박하였다.



심가문 沈家門



25일(정축) 진각(辰刻)에 사방의 산이 안개로 덮여 있는데, 서풍이 일어나 뜸을 펼치고 꿈틀꿈툴 굴곡을 지으며 바람의 세력을 따라가느라 그 진행이 심히 느렸다. 뱃사람은 그것을 ‘거풍’(拒風)이라 한다. 사각(巳刻)에 안개가 흩어져 희두백봉(稀頭白峯)의 착액문(窄額門) 석사안(石師顔)282)으로 나가 뜬 후에 심가문에 이르러서 닻을 던졌다. 그 문산(門山)은 교문(蛟門)과 유사한데 사방의 산이 동그랗게 안고 있으며, 두 문을 마주열고 있는데 산 세개가 연닿아 있어 아직도 창국현(昌國縣)283)에 속해 있다. 그 위에 어부와 나무꾼 10여 집이 모여 사는데, 그중에서 대성(大姓)을 가지고 그 해문을 명명한 것이다.

신각(申刻)에 비바람이 캄캄하게 닥쳐오고 우뢰와 번개가 급작스럽게 들이닥치니 얼마동안이 지나서야 멎었다. 이 날 밤 산으로 가서 장막을 치고 땅을 쓸고서 제사를 지냈다. 뱃사람은 그것을 사사(祀沙 모래를 제사한다는 뜻)라고 하나 실은 악독(岳瀆 산악과 하해를 말함)을 맡아 다스리는 신(神)으로, 배식(配食)하는 위(位)가 심히 많다. 배마다 각각 나무를 깍아 작은 배를 만들어서 거기에 불경(佛經)과 말린 양식을 싣고, 싣고가는 사람들의 성명을 써서 그 속에 넣어 그것을 바다에 던진다. 재앙을 떨어내고 압승(壓勝 자기의 해로운 것이 기운을 떨치지 못하게 하는 술법)하는 술법의 일단인 것이다.



매잠 梅岑284)



26일(무인)에 서북풍이 심히 강해서 사자(使者)가 삼절(三節)의 인원을 거느리고 작은 배로 상륙하여 매잠으로 들어갔다. 전부터 이르기를, 매 자진(梅子眞)이 은거하던 곳이기 때문에 이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신발 작국과 표주박 흔적이 돌다리 위에 있다. 그곳 깊은 산기슭 속에는 소량(蕭粱 남조 양양의 소 도성)이 세운 보타원(寶陀院)이 있고 그 절에는 영감관음(靈感觀音)이 있다. 옛날 신라(新羅)의 상인이 오대산(五臺山)285)에 가서 그곳 관음상을 파내어 자기 나라로 싣고 돌아가려고 바다로 나갔더니 암초를 만나 배가 달라붙고 전진하지 않았다. 이에 도로 암초 위에다 관음상을 놓으니, 보타원의 중인 종악(宗岳)이라는 자가 맞아다 그 절에 봉인하였다. 그 뒤부터 바다를 항해하는 선박이 왕래할 때는 반드시 가서 복을 빌었고 그렇게 하면 감응하지 않는 예가 없다. 오월(吳越)286)의 전씨(錢氏)가 그 관음상을 성 안의 개원사(開元寺)로 옮겼다. 지금 매잠에서 받드는 것은 후에 만든 것이다. 숭녕(崇寧 송 휘종의 연호)때의 사자(使者)가 조정에 알려 절에 새 현판을 내리고 매년 불승의 허가를 내주어서 장식을 더하게 하였다.

구제(舊制)로는 사자는 여기서 기도를 드린다. 이 날 밤 승도(僧徒)들은 분향 송경하고 범패를 노래하는 것이 심히 엄숙하였고, 삼절의 관리와 병졸도 다들 경건하게 예를 닦았다. 밤중에 이르러 별이 빛나고 깃발이 요동하여 사람들이 다 기뻐 뛰며 ‘바람이 이미 정남(正南)으로 돌았다.’고 하였다. 27일(기묘)에 뱃사람은 풍세가 안정되지 않아서 그대로 그것이 익기를 기다렸다. 바다위에서 바람의 방향이 돌아서 다음날 까지 바뀌지 않는 것을 ‘익는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큰 바다속에 이르러서 졸지에 바람의 방향이 돌아가면 망연해져 향할 바를 모르게 된다, 그 때부터 (바뀐 풍향이 익은 때) 곧 바다로 나가기 때문에 바람과 구름과 하늘의 때를 자세히 살펴보고 난 뒤에 전진하는 것이다. 신각신각에 정사와 부사는 삼절의 인원과 함께 다 같이 돌아가 배로 들어갔다. 이 때와서 물빛은 조금 맑아졌으나 물결치는 수면이 약간 움직여 배안은 이미 울렁임을 느꼈다.



해려초 海驢焦



28일(경진)에 하늘은 해가 돋고 깨끗이 갰다. 묘각(卯刻)에 8척의 배가 함께 떠났다. 정사와 부사는 조복(朝服)을 갖추어 입고 두 도관(道官)과 함께 궁궐을 바라보고 재배하고서 어전(御前)에서 내린 신소옥청구양총진부록(神霄玉淸九陽總眞符籙), 풍사용왕첩(風師龍王牒), 천조직부인오악진형(天曺直符引五嶽眞形) 및 지풍우(止風雨) 등 13부(符)를 바다에 던졌다.287) 그것이 끗나자 뜸을 펼치고 가 적문(赤門)을 나가니 한식경에 물빛이 점점 푸르러졌다. 사방을 바라보니 산과 섬은 좀 드물어져, 혹은 끊긴 구름같고 혹은 초승달과 같았다. 그런 뒤에 해려초를 지났는데 그 형상이 엎디어 있는 나귀와 같았다. 숭녕(崇寧) 연간에 뱃사람들 중에 바다 짐승이 물결사이에 출몰하는 것을 본 자가 있었는데, 그 형상이 나귀의 형체 같았다고 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다른 한가지 물건이었을 것이고, 반드시 암초에 의지해서 나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봉래산 蓬萊山



봉래산은 바라보면 심히 먼데, 앞이 높고 뒤가 내려갔다. 뾰쪽하게 치솟아 있는 것이 사랑스럽다. 그 섬은 아직도 창국(昌國 정해현을 말함)의 봉경(封境)에 속해 있다. 그 위는 극히 넓어 씨를 뿌릴 수 있어서 섬 사람들이 산다. 선가(仙家)의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봉래가 있는데, 그 곳은 약수(弱水)288) 3만 리를 넘어가서야 도달할 수 있다. 지금은 바로 앞에서 <선가의 봉래>를 보게는 안 될 것이므로, 틀림없이 지금 사람이 이것을 가리켜 그렇게 이름 지었을 것이다. 이 곳을 지나면 다시는 산이 나오지 않는다. 오직 연이은 파도가 솟았다 내렸다 하며 내뿜어 두들기고 들끟어 오르고 하는 것만이 보일 뿐이다. 선박이 뒤흔들려 배안의 사람들이 토하고 현기증이 나서 쓰러지고 제몸을 가누지 못하는 자가 십중 팔구나 된다.



반양초 半洋焦



배의 항행이 봉래산을 지난 후에는 물이 깊고 푸른색이 유리 같으며 물결의 기세가 더욱 터진다. 큰 바다 가운데 돌이 있는데 그것을 반양초라고 한다. 배가 암초에 부딛히면 뒤집혀 물에 빠지기 때문에 뱃사공들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 한다. 이 날 오후에 남풍이 더욱 급해져 야호범(野狐颿)을 보탰는데, 그것은 돛의 힘을 제약하자는 뜻이었다. 물결이 몰려와서 배가 그 기세를 이겨내지 못할까 두려웠다. 그래서 작은 돛을 큰돛 위에다 보태서 그것들이 같이 어울려서 가게 하는 것이다. 이 날 밤에는 큰 바다 가운데서 머물러 있을 수는 없어서 다만 별을 살피면서 앞으로 가다가, 캄캄해지게 되면 지남부침(指南浮針 나침반의 일종)을 써서 남북을 헤아렸다. 밤중에 접어들어 불을 치켜올리면 8척의 배가 다 그것에 호응하였다. 한밤중에 바람이 서북으로 돌았는데, 그 기세가 심히 급해서 이미 뜸을 내려버렸는데도 이리저리 뒤흘려서, 병이니 항아리니 하는 것이 다 쓰러지고 온 배의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하며 담기가 없어져 버렸다. 여명이 되어서야 좀 가라앉아 사람들의 마음이 안정되어 가서 그대로 돛을 올리고 전진하였다.



백수양 白水洋



29일(신사)에 하늘 빛이 어둡고 풍세가 정해지지 않더니 진각(辰刻)에 바람이 적어지고 또 순해져, 다시 야호범(野狐颿)을 보탰으나, 배의 항행이 심히 둔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돌았고 유각(酉刻)에는 구름이 꽉 차서 비가 오다가 밤중에 접어들어서야 멎었다. 다시 남풍이 일어나 백수양으로 들어갔다. 그 근원이 말갈(靺鞨)289)에서 나왔기 때문에 흰색이 된 것이다.290) 이 날 밤에 불을 치켜들었더니 세척의 배가 호응하였다.



황수양 黃水洋



황수양은 곧 모래톱이다. 그 물은 흐리고 또 얕다. 뱃사람이 말하기를 ‘그 모래는 서남쪽에서부터 와서 큰 바다 가운데 1천여 리에 가로놓여진 것으로 곧 황하(黃河)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이라 한다. 배의 항행이 이곳에 이르면 닭과 수수로 모래를 제사한다. 대체로 전후로 배를 몰고 모래를 지나가는 동안 해를 입은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 익사한 혼을 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구려(句麗 우리의 땅을 말함)로 가는 데에는 오직 명주(明州)의 길만이 이 곳을 지나가는데, 등주(登州)291)의 판교(板橋)에서부터 건너가면 이 곳을 피할 수가 있다. 근자에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러 첫째 배는 거의 얕은 곳에 박힐 뻔 하였고, 둘째 배는 오후에 세 키를 다 부러뜨렸는데, 종묘 사직의 위령(威靈) 덕분으로 살아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뱃사람들은 언제나 모래톱을 지나기는 것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자주 납 추를 사용하여 때때로 그 깊이를 알아보는 것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흑수양 黑水洋



흑수양은 곧 북해양(北海洋)이다. 그 물빛은 어듬이 깊이까지 파고들어 검은 색이 먹같아, 졸지에 그것을 보면 정신과 담력을 다 잃게 된다. 성난 파도가 내뿜고 닥쳐오는 것이 만으로 헤아리는 산들같이 치솟아 오른다. 밤이되면 파도 사이가 선명하게 빛나 그 밝기가 불과 같다. 배가 파도위로 올라갈 때는 바다가 있음을 느끼지 않고, 오직 하늘의 해가 밝고 쾌할 뿐이다. 그러다가 우묵한 파도 밑으로 내려가게 되어 전후의 수세를 쳐다보면 그 높이 하늘을 가리워 위장이 뒤집히고 헐떡이는 숨만 겨우 남아있어, 쓰러져 토악질을 하며 낱알이 목구멍을 내려가지 않는다. 보료 위에서 지쳐 누워있는 자는 반드시 사방을 높이 올려서, 가운데가 구유통 같이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울어져 굴러서 몸을 다치게 된다. 이러한 때에 몸을 만번 죽는 가운데서 벗어나기를 바라니, 위험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5 권



해 도 2 海道二



협계산 夾界山



6월 1일 임오 여명에 안개가 자욱한데 배는 동남풍을 탔다. 사각(巳刻)에 좀 겠고 바람이 서남으로 돌아 야호범을 더 보태었다. 오정에 바람이 사나와 첫째 배의 대장(大檣)이 와지끈 하고 소리가 나며 휘어서 부러지려고 해서 급히 큰 나무를 거기에 붙여 온전할 수가 있었다. 미시(未時) 후에 동북쪽 하늘 가를 바라보니 은은히 구름 같은 것이 보이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반탁가산(半托伽山)이라고 하였으나 그리 똑똑하게 가려낼 수는 없었다. 밤에는 바람이 약해 배의 항행이 매우 느렸다. 2일 계미에 아침 안개가 자욱하고 서남풍이 일어나더니 미시 후에 맑게 갰다. 정동(正東)으로 병풍같은 산 하나가 바라보이는데 그것이 곧 협계산으로, 중국과 이족(夷族)이 이것으로 경계를 삼는다. 처음 바라볼 때는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유시(酉時)후에 바싹 다가가니 앞에 두 개의 봉우리가 있는데 그것을 쌍계산(雙髻山)이라고 하였다. 그 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있는데 달리는 말의 형상과 같다. 눈 같은 물결이 세게 뿜는데 그것이 산을 만나서는 튀어 쏟아지는 것이 더욱 높아진다. 자정에 바람이 세고 비가 와서 돛응 내리고 뜸을 걷어 그 기세를 늦추었다.



오서 五嶼



오서는 곳곳마다 있으나 협계산 가까이에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정해(定海)의 동북쪽 소주(蘇州)의 큰 바다 안의 군산(群山)과 마도(馬島)에도 오서가 있다. 대체로 사공들은 바다의 산 위의 작은 산을 가리켜서 ‘서’(嶼)라고 한다. 그래서 여러 군데에 다섯 산이 서로 다가 있으면 다 그런 것들을 ‘오서’라고 하는 것이다.3일 갑신에 밤새 오던 비가 개지 않고 동남풍이 일어났다. 오시 후에 이 서(嶼)를 지나갔는데, 바람과 파도가 거세게 뿜어대어 오래 계속되는 데 따라 높고 험해지는 것 역시 퍽 사랑스러웠다.



배도 排島



이날 사각(巳刻)에 구름이 흩어져 버리고 비가 멎어, 사방을 돌아보니 깨끗이 갰다. 멀리 바라보니 세 산이 나란히 늘어서 있고 그 가운데의 한 산이 담 같은데, 뱃사람은 그것을 가리켜 ‘배도’라고 한다. 또 배타산(排垜山)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이 화살받이의 형태 같아서 그런 것이다.



백산 白山



이날 오시 후에 동북쪽으로 한 산이 바라보였다. 극히 큰 것이 성같이 잇닿아 늘어서 있는데, 햇빛이 쬐는 곳은 희기가 옥과 같다. 미시 후에 바람이 일어 배의 항행이 매우 빨라졌다.



흑산 黑山



흑산은 백산 동남쪽에 있어 바라보일 정도로 가깝다. 처음 바라보면 극히 높고 험준하고, 바싹 다가서면 산세가 중복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앞의 한 작은 봉우리는 가운데가 굴같이 비어 있고 양쪽 사이가 만입(灣入)했는데, 배를 감출 만하다. 예날에는 바닷길에서 이곳이 역시 사신의 배가 묵는 곳이었다. 관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길을 잡음에는 여기서 더 이상 정박하지 않았다. 위에는 주민의 부락이 있다. 나라 (고려를 말함) 안의 대죄인으로 죽음을 면한 자들이 흔히 이곳으로 유배되어 온다. 언제나 중국 사신의 배가 이르었을 때 밤이 되면 산마루에서 봉화불을 밝히고 여러 산들이 차례로 서로 호응하여서 왕성(王城 송도를 말함)에까지 가는데, 그 일이 이 산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시 후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월서 月嶼



월서는 둘인데 흑산에서는 심히 멀다. 앞의 것을 대월서(大月嶼)라고 하는데 달같이 둘러싸고 있다. 저부터 그 위에 양원사(養源寺)가 있다고 전해진다. 뒤의 것을 소월서(小月嶼)라고 한다. 문같이 대치하고 있어 작은 배가 통행할 수 있다.



난산도 闌山島



난산도 또 천선도(天仙島)라고도 하는데 산이 높고 험하다. 멀리 바라보면 벽같이 서 있는데, 앞의 작은 두 암초는 거북과 자라의 형상 같다.



백의도 白衣島



백의도는 세 산이 잇닿아 있고 앞에는 작은 암초가 붙어 있는데, 기울어진 노송과 쌓여 있는 차조기는 푸르고 윤기가 있어 사랑스어웠다. 이곳응 또 백갑섬(白甲섬)이라고도 한다.



궤섬 跪苫



궤섬은 백의도의 동북쪽에 있는데 그 산은 여러 섬들보다 훨씬 크다. 여러 산이 잇닿아 있고 부서진 암초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밤에는 밀물이 세차게 쳐올라 눈 같은 파도가 부서지는데 달이 지고 어두운 속에 물거품의 밝기가 타오르는 것과 같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6 권



해 도 3 海島三



춘초섬 春草苫



춘초섬은 또 궤섬밖에 있는데 뱃사람들은 그것을 외서(外嶼)라고 부른다. 그 위는 다 소나무와 노송나무 등속인데 바라보니 울창하다. 밤중에는 바람이 조용하여 배의 항행이 더욱 둔해졌다.



빈랑초 儐郞焦



빈랑초는 형태가 유사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대체로 바다 가운데의 암초는 멀리서 바라보면 대부분 이런 형상을 하고 있지만, 뱃사람들은 춘초섬과 가까운 것만을 빈랑초라고 한다. 밤이 깊어지자 밀물이 빠져서 배가 물을 따라 물러나 거의 다시 큰바다로 들어가려 해서 모든 배가 두려워하여 급히 노를 저어 그 기세를 도왔다. 여명까지도 여전히 춘초섬에 있었다. 4일 을유에 날씨가 맑게 푸른 것이 거울 같아 바닥을 볼 수 있었다. 또 바다 물고기 수백 마리가 있어 크기가 수장(數丈)이나 되는데, 배를 따라 왕래하며 즐거이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유유자적하고, 선박이 지나가는 것응 전연 아랑곳도 하지 않는다.



보살섬 菩薩苫



이날 오시 후에 보살섬을 지나갔다. 고려인들이 말하기를, 그 위에서 기적이 나타난 적이 있어서 그렇게 명명한 것이라고 한다. 신시(申時) 후에는 바람이 조용해져서 밀물을 따라 전진하였다.



죽도 竹島



이날 유시(酉時) 후에 배가 죽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여러 겹이고 수풀의 나무들이 짙푸르게 무성하며, 그 위에는 역시 주민들이 있고 주민들에는 또한 장(長)이 있었다. 산 앞에 흰 돌로 된 암초가 수백 덩어리 있는데 크기가 같지 않고 흡사 쌓아 놓은 옥과 같았다. 사자(使者)가 귀로에 이곳에 이르었을 때 마침 추석달이 돋아 올랐었다. 밤은 고요하고 물은 잔잔한데 밝은 놀이 서로 비치고 비낀 달빛이 천 장(千丈)이나 되어, 섬과 골짜기와 선박과 기물이 온통 금빛이 되어졌다. 사람마다 일어나 춤추어 그림자를 희롱하며, 술을 들고 저를 불고하여 마음과 눈이 즐고워서 앞에 해양이 격해 있음을 잊었다.



고섬섬 苦苫苫



5일 병술은 날씨가 청명하였는데 고섬섬을 지나갔다. 죽도에서 멀지않고 그 산이 유사한데 역시 주민이 있었다. 고려의 습속으로는 자위모(刺蝟毛 고슴도치의 털)을 고섬섬이라고 한다. 이 산의 나무들은 무성하나 크지 않아 바로 고슴도치털 같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이날 이 섬에 정박하니, 고려인들이 배로 물을 싣고 와 바쳐서 쌀로 사례하였다. 동풍이 크게 일어 전진할 수 없어서 결국 여기서 묵었다.


군산도 群山島



6일 정해에 아침 밀물을 타고 항행하여 진각(辰刻)에 군산도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그 산은 열 두 봉우리가 잇닿아 둥그렇게 둘려 있는 것이 성과 같다. 여섯 척의 배가 와서 맞아 주는데, 무장병을 싣고 징을 울리고 호각을 불며 호위하였다. 따로 작은 배가 초록색 도포 차림의 과리를 싣고 있는데 홀을 바로잡고 배 안에서 읍을 하였으나, 통성명은 하지 앟고 물러갔다.군산도의 주사(注事 아전을 말함)라고 한다. 이어 역어관(譯語官)인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292) 심 기(深起)가 와서 동접반(同接伴) 김 부식(金富軾)293)과 합류하였다. 지전주(知全州) 오 준화(吳俊和)가 사자를 보내와 원영장(遠迎狀)을 내놓자 정사와 부사가 예를 차려 그것을 받았다. 그러나 읍만 하고 배례하지는 않았고 장의관(掌儀官)을 보내 접촉시켰을 따름이다. 이어 답서(答書)를 보냈다.

배가 섬으로 들어가 버리자 연안에서 깃발을 잡고 늘어서 있는 자가 1백여 인이나 되었다. 동접반이 서신과 함께 정사, 부사 및 삼절(三節)의 조반을 보내왔다. 정사와 부사가 접반에게 아첨하여 국왕선장(國王先狀 국왕에게 그들의 도착을 만나기 전에 먼저 알리는 서장)을 보내니, 접반이 채색 배[采舫]를 보내어 정사와 부사에게 군산정(群山亭)으로 올라와 만나주기를 청했다. 그 정자는 바다에 다가 서 있고 뒤는 두 봉우리가 의지하고 있는데, 그 두 봉우리는 나란히 우뚝 서 있어 절벽을 이루고 수백 길이나 치솟아 있다. 문밖에는 공해(公廨 관가 소유의 건물) 10여 칸이 있고, 서쪽 가까운 작은 산 위에는 오룡묘(五龍廟)와 자복사(資福寺)가 있다. 또 서쪽에 숭산행궁(崇山行宮)이 있고, 좌우 전후에는 주민 10여 가가 있다. 오시 후에 정사와 부사는 송방(松舫)을 타고 해안에 이르렀고, 삼절은 수종 인원을 이끌고 관사로 들어갔는데 접반과 군수가 달려와 맞이하였다. 뜰에는 향안(香案 향로를 놓은 상)이 마련되어 있는데, 궁궐을 바라보고 배례 무도(拜禮舞蹈)하고서는 공손하게 성체(聖體)의 안부를 물었다.

그 일이 끝나고서는 양쪽 층계로 나뉘어 대청으로 올라가 정사와 부사가 상좌에 있으면서 차례로 만나 재배하고, 끝나면 좀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하고 다시 재배하고 자리로 갔고, 상,중절(上中節)은 대청 위에서 차례로 서서 접반과 읍을 하였다.

이 나라의 습속은 다 아읍(雅揖 한쪽 무릅을 꿇고 하는 읍을 말함)을 한다. 도할관이 앞으로 나가 인사말을 하고 재배하고는 다음에 군수에게 앞서 한 예와 같이 읍하고 물러나 자기 위치에 와서 앉는다. 정사와 부사는 다 남쪽을 향하고, 접반과 군수는 동서로 마주 향하고, 하절과 뱃사람은 뜰에서 묵례하고, 상절은 대청에 나뉘어 앉고, 중절은 양쪽 행랑에 나뉘어 앉고, 하절은 문의 양쪽 곁채에 앉고, 뱃사람은 문밖에 앉는다. 시설이 극히 정제 엄숙하고 음식은 또 풍성하고 예모는 공손 근엄하다. 바닥에는 다 자리를 깔았는데 대체로 그 습속이 그러한 것으로 역시 고풍에 가까운 것이다. 술이 열 차례 돌아가는데 중절과 하절은 다만 그 회수가 줄어들 뿐이다.

처음 앉을 때에는 접반이 친히 따라서 바치고 사자(使者)는 다시 그것을 따라 준다. 주연이 반쯤 진행되었을 때 사람을 보내어 술을 권하게 하고, 삼절은 다 큰 술잔으로 바꾼다. 예가 끝나면 상・중절은 처음의 예와 같이 걸어나가 읍하고, 정사와 부사는 송방에 올라타고 타고온 큰 배로 돌아간다.



횡서 橫嶼



횡서는 군산도의 남쪽에 있다. 한 산이 특히 크며, 또 안섬(案苫)이라고도 한다. 앞뒤에 작은 암초 수십 개가 들려 있다. 돌 밑뿌리의 한 동굴은 그 깊이가 두어 길[數丈]이나 되는데 높고 넓은 것으로 유명하다. 밀물이 들어와 물을 치면 그 소리가 우뢰와 같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7 권



해 도 4 海島四



자운섬 紫雲苫



7일 무자에 날씨가 쾌청하였다. 아침에 전주 수신(全州守臣 전주목사를 말함)이 서신을 보내와 술과 예를 갖춰 간곡하게 사자를 만류하였으나, 사자가 서신으로 고사(固辭)하여 중지되었다. 다만 그가 준 채소, 어패 등만을 받고서는 방물(方物 여기서는 중국물건을 말함)로 갚아 주었다. 오각(五刻)에 배를 풀어 횡서(橫嶼)에서 묵고, 8일 기축에 일찍 떠났다. 남쪽으로 하나의 산이 보이는데, 그 뒤의 두 산은 더욱 멀어, 흡사 한쌍의 눈썹에 싱그러운 빛이 엉겨 있는 것 같다.



부용산 富用山



이날 오시(午時) 후에 부용창산(富用倉山)을 지나갔다. 그것은 곧 뱃사람들이 말하는 부용산(芙蓉山)인데, 그 산은 홍주(洪州)294) 경내에 있다. 그 위에는 창고가 있고, 또 쌓아둔 곡식이 많다고 한다. 변경의 비상시 용도에 대비한 것이라 해서 부용(富用 풍부하게 씀)이라 명명한 것이다.



홍주산 洪州山



홍주산은 또 자운섬(紫雲苫)의 동남쪽 수백 리 지점에 있는데, 고을이 그 아래에 이뤄졌다. 또 동쪽에는 금(金)이 나는 산 하나가 범같이 도사리고 있는데, 그섯을 동원(東源)이라고 한다. 작은 산 수십 개가 성같이 둘러싸 있고, 그 산 위에 못이 하나 있는데 맑기가 거울 같고 깊이는 헤아릴 수가 없다. 이날 신각(申刻)에 배가 이 산을 지나갔다.



아자섬 亞鳥子苫



아자섬은 또 알자섬(軋子苫)이라고도 한다. 고려인들은 삿갓[笠]을 ‘알(軋)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형태가 그것과 유사해서 그 이름을 얻은 것이다. 이날 유각(酉刻)에 배가 이 섬을 지나갔다.



마도 馬島



이날 유시 후에 풍세가 극히 커서 배의 항행이 나는 듯하였다. 알자섬으로부터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에 걷 마도에 정박하였다. 마도는 청주(淸州)땅이다. 샘물은 달고 풀은 무성한데, 나라 안의 관마(官馬)는 일이 없으면 여기에 몰아다 먹인다. 그래서 그런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그 주봉(主峰)은 중후(重厚)해 보이는데, 왼쪽으로 둥그렇게 껴안고 있다. 앞의 돌부리 하나가 바다로 들어가 있어서 물과 부딪쳐 파도를 돌려보내는데, 놀란 여울물이 들끓어오르는 것이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래서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대부분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데, 그것은 암초에 부딪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객관(客館)이 있는데, 안흥정(安興亭)이라 한다. 지청주(知淸州) 홍 약이(洪若伊)가 개소관(介紹官)을 역어관(譯語官) 진 의(陣懿)와 함께 보내와 전주(全州)에서와 예같이 하였다. 해안의 환영과 군졸의 기치는 군산도의 경우와 다름이 없었다. 밤으로 접어들어서는 큰 횃불에 불을 붙여 휘황하게 하늘을 비췄다. 그 때 막 바람이 사나워져 배 안이 뒤흔들려 거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사자(使者)는 부축되어서 작은 배로 상륙하였고, 상견례(相見禮)는 군산정에서의 예와 같았다. 그러나 주례(酒禮)만은 받지 않고 밤중에 사절의 배로 돌아왔다.



구두산 九頭山



9일 경인은, 날씨는 청명하였으나 남풍이 몹시 강하였다. 진시에 마도를 출발하여 사각(巳刻)에 구두산을 지나갔다. 그 산에는 아홉 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멀리서 바라보니 그리 분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풀이 무성하여 밝고 윤기가 도는 것이 좋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8 권



해 도 5 海道五





당인도 唐人島



당인도는 그 이름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 그 산은 구두산과 가깝다. 이날 오각(午刻)에 배가 이 섬아래를 지나갔다.



쌍녀초 雙女焦



쌍녀초는 그 산이 심히 커서 도서(島嶼)와 다름없다.앞의 한 산에는 초목이 있기는 하나 그리 빽빽하지 않다. 뒤의 한 산은 퍽 작고 중간이 끊어져 문이 되어 있으나, 아래에 암초가 있어 배가 지나가지는 못한다. 이날 사각(巳刻)에 배가 당인도에서부터 이어 이 초(焦)를 지나갔는데, 풍세가 매우급해져서 배의 항행이 더욱 빨라졌다.



대청서 大靑嶼



대청서는 멀리서 바라보면 울창한 것이 진한 눈썹먹같다 해서 고려인이 이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날 오각에 배가 이곳을 지나갔다.



화상도 和尙島



화상도는 산세가 중첩하고 숲이 우거진 골이 깊고 무성하다. 산 속에는 호랑이가 많다. 옛날 불도를 배우는 자가 거기에 살았었는데, 짐승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하며, 지금의 엽로사(葉老寺)가 그 유적이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그것을 화상도(화상은 중에 대한 경칭)라고 한 것이다. 이날 미각(未刻)에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갔다.



우심서 牛心嶼



우심서는 소양(小洋) 가운데 있다. 한 봉우리가 유독 솟아나 형상이 엎어놓은 바리(盂)와 닮았는데, 가운데가 좀 날카롭다. 고려인들은 그것을 소의 염통이라고 하는데, 이런 것은 어디를 가나 흔히 보게 된다. 또 형체가 이산과 닮고 약간 작은 것은 계심서(鷄心嶼)라고 한다.이날 미시 정각에 이 섬을 지나갔는데, 남풍에 가랑비가 내렸다.



섭공서 攝公嶼



섭공서는 성(姓)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멀리서 보면 심히 날카로운데 바싹 가까이 가면 담같다. 대체로 그 형체다 납작해서 가로 보는 것과 세로 보는 것이 각각 다르다. 이날 미시 말에 배가 그아래를 지나갔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39 권



해 도 6 海道六



소청서 小靑嶼



소청서는 대청서의 모양고 같은데 다만 그 산이 약간 작고 주위에 초석이 많을 뿐이다. 신시(申時)초에 배가 지났는데 비가 제법 세게 쏟아졌다.



자연도 紫燕島



이날 신시 정각에 배가 자연도에 머무르니, 이곳은 곧 광주(廣州)이다. 산에 기대어 관사를 지었는데, 방(榜)에 ‘경원정’(慶源亭)이라고 하였다. 경원정 곁에는 막집 수십 간을 지었다. 주민들의 초가집도 많다. 그 산의 동쪽 한 섬에 날아다니는 제비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명명한 것이다. 접반 윤 언식(尹彦植)과 지광주(知廣州) 진숙(陳淑)이 개소(介紹)와 역관 탁안(卓安)을 보내어 서신을 가지고 와서 영접하게 하였는데, 병장과 의례가 융숭하였다. 신시(申時) 후에 비가 멎어 정사와 부사가 삼절(三節)과 함께 상륙하여 관사에 당도하였고, 그 음식과 상견례는 전주에서의 예(禮)와 같았다. 밤의 누각(漏刻)이 2각으로 내려가자 배로 돌아갔다. 10일(신묘) 진각(辰刻)에 서북풍이 불어 8척의 배는 움직이지 않았다. 도할관 오 덕휴(吳德休)와 제할관 서 긍(徐兢)은 상절과 함께 다시 채색배로 관상에 갔다가 제물사(濟物寺)에 들러 원풍(元豊 송 신종의 연호) 때의 사신인 고 좌반전직(左班殿直) 송 밀(宋密)을 위해 동양을 드린 의에 배로 돌아갔다. 사각(巳刻)에 밀물을 따라서 전진하였다.



급수문 急水門



이날 미각(未刻)에 급수문에 도달하였는데, 그 문은 바다섬과는 닮지 않고 흡사 무협(巫峽)의 강로 같았다. 산이 둘러싸고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서로 이어졌는데, 그 양쪽 사이가 물길이다. 수세(水勢)가 산협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량을 뚫는데, 요란하기가 우뢰와 같아 천균(千鈞)의 쇠뇌와 바람을 쫒아가는 말이라 해도 그 물살의 급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부적하다. 이곳에 이르러서는 이미 돚을 펼쳐서는 안 되고 다만 노를 써서 밀물을 따라 전진할 뿐이다.



합굴 蛤窟



신시 후에 합굴에 당도하여 정박하였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고 주민도 역시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사(龍祠)가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가고 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바닷물이 이곳에까지 이른다. 급수문과 비교해 보면 물빛이 황백색으로 변한 것이다.



분수령 分水嶺



분수령은 곧 두 산이 마주보고 있는 것으로, 작은 바다가 여기서부터 나뉘어 흘러가는 곳인데 물빛이 다시 매잠(梅岑)같이 흐리다. 11일(임진) 아침에 비가 내리고 오각에 밀물이 빠지며 비가 더욱 심해졌다. 국왕이 유 문지(劉文志)를 시켜 선서(先書)를 보내어 왔는데, 사자는 예를 갖추어 그것을 받았다. 유각(酉刻)에 전진하여 용골(龍骨)에 이르러서 정박하였다.



예성항 禮成港



12일(제사)아침에 비가 멎자 조수를 따라 예성항으로 들어가고, 정사와 부사는 신주(神舟)로 돌아 들어왔다. 오각에 정사와 부사가 도할관과 제할관을 거느리고 채색배에서 조서(詔書)를 받들고 갔다. 만으로 헤아리는 고려인들이 무기・갑마(甲馬)・기치・의장물(儀物)을 가지고 해안가에 늘어서 있고 구경군이 담장같이 둘러서 있었다. 채색배가 해안애 닿자 도・재할이 조서를 받들고 채색 가마로 들어가고, 하절이 앞에서 인도하며 정사와 부사는 뒤에서 따라가고 상・중절이 차례로 따라갔다. 벽란정(碧瀾亭)으로 들어가서 조서를 봉안하는 일을 끝내고는 위차(位次)로 나뉘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음날 육로를 따라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생각하건대, 바닷길은 어려움이 대단하였거니와, 일엽편주로 바다의 험난한데 떠있을 적에, 오직 종묘가직의 복이 파신(波神)으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였음을 힘입어 건너온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사람의 힘으로 도달해 낼 수 있었겠는가? 큰 바다에 있을 때에 돛단배로 가는데, 풍랑을 만났다면 다른 나라로 흘러들러갔으리니, 생사가 순식간에 달라졌을 것이다. 또 세 가지 의험을 싫어하니, 치풍(癡風 음력 7・8월에 부는 동북풍)과 흑풍(黑風 폭풍)과 해동(海動) 바다의 지진으로 이러나는 물의 움직임이 그것이다. 치풍이 일어나면 연일 성내어 외치며 그칠 줄 모르고 사방을 가려내지 못한다. 흑풍은 때엾이 성내어 불어닥치고 하늘 빛이 어두워 낮과밤을 분간하지 못한다. 해동이 일러나면 바닥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이 거센 불로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큰 바다 가은데서 이것을 만나면 죽음을 면하는 자가 적다. 또, 한 물결이 배를 밀어내는것이 툭하면 몇 리나 되니, 몇 길의 배로 파도 사이에 떠 있는 것은 터럭끝이 말의 몸에 있는 것 정도도 못 된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자는 배가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을 급무로 삼을 것이 아니라 조심해서 이행하는 것이 제일이다. 만약에 의험을 만나면 지성에서 우러나 경건하게 기도하고 슬프게 간구하면 감응하지 않는 경우가 없다. 근자에 사신의 행차에 둘째 배가 황수양(黃水洋) 가운데에 이르러 세 개의 키가 다 부러졌을 때 내가 마침 그 가운데 있었는데, 같읕 배의 사람들과 머리를 깍고 슬프게 간구하였더니 상서로운 빛이 나타났다. 그런데 복주(福州)의 연서신(演嶼神) 역시 기일에 앞서 이적(異蹟)을 나타냈었으므로 이날 재가 비록 의태로왔으나 다른 키로 바꿀수 있었던 것이다. 뒤에 바꾸고 나서도 다시 전같이 기울며 흔들렸고 5주야를 지나서야 비로소 명주(明州)의 정해(定海)에 도달하였다. 상륙할 때에 가까와져서는 온 배의 사람들이 초췌해져 거의 산사람의 기색이 없었으니,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헤아려 알 수 있을 것이다. 만약에 바닷길이 험난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정에 돌아와 복명하고서 후한 상을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조종(祖宗)때 이래로 누차 사절을 파견하였어도 표류 익사하고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었다. 다만 나라의 위령(威靈)을 맏고 충신(忠信)에 의지하면 툴림없이 근심이 없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점을 서술하여 뒤에 오는 이들에게 격려가 되게 하는 바이다. 근자에 사절의 행차는, 떠나가는 기간 중에는 남풍을 이용하고 돌아오는 기간 중에는 북풍을 이용한다. 처음 명주를 출발한 것은 그해 5월 28일이었는데, 큰 바다로 나가서는 순풍을 얻어 6월 6일에 가서 곧 군산도에 도달하였다. 귀로에 오르게 되어서는 7월 13일(갑자)에 순천관(順川館)을 떠났고, 15일(병인)에 다시 큰 배에 올랐다. 16일(정묘)에 합굴(蛤窟)에 이르렀고, 17일(무진)에 자연도(紫燕島)에 이르렀고, 22일(계유)에 소청서(小靑嶼)・화상도(和尙島)・대청서(大靑嶼)・쌍녀초(雙女焦)・당인도(唐人島)・구두산(九頭山)을 지났는데, 이날 마도(馬島)에 정박하였다. 23일(갑술)에 마도를 떠나 알자섬을 지나 홍주산(洪州山)을 바라보았으며, 24일(을해)에 횡서(橫嶼)를 지나 군산문(群山門)을 들어가 군산도 아래서 정박하였다. 8월 8일까지 도합 14일 동안 바람이 막혀 가지 못하다가, 신시(申時) 후에 동북풍이 일어나 밀물을 타고 큰 바다로 나가 고섬섬을 지났고 밤으로 접어들어서도 머물지 않았으며, 9일(기축)에는 아침에 죽도(竹島)지났다. 진시와 사시에 흑산(黑山)을 바라보았는데, 느닷없이 동만풍이 사나와지고 또 해동(海動)을 만나 배가 한쪽으로 쏠려 기울어지려고 해서 사람들이 대단히 두려워하여 곧 북을 울려 뭇사람을 불렀더니, 배가 다시 바로 돌아왔다. 10일(경인)에는 풍세가 더욱 맹렬해져 오각(午刻)에 다시 군산도로 돌아갔다. 16일(병신)까지 또 6일이 지났다. 그날 신시(申時) 후에 바람이 가라앉자 곧 큰 바다로 떠나 밤에 죽도에 정박하였다. 또 이틀 동안 바람에 막혀가지 못하다가 19일(개해)에 이르러, 오시 후에 죽도를 떠나 밤에 월서(月嶼)를 지났다. 20일(경자)에는 아침에 흑산(黑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백산(白山)을 지났고 다음에는 오서(五嶼)와 협계산(夾界山)을 지났는데, 북풍이 대단하게 일어나 뜸을 낮춰 그 기세를 줄였다. 21일(신축)에 사미(沙尾)를 지났고 오시 사이에는 둘째 배의 세 개의 보조 키가 부러졌고, 밤의 누각(漏刻)이 4각으로 내려가자 정타역시 부러졌다. 사신의 배와 다른 재들도 다 의험을 당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22일(임인)에 중화(中華)의 수주산(秀州山)이 바라보였고 24일(계묘)에 동서서산(東西胥山)을 지나 25일(갑진)에 낭항산(浪港山)으로 들어가 담두(潭頭)를 지났다. 29일(을사)에는 아침에 소주양(蘇州洋)을 지나 밤에 율항(栗港)에 정박하였고 27일(병오)에 교문을 지나 초보산(招寶山)을 바라보았고 오각(五刻)에 정해현(定海縣)에 도착하였다. 고려를 떠나서부터 명주 땅까지 오는 데 무릇 바닷길로 42일이 걸렸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 40 권



동 문 同文295)



정삭(正朔)296)은 천하의 정치를 통솔하는 방법이고, 유학(儒學)은 천하의 교화를 아름답게하는 방법이고, 악률(樂律)은 천하의 조화를 이끄는 방법이고, 도량권형(度量權衡)은 천하의 공용하는 기준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네가지는 비록 다르기는 하나 반드시 천자의 절제와 서로 합치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 후라야 태평의 표적(表迹)이 갖추어지게 된다. 성인(聖人)297)이 일어나면 반드시 세정(歲正)을 세우고, 국시(國是)를 정하고 한 조대(朝代)의 음악을 새롭게 하고, 율도(律度)와 양형(量衡)을 동일하게 만든다. 대체로 지극함 하나로 뭇 움직임을 바로잡는데는 그 방법이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우리 국가가 대일통(大一統)으로 만방에 임하니 화하(華夏)와 만맥(蠻貊)이 다 신복하였다.298) 비록 고구려(高句麗 우리나라의 범칭(汎稱))는 바다 섬에 자리잡고 있어 거대한 파도가 가로막고, 구복(九服 중국 역대의 복속지역을 말함)안에 들어 있지 않기는 하나, 정삭을 받고 유학을 준봉(遵奉)하며, 악률은 조화를 같이 하고 도량형은 제도를 같이하니, 우순(虞舜)의 태평 시절에 동쪽에서 협력하고 백우(伯禹)의 덕화(德化)가 남쪽에까지 미쳤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거론할게 못될 정도이다.299) 옛사람이 말한, ‘글은 글자를 같이 하고 수레는 차폭을 같이한다’고 한 것을 지금에 보게 된 것이다.300) 또 도지(圖志 그림과 기록)의 작성은 이국의 다른 제도를 기록하는 방법인데, 만약에 그 제도가 혹 같을 경우라면 그림의 작성이야 군더더기 같으니 만들어 무엇하겠는가? 삼가 그 곳의 정삭․악률․도량을 중국과 같은 것을 조목지어 기록해서 ‘동문기(同文記)’를 만들고, 그 그림은 생략하겠다.



정삭 正朔



당(唐) 유 인궤(劉仁軌)301)가 방주자사(方州刺史)가 되자, 반포할 역서(曆書) 및 종묘의 휘(諱)를 청하여 말하기를 ‘마땅히 요해(遼海)를 평정하여 우리 조정의 정삭을 나누어 주고, 전쟁에 이기게 되면 군사를 가지고 고려(高麗 고구려를 말함)를 공략하여 그 추장(酋長)을 거느리고 등봉(登封)302)의 모임에 가도록 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처음에 한 말과 같이 해 내어 사신(史臣)이 그 일을 장하게 여겼다. 그러나 인궤는 단지 그 힘을 굴복시켰을 뿐이었지 반드시 그 본심을 굴복시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 하면 내가 고려인들이 중국을 섬기는 것을 살펴보건대, 그들이 존호(尊號)303)를 내려주고 정삭을 나누어 주기를 청하는 것이 공손하고 간절하여 입에서 떠나지 않더니, 강한 오랑캐(契丹, 즉 요(遼)를 말함)에게 핍박받게 되고부터는 표면으로만 복종하였지, 우리 조정에 마음을 돌려 해바라기같이 기울고 개미같이 사모하는 정은 끝내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어찌 군사를 쓰는 것이 덕을 베푸는 것에 대하여 본디 비교가 되겠는가?

그러나 가까우면 복종시키기 쉽고 멀면 회유하기 어려운 것이다. 고려의 땅은 황제의 고장에서는 멀리 큰 바다 밖에 있으니, 거기서 올 때에는 거대한 배를 띄워 바람을 몰고 밤낮을 도와 10 여일을 와야 비로소 사명(四明)에 도달한다. 바람이 혹시 거세어지면 놀란 파도가 산같이 솟아올라 화덕의 가마솥이 뒤집혀 쏟아져서 한 방울의 물도 남지 않고, 또 취사를 할 수도 없어 뱃사람들은 왕왕 밥을 굶게 되고, 심할 때는 키가 부러지고 돛대가 꺾여져 뒤집어 엎는 변고가 순식간에 생기니 또한 대단히 위험하다. 그러나 건륭(建隆)․개보(開寶 모두 송 태조의 연호, 960~975) 연간부터 신하의 충절을 지키기를 원하여 감히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고 지금에 이르렀다. 북쪽 오랑캐와의 관계로 말하면 국토의 거리가 겨우 한 줄기의 물뿐이어서, 오랑캐가 아침에 말을 타고 떠나면 저녁에는 이미 압록강에서 물을 먹이게 된다. 앞서 크게 패전하고서야 비로소 신하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그들의 연호(年號)를 썼는데, 그 일은 통화(統和 983~1011)와 개태(開泰 1012~1021)에 걸친 도합 21년 동안 계속되었다.

왕 순(王詢 고려 현종(顯宗))때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를 대파하여 다시 중국에 통하게 되어서 진종 황제(眞宗皇帝) 대중상부(大中祥符) 7년(고려 현종 5, 1014)에 사신을 보내어 정삭을 나눠 주기를 청하여, 조정에서는 그 청대로 따랐고, 그 후에는 마침내 ‘대중상부’라는 연호를 쓰고 북쪽 오랑캐의 개태(開泰)라는 연호를 갈아 버렸다. 천희(天禧 1027~1021) 연간에 이르러 북쪽 오랑캐가 다시 고려를 격파하고 그 백성들을 거의 다 살륙하여, 왕 순은 나라를 버리고서 합굴(蛤堀)로 도망가기에 이르렀고, 오랑캐는 성안에서 8개월동안 머물러 있다가 마침 서북쪽 산의 온갖 소나무가 다 사람 소리를 내자 비로소 놀라고 두려워하여 철수해 가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왕 순에게 강제로 정삭을 나누어 주므로 왕 순은 힘에 굴복하여 부득이 그것을 사용하였다. 그리하여 태평(太平)304) 2년부터 17년이 계속되었고, 중희(重熙 1032~1054)에 이르러서는 22년이 계속되었고, 청녕(淸寧 1055~106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함옹(咸雍 1065~107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태강(太康 1075~108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대안(大安 1085~1094)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수창(壽昌 1095~1100)은 6년이 계속되었고, 건통(乾統 1101~1110)은 10년이 계속되었고, 천경(天慶 1111~1120)은 8년(천경은 10년간 계속했으니 저자의 착각인듯)까지 갔으니 도합 1백년이 된다.

그리고 야율(耶律 요 황제의 성씨, 요를 말함)이 대금(大金)에게 곤욕을 당하자 고려는 드디어 북쪽 오랑캐의 연호를 버려버렸으나, 또 우리 조정에 명령을 청하지 않아 감히 그대로 정삭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다만 세차(歲次 연수에 따른 간지를 말함)로 해를 기록하고 장차 정삭을 청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조정은 고려와는 저토록 멀고 복쪽 오랑캐는 고려와 이토록이나 가깝다. 그러나 북쪽 오랑캐에게 붙은 것은 언제나 병력에 곤욕을 당해서이었으며, 그것이 좀 이완해진 것을 틈타서는 곧 항거하였다. 성조(聖朝)를 높여 받드는 것으로 말하면 시종여일하게 간절히 추대하고, 비록 어쩌다 때때로 견제를 받아 소원대로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성의의 방향은 굳기가 금석과 같다. 그것은 누대의 성군께서 인자함으로 편안케 하여 주시고 은덕으로 위무하여 주주셔, 안으로 그들의 마음을 얻은 것이 북쪽 오랑캐가 강포하여 한갓 힘으로 그들의 외면을 제압한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수 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철과 달을 맞추어 날을 바로 잡는다.305)’ 하였거니와, 이제 북쪽 오랑캐가 이미 멸망하였으니 고려의 사신이 정삭을 청해옴을 곧 보게 될 것이고, 만방의 시(時)․월(月)․일(日)을 맞춰서 바로 잡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유학 儒學



동이(東夷)는 천성이 인자하여 그 땅에는 군자가 죽지 않는다는 나라가 있다. 또 기자(箕子)가 봉해졌던 조선 땅에서는 본래부터 8조의 가르침을 잘 알아, 그 남자들은 예의로 행동하고, 부인들은 올바름과 신용을 지키고, 음식은 두변(豆籩 두와 변. 모두 법도에 맞게 쓰는 예기(禮器))을 가지고 하고, 길을 가는 자들은 서로 양보한다. 그리하여 만맥 잡류(蠻貊雜類)들이 이마에 자자(刺字)하고, 발에 굳은 살을 지우며 변발(辮髮)에 횡폭(橫幅 오랑캐의 복식 이름)을 두르고, 부자가 잠자리를 같이하고 친족이 관곽을 같이하는 따위의 편벽하고 괴이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한 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해서부터는 신첩(臣妾)으로 내속(內屬)하여 중화의 정치 교화가 점차로 미쳐갔던 것으로 비록 위(魏)를 거치고 진(晋)을 지나면서 시대의 기복에 따라 잠시 이탈했다 잠시 합쳤다 하기는 하였으나 의리가 마음속에 뿌리박은 것은 없어진 적이 없었다.

당(唐) 정관(貞觀 태종의 연호) 초년에 태종(626~649)이 위 정공(魏鄭公 위 징(魏徵)의 봉호가 정국공(鄭國公)임)의 한 마디를 써서 인의(仁義)로 정치하고 학교를 넓히며 학자를 숭상하였는데, 이 때에도 의론에 참여하였던 대신들은 오히려 의심을 품고 그것의 유익함을 몰랐었다. 그런데 저 나라에서는 서둘러 자기네들의 뛰어난 자제들을 보내어 경사(京師 당시 당의 수도였던 장안(長安)을 말함)에서 교육시키를 청했던 것이다. 그 후 장경(長慶 목종의 연호, 821~824)연간에는 백거이(白居易 자는 낙천(樂天), 당대의 시인)가 가행(歌行 성률이 덜 근엄한 고체시(古體詩)의 일종으로 악부시(樂府詩)의 계통을 이은 것)을 잘 지었는데, 계림(雞林 우리나라를 말함)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감탄 흠모하여 일금(一金 황금 1금을 말함)으로 한 편을 바꿔서 그것으로 규범을 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의 마음 쓰는 것을 알 수 있다. 왜(倭)․진(辰) 등 나머지 나라들을 살펴보면, 혹은 가로쓰고 혹은 왼쪽으로 획을 긋고 혹은 노끈을 매듭지어 신표로 하고, 혹은 나무를 파서 기록으로 삼고 하여 각각 방법을 달리 하고 있다. 그런데 고려인들은 예서법(隸書法)을 모사하여 중화의 것으로 바로 잡으며, 화폐의 글자와 부절과 인장의 각자에 이르러서는 감히 망령되이 자체를 증손(增損)하지 않으니 문물의 아름다움이 상국(上國)과 맞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宋) 나라가 일어나 그 문화가 멀리에까지 미쳐가자 머리를 조아리고 관문을 두드려 번신(藩臣)이 되기를 청해왔다. 그 사자(使者)가 와서 조정에 들 때마다나라의 찬란한 문물을 보고서는 그 아름답고 찬란함을 부러워하고, 돌아가서는 서로 이야기하여 사람들이 더욱 힘쓰게 되었다. 순화(淳化) 2년(고려 성종 10년 991)에 천하의 선비들에게 조정에서 시험을 베풀었는데, 그들 역시 자기네 사람들을 빈공(賓貢)으로 보내서 문예(文藝)를 바쳐왔다. 태종 황제(太宗皇帝)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그 수효 안에서 뽑아주시어 왕 빈(王彬), 최한(崔罕) 등은 진사 급제(進士及第)로 장사랑 수비서성교서랑(將士郞守秘書省校書郞)을 제수하고 배를 태워 귀국케 하였다. 그때의 국왕 치(治 고려 성종(成宗))가 표물을 바쳐 사의(謝意)를 표했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감격스러웠다.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속학(俗學)의 폐단을 근심하시어 삼경(三經 「시경」 「서경」 및 「역경」을 말함)을 훈석(訓釋)하여 천하의 암매함을 없애주도록 명하시고, 특히 조명(詔命)으로 그 책들을 내려 그들로 하여금 대도(大道)의 순전(純全)함을 볼 수 있게 하여 주도록 하시었다. 주상(主上 송 휘종을 말함)께서는 선왕의 뜻을 훌륭히 계승하시어 시사법(施舍法)306)을 확대시키셨고, 또 내학자제(來學子弟 당시 고려 유학생을 말함) 김 단(金端) 등에게 과명(科名 과거 급제의 종류에 따른 명칭)을 내리어 귀국시키셨다. 이리하여 휩쓸리듯 따르고 세차게 교화되어 즐겁고 공경스럽게 유학을 지켜나가 비록 연․한(燕韓)307)의 변두리 편벽한 곳에 살기는 하지마는 제․노(齊魯)308)의 기풍과 운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근자에 사신이 그 곳에 가서 물어보고 알았지마는, 임천각(臨川閣)에는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고, 또 청연각(淸燕閣)이 있는데 역시 경․사․자․집(經史子集) 4부의 책으로 채워져 있다 한다.309) 국자감(國子監)을 세우고 유관(儒官)을 선택한 인원이 짜여져 하게 구비되어 있었으며, 황사(簧舍 학교를 말함)를 새로 열어 태학(太學)의 월서계고(月書季考)310)하는 제도를 퍽 잘 지켜서 제생(諸生)의 등급을 매긴다. 위로는 조정의 관리들이 위의가 우아하고 문채가 넉넉하며, 아래로는 민간 마을에 경관(經館)과 서사(書舍)가 두셋씩 늘어서 있다. 그리하여 그 백성들의 자제로 결혼하지 않은 자들이 무리지어 살면서 스승으로부터 경서를 배우고, 좀 장성하여서는 벗을 택해 각각 그 부류에 따라 절간에서 강습하고, 아래로 졸병과 어린아이들에 이르기까지도 향선생(鄕先生 자기 고장의 글가르치는 선생)에게 글을 배운다. 아아, 훌륭하기도 하구나!

그런데 제후가 공을 이룩하는 것은 실은 천자의 위령(威靈)을 빈 것이고, 제후가 덕을 드러내는 것은 실은 천자의 교화를 따른 것이다. 고려인은 중국에 대해서는 바다 한 구석의 후백(侯伯)의 나라일 뿐이다. 이제 그들의 문물이 풍성함이 이와 같음은 대체로 좋은 감화의 소치이니 또한 위대하지 않은가? 이르테면 일월을 비롯한 삼진(三辰 일․월․성을 말함)은 원기(元氣)를 빌어서 열(列)을 이룩하나, 그것들이 빛으로 나타내는 것은 하늘의 밝음으로 되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초목을 비롯한 온갖 보물은 원화(元化 조화의 위대한 작용을 말함)를 받아서 꽃을 피워내나, 그들 꽃이 아름답게 피고 지고 하는 것은 땅의 문체로 되어지는 것이다.

그 나라의 선비를 뽑는 제도로 말하면, 비록 본조(本朝 송나라를 말함)의 그것을 규범으로 삼기는 하지마는, 전승하여 듣고 구례를 따르고 하는데 따라 약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그들은 학생(學生)들에 대해서는 매년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묘 즉 문묘)에서 시험하는데 합격자는 중국의 공사(貢士 중앙고시에의 응시자격을 추천 받은 자)와 대등하다. 그들의 거진사(擧進士 진사시에 응시할 자격을 갖춘 자)는 한 해 건너 한차례씩 그 소속지에서 시험을 실시하여 합격하면 공자(貢者 학생으로 합격한 자를 말함)와 대등해지는데, 도합 3백 50여 인이다. 추천 선발이 끝나면 또 학사(學士)들에게 명해 영은관(迎恩館)에서 전체 시험을 치루게 하여 30~40인을 뽑아, 갑․을․병․정․무 5등으로 나눠서 급제를 내리는 것이 대략 본조의 성위(省闈 궁중에서 치루는 중앙고시를 말함)의 제도와 같다. 왕이 친히 시험해서 벼슬을 주는 것으로 말하면 시․부․논(詩賦論) 3제를 쓰고 시정(時政)을 책문(策問)하지 않으니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그 밖에 또 제과(制科)311)와 굉사(宏辭)312)의 명목이 있는데 조문은 갖추어져 있으나 늘 시행하지는 않는다. 대체로 성률(聲律)313)을 숭상하고 경학(經學)은 그리 잘하지 못한다. 그들의 문장을 보니 당의 여폐(餘弊)와 방불하다.314)



악률 樂律



훌륭한 음악은 천지와 함께 조화를 같이 하거니와315) 오성(五聲)의 발생은 오행(五行)에 근원을 두었으며,316) 팔음(八音)의 구별은 팔풍(八風)에서 생겨난다.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는 다 한 기운에서 나오나, 손과 발이 흥겹게 움직이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는데도 그렇게 하게되는 점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궤부(蕢桴 흙으로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면(面)을 한 악기를 치는 채)와 토고(土鼓 흙을 구워 틀을 만들고 가죽으로 면을 한 악기)로도 다 그 소리를 깃들이고 조화를 토해내기에 족하다. 그래서 갈천씨(葛天氏) 때부터 쇠꼬리의 노래가 이미 문헌에 보이게 된 것이다.317) 후세에 성인(聖人)이 음악을 만들어 덕을 숭상하여 금(金)․석(石)․토(土)․혁(革)․포(匏)․목(木)․사(絲)․죽(竹) 등의 물건을 가지고 종(鐘)․경(磬)․도고(鞉鼓)․훈지(塤篪)․생우(笙竽)․축어(柷敔)․금슬(琴瑟)․관적(管篴)318) 등의 악기를 제작하여서 연주하고, 멈추고, 읊조리고, 쉬고 하여 천지의 조화에 맞춰 신기(神祇 하늘과 땅의 신령)와 조상의 영혼을 강림하게 하였다.319)

만이(蠻夷)와 융적(戎狄)의 음악에 있어서도 역시 합주(合奏)를 하는데, 말사(靺師)320)가 있어 그 음악을 관장하고 모인(旄人)321)이 있어 그 무(舞)를 늘어 놓고, 제류씨(鞮鞻氏)322)가 있어 그 가취(歌吹)를 맞춘다. 무릇 민중과 함께 음악을 즐겨서 천하를 즐기므로 처음부터 이하(夷夏 한족과 그밖의 이족)의 구별이 없다. 받아들이고 널리 채택함은 우리 덕이 널리 퍼져나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아(雅)를 연주하고 남(南)을 연주하고, 약(籥)을 연주하여도 혼란을 일으키지 않는다.323)’ 하였는데, 설명자가 ‘아는 하악(夏樂 중국의 음악)이고, 남은 이악(夷樂)이라.’고 하였다. 즉 두가지를 합주해서 조화를 이루어 천지의 중성(中聲 중화(中和)의 음성) 에 맞춘 연후라야 음악을 갖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방의 이역(異域)에서는 음식이 조화를 달리하고, 의복이 제도를 달리하고, 기용(器用)이 방법을 달리하므로 음악 역시 같아질 수 없다. 그래서 동방의 것을 ‘말’(靺)이라 하고, 남방의 것을 ‘임’(任)이라 하고, 서방의 것을 ‘주리’(侏離)라 하고, 북방의 것을 ‘금’(禁)이라 하여, 각각 그 뜻을 지니고 있어 뒤섞을 수 없는 것이다.

고려인으로 말하면 동이(東夷)의 나라이므로 음악은 ‘말’(靺)에 근본을 두었다고나 할까? 또 삼대(三代)의 제도는 상(商)의 것을 대호(大濩)324), 주(周)의 것을 대무(大武)325)라 하는데, 기자(箕子)는 상(商)의 후예로 조선으로 주(周)의 봉(封)을 받았으니, 그 곳의 말악(靺樂)의 비루함을 고쳐 틀림없이 호․무(濩武)의 유음(遺音)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제작(制作)을 차례로 이어받아 지금까지 천년이 지났으나 성음이 조화되고 악률이 맞으니 취할 것이 있어 마땅하다. 희령(熙寧 송 신종의 연호)연간에 왕 휘(王徽 고려의 문종(文宗))가 악공(樂工)을 보내달라고 주청(奏請)하여 조명(詔命)을 내려 그 나라에 가게 하였는데 수년 후에야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후 사람들이 사절로 오면 반드시 재물을 가지고 와서 공기(工技 악공을 말함)를 스승으로 삼아서, 번번이 관사에 가서 가르쳐 주게 하였다. 근년에 입공(入貢)하여서는 또 대성아악(大晟雅樂) 내리기를 청했고, 다시 연악(燕樂) 내리기를 청했을 때는 조명으로 그 청을 다 들어 주었다.326) 그래서 악무(樂舞)가 더욱 성대해져 보고 들을 만하게 되었다.

지금 그 음악에는 2부(部)가 있다. 좌부는 당악(唐樂)이니 중국의 음악이요327), 우부는 향악(鄕樂)이니 이(夷)의 음악이다. 중국 음악은 악기가 다 중국 제도 그대로인데, 다만 향악에는 고(鼓)․판(版)․생(笙)․우(竽)․필률(觱篥 피리. 그 모양이 나라에 따라 약간씩 다름)․공후(箜篌)328)․오현금(五絃琴)․비파(琵琶)․쟁(箏)․적(笛)이 있어 그 형제(形制)가 약간씩 다르다. 슬(瑟)의 기둥은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기 않는다. 또 소(簫)가 있는데 그 관(管)의 길이가 2척여로 그것을 호금(胡琴)이라고 한다. 몸을 굽혀서 먼저 그것을 불어 가지고 여러 악기의 소리를 시작하게 한다. 여기(女伎)로 말하면 그것을 ‘하악’(下樂)이라고 하는데 도합 3등급이 있다. 대악사(大樂司)는 2백 60인으로 왕이 늘 사용하는 것이다. 다음 관현방(管絃坊)은 1백70인이요, 그 다음 경시사(京市司)는 3백여 인이다. 또 석지(䄷枝)329)와 포구(抛毬)330)의 기예(技藝)도 있다. 그들의 백희(百戲)331)는 수백인인데 듣기로는 다들 민첩하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때 왕 우(王俁)의 상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악공들은 그 악기를 잡고 있고 연주하지 않아서 성률의 절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권량 權量



대씨(戴氏)의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예악을 제정하고 도량형을 반포하면 천하가 철저하게 복종한다.332)’ 하였고, 노어(魯語)에 이르기를, ‘권량(權量 역시 도량형을 말함)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법도를 자세히 살펴서 사방의 정사가 시행되게 되었다.333)’고 하였다. 대체로 왕자(王者)가 제후를 통솔하는 데는 비록 덕화(德化)와 형위(形威 형벌을 가하는 위력)에 근본을 두기는 하지마는 그 정사를 통솔시키는 방법은 더욱이 권량을 앞세운다. 삼대(三代 하․은․주)가 전성했을 때에는 반드시 왕부(王府)에서 가량(嘉量)334) 등의 기구를 내놓아 나라안에 나누어 주어, 그것을 그 관원으로 관장하게 하였고, 그것을 제때에 평준하게 하였으며, 순수(巡狩 천자의 지방 시찰을 말함)할 때에 가서는 또 맞춰서 같게 하여 내외와 원근에 따라 다른 제도가 생기지 않게 하였다. 그렇게 한 후에 천자의 정치가 시행되었던 것이다. 만약에 사방의 제후로 이 세 가지에서 한 가지라도 변개가 있다면 몰아내고 죽여 없애고 하여 법에 용서가 없었으니, 뉘라서 그것이 기용의 말단이라 하여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대저 오도(五度)의 제도는, 분(分)에서 분별하고 촌(寸)에서 촌탁하고[忖], 척(尺)에서 재고, 장(丈)에서 펼치고, 신(伸)에서 끌어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길이를 재는 것이다. 오량(五量)의 제도는 약(龠 즉 작(勺))에서 나가게 하고 홉(合)에서 합치고, 승(升)에서 올리고, 두(斗)에서 모으고, 곡(斛)에서 헤아려 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용량을 되는 것이다 오권(五權)의 제도는 수(銖)에서 시작하고, 양(兩)에서 짝채우고, 근(斤)에서 밝히고, 균(鈞)에서 고르고, 석(石)에서 끝내고, 그렇게 하여 온갖 물건의 무게를 단다.335) 그러나 다 동(銅)으로 부어서 찍어 내는데 이는 그것이 동일함을 취한 것으로, 천하의 도량형을 같게 하고 풍속을 일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주(周) 나라의 도(道)는 동쪽으로 기울어져 정치는 그 권병을 잃었다.336) 진(晉)나라의 악률 맞추던 자는 장척(長尺)을 만들어서 종을 쳐 음악의 중성(中聲)을 잃었고, 제(齊)나라의 재상으로 있던 자는 큰 말로 백성들에게 양곡을 주어 자기의 개인적인 은혜를 샀고337), 당(唐)나라의 역법(曆法) 연구자는 옥형(玉衡)과 선기(璿璣)의 제도를 잃어 천도(天道)와 삼진(三辰 일․월․성)의 운행을 고루할 길이 없어졌다.338) 이런 일들은 이목으로 접하게 되는 가까운 것조차도 그 법도 가운데서 같은 점을 살피지 못한 것이니, 하물며 멀리 바다 밖에 있는 나라에서 거대한 파도 사이를 뚫고 신기루의 섬을 건너가 도량형이 통일되어 같기를 바라려고 함은 어찌 배를 육지에서 몰고 감과 다르겠는가?

고려라는 나라는 중화에서 3천 리가 떨어져 있는데, 제왕이 지극하게 다스렸을 때부터 역시 지배를 받는 지역에 들어 있기는 하였으나, 도량권형을 나눠주어서 그곳이 같아지기를 도와준 자가 있었다고는 듣지 못하였다. 우리 송(宋)이 나라를 세우자 덕이 천지와 같아, 하늘 끝까지 그리고 땅의 극한까지 신첩(臣妾)이 아닌 것이 없다. 그런 까닭으로 해서 고려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안으로 향해 번병(藩屛)이 되어 중국에서 모범을 취하기를 원했고, 도량권형을 가지고 그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인자한 은덕이 옆으로 흘러가 제왕이 회유하지 못한 데를 회유해낸 것이고, 무력의 뜻[武誼]이 멀리에까지 미쳐 왕자(王者)가 제압하지 못한 데를 제압해낸 것이다. 앞서 사절의 인원들이 군명을 받들고 그 속에가서는 연향(燕饗)때 그들의 선물을 주는 예를 받았었다. 뱃사람들이 시장에 가서 그들이 교역하는 물건을 거래하면서, 그들의 길이의 법식과 용량의 수와 중량의 등급을 잠자코 알아보고 그것들을 중국의 법과 비교해 보았더니, 조그마한 차이도 없어서 더욱 그들의 정성이 지극함을 찬양하게 되었다.

대저 이목이 미치는 데에 근신하는 자는 혹 이목이 미치지 않는 데를 게을리하는 경우가 있고, 형벌의 위엄이 제재하는 데를 두려워하는 자는 혹 형벌의 위엄이 제재하지 않는 데를 깔보는 경우가 있다. 이제 고려는 노정이 우원하고 국도(國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이미 이목이 미칠 수 있는 데가 아닌데도 주상께서 위대한 덕을 지니시어 관대한 은전으로 이적(夷狄)을 대우하셨고, 또 까다롭게 형벌의 위엄을 숭상하여서 제재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도량권형을 이토록 근엄하게 지켜 쓸 수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마음으로부터 기뻐하여 성심으로 복종한 것이지 억지로 해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서경」(書經)에 이렇게 말하지 아니하였는가? ‘저울과 말[斛]이 조화를 이루었으니, 왕의 부고에는 그것들이 있다.’ 대저 저울과 말의 조화를 이룬 것은 왕이 부고의 소유뿐인즉, 개인의 입장에서는 감히 고쳐 만들지 못하고 다만 우리 법도에만 같게 만듦이 또한 의당한 일이다.

송 고 상서형부 원외랑 서공 행장 宋故尙書刑部員外郞徐公行狀



증조부 상(爽)은 황임(皇任 황제가 임명한 것을 말함) 비서성 교서랑(秘書省校書郞)339) 증금자광록대부(贈金紫光祿大夫)340)이다. 증조모 섭씨(葉氏)는 증건안군태부인(贈建安君太夫人)이다. 조부 사회(師回)는 황임(皇任) 조의대부(朝議大夫) 증광록대부(贈光綠大夫)341)이다. 조모 임씨(林氏)는 증함녕군태부인(贈咸寧郡太夫人)이다. 부 굉중은 황임 조청대부(朝請大夫) 직비각(直秘閣) 증소보(贈小保)이다.342) 모 갈씨(葛氏)는 증위국부인(贈衛國夫人)이다. 공의 이름은 긍(兢), 자는 명숙(明叔), 성은 서씨(徐氏)다. 웃대는 건주(建州)의 구녕현 사람이었으나 광록(光祿 조부 사회를 말함) 때부터 비로소 화주(和州)의 역양(歷陽)으로 옮겨와 살았다.343) 비각(秘閣 부친 굉중을 말한 것)이 악주(鄂州)의 법조(法曹)344)가 되어 밤에 이런 꿈을 꾸었다. 황관(黃冠 도사가 쓰는 관)의 도사(道士)와 함께 큰 못 가운데서 놀았는데 품 속을 뒤져 작은 대쪽을 꺼내서 비각에게 주고 가버렸는데, 그것을 읽어 보니 정 영위(丁令威)가 화표(華表)에 남긴 말이었다.345) 그 후 5일째 되던 날 큰 물이 성곽을 넘어와 관청은 다 다른 데로 피해갔다. 비각은 집안을 황학루(黃鶴樓)346) 위에 거처시켰었는데, 그날 밤에 바로 공을 낳았다. 공이 난 지 수개 월 만에 글자를 보고는 기쁜 얼굴을 짓고 날뛰었다.

10여 세가 되어서는 뛰어나게 슬기롭기가 유례가 없었고, 과거 공부를 할 때는 문사의 근원이 넓어 식자들이 그에게 촉망을 걸었다. 나이 열 여덟 살 때 태학(太學)에 들어가 재예를 겨뤄 자주 높은 등급을 차지하였으나, 과거[大比]에 응시하여서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정화(政和 송 휘종의 연호) 갑오년(고려 예종 9, 1114)에 부임(父任)으로 장사랑(將仕郞)347)에 음보(陰補)되어통주사(通州司)348)의 형조사(刑曹事)에 제수되었다. 상서랑(尙書郞)349) 서 인이 제명(帝命)을 받들고 동남구로(東南九路)350)에 있는 광산에서 보화(寶貨)의 제련을 조처하게 되자 공을 간판공사(幹辦公事)351)로 임명하였다. 정강(靜江)352)에 황 인(黃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대리국(大理國 징강본에는 대례국(大禮國))353)을 끌어들여 입공(入貢)시켰다. 조정에서는 이 일을 의심하여 인에게 조명을 내려 사실을 규명케 하였다. 인(麟)은 궁중의 귀인과 연통하여 권세가 오령(五嶺)354)을 휩쓸어 정강수(靜江帥)355) 주 동(周穜)356)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은 그 일을 공에게 위촉하였는데 공은 ‘그 일은 정녕 처리하기 쉽습니다’ 하고 그 부곡(部曲)들을 앞에다 불러놓고 나라를 세운 연월과 산천과 풍속 등을 잡다하게 물어보자 다 벙어리처럼 대답하지 못해 사기한 죄상이 마침내 드러났다. 옹구(雍丘)357)에 현령이 비어 조명(朝命)으로 공에게 그 직무를 대리하게 하였다. 이때 그 읍에 형제가 서로 소송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오래 계류되어 결정을 보지 못했었다. 공이 와서는 지키는 자에게 일러 자리 하나를 마련케 하고 그로 하여금 같이 기거하며 식사는 반드시 그릇을 함께 쓰게 하였다. 10일이 지나자 감동하여 깨닫고 서로 잡고 울며 말하기를 ‘영군(令君 현령의 일을 대행하던 서 긍을 가리켜서 한 말)께서 우리를 가르치신 것이 지극합니다. 스스로 새사람이 되기를 원하거니와 어찌 감히 곡직을 따지겠읍니까?’ 하였다. 그후로부터는 다시 우애로 칭송되었고 민간에서는 그 감화를 받아 옥송(獄訟)이 줄어들어 멎어버렸다. 경서부(京西部)의 사자(使者)358)가 영행(佞倖 말재간으로 아첨하여 총행을 받음을 말함)으로 추천되어 나왔는데, 그는 도망병 2백 명을 시켜 읍에다 집을 짓고 멋대로 포악한 도둑질을 하게 하여 온 읍이 크게 소란해졌다. 공이 그들을 체포하여 치죄하니, 사자는 상총359)이 어명을 얻었다고 칭탁하고 읍에 당도해서 그 도당을 풀어놓아 북을 울리며 외치고 옥으로 들어가 포박된 자들을 깡그리 풀어 내놓았다. 공이 말하기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법률을 지키고 천자를 받듦은 동등하다. 그런 입장에서 일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나는 임금을 기만하는 것이다. 임금을 기만해서 남에게 아첨하는 일은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을 물샐틈없이 막고 다시 흉악한 도당을 잡아 소속을 알아보고 법을 적용시켜 한 사람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전임되어 정주(鄭州)의 원무현사(原武縣事)360)를 대리하게 되어 단신 수레로 부임하였다. 그 때 탄사(炭事)를 관리하던 자가 자기 아우의 높은 지위와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공(功)을 세운다고 멋대로 잔인하게 굴며 강물 가에 창고를 세우고 배를 건조하였는데, 그 위세가 군읍에 떨쳐 칼을 쓰고 포박을 당한 자들이 길에 가득찼다. 그리고 공에게 회장(回狀)을 보내어 늦게 온 자들과 영을 무시한 자를 치죄하라고 하였다. 공이 개탄하며, “현령이 못나서 백성을 보호하지 못하는구나. 이러한 극단적인 형벌에까지 이르는 것을 어찌 참겠는가?” 라고 말하고는 그 해독을 써서 조정에 알리고, 무고한 사람 대신 자신이 죄를 받기를 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해독은 멎어버리고 말았다. 또 전임 현령이 탐욕 잔학하여 백성들을 괴롭힌 것을 공이 철저하게 위무하여 주자, 읍인들은 궁궐에 가서 공이 정식 현령에 취임하게 되기를 호소하고, 다투어 거마를 마련하여 공의 가족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비각(서긍의 부친을 말함)이 원치 않아 상국(相國)에게 간절하게 말하고서야 가라앉았다. 연국(燕國)의 정공(鄭公)이 동렬자(同列者)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현령들로 하여금 다 서 긍같이 하게 한다면 천하에 어찌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제주사사(濟州司士)361)에 조임(調任)되었으나 육조의 부서가 결정되기 전에 모친상을 당하게 되었다. 상기가 끝나자 원풍고감(元豊庫監)362)이 되었다.

선화(宣和) 6년(고려 인종 1, 1124)에 고려가 입공하여 임금에게 청해 글씨 잘 쓰는 자를 얻어 그 나라로 데리고 가기를 원했다. 이어 급사중 노 윤적(路允迪) 을 보내어 보빙(報聘 다른 나라의 빙문(聘問)에 답례함)하게 하였는데, 곧 공을 국신소(國信所)의 제할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삼았다. 그 일로 해서 「고려도경」 40권을 저술하니 조명을 내려 어찰(御札)을 주고 그것을 바치게 하였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대(漢代)의 장 건(張騫)이 월지(月氏)에 사신으로 나갔다가 13년 후에 돌아왔는데도 겨우 그가 경과했던 나라의 지형과 산물을 말할 수 있었을 따름이었다. 나는 고려에서 월여 동안 있었는데, 관사에는 파수병이 있었고 나간 것은 겨우 5∼6 차례였다. 거마를 달리는 동안과 연석에서 수작하는 경우 이목이 미쳐간 것은 13년이라는 오랜 세월 같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그 건국과 입정(立政)의 근본과 풍속과 사물의 상황을 그리고 기록하여 거의 빠진 것이 없다. 감히 널리 앎을 자랑하고 경박함을 가다듬어서 황상의 총명을 흐리게 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모아서 일을 시키신 은혜의 반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휘종 황제께서 그 책을 보고 대단히 기버하시어 편전에서 소대(召對)케 하시고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363)을 내리시어 지대종정승사(知大宗正丞事)364)로 발탁하시고, 장서학(掌書學)365)을 겸임케 하였다가 상서형부원외랑(尙書刑部員外郞)366)으로 옮기시었다. 당시의 재상이 책면(冊免)되자 친혐(親嫌)으로 연좌되어 유배되어 지주(池州)의 영풍(永豊)367) 감옥에 감금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했다. 상기가 끝나자 연강제치사(沿江制置司)368)의 참모관(參謀官)을 제수하였으나 봉사(奉祠)369)를 신청하여 남경(南京)의 홍경궁(鴻慶宮)370)을 주관하였다. 그때부터 대주(臺州)의 숭도관(崇道觀)371)을 세 차례나 맡아보았다.

공은 천품이 명철 예리하여 일을 당하면 곧 깨달아 번잡을 없애고 극심한 것을 해결하는 지혜가 담소하는 사이에 나와, 강노(强弩)를 당기고 자물쇠를 잠그고 하는 것을 남이 헤아려 알 수가 없었다. 그의 효성과 우애는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적이 회전(淮甸 회수(淮水) 지방을 말함)을 범하자 집을 신주(信州)의 익양372)으로 옮기고는 선영(先塋)이 막혀 버린 일로 해서 슬픈 마음을 가누지 못했다. 그런데 광록(조부 사회(師回)를 말함)은 요주(饒州)373)에서 보좌관을 지낸 일이 있고 비각(아버지를 말함)은 또 강동(江東 양자강 하류의 남안 지방)의 조운사(漕運使)374)를 지낸 일이 있어 그 분들의 사당이 덕흥현(德興縣)375)의 청운사(淸雲寺)에 있으므로, 공은 매년 사철마다 사당에 가서 제례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모형(同母兄)인 지금의 부문각 직학사(敷文閣直學士)376) 임(林)377)이 당시의 재상을 거스르기에 이르러 남쪽으로 포양(蒲陽)378)에 좌천되자 공은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달려가 찾아보고 오래도록 차마 떠나가지 못하며 ‘슬픔이 형제에게 있는데 어느 하가에 처자를 돌보겠는가?’ 말하였다.

공은 남다르게 뛰어나고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여 재물 보기를 분토(糞土) 같이 여기고 남의 어려움을 돌봐 주기를 자신을 생각하는 것보다 서둘렀다. 하남소윤(河南少尹)379) 허 방(許滂)이 공과 함께 팽려호(강서성의 파양호)를 건널 제, 방의 배가 뒤집혀 공이 그를 건져 주고 그의 집안 식구 20인을 전부 살리고 또 물건을 후하게 주었다. 방이 후에 사례품을 보냈으나 공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친지 송 포(宋浦)가 사건으로 대리시(大理寺)380)에 회부되어 46만 전(錢)을 물어내게 되어 시장에서 구걸을 했다. 공의 지폐 가운데 다권(茶券)381)이 있어 마침 그 액수가 되므로 그것을 내주어서 포는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무릇 소원한 사람이거나 친척이거나 먼 사이건 가까운 사이건, 고독 곤궁하면 공은 그들을 우환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고, 그들을 혼인과 장례 때에도 도와 주었는데, 그렇게 한 일은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공은 장구(章句 경전의 주석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학문은 하찮게 여기고 고금의 전적을 섭렵하여 그 내용을 탐색하고 요점을 정리하여서, 아래로 불가, 노자, 손무(孫武), 오 기(吳起), 노편(盧扁 노(盧) 땅의 명의 편작(扁鵲))의 책들과, 산경(山經), 지지(地誌), 방언(方言),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관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귀인들 앞에서 손뼉을 치며 사물을 논하면 언제나 온 좌석의 주의를 모았다. 문장이 뛰어나고 민첩하여 당장에 붓을 대어 술술 써내어 그칠 줄을 몰랐다. 더우기 시가를 잘했다. 서초(西楚)의 패왕묘(覇王廟)382)에 들렀다가 28자(칠언절구(七言絶句)를 말함)를 남겼는데 중서사인(中書舍人)383) 한 구(韓駒)384)가 그것을 보고 ‘뒤에 오는 사람은 거의 붓을 댈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림은 신품(神品)의 경지에 들어갔는데 산수와 인물 두 가지가 다 뛰어났다. 한번은 장난으로 평원도(平遠圖)385)를 그리고 그 곁에 장구(長句 칠언고체시(七言古體詩)를 말함)를 써서 구(駒)에게 주었다. 구는 언제나 그것을 꺼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명숙(明叔 서 긍의 자)은 시로 그림을 그리는 것인가, 그림으로 시를 짓는 것인가?’ 라고 말하고는 하였다. 비록 붓을 적셔 먹을 뿌려 잠깐 사이에 그림을 완성하기는 하지마는 흰 비단을 펼쳐 놓고도 혹 한 해가 지나도록 돌아보지 않는 수도 있었다. 세상 사람이 수장하고 있는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의 손에서 나왔거나 혹은 공이 지시하여 가르쳐 주었거나 한 것들이라 한다.

공이 일에 대처하는 데는 일의 대소를 막론하고 다 묘하게 생각한 이치가 들어 있어, 다른 사람들은 지혜와 사려를 다해도 따라가지 못하였다. 음률을 잘 알고 또 휘파람을 잘 불었는데, 가끔 사람을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그것에 맞춰 휘파람을 불면 소리가 맑아 피리 소리를 누르고 울려났다. 그리하여 먼지가 날고 장막이 움직이고 하여 거의 난새와 봉새가 떼지어 모여있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면 두 말까지 가도 난잡해지지 않았다. 객과 대작하게 되면 반드시 가뜩 따라서 먼저 마셔버린다. 술이 한창 어울리면 담론이 신나게 벌어지고, 혹 시문과 서화로 즐기기도 하고, 퉁소를 불고 큰 거문고를 타기도 하여, 그 초연함은 그가 신선들 속의 사람인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온 천하의 선비들이 공의 이름을 듣고는 다들 교분을 트기를 원했다. 미천한 사나이가 집으로 찾아와도 그를 맞는 데는 역시 꼭 예를 다하고,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작건 크건 그대로 응해 주었다. 그리고 남에게 선한 점이 있으면 자기가 지닌 듯이 기뻐하였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가까이하고 아끼고 하였는데, 만맥(蠻貊)의 사이라 하여도 그것이 잘 통하였다.

농지 수십 묘(畝)를 가꾸고 그것을 세연지(洗硯池)라 명명하였는데, 그윽한 승경이 강남에 소문이 났다. 자신거사(自信居士)라 자호하였고, 봉사(奉祀)한 것이 20년이었는데, 한가히 물러나 있는 것을 편안하게 여겨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만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분묘를 그리워하여 마지않았다. 소흥(紹興 송 고종 연호) 신미년(고려 의종 5, 1151)에 역양(歷陽)으로 돌아가 분황(焚黃 증직(贈職)이 된 때에 관고(官誥)의 부본(副本)을 쓴 누른 종이를 무덤 앞에서 불사르는 일)하여 돌아갈 것을 고하고 오주(吳州 소주(蘇州)의 별칭)에 다다라 병이 나 졸(卒)하였다. 아, 공의 포부가 이러하였는데, 장년 때부터 나라를 떠나(조정에서 밀려나 지방에서 지낸 것을 말함) 낙백하여 그 재능을 써볼 데가 없었으니, 비록 공은 그런 처지를 여유 있게 대처하였으나 뜻 있는 인사로 시대를 위해 개탄하고 애석해하는 이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한다.

공은 원우(元祐 송 철종의 연호) 6년(고려 선종 8, 1091) 5월 21일에 출생하여 소흥 23년(의종 7 1153)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3세다. 관직을 역임하여 조산대부(朝散大夫 문산신괸 제16계)에 이르러 삼품복(三品服)을 하사받았다. 봉의인(封宜人) 진씨(陳氏)와 결혼하였고 진씨는 공보다 5년 뒤져서 졸했다. 자녀는, 아들이 3인으로 집(集)은 일찍 졸했고, 藏(宋本에는 箴)은 우승직랑(右承直郞 문산신관 제32계) 강남서로전운사 간판공사(江南西路轉運司幹辦公事)인데, 서 긍의 종형 조봉랑(朝奉郞 문산신관 제22계) 철(喆)의 뒤를 이었으며 공보다 13년 뒤져서 졸했고, 성은 우적공랑(右迪功郞 문산신관 제37계) 감회서강동총령소 호부대군고(監淮西江東總領所戶部大軍庫)다. 딸 2인 중, 맏이는 우봉의랑(右奉議郞 문산신관 제24계) 지임강군 신감현사(知臨江郡新監縣事) 차 사문(次師文)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우선교랑(右宣敎郞 문산신관 제26계) 지복주회안현사(知福州懷安縣事) 이 간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6인으로, 원로(元老)는 우수직랑(右修職郞 문산신관 제36계)이고, 동로(同老), 명로(明老), 양로(洋老), 적(籍)은 장사랑(將仕郞)이고 그 중의 하나는 이름을 짓지 않았다.

손녀는 8인으로, 맏이는 좌적공랑(左迪功郞) 악주주학 교수(鄂州州學敎授) 유 벽(劉壁)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진사 주 진경(朱縉卿)에게 출가하였고, 다음은 장사랑(將仕郞) 유모(兪某)에게 출가하였고, 나머지는 출가하지 않았다. 여러 유자손들이 공의 영구를 받들고 와 이해 윤 12월 초1일(을유)에 익양 옥정향(玉亭鄕) 구봉(龜峰)의 좋은 자리에 장사지냈다.

공의 집안에는 전부터 기성(騎省 송초의 전・예(篆隸)의 대가 서 현(徐鉉). 서 긍의 조상)의 유물이 많았다. 백부 증광록대부(贈光祿大夫) 시중(時中)이 벼루 한 개를 진보(珍寶)로 여겼는데, 그 벼루 곁에 ‘정신’(鼎臣 삼공 등 지위 높은 대신을 말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 번은 여러 아이들에게 말하기를 ‘세업’(世業 서법(書法)을 말한 것임)을 계승해 낸 자가 나오면 이것을 주어야겠다’ 하였다. 공은 그 때 갓 성년이 되었었으나 분별할 줄 알아서 전주에 전념하여 백부는 그 벼루를 들어 공에게 주었다. 공이 태어날 적에 ‘천세래귀’(千歲來歸 주7) 참조)의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친지들은 공을 기성의 후신이라 말했던 것이다. 처음 소보(小保 서 긍의 부친 굉종을 말함)가 공에게 명해 함녕(咸寧 서 긍의 조모 임씨를 말함)의 묘비를 쓰게 하였는데 써내지 못해 부처에게 기도를 드리고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가져다 쓰는 연습을 하였다. 그 뒤 실제로 비문의 글자를 쓸 때에 우연히 바람을 받은 깃발이 날려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어 그로 인해 체세(體勢)를 깨달아 그 때부터 천하의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휘종(徽宗)께서는 더욱 좋아하시어 한번은 금중에 불러들여 ‘진덕수업’(進德修業) 네 글자를 쓰게 하였는데 그 너비가 1장(丈) 가량이나 되었다. ‘업’(業)자에 가서 공은 특히 기묘한 변화를 일으켰다. 운필이 가운데 획을 밋밋하게 그어 나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길고 세차며 단정하고 곧게 떨어지는 것이 둥근 돌이 천길을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임금께서는 놀라 기이해하며 잘한다고 칭찬하셨고 좌우 사람들은 다 경탄하는 소리를 발하였다. 그의 운필이 정숙(精熟)하여 돌고 꺾고 하는 것은 밤중에 등이나 촛불을 가리운다 하여도 호리의 차오도 없다. 진서(眞書 즉 해서)와 행서(行書)는 굳세며 아름다움이 뛰어나 저(褚 수량(遂良)), 설(薛 직(稷)), 안(顔 진경(眞卿)), 유(柳 공권(公權)) 등 여러 체를 겸비하였다. 만년에는 초서를 좋아하였고, 더욱 회소(懷素 당대 장사(長沙)의 초서에 능했던 불승)에 육박했다. 천하에서 글씨를 말하는 자는 공을 종주로 삼는데, 소학가(小學家 문자학자를 말함)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사(李斯 진 시황 때의 승상)가 소전(小篆)으로 변개시킨 뒤부터는 진(秦), 한(漢) 사이에는 계승할 수 있는 자가 없어, 비갈(碑碣)에 전해지는 것은 필법에 취할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편방(偏傍) 역시 또 어긋나고 잘못되어 있다. 위(魏),진(晉)에서부터 당(唐)까지는 오직 이 양빙(李陽氷)386)이 독보로 불린다. 하지만, 근래 이 학문이 중간에 끊어졌기 때문에 이 양빙이 이 명성을 빼앗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원 차산(元次山 결(結). 당대의 시인)의 생질 이 강(李康)이 오계387)와 어대(御臺)의 두 비명(碑銘)을 썼는데 제법 진(秦)의 서법을 터득하여 양빙에 비하면 천양지판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그리 나타나지 않았으니 일에는 본래 행운과 불행이 있는 것인가? 기성 형제(서 현(徐鉉)과 서 개(徐皆))는 이 사를 조술하였고 소학(小學 문자학을 말함)의 심오함은 숙중(叔重 후한의 허신(許愼))과 맞먹을 수 있다. 그리고 공이 또 계승하였으니 그 연원이 심원하다.

사(斯)의 유적은 역산(嶧山 산동성 추현(鄒縣) 동남에 있음)에서 타버려 당대(唐代)에는 이미 남아 있지 않았다. 구양 문충공(歐陽文忠公 구양 수(歐陽修))이 천하의 금석 각명(金石刻銘)은 퍽 철저하게 모았으나 태산(泰山)의 조문(詔文)은 겨우 수십자가 있을 뿐이었다.388) 대관(大觀 송 휘종의 연호) 연간에 하간(河間 하북성 한간현) 사람 유기389)가 산마루에 올라가 각석(刻石 명문에 세긴 돌)을 두루 살펴서 비로소 그 전체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정강(靖康)의 난을 겪은 지 겨우 10여 년이라, 그 탁본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다. 배우는 사람들이 사(斯)를 본받는다고 그릇되게 말하지만 과연 그것들이 많이 보이기야 하였겠는가? 공이 그 각명(刻銘)을 얻어 보물로 간직하고 깊이 완미하여 사의 법을 깡그리 터득한 데다가 또 삼대(三代)의 박종정이(鎛鐘鼎彛)390) 등의 기물을 고찰하여 관지(款識 금석에 새긴 글자)를 풀이하는 데 모두 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의 대전(大篆)으로 말하면 필력이 기고(奇古)하여 그 침착한 곳은 고대에 새긴 진적(眞蹟)과 다름이 없어 붓과 종이로 이루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대전(大篆)에 조정을 가해서 변개하여 소전(小篆)으로 들어가 편방(偏旁)을 갈라내어 문자를 만든 본의와 부합하여 종횡으로 치닫게 되어 그 활용이 무궁하여졌다. 아마 옛날의 명필은 진실로 손가락 꼽아 셀 수 있다. 저승에서 되살아나지 않으니 후에 또 그들을 계승할 자가 나올 것인가? 공이 작고한 지는 지금 15년이 되었다. 장사 때 급해서 묘지명을 만들지 못했다. 나는 대대로 역양(歷陽)에 살았고 또 공의 가문과는 인척 관계가 있어, 공의 행적의 대략을 두서없이 적어서 진정한 작자가 정리해 써서 돌에 새겨 무덤 위에 놓게 되기를 기다린다. 삼가 행장을 쓴다.

건도(乾道) 3년 4월 초 10일

좌적공랑(左迪功郞) 영국부선성현주부주관학사(寧國府宣城縣主簿主管學事)

장 효백(張孝佰)이 행장을 씀



발 跋



중부(仲父)는 책을 어부(御府)에 바치고 그 부본(副本)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 정강(靖康) 정미년(고려 인종 5, 1127) 봄에 동네 사람 서 주빈(徐周賓)이 그것을 빌어다 보았는데 반환되지 않은 채 적이 들어와 책의 소재를 모르게되었다.391) 그후 10년이 되어 아버님께서 강서(江西)의 조운사(漕運使)로 홍주(洪州 강서성 남창현(江西省南昌縣))에 주재하고 계셨는데 중부가 와서 찾아뵈었다. 그 때 어떤 이가 말하기를 ‘군아(郡衙)에 북방의 의원[北醫] 상관생(上官生)이 있는데 그가 확실히 이 책을 얻었다’ 하기에 급히 찾아가 보았더니, 그 중에 성한 것은 단지 해도(海道) 2권392)뿐이었다. 중부가 한번은 나에게, ‘세상에 전해지는 내 책은 왕왕 그림은 없어지고 경문이 남아 있는데, 내가 후에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나는 그 일을 해내지 못했다’고 한적이 있었다.

아아, 관 뚜껑을 덮으면 일은 끝나버리는 것이다. 우선 이것을 판각하여 징강(운남성 징강현(운남성 징강현(雲南省徵江縣))의 군재(郡齋)에 남겨 두거니와 뒤에 오는 사람들은 그래도 참고할 데가 있게 될 것이다.

건도(乾道) 3년(1167) 하지일(夏至日)

좌조봉랑(左朝奉郞)393) 권발견강음군군주관학사(權發遣江陰郡軍主管學事) 서 천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