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군기자들과 난징전 참전 일본군의 증언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의 이마이 마사다케(今井正剛)기자는, 1956년 12월호 '문예춘추'에, '난징 성내의 대량 학살'을 썼다. 1937년 12월 15일 석양이 붉게 물들 무렵, 아사히신문 지국 부근의 대방항(大方港, 다팡강)에서 본 대학살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국(支局) 근처 석양의 언덕이었다. 4,5백명의 중국인 남자들이 공터를 채우며 주저앉고 있다. 공터의 한편은 무너져 내린 검은 벽돌담이다. 그 담을 향해 6명씩의 중국인이 선다. 2,30보 떨어진 뒤에서, 일본병이 소총으로 일제히 사격을 하고, 넘어지는 중국인들에 달려들어, 등을 총검으로 찌르고 그치는 것이 일사불란하게 보인다. 윽~ 하는 단말마의 신음 소리가 석양 언덕 가득 퍼져 나간다. 다음, 또6명의 차례다. 계속해서 사살되어 등을 이리저리 찔리는 것을, 공터에 앉아 있는 4,5백명의 무리가, 넋이 빠진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다. 부모, 남편, 형제나 자식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며, 공포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음이 틀림없다. 비명이나 통곡도 들릴 법 하다. 그러나 나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팡~ 하는 총성과, 악~하는 울부짖음만이 귀에 가득 퍼져, 비명과 함께 비스듬하게 찌르는 칼이 석양의 줄무늬가 되어 벽돌담을 진홍에 물들이고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
이마이 기자는 양쯔강의 부두, 샤관(下關)에서도 중국인 시체의 산을 보았고, 그 시체들을 양쯔강에 투기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또, 그 작업에 동원된 중국인 노동자까지 기관총으로 학살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곧 있으면 아침이 온다. 부두의 한쪽은 검게 타 겹겹으로 쌓여진 시체의 산이다. 그 사이를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의 그림자가 50명에서 100명 정도가 보인다. 시체를 물가까지 끌고 가 강에 던지고 있었다. 낮은 신음 소리와 흐르는 피, 경련 하는 수족.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무언극과 같은 정적이 나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다. 달밤에 보이는 진흙탕의 부두 한쪽이 달빛이 반사되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피다. 이윽고, 작업을 끝낸 '노동자들'이 강 언덕에 일렬로 나란히 섰다. 두두둑하는 기관총 소리....뒤집혀 마치 춤추듯이 그 중국인 노동자들은 강 속으로 떨어졌다. 마지막이다. 하류 가까이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던 배 위에서, 물속을 겨냥해 기관총탄이 불을 뿜었다.."약2만명 정도 된다."고 한 장교가 말했다. 몇 만 명이나 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중 몇 퍼센트만이 패잔병이었고, 대부분은 남경시민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
샤관에서의 학살을 목격한 종군 특파원 유키오 오마타는 이 광경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첫 번째 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줄의 포로들은 자신의 목이 잘리기 전에 앞줄에 서 있던 포로들의 목이 잘린 몸통을 강물에 던져 넣어야 했다. 살육은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되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2,000명밖에 처리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이런 방식의 처형에 싫증이 난 일본군은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운 후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타 타 타! 방아쇠가 당겨졌다. 포로들은 강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강 건너편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마이니치 (每日) 신문 기자 스즈키 지로우(鈴木二郎) 의 목격담
스즈키 지로우(鈴木二郎) 기자는 12월 13일의 기사에서 일본군이 중국인 포로들을 중산문 근처 벽 위에 세워두고 장총에 꽂은 총검으로 찔러 떨어뜨리는 것을 목격했다고 전한다.
"포로들이 한 사람씩 성벽에서 떨어졌다. 피가 온 사방으로 튀었다. 차가운 공기로 포로들의 머리카락은 곤두섰고, 이들의 손과 발은 두려움으로 심하게 떨렸다. 나는 그저 거기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자료 출처;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 |
모리야마 요시오(守山義雄)기자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도 허위 보도를 할 수밖에 없었던 모리야마 요시오(守山義雄)기자는, 그 고뇌를 당시 , 친구에게 "시노하라(篠原)군, 일본군의 이런 잔학무도한 행위를 눈앞에 보면서, 황군이라든지 성전으로 포장해 허위보도를 해야하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절망해 차라리 펜을 꺾고 일본으로 돌아갈까 며칠을 고민했던 적이 있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 후 20년 후에 모리야마 기자가 친구에게 말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난징대학살의 증명'에 실렸다.
"일본군이 난징에 입성 했을 때, 성내에 남아 있던 사람은 비전투원뿐이었다. 그것도 대 부분이 노인과 여자와 아이였다. 일본군은 그들을 한 곳에 모아 두고, 성벽 위에서 경 기관총과 수류탄을 난사하여 모두 죽였다. 그 수는 3만여 명에 달해, 차례차례 겹쳐져 있는 시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가 강물처럼 도로에 넘쳐 신고 있던 가죽장화를 덮을 정 도였다고 한다." |
난징 학살, 현장의 심정 --전 종군 병사의 일기
<아사히신문 1984년 8월 5일자 기사의 일부분>표제='난징 학살, 현장의 심정-미야자키
에서 발견된, 전 종군 병사의 일기'(23연대 상등병, 당시 나이 23세)
소화 12년(1937년) 12월 15일
"오늘 도피할 곳을 잃은 중국인 약 2천 명이 백기를 올리고 투항해 오는 한 부대와 만났다. 노인도 섞여 있으며, 복장은 천차만별이고... 각각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여 버린 것 같다. 최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죄도 없는 시나인을 잡아와서는, 산 채로 매장을 하거나 불 속에 쳐 넣거나, 나무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하는 등, 중국군도 무색하게 하는 참살을 즐기
는 것이 유행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소화 12년 12월 21일
"오늘도 죄 없는 사람(중국인 일까?)을 쓰러뜨리거나 때리거나 하여 반죽음으로 만들어 호
안에 넣고 머리에 불을 붙여 살인놀이를 한다. 무료함을 달래주기에 모두 재미있어 하지만,
그것이 일본 내에서의 일이라면 굉장한 사건이 될 것이다. 마치 개나 고양이를 죽이는 것과도 같다...."
난징에의 길(南京への道)
'아사히 저널'에 실린 연재 기사 1984년 9월 1984년 73살이 되는 난징전 당시 모로즈미(は両角)부대 하사관이었던 후쿠시마(福島)현 출신의 다나카 사부로(田中三郎,가명)씨가 '아사히 신문'의 혼다 가츠이치(本多勝一)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1984년 9월의 연재 기사 '난징으로의 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포로의 큰 떼는 장강의 강가에 모아졌다. 버드나무가 점점으로 서 있는 강변이다.…일본군에 둘러싸여 많은 기관총도 총구를 향하고 있다. 이 때 다나카(田中)씨가 있던 위치는, 구릉 곁의 일본군의 열중에서 가장 동쪽에 가까운 곳이었다. …주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일제 사격 명령이 나온 것은 그 때였다. 반원 모양으로 중기관총, 경기관총, 소총이 열을 지어 포로들에게 한꺼번에 집중 사격하는 소리와 무리로부터 터져 나오는 단발마의 절규로, 장강의 강가는 고성으로 절규하는 지옥, 아비 지옥으로변하였다.…사격은 1시간 정도 계속되었다. 서 있던 사람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살아서 도망치는 사람이 있으면, 포로 전원 학살의 사실이 외부로 유출되어 국제 문제 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였다. 다나카씨 대대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완전 처리'를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만 명 단위의 사람의 생사를 확인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법이 불에 태우는 것이었다. …시체산의 여기저기에 불을 붙였다. 자세히 살펴보자, 시체 중에는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살그머니 손을 움직여 불을 비벼 끄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그런 움직임이 있으면, 즉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불타오르는 불속을, 총검으로 찌르는 작업이 밤을 새워 끝없이 계속되었다. …이 '작전'에서 몰살 현장을 도망쳐 살아남은 포로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 습니다"라고 타나카씨는 말한다. |
사진기자인 가와노 히로키
'난징 진격식'전 나는 50구에서 100구 정도의 시체가 양쯔강에 떠다니는 것을 보았다. 이들
은 전투에서 죽은 것일까, 포로로 잡힌 후 살해된 것일까? 아니면 살육당한 시민들일까?
나는 난징 근교에 있던 연못을 기억했다. 그 연못은 마치 피바다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굉장한 색이었다. 나에게 컬러 필름만 있었더라면...
그 장면은 정말 굉장한 사진감이었을 텐데!
한 일본 병사의 진중기(陣中記)
12월 16일 맑음
산처럼 쌓여있는 사체를 밟고 올라서니 돌격하는 기분도 들고, 귀신이 든 듯 용기가 나, 있는 힘껏 찌르니 윽~ 하는 시나병의 신음소리. 노인도 있고, 아이도 있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날카로운 칼로 목을 베어 보았다.
우리 일본군은 모두 무사하고 건강했다. 돌아오니 8시가 되었고 상당히 피곤했다.
아사히( 朝日) 신문 1984년 6월 23일자에 실린 나카야마 로우(中山老)씨의 증언(난징전 당시 나카야마씨는 25살의 나이로 육군전차부대 상등병이었다.)
"나는 정비병이었습니다. 전차를 수리하면서 지내는 동안 줄 곧, 겹겹이 쌓여진 시체중 에 전투원이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여성이나 노인이 대다수 섞여 있는 것을 보고 이 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일은 난징 입성 이틀 전, 교외의 우화대(雨花台, 위화타이)에서 본 광경입니다. 백기를 내걸고 투항해 오는 중국인을 참호 위에 앉게 하고, 일본군이 차례 차례로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있었습니다. 한번 찔려 완전히 죽지 않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은 군화로 밀쳐 땅으로 떨어 뜨렸습 니다. 노인과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는 판단력을 상실한 살육이 계속되었습니다. 4시간 남짓 이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광경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나라를 위해, 천황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전쟁이라고 생 각했습니다만, 그 날부터 전쟁이 싫어졌습니다." |
난징전 참전 한 일본군인의 그림
난징전에 참전했던 한 일본 군인이 자신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그림집이다.
여기서 특이한 사항은 강간에 대한 기록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진 자료출처: MBC 스페셜 '난징대학살'에서)
시라이 시게루(白井茂), 영화 '난징'의 제작자. 학살 현장은 두 번 보았다. 한 번은 사쿠(달님)가 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멀리 떨어 져 있는 곳에서, 총살이 자행되고 있었다. 몇 명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양쯔강이 아닌 다른 강으로 기억하는데, 기관총을 쏘는 것도 보았다. 나 같으면 저항했을 텐데 하고 생 각했지만, 그들은 차례대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강에 뛰어들어 힘들게 헤엄쳐 가는 사람도 있었다. 2백명 정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장소는 기억나지 않는다.
후지이 신이치(藤井慎一), 영화 '난징'의 녹음 기사. 작은 강 옆의 문안에서 포로로 보이는 사람을 공격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시라이씨와 함께였다. 몇 구의 시체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 중에 살아 있는 군인이 있었는데, "빨리 쏴라!” 라고 말하며 가슴을 가리키고는, "장개석 만세”를 불러, 몹시 놀랐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 이외에도, 은행 뒤에서 백 명 이상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다. 가슴 근처를 총검으로 찌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살의 소문을 들어 그런 일이 있었구나 생각했으나, 직접 본 것은 이 때 뿐이었다.
오쿠누미야 사다케(奥宮正武) 차를 서쪽으로 몰아서 난징 성 밖으로 나와, 양자강기슭에 있는 샤관(下關)에 가기로 했 다. 그리고 거기서, 뜻하지 않게, 육군부대가 많은 중국인을 글자그대로 '학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강기슭의 처형장이라고 기억하는데, 들어가자, 각각 삼십 몇 명을 태운 트럭이 차례차례 로 성안으로부터 나와 이곳에 도착하고 있었다. 군인들이 그들과 처형장의 한 구석으로 동행하여, 손을 뒤로 묶고, 강둑으로 끌어내어 흐름에 따른 장소에 일렬로 줄을 세운 후, 일본도나 총검으로 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시체를 강위에 투기하고 있었다. 그래도 죽지 않은 사람은, 총으로 급소를 쏘았다. 안에는, 얕은 여울이나 강위의 장애물로 인해 떠내려가지 않는 것이 있었으므로, 그 주위는 피바다가 되고 있었다. 거기서, 부근에 있던 육군 장교 한 명에게 "왜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라고 물었더니, 그는, "며칠 전, 한 명의 용감한 중국군이 우리 부대 소대장급의 장교 10여 명이 자고 있는 침 실에 몰래 침입해, 모두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부대 장교들의 부하들이 보복을 하고, 또, 그 숙소 부근의 주민에게 본보기를 보일 목적으로 처형하고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 했다. 이틀 후 순회를 할 때도, 샤관에서 동일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렇다 치더라도, 다수의 중국인을 큰 혼란 없이, 하관까지 데려 오는 것에 의문이 들어, 처형장 입구를 경계하고 있던 한 명의 하사관에게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난징 성내에서 적편부를 시키고 있는 중국인에게, "배고픈 사람은 손을 들어라" 라고 말하고, 그들을 식사 장소에 데려 가는 것처럼 하여 트럭에 실어 온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 또 묻기를, "일본도나 총검으로 처형하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라고 물으니, "상관으로부터 탄약 절약을 위해, 그렇게 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라는 것이었다. 그러한 처형이, 난징 점령 후 2주 이상이나 지나서도, 연일, 무리 없이 잘 치러지고 있는것이다. 이로써 헤아려 본다면, 그것이 전장 특유의 일시적 흥분 상태에서의 적을 대하는행동이라고는 아무래도 내게는 생각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통제를 취할 수 있는 행위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 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우리 육군 부대의 난징 점령 이후, 그 수는 확실하지 않지만, 막대한 수의 학살이 행해졌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
'난징전 닫혀진 기억을 더듬어 - 옛 병사 102명의 증언' 마쓰오카 다마키(松岡 環) 저
밑의 글은 월간 '일본의 진로' 2003년 10월호에 실린 글로 JCJ상을 수상한 마쓰오카 다마
키씨의 수상소감입니다.
마쓰오카 다마키는 초등학교 교사로 난징전에 참가한 일본군 102인의 증언을 정리해 2002
년 8월 '난징전 닫혀진 기억을 더듬어 - 옛 병사 102명의 증언'을 간행하였다.
우리 난징대학살 60주년 전국 연합회의 오사카 멤버는, 난징대학살에 관련된 전 병사를 방문하고 기록을 하여, 한권의 책에 정리했습니다. 작년 8월 '난징전 닫혀진 기억을 더듬어'(사회 평론사)를 간행하자, 침략전쟁을 부정하는 세력으로부터 잡지나 인터넷상에서 굉장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또한, 정당하게 평가해 주시는 연구자나 평론가 여러분에 게도, 근거가 없는 집요한 반론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가해 병사 102인의 증언집 '난징전 닫혀진 기억을 더듬어'는, 많은 사람들의 성원에 힘입어 이 분야에서는 드물게 1만권 가깝게 증판 되었습니다. 금년 2003년 8월, 이 책 「난징전」의 편저자인 나는, 일본 져널리스트 회의로부터 우수한 져널리스트에 주어진다고 하는 JCJ상을 수상했습니다. 동시에 8월, 난징대학살의 피해 증언집 「난징전·잘라 번창할 수 있었던 수난자의 영혼」(사회 평론사) 120인의 피해자의 증언을 검증하여 한권의 책을 냈습니다. 저는 취재, 기록하여 검증하고 정리하는 일 등에 대해 너무도 무지했습니다. 단지 희생자들을 떠올리며 이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조금이라도 일본인의 역사 인식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과 주위사람들의 협력이 나에 자극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꼭 이런 책을 읽으셔서 난징의 진실을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되돌아보면, 난징전에 참가한 전 병사의 증언을 기록하기 시작한지 5년 이상이 지났습니다. 양자강에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기관총을 마구 퍼붓는 모습을 자세하게 가르쳐 준 86세의 보병 제 16 사단의 전 병사.수차례의 방문에 겨우 무거운 입을 열어, 중요한 증언을 해 준 9 사단의 전 병사. 우리는 난징대학살의 역사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증언의 청취를 계속했고, 때로는 난징대학살 당시의 일기나 사진, 편지등의 귀중한 자료를 당사자로부터 많이 제공받았습니다. 한편 이웃나라 중국에서는, 일본군의 살인, 폭행, 강간, 방화등 모든 잔혹한 피해를 입은 생존자나 육친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역사를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계속 들려주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후손들은, "자신의 부모나 조부모의 세대가 받은 잔혹한 역사를 절대 반복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우리는 역사 발굴의 일단을 담당하고, 남경시에 거주하는 약2백명의 피해자택을 한 채 한 채 방문하여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이 숫자는 방대한 난징대학살 피해자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난징대학살은 과거의 역사상의 하나의 포인트가 결코 아닙니다. 일본군의 조직적인 살인이나 폭행에 직접 참가한 관계자들은 난징에서의 행동이나 자신들이 목격한 것을 입을 열지 않은 채로, 지금 인생의 임종을 맞이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 사회는 반세기 이상에 걸쳐, 지난 전쟁을 뒤돌아보는 일도 없었고, 침략의 역사사실을 '사실'로서 사회나 교육계에서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최근 몇 년 일본의 사회상황은 우익화의 속도를 빨리 하고 있습니다. 2001년 9월 미국에서의 테러에 대한 보복 전쟁에서는, 일본은 미국에 협력하고, 자위대를 전지에 파병했습니다. 신속하게 법률을 다시 만들어서까지 미국에 추종한 일본은, 마침내 전쟁을 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지금 전쟁 정당화의 여론을 구축하는 일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두 번 다시 침략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로운 사회를 염원하며, 모은 자료와 난징대학살 기념관의 풍부한 자료를 기초로, 우리의 손으로 패널을 창작했습니다. '난징·닫혀진 기억'전람회는 지금, 일본 각지에서 개최하고 있습니다. |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가한 일본군들은 대개 난징에서의 일에는 함구를 하고 있으며,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은 과거의 침략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일본내 그릇된 역사인식과 맞물려 있다.
마쓰오카씨가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아 이 증언들을 모았는지는 짐작이 된다. 일본의 역사학자들까지도 외면, 왜곡하고 있는 난징의 진실을 파헤쳐 다시는 그와 같은 만행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소수 양심있는 일본인들 중의 한사람임에 틀림없다. 마쓰오카씨의 용기와 진실에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이 책의 증언은 난징대학살에 직접 참전한 일본군의 체험이 고스란히 기록된 것으로, 너무도 분명한 난징대학살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의 우익측에서는 마쓰오카 다마키씨를 좌익여교사로 비난하며, 온갖 말트집을 잡으며, 이 책에 실린 증언은 모두 거짓이라고 몰아세우고 있다.
그들이 그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1. |
증언 중에 11세 일본군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
2. |
증언 중에 2시간을 연속 사격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을 문제 삼는다. 총열이 과열이 되어, 2시간 연속사격은 불가능하므로 이 증언은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2시간 연속 사격을 한다고 해서, 2시간 내내 총을 쏜다는 것은 아니다. 중간 중간에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2시간 동안 사격을 할 때도, 우리는 2시간 연속 사격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한마디로 말꼬리를 잡아 이 책의 진실에 흠집을 내 보겠다는 심산이다. |
3. |
증언 속의 제 3함대 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제 11전대는 난징전에 참가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남경사건' 48인의 증언에 보면 제 3함대는 분명 존재했으며, 제 11전대가 난징전에 참가했음은 전투상세보도에도 등장하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
4. |
시체에 석유를 뿌려 태웠다는 증언에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당시 일본에는 '석유 한방울이 피 한방울'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석유가 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난징에는 텍사고(Texaco)석유 저장소가 있었고, 스탠다드 석유도 진출해 비교적 석유를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또한, 욘 라베가 히틀러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에 관한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단지 부상당하여 정신을 잃은 사람도 있었습니다만, 시체와 같이 가솔린을 뿌려, 아직 살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불을 붙였습니다. |
5. |
이 이외에도, 사소한 말실수나 확인되지 않은 난징전 당시의 상황근거로, 이 책의 진실성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으며, 마쓰오카 다마키씨를 비롯해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일본내 양심적 인사들을 공격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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