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조선왕조실록 숙종임금, 고구려보다 배(倍)가 큰 조선이라함...

한부울 2007. 2. 3. 15:09

 

조선왕조실록

肅宗 38卷, 29年( 1703 癸未 / 청 강희(康熙) 42年) 12月 7日 戊寅

옥당관을 불러 《동국통감》의 안시성 싸움 등을 강하다

 


○戊寅/召對玉堂官, 講《東國通鑑》, 至高麗安市城事, 上歎曰:


옥당관(玉堂官)을 소대(召對)하여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하였는데, 고구려(高句麗) 안시성(安市城)의 일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한탄하기를,


“高麗, 一小國耳, 以善守城名, 能抗隋、唐百萬之師。 我國地方, 比高麗倍之, 山川險阻, 古今一也, 而丙子之亂, 虜兵如入無人之地, 竟有下城之辱。 言念及此, 不覺痛心。”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성(城)을 잘 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수(隋)·당(唐)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倍)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古今)이 같은데도, 병자년12215) 의 난리에 오랑캐 병졸이 마치 무인지경(無人之境)같이 밀려 들어와, 마침내 하성(下城)하는 치욕을 당하였다. 이 일을 생각하면 어느 새 너무 마음이 아프다.”


上又曰: “故相臣李景奭三田碑文, 予未曾一見, 頃者李履成疏出後, 使人取都監謄本見之, 其文極意贊揚。 雖不得已而應命, 何乃褒美至此耶? 措語未安處甚多矣。”

하고, 또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이경석(李景奭)의 삼전도(三田渡) 비문(碑文)은 내가 일찍이 본 일이 없었는데, 얼마 전에 이하성(李廈成)의 상소가 나온 뒤 사람을 시켜 도감(都監)의 등본(謄本)을 가져오게 하여 보았더니, 그 글의 내용이 극도로 찬양한 것이었다. 비록 하는 수 없는 상황에서 명령에 응하여 쓴 글이라지만, 어찌 이렇게 드날리고 미화(美化)할 수 있는가? 문장을 만든 말 중에 온당하지 못한 곳이 매우 많았다.”

하였다. 


侍讀官李晩成曰: “其時事勢蒼黃, 承命製進, 固所不已, 而其所爲言, 全無斟量, 安得免淸議之誅責乎? 故相臣張維, 一時應製, 而以鄭伯牽羊爲喩, 其微意, 可見矣。”


시독관(侍讀官) 이만성(李晩成)이 아뢰기를,

“그 당시 사세(事勢)가 황급(惶急)했으므로 명을 받들어 글을 지어 바치는 일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거기 쓰인 말은 참작한 점이 전연 없었으니, 청의(淸議)의 나무람을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고(故) 상신(相臣) 장유(張維)도 동시에 명을 받고 제술(製述)하였는데, 우리의 사정을 정백 견양(鄭伯牽羊)12216) 에 비유하였으니, 여기에서 그 숨은 뜻을 엿볼 수 있습니다.”


上曰: “予亦非以應製爲不可也。 製述之體, 不可一槪論, 遣辭之間, 豈無斟量底道理, 而頌美至此? 宋時烈之譏斥, 固也。 厦成輩, 因此憾恨, 醜辱先正, 罔有紀極, 良可駭惋。 見碑文而後, 方知譏斥之不爲過矣。”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명에 응하여 지은 것을 잘못이라 하는 것이 아니다. 제술(製述)하는 방법을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을 배치하는 사이에 어찌 참작하는 도리가 없어서 칭송하고 찬미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인가? 송시열(宋時烈)의 비난이 마땅하였다. 이하성(李廈成)의 무리가 이 때문에 원한을 품고 선정(先正)을 추욕(醜辱)한 것이 끝이 없었으니, 참으로 몹시 한탄스러운 일이다. 비문(碑文)을 보고 난 뒤에야 바야흐로 그 비난이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다.”하였다.


晩成曰: “厦成誣辱儒賢, 實係斯文之變。 自上洞燭而痛斥之, 世道幸甚。” 上臨筵感慨, 明示是非, 聞者莫不激昻


이만성(李晩成)이 아뢰기를,

“이하성이 유현(儒賢)을 함부로 욕한 것은 실로 사문(斯文)의 변고였는데, 성상께서 밝게 살피시어 통렬히 배척하시니, 이 세도(世道)의 큰 다행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경연(經筵)에 임하여 개탄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가려보이니, 듣는 이가 감격하지 않음이 없었다.


[註 12215]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12216]정백 견양(鄭伯牽羊) : 《춘추(春秋)》 노선공(魯宣公) 12년 봄에 초왕(楚王)이 정(鄭)나라를 침범하여 그 수도를 함락시키자, 정백(鄭伯)이 옷을 벗어 웃몸을 드러낸 채 양을 끌고 가서 맞이하였음. 이는 곧 신복(臣僕)이 되는 것을 뜻한다고 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