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부

명성황후시해 "일본내각 개입 확인" 이토히로부미가 지휘가능?

한부울 2006. 8. 16. 11:21
 

명성황후 시해' 일본내각 개입 확인

[세계일보] 2006년 08월 15일(화) 오전 08:08


 

 


1895년 10월8일 새벽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과 관련, 당시 일본 내각 핵심 인물들이 만행을 기획하고 책임자를 조선에 파견했던 과정이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1846∼1926)의 수기를 통해 일부 드러났다. 미우라는 시해사건을 모의하고 현장을 지휘했던 인물이다. 근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해온 도쿄가쿠게이 대학의 이수경 교수(역사사회학)는 14일 미우라의 고향인 야마구치현 하기시립도서관에 대여금지 상태로 보관 중인 ‘관수장군(미우라) 호쾌록(豪快錄·1918)’과 ‘관수장군 영웅론(1920)’, ‘관수장군 종횡담(1924)’을 비롯해 이미 일부 내용이 알려진 ‘관수장군 회고록(1925)’ 등의 사본을 모두 입수해 명성황후 시해 관련 내용을 발췌해 공개했다. 미우라는 300여쪽 분량의 인쇄체로 발행된 B5용지 크기의 호쾌록 등에서 자신의 조선 파견 과정과 명성황후 시해를 주도했던 의도 등을 기록했다. 이 교수는 미우라의 수기들이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미우라는 자신이 주범이 아니라 꼭두각시처럼 행동한 ‘종범’이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대목을 수기 곳곳에 남겨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고 이 교수는 덧붙였다.


‘관수장군 회고록’ 중 조선사건 서문에 따르면 1895년 7월쯤 군부 실세로 고향 선배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 육군대장이 당시 육군 중장으로 퇴역한 뒤 추밀원 고문이던 미우라에게 시급히 조선으로 갈 것을 종용하자, 미우라는 “나는 외교에 대해 일절 모르니 조선을 합방 또는 독립시켜야 하는지 러일 공동의 지배에 둬야 하는지부터 우선 밝혀 달라”고 요구했다. 야마가타는 재차 “당신이 밝히라고 한 것은 중대하고 심사숙고해야 할 사안이며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결정될 것이니 하루빨리 도한(渡韓)하라”고 했고, 미우라는 “정부의 무방침대로 도한한 이상 내가 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고 썼다.


미우라는 또 명성황후 시해 이듬해인 1896년 1월 형식적으로 수감됐던 히로시마 형무소에서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된 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1841∼1909)든지 이노우에 가오루(정상형·1836∼1915·전 주한공사)든지 야마가타가 나를 (조선에) 가도록 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나를 고생해 불쌍한 놈으로 여기고 있다”고 술회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미우라가 사건 몇 달이 지나 스스로 꼭두각시로 농락당했다는 점을 자각한 상태로, 미우라를 직접 추천하고 사건을 모의한 이노우에나 당시 내각 총리였던 이토 히로부미가 면회를 하지 않았던 것을 불평하는 대목”이라고 말했다.



미우라는 호쾌록에서 석방 직후 이토 히로부미가 축하사절로 보낸 다나카 궁내대신(궁내청장관)에게 “이토씨가 그렇게 친절하다면 관계 대신 한 두 명을 보내 내가 한 짓(시해사건)을 듣는 게 어때?”라면서 불편한 속내를 내비치기도 했다.


1895년 9월1일 갑자기 주한 공사로 부임한 미우라는 또 시해사건의 선봉을 맡은 아다치 겐조(安達謙藏) 한성신보 사장 등과 만나 명성황후 시해를 의미하는 ‘여우사냥’이란 말을 처음 꺼내는 등 구체적으로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아다치 겐조 자서전)미우라의 수기와 관계 자료 등을 종합한 이 교수는 “당시 일본 정권 실세들이 구체적인 이유도 없이 갑작스레 주한공사였던 이노우에 가오루 대신 미우라를 파견한 것은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우라와 이노우에는 같은 고향으로, 하기시내 학교였던 메이린칸(明倫館) 선후배 사이이며 이노우에는 누구보다도 미우라의 과격한 성격을 잘 알기에 야마카타에게 적극 추천했다는 것이다. 그는 “야마가타는 이노우에에게 사건을 맡을 것을 제의했지만 이노우에는 직접 유혈사태에 관여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에 행동적이고 영웅심이 강한 미우라를 추천한 것으로 이해된다.”며 “군부 실세들은 대륙 침략의 방해꾼인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무력을 동원해 친일정부 수립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는 인물은 미우라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면서 “미우라 고로의 관계문서 등의 행간 뜻을 짚어보면 명성황후를 살해했던 증거들이 곳곳에 스며 있다”고 풀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