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한부울 2019. 4. 7.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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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글쓴이:한부울


1).한글 보급에 대한 의문
2).1920년 5월의 칼럼
3).조선이 4.5등분된 이유
4).조선인(朝鮮人)은 대의(大義)에 서야 한다.
5).마무리
    

1).한글 보급에 대한 의문


우리는 동인조선(朝鮮), 서인조선(西朝鮮), 남인조선(朝鮮), 북인조선(朝鮮) 4대조선(四大朝鮮)에 대해선 몰라도 파당에 의한 사림파(士林派)제거의 무오사화(戊午士禍:1498), 폐비윤씨(廢妃尹氏)사건의 갑자사화(甲子士禍:1504), 혁신파 조광조(趙光祖)몰락의 기묘사화(己卯士禍:1519), 대윤(大尹),소윤(小尹)의 을사사화(乙巳士禍:1545) 4대 사화(四大士禍)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바로 파당, 분당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이전투구 정치형태라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한반도 사관을 신봉하던 친일역사학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가르친 결과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진다면 이것은 한반도 역사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조작된 역사로써 소위 인물 중심으로 편집된 집약된 사건들의 이야기란 사실이다.

실제로 옛 조선에서 벌어진 붕당사건들은 정책문제에서 기인한 것이다.

체제내 각자 인종별 민당, 지역별 민당, 종교별 민당, 문화적 민당등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추구하는 정책과 이해관계에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 할지라도 또한 각자 처해진 입지나 정치적인 환경에 따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면을 포괄적, 다원적, 다문화적으로 종교, 인종, 민족 간 첨예한 갈등의 분출이라 볼 때 여기서 발생되는 상황은 한반도 역사론 그 자체를 수용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임을 우리는 잘 알 수 있겠다는 이야기다.

한반도 역사는 단일민족, 단일문화, 단일사상등이 지배하기 때문에 다양성을 포괄하여 수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며 결코 실행하기 극히 어려운 이야기며 이와같은 상황전개에 아마도 이해하기가 매우 힘들 수밖에 없다.

 

아래 게시하는 글은 켑처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동아일보(1920.05.20) 정언생(鼎言生)선생의 칼럼기사로써 이것은 한글을 알고 있는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류층인 지식인(知識人)들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써 관어(官語)인 한문(漢文)을 기본으로 사용하면서 한글은 일부 대명사, 접속사, 조사 및 동사만에 사용하고 한문한글 혼용의 사건 신문기사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현재 우리가 당시 신문들을 그대로 읽어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한문 옆에 한글 음()을 붙인 것은 알기쉽게 하기 위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에서 첨가한 것이지만 의미가 붙어있지 않다.

당시 상황을 보면 총독부에 의해 1920년부터 시작된 한글보급운동차원에서 신문발행에 초점을 두고 이것에 의한 보급효과를 노렸다는 것도 알 수가 있고 한문이 주가 된 바탕에는 당시 신문에 관여한 인물들이 한문에 능통함은 물론이겠지만 신문을 받아 읽는 독자 역시 한문에 능통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특별히 한문 의미를 첨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본 블로그 글 "2.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4) 코리언학살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0 "에서 지적했듯이 1950년 한국 전쟁당시 한국 군인들의 문맹률이 70% 정도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지 않는 충격적인 사실이다.

그것과 함께 놀라운 사실이 또 발견되는데 사실상 신문발행이 허용되던 1920년 이때부터 총독부에 의해 한글보급운동이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빠른 속도로 야학(夜學)이 확산되었다고 하였으며 이듬해인 1921년에 마침내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창립되었다는 사실이다.

1920년부터 한문과 별도로 한글보급운동이 전 조선백성을 대상으로 전개된 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한문보급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체제내 지식자들에게 기본으로 사용되는 문자가 한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놀랍다는 것은 이미 그 이전에 한반도에 들락거렸던 선교사를 포함한 유명 서양인들 중에 한글을 능통하게 사용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 수 있었던 사실이다.

도대체 한글은 한반도 한국인을 위한 글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동서양 가릴 것 없이 포괄적으로 사용하던 글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혹 한글은 한반도 한국인이 아닌 어딘가에 존재했던 조선인을 위한 한글이었을 가능성을 상당히 비중있게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동아일보의 한문과 병용한 한글도 한반도인을 위한 한글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를 위한 글임을 알 수 있는 것은 한글도 못 읽는데 한문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 때 조사를 보면 당시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의 문맹율(文盲率)은 거의 90%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때 조선백성은 혹 한반도 인들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역사장소에 존재하던 조선인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 조차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물론 한반도가 아닌 곳에 조선인들의 구성원은 동서양 가릴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1920년부터 한글 보급 운동을 했지만 9년이 지난 후에도 별 무 소득이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당시 한반도 한국사회에서 한글 토대가 제로상태였다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까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세종대왕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반포한 1443년에 한글을 창제하신 것이다.

그로부터 50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한글 보급에서 실제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이 한글을 창제했지만 그래서 사용하게 만들었지만 일반백성들은 이래저래 힘들었다는 이야기로 일부계층에서만 사용되던 한문과 진배 없었다는 말이 된다.

한문은 서양인들이 말하길 조선사회에서 고급언어로 문서와 관공서, 서체에 쓰이는 글이라고 말했다.

한반도에 한정된 역사조건이라면 한글 보급이 그렇게도 힘들었을까?

아니다.

한반도가 아니라 세계전역을 가름할 지배체제였기 때문에 보급이 힘들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조선전체란 범위적인 문제와 오늘날 한반도로 한정하여 볼 수밖에 없는 시각의 간격이 보인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때 조선에 와서 청일전쟁 직전에 중국으로 돌아간 이른바 조선통이라고 하던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을 지낸 원세개(袁世凱,1859-1916)는 중국 사람들이 어려운 한자 때문에 문맹률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알고는 조선의 한글을 중국인에게 가르쳐서 글자를 깨우치게 하자고 주장했다가 기존 세력들의 반대로 불발되었다는 말이 있다.

기존세력들은 왜 일반 중국인들에게 한글 보급을 꺼려 했을까?

특수계층들이 장악하고 전유물처럼 인식되던 고급정보확보가 일반화되면서 일반백성과 공유함을 염려했을 것이고 한글 보급으로 급격히 대중화될 수 있는 여론을 의식해 두려워했을 수도 있다.

청조(淸朝)말엽에 조선과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90%에 달했기 때문에 '한자불멸중국필망(漢字不滅中國必亡)'의 구호를 외치며 문학가 노신(魯迅,1881-1936)등 지식인들이 한자 폐지를 주창하고 나섰다는 이야기도 이와 같은 형태에서 이해할 수가 있다.

이처럼 밝혀지는 내용들을 종합할 때 당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시사신문 같은 민족신문들은 거의가 지식인을 독자로 한 신문이며 동일한 조건 속에서 보도기사를 실고 신문발행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이 당시의 대의란 의미도 전체백성을 대상으로 할 수없다는 점과 사회전반적으로 상당히 제약된 상태에서 민의가 해석되고 여론이 조성되었다는 사실도 우리가 인식해야 할 이야기다.

즉 글을 모르는 90%의 국민은 풍문이나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으로만 듣고 정세와 세상물정을 알 뿐임을 인지할 수가 있다.

 

아래 켑처(capture)하여 게시한 동아일보 컬럼 기사(記事) 원본(原本)을 보아서 알겠지만 현재 우리들도 이러한 옛 한문(漢文)위주의 기사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지극히 난해한 것이므로 글쓴이는 이를 읽기 편하게 현재 우리말과 비슷하게 편집하였고 내용을 일부 보충하여 작성한 글을 토대로 당시 칼럼작가가 지상에서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인지 진의를 그렇게라도 풀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과 대신 그 본질을 글쓴이가 훼손치 않으려 노력했다는 점도 감안해주었으면 하는 바다.



2).1920년 5월의 칼럼

 

자 그럼 본격적으로 동아일보 보도에 몰입해 들어가보자.

 

과연이천만인(果然二千萬人)

정언생(鼎言生)

1920.05.20. 동아일보

1면 사회기사(칼럼/논단)

 

제목에서 보면 과연 이천만인(二千萬人)이 맞는가 하는 의문형을 다는 문제에서 수치적인 문제라 보면 간단하게 생각되던 논제이다.

즉 칼럼작가는 조선(朝鮮)인구가 이천만인(二千萬人)이라는 수치에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러한 인구가 역사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고 더 나아가 왜 그러한 인구수치가 생성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옛 정치적 환경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적으로 탐구해야 할 문제와 이를 대의적(大義的)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논제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칼럼발행 시기가 19205월이니 총독부가 문화통치(文化統治)의 일환으로 조선민간신문으로 지목되었던 동아일보 및 시사신문, 조선일보 등 3 개 민간신문들의 발행을 허가 한 시점이다.

총독부의 이러한 조치는 순화(純化)정책이라기 보다 오히려 검열을 강화하고, 기사삭제를 조건화하면서, 최후 정간, 폐간 등의 조치를 이용하여 친일언론화(親日言論化)를 염두에 두면서 최종적으로 기사 내용까지 조작하여 언론을 지배하겠다는 기획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실제로 식민통치 말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많은 민족 신문이 친일화 되었다고 알려진다.

상지대학교 미디어영상광고학부 박용규 교수의 주장을 보면 1919년 극에 달했던 조선인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총독부는 1920년에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고, 그런 신문을 통해 민심을 파악하거나 여론을 조작하려고 했다며 총독부는 분열과 경쟁을 유발하기에 적절한 신문의 수()까지 따져보고 전체적인 구도를 짜서 신문발행을 허가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양한 조선인집단이나 개인들은 정치적 목적이나 경제적 의도 등을 갖고 신문발행 허가를 신청했고 이에 총독부는 적극적 협력세력 중에 2, 소극적 저항세력 중에 1개의 신문발행을 허가했다고 말한다.

협력세력 중에는 동화주의(同化主義)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던 국민협회(國民協會)에게 <시사신문(時事新聞)>을 허가했고, 내선융화(内鮮融和)를 표방하며 사교활동을 했던 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에게 <조선일보(朝鮮日報)>를 허가했으며 저항세력 중에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도 타협할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인 세력에게 <동아일보(東亞日報)>의 발행을 허가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 그 중에서는 동아일보가 민족신문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럴때 동아일보의 칼럼이니 민족적 자존에 대한 논제가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칼럼 작자인 정언생(鼎言生)의 약력에 대해선 나타나는 것이 없고 이분에 대해서 현재까지 알 려지는 것이 없다.


3).조선이 4.5등분된 이유

 

본문으로 들어 가보자.

 

하루 종일 통곡(痛哭)을 하여도 어떤 사람이 죽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과 같이 나는 이미 조선(朝鮮)에 태어난 지가 30년 세월이 지난 금일인데 조선인(朝鮮人)이 과연 몇 천 몇 만(幾千幾萬)인 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로다.

내가 듣기론 일정(一定)한 토지(土地)와 일정(一定)한 민중(民衆)과 일정(一定)한 주권자(主權者)는 국가성립(國家成立)의 요소(要素)라 말하였도다.

이러한 즉 하나의 국가가 국가로써 성립된 이상은 그러한 영토(領土)가 몇 평(幾坪)이며 그러한 국민이 몇 명(幾人)이고 주권자(主權者)가 누구임을 옳게 알아야 함에도 국민()은 나라의 근본(邦本)이라는 국가(國家)의 성질상(性質上) 그 국민(其民)의 수()를 알지 못하고서 어찌 치국(治國)의 바른 길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즉 조선인(朝鮮人)은 참으로 몇 천 몇 만(幾千幾萬)명이라 하느냐란 물음에 묵은 책장(冊章)에 고민할 필요가 없고 해가 바뀐(日移事去) 금일(今日)에 있어 과거정치(過去政治)를 격렬하게 논(痛論)할 필요가 없겠으나 여하튼 무책임이 극심(極甚)하였고 또한 불성의(不誠意)함이 너무 지나쳤다.

조선(朝鮮)은 역사가 시작(有史)된지가 반만년(半萬年)이라 하나 이와 같은 반만년 역사(半萬年史)를 다스리거나 말거나(或治或亂)의 주체(主體)가 되었든지 간에 국민(國民)의 통계(統計)를 알기가 힘든다는 것이 사실이다.

묻노라, 조선인(朝鮮人)이 과연 이천만인(二千萬人)인가.

문헌비고(文献備考)에 기재된 호구(戶口)를 살피면 정종조(正宗朝)때에서 태종조(太宗朝)때까지의 각대통계(各代統計)는 보통(凡一), 531,365()호로 7,356,785()명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때가 옛날일 뿐만아니라 그것의 조사하는 과정상 정확(正確)함을 믿기 어려운 것이다.

 

작가가 고려 말기의 문신 이방과(芳果) 정종(定宗,1357-1419,재위:1398-1400)에서 고려문신이었던 이방원(李芳遠)이 등극한 태종(太宗,1367-1422,재위:1400-1418)때까지 20년간에 문헌비고(文献備考)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현재 전해지는 것은 18세기,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東国文献備考)를 바탕으로 한 증보문헌비고(増補文献備考)는 조선이 생을 다했을 무렵인 1908년에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이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이 전체적으로 조작되었을 확률이 대단히 높은 사서(史書)라 말할 수 있다.

그러니 1920년에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 한 인구통계역시 실체인 거대한 세계 조선(朝鮮)4.5등분으로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인구가 분명히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어지는 다음 글을 또 보자.

 

근래(近來)에 서양인(西洋人) "옷팔트"()의 조사는 조선인 인구를 15,000,000이상(以上), 16,000,000이라하며 "부아레"()16,000,000이상(以上), 18,000,000 이라하고 일본인(日本人)17,000,000 이라하며 우리는 20,000,000 동포(同胞)라 한다.

조선인(朝鮮人)은 통계수자가 이와같이 제각기 달라(甲左乙右) 정확(正確)한 것을 상세히 알기가 힘든 것이나 이를 장점을 제거하여 단점을 보완하는 계산안(拆長補短的計算眼)으로써미루어 짐작할 때 15,000,000 이상(以上), 20,000,000 이하(以下)의 인구임을 확실하게 여긴다 하리오.

아아! 우리는 20,000,000 명 미만(未滿)이라 함을 한()말며 우리는 20,000,000에 부족(不足)함을 원()치 말지니라.

정신생활(精神生活)이 종합되면 그것의 수천만인(數千萬人)이 한사람이 되고 정신생활이 이산되면 한사람이 천만인(千萬人)이 된다.

이러한 즉 나는 이천만인(二千萬人)이 못 됨을 한()하는 바가 아니고 진정 그것이 한사람이 못됨을 한()하는 바며 나는 이천만인(二千萬人)에 부족(不足)됨을 원하는 바가 아니고 진정 한사람이 못됨을 원()하는 바이다.

 

사실상 그는 1920년경에 서양인인류학자나 통계학자들이 주장하는 조선인구수에서 결국 15,000,000명에서 20,000,000명 사이가 될 것이란 짐작이 가능하다고 했다.

1920년 기준으로 인구를 보면 러시아 101,408,000. 독일 62,126,000. 영국 42,388,400. 프랑스 39,000,000. 미국 106,021,600. 네덜란드 6,754,000. 스페인 21,303,200. 일본 55,963,100.으로 나타난다.

일본만 하더라도 55,000,000명이다.

그러나 그는 다음 글에서 왜, 이렇게 작지도 크다고도 할 수 없는 인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에 대한 원인과 그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슬프다, 시대의 사정은 지금과 옛날(今古)이 멀리 떨어져 있고 인사(人事)의 잘못됨은 심성(心性)이 각각 다르니 지금 가타부타(可耶否耶)를 새롭게 논할 필요는 없기는 하나 역사가 시작된 이래(有史以來)로 모든 일에서 인륜의 대도(大道)를 갑자기 깨부수고(忽然打破) 동서남북을 말하고(曰東曰西曰南曰北), 청남탁남(淸南濁南)과 소북대북(小北大北)으로 우리가 파별을 만들고 당()을 이루게 하여 서로 밀치락달치락(互相軋轢)이 장차 삼백년(三百年)의 긴 세월을 소비 할 때부터 조선인(朝鮮人)이 비록 소수라 하나 20,000,000에 근접하여 지극히 소수가 아니며 조선인이 비록 미약하다 하나 20,000,000에 가까운 힘이 또한 강하지 않다고 할 수 없거늘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었고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었고 남인(南人)은 남인(南人)으로 북인(北人)은 북인(北人)으로 각각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朝鮮)은 동인조선(東人朝鮮)과 서인조선(西人朝鮮)이 되었으며 남인조선(南人朝鮮)과 북인조선(北人朝鮮)이 되었다.

이로써 조선 땅(朝鮮地)의 면적(面積)을 측량(計之)하고 조선인(朝鮮人)의 수()를 셈(算之)할 새 조선 땅(朝鮮地)은 몇 백 평(幾百坪)에 불과 하였고 조선인(朝鮮人)은 몇 십 인(幾十人)에 불과했다.

이와같이 같은 조상, 같은 자손(同祖同孫)으로써 스스로 이족(異族)을 만들었으며 같은 국가, 같은 국민(同國同民)으로써 스스로 다른 민족(異民)을 만들었기 때문에 땅이 가난하고 사람이 가난(地貧人貧)함을 자초한 것이며

 

본 블로그 글 “2009년 조선시대 붕당(朋黨)은 당쟁으로 보아야 하는가? http://blog.daum.net/han0114/17049081 ”에서 처음으로 당쟁(黨爭)을 대륙사관점으로 살펴보았다.

당쟁을 한반도 사관으로 읽을 때 우리에게 노예같은 식민지인의 신세가 어쩜 마땅했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 블로그 글에서 말하길 붕당(朋黨)정치는 다원적(多元的), 다문화적(多文化的)인 국가일체주의(國家一體主義)에서 인종(人種)과 지역(地域), 극단적 종교(宗敎)갈등으로부터 국론을 조정하면서 나라 통합에 지장이 없도록 유효적절하게 타협(妥協)하고 봉합(縫合)하며 조절기능으로 존재한 균일적(均一的)조정 장치제도로 충분한 정치적 가치를 다 하였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였고 다문화적 갈등과 분쟁을 최소화하고 국론통합(國論統合)을 이어가는 삼한(三韓)전통적 정치제도형태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삼한역사문화는 어쨌거나 하나의 체제아래 통제되고 지배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난맥상에 빠질 때 극한적 갈등과 불만에 의한 대립을 낳고 상방 소통이 거의 불가능하게 하여 급기야 서양역사가 말하는 크고 작은 전투, 전쟁 즉 내란(內亂)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양역사는 소소하던 아니던 그것을 전부 전투(戰鬪:battle), 전쟁(戰爭:War)이라 말하고 있지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충돌(衝突)이고, 반란(叛亂)이며, 내란(內亂)이다.

왜냐하면 체제아래서 발생하는 것이기에 내부통제적 해결법이 강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했기 때문에 분당(分黨)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4대 사화(四大士禍)는 조직간 충돌이거나 거의 내란(內亂)이라고 보아야 맞다.

2012년 본 블로그 글 프랑스 왕실 상징 플뢰르 드 리스(Fleur-de-lys)에서 본 대조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527 "에서 조선(朝鮮)이란 거대한 정치사회에서 붕당(朋黨)이라고 하는 서인(西人), 남인(南人), 노론(老論), 소론(少論), 그리고 시파(時派), 벽파(辟派)가 서로 충돌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였고 특히 시파, 벽파가 생성된 1801년 이후부터 프랑스도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이러한 사태가 공교롭게도 정치, 사회, 문화전체가 조선(朝鮮)과 일치한다고 했다. 프랑스는 종교적 갈등이 매우 심했던 나라인 것처럼 신교(新敎:프로테스탄트)가 바탕이 된 부르주아혁명(Bourgeois revolution)을 막지 못해 권력이 부르몽왕가(House of Bourbon)에서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로 이동되는 과정도 결국 거대한 부르주아세력인 안동김씨 세도정치로 이전되는 상황과 일치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또한 본 블로그 글 버지니아(Virginia)와 경주(동경) 2015 http://blog.daum.net/han0114/17050755에서 조선말기에 나라가 흔들린 이유 중에 하나가 세도정치라는 문제로 들어가면 먼저 정조(正祖,1752-1800,재위:1776-1800)를 옹립한 일루미나티(光明會:Bavarian Illuminati)와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바이에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국영(洪國榮:1748-1781)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정조(正祖)때 풍산홍씨를 업은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득세가 있어 그것은 결국 부르조아 세력들이 준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작가는 이와같이 같은 조상, 같은 자손(同祖同孫)으로써 스스로 다른 민족(異族)을 만들었으며 같은 국가, 같은 국민(同國同民)임에도 우리스스로 다른 국민(異民)을 만들었기 때문에 땅이 가난하고 사람이 가난(地貧人貧)함을 자초한 것이라 하였다.

이로써 조선 땅(朝鮮地)의 면적(面積)을 측량(計之)하고 조선인(朝鮮人)의 수()를 셈(算之)할 새 조선 땅(朝鮮地)은 지금처럼 몇 백 평(幾百坪)에 불과 하였고 조선인(朝鮮人) 또한 몇 십 인(幾十人)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不啻) 임금(君父)관산에 뜬 달 보며 통곡하노라/압록강 바람에 마음 쓰리다/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痛哭關山月/傷心鴨水風/朝臣今日後/寧腹各西東)”라 한 선조어작(宣祖御作)의 분노가 치밀어 원통하고 슬프기 한이 없는(慷慨無量) ()의 어제(御製)가 되게 한 자(), 우리가 아니고 누구()이며 이와 같게 한 시()를 백성(臣民)이 된 자()로써 그리고 이글을 비통한 마음으로 읽게(拜讀)한 자()가 누구이며, 또한 그 후(其後) 임금(君父) 인조(仁祖朝)때 남()으로 삼백여리(三百餘里) 긴 길 바깥에(長路外) 쌍수산성(雙樹山城)을 향하시게 하였고 서(西)쪽으로 바다 건너 외딴 섬(隔海孤島)의 삼랑성(三浪城)을 오르게 한 자()가 또한 누구인가.

무릇 국가가 있는 이상(以上)은 선량(善良)한 정치(政治)를 요()하며 정치(政治)의 선양여부(善良與否)는 오직 국민(國民)이 판단(判斷)하며 깨닫게(覺悟)하는 것으로 민당(民黨)이 발생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리(事里)와 형세(形勢)인지라 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민당(民黨)이라하는 것은 무엇이던가.

 

한국고전종합자료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용만서사(龍灣書事)에 선조(宣祖,1552-1608,재위:1567-1608)가 황망(慌忙)하게도 15924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그 해 430일 법전(法殿)을 버리고 용만(龍灣 의주(義州))으로 몽진(蒙塵)하여 620일 그곳에 도착하여 읊은 위 시()귀중 미련(尾聯)10, 朝臣今日後/寧腹各西東 조정 신하들은 이날 이후에도/동인이니 서인이니 나누어 싸움을 계속할 것인가하면서 통절하게 경계하고 엄하게 꾸짖으신 뜻이 글의 표면에 가득히 넘쳐 드러나서 당시의 신하들을 감동하여 울게 하기에 충분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한반도 조선인만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이미 동조동손(同祖同孫), 동국동민(同國同民)의 조선조정(朝鮮朝廷)에는 많은 수의 다른 민족(異族), 다른 나라(異民)의 동인과 북인, 남인, 서인들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우리 스스로가 그들을 이질적으로 만든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인조(仁祖) 5(1627) 2월에 후금(後金)의 군사를 피하여 강화도로 피난하는 수모를 말하는 것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말한다.

서인(西人)의 친명(親明) 정책과 후금 태종의 조선(朝鮮)에 대한 주전(主戰)정책의 충돌에 기인한 싸움으로써 명()으로 인해 조선과의 경제단교(經濟斷交)가 되었고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한 후금입장에서 불가능했던 이러한 충돌에 의한 마무리로 조선(朝鮮)과의 무역교역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보면 명조(明朝)말 무장 모문룡(毛文龍:1576-1629)은 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평안도 철산 앞바다 가도에 머물다가 이것이 단초가 되어 후금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것은 그동안 조선이 명을 지키는 것으로 역사에 나타나지만 실은 명이 조선을 보호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조선(朝鮮)과의 교역은 곧 그 나라의 사활에 대한 문제였던 것으로 풀이 되는데 바꾸어 말하면 조선의 거대한 경제적 시장성이 어마어마했던 것으로 인식되는 면이다.

결국 그러한 임금의 수모는 신하들의 아집과 자신의 영달 그리고 이익을 위해 파당을 만들고 아귀다툼을 하였을 뿐이며 국민의 권리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을 표방하고 나서는 민당(民黨)은 결코 아니었다는 말이다.

 

널리 평등하게 한뜻이 되게 하는(同仁同德)것은 국가(國家)가 하는 전쟁(戰爭)에 용감한 자()이고 사사(私事)로이 싸우는(私鬪)것에 용감한 자가 결코 아니며 국가 일(國務)에 힘쓰는 자()이며 개인적 이익(私利)에 몰두()하는 자가 결코 아니다.

고로 나라를 위한 옳은 일 국시(國是)로써 가장 완전(完全)한 이상(理想)으로 나아가며 학문(學問)이나 예술(藝術)의 발전(發展)하는 운수(運數)는 이로써 높고 높은(隆高)곳으로 성취하게 하여 백년대계(百年大計)를 하루일과 같이 나라를 안정되고 평화롭게 다스리는 것이니 요순(堯舜)의 성스러운 정치(聖治)는 여덟 명의 선량한 사람과 여덟 명의 화합(和合)한 사람(八元八凱黨)이 서로 조심하여 공사(公事)를 봉행하고 마음을 합쳐 공경을 다(同寅協恭)하여 공적이 빛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희랍(希臘)의 문치(文治)"소론"()이 교화(敎化)의 적합하게 하여 문화만고(文化萬古)의 시조(鼻祖)가 되었으며 불국(佛國) "로베스피어르"의 과격공화당(過激共和黨)은 인권해방(人權解放)의 제일막(第一幕)을 열었고 독일(獨逸)"루터" 신교당(新敎黨)은 가교신성(家敎神聖)을 천하(天下)에 선전하였다.

이러함이 국가(國家)의 정치와 사회의 문화는 어떤 것을 불문하고 만인(萬人)이 당을 만든 후 만선(萬善)을 종합하여 널리 평등하게 한뜻이 되게 하는(同仁同德)으로 갈고 닦아(磨之琢之)야 하며 자르고 갈아(切之瑳之)하야 성덕지선(盛德至善)에 노력하는 그사이에 있어야 한다.

슬프다. 우리는 4색 당(四色黨)의 무익한 이전투구로써 우리의 이익과 행복(利福)을 강구(講究)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 문화(文化)에 진력(致力)할 여유가 없었으니 이를 공정(公正)한 의사(意思)와 불편(不偏)한 언론(言論)으로 사료되는데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대위인(大偉人)이었고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문화인이라 이와 같이 한 웅지대략(雄志大略)으로써 그것에 대한 오해(誤解)가 길다()함이 삼백여년(三百餘年)에 건넘()이 어찌 우리들(吾等)로 하여금 오늘날 유감(遺感)되게 하는 것이고 어찌 우리들(吾等)의 오늘날 이상함(不思議)이라 하지 않으리.

 

나라가 필요한 민당(民黨)이라 함은 파당이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와 사회, 문화 어떤 것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민당(民黨)을 만든 후 최고, 최선을 위한 것이며 널리 평등하게 한마음 한 뜻이 되어 훌륭한 품덕(品德)과 지극한 선()을 이루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역사는 4색 당(四色黨)의 무익한 이전투구로써 우리의 이익과 행복(利福)을 강구(講究)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 문화(文化)에 진력(致力)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대위인(大偉人)이었고 우리의 선조(先祖)는 과거시대의 문화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오해를 풀 수 있었던 시간이 300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은 생각해도 매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라 했다.


4).조선인(朝鮮人)은 대의(大義)에 서야 한다.

 

고로 당시를 회고(囘顧)하여 회개(改悔)의 매우 감격하여 눈물(感淚)를 흘리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의 회개(改悔)를 가깝게 하여 현재(現在)로부터 더 잘 진행되도록(促進)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이날 이때(此日此時)는 험준한 산을 사다리를 타고 넘고 거친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는(梯山航海) 것으로 육주오양(六洲五洋)은 항구의 출입구(港門)을 크게 열고(大開) 서구동아(西歐東亞)에 제민족(諸民族)이 섞여 살며(雜居) 생존(生存)을 서로 이겨내고(相鬪) 우열(優劣)을 서로 경쟁(相爭)하여 대민족(大民族)의 대활동(大活動)이 있는 것이 다사추(多事秋)하다 할 것이다.

이러한 때 우리는 육체와 정신을 공유하는 동기동혼(同氣同魂)과 같은 목소리를 내는 동성동음(同聲同音)으로 우리의 앞길이 험악(險惡)하고 우리의 입지(立地)가 곤란(難苦)함을 거울()로 행동할 바와 멈출 것을 크게 부르짖지(大呌)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인(朝鮮人)은 참으로 20,000,000 ()이되며 이 20,000,000()은 나아가 한사람이 될지어다.

우리는 과거를 회고(囘顧)하여 회개(改悔)의 매우 감격하여 눈물(感淚)를 흘리며 회개(改悔)하는 것이며 이 회개(改悔)로써 선량한 백성(良民)의 역사를 만들고자 하는 이때 이어날 어느 쪽의 검은 천사(何方黑天使)의 명()으로써 안으로는 4색혼(四色魂)이 아직도 없었지지 않고 밖으로는 그것을 개명파(開明派)라 하면서 나는 완고파(頑固派)라하며 혹은 유교(儒敎) 혹은 야소교(耶蘇敎) 또는 불교파(佛敎派)라 하여 새로이 5(五色) 혹은 6.7(六七色)을 이룩코저 함이 도대체 무슨 심정으로 그러하는지 알 수 없음(抑何心情)이 아닌가.

조선인(朝鮮人)은 대의(大義)에 서야 한다.

 

지금은 비로소 육주오양(六洲五洋)은 항구의 출입구(港門)을 크게 열고(大開) 서구동아(西歐東亞)에 제민족(諸民族)들이 대민족(大民族)의 대활동(大活動)을 하고 있어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이 때 육체와 정신을 공유하고 같은 목소리를 내며 과거 잘못을 거울삼아 가야할 방향과 가지 말아야 할 방향을 잘 판단해야 하고 조선인 20,000,000명은 한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직까지 4색혼(四色魂)이 남아 있고 새로이 5(五色) 혹은 6.7(六七色)을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억하심정인가 말하고 있다.

끝으로 그는 정리하길 옛 대성인(大聖人)과 대교조(大敎祖)라 하는 선철제현(先哲諸賢)은 베품()으로써 똑같이 보며 종족(種族)의 구별이 없었으며 어짐()으로써 똑같게 인식(同認)하면서 동서(東西)의 구별이 없었기 때문이며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이치를 나에게는 적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하는 것이며 선을 권하고 악을 벌하는 권선징악(勸善懲惡)도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자기는 면하는 것이 아닌 즉 이해(利害)를 계산함이 아니며 영욕(榮辱)을 산정함이 아니라 모두에게 유리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동서남북 4.5분 분리되지 않았을 거대한 대조선시기에 4색혼(四色魂)은 전체가 한사람이 되지 못한 결과이며 지도자가 어느 한 쪽을 편애하거나 편중하여 종족(種族)을 구분하고 지역을 차별하며 믿음을 강요하는 것 따위가 존재했고 대성인과 대교조가 주장하는 덕()과 인()이 모자랐다는 것을 힘주어 말하고 있다.


5).마무리

 

지금까지 정언생(鼎言生)선생의 칼럼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위에서 말한 제어(諸語)와 같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동서남북의 조선인들을 떼어주기 전에 온전한 대조선의 모습을 어떤 것이었을지 솔직히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현재 글쓴이 뿐만아니라 재야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틀은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지만 이러한 대조선의 진짜 모습에 근사치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그 모습은 세계사를 보는 것과 같다고 확신한다.

때문에 글쓴이는 한결같게 세계삼한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동인(東人)은 동인(東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지 않았다면 또한 서인(西人)은 서인(西人)으로써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남인(南人)은 남인(南人)으로 북인(北人)은 북인(北人)으로 각각 별개의 조선인(朝鮮人)이 되지 않았다면 그래서 조선(朝鮮)은 동인조선(東人朝鮮)과 서인조선(西人朝鮮), 남인조선(南人朝鮮)과 북인조선(北人朝鮮)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면 조선은 실제 어떤 모습의 역사이었겠는가.

상상하기조차 벅찬 것이다.

 

칼럼 작가는 그러했기 때문에 현재 조선 땅(朝鮮地)은 몇 백 평(幾百坪)에 불과 하였고 조선인(朝鮮人)은 몇 십 인(幾十人)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있고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모습이다.

같은 조상, 같은 자손(同祖同孫)이었지만 우리스스로가 이족(異族)을 만들었고 같은 국가, 같은 국민(同國同民)이었지만 우리스스로 다른 민족(異民)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 우리의 땅이 가난하고 사람이 가난(地貧人貧)함을 자초한 것이라 하였다.

그것의 단초는 지도자가 덕()과 인()이 부족했고 파당을 만들어 사익을 위해 이전투구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육주오양(六洲五洋)은 항구의 출입구(港門)을 크게 열고(大開) 비록 분리되었지만 온전한 모습인 서구동아(西歐東亞)에 제민족(諸民族)들이 서로 어울려 대민족(大民族)의 대활동(大活動)이 있으며 이를 다사추(多事秋)라 하였는데 그렇게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라고 말하고 있다.

그 때가 1920년이다.

즉 우리 역사의 잘못된 판단을 칼럼작가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들여다보았고 합체된 대조선의 모습을 오늘에서야 비현실적으로 대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면 19세기 시작과 동시에 대조선 붕당(朋黨)의 하나로서 예측할 수 있는 하노버왕가(House of Hanover:1714-1901)가 안동김씨(安東金氏)와 엮인다는 사실에서 과연 붕당이란 것이 반도역사가 주장하는 관리들의 단순한 자중지란(自中之亂)에 이어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맞는가에 대한 문제도 위 칼럼이 말한 불가사의한 관점으로 풀어야 마땅할 것이라고 생각되는 점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전자적 한계라 하고 이를 빌미로 서양식민제국세력들만의 얄타회담(Yalta Conference:1945.2.4-2.11)에서 미국인들이 말하는 조선인 자치성의 결여란 딱지는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주홍글씨로 남고 말았다

이것에 대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등의식은 얼마이던가.

조선인들은 모래 알 같다는 스스로의 자학도 이때부터 기인한 것일게다.

과연 반도역사에서 그토록 조선 붕괴의 원인을 붕당이라 하고 일반 신하의 당파싸움으로 인한 것처럼 몰아붙인 이유가 조선인은 모래알 같다는 서양식민제국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붕당을 옹고집 관리들의 이전투구 아귀다툼 난장판 당파싸움 인자로 보았다는 것은 기존 역사학자들의 역사적인 인식이 결여되어 스스로 왜소하게 만들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한문으로 붕당(朋黨)의 붕()은 벗, 동무, 친구를 의미하고 특히 마음을 같이 하다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에 절대 이전투구(泥田鬪狗)라고만 볼 수가 없다.

또한 붕()은 두 개 월()자의 파자(破字)를 가지고 있고 화폐단위에 기초가 되는 조가비(貝殼) 2, 또는 5개를 뜻하는 것이라 했으니 이것이 재화집합(財貨集合)이라 보아 자본화(資本貨)가 된다는 것이며 자본 세력(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에 의한 각 당리에 따라 합쳐진다는 의미가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어 조선말기에 파당이 심화된 이유 중에 하나가 유대자본이나 유대세력의 생성과 관련이 깊은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2차세계대전을 끝으로 일제는 교묘하게 엮어 한반도에 엉뚱한 역사를 심고 그것도 모자라 마치 한반도인들은 모이면 이전투구 밖에 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매도, 호도하게 만들어 조선역사에서 폐악적으로 그려놓고 이를 재해석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니 어찌 이를 허용할 수 있겠는가.

위 칼럼작가도 이야기 했듯이 본래의 취지는 역사발전을 위한 것이며 그것은 생산적인 민당(民黨)이고 거대한 영토 국가체제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안전장치적인 정치제도이다.

다문화, 다원적인 여론을 수렴하고 균등하고 평등하게 정책을 마련한다는 취지에 대의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조선말기에 나라가 흔들린 이유 중에 하나가 세도정치라는 문제로 들어가보면 먼저 정조(正祖,1752-1800,재위:1776-1800)를 옹립한 일루미나티(光明會,Bavarian Illuminati)와 연결되고 있으며 이것은 바로 바이에른 풍산홍씨(豊山洪氏) 홍국영(洪國榮:1748-1781)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나 정조 때 풍산홍씨를 업은 노론벽파(老論僻派)의 득세가 있어 부르조아 세력들이 또아리를 틀고 준동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어 19세기초 순조때 이르러 세도벌열(勢道閥閱)들의 각축과 함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면서 정치·경제·외교·문화와 행정까지도 협의에서 결정하는 비변사(備邊司)를 장악한 노론시파(老論時派)의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조순(金祖淳:1765-1832)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세도정치체제가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한반도 역사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이들이 결국 자본 세력과 결탁되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에서는 영국과 똑같이 1834~1860까지 반 프리메이슨(Anti-Masonic)정당으로 휘그당(Whig Party)이 존재했다.

하지만 영국의 양당제에서 정당인 휘그당(Whig Party)과 토리당에서 근원적으로 볼 때 휘그당의 "휘그(Whig)"는 스코틀랜드어의 "whiggamor"에서 유래되어 "모반자"라든지 "말 도둑"란 뜻이라는 것임을 알 수 있고 반대당 역시 "토리(Tory)"라 하는 것도 아일랜드어에서 "불량", "도적"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모두 정권탈취세력들임을 금방 알 수가 있다.

이들은 역시 대조선(大朝鮮)을 갈라놓지 못해 안달하는 세력들이라고 알 수 있을 것이고 대의(大義)를 앞세운 반동들일뿐 결코 민당(民黨)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안동김씨 순원왕후김씨(純元王后:1789-1857)는 헌종(憲宗)과 철종(哲宗)을 섭정하였으며 다시 조만영(趙萬永,1776-1846)에 의한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정치가 신정왕후(神貞王后:1809-1890)까지 이어졌고 철종(哲宗,1831-1864,재위:1849-1864)보위를 마무리한 것을 보면 결국 조선왕족직계보까지 세도정치가 만연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철종대(哲宗代)에서 계보가 단절되는 비운은 이것에 의한 것이 틀림없고 그 주 원인은 자본 세력들에 의해 자중지란 속에서 벌어진 해체적 진상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이 시기가 대조선의 운명을 쇠락(衰落)길로 접어들게 만들고 반대로 서양세력들은 분기탱천시기로서 세력분기점으로 나타나는 큰 갈래 길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바로 깃 점이 1864년이다.

철종이 절명하면서부터 서양세력들의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철종은 자본 세력의 사주를 받은 무장집단에 의해 왕가일가 참살이 벌어졌다는 사실 또한 숨길 수 없는 역사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벽려(薜荔, Ficus pumila)는 동아시아대륙이 아니라 아메리카가 원산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에서 언급하였지만 니콜라이2(Aleksandrovich Nikolai II,1868-1918)의 일가족 황후를 포함한 14녀 모두가 1918717일 유대인 출신의 스베들로프(Sverdlov)일당들에 의해 예카테린부르크(ekaterinburg)에서 집단 처형된 사실과 흡사하다고 해야 맞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목적을 위해 테러를 밥먹듯이 하던 종족이었다.

이미 그 이후의 계보(系譜) 발생은 대조선 역사와는 틀을 달리하는 것이고 역사적으로 논할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조선왕조실록 역시 철종(哲宗)까지 조선조 정식계보로 인정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종과 순종실록이 일본 제국주의시대에 편찬됐기 때문이며 이것은 1927년부터 시작되어 1935325, 이왕직(李王職)에 의해 고종순종실록(高宗純宗實錄)완성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후 멈추어진 철종(哲宗)에서 계보가 다시 세도에 의해 방계(傍系)로 이어지고 이상하게도 신정왕후를 이은 흥선대원군에서 부계가 아니라 모계로 이어지는 여흥민씨(黃驪,驪興閔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계속되었고 결국 파행을 맞이한 것이라고 풀어 볼 수 있지만 방계로 이어지는 것은 또한 안동김씨라고 판단되는 빅토리아시대와도 정확히 연결된다고도 하였는데 본 블로그 글 "1890년에 영국인들이 말한“COREAN”시대(Era)라고 한 의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8 "에서 밝힌 사실들과 같다.

때문에 영국여왕 빅토리아(Queen Victoria:1819-1901), 그리고 청정부의 이홍장(李鴻章:1823-1901)과 같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1820-1898)과 연결되는 조선, 영국, 청조까지 3개역사개체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히게 하는 실로 기이한 도플갱어(Doppelgänger)를 바라볼 수가 있다.

글쓴이는 이런 붕당들의 준동은 유대자본이 모든 것을 장악하는 과정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예를 들면 하노버왕가에 속한 김조순(金祖淳:1765-1832)이 장악한 비변사는 사실상 성종(成宗,1457-1495,재위:1469-1495)때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여진(女眞)과 왜구(倭寇)를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라 하였고 바로 일본이라 할 수 있는 앵글계(angle) 서양해적 무리들이 끊임없이 대조선 북쪽과 남쪽영역에 침입하였기 때문에 이를 퇴치하기 위한 기구임을 알 수가 있다.

즉 반 서양세력퇴치 기구였고 다른 자료에는 이를 오늘날 국가안전보장회의와 국무회의, 국회의 기능이 통합된 기구라고 한다.

김조순이 1800년에 정순왕후의 힘을 빌어 이렇게 막강한 비변사(備邊司)제조당상(提調堂上)이 되어 장악하였다는 것은 본래 서세들을 견제하는 목적이 사라질 수밖에 없고 서양해적 무리들은 그 이후 거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해보면 가슴이 오그라진다.

비록 타의 에 의해 한반도로 이동되었다 하더라도 제국식민지 신세가 아니라 세계삼한역사를 살릴 수만 있었다면 지금처럼 우리가 역사에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자학하면서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과 비통함이 있다.

그래도 이 글로 그나마 마음을 달래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본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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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조선, 서조선, 남조선, 북조선을 계속하여 과학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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