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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니즘(Japonism)의 해괴한 변신
글쓴이:한부울
1)서론
2)자포니즘(Japonism)이란 무엇인가.
3)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자포니즘 화가
4)자포니즘과 양키일본
5)미농화지(美濃和紙:Mino washi)
6)고려종이(高麗紙) 닥나무(Broussonetia)근원
7)포르투갈,더치와 왜 양이(洋夷)
8)마무리
1)서론
자포니즘(Japonism)은 상업주의 요소가 가장 큰 것으로 안세이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1858)주도국인 미국(양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의 당시 서양우월주의를 위한 상품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열도동양일본인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님을 단정지울 수 있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우월주의를 내세우기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1935-2003)의 1978년 저서[오리엔탈리즘]에서 주장하길"서양인들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사고양식"이라고 비판하였지만 서양인 스스로가 동양인과 구분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성된 동양오리엔탈리즘이란 사상은 어찌 보면 그에 대한 무한의 열등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사 전체를 아우러보면 절대로 동서양이 분리될 수 없었던 역사문화인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같은 동일한 문화를 추구했다는 역사본질에서 한쪽으로 쏠리면 한쪽은 너무 빈약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어코 분리시킨 것을 보면 다분히 해양세력이었던 서양역사문화의 열등의식이 저변에 깊게 깔려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상태를 그들이 애써 감추어 버렸기 때문에 지금은 알 수가 없지만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제로게임과 같기 때문에 충분하게 유추가 가능하다.
그렇다고 하여 그들이 유럽대륙역사를 온전히 장악했던 것도 아니고 비주류로써 대서양 주변도서를 배회했을뿐 마땅한 거처도 없이 헤매이는 해양시대를 갈구했던 이력 말고 특별하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종족들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실은 맞다.
기존 주체세력들이 이들을 제거하지 못했던 이유 중에 하나가 그들의 고정된 거처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이 아프리카남단을 거쳐 서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정복하고 인도네시아전체를 식민지하는 등의 사실들은 서양인들이 주장하는 것일뿐 어느하나 검증되거나 실증사적으로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때문에 현재 세계사는 깡그리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그들은 15세기때도 그렇듯 전세계 해양을 계획적으로 누빌 수 없는 항해기술은 초보적인 단계였다는 것을 스스로 고백한 콜롬버스 착각지도 등이 그것을 증명하는 수준이었다.
서인도인지 동인도인지도 알 수 없는 한마디로 머저리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준동하기 전 아랍 즉 무슬림세력이 유럽대륙전체를 차지하고 장악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고 그 동쪽편 전체가 18세기까지 대타타르(Great Tartary)가 지배한 유라시아대륙이다.
본 블로그 글 "악라사관기(鄂羅斯館記)로 본 대한제국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4" 에서 최소 1799년까지 푸른 눈, 검은 얼굴의 대비달자국(大鼻㺚子國)악라사(鄂羅斯)가 그 지역을 전부 점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했는데 "지역이 매우 커서 동서가 3만여 리, 남북이 2만여 리가 된다. 동남쪽에는 유구와 안남(安南)이 접해 있고, 동북쪽에는 몽고가 접해 있고, 서남쪽에는 크고 작은 서양(西洋)이 접해 있다"한 것이다.
즉 남쪽에 접해 있어야 할 거대한 인도(印度)는 아예 존재자체가 없었고 유럽대륙에는 작은 서양(小西洋)이 접해있다고만 했는데 이 소서양(小西洋)도 인도양 뿐만아니라 지중해도 포함시켜 이야기 한 사실을 전제할 때 유럽대륙에 서양세력이 있을 만한 공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명확하지 않지만 무슬림으로 구분되는 남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서아시아의 회교권의 아랍계나 베르베르족의 후손인 무어족(Moors)과 투르크족(Turks)의 상황 묘사가 중세적인(Medieval), 르네상스(Renaissance), 바로크 예술(Baroque art)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상황을 충분히 예단할 수 있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이것들은 19세기말엽에 그들이 세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뒤바꾸려는 욕심이 생겼고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공격성향의 예수회가 주도하여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유럽인 주도의 중세문화를 생성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역사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쨌던 이를 비켜나가야 할 새로운 궁리가 그들에게 필요했다.
본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의미는 진보된 순수한 동방(東方)문화라는 틀에서 시작된 어원인데 해가뜨는 곳, 북아메리카대륙을 말한 것이며 그곳을 또한 아시아라 한 것이 틀림없다.
본 블로그 글 "아세아(亞細亞:ASIA)란 무엇인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696"에서
asia, It is of Greek origin, where it means 'sunrise'. It is also of Assyrian origin (a form of 'asu') and it means 'east'.
실제로 아시아(asia)의 영어의 본뜻은 그리스말로 “sunrise” ‘태양이 뜨다’, ‘일출’, ‘해돋이’라 하였고 아시리아어(Assyrian)로는 'east' 동쪽, ‘동방’을 뜻하는 단어로 나타나고 있으며 일본어로 아사(asa:あさ:明日:朝)도 ‘아침’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오리엔트(Orient)역시 라틴어의 오리엔스(Oriens)에서 기원했으며, ‘해돋이’ ‘해가 뜨는 방향’이란 뜻이다.
때문에 인도 시성(詩聖)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1861-1941)는 그의 시(詩)에서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기에 빛나던 등불의 하나였던 코리아"라고 읊었던 것인데 이것을 현재 조작되어 굳어진 유라시아대륙을 말하고 있다.
얼마나 굴곡진 이야긴가.
아시아는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하고 그곳에 코리아가 존재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19세기 식민지제국들에 의해 오리엔탈이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동양편견주의, 그들에 의해 왜곡되거나 조작된 허구가 이를 부추겨 지금의 아시아대륙으로 옮겨지면서 본의가 크게 훼손된 것이다.
이를 엄밀하게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자면 세계삼한역사를 공중에 부양하게 만들고 그 부양한 자리에 서양인들이 창작한 유럽사를 안전하게 안착시켰다고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양인들은 그러한 왜곡을 멈추지 않았고 유럽대륙을 차지하고 난 후 오리엔트를 유럽대륙 지중해를 경계로 만들고 그 동쪽을 가리키는 지리적 용어로 근동(近東), 중동(中東)이라 하여 그곳을 유럽대륙의 경계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이집트문화를 유럽역사 산실로 만들었다.
왜곡 되지 않은 역사라면 현재 이집트, 페르시아제국, 중동제국들은 모두가 지금보다 동쪽에 있어야 하고 그곳은 북아메리카대륙이어야 정확한 역사위치가 된다.
이것은 유럽역사가 아랍역사를 품고 독창적(?)으로 역사를 재구성하는 바람에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일간신문에 이런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오리엔트에서 파생된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이란 말에는 서양인들이 요구하는 오리엔탈 정체성이 숨어 있고 세계의 중심세력인 서양(西洋)을 중심으로 동양 또는 아프리카를 계몽, 교화해야 할 대상이라고 한다는 사실에서 "신입생 교육"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하였는데 참으로 섬뜩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서양인들의 지나친 우월감은 이런 신입생교육에서도 어긋나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열등의식이 지나쳐 이렇듯 무리를 할까도 생각해본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해적질을 일삼던 해양세력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따질 근본이 있을 수가 없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다가 수중에 돈이 생기자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음이고 돈을 무기로 그동안 쌓아왔던 한을 그런식으로 어긋나게 푼 것이다.
이러한 못된 발상은 바로 식민주의에서 나온 것으로써 그들의 기본정책 활동에서 식민지자원, 노동력,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시장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래서 식민주의를 곧잘 정당화하는데 쓰이는 주장이 식민지배자가 피식민자보다 뛰어나거나 우월하여, 식민지지배는 근대화에 필요한 것이며 경제기반, 정치기반을 발전시키는 것에 목표가 있으므로 피식민자들에게 결국 이익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된다.
이것이 오늘날 한반도 친일파들의 식민지근대화론이기도 하다.
동방, 동양역사에 비해 열등한 강박관념을 가졌던 서양세력들은 해적이란 오명을 벗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렸다고 본다.
산업혁명이후 기기의 발달을 이용하여 해상일지를 만들고, 그림과 삽화를 그리며, 또한 후일 증거를 위해 사진을 마구찍어대면서 역사증거물을 수집하기에 혈안이 된 것도 사실이다.
거처도 없이 떠돌아 다닐 수밖에 없었던 해양세력이라는 취약한 정체성은 그들을 쉬 자괴감에 빠지게 만들기에 충분했고 진보된 동양역사문화에 비해 현실적으로 열등한 심리가 주는 폐배의식을 바탕으로는 식민주의 자체가 바로 설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깊이 자각한 탓일게다.
때문에 그럴듯한 논리와 우월한 신종교를 앞세우고 계몽과 교화가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필요했던 것임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프랑스혁명이후 그들이 주장하는 계몽과 교화를 위한 교육이 그들에게 왜 굳이 필요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양 천주교가 조선의 관습을 무시하고 내부적으로 체제를 혼란시키려고 하는 위협이 가해지자 1801년 사교(邪敎)·서교(西敎)를 엄금, 근절하라는 금압령(禁壓令)이 순조(純祖1790-1834,재위:1800-1834)로부터 내려진다.
그러나 1798년에는 군사혁명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1769-1821,재위:1804-1814)의 휘하장군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Alexandre Berthier:1753-1815)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교황 비오 6세(Pope Pius VI,1717-1799,재임:1775-1799)를 사로잡아 감금하였고 결국 프랑스군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리고 1801년 비로소 나폴레옹에 의해 정교조약(政敎條約)이 맺어지게 되지만 천주교는 많은 제약을 받게 되는데 공권력을 인정하고 국가권력에 충성 서약까지하게 된다.
조선(朝鮮)순조(純祖)가 내린 1801년 금압령은 유럽역사와 비교되는데 하노버왕조의 벽파와 대립하였던 부르몽왕조의 남인, 시파를 숙청하는 사건이다.
특히 야당인 남인(南人:프랑스,南越)중에서 천주교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1805년에 들어서면서 조선의 영향을 받은 청조(淸朝)에서도 제사를 금지한 천주교회를 중국의 전통을 파괴하는 무리로 보고 천주당(天主堂)과 신학교를 파괴하고 탄압을 가했고 그 이후 교황 비오 9세(Pius PP. IX,1846-1878,재임:1846-1878)는 1854년 주교들의 지지를 받아 손상된 천주교의 입지를 다시 구축하게 되었으나 정상을 찾기는 15년이 지난 1869년에 비오 9세(Pius PP. IX)에 의해 실시된 바티칸에서 공의회(公議會:Concilium)개최이며 떨어진 천주교회 권위를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해진다.
그렇지만 조선에서는 1866년 초 체제를 어지럽히고 신도수가 증가함에 따라 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내리고 프랑스신부와 조선인 천주교신자를 체포, 탄압하자 강화도(江華島)침범으로 이어지는 병인양요(丙寅洋擾:1866)가 발생한다는 것이 천주교 탄압에 대한 세계사적인 연대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보면 실제로 조선과 프랑스가 엮어있는 듯한 느낌에서 일체의 역사 사건들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반도에 무엇이 있다고 선교사들이 대거 들락거리겠는가.
그 만큼 조선은 엄청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국가이며 체제였기 때문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를 사고 달려든 것이다.
조선 말 선교사가 대거 등장하는 것도 한국인들이 조상대대로 거처로 삼던 곳이지 한반도가 아니다.
선교사 어느누구도 순수한 종교교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식민제국들의 첨병역할을 했다는 것은 양심있는 역사학자들이 하나같이 비난하는 이야기다.
앞에서 식민주의를 이야기 했지만 14세기경 유라시아 대륙의 작은 나라들에 불과했던 서유럽 국가들이 미국, 중국, 아프리카 등에 식민지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특이한 경쟁심을 말하고 있고 앞선 과학지식, 민주주의선도와 의학기술, 주체할 수 없는 소비주의 그리고 직업 윤리의식 등 여섯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있다.
서양의 관점에서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가져다 준 혜택을 설명하는 것도 동양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지배자들은 정작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고 느슨한 국가정책을 펴 서양인들에 의해 경쟁에서 밀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동양인이 아닌 서양인들에 의해 결국 정치, 사회, 경제 전반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도 그들의 우월주의에 의한 책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보리밥에 간장 반찬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무고한 동양사람들의 재산을 억압으로 강탈하고 착복하여 그것을 이용하여 더 많은 이문을 남기고 잉여자본으로 본래 강탈한 재산 주인에게 이밥과 고기반찬을 사주어 이득을 준 것이라고 강변하는 것이 정당한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 자유시장경제는 법치주의를 벗어나서는 설 곳이 없다고 하는 법리를 향상 내세우지만 그들 스스로가 법리를 먼저 따지고 합당한 법치를 따르는 적이 있었던가.
자본주의사회가 법치를 생명으로 여겨야할진데 아무 이유도 없이 강압적으로 남의 사유재산을 강탈하고 죄의식조차 갖지 않는 것은 악날한 범죄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식민지근대화론이란 얄팍한 이론을 앞세워 그들의 무도한 행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한 그들의 추악한 이력을 어떻게 한순간에 지울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범죄행위에 대한 단죄(斷罪)가 필요했던 것이지만 서양인들은 그것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서양해양세력의 겉껍데기인 열도일본 정치인들도 이와같은 행위를 닮아 아무렇지도 않게 항변하는데 마치 그들이 서양인 인냥 행세하는 모양새는 가히 뻔뻔스럽고 가소롭기가 짝이 없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뻔뻔스럽게 만들었을까?
거짓역사는 양심의 보루조차 잃어버리게 만든다.
바로 자포니즘 따위를 잘못해석한 것이며 일찍이 서양세력들이 일본을 동양일본으로 만든 것도 동양인들에게 근대화를 이룬 일본을 본보기화 하려는 것이며 그래서 서양우월성을 느끼게 하는 누이좋고 매부좋은 매우 교활한 수법이 아닐 수 없다..
19세기 말엽에 서양우월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만년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은 백인우월주의에 사로잡힌 인도 붐바이(Bombay) 출신인 러디어드 키플링(Rudyard Kipling:1865-1936)같은 영국 저널리스트겸 문인조차도 "야만적인 흑인과 황인종을 개화시키는 것은 힘들고 고되지만, 그들에게서 보답은 커녕 원망과 비난을 받을지라도 고귀한 의무를 다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며 유색인들을 문명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백인의 의무(The White Man's Burden)'라는 의견을 펼쳤다.
Oh, East is East, and West is West, and never the twain shall meet,
그리고 그는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라, 절대 서로 어울릴 수 없다고도 말하여 철저한 분리주의를 고수했다.
그림:존 불(John Bull:잉글랜드정부), 엉클 샘(Uncle Sam:US,미국정부)은 세계 유색인종들을 문명세계에 인도하는 '백인의 책무(키플링의 정당성)'을 견디어 낸다.(저지잡지, 1899년 4월 1일)
위 사진을 보면 저절로 쓴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느낀 바대로 몇자 서사시(敍事詩)처럼 적어본다.
미개하지 않았음에도 미개하다고 하고 그것을 대응하는 문명을 요구하니 참으로 어줍잖은 이야기다.
오리엔탈문화에 문명이 없었던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더스, 황하문명이 있었다.
그토록 인간이 진보되지 않으면 역사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일만년 오리엔탈 문화역사는 서양우월주의 사회다윈주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진보했다.
그들은 시민(citizen)에 대한 시비스'civis'와 시비타스'civitas'만 알고 도덕과 윤리는 왜 모르는가.
cīvis=citizen, civitas=condition or privileges of a (Roman) citizen
도덕(道德:Morality)과 윤리(倫理:ethics)를 던져버린체 오직 사욕(邪慾)에 의한 물질풍요와 절제되지 않는 쾌락만이 문명(civilization)이란 말인가.
탐욕과 오만의 문명이란 틀을 세우고 그곳으로 밀어넣는 압제는 누구로부터 나온 것인가.
백인들이 요구하는 문명이 아니더라도 충분한 문명, 문화를 만끽하고 부족함을 모르던 오리엔탈 시민들이 아닌가.
악덕(vice),노예(slavery),무지(ignorance),살육(brutaltity),미신(superstition),압제(oppression),야만적인행위(barbarism)는 누가 만든 것인가.
그들이 만든 것임에도 마치 오리엔탈시민에 의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도 고약하지만 짐(burden)을 지도록 시키지도 않는 수고를 하고자 자임하고 나선 그들에게 수고 보답으로 식민지착취 이외 무엇이 더 필요할까
어울리지도 않는 존경과 칭찬이 필요한가.
아니면 열등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우월심리가 필요한가.
식민지착취로 풍부한 물질을 얻고 정신적 위안까지 요구하는 것은 백인종족들의 지나친 욕심이고 뻔뻔스러움이 아닌가.[한부울 지음]
다시 백인들의 우월상황을 영어자료에서 찾아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발견된다.
White supremacy has ideological foundations that date back to 17th-century scientific racism, the predominant paradigm of human variation that helped shape international relations and racial policy from the latter part of the Age of Enlightenment until the late 20th century
'백인우월주의는 17세기 과학적 인종차별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념적 토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계몽시대 후반부터 20세기 후반까지 국제관계와 인종정책을 형성하는데 기여한 인간 변이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Sociologist Stephen Klineberg has stated that U.S. immigration laws prior to 1965 clearly declared "that Northern Europeans are a superior subspecies of the white race".
미국뉴욕출신이며 사회학자 스티븐 클라인버그(Stephen Klineberg:1940~)는 1965년 이전의 미국 이민법에서 "북유럽인들은 백인종에서 우월한 아종"이라고 분명히 선언했다.
White supremacism has been depicted in music videos, feature films, documentaries, journal entries, and on social media.
수많은 뮤직비디오, 장편영화, 다큐멘터리, 저널리스트, 소셜미디어 등에 백인우월주의가 그려졌다.
In an editorial about Native Americans in 1890, author L. Frank Baum wrote: "The Whites, by law of conquest, by justice of civilization, are masters of the American continent, and the best safety of the frontier settlements will be secured by the total annihilation of the few remaining Indians."
1890년 미국 원주민에 대한 사설에서 미국뉴욕출신이며 작가 프랭크 바움(L. Frank Baum:1856-1919)은 다음과 같이 썼다: "백인들은 정복의 법칙에 의해, 문명의 정의에 의해, 미국 대륙의 주인이며,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인디언들의 완전한 멸망에 의해 국경 정착지의 최고의 안전이 확보될 것이다."라고했다.
In 1937, Winston Churchill told the Palestine Royal Commission: "I do not admit for instance, that a great wrong has been done to the Red Indians of America or the black people of Australia. I do not admit that a wrong has been done to these people by the fact that a stronger race, a higher-grade race, a more worldly wise race to put it that way, has come in and taken their place." British historian Richard Toye, author of Churchill's Empire, said that "Churchill did think that white people were superior."
백인우월주의자이기도 한 윈스턴 처칠은 1937년, 팔레스타인 왕립 위원회에서 말하길"예를 들어, 나는 미국의 레드 인디언이나 호주의 흑인들에게 큰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더 강한 인종, 더 높은 등급의 인종, 그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위한 더 세속적인 현명한 인종이 들어와서 그들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사실에 의해 백인들에게 잘못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고 했다.
19세기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아편의 탐닉성과 독성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여 황색인종에게 가장 강하다는 것을 규명했으며 이는 아편전쟁까지 치르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는 골자는 서양우월주의극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20세기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731부대(関東軍防疫給水部) 마루타(丸太:まるた,マルタ)생체실험(生體實驗)을 떠 올리기에 충분한 이야기며 이것이야 말로 자기합리화(Self Justification)이고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Cognitive Dissonance)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인간실험을 한 결과 동양인에게 아편의 약효가 가장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인위적으로 아편을 주입한다면 약효가 빠르다는 것이고 중독성이 강해 아편전쟁을 자신하게 만들었다는 소리이다.
서양세력들은 늘 이런식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힘의 교합은 늘 파멸을 불러왔다.
때문에 서양인들의 이런 우월주의정책으로 인해 인류사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대량살상을 유발시킨 거대한 두 차례(1, 2차세계대전)의 큰 전쟁이 발생하게 만들었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서양인들은 우월한 종교관념 뿐만아니라 난데없이 여론을 호도하기 위해 이론을 앞세우기를 좋아하지만 론(論)의 기본은 반론을 전제로 삼는 것이고, 다른 대안이 나오면 대체될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만 이러한 논제가 재고(再考)된 적이없고 일방적이었다.
과학이란 이름을 빌어 그들은 우월주의를 정당화하거나 합리화하는데 동원하였고 이론적, 학술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고 하는 론(論)은 겁도없이 신(神)의 경지境地)를 넘나들고 필요에 따라 이러한 것들이 대량 양산되면서 과학의 본질을 훼손시켰고 수많은 오류를 뒤로한체 그들의 목적은 멈추질 않았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마땅히 양심이 있고 인류적인 문제를 생각한다면 과하자나 역사학자들이 상대적으로 왜소해지는 동양학문에서 실증적 검증을 했어야 했지만 사실적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아시타비(我是他比), 내가 한 것은 무조건 옳고 남이 하는 것은 무조건 부정하는 짓을 산업혁명이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윈(Charles Darwin)의 진화론(進化論:Evolutinary theory)을 등장시켜 생물이 자연진화하는 것을 당장 서양우월주의에 접목하면서 힘의 지배는 정당한 것처럼 사회기류가 형성되게 만들었으며 마치 열등종족을 유색인종이라고 못을 박고 신(神)의 섭리에 의한 것처럼 호도하고 전 세계를 상대로 식민제국(植民諸國)을 건설하는데 혈안이 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상 힘의 논리이고 합리적인 지배라고 하지만 속물적 소유욕의 풍족이며 인류애와 최소한 인간성을 찾을 수 없는 폐악질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강탈의 의한 식민지근대화가 총칼과 강압이 아니라면 이것도 신의 섭리하고 떠 벌릴 것이다.
기가 찬 것은 영국의 사회학자이며 철학자인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 영국의 성직자이며, 인구통계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Thomas Robert Malthus,1766-1834), 영국의 인류학자 프랜시스 골턴(Francis Galton,1822-1911)같은 자는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Social Darwinism)이란 괴변을 만들어 서양우월주의의 도구가 되게 하고 저질 스러운 진화론은 사멸적 악행의 방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리 미화하고 덧칠하더라도 그것이 바탕이 된 서양역사가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절대로 미래 역사에서도 인정받기가 힘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것이고 그러한 행위로 인해 얼마나 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연기처럼 사라졌겠는가를 생각해야 마땅할 것이다.
2)자포니즘(Japonism)이란 무엇인가.
자포니즘의 자폰(Japon)에서'-ism'이 붙어있는 것을 보면 사상, 이념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서양우월주의의 상업브랜드라고 하는 자포니즘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것도 분명 동방문화에 반하여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그 발흥의 시대가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란 용어가 비등할 때이다.
동방문화의 어떤 기류에 반한 것일까?
17세기 부터 유럽귀족사회에 불어닥친 중국양식(中國樣式)의 사조(思潮) 시누아즈리(chinoiserie)이다.
시누아즈리는 중국골동품이라고 근세 유럽 미술에 나타난 중국풍의 기법. 또는, 그러한 공예품. 18세기 중엽 프랑스에서는 어원'rocaille(조개무늬 장식, 자갈)'에서 온 로코코(Rococo)와 융합하여 실내 장식·가구·벽걸이·도자기 등에 많이 이용되었다.
이 시누아즈리(chinoiserie)란 영어단어는 음식을 갈거나 거르는데 사용하는 조리기구 쉬느와즈(chinois)를 인용한 것 같으나 기어코 chinois의 단어인 "중국어"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어에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Chine (“China”) + -ois (“-ese”)
자포니즘을 백과사전에서는 사조(思潮)라고 풀이하는데 어떤 시대나 계층에 나타나는 공통적이고 일반적인 사상의 흐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란 용어 따위는 대중적인 것이 아니다.
자폰이라는 명칭은 한반도 옆, 길게 세로로 늘어서 있는 열도(列島)일본을 지칭말인 것으로 인식되지만 일본국명은 삼한 백제가 지어준 것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타나며 우리는 동양한문으로 일본(日本)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Japan' , 프랑스어로는 'Japon'이라 하는데서 연유을 찾을 수 있다.
근세기 서양세력들이 큰 두 차례 전쟁에서 이긴자의 승전 전리품을 두둑하게 챙겨 역사본질이 가려져 있다 하더라도 본 블로그에서 들어날 것은 이미 다 들어난 상태이다.
19세기 말엽부터 신흥자본국가로 등장한 양키와 그 외 세력들이 서로 얽혀 어느 것이 진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세계삼한역사에 기록된 왜구(倭寇)역사와 현재 들어나고 있는 동아시아의 열도일본역사는 상당한 괴리를 가지고 있어 맞지 않으며 과거 해양세력들 전체가 공동체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일본이 가진 생물학적 역사위치는 때로는 열대지방, 온대지방기후, 그리고 북방기후까지 폭넓게 형성된다.
무엇인가에 의해 일본이 모든 면에서 매우 부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한 개체들이 모두가 명확한 인물묘사나 정확한 스토리 전개가 없이 뭉뚱그려 사실을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크다.
이것들은 본 블로그에서 판단하길 인물이 가공되었을 가능성과 때문에 사건묘사가 역사적으로 구체적으로 나타낼 수 없다는 부족함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 모순들이 현재 한반도, 열도, 동아시아의 전체 역사가 한결같다는 사실에서 공통적으로 짜집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한다.
동양역사를 풀어 볼 때 거의 일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희멀거래 하며 개성도 없고 색상도 없는 무미건조하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매우 단편적인 형태를 가졌다는 느낌을 매번 받는데 이것은 근세기에 짜맞춘 것이라고 수백번 되뇌인다.
현재 중국이라는 역사를 보면 한인(漢人)편중 역사일 뿐만아니라 몽골리안 일색(一色)의 역사이다.
일단 중국이라 함은 다문화적인 요소가 크고 동양서양할 것 없이 모든 문화를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모든 인물들의 삽화가 동양수채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과 도대체 서양역사 인물화상을 보면 그들이 해양개척시대라고 주장하는 15세기부터 마치 사진같은 세밀한 회화들이 넘쳐나게 존재하지만 동양역사 인물들은 거의가 붓으로 먹칠을 하고 전통적인 기법이라고 하지만 마치 대충그려놓은 듯한 것으로 이를 동양화(東洋畵)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이상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양화와 동양화가 그렇듯 갈려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동양에서 건조하였다고 함선과 서양에서 건조했다고 함선의 생김새 차이를 보라.
어찌그리도 다를까?
본 블로그 글 "[1]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 귀선(龜船)과 거북선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2 "에서 세세하게 지적한 것이지만 달라도 너무다르다.
동양에서는 주로 먹을 사용한 그림이 산수화, 수채화일 수밖에 없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왜 동양사람들은 특히 화가들은 아름다운 형형색색, 사실적 표현은 관심없이 보기에도 우중충한 마음의 색깔만 담으려 애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곧바로 생긴다.
왜 서양인물사진처럼 화려하지 않고 절제된 색감만을 나타내며 진실된 내면세계의 표현을 하려하고 전신사조(傳神寫照)만을 고집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불교의 불화를 보면 오히려 동양화가 더 화려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이것은 중국역사도 그렇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다양한 인종이 섞여 각자의 삶을 꾸려나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한반도 역사에서는 전혀 그러한 느낌조차 받을 수가 없다.
간혹 검은 얼굴도 있을 것이고 백인도 있을 것이며 코가 낮은 황인종도 있을 것이다.
위 그림은 프랑스화가 생 소뵈르 자크(Grasset Saint-Sauveur, Jacques:1757-1810)의 수채화로 그린 구리판화 작품 코리아 남성과 여성(homme et femme de Coree)이란 작품인데 여성에 품에는 아기도 있다.
코리아인(한국인)이 동양계 몽골리안인가.
아니다.
본 블로그 글 "삼한역사 말살의 도구로 사용된 삽화(揷畵)와 사진(寫眞)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8 "과 "붉은바다거북과 귀부(龜趺)의 진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86 "에서 말했듯이 조선(朝鮮)사람에는 갓을 쓴 벽안(碧眼)의 백인(白人) 코카소이드(Caucasoid)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말했고 강한 색깔의 흑인이 아닌 대비달자국(大鼻橽子國)의 사람들은 얼굴이 검고 코가 높은 서양인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어 이와 같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 적 있으며 또한 백인과 인디언의 혼혈이라도 하는 메티스(Metis)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본 블로그 글 "한국인 유전자와 북아메리카 연결-Haplogroup C3 (Y-DNA)
http://blog.daum.net/han0114/1705057 "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들에게 하플로 그룹은 "haplogroup Q(Y-DNA), Haplogroup R1(Y-DNA), Haplogroup C3(Y-DNA)"이 주로 검출되고 그 중에서도 "Haplogroup R1(Y-DNA)"을 가진 인디언들은 백인 통혼 이전 사진을 보아도 안와상융기(眼窩上隆起, supraorbital torus)가 발달하였고 코가 좁고 높은 형질이 많이 보이는 백색인종, 유럽인종을 이르는 코카소이드(Caucasoid)적 특징이 있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한반도사관이 제시하는 조선시대 인물들을 보면 동양계몽골리안이 전부이고 화상에 나타나는 얼굴은 그 인물이 그 인물이라서 도대체 개성은 찾을 수 없고 누가 누군지 도대체 구분이 잘 되지 않는 그래서 언듯 기억에 없는 그냥대충 그려놓은 듯한 기막힌 맹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과 비교가 될 수있는 서양 인물화는 그렇지 않다.
이것이 서양역사와 동양역사의 차이점이다.
현재 역사로 보면 동양역사는 어둡고 침침하여 볼 품없고 서양역사의 기록들은 빛이 넘쳐난다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러한 차이점은 서양우월심리가 깔려 있다 할 수 있겠지만 차이가 나도 너무 심할 정도이다.
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1866-1946)가 1920년에 세계사강(世界史綱:The Outline of History)을 출판한 시점까지 동양역사의 모든 자료는 별의미없이 취급되었을 가능성과 서양역사와 비교하기위해 갑작스럽게 볼 품없이 만들어졌을 것이란 추측이 강하다.
형편이 이러니 이미 역사기록전반에 걸쳐 인위적으로 차이가 나게 한 것이며 바로 서양근대화 주장과 일치하게 하여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이야기다.
위 일본인 사진들은 이탈리아태생의 영국사진작가 펠릭스 비토(Felix Beato)가 1860년경에 촬영한 것인데 그는 1863년부터 21년간 요코하마에서 살았고 동아시아의 사진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작가 중 한 명이라 한다.
명치유신시대 때 실제로 미개인 같은 복장을 한 일본만 하더라도 서양근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산업근대화를 이루고 급속하게 발전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들 역시 서양우월주의에 취해 마치 그네들이 서양인이 된 것처럼 으시댄다는 점도 있지만 이를 위해 음양으로 서양세력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서양세력들이 아시아정책에서 우선적으로 일본을 지정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가 깔려 있다 할 것이다.
물론 왜구일본문화라고 무시되거나 그 자체를 폄하해서는 안된다.
워낙 삼한역사가 거대한 것이어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지만 왜구문화가 다시말해 서양문화이다.
워낙에 노략질과 침략을 일삼던 왜구(倭寇)역사이기에 자포니즘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자포니즘이란 단어에서 'japan' 이 아니라 'japon' 으로 발음 하는 것은 이 사조 발흥이 프랑스와 관계가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 사실이다.
자포니즘(Japonism)이란 말은 1872년에 프랑스 미술비평가 필립 뷰르트(Philippe Burty:1830-90)가 최초로 사용한 것이라 한 사실을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풀어 보면 프랑스와 당시 일본은 지형적으로 거리가 가깝거나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가 있다.
일본이 근대화하면서 프랑스에 견문, 견학을 한다든지 군사적으로 근대식 교육을 받는다든지 매우 밀접하게 엮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1894년 청일전쟁(淸日戰爭:First Sino-Japanese War) 당시에도 전쟁비용이 2억 엔[60억 달러: 5조4천억원]이 소요되었던 바 프랑스로부터 전쟁자금을 급하게 지원받아 전쟁을 치뤘다는 사실도 그러한 관계를 진단할 수 있는 배경이다.
이와같이 그들의 빈곤한 재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청년학파(Jeune Ecole)주의 즉 북양함대의 대형 함선에 대항하여 소형의 빠른 전함를 사용하는 것을 따랐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현재 근세사에서는 일본이 당시 프랑스 흉내를 내었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프랑스 스스로가 한 짓을 일본이라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본 블로그 글 "[2]1886년의 조선해군력(朝鮮海軍力):92척의 전선(戰船)
http://blog.daum.net/han0114/17050733" 에서 풀어 본 이야기는 이렇다.
모든 중국문헌에도 갑오지역(甲午之役:1894)시기에 일본이라 하지 않고 그냥 왜(倭)라고 만 칭했다.
당시 청일전쟁 때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가 삽화그림을 보면 일본군인들의 모습에서 나폴레옹모자를 착용한 서양인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동인도회사 성격인 서양일본과 양키와는 같은 연합체로써 경제신흥국이라는 점에서 동질성을 말할 수 있고 1858년 발생한 안세이불평등조약(安政五カ国条約,Ansei Five-Power Treaties)의 주도5국[미국(양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중에 프랑스가 포함되고 있다.
서양사에 따르면 전통유럽역사를 가진 프랑스는 고대 로마시대때부터 유럽남부에 존재한 프랭크족의 후예라 한 사실을 본 블로그 글 "바질(Basil)은 난향[蘭香]과 영릉향(零陵香)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6" 에서 남월국(南越國)이 한무제(武帝:BC111)에 의해 멸망했다고 하는 동양역사를 이야기 하며 로마공화정(羅馬共和國:BC509-BC27, AD235)시기에 의해 멸해진 게르만족의 일파인 캘트족(Celts)을 원주민인 갈리아(Gallia:Gaul)와 동일하게 보아야 하며 갈리아족을 프랑크족과 연결시킬 수 있고 현대 국명 프랑스라고 결론 짓는 사실등에서 남월국은 뉴올리언즈를 중심으로 하는 조지아주와 플로리다주를 포함하고 그곳을 영주(瀛州)라 하였으며 또는 제주라 하였다는 사실까지 밝힌바가 있고 이곳을 베트남(越國)이라는 설도 보태진다.
왜냐하면 월국은 베트남과 엮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게도 베트남을 식민지통치(11864-1948)한 프랑스가 여기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가정해 본다면 프랑스는 유럽대륙에 속한 것이 아니라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존재하였고 서양 일본은 안세이5개국을 다 포함한다고 할 때 이를 표면적이던 아니던 더치(네덜란드)를 보함한 양키라고 할 수 있으며 양키가 미국이 될 때까지 북아메리카대륙이란 동일한 영토내에서 같이 존재했다고 하는 틀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와같이 안세이5개국이 공히 자포니즘(Japonism)을 환영한 것은 새로운 가공제품들을 상업프레임화하고 선전을 이롭게 하여 가공업자, 부르주아들에게 상당한 이윤을 남겨주었기 때문이다.
자포니즘의 사조가 프랑스인에 의해 활성화되었다고 하는 것은 당시 상업주의가 산업번영에 길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고 때문에 프랑스파리에서는 만국박람회가 수시로 개최되었다는 사실들은 당시 프랑스정권을 잡은 공화주의자와 상부상조할 수 있는 환경에서 부르주아들에게도 황금시대나 마찬가지였다고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공화주의자 시대라고 불리는 프랑스 제3공화국(Troisième République française:1870-1940)시기에 공화주의자와 부르주아는 협력자라 할 수 있고 프랑스에서 상업주의 사조들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정부의 정책적인 받침도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포니즘은 나폴레옹 3세(Charles Louis Napoléon Bonaparte,1808-1873,재위:1852-1870)때인 1867 년에 개최된 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 de 1867)에 일본 채색화가들이 제작한 100 여점의 작품을 전시한 것에서 출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에 의해 당시 19세기 중후반(1863-1890)사이의 자포니즘 사조속에 프랑스의 사회 모습을 담아내려 하였으며 서양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印象主義:impressionism)화가들이 이를 받아 적극적으로 모방하거나 그것으로 창작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정리되고 있다.
실제로 자포니즘 화가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실력자가 있었다.
바로 석판 인쇄공출신인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1798-1863)이다.
때문에 필립 뷰르트(Philippe Burty)는 정계의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던 외젠을 이용하면서 대중화를 노려 낭만학파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의 편지를 잡지를 통해 발표하였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외젠이 화가로서의 생애 동안, 보호받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루이필리프 왕(king Louis-Philippe)과 친부로 의심되며 프랑스혁명(French Revolution:1789-1794)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Charles-Maurice de Talleyrand-Périgord:1754-1838)에 의해 보호받았고, 후에 탈레랑(Talleyrand)의 손자인 찰스 오거스트 루이 조셉(Charles Auguste Louis Joseph)과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1808-1873)의 이복형이자 프랑스 하원의장 모르니 공작(Duc de Morny)에게 보호받았다고 알려진다.
사회적으로 막강한 비호세력을 자포니즘 또한 업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의 사회집단은 노동자, 프티 부르주아 공화주의자, 공화파 부르주아, 왕당파 부르주아등으로 구성되었다.
프랑스는 일반적으로 근세유럽역사에서 정치 및 문화, 예술적인 가치와 선두적인 입장에 있었고 영국(England)보다 앞서 있었던 중세유럽역사에서 주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쪽에서보면 그 영향력은 지대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때문에 유럽중세 르네상스문화의 꽃은 프랑스에서 만개했다고들 한다.
그만큼 프랑스는 유럽역사 문화예술의 대명사처럼 근세역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대혁명 역시 이러한 역학관계에서 발생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서양세력에서 주도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자본주의 요소라 할 수 있는 부르조아계급의 상징성 또한 프랑스에서 차지하는 가치가 매우 크다 할 것이다.
자포니즘은 상업주의에 의한 부르주아계급속에서 잉태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3)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자포니즘 화가
[그림]자포니즘 화가들의 특성
자포니즘화가들의 부모직업을 보면 개신교집안이나 부르주아들이 대다수이다.
프레데리크 바지유(Frédéric Bazille)는 개신교중산층,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프랑스정치인, 귀스타프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는 군수섬유사업상속자이며 상업법원판사이고, 메리 카사트(Mary Cassatt)는 주식투자자, 은행고리대금업자이며, 폴 세잔(Paul Cézanne)은 카톨릭신자이며 금융회사공동설립자이고,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는 은행원, 제임스 죠셉 띠쏘(Jacques Joseph Tissot)는 휘장사업상인,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는 상류층 외교관딸이며,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는 철도기술자,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는 정통적부르주아집안으로 세르현수석행정관리자,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는 성공한 포르투갈계 유대인상인이고, 오귀스트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는 재봉사, 알프레드 시슬레(Alfred Sisley)는 실크사업가,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는 개선교목사,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Henri de Toulouse-Lautrec)는 귀족집안이고,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역시 부유한 부르주아이며,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금화공기술자의 자식 등이다.
부르주아(bourgeois)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들을 일컫고 중세 유럽에서, 성직자와 귀족에 대하여 제삼 계급(第三階級)을 형성한 중산계급(中産階級)의 소위 시민이란 명칭이 있으며 부자(富者)라고 하는 자본가(資本家)를 말한다고 정리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력은 잉여자본력을 소유함으로써 삼부회(三部會)등장과 권력 중심부에 등장하였고 왕권주의가 약해지면서 입헌적(立憲的) 법치주의(法治主義)생성과 함께 새로운 권력계층인 법조계를 장악하고 자리잡는 사회적 또하나의 파워집단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럽사회에서 부르주아 부자가 권력을 사고팔고 하는 것은 당연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상업적으로 잡다한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법률관리를 그들이 장악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게 와 닿는다.
법조계를 주름잡는 것은 권력중심부에 있는 것과 같고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그렇게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어 계몽주의 시대의 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Montesquieu:1689-1755)는 개신교 아내를 둔 사람으로써 저서 <법의 정신Esprit des Lois,1748>을 통해 자유주의 입장에서 권력분립에 의한 법치주의를 제창하였으나 그는 부르조아출신이며 백부의 작위와 봉토를 계승하여 제2대 몽테스키외 남작(Baron de secondat Montesquieu)이 되었으며 당시 백부가 맡고 있었던 보르도의 지방법원의 원장직을 계승할 수 있었지만 세습하여 물려받은 그의 법원 원장직을 경매로 처분하고 파리로 이주하여 연구와 저술에만 전념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즉 법치주의라고 하지만 법을 제정하고 관리하는 법원 원장직을 경매로 사고 팔고가 가능했다는 사실은 삼권분립을 무색하게 하는 당시 자본의 위력이며 그 자본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가 있다.
여기서 자포니즘(Japonism)을 좀 더 알기 위해서는 부르조아 즉 자본가가 소유할 수 있는 모든 사회적 속성(社會的屬性)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어쩌면 유럽역사의 주체는 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미화시키고 더욱 부르주아 가치를 상승시키는 도구로 이용된 것이 바로 자포니즘이 아닐까 한다.
어쩌면 서양위주의 상업적 가치를 최대한 효과를 나타내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시대적 패러다임(paradigm)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개인 공업기술에 한정될 수 있는 자포니즘이 정치적으로 확대되어 국가의 제국주의(帝國主義:imperialism)로 발전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잉여자본은 부(富)를 잉태하고 권력을 창출하지만 또 다른 식민주의를 양산시키는 수단이 된다.
제국주의는 다른 민족, 국가의 영토를 침략하여 국가의 지배권을 확대시키려는 정책 행위라 하였고 패권보다는 영역의 지배를 확대하는 정책 또는 사상을 가리킨다고 정리되어 있는데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하다.
즉 자본을 축적한 서양제국들은 월등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증대시켜 지배력을 확장하고자 하는 착취세력으로 등장하였고 독일어의 제국(帝國)이란 단어가 "라이히(reich)가 부(富)" 이듯이 제국이라 함은 자본력이 충부한 부유한 세력집단인 동시에 지배권을 확대할 목적의 집단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즉 당시 자본력은 개인이거나, 일반 조직이거나 또는 주식회사이거나, 국가이거나 할 것 없이 법률을 이용한 강권, 압박, 권력남용, 무력행위 등을 이용하여 지배력을 확장하는 것이 근본 목적이었다는 것은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고 지배권을 소유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19세기부터 자리잡은 부르조아나 제국주의의 적나라 한 모습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돌아가, 자포니즘(Japonism)어원에서 찾아보면 또한 더치(네덜란드)의 영향력도 컸다고 보인다.
자폰은 17세기부터 일본역사에서 중간 매개체 역할과 야누스(Janus)와 같은 역할을 한 더치어(Dutch language), 네덜란드어로 '야폰(japon)'이라 하고 그것은 '남성들이 집에서 입는 편한 옷' 또는 '여성복'이란 의미도 있으며 '드레스[조례복(朝禮服)]', '가운'이란 뜻도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현 일본인들이 즐겨 입는 화복, 와후쿠(和服)를 말하는 것이며 일본인 남자는 몬츠키하카마(紋付袴), 여자는 후리소데(振袖)라 하는 기모노(着物)를 말하여 그것을 마치 오랜 된 열도일본인들의 고유복장인 것처럼 우리는 인식하고 있지만 실상은 오랜 더치의 관습적 용어임도 알 수가 있다.
또한 기모노에 무늬가 다양해지고 화려해 진 것은 16세기부터 포르투갈인과 더치(Dutch)인의 방문으로 새·꽃·사람 등의 무늬를 여러가지 빛깔로 날염한 천인 사라사(更紗)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자료가 보이는데 의복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으로 남만(南蠻)이란 세력들의 영향력이 지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고 남만(南蠻)인들이 일본인처럼 화려한 색상을 즐겨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자포니즘이라고 하는 작품을 보면 전부 이런 화려한 형태의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많다.
즉 이것은 오늘날 산업미술, 산업디자인을 떠올리게 하는 것으로써 그 자체가 상품이며 당시 사람들에게 제품자체가 화려하게 각인되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바로 현대적으로 이야기 하면 당시 생산된 일반 소비재, 장식품등 소비자의 소비욕을 촉진시키는 현대적인 산업미술, 디자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많은 소비욕을 자극하여 판매를 증가 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상 이것이 자포니즘 가치의 핵심적인 이야기다.
새, 꽃, 사람 등으로 묘사된 열도일본인들의 19세기 삽화들은 열도일본인들의 고유창작물이 아니라 이미 상업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소비욕을 자극시킬 수 있는 디자인들을 이용하여 만든 상품들은 포르투갈이나 더치 상인들에 의해 전달된 상당히 서구화된 도식적 작품이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청일전쟁은 고려(高麗)와 서세(西勢日本)의 충돌
http://blog.daum.net/han0114/17050727" 에서 밝혀보았지만 일본의 다양한 색상의 목판화인 네덜란드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의 "탕기(Tanguy) 할아버지"작품의 배경으로도 쓰였던 우키요에(浮世繪:Ukiyoe)화풍의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활동을 하였다고 알려지는데 여기서 네덜란드가 일본일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으며 어쩌면 빈센트 고흐가 우키요에의 대가이었을 수도 있다.
상업을 중심으로 세력화된 유럽인 즉 서양해양세력들은 주요고객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거나 소유욕을 북돋우기 위해 상품을 최대한 아름답게 디자인해야 하는 것에서 우키요에 판화법이 적용되었던 같다.
그렇다면 선진중상주의를 표방한 서양인들에게 그 전에는 이러한 사조가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동양적 사조의 존재성이 들어난다.
이미 자포니즘이 활성화되기 훨씬 이전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의 절대적인 고객이었던 유럽 귀족 사이에 생성된 또 하나의 사조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있다.
앞에도 이야기 했지만 자포니즘과의 차이점은 바로 고객이 봉건주나 귀족들이라는데 있고 주체가 중국이라 점과 자포니즘은 서양인이 주체라는 사실이 다르다.
생각컨데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난 후 조선사회의 진상과 중국이란 체제특이성등이 알려지고 이것이 호기심으로 다가 간 것이라고 풀이된다.
중국풍 취미가 한껏 유행되어 소위 17세기 유럽, 18세기 독일과 남아메리카에 유행을 한 바로크(Baroque)예술이나 18세기 프랑스에서 생겨난 예술형식인 로코코(Rococo)양식의 미술공예품에서 특히 많이 볼 수 있었고 대표적인 예가 베르사유 궁(Château de Versailles)의 정원에 만든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 재위:1643-1715)의 이궁(離宮)에 중국의 청화자기(靑花磁器)를 본딴 도기(陶器)와 도판(陶板)으로 내외를 장식한 ‘자기(磁器)의 트리아농(Grand Trianon)을 1687년에 해체해서 세우게 했다고 알려지며 그 이후 각국의 궁전(宮殿)이나 별궁(別宮)의 정원에 시누아즈리(chinoiserie)의 파고다(塔婆:pagoda, Stupa)나 키오스크(亭子:kiosque)가 세워졌다고 알려진다.
로코코(Rococo)어원은 프랑스어로 로카유(rocaille)와 코키유(coquille)인데 이는 ‘정원의 장식으로 사용된 조개 껍데기나 작은 돌의 곡선’을 의미하는 것으로 1422년 세종조(世宗朝)에 일본에서 조선왕을 천제(天帝)라고 칭한 사실과 함께 연못을 조성하는데 바닥에 수마석(水磨石)을 깔아 장식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자포니즘은 인쇄기술자, 판화가, 전위화가(前衛畵家)들에 의해 대중적으로 크게 방향성(方向性)이 있었던 반면 시누아즈리는 궁중 공예기술자나 건축가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는데 대중이 아니라 특수한 봉건주나, 귀족사회란 한정된 계층이라는 것이 다르다.
이 수마석을 오늘날 테라조(Terrazzo)라고 하며 이러한 장식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으로부터 인데 1890년대 말엽(末葉)이라고 한다.
19세기말엽에 부유해진 양키들에게 신흥귀족처럼 동양사조 시누아즈리를 받아들여 옛 동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이야기다.
또한 이러한 중국식 양식은 18세기에 유행한 영국식 정원의 일부로도 보급되면서 그들은 중국 또는 동양풍의 이국적인(exotic) 인물, 풍경, 문양 등의 장식 주제를 애호했으며, 그 범위는 실내장식, 가구, 도자기, 직물, 장식 등을 위시하여 널리 회화나 판화에까지 미쳤다고 알려져 이미 회화(繪畵)나 판화(版畫)는 중국풍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가 있다.
당시에 이렇듯 유럽인들에게 중국 도자기(陶瓷器)가 최고의 상품으로 가치를 얻으며 인기를 누렸고 이에 자극받은 유럽인 스스로 이를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포르투갈이나 더치(Dutch)무역상인들에 의해 설치된 동양관문인 나가사키 무역상관은 중국상품을 수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다는 사실과 당시 일본에서 도자기의 기술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을 발생시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당인(唐人)이라고 칭하던 조선인 도공(朝鮮人陶工)들을 포로로 납치하여 노예로 삼고 도공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는 사실도 한반도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가 있다.
포괄적으로 조선 내에 존재한 중국이라는 곳은 특히 장사아치 서양인들이 들락거릴 수 있는 시장 공간으로 중앙행정관청이 있는 곳이며 도공(陶工)들이 도자기를 제작할 수 있었던 곳은 바로 조선영내(朝鮮領內)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요측면에서 볼 때 유럽귀족고객들이 요구하던 자기(瓷器)들을 무한정 수입할 수 없었다는 사실과 선진기술을 습득하고자 노력했던 것은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임진왜란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임을 동시에 추정할 수가 있다.
임진왜란이 종결되고 난 후 주범들을 처리하고 수습이 되면서 유럽인들은 도자기 제작방법을 자체적으로 습득하여 상품화할 수 있었고 유럽각지에서 중국도자기를 모방하여 각종 화려한 도자기를 생산하게 이르렀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오랜시간 동안 제품질이 떨어져 귀족들의 소유욕을 충족시킬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만큼 조선도공(朝鮮陶工)기술은 유럽인들이 흠모할 만큼 우수한 선진기술이었음이다.
18세기말에 발생한 프랑스혁명은 귀족사회를 붕괴시켰고 19세기 초엽사이에 발생한 산업혁명은 수많은 생활용품이 유럽인들에 의해 대량 생산되면서 대량공급으로 인해 가격이 싸지면서 이런 값싼 소비재를 통해 새롭게 부상한 부르조아계급들의 생활은 점차 귀족화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경쟁적으로 점점 화려한 것을 요구하는 소비자가 증가하게 되자 좀 더 화려하고 소비욕을 자극할 수 있는 상품디자인 판화기술이 우키요에 화법으로 인정되며 그러한 판화기술과 인쇄술이 융합되어 자포니즘이란 사조가 생성된 것이라고 최종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에 의해 1862년 런던만국박람회(1862 International Exhibition)와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1867)를 통해 일본 도자기와 차, 부채, 우키요에 판화등이 서양인들에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고 서양인들에게 일본의 문화 및 예술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정확하게 연결된다.
4)자포니즘과 양키일본
자포니즘의 산실이라고 하는 일본은 유럽인들의 소비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생산기지이었을 것이다.
이것과 맥을 같이 하는 중요한 역사사실이 인디언의 삶을 노래한 음악에서 발견된다.
1971년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Paul Revere & the Raiders) 5인조그룹이 원곡을 리메이크하여 부른 인디언 보호지구(Indian Reservation)란 음악은 글쓴이에게도 매우 친숙한 노래이다.
이 노래 가사에서 보면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이 있는데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are nowadays made in Japan~우리가 손으로 꿴 구슬들은 지금은 일본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네."이다.
여기서 일본(Japan)이라 함은 바로 백인이주민 양키를 지칭하는 것이다.
즉 체로키족(Cherokees)들이 떠난 북아메리카대륙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동남부지역에 일본인들이 거주한 사실이 밝혀진다.
그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무조건 양키라고 하면 안된다.
그곳은 옛 프랑스인들이 개척했다고 하며 프랑스를 위해 미시시피 강으로 배수된 영토라고 하는 루이지애나준주(Louisiana Purchase:1682–1762)영역이다.
본 블로그 글 연속시리즈편 " (1)숙종과 루이14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5 , (2)영조와 루이15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6 , (3)정조와 루이16세 http://blog.daum.net/han0114/17050507" 에서 조선(朝鮮)과 프랑스가 밀접하게 엮이는 시기를 1661년부터 1800년까지라 주장한 것이니 만큼 이것 역시 루이지애나 준주(準州)의 지속시기와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루이지애나준주(Louisiana Purchase:1682–1763, 1801-1803, 1804-1812)
우선적으로 유럽역사 즉 서양역사가 주장하는 사실에서 진의를 밝혀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포니즘이 생성되기 전부터 이곳에는 일반 수공업에 의한 상공업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완성되고 더하여 산업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는 회화기술이나 판화기술, 인쇄술이 높아졌다는 것도 알 수가 있는 시대환경임을 앞 글에서 확인했다.
당시 파리박람회를 찾았던 관람객만도 천오백만명(Visitors:15,000,000)이었으며 참가국 42개국의 판매전시자(Business)가 52,200 개소이었다는 사실에서 신흥 중산층계급의 부르주아들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들에 의해 대중적으로 상당한 소비욕구가 생성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가 있다.
값싼 소비재들과 화려한 도자기들은 신흥 중산층들에게 새로운 소비유행을 만들었고 이러한 것들을 새로운 취미생활로 이어지면서 도자기 그릇, 찻잔, 장식장, 가구등을 집안에 장식하거나 수집하면서 마구 사들이는 신흥부르조아들이 넘쳐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당시 공예(工藝)의 혁명이라고 하니 오늘날 3D 프린트기술 혁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볼 때 19세기말엽에 유럽인들의 생활패턴을 바꾸고 소비욕을 증가시켰다고 하는 자포니즘과 선조격인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에 봉건주와 유럽귀족들에게 불어닥친 시누아즈리(chinoiserie)의 영향력도 역사적으로 상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인디언 보호지구(Indian Reservation:1979)-노래:올랜도 리바 사운드(Orlando Riva Sound)-앤소니 문과 라이너 피치(Anthony Monn and Rainer Pietsch)
They took the whole Cheroke nation
put us on this reservation
Took away our ways of life
tomahawk and the bow and knife
Took away our native tongue
taught their English to our young
And all the beads we made by hand
are nowadays made in Japan
Cherokee people, Cheroke tribe
so proud to live, so proud to die
그들은 체로키 땅 전부를 가져갔네
우리를 이 보호구역에 쳐박아두고
우리의 생활 방식 , 돌도끼
그리고 활과 칼 마저 가져가 버렸네
우리의 모국어도 빼앗고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네
그리고 우리가 손으로 꿴 구슬들은
지금은 일본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네
체로키 사람들, 체로키 부족
자랑스럽게 살고 자랑스럽게 죽네
위 음악 가사는 전자에 이야기하였던 인디언 보호지구(Indian Reservation:1979)란 서정적인 노래의 가사이다.
1979년 올랜도 리바 사운드(Orlando Riva Sound)는 "Lady, Lady, Lady"와 함께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독일을 대표하기 위한 경쟁에서 5위를 차지했다. 그 해, 그들은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Paul Revere & the Raiders)의 히트곡인 "Indian Reservation"으로 또 한번 히트곡을 냈다.
5인조그룹 폴 리비어 앤 더 레이더스에 의해 1971년 7월 24일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백만장이 넘는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였던 이 곡은 북아메리카 인디언(원주민)들의 한 부족인 체로키(Cheroke) 족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아픈 현실을 노래하고 있는데 특히 가사 중에 체로키족이 생계로 이어가고 있는 꿴 구슬조차 양키일본(Japan:nation개념)에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본 블로그 글 "요코하마가 어딘가. http://blog.daum.net/han0114/17050823"
의 소제 재퍼니스(Japanese)와 흰독수리 상징의 역사에서 말한 사실과 같이 일본은 북아메리카대륙에 존재한 양키들이다.
이 양키는 특별하게 국가나 민족개념이 없고 오직 개신교를 바탕으로 하는 집단인데 이들의 정체성도 모호한 것으로 대체적으로 이주민 백인을 지칭한 명칭이다.
물론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벌어진 역사는 신대륙(新大陸)이란 모호한 명칭아래 서양세력들이 유럽에서 이주한 16세기 전에 역사는 깡그리 무시되고 있어 서양자료만 보고 우리가 본질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현재 미국인들이 개척시대라 하여 동양계나 혼혈계, 아프리카계, 타타르계, 기타 미국시민 귀화한 계층들은 완전히 무시하고 조선왕조실록에 야인(野人)으로 기록된 인디언들만 개척의 대상이 된 것처럼 주장하는 것도 모순이라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미국시민으로 귀화하지 않고 남아 있던 인디언원주민 이외 사람들은 거의가 추방령으로 추방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필요가 있는데 다음 사진이 말해 주고 있다.
엉클 샘(Uncle Sam:US,미국정부)추방법(Indian Removal Act)과 미국이외 지역으로 소개령(疎開令)
인디언 체로키족(Cherokee)에 대해 역사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들이 북아메리카대륙을 점령하기 시작한 16세기부터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에 대해 바르게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여 인디언이란 개체만을 놓고 우리역사전체로 보는 것도 무리가 있는 사실이다.
16세기에 양키(이민자, 정착지없이 떠돌아다니는 백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북미대륙의 동부(東部)에서 남동(南東)쪽 걸쳐 미시시피 강(Mississippi River)유역에 체로키족이 살고 있었고 프랑스, 영국, 미국간에 프렌치 인디언 전쟁(French and Indian War:1754-1763), 앵글로 체로키 전쟁(Anglo-Cherokee War:1758-1761)과 치카모가 전쟁(Chickamauga Wars:1776-1794)에서 조상의 영토를 지키고자 체로키족은 노력 하였지만 결국 열세을 면치못하였고 1794년 양키와 사이에 텔리코블록하우스조약(Treaty of Tellico Blockhouse)이 체결된 후, 문명화의 길을 용감하게 걸었다고 하고 있으며 그들은 치카소(Chickasaw), 무스코기부족연합(Creek:Muscogee),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과 5대 부족의 연합을 결성하고, 백인의 문명을 받아들여 서양교육제도, 관공서, 공장같은 백인사회 구조 등을 도입하는 등 문명화된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국 그곳마저도 금(gold)이 산출된다는 이유만으로 쫒겨났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체로키 원주민 공동체의 서구화는 미개해서 서양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는 편견을 깨뜨렸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만큼 사회역사성이 강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830년대에 조지아주(Georgia)의 골드러시(gold rush)로 인해 양키들이 그들의 토지에 난입해 왔고 켈트족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이며 붉은머리 소유자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1767-1845,재임:1829-1837)대통령은 취임직후 1830년 제정된 ‘인디언 추방법(Indian Removal Act)’에 따라 미시시피 강 동쪽에 살던 6만명의 "5대 부족" 인디언들을 1838년 아칸소(Arkansas)와 오클라호마(Oklahoma)의 ‘인디언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체로키 족들은 이에 대항하여 저항 전쟁을 벌였고, "세미놀 전쟁" 등의 인디언 저항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제1차 세미놀 전쟁(1817-1818), 제2차 세미놀 전쟁(인디언의 베트남(南越)전쟁:1835-1842), 제3차 세미놀 전쟁(1855-1858)이다.
1853년에는 미국 동인도 함대를 인솔하여 일본 방문했다고 하는 페리의 흑선(黑船)사건도 있었다.
5대부족에 대한 강제 원주민 이주는 도보로 진행되었고 이를“눈물의 길”(Trail of Tears)이라고 불렸으며 당시의 기록은 "무덤에 들어가기 직전의 노파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걷고 있었다"고 기술되어 이런 가혹한 강제 이주는 체로키족만 8천명 가까운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5대부족이었으니 얼마나 더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테네시, 켄터키, 일리노이, 미주리, 그리고 아칸소주 전역에서 800마일[1,287(km)]이상 떨어진 곳까지 걸었고 결혼을 한 사람들은 질병, 유해한 환경노출, 기아로 고통 받았으며 4,000명이 사망했다고 했으며 체로키인(Cherokees)들은 노예를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흑인노예들을 데리고 갔다는 말도 있다.
다른 기록에는 미국정부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한겨울에 그들의 고향에서 쫓겨나 1900km나 떨어진 인디언 보호구역에 강제이주되었으며 헐벗고 굶주린 체로키 원주민들은 무려 4천명이나 저체온증이나, 영양실조로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인디언보호구역'에 갇힌 체로키원주민(Cherokees)들은 약간의 보조금을 받으며 기념품 장사를 하여 겨우 살았지만 북아메리카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앞날에 대해 희망을 가지거나, 세상을 바꾸려는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생각을 할 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 중독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았다고 하였다.
노스캐롤라이나주를 비롯해 동부에서, 남동쪽에 있었던 체로키 족(Cherokees) 일부는 백인의 도움으로 산 깊은 곳에서 숨어 강제 이주를 피해 현재 “동부 체로키 족”(인구 약 1만명)의 시조가 되었다고도 한다.
체로키 족(Cherokees)이 사라진 조지아 등 남부의 광대한 토지는 추점에 의해 양키들에게 그냥 나눠 주었고 나중에 면화산지로 변신하게 되었다.
이렇게, 체로키 족은 크게 서부와 동부로 분단되게 되었다.
1971년에 히트했던 곡 인디언 보호구역(Indian Reservation)은 그러한 나라와 언어를 강탈 당했던 체로키 등 원주민들의 비극적인 삶을 잘 표현한 노래이다.
이것을 연장하여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생각해보면 이런 서양세력에 의해 취해진 강제이주의 역사는 고려인(高麗人)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공화국으로 추방되는 대대적인 강제이주(deportatsiya)가 1937년 겨울철 시작되었고 최종적으로 마무리된 것이 바로 본 블로그가 말한 "1937년 10월 29일자에 러시아인들이 말하는 고려송환완료? http://blog.daum.net/han0114/17050102" 로 나타난다.
본 블로그 글 "북미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주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69 "에서 밝혔지만 북아메리카대륙에서 기존체제의 구성원들을 추방시킨 일지를 보면 (1)1830년 제정된 ‘인디언 추방법(Indian Removal Act), (2)1882년에 발효된 중국인추방법(Chinese Exclusion Act), 그리고 (3)10년 후 1892년 게리 법(Geary Act)에 의해 갱신되었고 (4)1902년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추방법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 (5)1917년부터 1920년과 1947년부터 1957년동안 사회주의자와 미국건립역사에 반하는 세력 추방운동 등 고립정책에 의한 추방정책은 미국내에서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여기에는 동양계 아시아인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위 그림은 1902년에 시어도어 루스벨트대통령에 의해 추방법이 무기한으로 연장되었다는 사실을 근거하는 그림인데 1904년부터 인위적으로 코리아를 만들고 노랑색 즉 황인종만을 코리아 땅으로 소개시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그림이고 더하여 동양인을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부류와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다는 글을 찾을 수가 있다.
사실상 붉은 괴물은 어떤 주체를 말하는 것일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 유색인종들을 문명세계에 인도하는 '백인의 책무'을 짊어진 존 불(John Bull:잉글랜드정부)과 엉클 샘(Uncle Sam:US,미국정부)이다.
고려인이라고 하면 한반도역사에 일치하는 한국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고려인에도 수많은 다른 종족도 포함되었다고 해야 맞다.
다만 한글이나 한문으로 고려인(高麗人:Korea)이라고 하는 사람만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고려인(高麗人)들은 본래 거주하던 원동(遠東)에서 이주되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고려인들이 말하는 원동(遠東)은 현재 블라디보스톡(海蔘威:Vladivostok)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만약 원동을 연해주라고 하면 본 블로그 글 "연해주(沿海州)와 쌍성雙城)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http://blog.daum.net/han0114/17050581"에서 밝힌 연해주는 캐나다 동부 중 뉴브런즈윅(New Brunswick)주,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Prince Edward Island)주 전체를 가리키는 마리팀즈(Maritimes)이며 연해주가 아니고 먼동쪽이란 단어 원동(遠東)이라고 하면 바로 체로키족이 추방당하기전 미시시피강 동부에 위치한 고려인들이 존재한 영토 지명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
당시 소련 비밀경찰 수장 예조프(N. Ezhov)내무인민위원은 몰로토프(B. Molotov)인민위원회 위원장(총리)에게 보낸 같은해 10월 29일자 서한에서 모두 171,781명의 한인을 “송환” 완료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Bugai,159-160),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서 넘어오는 과정에서 고려인 에리트 수천명이 사살된 상태였기 때문에 정확한 진의를 알 수도 없고 미국과 쏘련 정치인들에 의해 상당한 역사사실이 숨겨지고 감추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양키들에 의한 추방법으로 이민족의 소개(疏開:내쫓음)가 마침내 마무리 되었다는 사실은 마침내 서양세력들에 의해 역사짜집기가 완성되었다는 것과 같다.
5)미농화지(美濃和紙:Mino washi)
HOLLAND JAPONISM Dutch artists x Mino Washi send message of Beauty to the world Japonism has its origin in the early 17th century Holland and has influenced European artists in the 19th century.In 1609 de Liefde (VOC) headed for Japan at the risk of their lives. They encountered beautiful Japanese paper and took some back to Europe.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is one of the famous artist in the 17th century the Netherlands. He liked using beautiful Japanese paper called GANPI in his works.Even though each part of history seems to be disconnected from each other, actually history is an accumulation of small DNAs.Then Japonism spread throughout Europe in the 19th century.In the 21st century, Japanese paper goes beyond space-time and lives on to bring beauty around the world.Now this paper is handed back to Dutch artists again, for them to work on it as an homage to History.Holland JaponismA new history of Japanese paper has just started.
자포니즘이란 주제로 정신없이 마구 달려왔다.
이제 일본 종이라고 하는 미농화지에 대해 생물학적 근원와 원산지를 살펴보자.
미농화지는 우리가 미농지(美濃紙)라고 하는 것으로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질기고 얇은 종이이며 묵지(墨紙)를 받치고 글씨를 쓰거나 장지문 따위에 바르는 데에 쓰는 종이라고 정리된다.
일단 특징은 얇고 질기다는데 있다.
위 영어자료는 네덜란드의 자포니즘역사에 대한 자료이며 여기서도 미농지를 말하고 있다.
내용을 보면 더치(Dutch)의 화가(畵家)와 미농화지(Mino Washi)가 아름다움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했다고 하면서 더치의 동인도회사(VOC)소속 함선 데리푸데호(De Liefde)가 1609년에는 히라토(平戶)에 상관을 설치하고 화지(和紙)를 얻어 유럽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며 이것을 감피, 간피(Ganpi) 또는 화지(和紙)라 하거나 미농지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17세기 더치 출신 화가 렘브란트 하르먼스 판 레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은 그의 작품에서 윤기가 나고 매끌매끌한 간피(Ganpi)란 아름다운 일본종이(Japanese paper)를 사용하기를 좋아했고 이러한 역사의 작은 DNA의 축적이 유럽전역에 19세기에 자포니즘이 생성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참고:조엄(趙曮),해사일기(海槎日記); 金健瑞,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世界大百科事典 第2版の解説(http://kotobank.jp/dictionary/sekaidaihyakka/)
みのがみ【美濃紙】미노가미
岐阜県美濃市で漉(す)かれている和紙の総称。書院紙ともいう。古代において,美濃国は最も製紙の盛んな国であった。日本最古の紙は702年(大宝2)の美濃,筑前,豊前の戸籍用紙であるが,そのなかでも美濃の紙は純コウゾ皮を原料としたので,繊維が均等に絡みあって,漉きむらがなく優れている。古代の美濃紙は国府(不破郡垂井町)を中心として,揖斐(いび)川流域で漉かれたものと想像される。中世になって,美濃紙の技術はさらに向上し,各種の紙を漉き出すようになった。
위는 또 미농지에 대한 열도일본자료이다.
내용을 보면 기후현(岐阜縣) 미노시(美濃市)에서 생산되는 일본 종이라 하였고 고대 미농국(美濃國)은 제지(製紙)가 성한 지방이었다고 하였으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종이는 702년의 미농(美濃),축전(筑前),풍전(豊前)지방의 호적용지(戸籍用紙)라 하였고 그 중에서도 미농지는 삼지닥나무(=かみのき·かぞ)카미노 키카조 껍질을 원료로하여 섬유가 균등하게 얽혀있어 기복이 없이 우수하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의 미노가미(美濃紙)는 소재지(후와군 다루이초)를 중심으로 이비강(揖斐川)유역에서 손으로 가둠뜨기한 것으로 추측되며 중세가 되면서 미농지의 기술은 더욱 향상되고 각종 종이를 양산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 종이 미농지를 다른 명칭으로 서원지(書院紙), 농전(濃牋), 농주지(濃州紙), 미농화지(美濃和紙)라고도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왜지(倭紙)라 하고 이것이 곧 화지(和紙)의 한 종류이며 특히 희고 반들거리며 질긴 편이라 하였다.
재질에서 일치한다.
우리 사서(史書)들을 보면 이 미농지는 일본 측에서 조선(朝鮮)사신들에게 주었던 예물 가운데 하나라 말하고 1763년 정사 조엄(趙曮), 부사 이인배(李仁培), 종사관 김상익(金相翊)등 통신사 일행이 도쿠가와 이에하루(德川家治)의 습직(襲職)을 축하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이듬해 태수의 근족(近族)인 가즈사(上總) 오타키번(大多喜藩) 번주 마쓰다이라 마사하루(松平正溫)가 조선사신에게 답례로 미농지를 주었다고 기록이 있으며 또한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권5, 지(志)편에 일행이 받은 사예단(私禮單)에 태수근족(太守近族) 중 4인이 보낸 각각의 미농지(美濃紙)가 300첩이라고 하고 있다.
Wikstroemia ganpi Maxim.
= Daphne ganpi (Sieb. & Zucc.) J.J.Halda
= Diplomorpha ganpi Sieb.
= Passerina ganpi (Sieb. & Zucc.) Sieb. & Zucc.
= Stellera ganpi (Siebold & Zucc.) Meisn.
= Stellera ganpi Sieb. & Zucc.
= Wikstroemia canescens var. ganpi (Sieb. & Zucc.) Miq.
= Wikstroemia lasiocarpa Nakai
미농화지를 8세기부터 만드는데 일본자료에는 사용되어 온 일본 관목은 윅스트로우미아(蕘花屬:Wikstroemia)라 말하고 있다.
간피(雁皮:ガンピ,Gampi:Ganpi)라는 것은 참닥나무를 뜻하는 [식물]안피나무; 삼지닥나무을 말한다.
즉 현재분류체계에서 간피(Ganpi)를 종명(種名)으로 학명 윅스트로우미아 간피[Wikstroemia ganpi(Siebold & Zucc.)Maxim]를 말하고 있지만 이 학명은 본 블로그에서 밝힌 근세기에 식물분류체계를 이용하여 세계삼한역사 자취를 없애버린 장본인으로 가장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독일인 지볼트와 주카리니(Siebold & Zucc)가 1851년에 명명(命名)한 것임을 알 수가 있고 나중에 러시아인 막시모비치(Karl Johann Maximowicz:1827-1891)의 이름을 학명에 달고 있는데 본 블로그 글 "한반도 분류학체계의 문제점 http://blog.daum.net/han0114/17050489"에서 밝혔지만 이 사람역시 조선생물분류체계가 생성되는데 채집한 표본을 바탕으로 한반도가 근원이라고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이 종(種)은 동아시아와 일본에 정확하게 원산지로 포진하고 있다.
이를 한반도 생물학계에서는 산덕나무속(屬)에 넣고 이것을 왜저(倭楮)라고 하면서도 또한 근거도 없이 "거문도닥나무"라고까지 한다.
그러나 열도일본산과 다르게 한반도는 산닥나무[Wikstroemia trichotoma(Thunb.) Makino]라 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식물학의 아버지” 또는“열대지방에 있는 일본의 린네"란 별칭을 가지고 있는 스웨덴식물학자 칼 페테르 툰베리(Carl Peter Thunberg:1743-1828)가 명명한 학명 뒤에 조선사람이 아닌 일본인 식물학자 마키노(牧野富太郎:Tomitaro Makino,1862-1957)가 버티고 있다.
열대지방 일본이 어딜까?
멕시코와 카리브해라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일본화지의 재료를 거문도닥나무라 한 것은 이 종(種)들이 한반도 남부에 재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맞추기 위함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거문도는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는다.
산닥나무속(Wikstroemia)왜저(倭楮)(산닥나무와 거문도닥나무)
요화속(荛花属:Wikstroemia)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未分级) 被子植物 Angiosperms
(未分级) 真双子叶植物 Eudicots
目: 锦葵目 Malvales
科: 瑞香科 Thymelaeaceae
屬: 荛花属 Wikstroemia
Gampi
Gampi or Ganpi are a group of Japanese shrubs, members of the genus Wikstroemia, some of which have been used for making paper since the 8th century. It is used to make the high quality washi paper, as are kōzo and mitsumata trees.
세종 12년 경술(1430)8월 29일(정유)
예조에 전지하여 대마도에서 왜저를 구해오게 하다
예조에 전지하기를,遣人于對馬島, 求得造冊紙倭楮以來。
“대마도(對馬島)에 사람을 보내어, 책 만들 종이 왜저(倭楮)를 구해 오게 하라.”하였다.
세종 16년 갑인(1434)8월 3일(정미)
경상도 동래현과 경기 강화에서 재배하는 왜닥의 작황상황을 감사가 보고하게 하다
예조에서 전지하기를,慶尙道 東萊縣及京畿 江華, 栽植倭楮, 未有考察培養之條, 恐將絶種。 令監司每年夏秋, 開具榮枯之狀以聞。
“경상도 동래현과 경기 강화에 왜닥[倭楮]을 재배하였으나, 가꾸는 것을 고찰하는 조문(條文)이 없어서 장차 절종(絶種)이 될까 두려우니, 감사로 하여금 매년 여름과 가을에 잘되고 못된 상황을 갖추어 아뢰게 하라.”하였다.
세종 21년 기미(1439)1월 13일(임진)
조지소에서 왜닥씨를 태안ㆍ진도ㆍ남해ㆍ하동에 나누어 심게 할 것을 아뢰다
조지소(造紙所)에서 아뢰기를,○造紙所啓: "江華所種倭楮之實, 請於海氣相連忠淸道 泰安、全羅道 珍島、慶尙道 南海ㆍ河東分種。" 從之。
“강화(江華)에 심은 왜닥 씨[倭楮種]를 바다 기운이 서로 연해 있는 충청도의 태안(泰安), 전라도의 진도(珍島), 경상도의 남해(南海)ㆍ하동(河東)에 나누어 심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조 7년 신사(1461)8월 20일(정해)
군사 김영전을 파직하고 국문토록 하다
○丁亥/先是, 有僧信云啓全羅道 靈光 時兒島有倭楮, 卽馳書于觀察使, 令培養之, 至時信云訴于司憲府曰: "郡事金永湔 ‘以僧啓楮木産處, 煩擾郡民’, 拘留海島, 且加大杖, 欲致於死, 適遇濟州船, 潛逃(而)而來。" 憲府啓之, 命罷永湔職, 令拿來鞫之。
이 앞서 중[僧] 신운(信云)이 전라도(全羅道)의 영광(靈光) 시아도(時兒島)에 왜저(倭楮)가 있다고 아뢰므로, 곧 관찰사(觀察使)에게 치서(馳書)하여 가꾸어 기르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신운이 사헌부(司憲府)에 호소하기를,“군사(郡事) 김영전(金永湔)이, ‘중[僧]이 닥나무[楮木] 나는 곳을 아뢰어 군민(郡民)을 번거롭게 한다.’고 하여, 바닷섬에 구류(拘留)시키고 또 큰 매로 쳐서 죽음에 이르게 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제주(濟州)의 배를 만나 몰래 도망쳐 왔습니다.”하므로, 사헌부에서 아뢰니, 명하여 김영전을 파직(罷職)하고 잡아 와서 국문(鞫問)하게 하였다.
세조 8년 임오(1462)11월 12일(임인)
전라도 관찰사에게 영광 거두산에서 나는 왜저(倭楮)를 조사ㆍ간수케 하다
○承政院奉旨馳書全羅道觀察使曰: "道內靈光 巨頭山東麓産倭楮, 守令匿不以聞, 甚不可。 倭楮條數親審以啓, 且定看守人, 嚴加禁防。"
승정원에서 전지(傳旨)를 받들어 전라도 관찰사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도내(道內)의 영광(靈光) 거두산(巨頭山) 동쪽 산기슭에서 왜저(倭楮)가 나는데, 수령이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였으니 매우 옳지 못하다. 왜저의 조수(條數)를 친히 살펴서 계달하고 또 간수(看守)하는 사람을 정하여 엄하게 금방(禁防)을 가하라.”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상도(慶尙道) 경주부(慶州府)【토산】『신증』 왜저(倭楮)
경상도(慶尙道) 울산군(蔚山郡)【토산】『신증』 왜저(倭楮)
경상도(慶尙道)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토산】왜저(倭楮)
경상도(慶尙道) 거제현(巨濟縣)【토산】왜저(倭楮)
경상도(慶尙道) 고성현(固城縣)【토산】왜저(倭楮)자란도(自卵島)에 심는다.
황해도(黃海道) 풍천도호부(豐川都護府)【토산】왜저(倭楮)
이 왜저라 하는 산닥나무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경상도와 황해도에 토산(土産)으로 나타난다.
일본에서 자라는 원종이라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일본을 서양연합체로 볼 때 일본인들의 본거지는 애매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카리브해 연안과 멕시코 지역의 중앙아메리카대륙, 그리고 남아메리카대륙 북동부이라고 정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종이 조선땅에 자생할 수 있었다고 하여도 남쪽지역인 한반도 경상도는 이해가 되지만 황해도에 나타난다는 것은 한반도 지형사정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구도이다.
이러한 토산지가 말하는 지형은 경상도와 황해도가 근접해야 한다.
물론 이런 상황만 보더라도 한반도 지형이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위 영어자료에서 일본종이 화지(和紙)인 감피(Gampi)라고 하는 종(種)들의 설명을 보면 전부 산닥나무 요화속(荛花属:Wikstroemia)으로 설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 종들이 거의 전부가 아시아용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판단할 때 이 종(種)은 진짜 미농지 종(種)이 아니다.
또한 영어자료에 꾸지나무(構樹)와 삼지닥나무(三椏:結香,Edgeworthia papyrifera)라 하였다.
지금은 이 삼지닥나무 (Edgeworthia chrysantha)역시 지볼트와 주카리니(Sieb. & Zucc)가 명명했고 일본열도를 정확하게 지정하고 있다.
지볼트와 주카리니(Siebold & Zucc)가 이 학명을 명명하고 난 2년 후 1853년에 동인도함대를 인솔하고 일본 방문하여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고 하는 페리의 흑선(黑船)사건이 이와같이 존재하는 것이니 만큼 손댈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오매(烏梅 Fructus Pruni Mume) http://blog.daum.net/han0114/17049765"에서 밝혔지만 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지볼트와 주카리니가 1851년경에 있었던 곳은 다름이 아닌 멕시코와 카리브해 지역이라는 사실인데 한 살 적은 주카리니(Joseph Gerhard Zuccarini)는 지볼트가 일본에서 수집한 식물들을 분류하는 것을 도았고 나중에 멕시코 등지의 식물저술도 함께 했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식물을 채집한 곳은 현재 동아시아대륙과는 전혀 상관없는 곳임을 알 수가 있다.
산닥나무는 목안피(木雁皮)·요화(蕘花)·황안피(黃雁皮)등으로 나타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수록되어 있는 ‘왜저(倭楮)’도 산닥나무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며 1769년(영조 45년)에 간행되고 유형원(柳馨遠)의 17세기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안을 담고 있는 반계수록(磻溪隨錄)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의 닥나무보다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왜저가 종이의 질을 좋게 하므로 인조 때에 일본으로부터 종묘가 수입되었고, 주로 우리나라 남쪽 해안지방에서 재배되었다고 하였는데 이상한 것은 한반도에서 충청도 경기를 뛰어넘어 황해도(黃海道)에 구태어 재배했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이 나무를 이용하여 일본 미농화지를 만들었고 이를 닥나무(楮:KOHZO), 안피나무; 삼지닥나무(雁皮:GANPI), 미츠마타(みつまた:MITSUMATA:三椏)라고 일본인들은 호칭하고 있는데 닥나무와 산닥나무는 다른 종이다.
또한 일본에 제지기술이 전래된 것은 610년 무렵이고,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18년 봄 삼월 고구려왕에게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이 채색을 가한 종이와 먹, 아울러 수대(水碓:물레방아)로 움직이는 맷돌인 연애(碾磑)와 연애의 뚜껑을 만들어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를 통해 종이와 먹, 맷돌의 원료 및 제조법에 관한 것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졌으며 일본이 일정한 수준의 제지술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유럽자료에서는 불교승려들이 점차 일본에 미술을 전파되면서 제지기술이 일본에 전해졌으며 때문에 목판인쇄(木版印刷:block painting)술이 일본인에 의해 사용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751년에는 중국인들이 아랍에 포로가 되어 제지기술 초지법(抄紙法:종이뜨기)을 전수하였다 하였고 종이기술이 아랍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달되는데는 약 400년이 걸렸다고 말하고 있다.
1150년 당시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있던 무어인(Moor)에 의해 제지용 물레방아(paper mill)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기 1250년에는 이탈리아가 주요 종이 생산국이 되며 파브리아노(Fabriano)는 13세기부터 유럽에서 산업규모로 고급 종이를 만든 가장 초기의 장소 중 하나였다고 말하며 다년간 유럽 시장을 지배했다 한다.
1348년에 프랑스 수도승들은 성서를 위한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고 1411년 독일 최초의 제지공장은 이탈리아인의 도움을 받아 제분공장(製粉工場)을 개조하였다.
비로소 영국(England)은 1588년 자신의 종이를 만들기 시작했고 1680년에 새로운 세계 최초의 제지공장이 멕시코(Mexico)의 수도 근처에 있는 콜와칸(Colhuacan)에 스페인인에 의해 설립되었다.
북아메리카대륙에는 독일 이민자 윌리엄 리튼하우스(Willian Rittenhouse:1644-1708)에 의해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 설립되었다.
고구려(高句麗)는 서기 610년 3월에도 승려 담징(曇徵:579-631)과 법정(法定)을 보내기도 하였다는 사실이 있어 이것은 고구려가 유럽에 처음 종이제조 기술(技術)을 전수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화지(和紙) 사용 기록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조선전기에 일본으로부터 수입해 온 왜저(倭楮)를 충청도 태안, 전라도 진도, 경상도 남해와 하동 등지에서 재배하였다 하였고 그것을 재료로 한 왜지(倭紙)를 생산하기도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데 세종9년 정미(1427)때에는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강목통감(綱目通鑑)을 왜지(倭紙) 9백 59첩(貼)으로 인출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또 다른 기록에서 화지(和紙)의 원료로는 닥나무나 삼지닥나무, 대마(大麻, Hemp)나 저마(苧麻, Ramie)가 이용된다 하였고 제작법으로는 이러한 나무껍질의 내피(內皮)를 물과 융합되도록 저은 뒤 섬유의 엉킴을 풀어주고 이후 부유하는 섬유를 발을 사용하여 건져내는 방법으로 제작되는데 문제는 중국과 조선에서는 섬유와 섞였던 물을 자유롭게 흘려보내는 흘림뜨기(외발뜨기)방식을 주로 이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섬유를 틀 안에 채워 수직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가둠뜨기(쌍발뜨기) 방식을 이용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고 백과사전에서 말하고 있다.
특히 위와 같은 가둠뜨기 방식을 이용하면 소량의 재료로 매우 얇은 종이를 여러 번 뜰 수 있고 종이의 질(質)을 균일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작은 구멍을 형성하는 성질 다공성(多孔性)때문에 먹을 이용하여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적합하지 못하는 반면 치밀하고 단단한 경도 때문에 펜글씨에는 적합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그림을 그리는데 적합하지 못하다고 하고 있는 사실과 판화 인쇄는 괜찬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네덜란드 이야기와는 다르다.
6)고려종이(高麗紙) 닥나무(Broussonetia)근원
그렇다면 요화속이 아닌 닥나무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즉 동양종으로 알려지고 있는 산닥나무, 삼지닥나무, 안피나무등은 요화속(蕘花屬), 윅스트로우미아(Wikstroemia)으로 정리되지만 닥나무를 구수(構樹)라고 하고 학명이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로 파악되는 종은 동아시아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것의 원산지가 북아메리카대륙 남부를 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본 블로그 글 "고려종이(高麗紙)와 닥나무(Broussonetia)근원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7"에서 말한 것처럼 고려에서 만든 종이의 재료 닥나무이다.
이를 계림지(鷄林紙), 삼한지(三韓紙), 고려지(高麗紙), 조선지(朝鮮紙)등으로 불렸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경기(京畿) 바다 가까이에 있는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경상도(慶尙道) 동래현(東萊縣) 대마도(對馬島),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우도(牛島)가 토산지라 하고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하는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과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하는 닥나무 분포지도에서 북아메리카대륙 동남부전역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 남동부지역을 지정하고 있다
이것으로 역시 일본종이, 화지(和紙)를 만든다고 나타난다.
네덜란드가 말하는 미농지의 원료가 어떤 것이고 그 원료가 되는 식물은 어떤 종류이며 또한 그 식물의 근원지가 어딘지를 밝혀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 역시 닥나무를 말하고 있다.
서양일본연합체가 제조한 미농화지 감피(Gampi)나 간피(Ganpi)라는 일본미농화지(美濃和紙)는 정확하게 구수(構樹)라고 하는 닥나무다.
こうぞ 楮 (닥나무)
1. (カミソ(紙麻)의 音便おんびん) 닥나무(학명;Broussonetia kazinoki 그냥 저 라는 것으로 小構樹)
2. 뽕나뭇과(학명;Moraceae) 낙엽 저목(低木)
3. 서일본(西日本:にしにほん)의 산악지대에 자생하며 섬유 작물로서 각지에서 재배
4. 높이 약 3m에 달한다
5. 잎은 뽕나무와 비슷하나 성질은 조금 얇고 거칠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말하는 닥나무는 일본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Broussonetia kazinoki 라 하는 것으로 이는 하위종으로 소구수(小構樹)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한반도에는 학명;Broussonetia kazinoki 라 하여 이것을 닥나무라 하는데 이것은 하위종이며 그냥 저(楮) 라는 것으로 작은구수나무(小構樹)이다.
닥나무를 구수(構樹)라고 하고 학명이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Broussonetia is a genus of four species of trees in the family Moraceae, native to eastern Asia. one of these is the paper mulberry (Broussonetia papyrifera), whose bark fiber is used to make high-quality paper, in China, Korea and Japan. This species has been widely introduced and has become invasive in some areas.
영어자료에 보면 변함없이 브루소네티아(Broussonetia)는 동부아시아가 원산인 뽕나무과의 4개의 종이 있는 속명(屬名)이라고 하였고 이 중 하나의 종(種)은 나무껍질 섬유가 질 좋은 종이를 만드는 데 사용되는 종이뽕나무(paper mulberry)라고 하였으며 이 종(種)이 넓게 알려지는 것은 일부지역에 침습종(invasive species)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Broussonetia kaempferi
Broussonetia kazinoki
Broussonetia kurzii
Broussonetia papyrifera
위 브로수네티아속 4사지 아종 중에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만이 다르다. 이것을 고려종이 닥나무 재질로 보았다.
Five fossil fruits of †Broussonetia pygmaea have been extracted from borehole samples of the Middle Miocene fresh water deposits in Nowy Sacz Basin, West Carpathians, Poland.
폴란드 서부 카파시스(Carpathians)의 노비송치(Nowy Sacz)분지에 있는 민물 퇴적물 시추공에서 중기 마이오세(middle Miocene)시기의 멸종(†Broussonetia pygmaea)된 표본 화석 5개가 추줄되었다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을 보면 구지나무가 원종임을 알 수가 있다.
꾸지나무(構樹)의 분류체계를 보면 속씨식물군(被子植物:Angiosperms), 진정쌍떡잎식물군(真雙子葉植物:Eudicots), 장미군(薔薇類植物:Rosids), 장미목(薔薇目:Rosales), 뽕나무과(桑科:Moraceae), 닥나무속(構屬)의 학명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로 분류하는 종이뽕나무(paper mulberry)혹은 타파 천 나무(tapa cloth tree)라고도 한다.
한어자료 당조(唐朝)사람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구수(構樹)라 하였고 명대사람 주숙(周肅;周定王)의 구황본초 (救荒本草)에는 저도(楮桃)라 하였으며 청(淸朝)사람 오기준(吳其濬)의 식물명실도고(植物名實圖考)에는 저(楮), 서진(西晉)사람 육기(陸璣)의 시소(詩疏)에는 곡상(谷桑), 춘추시대 시경(詩經)에는 곡수(谷樹)라 하였다.
构树(学名:Broussonetia papyrifera、paper mulberry、 tapa cloth tree)是一种桑科构属的植物,也叫楮树或穀樹(穀音構),在臺灣又俗稱鹿仔樹。
构树一名出自《酉阳杂俎》,别名有楮桃(《救荒本草》)、楮(《植物名实图考》)、谷桑(《诗疏》)、谷树(《诗经》)等。
그림 Paper Mulberry - Broussonetia papyrifera (View 80cm)
科学分类
界: 植物界 Plantae
演化支: 被子植物 Angiosperms
演化支: 真双子叶植物 Eudicots
演化支: 蔷薇类植物 Rosids
目: 蔷薇目 Rosales
科: 桑科 Moraceae
属: 构属 Broussonetia
种: 構樹 B. papyrifera
二名法
Broussonetia papyrifera(L.) Vent.
異名
Morus papyrifera L.
用途
構樹其葉可以供作猪、牛、羊、兔、鹿的飼料,故在臺灣島民間又俗稱鹿仔樹。树皮可以造纸,或做成樹皮衣,是漢皮紙(桑皮紙)、和纸和韓紙的造紙原料之一。 構樹果实味道香甜好吃,有點類似草莓,然而不能到市场上出卖,因为太軟、易爛。 构树是一种优良的先驱植物,分布广、适应性强、抗逆性强,能大量吸滞粉尘和吸收二氧化硫等有毒物质,非常耐烟尘,自生繁衍能力强,速生,因此可以作为工厂和矿山区的绿化用树。构树在中国大陆广泛应用于城市园林绿化、工矿企业绿化,效果十分理想,也是三北地区的防护林和山区大力推广种植与封育成林的好树种。
위 한어자료에서 보면 구지나무라 하는 닥나무(構樹)의 잎은 돼지, 소, 양, 토끼, 사슴의 사료로 사용되기 때문에 대만사람들은(臺灣島民) 록자수(鹿仔樹)라고 하고 이 나무껍질은 종이를 만들거나 갖옷을 만들며 이것은 한피지(漢皮紙,桑皮紙), 화지(和纸)와 한지(韓紙)의 원료라 하여 중국, 조선,일본 종이의 재료라고 말하고 있다.
닥나무열매는 달콤하고 맛이 있으며 딸기와 같은 맛이 조금 있지만 시장에 내다 팔수가 없고 나무를 조성하는 것은 분포지가 넓고 적응성이 뛰어나며 분진(粉尘)과 이산화황(二酸化黃)과 같은 유독물질을 많이 흡수하여 매우 내연진(耐煙塵)에 좋고 자생적으로 번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자생속도가 빠르며 중국대륙에서 도시원림녹화, 광공기업(工矿企业)녹화에 널리 활용되어 효과가 매우 좋으며, 삼북지역의 방호림과 산간지역에서 재배와 봉육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기에 좋은 수종(樹種)이다.
It is a significant fiber crop in the history of paper. It was used for papermaking in China by around 100 AD. It was used to make washi in Japan by 600 AD. Washi, a Japanese handcrafted paper, is made with the inner bark, which is pounded and mixed with water to produce a paste, which is dried into sheets.
위 영어자료를 보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구지나무라고 하는 닥나무는 종이 역사상 중요한 섬유작물이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서기 100년경에 중국에서 종이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AD 600년까지 일본에서 화지(和紙:Washi)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고 하고 있다.
일본의 수공예 종이인 화지(和紙:Washi)는 안쪽 껍질을 찧고 물과 섞어 반죽해 종이로 말리는데 제작법은 수직 방향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가둠뜨기(쌍발뜨기) 방식과 같다.
7)포르투갈,더치와 왜 양이(洋夷)
본 블로그 글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0 "와 "오리엔탈역사문화의 인도(印度)지명이 아메리카에 있어야 할 이유 http://blog.daum.net/han0114/17049532"에서 더치(네덜란드)와 일본은 동일한 체제라는 것을 알았고 더하여 양키와 일본 역시 같은 부류라는 것도 알았다.
더하여 더치(네덜란드)와 양키가 또한 같은 세력이라는 사실 또한 밝혔다.
때문에 삼단논법으로 더치(네덜란드)와 양키 그리고 일본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자포니즘이란 사조(思潮)에서 이 미농지의 영향은 대단한 것이라고 네덜란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17세기초 서양문물이 들어 올 시점에서 생성된 일본의 독특한 문화가 난학(蘭學)이라 하였고 이것을 일본인들은 서양문화라고 하면서 더치 즉 화란(和蘭)문화임을 알렸다.
그때부터 동양과 서양문화가 다르다는 공식이 성립된 것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것의 역사장소는 남방지역인 나라현의 아스카 촌(飛鳥村)을 중심으로 생성된 대화국(大和國:AC250-710)으로 놀랍게도 그곳은 열대지방이다.
그곳이 진정 아시아대륙이란 말인가.
아시아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와 일본이 연결되는 듯하지만 양키와는 무관하다.
어쨌던 난학을 화(和)문화라 하였고 이것을 스스로 열도일본문화의 상징처럼 알리려 하였지만 동서양이 구분되지 않는 체제에서는 별의미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통해 알렸다.
열도일본인들은 네덜란드 즉 서양문화의 첨병인 것처럼 또는 그들 스스로가 네덜란드인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이역시 참으로 웃기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일본발음 또한 화(和)가 와(わ)로 발음되고 우리 말 음인 왜(わ[倭])와 같고 일본에서 왜(倭)를 '와(wa)'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화(和)와 왜(倭)가 동일하게 쓰였으니 같은 계통의 언어이다.
1683년(숙종 39년)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왜관(倭館)의 운영을 위한 금제조항(禁制條項) 다섯 가지를 제정하고 비석으로 세운 약조제찰비(約條制札碑)에 일본인을 화인(和人)이라 표기하였다.
또한 네덜란드를 한자표기로 화란(和蘭)이라 하였다면 약조제찰비에서 언급한 일본인은 네덜란드 즉 더치이며 서양인이 확실한데 더치인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결국 조선땅 왜관에 기거하고 조선관리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는 이야기다.
위 사진들을 보면 일본의상을 착용하고 있지만 모두가 어색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아주 자연스럽다는 사실이다.
본 블로그 글 "1923년 관동대지진 발생지는 열도가 아니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798 "에서 말하길 1923.9.15자 보도사진인데 시카고에서 열린 일본관동대지진 피해에 대한 모금운동 광경으로 당시 미국정부의 적극적인 독려와 함께 기모노를 착용하고 손에는 들고 다니는 제등(提燈)을 갖춘 미국소녀들이 보이고 이 소녀들은 시카고거리를 모금하기 위해 행진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그런데 글쓴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분명 기모노와 제등은 동양인 한국, 중국, 일본인들의 문화인 것 확실하지만 생김새가 모두 미국 백인계 서양인 소녀들이고 일본을 위한 지진피해자 모금이라 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주인공인 피해자 동양계 일본인의 모습들은 이 행사에 일체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미국인이지만 관습적으로 이들은 기모노를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아마도 더치 즉 네덜란드계미국인라고 추측하였다.
즉 일본인 스스로가 화인(和人)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더치 혹은 네덜란드와 동일하고 동양인이던 서양이던 간에 조선관리(朝鮮官吏) 눈에는 같은 부류에 속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열도일본인들의 입지는 어땠을까?
칼을 잘 쓰는 무사들은 용병(傭兵)으로 포르투갈이나 더치인들에게 고용되었을 것이고 일본동양계 백성들은 하층민으로 농업이나 어업에 종사했을 것이다.
대화국 즉 야마토 시대부터 최소한 14세기까지 서양계 예수회해양세력들이 이 나라에 접근하지 못했지만 예수회가 생성된 이후부터 준동(蠢動)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백제가 망하고 아스카시대 백제유민들이 영토가 없어 헤매다가 고려(高麗)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은 본 블로그 글 "서양인이 말한 압록강의 위치-미시시피강상류 http://blog.daum.net/han0114/17050776"에서 밝혔지만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통일신라시대(新羅,B.C57~A.D935) 기간인 A.D930년과 950년 사이에 등장한 것으로 나타나 오늘날 에스파니야의 핵심왕국이라 할 수 있는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1037-1230)의 페르난도1세(Ferdinand I, ?-1065)가 포르투갈세력에게 영토를 그저 주었다고 한 사실과 페르난도는 고려시대의 송조(宋,960-1279), 영종(英宗,재위:1063-1067)과 동일한 계보라고 밝힌 사실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에스파니아를 송나라와 결부시키는 것에 남송(南宋)이 피해 달아난 곳이 바로 여송(呂宋)이었고 이 여송을 스페인이 차지한다는 결과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페인 역시 오늘날 서양인들에게 사용된 명칭이기 때문에 사실상 에스파니아(Hispania)와 또 다른 해양세력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블로그 글 "역사지우기와 한반도근대사 연결 http://blog.daum.net/han0114/17050742" 에서 잉글랜드인들이 사용하는 방언이 또한 왜(倭: Wa)와 웨기(waggie)라 한 것을 그대로 음에 따른 것이라 할 때 네덜란드 사람들을 화(和:Wa)라 하고 '와'라 하는 것과 동일한 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도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다.
때문에 세계삼한에서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동일하게 왜(倭: Wa)라고 통칭했다.
이것들의 옷을 화복(和服わふく), 종이를 화지(和紙わし)라 하고 이 또한 일본문화를 별칭하는 것이며 “왜(倭)라는 옛지명을 ‘야마토(大和)’로 읽으며 여기에도 화(和)가 있다.
또한 왜(倭) 스스로가 조선의 벼슬아치가 되고 싶어 임진왜란 이후 조선(朝鮮) 남방(南方)에서 반(班)을 반(盤)으로, 번(番)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고 이것이 조선사회에 알려져 말성이 되고 세력화란 기류가 흐르자 조선지식층, 사대부에서 이를 남만(南蠻)이라고 했다.
대조선사회 내부로부터 남반들을 기피하고 꺼려하는 현상이 생성되어 점차적으로 반(班)이라는 본래 의미가 사라지는 현상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반(班)은 대조선 사회에서 존경받던 중추 관료 사대부(士大夫)선비들에게 붙이는 존칭이었음에도 왜(倭)가 스스로 반(南班)이 되고 싶었던 것이며 조선(朝鮮)사회에서 체제에 녹아들여 애를 쓴 것도 사실이지만 근원적으로 물욕이 과했고 물질에 집착한 나머지 정직하지 못했다는 것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선사회에서 남만 즉 서양해양세력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크다 할 것이다.
본 블로그 글 "담배(南草, 西草, 煙草, Nicotiana:Tobacco) http://blog.daum.net/han0114/17049492 "에서 포르투갈을 왜(倭), 만이(蠻夷), 남만(南蠻)이라 할 사실을 밝혔고 이것은 임진왜란 이전 포르투갈이 나가사키를 통해 전달한 서양학문을 남만학(南蠻学) 또는 만학(蠻学)이라고 하였다는 사실과도 같은 이야기다.
때문에 고종13년(1876)에 최익현(崔益鉉)이 서양 왜를 조심해야 한다는 상소문에서 5가지의 주의사항을 적시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我不備畏怯而求和, 則目前姑息, 而向後谿壑之慾, 何以充之? 所以亂亡者一也。
우리가 대비하지 못하고 두려워서 화호를 구한다면, 당장은 편히 넘어가겠으나, 앞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어떻게 채워 주겠습니까.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첫째입니다.
彼之物貨, 皆淫奢奇玩, 而我之物貨, 民命所寄而有限者也。 不數年東土數千里, 無復支存, 國必隨亡, 此亂亡者二也。
저들의 물건은 다 지나치게 사치한 것과 기이한 노리개인데, 우리 물건은 백성의 생명이 의지하는 한정이 있는 것이니, 몇 해 못가서 우리 땅 수천 리가 더 지탱하지 못하고 나라가 따라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둘째입니다.
彼雖托倭, 其實洋賊, 和事一成, 邪學傳授, 遍滿一國, 此亂亡者三也。
저들이 왜인이라고는 하나 실은 양적(洋賊)이니, 화호하는 일이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邪學:기독교)이 전수되어 전국에 두루 찰 것입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셋째입니다.
彼欲下陸往來, 築臺而居處, 以講和無說拒之, 若任之, 則財帛婦女之攘奪, 惟意所願, 此亂亡者四也。
저들이 뭍에 내려 왕래하며 대(臺)를 쌓아서 있으려 하는데, 강화(講和)를 거절할 말이 없다 하여 버려둔다면, 재물과 부녀의 약탈을 바라는 대로 할 것입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넷째입니다.
倡爲此說者, 引丙子南漢事, 曰講和後彼此交歡, 至今若盤石, 今日與彼, 何獨不然? 彼徒知貨色, 無復人理, 眞是禽獸, 與禽獸和好, 不知其何說, 此亂亡者五也。
이 말을 앞장서 하는 자는 병자년 남한(南漢)의 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강화한 뒤에 피차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이제까지 반석(盤石)과 같은데, 오늘날 저들과 만은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하나, 저들은 재물과 여색을 알 뿐이고 다시는 사람의 도리가 없으므로 참으로 짐승이니, 짐승과 화호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난망하는 까닭의 다섯째입니다라고 하고 있다.
최익현은 조선말 서양해양세력들에게 비유하길 짐승(與禽獸)이라 하였다.
조선사회에서 불신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렇게 볼 때 임진왜란 후 포르투갈을 물리치고 스스로 개혁코저 한 것으로 파악되는 더치(Dutch) 역시 노력은 했겠지만 우리조상들은 이들을 왜(倭)라 한 것이 틀림없다.
지금까지 한반도 사관의 한계 때문에 왜구(倭寇)라 하면 몸집작고 단신이라 하여 열도일본인을 지칭한 것으로 한정하여 알고 있었지만 기실 당시 해양세력인 서양인 전체를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만큼 조선관리나 사대부학자들이 왜의 문화, 역사, 학문 모두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왜라 하는 지칭으로 알 수가 있다.
일본(日本)이어야 하는 네덜란드에서 미농화지에 대해 말하길 세계에 아름다움을 전한 메시지라 하면서 자포니즘(Japonism)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자포니즘이 매우 부풀려져 있다는 이야기다.
즉 열도일본인들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고 전부 해양세력인 더치인이나 유럽인들에 의해 자포니즘이 생성되었으며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것은 스스로 네덜란드가 일본연합체 소속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자백하는 것과 같다.
또 미농화지는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Nara period,AD710-794)에 처음으로 고품질 종이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은 일본자료와도 다르지 않지만 그렇게 보는 이유가 원래 종이 일부가 나라(奈良)의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Shōsōin)에 보존되고 있었다는 이유를 말하고 있다.
이는 남방지역인 나라현의 아스카 촌(飛鳥村)을 중심으로 생성된 대화국임을 알게 하지만 정창원은 2차대전후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때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즉 정창원이 어디에 실제로 있었던 장소에서 아스카촌이 있어야 하고 원래종이가 보존되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지금 현 역사가 동양과 서양으로 두쪽으로 분리되고 있다는 것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글쓴이는 이런 현상이 마치 나가사키 짬뽕같다고 생각된다.
본래 나가사키 짬뽕은 중국의 볶음국수 초마면(炒碼麵)과 일본(日本)의 찬폰(찬펑:ちゃんぽん,Chanpon)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짬뽕이라는 의미는 해물과 닭, 돼지고기 등 남은 재료를 가지고 마구 잡탕으로 섞어 볶아 만든 국수를 말하는 것이라서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나가사키(長崎)의 역사처럼 짬뽕같은 역사혼란과 같다고 생각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서양과 동양을 혼입하여 마구섞어 놓은 것 같은 역사가 바로 오늘날 열도일본역사란 사실에 새삼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나가사키 짬뽕, 어원(語源)의 유래를 백과사전에서 찾아 보면 복건성(福建省)사람들의 ‘식사 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이었던 취판‘吃飯’의 발음인 샤뽄(シャポン) 또는 셋뽄(セッポン)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고 현실적으로 잡다하게 여러가지 재료를 섞는 모습을 옛날 나가사키(長崎:ながさき)의 방언인 ‘찬폰(ちゃんぽん)’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마지막으로 중국인을 ‘찬(チャン)’, 일본인을 ‘폰(ポン)’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등인데 일본(日本)의 쇄국시대(鎖国時代)였던 에도시대(江戸時代:1603-1867)에 일본의 유일한 개항지였던 나가사키에서는 외래문화를 흡수하여 나가사키만의 독자적인 문화로 발전시키곤 했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을 배경으로 나가사키 짬뽕(長崎ちゃんぽん)은 일본과 중국의 식문화가 합쳐져 개발된 요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더치인들이 관리하는 나가사키에서 외래문화(外來文化)라 함은 바로 중국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치(네덜란드)전통적인 물고기 수프(Dutch Fish Soup)와 중국의 국수면(湯麪)이 혼합되어 나가사키 짬뽕이라 하지 않았겠는가 한다.
8)마무리
자포니즘으로 본 일본 문화라는 것은 서양해양세력들의 문화이다.
빠뜨릴 수 없는 이야기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역시 세계삼한역사의 백제문화이다.
카스티야왕국(Reino de Castilla)시대에 포르투갈을 백제유민들의 국가체제로 보는 관점에서 그렇다.
일본 기모노를 화복(和服)이라 한다는 것은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이 종식과 더불어 17세기 초기 더치가 차고 앉기 전까지 포르투갈문화가 그것을 차지했겟지만 그 이후에 더치(Dutch)는 포르투갈과 달리 일본 사회모든 것에서 영향을 끼쳤고 교육이나 문화에 발전을 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주도한 것은 틀림없이 더치인들이다.
그것이 오늘날 까지 일본사회에서 난학(蘭學)으로 문신처럼 남아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다시말해 자포니즘이라는 것은 네덜란드 즉 더치인들의 일상적인 문화창작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기에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같은 유명화가들이 우키요에 판화에 흠취되어 자신의 작품까지 품어 확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전통적으로 늘 접했던 기법이기에 고흐에게는 그다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겉옷 기모노, 조례복(朝禮服)을 칭하는 사실에서도 독창적인 디자인을 바탕으로 하는 전위예술 또는 회화, 조각, 건축, 공예 등의 공간적 예술을 총괄하는 조형예술이라고 하는 유럽의 아방가르드 패션(avant-garde fashion)으로 발전되었다는 사실이 더해지며 이것이 서양패션 산업을 리더했다고 볼 수 있고 각 종 무늬가 화려하게 그려지고 작품화 또는 상품화되기까지의 과정은 바로 자포니즘이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열도일본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근원적인 역사사실을 비추어 볼 때 동양인 열도일본인이 아닌 서양부르주아들의 연합체 성격을 띤 예술성이 만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도일본인들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화복의 새겨진 문양들은 지금도 네덜란드에서는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독특한 디자인으로 하여금 산업화가 1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사실과 해양세력으로 가장 부흥을 이루던 더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전부 양키(Yankee)문화로 옮겨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와 닿는다.
그렇다면 현재 "japan"이라고 하는 것은 더치(Dutch)가 아니라 영어화된 명칭인 양키(Yankee)세력들로 이동하여 결국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의 상공업과 수공업산업을 장악하고 주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치(Dutch)와 양키가 17세초엽부터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서 친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참고하고 서양해양세력들에게는 공통적으로 양키(Yankee)라는 호칭이 자연스럽게 생성되었을 것이란 짐작도 가능한데 열심히 부지런히 작품에 또는 산업활동에 집중했다고하는 면을 그렇게 표현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연합체의 명칭이 다소 오늘날 비하 명칭으로 알려져 불명확하게 이런 저런 의미를 다 포괄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일본이란 명칭은 북아메리카대륙 이주민들 사이에 양키만큼 친숙하게 호칭되던 것이 아닌가도 한다.
다시 정리하면 일본 즉 '자폰'이란 명칭은 당시 서양해양세력들의 집합체, 또는 상업경제체제 등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미농지(美濃紙)의 근원지를 생물학적으로 위에서 밝혀보았지만 구지나무(構樹), 브루소네티아 파피리페라(Broussonetia papyrifera)의 근원지가 대체로 체로키족(Cherokees)이 소개된 조지아주(Georgia)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도 의미가 크다.
양키문화는 곧 더치문화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본 블로그 글 "고래역사와 더치·양키 그리고 일본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0"에서 일단 살펴본 사실이지만 재차 양키(Yankee)어원을 보면 더치(Dutch)어 'Jan' 'ki' 로 부르던 것이니 만큼 분명 현재 네덜란드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양키는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지 않고 상용한 호칭이었을 것이란 추측도 있다.
어쨌든 네덜란드 이주민 즉 더치인들이 미국독립전쟁이전까지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에 상권과 경제권을 지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곳들을 네덜란드식민지라 하기 때문이다.
자료에는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 뉴잉글랜드의 이주자(protestant)들을 양키라 하여 'Yankee Doodle' '양키 멍청이'라 하였다는데 이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사용한 지칭이라 하였고 또한 양키들은 손재주가 많았다고 알려지는 것과 동시에 인디어보호지역(Indian Reservation)이란 노래에서도 발견되지만 양키 즉 일본(Japan)은 체로키족의 수공업인 꿴 구슬까지 빼앗아 만들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손재주가 많았다는 것은 결국 수공업산업이 발달 할 수 있는 인적기반이 아니겠는가.
이것에서 일본은 분명 아메리카대륙의 "japanese"와 연결되어야 하며 북아메리카대륙 동북부지역에서 수많은 수공업을 영위하고 그들만의 경제권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손재주가 많은 적극적인 경제활동에서 발단된 것임도 알 수가 있다.
북아메리카대륙의 경제는 기계산업을 주도하던 영국과 다르게 가내 수공업이 발달하여 일상적인 생활용품들을 수작업으로 제작하고 판매한 것으로 나타나며 이것들을 상품화하고 고급스럽게 만들기 위해 자포니즘같은 판화기술로 디자인화가 필요했을 것이고 이런식의 가내수공업 제품들이 프랑스 부르주아(bourgeois)들에게 어필이 되어 활성화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자취들이 오늘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고흐박물관(Van Gogh Museum:1973)의 한 전시실에는 고흐가 평생 수집해놓은 2백여 점의 우키요에가 상설 전시되어 있고 또한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톤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1870)에만 공식적으로 약 5만점의 우키요에 판화와 7백여점 이상의 육필화(肉筆畵)가 소장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우키노예를 배경으로 한 탕기영감 작품을 그렸다.
탕기영감이 일본인이 아님에도 일본 풍으로 그렸다는 것인데 이것은 작가의 의도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모순된 이야기다.
오늘날 양키라고 불리우는 미국인들이 세계 제1의 경제국가가 되어 세계를 호령하는 근본 에너지가 어디에 있었을까를 근원적으로 따지는 사람은 많지 않다.
미국 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한 19세기말 도금시대(The Gilded Age:1873-1893)를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재벌들이 양산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석유업의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 석탄과 강철업의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 강철업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 석유와 철도업의 조지 F. 베이커(George F. Baker), 석유와 철도업의 윌리엄 록펠러(William Rockefeller), 석유업의 에드워드 S. 하크니스(Edward S. Harkness), 운송업의 J. 오그덴 아모어(J. Ogden Armour), 자동차업의 헨리폰드(Henry Ford), 철도업의 밴드빌트(W.K. Vanderbilt), 금융업의 에드워드 로빈슨 그린(Ed. H.R. Green), 철도업의 에드워드 헨리 해리먼(E. H. Harriman), 부동산업의 빈센트 애스터(Vincent Astor), 목화와 금융업의 제임스 스틸먼(James Stillman), 수송과 담배제조의 토마스 F. 라이언(Thomas F. Ryan), 광산과 제련업의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 강철업의 찰스 M. 슈왑(Charles M. Schwab), 금융업의 J.P.모건 주니어(J.P. Morgan Jr)등 거대한 자본주들은 거의가 19세기 말엽에 활동하던 인물들이다.
이러한 거대한 산업에 밀알같은 존재를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유대인의 대자본주가 이를 완성시켰다고 하겠지만 이러한 거대한 자본주의 고용아래 수많은 소가내공업과 생활용품업자들이 활동했을 것이고 그들이 나름대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며 기반을 튼튼하게 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사실상 2차세계대전은 유대 자본주들이 상거래 독점과 카르텔을 점유하여 소상공인과 그 외 자영업자들을 핍박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며 그러한 악영향을 받은 국가체제에서 잘못된 이단적인 사상이 생성되게 하는 잘못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죽했으면 엉클샘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1858-1919,재임:1901-1909)가 1890년 셔먼 독점금지법(Sherman Antitrust Act)을 부활시켜 7년 동안 43개 독점기업을 제소했겠는가.
때문에 기존 중상주의를 접목한 독일계, 오스트리아계 사람들은 독점적 거대자본의 행포때문에 심대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고 반대로 양키경제협력체들은 유대인의 거대한 자본주와 협력 또는 결탁하여 미국만의 고립정책이 가능하도록 했다는 비판이 있다.
그것은 결국 세계1차대전, 그리고 세계2차대전을 촉발시키게 된 것으로써 독점, 과점적인 잉여자본에 의한 돌이킬 수 없는 인류적 대참사가 발생되어 그것을 셀 수조차 없는 인명들이 살상되거나 부상하는 비극을 낳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질서는 변함없이 지속이 되어 21세기 냉전시대까지 낳았고 그 영향아래 역사가 부당하게 어긋나고 있다는 점도 우리는 상기해야 할 이야기다.
어쨌던 독점, 과점적인 자본형성은 거대한 자본주를 만들고 그러한 잉여자본형성시켰다는 사실과 이와 동시에 식민제국주의가 팽배하고 사회진화론같은 서양우월주의를 극단적으로 생성케 했다는 잘못이 분명존재하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포니즘의 영향도 컸다고 믿어진다.
양키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유대인 자본주의 고용이 된 상태에서 비난을 받았고 19세기 남북전쟁 당시에는 남부군(南部軍)이 북군 병사에 대한 모멸적 칭호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내용이지만 현재 열도일본인들은 스스로도 네덜란드(和蘭) 즉 화인(和人)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야마토(大和)를 말하는 것이라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네덜란드를 화란(和蘭)이라는 것과 역사의 근원은 서양DNA 를 가지고 있음이 틀림없다.
즉 열도일본인 스스로가 "우리는 네덜란드인이요"하는 것과 같다.
1885년 이미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으로 들어간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부르짖을 때부터 해양세력들의 역사는 어긋나기 시작한 것인데 아메리카대륙을 벗어나 유럽대륙으로 이동하기 위한 구호락도 볼 수 있다.
때문에 자포니즘은 일본사조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네덜란드 즉 더치(Dutch)에서의 그 원류를 찾는 것이 더 현명하고 아메리카대륙에서 유럽대륙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부터 유럽대륙역사는 아랍역사가 아닌 서양해양세력들의 역사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문화적인 유행(자포니즘)속에서 일본풍으로 만들어진 서구 물건의 스타일을 자포네스크(Japonesque)라 하는데 Japan(일본)+esque(식의)이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1853-1890)의 작품 중 우키요에(浮世繪)를 닮은 그림들이 많고 이것을 혹자들은 일본의 우키요예작품을 모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천만에 말씀, 오히려 본인의 작품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우키요에(浮世繪)는 '덧없고 허무하다', '부질없다' 등의 의미로 서민생활을 기조로 하여 제작된 회화(繪畫)의 한 양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일반적으로는 목판화(木版畵)라고 하며 인물을 사실적표현보다 회화(繪畫)한 것으로 풍자(諷刺)면이 컸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즉 네덜란드와 일본이 다르지 않고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와 우키요에를 만든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만든다.
이것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동양인 일본 우키요에의 사진을 찾으면 분명 동양계 인물사진이 등장할 것이다.
하지만 우키요에를 처음만든 사람은 아시아 동양계일본인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일본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위 우키노예에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보면 모두가 자연스러운 서양인모델로써 동양일본 문화라고 도저히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뒤집어 이야기 한다면 네덜란드계 일본인이 만든 회화성 기법이라는 이야기다.
빈센트 반 고흐도 더치(네덜란드)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자포니스(일본인)도 된다.
그리고 이 사람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목사의 아들이다.
자포니스들은 개신교인들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현재 동양계 열도 일본에는 개신교신자들이 많지 않는데 약 1%정도이다.
인도(印度)역사의 본거지라 하는 인도아대륙(印度亞大陸)역시 불교신자들은 전 인구에 0.8%란 사실과 같다.
네덜란드인은 켈트(지금의 에스파냐부터 다뉴브 강까지의 광대한 지역에서 살던 민족)와 게르만 족(현대의 독일인의 조상)사이에 살던 까닭에 두 민족의 혼혈이라고도 한다.
고대 갈리아에서는 이들을 '벨기에'라고 불렀다.
북아메리카대륙 동부에 벨기에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것도 음양으로 더치인들의 도움이 크다.
자포니즘이란 핵심적 이야기는 서양인들이 동양 일본 문화에 취하여 그 사조가 만들어지고 유럽사회와 미술가들에게 엄청난 반향(反響)을 불러일으켰다고 하지만 이것을 서양역사관점에서 푼다면 엄청난 모순을 안고 있다.
그 시기는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서양우월주의 즉 사회다윈주의가 팽배했을 때이다.
결국 문화적으로 선진 동양 일본을 만들고 그것의 문화, 역사 전반적으로 서구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을 알리고 서양우월주의를 말하고 있지만 상업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인들의 당시 사고가 과연 동양 오리엔탈 문화라고 하는 일본문화를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겠느냐 하는 것은 의문을 낳게 만드는 것이다.
17세기 부터 유럽귀족사회에 불어닥친 중국양식(中國樣式)의 사조(思潮)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비교되지만 당시는 서양사회에 우월사고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이고 서양역사 전반에 나타나는 열등의식이 존재할 때이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다.
19세말 서양인들의 사고는 동양역사문화를 배척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즉 식민지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사상(思想)과 사조(思潮)를 조정한다고 할 때 일본 우키요에 판화 인쇄술이 미각적으로 뛰어나우수한 문화라고 인정되더라도 그들의 식민주의사상과 크게 배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이 동양인이었을 때 이야기다.
양키서양문화이며 서양우월주의와 물질문명, 시티즌문화의 산물로써 총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오늘날 세계경제를 지배하며 세계강자 "유나이티드 스테이트 아메리카제국" 이 자포니즘에 클로즈업되어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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