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삼국지동이전(三國志 東夷傳)

한부울 2013. 6. 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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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魏書 東夷傳

 

삼한(三韓)에 관한 현존하는 신중국 역사기록은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동이전",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과 "진서(晉書) 열전사이(列傳四夷)", 사마천 사기(史記)의 조선열전(朝鮮列傳)과 후한의 반고(班固:32-92) 한서(漢書)의 서남이양월조선전(西南夷兩粤朝鮮傳)에 등장한다.

 

列傳四夷-东夷, 夫余国, 马韩, 辰韩, 肃慎氏, 倭人, 裨离等十国;西戎, 吐谷浑, 焉耆国, 龟兹国, 大宛国, 康居国, 大秦国;南蛮, 林邑, 扶南;北狄, 匈奴.

裨离国在肃慎西北,马行可二百日,领户二万。养云国去裨离马行又五十日,领户二万。寇莫汗国去养云国又百日行,领户五万余。一群国去莫汗又百五十日,计去肃慎五万余里。其风俗土壤并未详。

西南夷两粤朝鮮传 - 西南夷・南粵・閩粵・東海・朝鮮
西域,中国汉朝时多指天山南麓玉门关、阳关以西的诸多國家和地區,隋朝唐朝时的西域扩大,北道至拂菻,中道至波斯,南至婆罗门,元朝时更将欧洲非洲的一部分包括在内。

 

남북조시대(420-589)의 북조인 북위의 역사에 관한 북위서(北魏書)또는 후위서(後魏書)로서 송나라때 29편이 없어졌고 본래 130권이었는데, 현재 114권만이 남아있다는 책으로서 집필자의 주관이 많이 들어가 믿을 수 없는 책이라고 하여 예서(穢書)라 하는 사람도 있다.

삼국지(三國志)는 진(晉)의 학자 진수(陳壽:233-297)가 편한 것으로서 위(魏), 촉(蜀), 오(吳) 3국의 정사(正史)라고 한다. 위서(魏書) 30권, 촉서(蜀書) 15권, 오서(吳書) 20권, 합계 65권으로 표(表)나 지(志)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다.
기사(記事)가 간략하고 인용한 사료(史料)도 지나치게 절략(節略)되어 누락된 것이 많았다 하여 비판을 받고 있는 사서로서 근세기에 재편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물론 24사서에 들어가는 모든 사서가 그러한 의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는 부여(扶餘), 고구려, 동옥저(東沃沮), 읍루(挹婁), 예(濊),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 왜인(倭人)등의 전(傳)이 있는데 왜(倭)만 별개 취급한 것이어서 왜를 동이에 포함하기 위함이나 아니면 없던 것을 추가한 것이 아닌가 한다.
특히 동방민족에 관한 최고의 기록이라고 하고 동방의 고대사를 연구하는데 유일한(?)사료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의도된 설명이라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古代民族或部落列表
哀牢夷, 安东骨, 巴氏之戎, 白蛮, 白山, 白夷, 百濮, 百越, 北道十二国, 北狄, 北戎, 裨离, 僰, 伯咄, 赤夷, 爨, 楚(楚人), 达莫娄, 鞑靼, 大理国, 大荔之戎, 大月氏, (代), 掸, 党项, 狄, 氐, 滇, 滇僰, 东爨, 东胡, 东夷, 东察合台, 豆莫娄, 丁零, 方夷, 风夷, 扶余, 凫夷, 附国, 高昌, 高车, 甘州回鶻, 圪僚, 葛僚, 葛逻禄, 邽, 鬼方, 鬼戎, 绲戎, 高句丽, 号室, 河蛮, 貉, 貉貊, 黑车子, 黑汗, 华夏(华夏族), 黄夷, 黄帝部落, 回鶻, 回纥, 荤粥, 姬戎, 冀之戎, 堅昆, 建州女真, 姜戎, 羯, 鸠僚, 九黎, 九夷, 喀喇可汗, 寇漫汗, 库莫奚, 昆明, 莱夷, 褴破东胡, 乐浪, 俚, 骊戎, 僚, 林胡, 楼烦, 陆浑戎, 卢戎, 骆越, 蛮, 满饰, 茅戎, 灭烦, 闽越, 末利, 貊, 靺鞨, 牟奴, 蔑兒乞, 南道十国, 南越, 南诏, 南蛮, 女国, 女真, 瓯越, 汪古, 蒲者, 濮, 僰, 七闽, 契丹, 羌, 且弥, 且末, 犬戎, 畎夷, 群蠻, 戎, 柔然, 月氏, 塞种, 三苗, 沙楼, 沙陀, 山戎, 商, 烧当羌, 绳余, 室韦, 蜀, 束屠, 松外蛮, 叟, 肃慎, 粟末, 索家, 天山以北诸国, 铁勒, 同羅, 突厥, 突骑施, 吐蕃, 吐谷浑, 吐浑, 倭人, 乌古, 乌桓, 乌蛮, 乌蛮七部落, 乌孙, 勿吉, 西爨, 西胡, 西南夷, 西戎, 西域, 西域葱岭诸国, 肸(音“西”), 奚, 奚夷, 習, 黠戛斯, 夏, 先零羌, 鲜卑, 猃狁, 玁狁, 小月氏, 匈奴, 徐夷, 玄兔, 玄夷, 薛延陀, 熏育, 熏允, 獯粥, 炎帝部落, 阳夷, 扬越, 扬越人, 养云, 夜郎, 夜郎国, 一群, 伊洛之戎, 夷, 义渠, 挹娄, 殷, 于阗, 于夷, 越, 有穷氏, 有熊氏, 越戏方, 有仍氏, 有鬲氏, 有莘氏, 扬钜之戎, 中山, 笮, 指涅, 仲云, 周, 阻卜

 

東夷傳 序文

 

《書》稱:東漸於海,西被於流沙。其九服之制,可得而言也。然荒域之外,重譯而至,非足跡車軌所及,未有知其國俗殊方者也。自虞暨周,西戎有白環之獻,東夷有肅慎之貢,皆曠世而至,其遐遠也如此。及漢氏遣張騫使西域,窮河源,經歷諸園,遂置都護以總領之,然後西域之事具存,故漢宮得詳載焉。魏興,西域雖不能盡至,其大國龜茲、於寘、康居、烏孫、疏勒、月氏、鄯善、車師之屬。無歲不奉朝貢,略如漢氏故事。而公孫淵仍父祖三世有遼東,天子為其絕域,委以海外之事,遂隔斷東夷,不得通於諸夏。景初中,大興師旅,誅淵,又潛軍浮海,收樂浪、帶方之郡,而後海表謐然,東夷屈服。其後高句麗背叛,又遣偏師致討,窮追極遠,逾烏丸、骨都,過沃沮,踐肅慎之庭,東臨大海。長老說有異面之人,近日之所出,遂周觀諸國,采其法俗,小大區別,各有名號,可得詳紀。雖夷狄之邦,而俎豆之象存。中國失禮,求之四夷,猶信。故撰次其國,列其同異,以接前史之所未備焉。

 

서경에 말하기를,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유사에 연접되었다] 했으니, 그 구복의 제도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거친 국경 밖에도 사람들이 거듭 이르렀으니 사람의 발자취나 수레바퀴로 가 보지 않고서는 그 나라의 풍속이 우리와 어떤가를 알 길이 없다.

우나 주 때로부터 서융에서는 백환을 바쳤고, 동이에서는 숙신의 납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여러 해 만큼씩 있던 일이었으니 그 땅이 이같이 멀었던 것이다.

그 뒤에 한나라에서 장막을 서역으로 사신을 보내어 황하의 끝까지 더듬어 여러 나라를 거쳐 드디어 도호를 두어 나라를 다스리게 했으니 이렇게 한 뒤에 비로소 서역의 일이 보존되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 사관들이 그 지방 일을 자세히 쓸 수가 있는 것이다.

위나라가 일어나자 서역들이 비록 다 오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 큰 나라들로 구자, 우치, 강거, 오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 같은 나라들은 해마다 조공을 바쳐와서 옛날 한나라 고사와 같이 했다.

그러나 공송연이 그 아비, 할아비와 함께 요동을 차지하고 삼대를 이어오자 천자는 그 지방을 절역이라 해서 이곳은 바다 밖의 일로 치고 드디어 동이와 꿇고 지내니 이래서 동이 마저 굴복하게 되었다.

그 뒤에 고구려가 또 중국을 배반했다. 이에 또 군사를 내어 그들을 칠 때 거리가 워낙 멀어서 오환골도를 넘고 옥저를 지나 숙신 지방을 밟고 보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했다.

노인들이 말하기를, [이곳에는 얼굴이 닮은 사람들이 해돋이 가까이 산다] 하므로 이에 여러 나라를 둘러보고 그 지방의 법속을 보니 크고 작은 지방이 각각 구별되어 있고 저마다 이름이 있기로 그것을 자세히 기록했다. 아무리 오랑캐 나라라고는 하지만 그들도 그릇에 음식을 담아 먹고 제사를 지낸다. 중국이 예의를 잃자 이들 네 오랑캐 나라에서 예의를 구했기 때문에 여기에 그 나라들의 일을 기록하고, 그 같고 다른 점을 열거하여 이로써 전사의 갖추어지지 못한 점을 보충하려는 터이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序文>

 

東夷傳 夫餘

夫餘在長城之北,去玄菟千里,南與高句麗,東與挹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方可二千里。戶八萬,其民土著,有宮室、倉庫、牢獄。多山陵、廣澤,於東夷之域最平敞。土地宜五穀,不生五果。其人粗大,性強勇謹厚,不寇鈔。國有君王,皆以六畜名官,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使者。邑落有豪民,名下戶皆爲奴僕。諸加別主四出,道大者主數千家,小者數百家。食飲皆用俎豆,會同、拜爵、洗爵,揖讓升降。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飲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在國衣尚白,白布大袂,袍、袴,履革鞜。出國則尚繒繡錦罽,大人加狐狸、狖白、黑貂之裘,以金銀飾帽。譯人傳辭,皆跪,手據地竊語。用刑嚴急,殺人者死,沒其家人爲奴婢。竊盜一責十二。男女淫,婦人妒,皆殺之。尤憎妒,已殺,屍之國南山上,至腐爛。女家欲得,輸牛馬乃與之。兄死妻嫂,與匈奴同俗。其國善養牲,出名馬、赤玉、貂狖、美珠。珠大者如酸棗。以弓矢刀矛爲兵,家家自有鎧仗。國之耆老自說古之亡人。作城柵皆員,有似牢獄。行道晝夜無老幼皆歌,通日聲不絕。有軍事亦祭天,殺牛觀蹄以占吉凶,蹄解者爲凶,合者爲吉。有敵,諸加自戰,下戶俱擔糧飲食之。其死,夏月皆用冰。殺人徇葬,多者百數。厚葬,有槨無棺。魏略曰:其俗停喪五月,以久爲榮。其祭亡者,有生有熟。喪主不欲速而他人強之,常諍引以此爲節。其居喪,男女皆純白,婦人著布面衣,去環珮,大體與中國相仿佛也。

 

 夫餘本屬玄菟。漢末,公孫度雄張海東,威服外夷,夫餘王尉仇台更屬遼東。時句麗、鮮卑強,度以夫餘在二虜之間,妻以宗女。尉仇台死,簡位居立。無適子,有孽子麻餘。位居死,諸加共立麻餘。牛加兄子名位居,爲大使,輕財善施,國人附之,歲歲遣使詣京都貢獻。正始中,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遣玄菟太守王頎詣夫餘,位居遣大加郊迎,供軍糧。季父牛加有二心,位居殺季父父子,籍沒財物,遣使簿斂送官。舊夫餘俗,水旱不調,五穀不熟,輒歸咎於王,或言當易,或言當殺。麻餘死,其子依慮年六歲,立以爲王。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豫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公孫淵伏誅,玄菟庫猶有玉匣一具。今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世以爲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魏略曰:其國殷富,自先世以來,未嘗破壞。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而夫餘王其中,自謂「亡人」,抑有(似)也。魏略曰:舊志又言,昔北方有高離之國者,其王者侍婢有身,王欲殺之,婢云:「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後生子,王捐之於溷中,豬以喙噓之,徙至馬閑,馬以氣噓之,不死。王疑以爲天子也,乃令其母收畜之,名曰東明,常令牧馬。東明善射,王恐奪其國也,欲殺之。東明走,南至施掩水,以弓擊水,魚鱉浮爲橋,東明得度,魚鱉乃解散,追兵不得渡。東明因都王夫餘之地。

 

부여는 장성 북쪽에 있다. 현도와의 거리가 천 리나 되는데 남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해 있고, 동쪽은 읍루와 연결되었으며, 서쪽은 선비와 인접되어 있다. 북쪽에는 약수가 있는데, 지방이 二천 리나 되고 호수는 八만이나 된다.

그 지방 백성들은 모두 토착민들로서 궁실도 있고 창고도 있고 감옥도 있다. 산과 언덕도 많지만, 또 넓은 못도 있어 동이지방 중에서는 가장 평평한 지역이다. 땅은 오곡을 가꾸기에는 알맞아도 과실은 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추하고 몹시 몸집이 크며, 성질은 강하고 용맹스러운 한편 근실하고 후덕한 편이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

그 나라에는 국왕이 있고, 벼슬 이름은 모두 六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마가, 우가, 저가, 구가가 있고, 또 견사가 있는데 이 견사란 것은 심부름꾼이다.

부락에는 어디나 호민이 살고 있어 못 사는 백성들은 모두 그 밑에 가서 노복 노릇을 한다. 여러 대에 벼슬을 한 자는 따로 네 도를 관할한다. 큰 자는 수천 호를 맡아 다스리고 작은 자는 수백 호를 맡아 다스리기도 한다.

음식은 모두 그릇에 담아 먹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나라 정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이때가 되면 온 나라 안이 모두 모여서 날마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춘다. 이것을 영고라고 한다. 이때가 되면 감옥에서 형벌을 다스리지 않고 죄수들도 풀어 내 보낸다.

이 나라의 옷은 흰빛을 숭상한다. 흰 포목으로 도포를 만들어 입는데 소매가 몹시 넓고 바지가 희며 가죽신을 신는다. 그러나 이들이 외국에 나갈 때에는 비단옷에 수를 놓아 입기를 좋아하고 또 털옷도 입는다. 어른들은 여우나 삵괭이, 또는 잘로 만든 갖옷을 즐겨 입는다. 또 모자에는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통역들이 와서 말을 전하려면 모두 꿇어 앉아서 손으로 땅을 짚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형벌을 쓰는 것은 몹시 엄하고 급하다.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고 그 집 식구들을 데려다가 노비를 삼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도둑질한 열배를 벌 주고, 남녀간에 음란한 짓을 하거나 질투하는 여자를 미워해서 죽인 후 시체를 남쪽 산 위에 갖다 버리고 썩게 내버려 둔다. 이 시체를 여자의 친정에서 찾아 가려면 소나 말을 주어야 내주게 마련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이 풍속은 흉노와 같다.

이 나라에서는 짐승을 잘 기르고 이름 있는 말과 붉은 옥, 그리고 잘과 아름다운 구슬이 난다. 구슬이 큰 것은 대추알만큼이나 하다. 활과 칼, 창으로 병기를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가 있다.

그 나라 늙은이들이 말하기를, 옛날 도망 온 사람들이 성책을 모두 둥글게 만들어 마치 감옥과 같았다. 이 속에서 밤낮 없이 사람들이 길에 다니면서 노유가 모두 노래하여 종일토록 소리가 끊기지 않는다. 군사의 일이 있으면 역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 때 소를 잡아 그 발을 보고 길하고 흉한 것을 점친다. 즉 발가락이 갈라지면 흉하고 합쳐지면 길하다는 것이다.

만일 적이 쳐들어왔을 때는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싸우고 하호들은 양식을 져 날라 군사들을 먹인다.

사람이 여름에 죽으면 모두 얼음을 채워 두고 사람을 죽여 순장을 하는데 많이 죽일 때는 백여 명까지 죽인다. 그리고 장례를 후하게 지내는 사람도 관은 사용하되 곽은 사용하지 아니한다.

위략에 보면, 이 지방 풍속은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다섯 달 동안 집에 두는데 오래 둘수록 좋은 것으로 여긴다.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내는 음식으로는 날 것으로도 하고 익힌 것으로도 한다. 상주 된 사람은 장례를 빨리 끝내려 하지 않지만 주위에서 억지로 권한다. 거상하는 데는 남녀가 모두 흰 옷을 입고 여자는 목걸이나 패물을 걸치지 놓는다. 이런 풍속은 대체로 중국과 닮았다.

이 부여는 원래 현도에 소속되어 있었다. 한나라 말년에 와서 공손도가 바다 동쪽 지방에 세력을 넓혀 바깥 오랑캐들을 위엄으로 복종시켰다. 이리하여 부여왕 울구태는 다시 요동에 소속되었다.

이 때는 구려와 선비가 강성했다. 그런데 부여는 이 두 오랑캐 틈에 끼어 있다고 해서 울구태는 왕녀로 아내를 삼았다.

울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왕위에 섰다. 그러나 위거에게는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 마여만이 있었다. 위거가 죽자 모든 가들이 함께 마여를 세워 왕을 삼았다. 우가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의 이름도 위거였다. 이 사람으로 견사를 삼았다.

위거는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남에게 은혜를 잘 베푸니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따랐다. 이리하여 위거는 해마다 사신을 보내어 서울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정시년 중에 유주자사 무구검이 구려를 칠 때 현도태수 왕흔을 부여에 보내서 왕께 뵈었다. 이 때 위거는 견가를 시켜 들에 나가서 그 군사를 맞게 하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이 때 위거의 계부 우가는 딴 마음이 있었다. 이것을 알고 위거는 계부의 부자를 죽이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여 사신을 시켜 염송관에게 주었다.

이때 쯤 부여는 장마가 지고 가물기가 일쑤여서 오곡이 잘 익지 않았다. 그래서 그 죄를 왕에게로 돌려 바꿔야 한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죽여야 한다는 자도 있었다.

마여가 죽자 그 아들 의려는 나이 겨우 六세였다. 이 의려를 세워서 왕을 삼았다. 이 때 한나라에서는 부여왕이 죽으면 그 장사에 옥갑을 쓰도록 하여 언제나 미리 이것을 현도군에 보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갖다 쓰도록 했다. 공손연이 베임을 받았을 때도 현도군 창고에는 옥갑 한 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부여의 창고에도 옥벽과 규찬 등 여러 대 장사에 쓸 물건이 남아 있어서 이것을 대를 전해 가면서 보배로 삼고 있다.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선대 때에 하사한 물건이라 한다.

그 나라에서 쓴 도장은 예왕의 도장이라 하며, 나라에 있는 옛 성은 이름을 예성이라 한다고 하니 이곳은 대개 근본 예맥 땅이다. 그런데 부여가 그 나라 가운데 들어가 왕노릇을 하고 자칭 도망 왔다고 했으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위략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옛날 북쪽 지방에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왕의 종이 태기가 있으므로 왕이 죽이려 하자 종은 말하기를, [하늘에서 계란 같은 것이 내려와 소인의 입으로 들어가더니 태기가 있었다]고 했다.

十삭이 되어 아이를 낳았는데 왕이 이것을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가 입김으로 아이 몸을 녹여 죽지 않게 하였다. 왕이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로구나. 크면 반드시 천자가 될 위인이로다] 하고 아이를 거두어다가 그 어미를 시켜 양육하게 했다.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는데 왕은 그에게 말 먹이는 일을 시켰으나 동명은 활을 몹시 잘 쏘았다. 왕이 장차 나라를 빼앗길까 근심하여 죽이려 하니 동명이 도망하여 남쪽 시엄수에 닿았는데 배가 없어 건널 수가 없었다. 이에 동명이 활 등으로 강물을 한 번 치니 물속에서 물고기와 자라떼가 나와 다리를 놓아 주었다. 동명이 다리를 건너 강 건너편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떼가 물속으로 사라졌는데 이에 그를 쫓아오던 군사들이 더 이상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동명이 부여 땅에 도읍을 정하고 왕 노릇 했다는 것이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夫餘>

 

東夷傳 高句麗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南與朝鮮、濊貊,東與沃沮,北與夫餘接。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爲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祀靈星、社稷。其人性凶急,善寇鈔。其國有王,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雛加、主簿、優台丞、使者、皁衣先人,尊卑各有等級。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言語諸事,多與夫餘同,其性氣衣服有異。本有五族,有涓奴部、絕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本涓奴部爲王,稍微弱,今桂婁部代之。漢時賜鼓吹技人,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高句麗令主其名籍。後稍驕恣,不復詣郡,於東界築小城,置朝服衣幘其中,歲時來取之,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溝漊者,句麗名城也。其置官,有對盧則不置沛者,有沛者則不置對盧。王之宗族,其大加皆稱古雛加。涓奴部本國主,今雖不爲王,適統大人,得稱古雛加,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絕奴部世與王婚,加古雛之號。諸大加亦自置使者、皁衣先人,名皆達於王,如卿大夫之家臣,會同坐起,不得與王家使者、皁衣先人同列。其國中大家不佃作,坐食者萬餘口,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其民喜歌舞,國中邑落,暮夜男女群聚,相就歌戲。無大倉庫,家家自有小倉,名之爲桴京。其人絜清自喜,喜藏釀。跪拜申一腳,與夫餘異,行步皆走。以十月祭天,國中大會,名曰東盟。其公會,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大加主簿頭著幘,如幘而無餘,其小加著折風,形如弁。其國東有大穴,名隧穴,十月國中大會,迎隧神還于國東上祭之,置木隧於神坐。無牢獄,有罪諸加評議,便殺之,沒入妻子爲奴婢。其俗作婚姻,言語已定,女家作小屋於大屋後,名婿屋,婿暮至女家戶外,自名跪拜,乞得就女宿,如是者再三,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傍頓錢帛,至生子已長大,乃將婦歸家。其俗淫。男女已嫁娶,便稍作送終之衣。厚葬,金銀財幣,盡於送死,積石爲封,列種松柏。其馬皆小,便登山。國人有氣力,習戰鬥,沃沮、東濊皆屬焉。又有小水貊。句麗作國,依大水而居,西安平縣北有小水,南流入海,句麗別種依小水作國,因名之爲小水貊,出好弓,所謂貊弓是也。

 

王莽初發高句麗兵以伐胡,不欲行,強迫遣之,皆亡出塞爲寇盜。遼西大尹田譚追擊之,爲所殺。州郡縣歸咎于句麗侯騊,嚴尤奏言:「貊人犯法,罪不起於騊,且宜安慰。今猥被之大罪,恐其遂反。」莽不聽,詔尤擊之。尤誘期句麗侯騊至而斬之,傳送其首詣長安。莽大悅,佈告天下,更名高句麗爲下句麗。當此時爲侯國,漢光武帝八年,高句麗王遣使朝貢,始見稱王。

 

至殤、安之間,句麗王宮數寇遼東,更屬玄菟。遼東太守蔡風、玄菟太守姚光以宮爲二郡害,興師伐之。宮詐降請和,二郡不進。宮密遣軍攻玄菟,焚燒候城,入遼隧,殺吏民。後宮復犯遼東,蔡風輕將吏士追討之,軍敗沒。

 

宮死,子伯固立。順、桓之間,復犯遼東,寇新安、居鄉,又攻西安平,於道上殺帶方令,略得樂浪太守妻子。靈帝建寧二年,玄菟太守耿臨討之,斬首虜數百級,伯固降,屬遼東。(嘉)平中,伯固乞屬玄菟。公孫度之雄海東也,伯固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助度擊富山賊,破之。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爲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爲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其後復擊玄菟,玄菟與遼東合擊,大破之。

 

伊夷模無子,淫灌奴部,生子名位宮。伊夷模死,立以爲王,今句麗王宮是也。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其國人惡之,及長大,果凶虐,數寇鈔,國見殘破。今王生墮地,亦能開目視人。句麗呼相似爲位,似其祖,故名之爲位宮。位宮有力勇,便鞍馬,善獵射。景初二年,太尉司馬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正始三年,宮寇西安平,其五年,爲幽州刺吏毌丘儉所破。語在儉傳。

 

고구려는 요동 동쪽 천 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 예맥과 연접되고, 동쪽은 옥저와 연결되며, 북쪽은 바로 부여와 접한다. 환도 아래에 도읍했는데, 지방이 二천 리이고 호수는 三만이 된다.

이 곳은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넓은 못은 없다. 사람들은 산골짜기를 따라 살고 있다. 시냇물은 마시지만 좋은 밭은 없다. 아무리 힘써 농사를 짓어도 백성들은 자기들의 구복을 채울 수가 없다.

그 나라 풍속은 음식은 절약하면서도 궁실 치장은 한다. 살고 있는 집 좌우에는 큰 집을 세워 놓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또 영성과 사직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은 성질이 흉악하고 급하며 도둑질하기를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그 밑의 벼슬로는 상가, 대노, 패자, 고추가, 조부, 우태, 승, 사자, 조의, 선인 등이 있다. 이들은 각각 높고 낮은 등급이 있다.

동이에서 옛날 하던 말에 의하면 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는 것이나 모든 일들이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

그들은 성품과 옷 입는 것이 각각 다르다. 원래 다섯 종족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이다. 처음에는 연노부로 왕을 삼았었는데 차츰 힘이 미약해져서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하고 있다.

한나라 때 북 치고 피리 부는 기인을 주었더니 이들은 언제나 현도군을 통해서 조복과 머리에 쓰는 수건을 받아 갔다. 이리하여 고구려도 나라 명부에 올리게 했더니 이 뒤로 차츰 교만하여 방자해져서 다시는 와서 뵙지 않고 자기 나라 동쪽 경계에 조그만 성을 쌓고서 조복과 수건을 거기에 두어 두면 해마다 와서 가져가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지금 오랑캐들도 오히려 이 성을 책구루라고 한다. 이 구루란 즉 구려의 이름 있는 성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관리를 두는 데 있어 대노를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노를 두지 않는다. 왕의 종족은 그 대가를 모두 고추가라고 부른다.

연노부가 본래 나라의 주인이라, 지금은 아무리 왕이 아니라 하더라도 계통을 이은 이름은 고추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나라도 역시 종묘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 제사 지낸다. 절노부는 대대로 왕과 혼인을 했기 때문에 또 고추라는 칭호를 쓴다.

여러 대가들은 역시 자기가 따로 사자와 조의, 선인을 두어 이들의 이름을 모두 왕에게 아뢴다. 그러나 경대부의 가신으로서는 같이 모여 앉고 걸어가는 데 있어 왕의 집사자나 조의, 선인들과 같은 반열에 있지 못한다.

그 나라 안에 있는 큰 집들은 손수 농사를 짓지 않고 앉아서 놀고먹는데 그 수효가 만여 명이나 된다. 아래 백성들은 종이나 마찬가지로 멀리서 양식이나 생선, 소금 같은 것을 져다가 공급해 준다.

그 나라 백성들은 노래하고 춤추기를 좋아한다. 나라 안 모든 촌락에서는 밤만 되면 남녀들이 여럿이 모여서 서로 노래하고 논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조그만 창고는 있다. 이것을 부경이라고 이름한다.

사람들은 성질이 깨끗하고 맑다. 하지만 자기 집에 술을 빚어 두고 먹기를 좋아한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 다리를 뻗는다. 이것이 부여와 다른 점이다. 걸음걸이는 역시 모두 달음질치는 것과 같다.

十월이 되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가 되면 나라 안 사람들이 모두 모인다. 이것을 동맹이라고 한다. 공사로 모일 때 입는 옷은 모두 비단에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대가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쓴다. 이 두건은 수건같이 생겨서 뒤가 없다. 또 소가는 절풍을 쓰는데 이 절풍이란 모양이 마치 고깔과 같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다. 이 굴은 이름을 수혈이라고 하는데 매년 十월이 되면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 모여서 수혈신을 맞아 가지고 동쪽 물 위로 와서 제사를 지낸다. 이 때 나무로 만든 신좌 위에 그 수혈신을 모신다.

이 나라에는 감옥이 없다. 죄를 지은 사람이 있으면 여러 가 벼슬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의논해 가지고 죄인을 죽이고 그 처자는 데려다가 종을 삼는다.

그 나라 풍속은 혼인을 할 때 양쪽 집의 의논이 이미 정해지면 신부의 집에서 자기 집 뒤에 조그만 집 하나를 짓는데 이것을 서옥이라고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에 신부의 집에 와서 문 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 꿇어 앉아 신부와 함께 자겠다고 간청한다. 간청하기를 두세 번 하고 나면 신부의 부모가 비로소 승낙하고 집 뒤 조그만 집에 가서 자게 한다. 이 때 신랑은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이렇게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이미 크게 자라면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나라 풍속은 몹시 음란하다. 남자와 여자가 혼인만 하면 벌써 죽어서 장사 지낼 때 입힐 옷을 작만한다. 그리고 장사는 후하게 지낸다. 금과 은, 돈, 폐백 같은 것을 후하게 써서 장사를 지낸다. 그리고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봉분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

그 지방 말들은 몹시 작다. 그래서 산에도 곧잘 올라간다.

그 나라 사람들은 기운이 세다. 그래서 싸움을 잘한다. 옥저, 동예 등 나라가 모두 이 나라에 소속되었고, 또 이 밖에 소수맥이란 나라도 와서 붙였다.

고구려가 나라를 세울 때는 큰 물을 의지해서 백성들이 살게 했다. 서쪽에 있는 안평현 북쪽에 조그만 물이 있어 이 물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의 별종들이 이 소수를 의지해서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 나라를 소수맥이라 한다. 여기에서 좋은 활이 나는데 소위 맥궁이란 것이 곧 이것이다.

왕망 초년에 고구려 군사를 내어서 오랑캐를 치려 하자 고구려에서는 이 싸움에 잘 가지 않으려 했다. 이에 이것을 억지로 몰아서 내 보냈더니 이 군사들은 국경지방에서 모두 도망하여 도둑이 되었다. 이 말을 듣고 요서대윤 전담이 그 뒤를 쫓아 치다가 도리어 그들에게 죽었다. 이리하여 그 지방 주군이나 현에서는 모두 고구려 후 추에게 그 죄를 돌렸다.

엄우는 아뢰기를, 이것은 맥 사람들이 죄를 범한 것이요, 그 허물이 추에게 있지 않으니 도리어 그를 위로해 무마시키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만일 그에게 이 같은 큰 죄를 씌운다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했다. 그러나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치게 했다. 이리하여 엄우는 고구려후 추를 유인해 내다가 머리를 베어서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이 수급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이내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란 이름을 고쳐서 하구려라 부르라고 했다. 이리하여 이때에 이르러서 고구려는 하나의 후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한나라 광무제 八년 즉 서기 三二년에 와서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광무제는 비로소 왕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상제, 안제 사이에 와서 고구려왕 궁이 자주 요동을 침범하자 다시 이를 현도에 소속시켰다. 이 때 요동태수 채풍과 현도태수 요광은 고구려왕 궁이 두 고을의 해가 된다고 해서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다.

그러나 궁은 거짓 항복하는 체하여 화친하기를 청한다. 하지만 두 고을 태수는 이 말을 듣고 군사를 진격하지 않고 있다. 이 틈을 타서 궁은 비밀히 군사를 내어 편도를 쳐서 후성을 불사르고 요동에 들어가서 그곳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이런 뒤에도 궁은 다시 요동을 범했다. 이에 채풍은 군사를 보내 토벌했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다. 그런 지 얼마 안 되어 궁이 죽고 아들 백고가 자리를 계승하여 섰다.

그러나 이 백고도 순제, 황제 사이에 또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까지 이르렀다.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길 위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까지 빼앗아 갔다.

영제 건녕 二년에 현도태수 경림이 이를 토벌하여 고구려 군사의 머리를 베고 수백 명을 포로로 잡아 갔다. 이에 백고는 항복하여 요동에 소속되었다.

희평년 중에는 백고가 현도에 소속되기를 빌었다. 공손도의 위엄이 해동에 미치자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보내서 공손도를 도와서 부산의 적을 쳐서 깨쳤다.

백고가 죽자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의 이름은 발기요, 둘째 아들의 이름은 이이모였다. 그러나 큰 아들 발기는 몹시 불초하므로 나라 사람들은 함께 이이모를 세워 왕을 삼았다. 이 나라는 백고 때부터 자주 요동을 침범했고, 또 도망 온 호의 민가 五백 호를 받아들이기도 했다.

건안년 간에 공손강이 군사를 내어 쳐서 그 나라를 격파하고 부락들을 불태워 없앴다.

한편 발기는 자기가 형의 몸으로서 왕위를 아우에게 빼앗기고 만 것을 원망해서 연노부의 백성들 三만여 호를 데리고 공손강에게 가서 항복한 다음 비류수 근처로 옮겨 살았다. 이 때 항복해 온 호도 역시 이이모를 배반하니 이에 이이모는 다시 새 나라를 세웠다. 오늘 있는 나라가 바로 이것이다.

이에 발기는 드디어 요동으로 가고 아들은 고구려에 머물러 두었는데, 지금의 고추가와 교위거가 바로 이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뒤에 다시 현도를 치자 현도는 요동과 합세해서 이를 쳐서 크게 깨쳤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를 간통해서 자식을 낳았으니 이가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자 이 궁이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지금의 고구려왕 궁이란 바로 이 사람이다.

그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었는데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물건을 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은 이를 무척 미워했다. 그러더니 그가 자라자 과연 흉악하고 사나와서 자주 이웃 나라를 침략하다가 마침내는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지금의 왕도 나면서부터 역시 눈을 뜨고 물건을 본다. 이에 고구려 사람들은 이를 불러 그 증조와 닮았다고 하여 그 이름도 증조의 이름을 따서 위궁이라고 했다. 이 위궁은 힘이 세고 용맹이 있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경초 二년에 태위 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치자 궁은 주부와 대가를 보내어 수천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태위의 군사를 돕게 했다. 정시 三년에 궁이 서안평을 침략했고, 五년에는 유주자사 무구검에게 격파되었다. 이 사실들은 무구검전에 실려 있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高句麗>

 

東夷傳 東沃沮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濱大海而居。其地形東北狹,西南長,可千里,北與挹婁、夫餘,南與濊貊接。戶五千,無大君王,世世邑落,各有長帥。其言語與句麗大同,時時小異。漢初,燕亡人衛滿王朝鮮,時沃沮皆屬焉。漢武帝元封二年,伐朝鮮,殺滿孫右渠,分其地爲四郡,以沃沮城爲玄菟郡。後爲夷貊所侵,徙郡句麗西北,今所謂玄菟故府是也。沃沮還屬樂浪。漢以土地廣遠,在單單大領之東,分置東部都尉,治不耐城,別主領東七縣,時沃沮亦皆爲縣。漢(光)武六年,省邊郡,都尉由此罷。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夷狄更相攻伐,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主簿諸曹,皆濊民作之。沃沮諸邑落渠帥,皆自稱三老,則故縣國之制也。國小,迫於大國之間,遂臣屬句麗。句麗復置其中大人爲使者,使相主領,又使大加統責其租稅,貊布、魚、鹽、海中食物,千里擔負致之,又送其美女以爲婢妾,遇之如奴僕。

 

其土地肥美,背山向海,宜五穀,善田種。人性質直強勇,少牛馬,便持矛步戰。食飲居處,衣服禮節,有似句麗。魏略曰:其嫁娶之法,女年十歲,已相設許。婿家迎之,長養以爲婦。至成人,更還女家。女家責錢,錢畢,乃復還婿。其葬作大木槨,長十餘丈,開一頭作戶。新死者皆假埋之,才使覆形,皮肉盡,乃取骨置槨中。舉家皆共一槨,刻木如生形,隨死者爲數。又有瓦䥶,置米其中,編縣之於槨戶邊。

 

毌丘儉討句麗,句麗王宮奔沃沮,遂進師擊之。沃沮邑落皆破之,斬獲首虜三千餘級,宮奔北沃沮。北沃沮一名置溝婁,去南沃沮八百餘里,其俗南北皆同,與挹婁接。挹婁喜乘船寇鈔,北沃沮畏之,夏月恆在山岩深穴中爲守備,冬月冰凍,船道不通,乃下居村落。王頎別遣追討宮,盡其東界。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耆老言國人嘗乘船捕魚,遭風見吹數十日,東得一島,上有人,言語不相曉,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又言有一國亦在海中,純女無男。又說得一布衣,從海中浮出,其身如中(國)人衣,其兩袖長三丈。又得一破船,隨波出在海岸邊,有一人項中復有面,生得之,與語不相通,不食而死。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 동쪽에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큰 바다를 끼고 산다.

그 지형을 보면 동쪽과 서쪽은 좁고 남쪽과 북쪽은 길어서 천 리나 된다. 북쪽은 읍루, 부여와 연접되었고, 남쪽은 예맥과 닿아 있어서 호수가 오천이나 된다.

그 나라에는 대군왕은 없고, 대대로 내려가면서 부락마다 각각 장수가 하나씩 있다. 그들의 말은 구려와 대체로 같기는 하지만 때때로 조금씩 다른 점도 있다.

한나라 초년에 연나라에서 도망 온 사람 위만이 조금씩 왕 노릇을 하게 되자 이때부터 옥저가 모두 소속되었다.

한나라 무제 원붕 二년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쪼개서 네 군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다. 그러나 이 현도군은 그 뒤에 이맥에게 침입당하여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소위 현도고부가 바로 이것이다.

옥저는 도로 낙랑에 소속되었다. 이 당시 한나라는 토지가 너무 넓다 해서 단단대령 동쪽은 쪼개서 동부도위를 두었다. 그러나 성 밖을 다스릴 수가 없다 해서 따로 영동에 있는 일곱 현을 다스리게 하였다. 이 때 옥저도 역시 모두 현이 되었었다.

한나라 광무제 육년에 이르러 변방 군의 도위를 줄이게 되어 이 때문에 동부도위는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모두 그 고을 안에 있는 거수로 현후를 삼았는데, 이래서 불내, 화려, 옥저 등 모든 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다.

이 뒤에 이적이 다시 서로 치고 정벌했는데, 오직 불내와 예후만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공조, 주부를 두었다. 그러니 당시의 모든 조는 모두 예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의 모든 부락의 거수는 모두 자칭 삼로라고 했으니 이것은 옛날 현국의 제도이다. 그러나 나라가 적고 보니 큰 나라 틈에서 못 견디겠으므로 드디어 구려에 소속되어 신하노릇을 하게 되었다. 구려에서는 다시 이들 중에서 큰 나라를 추려서 사자를 삼아 두어서 여러 나라를 주장해 다스리게 했다.

또 대가를 시켜서 그 나라들의 조세를 맡아서 받아들이게 하여 포목, 생선, 소금과 그 밖의 바다 속에서 나는 먹을 것을 천 리 길에 져다가 바치게 했다. 또 그 중의 아름다운 여자들을 골라 보내서 첩을 삼게 하여 이를 마치 노복과 같이 대우하도록 했다.

그 나라 토지는 기름지고 아름다운데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서 오곡을 가꾸기에 알맞고 특히 밭농사 짓기에 적합하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직하고 용맹스럽다. 소나 말은 적고, 창을 가지고 보전을 잘한다. 음식을 먹는 것이나 거처하는 것, 그리고 입는 의복과 모든 예절은 구려와 비슷한 데가 많다.

위략에 보면, 그들의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은 여자가 십세만 되면 이미 혼인을 허락한다. 남편될 사람이 여자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길러서 자기의 아내를 삼는다. 그리고 혼인을 하여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의 집으로 같이 돌아간다. 이 때 여자의 집에서는 사위를 보고 돈을 내라고 하여 돈이 다 떨어지게 되면 도로 사위집으로 돌려보낸다고 했다.

그들의 장사 지내는 것을 보면 큰 나무로 곽을 만드는데, 그 길이가 십여 길이나 된다. 이것을 한쪽 머리에 문을 만들어 놓는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가매장을 해 놓는다. 이 시체는 겨우 몸만 가릴 만큼 흙으로 덮었다가 살이 다 썩으면 그 뼈만을 추려서 이 곽 속에 넣는다. 이리하여 온 집안사람의 뼈가 이 한 곽 속에 들어가게 된다. 여기에 나무로 산 사람의 모양ㅇ르 새겨 꽂아서 이 나무의 수효로 죽은 사람의 수를 알게 된다. 또 기와로 만든 솔을 곽 끝에 달아매고 그 속에 쌀을 넣어 두는 것이 역시 그 나라 풍속이다.

무구검이 구려를 치자 구려왕 궁은 옥저로 달아났다. 이에 무구검의 군사는 이들 진격해서 이 바람에 옥저의 여러 부락은 모두 깨지고 베이고 포로로 잡혀 간 것이 삼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 때 궁은 북옥저로 도망했다. 이 북옥저는 또 한 이름을 치구루라고 하는데, 남옥저와의 거리가 팔백여 리나 된다.

그 지방 풍속은 남쪽과 북쪽이 모두 같다. 읍루와 땅이 연접되어 있는데, 읍루는 배를 타고 와서 침략하기를 좋아한다.

북옥저 사람들은 이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여름철이면 언제나 산이나 바위 밑 큰 굴 속에 숨어서 수비하고 겨울이 되어 얼음이 얼어서 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면 부락으로 내려와 살았다.

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서 궁을 토벌할 때 그 동쪽 국경까지 쳐들어가서 그곳 노인들에게, [이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사는가]하고 물으니 노인들이 대답하기를, [이곳 사람이 어느 날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바람을 만나 수十일 동안 바람에 밀려서 떠갔더니 동쪽에 한 섬이 있고 그 섬 위에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서 알아 들을 수가 없다. 그곳 풍속은 해마다 七월이면 용녀들을 데려다가 바다에 던진다고 한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그 근처에 또 한 나라가 바다 속에 있는데 그곳에는 여자들만 살고 남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라고 했다.

그 노인의 말에 의하면 또 바다 위로 베옷 하나가 떠 내려왔는데 그 옷은 중국 사람의 옷과 같고 양쪽 소매의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다 하고, 또 깨진 배 한 척이 바람에 밀려서 해변에 와서 닿았는데 그 배 속에 있는 사람의 모양이 목에 얼굴이 또 하나 달렸고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무엇을 달라는지 알 수가 없어서 먹지 못해 굶어 죽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나라들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는 것이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東沃沮>

 

東夷傳 挹婁

挹婁在夫餘東北千餘里,濱大海,南與北沃沮接,未知其北所極。其土地多山險。其人形似夫餘,言語不與夫餘、句麗同。有五穀、牛、馬、麻布。人多勇力。無大君長,邑落各有大人。處山林之間,常穴居,大家深九梯,以多爲好。土氣寒,劇於夫餘。其俗好養豬,食其肉,衣其皮。冬以豬膏塗身,厚數分,以禦風寒。夏則裸袒,以尺布隱其前後,以蔽形體。其人不絜,作溷在中央,人圍其表居。其弓長四尺,力如弩,矢用楛,長尺八寸,青石爲鏃,古之肅慎氏之國也。善射,射人皆入(因)。矢施毒,人中皆死。出赤玉,好貂,今所謂挹婁貂是也。自漢已來,臣屬夫餘夫餘責其租賦重,以黃初中叛之。夫餘數伐之,其人衆雖少,所在山險,鄰國人畏其弓矢,卒不能服也。其國便乘船寇盜,鄰國患之。東夷飲食類皆用俎豆,唯挹婁不,法俗最無綱紀也。

읍루는 부여 동북쪽 천여 리 되는 곳에 있다. 큰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는 북옥저와 연접되어 있으나, 그 북쪽은 끝 간 곳을 알지 못한다.

땅은 산이 많고 지형이 몹시 험하다. 사람의 모양들은 부여와 같으나, 말은 부여와 같지 않고 오히려 구려와 비슷하다. 오곡을 가꾸어 먹고, 소와 말을 치며, 마포를 짜서 입는다.

사람들은 용맹하고 힘이 세다. 대군장은 없고, 부락마다 각각 대인이라는 것을 둔다. 산이나 숲 사이를 찾아 항상 굴 속에서 산다. 큰 집은 굴의 깊이가 사다리 아홉 개를 놓아야 들어갈 만하다. 깊이가 깊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땅 기운은 춥기가 부여보다도 더 춥다.

그들의 풍습은 돼지 기르는 것을 좋아해서 그 고기를 먹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에는 돼지기름을 몸에 바르는데 그 두께가 여러 푼이나 된다. 이것을 발라 추위와 바람을 막는 것이다. 여름에는 발가벗고 한 자쯤 되는 베쪼각으로 앞뒤만 숨겨 그 형체만 가린다. 그 사람됨이 모두 깨끗지 못해서 똥구덩이를 가운데에 만들어 놓고 그 구덩이 주위에 살고 있다.

그들이 쓰는 활은 길이가 사척이나 된다. 이 활의 힘은 마치 돌활과도 같다. 화살은 싸리나무를 쓰는데 그 길이가 一척 八촌이나 된다. 촉은 푸른 돌을 갈아서 거기에 꽂는다. 이 땅은 옛날 숙신씨의 나라로서 원래 활을 잘 쏘고 쏘기만 하면 반드시 사람을 맞히며 화살에 독이 있기 때문에 맞기만 하면 모두 죽는다.

이 땅에서는 붉은 옥과 좋은 잘이 난다. 지금 마랗는 읍루초라고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나는 달을 말하는 것이다.

한나라 이후로 이 땅은 부여에 소속되어 신하노릇을 해 왔다. 그러나 부여에서 너무 조세를 많이 물리기 때문에 황초년간에 와서는 부여를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키니 부여에서는 여러 번 자주 정벌했다.

그곳 사람들은 숫자는 비록 적다 하지만, 그 땅이 산을 끼고 험한데다가 그들이 활을 잘 쏘고 화살에 독이 있기 때문에 이웃 나라 사람들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종시 항복받지 못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또 배를 타고 가서 도둑질을 잘하기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머리를 앓았다.

동이는 음식 먹는 것이 모두 그릇에 담아 먹건만 유독 이 읍루만은 그렇지 않고, 법과 풍속이 이들 중에서 가장 기강이 없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挹婁>

 

東夷傳 濊

濊南與辰韓,北與高句麗、沃沮接,東窮大海,今朝鮮之東皆其地也。戶二萬。昔箕子既適朝鮮,作八條之教以教之,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其後四十餘世,朝鮮侯(淮)僭號稱王。陳勝等起,天下叛秦,燕、齊、趙民避地朝鮮數萬口。燕人衛滿,魋結夷服,復來王之。漢武帝伐滅朝鮮,分其地爲四郡。自是之後,胡、漢稍別。無大君長,自漢已來,其官有侯邑君、三老,統主下戶。其耆老舊自謂與句麗同種。其人性願愨,少嗜欲,有廉恥,不請(句麗)匄。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衣服有異。男女衣皆著曲領,男子擊銀花廣數寸以爲飾。自單單大山領以西屬樂浪,自領以東七縣,都尉主之,皆以濊爲民。後省都尉,封其渠帥爲侯,今不耐濊皆其種也。漢末更屬句麗。其俗重山川,山川各有部分,不得妄相涉入。同姓不婚。多忌諱,疾病死亡輒損棄舊宅,更作新居。有麻布,蠶桑作綿。曉候星宿,豫知年歲豐約。不以誅玉爲寶。常用十月節祭天,晝夜飲酒歌舞,名之爲舞天,又祭虎以爲神。其邑落相侵犯,輒相罰責生口牛馬,名之爲責禍。殺人者償死。少寇盜。作矛長三丈,或數人共持之,能步戰。樂浪檀弓出其地。其海出班魚皮,土地饒文豹,又出果下馬,漢桓時獻之。臣松之按:果下馬高三尺,乘之可於果樹下行,故謂之果下。見博物志、魏都賦。

 

正始六年,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興師伐之,不耐侯等舉邑降。其八年,詣闕朝貢,詔更拜不耐濊王。居處雜在民間,四時詣郡朝謁。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遇之如民。

 

예는 남쪽은 진한과 연접하고, 북쪽은 고구려, 옥저와 연해 있다. 그리고 동쪽은 큰바다에 닿아 있다. 지금의 조선 동쪽은 모두 그 예 땅이다. 호수는 이만이나 된다.

옛날 기자가 조선에 가서 여덟 가지 조목의 가르침을 만들어 가르쳤다. 그랬기 때문에 문을 닫지 않고 자도 민가에는 도둑이 없었다.

그 뒤 사십여 대를 지나 조선 후 준이 참람되게 왕이라 일컫자 진승 등이 일어나서 온 천하가 모두 진나라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연나라, 제나라, 조나라 백성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으로 옮겨 오게 되었으니 그 수효는 여러 만 명이 되었다. 이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북상투에 오랑캐 옷 입고 다시 여기에 와서 왕 노릇했다.

한나라 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하고 그 땅을 쪼개서 네 군으로 만들었다. 이로부터 오랑캐와 한나라가 차츰 구별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대군장은 없고, 한나라 시대 이후로 벼슬 이름은 후, 읍군, 삼로가 있어서 아래 백성들을 다스려 왔다.

그 지방 노인들이 옛날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곳 인종은 구려와 같다고 한다.

또 사람들의 성질을 보면, 솔직하고 매사에 성의가 있으며, 욕심은 적고 염치가 있다. 말하는 것과 법률과 풍속은 대체로 구려와 같고 의복만은 일절 다르다. 남자나 여자는 모두 곡령을 입고, 특히 남자는 허리에 은화를 차는데 넓이가 여러 치가 된다. 이것으로 장식 삼아 다는 것이다.

단단대령 서쪽은 낙랑에 소속되었고, 고개 동쪽 일곱 현은 도위를 두어 다스리게 한다.

이 지방 백성은 모두 예 땅 백성인데, 뒤에 와서는 도위를 없애고 그곳 우두머리를 뽑아 후를 삼아 다스리게 했다. 지금의 불내, 예는 모두 그 종족들이다. 그러나 한나라 말년에 와서는 다시 구려에 소속되었다.

그들의 습관은 산천을 몹시 소중하게 여긴다. 산천에는 각각 부분이 따로 있어 아무나 함부로 출입하고 상관하지 못한다.

같은 성끼리는 혼인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 밖에도 꺼리는 것이 몹시 많다. 식구가 몹시 앓거나 죽으면 살던 집은 버리거나 헐어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삼을 심어 마포를 짜고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서 입는다. 새벽이면 별의 방위를 보아 그 해의 풍흉을 점친다. 그들은 구슬이나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해마다 十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데, 이때에는 밤낮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논다. 이것을 무천이라고 한다. 또 그들은 범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를 올린다.

부락끼리 서로 침범하는 일이 있으면 문득 이것을 죄 주어 그 벌로 소나 말을 내놓도록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책화라고 한다. 또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인다. 그래서 역시 도둑이 별로 없다.

이들은 길이 세 길이나 되는 긴 창을 만들어 혹 이것을 몇 사람이 함께 가지고 쓰기도 한다. 그래서 이들은 보전을 잘한다.

낙랑과 단궁이 이 땅에서 났고, 그 바다에서는 얼룩거리는 물고기 가죽이 난다. 또 얼룩진 표범이 나고 과하마가 난다.

박물지 위도부에 보면, 이 과하마는 높이가 겨우 삼척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실과나무 밑으로도 타고 다닐 수가 있어서 이것을 과하마라고 한다고 했다.

정시 육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동쪽예가 구려에 소속되었다 해서 군사를 일으켜 정벌했다. 이에 불내후 등이 온 고을을 들어 여기에 항복했다.

정시 육년에 이들이 대궐에 나와 공물을 바치자 다시 조서를 내려 불내를 봉하여 예왕을 삼았다. 이로부터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濊>

 

東夷傳 韓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釁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冉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辟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濆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侯准既僭號稱王,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並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准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准,准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綰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綰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准降,說准求居西界,(故)中國亡命爲朝鮮籓屏。准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准,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准。准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居韓地,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准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絕滅,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魏略曰:初,右渠未破時,朝鮮相曆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鑡爲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爲韓所擊得,皆斷發爲奴,積三年矣。」鑡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辰)鑡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即以鑡爲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尚得千人,其五百人已死。鑡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匹,鑡收取直還。郡表鑡功義,賜冠幘、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

 

桓、靈之末,韓濊強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幘,下戶詣郡朝謁,皆假衣幘,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

 

其俗少綱紀,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禦。無跪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塚,其戶在上,舉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其葬有槨無棺,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以瓔珠爲財寶,或以綴衣爲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爲珍。其人性強勇,魁頭露紒,如炅兵,衣布袍,足履革蹻蹋。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木鍤之,通日嚾呼作力,不以爲痛,既以勸作,且以爲健。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飲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隨,踏地低昂,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爲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無他珍寶。禽獸草木略與中國同。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雞,其尾皆長五尺餘。其男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髡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豬。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巿買韓中

 

한은 대방 남쪽에 있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끝이 났고, 남쪽은 왜와 연접되어 있는데 지방은 사천 리가 된다. 이 한은 세 종족이 있다. 첫째 마한이요, 둘째 진한이요, 세 째 변한이다. 진한은 옛날의 진국이다. 마한은 그 서쪽에 있다.

이 지방 백성들은 대대로 여기에 와서 사는 사람들로서 벼를 심어 곡식으로 먹고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 입을 줄 알았다.

이 나라에는 각각 장수가 있는데, 그 중에 큰 자는 자기들 스스로 신지라고 부르고 그 다음은 읍차라고 한다. 이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산다. 이곳에는 성곽이 없다.

여기에는 원양국, 모양수국, 상수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록국, 신분첨국, 백제국, 속로불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남국, 자지국,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고비리국, 신첩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만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매로국, 군비리국, 전사오차국, 일리국, 불미국, 우반국, 구소국, 정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랑국, 임소반국, 신운신국,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사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 등 도합 오십여 나라가 있다.

이 중에 큰 나라는 혹 만여 호가 되는 나라도 있고, 작은 나라는 몇 천 호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모두 합치면 모두 십여만 호나 된다.

진왕은 월지국을 다스리고, 신지에게는 혹 우호신운견지보안사숙지분신이아불례구사진지렴의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 벼슬을 보면 위솔선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 장, 후가 있다.

준이 참람되게 자기를 왕이라고 일컫자 연나라에서 도망해 온 위만에게 공격을 받았다.

위략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옛날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가 주나라가 쇠하고 연나라가 자기 스스로 자기를 높여 왕이 되어 가지고 동쪽으로 땅을 침략하려 함을 이것을 보자 역시 왕이라 일컫고, 계속하여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치고 주나라를 존중히 여기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그 나라 대부 예가 간해서 중지되었다. 이에 조선에서는 예를 시켜 서쪽으로 가서 연나라를 설득시켜 그 쪽에서도 전쟁을 일으키지 말도록 했다.

그 뒤 두 나라는 자손들이 매우 교만하고 사나와졌다. 그래서 연나라에서는 장수 진개를 보내서 조선의 서쪽을 쳐서 땅 이천여 리를 빼앗아 만 반한으로 국경을 삼았다. 이 뒤로 조선은 차츰 힘이 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할 때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아 요동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조선에서는 왕 비가 왕위에 있었다. 그는 진나라에서 자기 나라를 습격할까 겁이 나서 항복하여 진나라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진나라에 조회하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조선왕 비가 죽고 그 아들 준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 지 이십여 년에 진항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연, 제, 조나라 등의 백성들이 몹시 조심하고 괴로움을 받아 차츰 도망해서 준에게로 갔다. 준은 이들을 서쪽 지방에 와서 살게 했다. 뒤에 한나라에서 노관으로 연나라 왕을 삼자 조선에서는 연나라와의 국경을 취수로 삼았다.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해서 호복 차림으로 동쪽으로 취수를 건너 준에게 와서 항복하고, 이어서 준에게 말해서 서쪽 국경지방에서 살게 해달라고 했다.

준은 생각하기에 그는 중국에서 망명 온 사람이고 우리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하니 믿어도 좋을 것이라 하고, 이에 그를 배하여 박사를 삼고 구슬을 하사하고 백리 땅까지 봉해 주었다. 그리고 그를 시켜 서쪽 변방을 지키라고 했다. 그러나 위만은 도망 오는 사람들을 달래서 자기편 사람을 많이 모았다. 그리고 거짓 사람을 보내서 준에게 고하기를, [지금 한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열 길로 쳐들어오니 내가 들어가 왕을 호위하겠읍니다] 했다. 준이 이를 허락하자 위만은 즉시 왕도로 들어가 준을 공격하니,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그를 대적하지 못했다.

이에 준은 자기 좌우에 있는 사람과 궁인들을 데리고 바다로 달아나 한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일컬었다.

위략에 보면, 준의 아들 우친은 자기 나라에 머무르고 있다가 성을 한이라 고치고, 준이 바다 가운데서 왕 노릇을 한 뒤로는 다시 조선에 왕래하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그 뒤에 망해 없어지고 지금도 한나라 사람들은 그를 받들어 제사 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에는 그 땅을 낙랑군에 붙이고 사시로 와서 왕께 뵈었다.

위략에 보면 이렇게 씌어 있다.

처음에 우거를 쳐서 깨치기 전에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간했으나 우거가 듣지 않자. 동쪽에 있는 辰國으로 갔다. 이때에 따라간 백성들이 이천여 호나 되었는데, 역시 조선과는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에 이르러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가 되었다. 그는 낙랑 땅이 토지가 아름답고 백성들이 부유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자기 나라에서 도망쳐 그곳에 항복하려고 자기 부락을 나왔다. 이 때 그는 밭 가운데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사람을 보았는데 韓人 말이 아니었다.

염사치가 그 까닭을 묻자 그 남자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漢나라 사람인데 내 이름은 호래다. 우리들 천오백 명은 나무를 베려고 나왔다가 韓나라 사람들에게 붙들려 모두 머리를 깎고 종이 되어 지금 삼년 째 이러고 있다.]라고 했다. 염사치는 묻기를,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한나라 낙랑에 항복하러 가는 길인데 같이 가겠느냐] 하니까 그들은 모두 그러겠다고 했다.

이에 염사치는 호래 등을 데리고 함자현에 나가 그 사연을 말하니 현에서 그들을 군으로 보냈다. 군에서는 즉시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잠중으로 해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갔다. 전에 호래와 함께 항복한 자들을 빼앗아 일천 명은 데리고 왔으나, 나머지 오백 명은 이미 죽어서 하는 수 없었다.

이에 염사치는 진한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는 오백 명을 돌려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낙랑에서 군사 만 명으로 배를 타고 가서 너희를 치리라] 했다.

진한에서는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오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보낼 수가 없고 대신 딴 것으로 갚으리다] 하고, 진한 사람 일만오천 명과 변한에서 나는 포목 일만오천 필을 보내 왔다.

염사치는 이것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니 군에서는 염사치의 공로를 표창하여 관책과 토지와 집을 하사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이어오다가 안제의 연광 사년 때에 이르러 모두 복제를 받았다.

환제, 영제 말년에 이르러 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그 군현을 제어 할 수 없이 되자 백성들이 많이 한나라로 도망해 들어갔다.

건안년 중에 공손강이 남쪽 지방 거친 땅을 쪼개서 대방군을 삼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서 유민들을 수집해서 군사를 일으켜 한과 예를 치니 옛날 살던 백성들도 차츰 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후로는 왜와 한은 드디어 대방에 소속되었다.

경초년 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보내서 해, 정 두 군을 넘어서 한의 여러 신지들에게 읍군의 인수를 더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읍장에게도 각각 인수를 더 내렸다.

그들의 풍속은 옷과 두건을 좋아한다. 그래서 아래 백성들이 군에 나가 뵈올 때는 모두 옷과 두건을 빌어쓰던 것이 이제는 명제가 하사한 옷을 입고 두건을 쓴 자가 천여 명이나 되었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이 본디 한나라를 통일했었다 해서 진국의 여덟 나라를 떼어 낙랑에 주었다. 그러나 역관의 말이 사실과 잘못 전해져서 신지 첨한이 노해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했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치다가 궁준이 전사하자 두 군은 드디어 한에게 멸한 바 되었다.

그곳 풍속은 기강이 서 있지 않아서 나라나 고을에 아무리 주수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이 부락으로 옮겨 다니면서 섞여 살아서 서로 제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꿇어앉아 절하는 법이 없다. 사는 집은 풀로 지붕을 해 이고 흙으로 방을 만들어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다. 문을 맨 위에 내고 온 집안 식구가 모두 그 속에 함께 있다. 그리고 어른과 어린이 또는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다.

사람이 죽어 장사를 지내는 데에는 관은 쓰지만 곽은 쓰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닐 줄은 모른다. 그래서 이 소나 말은 모두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내는 데 쓴다.

그들은 구슬을 제일 보배로 삼는다. 그래서 혹은 이 구슬을 옷에 매달아 장식을 삼기도 하고 혹은 목에 걸어 내리뜨리기도 한다. 그런 때문에 그들은 금은이나 비단 같은 것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성질이 몹시 강하고 용맹스럽다. 머리는 상투를 쪼아 내놓고 있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는다.

국가가 관가에 무슨 일이 있을 때에는 성곽을 쌓게 하고, 또 모든 나이 젊고 용맹하고 씩씩한 자를 뽑아서 모두 등가죽에 큰 노끈을 꿰어 기다란 큰 나무에 붙뜰어 매고 날마다 소리를 지르면서 잡아 당겨 힘을 써도 아픈 줄을 모르도록 단련한다. 이것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단단히 하는 외에 또 몸을 튼튼히 하는 데 필요한 것이다.

오월이 되어 씨를 다 뿌리고 나면 귀신에게 제사를 올린다. 이 때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 추며 술을 마시고 놀아 밤낮을 쉬지 않는다. 춤을 출 때에는 여러 십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서로 뒤를 따르면서 땅을 밟고 높이 뛴다. 이 춤 추는 모습은 꼭 택무와 같다. 十월에 농사 일이 끝나면 또 한 번 이렇게 논다.

귀신을 몹시 믿기 때문에 고을마다 한 사람을 뽑아 세워서 천신 제사 지내는 것을 주장하게 하는데, 이 사람을 천군이라고 부른다. 또 이들 여러 나라에는 각각 따로 읍이 있는데 이것을 소도라고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사방에서 도망해 온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모여 돌아가지 않는다.

이들은 또 도둑질을 좋아한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마치 불가에서 절을 세우는 것과 같다. 그들 중에는 착한 자도 잇고 악한 자도 있는데, 그 북쪽 지방의 군에 가까운 모든 나라는 조금쯤 예절을 알고 이와 반대로 먼 곳에 사는 백성들은 바로 죄수와 같아서 노비끼리 서로 모여서 산다.

그 곳에는 딴 보배라고는 없고 금수나 초목도 대략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고 큰 배가 난다. 또 꼬리가 가느다란 닭이 나는데, 그 꼬리는 대개 길이가 오척이 넘는다. 남자들은 때때로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 이것을 문신이라고 한다.

또 주호라는 땅이 있는데 이것은 마한 서쪽 바다 속 큰 섬 위에 있다. 그 지방 사람들은 조금 키가 적고 말하는 것도 한과는 다르다. 모두 머리를 깎아서 마치 선비와 같다. 다만 옷을 입고 가죽 띠는 것만 한과 같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른다. 또 옷은 웃도리만 입고 아랫도리는 없어서 마치 바지를 벗고 다니는 것과 같다. 배를 타고 한나라에 왕래하면서 장사를 한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韓>

 

東夷傳 辰韓

辰韓在馬韓之東,其耆老傳世,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馬韓割其東界地與之。有城柵。其言語不與馬韓同,名國爲邦,弓爲弧,賊爲寇,行酒爲行觴。相呼皆爲徒,有似秦人,非但燕、齊之名物也。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謂樂浪人本其殘餘人。今有名之爲秦韓者。始有六國,稍分爲十二國。

 

진한은 마한 동쪽에 있다. 그 나라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도망 온 사람들이 진나라의 괴로운 부역을 피하여 한나라로 오자, 마한에서는 그 동쪽 국경지방의 땅을 베어서 그들에게 주었다 한다.

그들은 성책이 있고, 그 말하는 것은 마한과 다르다. 나라를 방이라 하고 활을 호라고 한다. 도둑을 구라고 하고 술잔 돌리는 것을 행상이라고 한다. 서로 부르기를 같은 동무처럼 불러서 진나라 사람들의 말하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비단 연나라, 제나라에서 물건을 부르는 말일 뿐 아니라, 낙랑 사람을 아잔이라고 부르는 것이나 동쪽 지방 사람이 우리를 아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낙랑 사람은 본래 그 나머지 사람인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는 진한이라고 이름하는 자가 비로소 여섯 나라가 있더니 이것이 차츰 쪼개져서 열 두 나라가 되었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辰韓>

 

東夷傳 弁辰

弁辰亦十二國,又有諸小別邑,各有渠帥,大者名臣智,其次有險側,次有樊濊,次有殺奚,次有邑借。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弁、辰韓合二十四國,大國四五千家,小國六七百家,總四五萬戶。其十二國屬辰王。辰王常用馬韓人作之,世世相繼。辰王不得自立爲王。魏略曰:明其爲流移之人,故爲馬韓所制。土地肥美,宜種五穀及稻,曉蠶桑,作縑布,乘駕牛馬。嫁娶禮俗,男女有別。以大鳥羽送死,其意欲使死者飛揚。魏略曰:其國作屋,橫累木爲之,有似牢獄也。國出鐵,韓、濊、倭皆從取之。諸巿買皆用鐵,如中國用錢,又以供給二郡。俗喜歌舞飲酒。有瑟,其形似築,彈之亦有音曲。兒生,便以石厭其頭,欲其褊。今辰韓人皆褊頭。男女近倭,亦文身。便步戰,兵仗與馬韓同。其俗,行者相逢,皆住讓路。

 

변진은 역시 열 두 나라이다. 그 나라마다 모두 조그만 별읍이 있다. 그리고 각각 우두머리가 있는데 이것을 거수라고 한다. 큰 나라에는 이 우두머리를 신지라고 하고, 그 다음은 검측이라고 하며, 또 그 다음은 번예라 한다. 그 다음은 살해가 있고, 또 그 다음은 차읍이 있다.

이들에게는 기사국, 불사국, 변진미리미진국, 변진누도국, 근기국, 난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원국, 변진반로국, 변진낙노국, 군미국, 변군미국, 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시로국, 주선국, 마연국, 변진구사국, 변진정조마국, 변진안사국, 변진독로국, 사로국, 우유국 등이 있어 변한, 진한을 합치면 도합 이십사국이 된다.

이 중에 큰 나라는 사, 오천 호나 되고, 작은 나라는 육,칠백 호가 되어 총 호수가 사십오만 호가 된다. 그 중에서 이십개국은 진한 왕에게 소속되었는데, 진한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을 써서 농사를 지어 대마다 서로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진한의 왕은 자기 스스로 서서 왕노릇을 하지 못한다.

이곳은 토지가 기름지고 아름다와 오곡과 벼를 가꾸기에 알맞다. 또 누에치는 법을 알아서 비단을 짜서 입는다. 말과 소를 타고 다닐 줄 알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있어 모든 예속이 남자와 여자가 구별이 있다. 사람이 죽어 장사 지낼 때에는 큰 새의 날개를 다는데, 이것은 죽은 사람이 날아가는 듯하라는 뜻일 게다.

위략에 보면, 그 나라는 집을 짓는데 가로 나무를 얽어매어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이 만든다고 했다.

그 나라에는 쇠가 나는데 이것을 한과 예와 왜에서 모두 가져간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파는 것도 모두 돈을 가지고 해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가지고 쓰듯 한다. 이 쇠는 또 두 군에도 공급해 준다.

그 나라 풍속은 노래와 춤과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은 축방울과 같다. 이것을 타면 역시 소리와 곡조가 나온다.

아이를 낳으면 이내 돌로 그 머리를 누른다. 이것은 그 머리를 모나게 만들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머리가 모났다. 또 남자나 여자가 모두 왜와 같이 바늘로 몸뚱이에 먹물을 넣어 글씨나 그림을 그린다. 보전을 잘하고 병기는 대개 마한과 비슷하다. 그 나라 풍속은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나면 모두 그 자리에 서서 길을 양보한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弁辰>

 

東夷傳 弁辰

弁辰與辰韓雜居,亦有城郭。衣服居處與辰韓同。言語法俗相似,祠祭鬼神有異,施灶皆在戶西。其瀆盧國與倭接界。十二國亦有王,其人形皆大。衣服絜清,長髮。亦作廣幅細布。法俗特嚴峻。

 

변진은 진한과 서로 섞여서 산다. 여기에도 성곽이 있고, 의복이나 거처하는 것이 대개 진한과 비슷하다. 그리고 말하는 것과 법이나 풍속도 모두 같은 데가 많다. 귀신을 제사 지내는 법은 좀 다르다. 부엌을 집 서쪽에 만들어 놓고 여기에서 제사를 지낸다. 그 중에 독로국이 있는데 왜와 연접해 있다. 모두 열 두 나라로서 저마다 왕이 있다. 사람들의 모양은 모두 큼직큼직하고 의복도 정결한데 머리털은 길게 기른다. 이들도 역시 폭이 넓은 가느다란 베로 옷을 지어 입고 법과 풍속이 몹시 엄준하다.(三國志)

 

<三國志 東夷傳 弁辰>

 

東夷傳 倭人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依山島爲國邑。舊百餘國,漢時有朝見者,今使譯所通三十國。從郡至倭,循海岸水行,曆韓國,乍南乍東,到其北岸狗邪韓國,七千餘里。始度一海,千餘里至對馬國。其大官曰卑狗,副曰卑奴母離。所居絕島,方可四百餘里,土地山險,多深林,道路如禽鹿徑。有千餘戶,無良田,食海物自活,乖船南北巿糴。又南渡一海千餘里,名曰瀚海,至一大國,官亦曰卑狗,副曰卑奴母離。方可三百里,多竹木叢林,有三千許家,差有田地,耕田猶不足食,亦南北巿糴。又渡一海,千餘里至末盧國,有四千餘戶,濱山海居,草木茂盛,行不見前人。好捕魚鰒,水無深淺,皆沈沒取之。東南陸行五百里,到伊都國,官曰爾支,副曰泄謨觚、柄渠觚。有千餘戶,世有王,皆統屬女王國,郡使往來常所駐。東南至奴國百里,官曰兕馬觚,副曰卑奴母離,有二萬餘戶。東行至不彌國百里,官曰多模,副曰卑奴母離,有千餘家。南至投馬國,水行二十日,官曰彌彌,副曰彌彌那利,可五萬餘戶。南至邪馬壹國,女王之所都,水行十日,陸行一月。官有伊支馬,次曰彌馬升,次曰彌馬獲支,次曰奴佳鞮,可七萬餘戶。自女王國以北,其戶數道里可得略載,其餘旁國遠絕,不可得詳。次有斯馬國,次有已百支國,次有伊邪國,次有都支國,次有彌奴國,次有好古都國,次有不呼國,次有姐奴國,次有對蘇國,次有蘇奴國,次有呼邑國,次有華奴蘇奴國,次有鬼國,次有爲吾國,次有鬼奴國,次有邪馬國,次有躬臣國,次有巴厘國,次有支惟國,次有烏奴國,次有奴國,此女王境界所盡。其南有狗奴國,男子爲王,其官有狗古智卑狗,不屬女王。自郡至女王國萬二千餘里。

 

男子無大小皆黥面文身。自古以來,其使詣中國,皆自稱大夫。夏後少康之子封於會稽,斷發文身以避蛟龍之害。今倭水人好沈沒捕魚蛤,文身亦以厭大魚水禽,後稍以爲飾。諸國文身各異,或左或右,或大或小,尊卑有差。計其道里,當在會稽、東冶之東。其風俗不淫,男子皆露紒,以木綿招頭。其衣橫幅,但結束相連,略無縫。婦人被發屈紒,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種禾稻、紵麻,蠶桑、緝績,出細紵、縑綿。其地無牛馬虎豹羊鵲。兵用矛、楯、木弓。木弓短下長上,竹箭或鐵鏃或骨鏃,所有無與儋耳、硃崖同。倭地溫暖,冬夏食生菜,皆徒跣。有屋室,父母兄弟臥息異處,以硃丹塗其身體,如中國用粉也。食飲用籩豆,手食。其死,有棺無槨,封土作塚。始死停喪十餘日,當時不食肉,喪主哭泣,他人就歌舞飲酒。已葬,舉家詣水中澡浴,以如練沐。其行來渡海詣中國,恆使一人,不梳頭,不去蟣虱,衣服垢汙,不食肉,不近婦人,如喪人,名之爲持衰。若行者吉善,共顧其生口財物;若有疾病,遭暴害,便欲殺之,謂其持衰不謹。出真珠、青玉。其山有丹,其木有柟、杼、豫樟、楺櫪、投橿、烏號、楓香,其竹筱簳、桃支。有薑、橘、椒、蘘荷,不知以爲滋味。有獮猴、黑雉。其俗舉事行來,有所雲爲,輒灼骨而蔔,以占吉凶,先告所蔔,其辭如令龜法,視火坼占兆。其會同坐起,父子男女無別,人性嗜酒。魏略曰:其俗不知正歲四節,但計春耕秋收爲年紀。見大人所敬,但搏手以當跪拜。其人壽考,或百年,或八九十年。其俗,國大人皆四五婦,下戶或二三婦。婦人不淫,不妒忌。不盜竊,少諍訟。其犯法,輕者沒其妻子,重者滅其門戶。及宗族尊卑,各有差序,足相臣服。收租賦。有邸閣國,國有市,交易有無,使大倭監之。自女王國以北,特置一大率,檢察諸國,諸國畏憚之。常治伊都國,於國中有如刺史。王遣使詣京都、帶方郡、諸韓國,及郡使倭國,皆臨津搜露,傳送文書賜遺之物詣女王,不得差錯。下戶與大人相逢道路,逡巡入草。傳辭說事,或蹲或跪,兩手據地,爲之恭敬。對應聲曰噫,比如然諾。

 

其國本亦以男子爲王,住七八十年,倭國亂,相攻伐歷年,乃共立一女子爲王,名曰卑彌呼,事鬼道,能惑衆,年已長大,無夫婿,有男弟佐治國。自爲王以來,少有見者。以婢千人自侍,唯有男子一人給飲食,傳辭出入。居處宮室樓觀,城柵嚴設,常有人持兵守衛。

 

女王國東渡海千餘里,復有國,皆倭種。又有侏儒國在其南,人長三四尺,去女王四千餘里。又有裸國、黑齒國復在其東南,船行一年可至。參問倭地,絕在海中洲島之上,或絕或連,周旋可五千餘里。

 

景初二年六月,倭女王遣大夫難升米等詣郡,求詣天子朝獻,太守劉夏遣吏將送詣京都。其年十二月,詔書報倭女王曰:「制詔親魏倭王卑彌呼:帶方太守劉夏遣使送汝大夫難升米、次使都巿牛利奉汝所獻男生口四人,女生口六人、班布二匹二丈,以到。汝所在逾遠,乃遣使貢獻,是汝之忠孝,我甚哀汝。今以汝爲親魏倭王,假金印紫綬,裝封付帶方太守假授汝。其綏撫種人,勉爲孝順。汝來使難升米、牛利涉遠,道路勤勞,今以難升米爲率善中郎將,牛利爲率善校尉,假銀印青綬,引見勞賜遣還。今以絳地交龍錦五匹、臣松之以爲地應爲綈,漢文帝著皁衣謂之弋綈是也。此字不體,非魏朝之失,則傳寫者誤也。絳地縐粟罽十張、蒨絳五十匹、紺青五十匹,答汝所獻貢直。又特賜汝紺地句文錦三匹、細班華罽五張、白絹五十匹、金八兩、五尺刀二口、銅鏡百枚、真珠、鉛丹各五十斤,皆裝封付難升米、牛利還到錄受。悉可以示汝國中人,使知國家哀汝,故鄭重賜汝好物也。」

 

正始元年,太守弓遵遣建中校尉梯俊等奉詔書印綬詣倭國,拜假倭王,並齎詔賜金、帛、錦罽、刀、鏡、采物,倭王因使上表答謝恩詔。其四年,倭王復遣使大夫伊聲耆、掖邪狗等八人,上獻生口、倭錦、絳青縑、綿衣、帛布、丹木、犬付、短弓矢。掖邪狗等壹拜率善中郎將印綬。其六年,詔賜倭難升米黃幢,付郡假授。其八年,太守王頎到官。倭女王卑彌呼與狗奴國男王卑彌弓呼素不和,遣倭載斯、烏越等詣郡說相攻擊狀。遣塞曹掾史張政等因齎詔書、黃幢,拜假難升米爲檄告喻之。卑彌呼以死,大作塚,徑百餘步,徇葬者奴婢百餘人。更立男王,國中不服,更相誅殺,當時殺千餘人。復立卑彌呼宗女壹與,年十三爲王,國中遂定。政等以檄告喻壹與,壹與遣倭大夫率善中郎將掖邪狗等二十人送政等還,因詣台,獻上男女生口三十人,貢白珠五千,孔青大句珠二枚,異文雜錦二十匹。

 

왜인은 대방 동남쪽 큰 바다 속에 있다.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를 만들었는데 모두 백여 나라가 된다.

한나라 때에는 조현하는 자가 있었고, 지금도 역관들이 다니는 나라가 삼십개국이나 된다.

왜에 가려면 해안을 쫓아 한국을 지나서 조금 남쪽으로 해서 다시 조금 동쪽으로 가다가 그 북쪽 언덕 구사에 이르면 한국과의 거리가 칠천 리나 된다. 처음 바다를 한 번 건너려면 천여 리가 되는데 바로 대마도에 이른다. 그 나라 대관은 비구라 하고 부관은 비노무리라 한다.

그들이 살기는 절도에 살지만 지방은 사백여 리 나 된다. 땅의 형세를 보면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다. 길은 겨우 새가 기어다니고 사슴이 걸어 다닐 만한 좁은 길이다. 호수는 일천이 넘는다. 하지만 좋은 밭이 없어 농사짓는 것은 별것이 아니고 바다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산다. 그리고 배를 타고 남쪽 북쪽으로 다니면서 장사를 한다.

또 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일 천 리를 가면 한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도 큰 나라 하나가 있다.

벼슬 이름은 첫째 비구요, 그 다음은 비노무리인데 지방은 삼백 리가 된다. 곳곳에 대나무숲이 많고, 집은 삼천여 호나 된다. 조금 밭이 있기는 하지만 이 밭에 애써 농사를 지어도 그 사람들이 잘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남쪽과 북쪽으로 다니면서 장사를 해서 먹고 산다.

또 바다 하나를 건너 일천여 리를 가면 말로국이 있다. 여기에는 인가가 사천여 호나 된다. 이곳은 산을 의지하여 바다를 끼고 산다. 초목은 무성하고 길을 다녀도 사람이라곤 보지 못한다. 물고기와 전복이 잘 잡힌다. 물이 깊거나 얕거나 간에 물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잡아낼 수가 있다.

동남쪽으로 육지로 오백 리를 가면 이도국에 도달한다. 이곳 벼슬 이름은 이지가 있고, 그 다음으로 설모, 고병, 거고가 있다. 천여 호가 사는데 대대로 왕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여왕국에 소속되어 있다. 그래서 언제나 사신이 왕래하기도 하고 여왕국에 주재해 있기도 한다.

동남쪽으로 가면 노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곳 벼슬 이름은 사마고가 있고, 다음으로 비노무리가 있다. 여기에는 인가가 이만여 호가 있다.

동쪽으로 백 리쯤 가면 불미국이 있다. 이곳의 벼슬 이름으로는 다모가 있고, 그 다음은 역시 비노무리가 있다. 이곳에는 인가가 천여 호가 있다.

남쪽으로 투마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곳은 바다로 이십일을 간다. 벼슬 이름은 미미가 있고, 그 다음으로 미미나리가 있다. 이곳은 인가가 오만여 호가 된다.

남쪽으로 또 야마대국이 있다. 이곳은 여왕이 도읍하고 있는 곳으로서 바다로 십일을 가고 다시 육지로 한 달을 가야 도달한다. 벼슬 이름으로는 이지마가 있고, 다음으로 미마승, 또 그 다음으로 마마획지, 노가지가 있다. 이곳에는 인가가 칠만여 호나 있다.

이 여왕국으로부터 북쪽에 있는 호수와 도리 같은 것을 대략 기록해 본다. 그러나 그 나머지 곁에 있는 나라들은 멀리 외져서 자세히 알 길이 없다.

그 나라들은 차례로 사마국이 있고, 또 그 다음으로 이백지국이 있고, 또 이사국이 있다.

계속해서 나라 이름을 기록해 본다.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야마국, 궁신국, 파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 등이 있는데, 이것으로 여왕국의 국경은 끝이 난다.

그 남쪽으로 구노국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이곳은 남자가 왕으로 있다. 벼슬 이름으로는 구고지비구로서 이들은 여왕에게 소속되지 않는다.

이곳에서 여왕국까지는 일만이천여 리나 된다. 이곳에서는 남자는 어른이나 어린이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넣고, 또 몸뚱이에도 바늘로 먹물을 넣어서 글자나 그림을 넣는다. 옛날로부터 이들이 중국에 와서 배울 때에는 모두 자기들의 칭호를 대부라고 했다한다.

하나라 소강의 아들을 회계 땅에 봉했을 때 그는 머리를 깎고 몸뚱이에 바늘로 먹물을 넣어 글자나 그림을 그려 가지고 교룡의 해를 피한 일이 있었다.

지금 왜인이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와 전복, 조개를 잘 잡고 몸뚱이에 그림을 넣는 것도 역시 큰 물고기나 물새를 싫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뒤에 와서는 차츰 장식으로 이 법을 쓰게 되었다.

모든 나라의 이 문신하는 기법은 모두 다 달랐다. 혹은 좌편에 그림을 넣기도 하고 또는 우편에 글씨를 넣기도 한다. 그 크고 작은 것도 다 각각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 문신의 위치, 대소를 가지고 사람의 높고 낮은 것을 구별한다.

그 도리를 계산하는 것은 회계 동쪽으로 기준을 잡는다.

그들의 풍속은 음란하지가 않다.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어 매 놓고 무명 수건으로 머리를 가린다. 옷은 폭이 넓은 옷감을 서로 이어서 걸치는데, 그 밖에는 별로 꿰매는 일이 없다. 여자들은 머리를 틀어 쪽을 찌고 홑옷을 걸치는데 옷을 통째로 만들어 중간에 구멍을 뚫고 머리에서부터 내려 쓴다.

오곡과 벼를 가꾸어 먹을 줄 안다. 또 누에를 쳐서 비단을 짜고 삼을 심어서 베를 짠다. 그래서 가는 모시와 좋은 비단이 생산된다. 그곳에는 소나 말, 범과 표범, 양,닭 같은 것은 없다. 병기로는 창과 방패, 나무활을 쏜다. 나무로 만든 활은 아랫도리는 짧고 위는 길다. 대나무 화살에 촉은 쇠나 뼈로 만들어 꽂는다.

이곳 왜는 땅이 몹시 따뜻해서 겨울, 여름 없이 싱싱한 나물을 먹을 수가 있다. 그들은 모두 발을 벗은 채로 살고 집과 방을 만들어 거처한다. 부모와 형제끼리는 딴 곳에서 거처하고, 몸에는 주사를 발라 마치 중국에서 얼굴에 분을 칠하듯이 한다.

음식은 그릇에 담아 손으로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은 쓰지만 곽은 없다. 흙을 긁어 모아 봉분을 만든다. 사람이 죽으면 십여 일 동안 시체를 집에 두어 두는데, 이 때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 동안 상주는 곡하고 울지만 딴 사람들은 노래 부르고 춤 추고 술을 마신다. 장사를 지내고 나면 온 집안 식구가 물 속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 중국에 올 때에는 항상 머리에 빗질 않고 서캐도 잡지 않아서 의복이 더러운 사람 하나를 데리고 간다. 이 사람은 고기도 먹지 않고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아서 마치 상인과 같이 한다. 이 사람을 지최라고 한다.

그 일행이 만일 좋은 일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재물을 주고 만일 일행 중에 병이 있거나 해를 입는 일이 있으면 그 지최라는 사람이 행동을 잘못했다 해서 죽이려 한다.

이곳에서는 진주와 푸른 옥이 난다. 그리고 그 산에는 단사가 있다. 이곳에서는 매화나무, 도토리나무, 상수리나무, 예장나무, 가죽나무, 참죽나무가 나고, 또 오호라는 활이 난다. 풍향도 난다.

대나무로는 가는대가 나고, 또 살대가 난다. 또 생강, 귤, 후추, 소엽도 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맛 있는 것인 줄을 모르고 지낸다. 원숭이와 검은 꿩도 있다.

그 지방 풍속을 보면, 무슨 일이 있으면 자기 뼈를 불로 지져서 길흉을 점 치는데, 이 법은 마치 거북점을 치는 것과 같아서 불빛을 보고 그 조짐을 알아낸다.

그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앉는데 부자간이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또 그곳 사람들은 몹시 술을 좋아한다.

위략에 보면, 그들의 풍속은 올바른 사시를 알지 못하고 다만 봄이면 밭을 갈고 가을이 되면 거두어 들이는 것을 알 뿐으로서 이것으로써 일 년으로 따진다고 했다.

어른을 보면 공경한다는 것이 겨울 손을 마주잡고 꿇어앉아 절하는 것뿐이다. 이들은 몹시 오래 살아서 혹 백 년을 넘겨 사는 사람도 있고, 또 팔,구십세를 사는 사람도 있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여자를 많이 얻어 대개 사, 오명을 데리고 살고, 아랫도리 백성이라도 혹 이,삼명의 여자를 데리고 산다. 여자들은 음란한 짓을 하지 않고, 또 질투를 하지 않는다. 또 그곳 사람들은 도둑질이나 소송을 하는 법이 없다.

만일 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그 중에 죄가 경한 자는 그 처자를 몰수해 가고 죄가 중한 자는 그 사람의 한 문호나 종족까지 모두 멸해 버린다.

높고 낮은 사람은 모두 각각 차서가 있다. 웃사람에게는 무조건 복종한다. 세금을 받고, 또 다 각각 집을 지니고 살며, 곳곳에 시장이 있다. 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것은 대왜를 시켜 감독하게 한다.

여왕국으로부터 북쪽에는 특별히 큰 기관 하나를 두어서 여러 나라들을 감독한다. 모든 나라들은 이 기관을 몹시 두려워하고 꺼린다. 그 밑에 있는 이도국은 나라 안에 자사를 두어 다스리게 하는데, 이 법도 위에 말한 기관과 같다.

왕이 사신을 보내서 경도, 대방군과 그 밖의 모든 한나라에 가서 보게 한다. 왜국에 사신 갔을 때는 보내는 문서나 물건들을 모두 여왕에 바치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이 해야 한다.

아랫도리 백성들이 어른을 길에서 만나면 길가에 서서 머뭇머뭇하고 혹은 걸터앉기도 하고 혹은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땅을 짚어 공경하는 표정을 갖는다. 묻는 말에 대답할 때는 [아아!]하고 소리를 내는데 이것은 그렇다는 뜻이다.

이 나라는 본래부터 남자를 왕으로 삼아 왔었는데, 육, 칠십년이 지난 뒤에 나라가 어지러워져서 몇 해 동안을 서로 공격하고 싸워 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여자 하나를 세워 왕을 삼고 이를 비미호라고 불렀다.

이 여왕은 귀신을 섬겨 온 나라 백성들을 반하게 만들었다. 나이가 찼건만 남편을 맞지 않고, 오직 남자 동생 하나가 있는데 그가 여왕을 도와서 나라를 다스린다.

그는 왕이 된 지 여러 해사 되었건만 그의 얼굴을 본 자가 몇 사람 없다. 계집종이 천 명이나 그를 모시고 있고, 그 중에 남자 한 사람이 있어 음식을 갖다 올리고 말을 전하면서 출입한다. 그가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 그리고 성책은 모두 거창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언제나 병기를 가지고 수위한다.

여왕국에서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일천여 리를 가면 거기에 또 나라 하나가 있는데 이것도 모두 왜의 종족이다.

또 수유국이란 나라가 그 남쪽에 있는데, 그곳 사람들은 키가 삼, 사척이나 된다. 이 나라는 여왕국에서 거리가 사천여 리가 된다.

또 나국과 흑치국 등의 나라가 그 동남쪽에 있다. 이곳은 배를 타고 일년이나 간다. 이 나라는 모두 왜국 땅으로서 바다 속에 섬으로 혹 연해 있기도 하고 혹 끊어져 있기도 하다. 이곳은 주위가 오천여 리나 된다.

경초 이년 유월에 왜국 여왕이 대부 난두미 등을 보내서 군에 와서 천자를 뵙고 물건을 바치겠다고 청한다. 이에 태수 유하가 사신을 보내서 서울에 가서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 해 십이월에 천자가 조서를 내려 여왕에게 회보하기를, [이제 조서를 써서 친위왜왕 비미호에게 알리노라. 지금 대방태수 유하가 사신을 보내 와서 너희 대부 난두미와 부사 도시우리가 갖다 바치는 남자 사명, 여자 육명과 반포 두필을 받았다. 너희 나라는 상거가 몹시 먼 데도 사신을 보내서 물건을 바쳐 왔으니 이는 오로지 너의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알고 나는 몹시 너를 귀엽게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너를 친위왜왕을 삼는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에게 보내는 것이니 너는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네가 보낸 사신 난두미와 도시우리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두미로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로 솔선교위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 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 보내는 바이다. 그리고 강지교룡금 오필과 강지추속계 십장, 청강 오십필, 감청 오십필을 주어 너희가 바쳐 온 공물에 대해 답사하는 것이다. 또 특별히 너에게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두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보내는 터이니, 너희는 이를 갖다가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여 주어서 우리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하라. 그래서 정중하게 이같은 좋은 물건을 너희에게 하사하는 바이다] 했다.

정시 원년에 태수 궁준이 건중교위 제휴를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왕을 배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정시 사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팔인을 보내서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다. 이에 액사구 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다음 육년에 조서를 내려 왜국의 난두미와 황동에게 인수를 주었다. 팔년에는 태수 왕기가 와서 보고하기를, 왜국의 여왕 비미호와 구노국의 남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해서 왜국에서는 재사오월 등을 보내서 그들의 서로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에 중국에서는 색조연사 장정 등을 보내서 황동에게 조서를 내려 난두미에게 벼슬을 주고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비미호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 명을 순장했다.

비미호의 뒤를 이어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희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서 이 때 죽은 사람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비미호의 일가 딸이 되는 대여를 세웠다. 이 때 대여의 나이는 겨우 십삼세였는데 비로소 나라안의 인심이 정해졌다.

이 때 장정 등이 대여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더니, 대여는 왜국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삼십명을 보내 와서 뵙고 포로 삼십명과 흰 구슬 오십덩이, 청대구주 두장, 이문잡금 이십필을 바쳐 왔다.(三國志)

 

評曰:史、漢著朝鮮、兩越,東京撰錄西羌。魏世匈奴遂衰,更有烏丸、鮮卑,爰及東夷,使譯時通,記述隨事,豈常也哉!

 

평한다.(오환선비동이전 전체에 대한 진수의 논평) [사기]와 [한서]가 조선, 양월을 저술하고 동경(東京)은 서강(西羌)을 기록했다.(동경은 후한 때 수도인 낙양을 말하는 것으로, 후한 때 서강 공략을 상징하는 표현인 듯한데, 혹시 다른 사서 명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나라 때에 흉노가 마침내 쇠망했으나 다시 오환, 선비와 동이가 있었다. 사역(使譯)이 때때로 통하여 사안에 따라 기술하였으나 어찌 불변일 수 있겠는가!

 

魏略西戎傳曰:氐人有王,所從來久矣。自漢開益州,置武都郡,排其種人,分竄山谷間,或在福祿,或在汧、隴左右。

 

《위략魏略》<서융전西戎傳>에서 말하길: 저氐인들에게 왕이 있었던 것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오래된 일이다. 한나라가 익주를 개척하여 무도군武都郡을 개설하고, 그 종족들을 물리쳐서 (저인들이) 산과 계곡 사이로 달아나서 숨었으니, 나뉘어서 (무도군의) 상록현上祿縣에 머물거나, 견汧과 농隴의 좌우에 머물렀다.

 

其種非一,稱槃瓠之後,或號青氐,或號白氐,或號蚺氐,此蓋蟲之類而處中國,人即其服色而名之也。其自相號曰盍稚,各有王侯,多受中國封拜。

 

그 종족은 하나가 아닌데, 반호槃瓠의 후예라고 하며, 혹은 『청저靑氐』라고 부르고, 혹은 『백저白氐』라 부르며, 혹은 『염저蚺氐』라고도 부르니, 이것은 대개 벌레의 종류로 중국에 사는 것인데, (중국인들이) 그 사람들을 옷의 색깔에 따라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서로 『합치盍稚』라고 부르며, 각각 왕과 후가 있으니, 많은 것이 중국에서 피봉받거나 벼슬받은 것이다.

 

近去建安中,興國氐王阿貴、白項氐王千萬各有部落萬餘,至十六年,從馬超爲亂。超破之後,阿貴爲夏侯淵所攻滅,千萬西南入蜀,其部落不能去,皆降。

 

근래 (헌제) 건안建安 중에 흥국興國(흥국현은 한양漢陽군에 있다.) 저왕 아귀阿貴와 백항百項(백항은 구지仇池다. 구지는 무도현에 있다.) 저왕 천만千萬에게는 부락에 각각 1만여명이 있었는데, (건안) 16년(216년)에 이르러 마초馬超를 따라서 난을 일으켰다. 마초가 격파된 후에 아귀는 하후연夏侯淵에게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였고, 천만은 서남쪽의 촉蜀으로 들어갔는데, 그 부락민들은 갈 수가 없어서 모두 (위나라에) 항복하였다.

 

國家分徙其前後兩端者,置扶風、美陽,今之安夷、撫夷二部護軍所典是也。其(太)守善,分留天水、南安界,今之廣魏郡所守是也。

 

나라가 나뉘어 옮겨간 그 전후에 양단에 부풍扶風군과 미양美陽군이 설치되니, 지금의 안이安夷와 무이撫夷 이부의 호군護軍이 관장하는 곳이다. 그들은 본래의 선량함을 지키며, 천수天水와 남안南安의 경계에서 나뉘어 머무르니, 지금의 광위군廣魏郡이 지키는 장소가 이곳이다.

 

其俗,語不與中國同,及羌雜胡同,各自有姓,姓如中國之姓矣。其衣服尚青絳。俗能織布,善田種,畜養豕牛馬驢騾。

 

그 습속과 언어는 중국과 같지 않고, 강羌족이나 잡다한 종족들과 같으며, 각자 스스로 성씨가 있는데, 성씨는 중국의 성씨와 같다. 그들의 의복은 청색과 진홍색을 숭상한다. 풍속은 베를 짤 수 있으며, 밭농사를 잘하고, 가축은 돼지․소․말․당나귀․노새를 기른다.

 

其婦人嫁時著衽露,其緣飾之制有似羌,衽露有似中國袍。皆編發。多知中國語,由與中國錯居故也。其自還種落間,則自氐語。

 

그들의 부인들이 혼인할 때에는 임로衽露를 입고, 그 외관을 꾸미는 생김새는 강羌족과 비슷한데, 임로는 중국의 포와 비슷하다. 모두 머리를 땋는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어를 아는데, 이는 중국과 섞여서 기거한 까닭이다. 자기들 종족의 부락 사이로 돌어가면, 자신들의 저어를 사용한다.

 

其嫁娶有似於羌,此蓋乃昔所謂西戎在於街、冀、豲道者也。今雖都統於郡國,然故自有王侯在其虛落間。又故武都地陰平街左右,亦有萬餘落。

 

그들의 혼인은 강羌족과 유사한데, 이것은 아마도 옛날에 서융西戎이 가街현․기冀현․원도豲道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지금은 모두 군국郡國에서 통치를 받지만, 오래 전에는 그들의 빈 읍락 사이에는 스스로 왕과 제후가 있었다. 또한 옛 무도武都군의 땅 음평陰平현과 가街현 주위에도 1만여명의 부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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