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의 최후

한부울 2011. 10. 21. 13:04

********************************

누가 무아마르 카다피(Muammar Gaddafi, 1942-2011)를 쏘았나?

[연합뉴스] 2011년 10월 21일(금) 오전 10:24 |

  

독재자의 최후

그 누구라도 국민을 속이고 국민을 위해하고 국민에게 겁주고 그래서 자신이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자의 결말은 이와 같은 것이다.

똑똑히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리비아의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에게 누가 총을 쏘았을까.

국가과도위원회(NTC)군에 생포된 카다피의 모습과 이를 현장에서 지켜본 목격자들의 생생한 증언이 나오고 있지만, 정작 누가 카다피를 쏴 숨지게 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외신들을 종합해보면 카다피가 NTC군에 붙잡혔을 때까지만 해도 부상을 당하긴 했지만, 살아있었다.

 

카다피는 20일(현지시간) 호송차량 100여 대를 앞세워 반군의 포위망을 뚫고 시르테 탈출을 시도하다가 시르테 서쪽으로부터 3㎞ 떨어진 곳에서 생포됐다. 프랑스 전투기가 카다피 호송 차량을 향해 위협 폭격을 가했으며 이어 NTC군이 공격해 호송차량 가운데 15대가량이 불탔고, 카다피군 50여 명이 숨졌다. 그러나 카다피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인근 고속도로 밑에 있는 배수관 밑으로 숨어들었고, 곧이어 NTC군에 적발됐다. NTC군은 카다피를 생포했을 당시 그가 이미 다리와 등에 총상을 입었다고 전했다.

 

                               [Al Jazeera Muammar Gaddafi dead]

 

 

 

 

문제는 카다피가 붙잡힌 이후 상황이다.

 

휴대전화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에는 멍한 표정의 카다피가 피를 흘린 채 비틀거리며 NTC 군인들에 이끌려 트럭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어 누군가 "그를 살려줘, 그를 살려줘!"라고 소리친 뒤 총성이 울렸고, 카메라의 방향은 갑자기 바뀌어 영상 속에서 카다피는 사라졌다. 이후 화면에는 죽은 것처럼 보이는 카다피가 구급차에 실려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NTC의 마무드 지브릴 총리는 "그가 생포된 이후 카다피 지지자들과 NTC군 사이에서 총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카다피가 머리에 총을 맞아 숨졌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NTC의 한 소식통은 로이터통신에 "그들(NTC군)이 카다피를 생포했지만, 그를 끌고 가는 동안 카다피를 구타했고, 그를 죽였다. 이것은 전쟁이다"라며 다른 증언을 내놓았다. 이 소식통은 "카다피가 당시 저항했던 것 같다"고 추정했다.

 

CBS방송은 카다피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사람은 숨진 것처럼 보였던 카다피 경호원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카다피가 체포되지 않도록 그를 쐈다는 것이다.

 

한 NTC군도 로이터통신에 "카다피의 경호원 중 한 명이 카다피의 가슴에 총을 쐈다"고 전했다. 카다피의 시신이 해안도시 미스라타로 이송된 뒤 이를 확인한 의사는 카다피가 머리와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진술이 엇갈리면서 카다피가 누구의 손에 의해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됐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또 누군가가 카다피를 고의적으로, 혹은 우발적으로 죽였는지도 불분명하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18일 "우리는 무아마르 카다피 전 리비아 국가원수가 생포되거나 살해돼 리비아 국민이 더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길 바란다"고 밝혀 카다피 살해를 용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또 지난 5월 미국이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을 당시 일각에서는 빈 라덴을 생포할 경우 신병 처리 과정에서 논란이 일 수 있고, 빈 라덴을 따르는 이슬람 급진세력의 반발과 공격이 거세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처음부터 미국이 사살을 염두에 두고 작전을 펼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카다피의 경우도 NTC군이 카다피군의 보복 등을 우려해 의도적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그러나 지브릴 NTC 총리는 "카다피를 죽이라는 지시는 없었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 조재영 기자

******************************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 미냐르 알카다피(Muammar Gaddafi, 1942년 6월 7일-2011년 10월 20일)는 리비아의 정치인이자 군인으로, 1969년부터 2011년까지 리비아의 최고지도자였다. 가다피라고도 부른다.

 

1972년부터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그 이후에도 정부 문건과 관영 통신에서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jamāhīriyya, 대중의 국가", "대중에 의한 공동체)의 위대한 9월 사회주의 인민 혁명의 수호자' 내지는 '혁명의 지도자이자 수호자'를 자칭하며 독재정치를 펴 왔다. 그 과정에서 기행도 일삼아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그를 중동의 미친 개라고 부른것을 계기로 이와같이 불리기도 하였다.

 

1969년 육군 대령(Colonel)으로 복무 중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정을 몰아내 1970년 리비아의 국가원수 겸 국가평의회 의장 겸 총리 겸 국방장관에 올랐다. 1977년 사회주의,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융합한 자마히리야(인민권력) 체제를 선포한 그는 '인민 직접민주주의'라는 독특한 체체 구축을 명분으로 의회제와 헌법을 폐지, 전제 독재권력을 강화했다.

 

2009년 6월 8일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사망함으로써 현재 생존하는 국가 지도자(왕족 제외) 중에서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으며(사망자까지 포함하면 4번째) 리비아 지역이 1551년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1299–1919)의 영토가 된 이래로(당시 트리폴리, Tripoli)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이다. 2009년 2월부터 2010년 1월까지 53개 아프리카 국가로 구성된 국제 정부간 기구 아프리카 연합(African Union) 의장을 지냈다.

 

2011년 초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리비아에서도 2011년 2월 카다피 정권에 대항해 반정부 시위(National Transitional Council)가 일어났으며, 2011년 8월 22일 자유 리비아군이 트리폴리에 진입하여 그의 아들 둘을 생포하였다. 10월 20일에 그는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시르테(Sirte) 또는 수르트는 리비아의 도시로, 시르테 주의 주도이며 인구는 135,451명(2009년 기준)이다. 지중해 시드라 만 남부 연안에 위치한다. 1942년 무아마르 카다피가 이 곳에서 태어났으며 1969년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카다피가 자신의 친족이나 같은 부족 출신 인사들을 적극 기용하면서 수르트는 카다피 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이 된다. 1999년 아프리카 통일 기구 정상 회의와 2007년 다르푸르 분쟁 평화 협상이 이 곳에서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