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독립의사-송학선(宋學善)

한부울 2011. 5. 21. 22:29

송학선(宋學善, 1897.2.19~1927.5.19)은 일제 강점기에 금호문 사건을 일으키고 사형 당한 독립 운동가이다.


생애한성부 태생으로 어릴때 가세가 기울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어렵게 자랐다. 성인이 된 뒤로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기구 가게에 다녔으며, 1926년 거사 무렵에는 병으로 가게를 그만두었다가 완치된 상태였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사망하자 빈소가 마련된 창덕궁 앞에서는 호곡을 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 고종은 망국의 상징이었고 일본인들에게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에 비통함이 더욱 컸다. 금호문(金虎門)은 창덕궁의 서남문으로 빈소의 출입구였으며, 송학선은 조선총독부의 고관들이 이곳으로 드나드는 것을 보고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26일, 27일 양일간 이 곳에서 칼을 품고 사이토를 기다리다가 사흘째인 4월 28일 창덕궁에서 조문을 하고 나오는 일본인 세 명이 탄 무개차 안에 사이토가 탄 것으로 착각하고 이 차를 습격하여 경성부회 평의원 다카야마, 사토, 이케다 등을 죽였고 이중 사이토로 오인한 한 사람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현장에서 달아나던 중 그를 추격하던 조선인 순사 오환필을 찌른 후 휘문고등보통학교 인근에서 일본 경찰과 격투 끝에 붙잡혔으며,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사건 당시 미혼으로 자손은 없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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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 암살 하려했던 10대 열혈의사

[뉴데일리] 2011년 05월 19일(목) 오전 11:55


1926년 일제의 사이토 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10대 애국자가 있다. 그 애국자의 94주기 추모식이 열린다. 국립서울현충원(원장 정진태)은 “19일 오전 11시, 애국지사묘역 9호에서 ‘송학선 의사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거행되는 ‘송학선 의사 94주기 추모식’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송학선 의사’는 서울 출생이다. 17살 때 일본인이 경영하는 서울 남대문 호전(戶田)농기구 상사에서 근무했다. 송 의사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를 숭배하며 자신도 일제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다.


송 의사는 1926년 3월 15일 순종이 붕어(崩御)하자 사이토 총독도 반드시 조문할 것이라 판단하고, 18일 창덕궁 금호문 앞에서 기다렸다. 오후 1시경 일본인 3명이 탄 차가 창덕궁으로 들어가자 송 의사는 사이토 총독이 탄 차라고 생각하고 뒤쫓았다. 얼마 후 차가 금호문으로 나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자동차에 뛰어들어 2명을 사살했다. 차를 뒤쫓는 일본 기마경찰과 서대문경찰서 순사 오필환도 사살한 뒤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하지만 이후 그가 사살한 2명이 초옥 일행이 아니라 일제 침략의 선봉이었던 국수회 지부장과 경성부협의원이었음을 알고 땅을 쳤다.


송 의사가 재판을 받을 때 경성지방법원의 일본인 재판관이 “피고는 어떤 주의자인가? 사상가인가?”라고 묻자, “나는 주의자도 사상가도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다. 다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우리 민족을 압박하는 놈들은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는 것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총독을 못 죽인 것이 저승에 가서도 한이 되겠다”고 대답했다.


경성지방법원은 송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27년 5월 19일 사형이 집행됐다. 송 의사는 1966년 5월 18일 애국지사묘역 9호에 안장되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일 열리는 송 의사 추모식에는 기념사업회 회원, 국가보훈처·광복회 관계자, 추모객 등 4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서울현충원은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들의 나라사랑 정신의 계승발전에 일조하는 관련단체의 추모행사를 지속적으로 적극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전경웅 기자  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