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구천을 떠도는 영혼

한부울 2009. 10. 21. 14:57

이등박문 사체검안서’ 첫 공개…피격당시 총탄상흔 명확 http://blog.daum.net/han0114/17049555 

 

뤼순(旅順)이라는 지명 사실여부와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변고여부?

************************

구천을 떠도는 영혼

[연합뉴스] 2009년 10월 21일(수) 오전 07:00


뤼순감옥 부근 유해 아직 못 찾아

 


중국 랴오닝성의 해상 관문 다롄에서 버스로 1시간을 더 달리면 랴오닝반도의 남단 항구도시인 뤼순에 도착한다. 다롄-뤼순간 4차로 도로가 널찍하게 느껴질 만큼 교통량이 많지 않은 한적한 소도시이지만 1905년 당시 뤼순은 만주 차지를 위해 격돌한 러시아와 일본이 벌였던 러일전쟁의 최대 격전지였다.


우리에게는 100년 전 하얼빈 의거로 일제의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최후의 순간을 맞이했던 뤼순감옥이 있는 곳으로 잘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받아 가로수 잎들이 고운 단풍을 차려입은 19일 찾은 뤼순감옥은 5m가 넘는 높이에 쇠창살이 둘러쳐진 높다란 붉은색 담에 둘러싸여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열강의 식민지 쟁탈 경쟁이 한창이던 1900년대 일찌감치 만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이곳에 1902년 처음 85칸짜리 감방을 갖춘 감옥을 세웠고 러일전쟁 승리로 만주 땅을 확보한 일제는 이 감옥을 증축한 뒤 항일운동을 벌였던 애국열사들을 가두는 사상범 수용소로 사용됐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는 이듬해 3월 26일 처형되기까지 5개월간 이곳에 수감돼 있었다. 감옥 문을 들어서면 붉은 벽돌로 세워진 일본식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로 팔을 벌리듯 감방이 늘어선 2층짜리 수용소가 음산한 기운을 풍기며 맞이한다.


수감자들이 입었던 죄수복이며 고문 기구, 북쪽 담 옆에 있는 사형장 등 일제시대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된 감옥을 돌다 보면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돼 수감된 애국열사들이 어떤 고초를 겪었을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안 의사가 수감된 감방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처형장도 원형대로 보존돼 있다. 일제가 물러간 뒤 이 역사적 현장을 기념관으로 지정, 관리하면서도 군사기밀 등을 이유로 외국인에에게 개방하지 않았던 중국 정부는 올해부터 외국인의 관람을 허용했다.

 

이 기사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무엇인가 중요한 열쇠가 숨겨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20세기초 대일항쟁, 일제타도란 대의는 중공정부역시 우리민족과 다르지 않게 공통적인 지상최대 목표였고 안의사의 이등박문 사살사건은 그들에게도 귀감이 되고 교육적인 가치가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해방이후 60년이 넘도록 안중근 의사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않고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민족이라는 이질감을 따지기 전에 정말 각박하기 이를 때 없고 솔직히 매정하기까지 한 처사라 섭섭한 마음이 없을 수가 없다.

정말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자꾸드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지금 중공정부는 중화를 외치면 56개 소수민족을 지배하고 있다.

물론 그 속에는 조선족도 포함된다.

그들은 중화를 외치지만 중화의 대의가 올바르게 서 있는지 조차 의심가게 하는 면이다.

조선족을 포용 할 수 있는 중국이라면 그래서 중화라면 60년이 넘도록 안의사의 유지를 내 몰라라 할 수 없는 일이다.

60년 시간, 죽의 장막...

그동안 대륙에서는 피비린내를 앙동하게 하는 변란이 무수히 많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화대혁명! 이다.

그 기간동안 수많은 인명과 문화재가 살상되고 파괴되었다.

바로 공산당원 홍의병들이 사상적,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면을 타파하고자 광분 할 때다.

문화대혁명시 무슨일이 일어 났는지 우린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중공정권이 1949년 비로소 대륙을 차지하고 난 후 기필코 숨겨야 할 역사적 사실이 그 때까지는 여기저기 산적해 있었다고 해야 한다.

그 만큼 숨길 것이 많았다는 말이다.

60년간 중공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안중근 의사 시신정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왜 찾아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바로 대의를 바탕으로 한 선린관계이다.

그러함에도 중공정부는 두손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드는 면이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인가 밝히지 못할 것이 분명히 있어 여태 개방하지 않았다고 보이는 의심스러운 면이 많다.

무엇일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그들은 부자유스럽게 하고 있었음이다.

일본 역시 명확하게 거들지 못하는 이유도 그와 같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를 삼고 지적하여야 할 중요한 점은 바로 뤼순(旅順)이라는 지명 정체성이다.

이상하게도 뤼순(旅順)이라는 장소가 블라디보스톡(海蔘威)과 연계되는 것 같고 위해위(威海衛)가 여순(旅順)이라는 느낌이 자꾸든다.

구 블라디보스톡이 바로 대련 즉 뤼순이라는 느낌이 많다.

1895년 청일전쟁(sino-japanese war)이란 도식을 만들 때부터 일어난 혼란이라고 추측된다.

결론적으로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지금 뤼순감옥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문화대혁명기간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그것을 숨기려 한 것이 아닌가 보이는 점이 분명히 있다.

지금 그들이 안중근 의사 시신을 찾아낸다 하여도 신빙성이 떨어진다.

왜냐하면 이미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더 많으니까....

시대적 혼란속에서 영혼마저 구천에 떠돌 수밖에 없는 처지를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뤼순 감옥 내에 안 의사 추모관과 함께 '국제 항일열사 기념관'이라고 명명하긴 했지만 안 의사를 비롯한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도 승인했다. 이 기념관에는 안 의사뿐 아니라 함께 수감된 단재 신채호 선생, 우당 이회영 선생 등 11명의 독립투사의 흉상과 사료들이 전시돼 있다.


광복회 등이 예산을 지원, 5개월의 준비를 거쳐 안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25일 개관식을 갖는 이 기념관은 이미 입장료 20위안을 받고 관람객들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32살의 젊은 나이로 조국 광복을 위해 짧은 생을 마감한 안 의사가 의거 100주년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뤼순감옥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그러나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내가 죽거든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이장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유언은 여전히 실현되지 않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어쩌면 그의 유언을 영영 이룰 수 없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보훈처는 지난해 3월 그가 묻힌 곳으로 추정되는 감옥 북쪽의 야산 일대를 발굴했지만 끝내 그의 유해를 찾는 데 실패했다. 이미 이 일대는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다. 20층 높이의 고층 건물이 올라섰고 기중기를 비롯한 중장비가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다.


일부 연구가들은 이 야산이 아닌 다른 곳에 묻혔을 것이라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하지만 사형장이 북쪽에 위치하고 수감자들이 처형되면 으레 이 야산에 묻혔던 점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보훈처 역시 새로운 고증이 나오기 전까지는 추가 발굴에 나서기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2006년 현지 실사를 통해 매장 추정지를 확인하고도 발굴을 미뤘던 당국의 늑장 대응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기념관 역시 원래 기대에는 크게 못 미친다.


1억5천만원의 사업비를 들여 600㎡ 규모로 건립된 이 전시관은 안 의사가 숨진 현장에 들어섰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지만 당초 계획보다 상당히 축소됐다. 원화 가치 하락으로 집행 예산이 줄면서 안 의사의 일대기를 소개하는 동영상 제작이 취소됐고 생전 안 의사의 유품 모조품을 만들어 전시하려던 계획도 백지화됐다.


하얼빈 역 의거 현장이 중국 당국의 소극적 자세로 보호구역으로 지정되지 못하는 마당에 기왕에 건립한 이 기념관에라도 더 공을 들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안 의사의 영혼이 고국 땅을 찾아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마당에 뤼순감옥의 기념관만이라도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념관 건립을 주도한 다롄대 유병호 교수는 "뤼순 감옥 내에 안 의사를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며 "더 많은 애착과 관심을 갖고 안 의사를 기릴 수 있도록 후손들이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뤼순=연합뉴스) 박종국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