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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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道]
1.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고,
直隸省(十一府。六直隸州。十九州。一百二十四縣)。
○保定府(名莫州。領二州。一十五縣)清苑(樊興附府)滿城(永樂)安肅(遂城)定興(范陽)新城(新泰)唐縣(解虞)博野(博陵)望都(武定)容城(漢縣)完縣(燕平)蠡縣(彖州)雄縣(歸義)祁州(安國)束鹿(鹿城)安州 高陽(高平)新安(安全)-地輿名目(一十九省)
欽州(安州)
경기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고양(高陽)이고,
평안 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안주(安州)이고,
安州,
中国古代行政区划名。
南朝梁置,治宋寿县(今广西钦州市东北钦江西北岸)。
隋开皇十八年(598年)改名钦州。
南朝梁改南梁州置,治南安县(今四川剑阁县)。
辖境约当今四川省剑阁县。西魏改为始州。
西魏大统十六年(550年)置,治安陆县(今湖北安陆市)。
北周大象初改名郧州,旋复名安州。
唐辖境相当今湖北省安陆、云梦、应城、广水、孝感等市县地。
北宋属荆湖北路。宣和元年元年(1119年)升德安府。
唐初李子通置,治武康县(今浙江德清县千秋镇西余英溪南)。
辖境相当今浙江省德清县一带。寻改名武州。
唐武德五年(622年)置,治隆安县(今越南清化省清化县东南)。
贞观元年(627年)废。
渤海国置,治今俄罗斯滨海边区奥耳加。为安边府治所。辽废。
唐末或五代前蜀置,治今重庆市云阳县北云安镇。后废。
辽置,治今辽宁省昌图县北四面城。
金皇统三年(1143年)改为归仁县。
金天会七年(1129年)升顺安军置,治高阳县(今河北高阳县东旧城)。
辖境相当今河北省高阳县北部及安新县南部等地。
大定二十八年(1188年)移治葛城县(今河北安新县西南安州),泰和八年(1208年)又移治渥城县(今河北安新县)。
元初复治葛城县,至元二年(1265年)省。旋复置。
明洪武七年(1374年)省葛城县入州。1913年降安州为安县。
元中统五年(1264年)改石泉军置,治今四川省安县东北。属成都路。
辖境约当今四川省安县、北川县境。明洪武七年(1374年)降为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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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평안도⊙ 안주목(安州牧)
사(使) 1인. 영변도 중익 병마(寧邊道中翼兵馬)를 겸한다. 판관(判官) 1인. 역시 중익 병마(中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의 팽원군(彭原郡)인데, 태조(太祖) 14년 신묘에【당(唐)나라 장흥(長興) 2년. 】안북부(安北府)를 두고, 성종(成宗) 2년 계미에【송(宋)나라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 】영주 안북 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 무오【송나라 천희(天禧) 2년.】에 안북 대도호부(安北大都護府)로 고쳤다. 공민왕(恭愍王) 18년 기유에 안주 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고, 좌용(左勇)·우용(右勇)·좌맹(左猛)·우맹(右猛)·전용(前勇)·후용(後勇)·전맹(前猛)·후맹(後猛)의 8군(軍)에 각기 상·부천호(上副千戶)를 두었다가,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목(牧)으로 삼았다. 별호(別號)는 안릉(安陵)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속현(屬縣)이 1이니, 안융(安戎)이다.
가을두산(加乙頭山)【주(州) 동쪽에 있는데, 주인(州人)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대천(大川)은 청천강(淸川江)이다.【주성(州城) 북쪽을 둘러 있다. 예전에는 살수(薩水)라 일컬었으니, 곧 고구려 을지 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장수 우문술(宇文述)·우중문(于仲文) 등 9 장군을 패퇴시킨 땅이다. 조준(趙浚)이 일찍이 시(詩)를 짓기를, “살수가 출렁출렁 푸른 하늘에 잠겼는데, 수병(隋兵) 백만이 고기가 되었구나. 지금도 아직 어초부(漁樵夫)의 이야기로 남아 있으나, 한갓 나그네의 웃음거리도 되지 못하네.” 하였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개천(价川)에 이르기 25리, 서쪽으로 안융(安戎)에 이르기 37리, 남쪽으로 숙천(肅川)에 이르기 25리, 북쪽으로 박천(博川)에 이르기 2리이다.
호수가 2천 6백 90호, 인구가 8천 5백 6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백 50명, 익군(翼軍)이 4백 77명, 선군(船軍)이 1백 94명, 수성군(守城軍)이 61명이다.
입진성(入鎭姓)이 34이니, 오(吳)·최(崔)·김(金)【해주(海州). 】·김(金)【교하(交河). 】·강(康)【정주(靜州). 】·서(徐)【성주(星州). 】·김(金)·지(池)【수주(水州). 】·서(徐)【봉성(峯城). 】·문(文)【장연(長淵). 】·박(朴)【교동(交同). 】·노(魯)【진강(鎭江). 】·장(張)【부령(扶寧). 】·김(金)【수원(水原). 】·송(宋)【용성(龍城). 】·김(金)【안산(安山). 】·김(金)【장사(長沙). 】·이(李)【철야(鐵冶). 】·한(韓)【재령(載寧). 】·김(金)【광양(光陽). 】·김(金)【온수(溫水). 】·강(康)【남원(南原). 】·견(甄)·문(文)【전주(全州). 】·김(金)·방(方)·임(林)·최(崔)【풍주(豊州). 】·오(吳)【해주(海州). 】·송(宋)【송림(松林). 】·민(閔)【동주(凍州). 】·강(康)【등주(登州). 】·이(李)【수안(遂安). 】·강(康)【배주(白州).】이며, 안융현(安戎縣)의 입진성(入鎭城)이 2이니, 최(崔)·김(金)이다.
땅이 많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1만 2천 9백 80결이다.【논이 6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닥나무·왕골·배·밤이요, 토공(土貢)은 옻·지초·표범가죽·여우가죽·삵가죽이며, 약재(藥材)는 과남풀[龍膽]·검산풀뿌리[續斷]이다. 염소(鹽所)가 1이다.【가마[盆]가 11인데, 모두 주(州) 서쪽에 있다. 】
읍석성(邑石城)【둘레가 3천 3백 75보(步)이다. 】백상루(百祥樓)가 성(城) 가운데에 있다.【북쪽으로 청천강(淸川江)에 임한다. 누(樓)에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어제시(御製詩)가 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청천강 위 백상루에 삼라만경(森羅萬景) 벌여 있어 한눈에 보기 어렵고, 풀은 멀리 긴 둑에 한 줄로 푸르렀다. 하늘로 뻗은 멧부리 천으로 줄지었고, 비단병풍 속을 나르는 외로운 따오기, 옥거울 속에 뜬 한 점의 작은 배라. 속세에 선경(仙境)이 있는 것을 믿지 않았더니, 밀성(密城)에서 오늘 영주(瀛州)를 보는구나.” 하였다. 】
관(館)이 1이니, 안흥(安興)이다.【읍성(邑城) 안에 있다. 】봉화가 5곳이니, 성황당(城隍堂)【서쪽으로 청산(靑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박천(博川) 독산(禿山)에 응한다. 】·청산(靑山)【남쪽으로 소산(所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노근강(老斤江)에 응하고, 북쪽으로 정주(定州) 칠악산(漆岳山)에 응한다. 】·소산(所山)【동쪽으로 오두산(烏頭山)에 응한다. 】·오두산(烏頭山)【남쪽으로 숙천(肅川) 통령산(通寧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노근강에 응한다. 】·노근강입소(老斤江立所)【남쪽으로 숙천(肅川) 여을외(餘乙外)에 응하고, 북쪽으로 정주(定州) 미륵당(彌勒堂)에 응한다. 】이다. 관방(關防)은 노근강이다.【안융현(安戎縣)에 있는데, 영변도 수군 첨절제사(寧邊道水軍僉節制使)가 비어한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都護府)가 2이니, 성천(成川)·숙천(肅川)이요, 군(郡)이 4이니, 자산(慈山)·순천(順川)·개천(价川)·덕천(德川)이요, 현(縣)이 4이니, 영유(永柔)·맹산(孟山)·은산(殷山)·양덕(陽德)이다.
【영인본】 5책 686면
【태백산사고본】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성천 도호부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숙천 도호부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자산군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순천군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개천군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덕천군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영유현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맹산현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은산현
○ 지리지 / 평안도 / 안주목 / 양덕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안주목(安州牧)
동으로는 개천군(价川郡) 경계까지 35리, 순천군(順川郡) 경계까지 52리, 남으로는 숙천부(肅川府) 경계까지 48리, 서쪽으로는 노강진(老江鎭)까지 60리, 북으로는 박천군(博川郡) 경계까지 8리, 영변부(寧邊府) 경계까지 9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7백 50리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식성군(息城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중반군(重盤郡)으로 고쳤고, 고래 태조 때는 팽원군(彭原郡)으로 고쳤으며 14년에는 안북부(安北府)를 두었고, 성종 때는 영주안북대도호부(寧州安北大都護府)라 칭하였으며 현종 때는 안북대도호부라 칭하였다. 고종 43년에는 몽고군을 피하여 창린도(昌麟島)로 들어갔다가 다음에 육지로 나왔으며 의종 때에는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두었다가 후에 폐하였으며 공민왕 18년에는 안주만호부(安州萬戶府)를 두었다가 뒤에 목(牧)으로 승격시켰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좇았다. 세조조에 진(鎭)을 두었다.
[산천]가두산(加頭山) 주의 동쪽 3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인데 태자산(太子山)이라고도 한다. 오도산(悟道山) 원통산(元通山)이라고도 하는데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왕산(王山) 주의 동쪽 15리에 있다. 마두산(馬頭山) 주의 남쪽 25리에 있다. 봉덕산(鳳德山) 주의 동쪽 20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9층의 철(鐵)로 된 부도(浮屠)가 있다. 바다 안융진(安戎鎭)에 있는데 부와는 서남쪽으로 60리다.
청천강(淸川江) 살수(薩水)라고도 이름하는데 묘향산(妙香山)에서 나와 주의 북쪽 성(城) 밑을 지나 서쪽으로 30리를 흘러 박천강(博川江)과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 수(隋)의 우문술(宇文述) 등이 고구려 군사를 치려고 살수를 건너 평양성과는 30리 거리에 이르러 산에 영을 쳤다가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거짓 항복에 따라 군사를 돌려 청천강에 이르러 군사가 반쯤 건너자 을지문덕은 급히 그 후미를 공격하여 우둔위(友屯衛) 장군을 죽이니 신세웅(辛世雄)과 수 나라 군사가 거의 궤멸되었다. 평양의 인물조에 자세하다. ○ 김극기의 시에, “길 다하여 잠깐 고삐를 푸니, 연기 찬 개포[浦]에 바람배 올라오네. 가득한 물은 푸른 물결 보내고, 삐쭉한 산은 푸르게 빼어났네. 등나무 가지는 언덕에 나직하고, 버드나무 가지는 물가를 길게 쓰네. 만고에 혼(魂) 녹인 곳, 푸른 물결은 객정(客亭)을 돌아가네.” 하였다. ○ 조준의 시에, “살수(薩水) 출렁거려 푸른 하늘에 잠겼는데, 수병(隋兵) 백만이 고기가 되었구나. 지금도 아직 어초부(漁樵夫)의 이야기 남았으나 나그네의 한갓 웃음거리도 되지 않네.” 하였다. ○ 축맹헌(祝孟獻)의 시에, “수병(隋兵) 다시 일면 어찌 허사이겠는가, 이 땅은 몇 번이고 학철어(涸轍魚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로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 속의 고기)가 되리니. 당시 당 나라 이(李 세적(世勣))와 설(薛 인귀(仁貴))을 못했는가. 깃발을 휘두르며 곧장 부여로 오리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조선[東藩] 수십 주를 두루 돌아서 물가 정자 구름속 높은 누각(樓閣)에 머무는 것 버릇되었네. 오래도록 경치를 대하면 흥 절로 일어나, 곳마다 산을 보며 이르지 않은 곳 없네. 성긴 비 몇 번이나 혹서(酷暑)를 피했는지, 긴 강의 유월이 마치 맑은 가을 같구나. 술잔과 시권(詩卷)은 언제나 있어, 눈에 찬 풍연(風煙)은 걷히지 않네. ○ 가득한 맑은 물은 박천(博川)을 닮았으며, 두 강은 서로 가까우나 연하지 않았더라. 늘어선 산[連山] 끊어진 곳엔 모래 많고, 길은 평평한 들녘을 돌 때는 수전(水田) 사이를 지나네. 나루터 한가한 정자(亭子) 나직한 나무 스치고, 성두(城頭)의 높은 누각(樓閣) 하늘까지 솟았더라. 한때에 말 탄 하인 비같이 따라 오는데, 사람은 훈풍이 불어오는 호화선[畫船]에 있네.” 하였다. ○ 기순(祁順)의 시에, “살수 흐르는 곳 얼마나 깊었는가, 춘풍에 사절(使節) 가지고 우연히 등림(登臨)하니, 양 언덕 끊어져 막힌 곳 티끌 흔적 하나 없고, 한 거울 평평하게 열어 논 듯 도심(道心)을 본 듯하네. 눈 쌓인 한 산은 백벽(白壁)을 안은 듯, 구름 깨고 나온 햇빛 황금 물결에 출렁이네. 성두(城頭)의 피리 북소리 갈 길을 재촉하니, 중류(中流)에 띄워 놓고 시를 읊노라.” 하였다. ○ 진가유(陳嘉猷)의 시에, “비 갠 새벽 노를 울려 두 물을 건너가니, 물결은 잔잔하여 편히 앉은 초정선(草亭船)이네. 온 둑의 꽃이 지니 붉은 비 날리고, 몇 점 백구 날라 푸른 연기 깨는구나. 사람 그림자 물거울 속에서 번번이 움직이고, 노래 소리 멀리 바다 구름 뚫네. 나는 어떻게 영풍(靈風) 만나, 신선의 배를 얻어 곧장 하늘에 오르리.” 하였다.
무골도(無骨島) 주의 동쪽 22리인 청천강(淸川江) 가운데에 있다. 누영지(漏盈池)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개지(介池) 안융(安戎)에 있다.
[토산]사(絲)ㆍ삼, 마노[碼碯石] 안융에서 난다. 닥종이[楮]ㆍ왕골[莞草]ㆍ잣ㆍ수유(酥油)ㆍ숭어ㆍ은어[銀口魚]ㆍ준치[眞魚]ㆍ붕어ㆍ굴[石花]ㆍ게ㆍ새우.
[불우]칠불사(七佛寺) 북성(北城) 밖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수(隋) 나라 병사가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배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곱 중[僧]이 강가에 와서 여섯 중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거늘 수 나라 병사가 보고 물이 얕은 줄 알고 군사를 지휘하여 다투어 건너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가 내에 가득하여 흐르지 않아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일곱 중처럼 일곱 돌을 세워 놓았다.” 한다. 천왕사(天王寺) 성안에 있다. ○ 권근의 시에, “적적한 절은 주(州)의 성문에 있어, 6월 창문 가에 살 만하네. 나루터 행인은 물이 물러간 뒤에 가고, 밭 가운데 김매는 노인은 비 개고 나왔더라. 산은 들 밖을 비껴 있어 평원도 넓을시고, 물은 성모퉁이를 돌아가니 옛 성의 자리로다. 날마다 누에 올라 시 읊는 흥도 많아, 우연히 시가 되면 벽 틈에 적어보네.” 하였다. 장락사(長樂寺) 봉덕산(鳳德山)에 있는데, 9층의 동탑(銅塔)이 있다. 승현사(僧賢寺)ㆍ석천사(石泉寺) 모두 고맹주(古孟州)에 있다. 화엄사(華嚴寺) 갈두산(乫頭山)에 있다. 정수사(淨水寺)ㆍ미타사(彌陀寺) 모두 마두산(馬頭山)에 있다. 영천사(永川寺)ㆍ백학사(白鶴寺)ㆍ경운사(慶雲寺)ㆍ원통사(圓通寺)ㆍ청룡사(靑龍寺)ㆍ문수사(文殊寺)ㆍ보현사(普賢寺)ㆍ개법사(開法寺)ㆍ운주암(雲住菴)ㆍ금동사(金洞寺) 모두 오도산(悟道山)에 있다. 영화사(靈華寺)ㆍ은적사(隱寂寺) 모두 왕산동(王山洞)에 있다.
[고적]고맹주(古孟州) 주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맹산(孟山)이 본주의 속현이었을 때의 치소(治所)였다. 안융진(安戎鎭) 융(戎)을 인(仁)으로도 쓰는데 주의 서쪽 65리 바닷가에 있는데 토성(土城)이 있다. 고려 광종(光宗) 25년에 쌓았는데 둘레가 2천 4백 90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고석성(古石城) 주의 동쪽 6리에 있는데 둘레는 6천 5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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