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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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安道]
2.진정부(眞定府)는 정주(定州)이고,
○定州(名中山。領縣二)曲陽(恒陽)深澤(滋河)-地輿名目(一十九省)
경상도 진정부(眞定府) 진주(晉州)
황해도 진정부(眞定府) 평산(平山)
평안도 진정부(眞定府) 정주(定州)
定州的历史变迁,唐杜佑的《通典》记载的非常详细,《通典·州郡·博陵郡》
说:“定州,帝尧始封唐国之地。战国初为中山国,后为魏所并,后又属赵。
秦为上谷、钜鹿二郡之地。汉高帝置中山郡,景帝改为中山国。
后汉因之,晋亦不改。后燕慕容垂移都于此,北岳常山在焉。
后魏为中山郡,兼置安州,道武帝改为定州。
后周置总管府,领鲜虞郡。隋初郡废,炀帝初置博陵郡,后改为高阳郡。
大唐为定州,或为博陵郡。领县十一:安喜、北平、鼓城、恒阳、新乐、义丰、望都、无极、唐昌、深泽、陉邑。”
古国都市,华北重镇。早在新石器时代,已有先民在此生息繁衍。
商代为北方方国。西周时聚落渐增。
春秋时,齐相管仲筑城。战国时,中山国在此定都。
西汉置卢奴、安险、新处、苦陉四县于今定州市境内。
西汉至前秦,卢奴一直是中山国(郡国)都。
后燕都于此。
北魏皇始二年(397年)置安州,设行台。
天兴三年(400年),改安州为定州,今定州由此而得名。
今定州市境内当时有卢奴、魏昌、安喜三县。北齐废卢奴入安喜。
唐代今定州市境内有安喜、唐昌二县。
宋、金、元三代境内只有安喜县。
明初撤安喜入定州,至清代仍为定州。
自北魏至清,此地曾为行台、府、路、郡、州的治所。
民国初废州改为定县,后曾两度为专署驻地。抗日战争初期,中共定县县委将定县分为定南、定北两县。
后定北县又分为定唐、望定二县。
日本投降后,恢复定北县。
民国36年(1947年)定县解放,建立定县市;定南、定北县合并为定县。翌年定县市并入定县。曾是冀中九专署(后改定县专署)驻地。
1958年定县、曲阳合并为定县,1961年定、曲两县分置。1986年,定县撤县改为定州市。1994年12月保定地区和保定市合并,组建新的地级保定市,定州市属之至今未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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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평안도 / 의주목 ◎ 정주목(定州牧)
사(使) 1인. 의주도 좌익 병마(義州道左翼兵馬)를 겸한다.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인데, 현종(顯宗) 9년 무오에 구주 방어사(龜州防禦使)를 두었다. 고종(高宗) 3년 병자에 글안병(契丹兵)이 침입하매, 주인(州人)들이 막아 싸워서 적을 많이 베었으며, 18년 신묘에 몽병(蒙兵)이 내침(來侵)하매, 병마사(兵馬使) 박서(朴犀)가 힘을 다하여 막았으되, 힘이 부족하였으나 항복하지 아니한 공으로 인하여, 정원 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시켰다가,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다.
마산(馬山)【주(州) 북쪽에 있는데, 주인(州人)들이 진산(鎭山)으로 삼고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가산(嘉山)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수천(隨川)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삭주(朔州)에 이르기 70리이다.
호수가 1천 33호, 인구가 5천 4백 66명이며, 군정(軍丁)은 익군(翼軍)이 4백 단(單) 2명, 수성군(守城軍)이 20명, 선군(船軍)이 1백 31명이다.
입진성(入鎭姓)이 8이니, 유(劉)【배주(白州). 】·정(鄭)【보령(保寧). 】·최(崔)
【춘주(春州). 】·이(李)【회령(會寧). 】·김(金)【신주(信州). 】·강(康)【안산(安山). 】·노(盧)【해주(海州). 】·백(白)【황주(黃州). 】이다.
간전(墾田)이 1만 2백 54결이다.【논이 5분의 1에 약하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씩이며, 어염(魚鹽)과 사냥의 이(利)가 있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닥나무·왕골·배·밤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옻·족제비털·여우가죽·삵가죽·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흰바곳[白附子]이다. 염소(鹽所)가 1이요,【가마[盆]가 12인데, 주(州) 남쪽에 있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며,【주(州) 북쪽 사기리(沙器里)에 있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다.【주(州) 북쪽 추동(楸洞)에 있다. 모두 품질이 하품이다. 】
읍성(邑城)【흙과 돌로 쌓은 것이 서로 반반씩인데, 둘레가 6백 49보(步)이다. 】봉화가 7곳이니, 수로(水路)는 미륵당(彌勒堂)【동쪽으로 안주(安州) 노근강(老斤江)에 응하고, 남쪽으로 본주(本州) 사산(舍山)에 응한다. 】·사산(舍山)【서쪽으로 잉박곶(仍朴串)에 응한다. 】·잉박곶(仍朴串)【서쪽으로 마암(馬岩)에 응한다. 】이요, 육로(陸路)는 마암(馬岩)【서쪽으로 합화(蛤)에 응한다. 】·합화(蛤)【서쪽으로 수천(隨川) 오도곶(吾都串)에 응한다. 】·마산(馬山)【서쪽으로 수천 구령(仇嶺)에 응하고, 동쪽으로 칠악산(七岳山)에 응한다. 】·칠악산(七岳山)【동쪽으로 가산(嘉山) 연지(蓮池)에 응한다. 】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정주목(定州牧)
동쪽은 가산군(嘉山郡) 경계까지 38리, 남쪽은 해안까지 20리, 서쪽은 곽산군(郭山郡) 경계까지 15리, 북쪽은 귀성부(龜城府) 경계까지 42리, 태천현(泰川縣) 경계까지 44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8백 99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려 귀주군(龜州郡)이었는데, 현종조에 방어사(防禦使)로 만들었다가 고종 18년에 몽고병이 내침하자 병마사 박서(朴犀)가 힘을 다해 막았다. 힘이 모자랐으나 오히려 항복하지 않아 그 공으로 정원대도호부(定遠大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뒤에 도호부로 되었고,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친 후 치소를 마산(馬山)의 남쪽으로 옮겼다. 본조 세조 원년에 귀성군을 고귀주(古龜州)의 땅에 나누어 위치시켰으며, 12년에 주의 치소를 수천(隨川)으로 옮겨 수천군(隨川郡)을 없앴다.
[산천]마산(馬山) 고정주(古定州)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당오령(唐於嶺) 주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곽산군 경계이다. ○ 예겸의 시에, “당오령(堂於嶺)에 굳이 올라오니, 작은 돌은 모나고 큰 바위는 사납네. 말 달려 곧장 마루에 올라 보니 앞길에 아직도 만 겹의 산이 있네.” ○ “바다 따라 아득히 길이 머니, 잠깐 평야를 가다가 또 언덕을 올라가네. 산 밖에 산이 이어 아직도 천 겹이요, 서늘한 산 찬 풀밭에 석양지기 몇 번인가.” 하였다. 원통산(元通山) 주의 동쪽 35리에 있다. 천동현(泉洞峴) 주의 북쪽 42리에 있는데 또 귀성부(龜城府)에도 보인다. 광림산(廣林山) 주의 동쪽 15리에 있는데 예전엔 가산군(嘉山郡)에 예속되었다. 심원산(深原山) 주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봉새가 이곳에서 울었다.” 하여, 봉명산이라고도 한다. 칠악산(七岳山) 주의 동쪽 70리에 있는데 위에 용지(龍池)가 있으며 가물면 비를 빈다. 바다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달천(㺚川) 주의 동쪽 5리에 있는데 귀성부 검산(檢山)에서 흘러나와 남쪽으로는 방호현(防胡峴)까지 흘러 내리고, 서쪽으로는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 원(元) 나라 순제(順帝)가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세우고 군사 1만 명으로 호송하도록 하였다. 공민왕이 우리 태조에게 정예 기병 1천 명을 데리고 따르도록 하였다. 이때 적은 이미 수주(隨州)의 달천에 둔을 쳐서 여러 장군들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내일의 싸움은 그대 홀로 당하십시오.” 하였다. 다음날 적은 세 대(隊)로 나누었으므로 태조와 그 아래 노장 두 사람이 각각 그 한 대씩을 맡아 분격(奮擊)하였다. 태조의 말이 진흙에 빠져 매우 위급하게 되었는데, 말이 몸을 삐쳐 뛰어 나가니, 모두 놀랐다. 태조가 적장 몇 명을 쏘고 두 노장과 서로 합하여 쳐 대파시켰다. 예겸의 시에, “신안(新安) 후관(侯館)에서 날이 밝아 출발하여, 말을 달리고 채찍을 드날리며 옥가(玉珂)를 떨쳤네. 또 달천 다리 위를 건너가니, 백 척이나 되는 맑은 무지개 창파에 누웠네.” 하였다. 위도(葦島) 주의 동쪽 50리에 있다. ○ 고려 고종 때 김방경(金方慶)이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는데 몽고병이 여러 성을 공격해 오니, 위도에 들어가 은신하였는데 그곳이 10여 리나 되었다. 평평하고 넓어 경작할 만하였으나 바다의 조수가 밀려 경작할 수 없어 걱정이었다. 이에 김방경은 둑을 쌓고 파종하여 백성들이 처음은 고생하였으나 가을철 곡식이 익자 사람들이 그걸로 살아갈 수 있었다. 섬에 또 우물과 샘이 없어 항상 육지에 가서 물을 긷는데 가끔 잡혀 포로가 되자, 김방경은 빗물을 모아 못을 만들어 물 걱정도 없어졌다. 고종 14년에 섬에 누렁 뱀이 있었는데 크기가 기둥만 하였다. 가산(椵山)에 초동(樵童)이 있어 지나면 부르는 소리가 나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없어 가 보면 뱀이었다. 그런데 사람처럼 말하기를, “이 섬 사람들이 머지않아 난을 일으킬 것이니, 돌아가 감창(監倉)에게 알려 절대로 근신하게 하라.” 하였다. 감창사는 이상하였지만 비밀로 하였는데 주(州)의 사람들이 몽고에 투항하였다. 고도(孤島) 주의 남쪽 20리에 있다. 달도(㺚島) 주의 서남쪽 15리에 있다. 가마천(加磨川) 주의 동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태천현(泰川縣) 대사리(大思里)에서 나와서 사읍동음(沙邑冬音)에 이르러서 바다로 들어간다. 도치곶(都致串) 주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목장(牧場)이 있다. 이언지(伊彦池) 옛 수천(隨川) 동쪽에 있다.
[토산]사(絲)ㆍ삼[麻]ㆍ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맛조개[竹蛤]ㆍ부레[魚鰾]ㆍ새우[蝦]ㆍ굴[石花]ㆍ토화(土花)ㆍ조기[石首魚]ㆍ낙지[絡締]ㆍ은어[銀口魚]ㆍ민어(民魚)ㆍ준치[眞魚]ㆍ넙치[廣魚]ㆍ오징어[烏賊魚]ㆍ조개[蛤]ㆍ윤화(輪花)ㆍ제호유(鵜鶘油)ㆍ지치[紫草].
[불우]안양사(安養寺)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절 서쪽 바위 아래 샘이 있는데 가물 때 비를 빌면 곧 영험이 있다. 심원사(深原寺) 심원산(深原山)에 있다. 지장사(地藏寺) 덕달산(德達山)에 있다. 석련사(石連寺) 탄고개산(炭古介山)에 있다. 자성사(慈聖寺)ㆍ송흥사(松興寺) 모두 오봉산에 있다. 원통사(元通寺) 원통산(元通山)에 있다. 진강사(鎭江寺) 칠악산(七岳山)에 있다. 옥계사(玉鷄寺) 대야산(大夜山)에 있다.
[고적]수천 폐군(隨川廢郡) 주의 남쪽 15리에 있다. 본래 고려 수주(隨州)이다. 고종(高宗) 18년에 몽고 군사가 창주(昌州)를 함락시키매, 본주 사람들이 자연도(紫燕島)로 들어갔다가 원종(元宗) 2년에 육지로 나와 곽주(郭州) 바닷가에서 사니, 고을 사람들이 제 토지를 잃었으므로 곽주 동쪽 16촌(村)과 소속된 안의진(安義鎭)을 떼어서 지수주사(知隨州事)라고 일컫고 인하여 곽주를 합쳤다. 공민왕 20년에 다시 곽주를 따로 두었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수천군(隨川郡)으로 고쳤다. 세조(世祖) 12년에 이를 없애고 정주의 치소(治所)를 그 군(郡) 신안역(新安驛)으로 옮겼다. 옛 정주성(定州城) 지금 치소의 동쪽 30리에 있다. 돌과 흙이 반반씩 섞였는데 둘레가 3천 8백 97척이요, 높이가 15척이며, 안에 우물 8개와 못 1개가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다. 성동 고성(城洞古城) 주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흙과 돌이 반반이며, 외성(外城)의 둘레는 3만 1천 7백 9척, 내성(內城)의 둘레는 9천 1백 18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육지 고성(育地古城) 주의 남쪽 27리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7천 1백 16척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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