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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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道]
2.형남부(荊南府)는 강릉(江陵)이고,
湖北省(領十府。一直隸州。七知州。六十縣)。
○荊州府(名荊南。釐七縣)江陵(郢都。附府)公安(南平)石首(建寧)監利(豐都)松滋(高城)枝江(旌陽)宜都(夷都)-地輿名目(一十九省)
荊南府(湖北江陵府)
荊南(924年-963年,又稱南平、北楚)是五代時十國之一。高季興所建。統治範圍包括今湖北的江陵、公安一帶。
後梁開平元年(907年)高季興任荊南節度使。當時荊南所轄的10州為鄰道侵奪,只有江陵一城。高季興到任後,招集流亡,民漸復業,又收用一些文武官作輔佐,暗中準備割據。
後唐同光二年(924年)封為南平王,建都荊州(今湖北江陵),史稱南平。又以方鎮名為荊南,後世以此稱之。高季興死後,其子高從誨繼位,重新向後唐稱臣,因此後唐始追封高季興為楚王,諡武信(楚武信王),故南平又被稱為北楚。或後唐滅前蜀以後,高季興得到了歸、峽二州。他本欲奪取夔、忠、萬等州,終不敵後唐而作罷。荊南雖地狹兵弱,但卻是南北的交通要衝。其時南漢、閩、楚皆向後梁稱臣,而每年貢奉均假道於荊南;因此高季興便邀留使者,劫其財物。至南漢、閩、楚各稱帝後,高氏對南北稱帝諸國,一概上表稱臣,以獲取賞賜和維持商貿往來,由是被諸國視為「高賴子」。929年,高季興死,後唐明宗追封他為楚王,故南平又稱北楚。據有今湖北江陵、公安一帶,建都荊州(今湖北江陵)。其子高從誨繼立,後經高保融、高保勗,直到第五主高繼沖,於宋太祖建隆四年(963年)納地歸降。
由高季興公元907年擔任節度使至荊南963年亡國,前後歷五十七年。
江陵府,
唐上元元年(760年)升荆州置,治江陵县(今属湖北)。辖境约当今湖北省枝江市以东,潜江市以西,荆门、当阳二市以南地区。五代为南平国都,宋为荆湖北路治所。南宋建炎四年(1130年)改为荆南府,淳熙中复改江陵府。元至元十三年(1276年)改为荆南府路,大德中改为江陵路,天历二年(1329年)改为中兴路。
历史沿革
因“此地临江”、“近州无高山、所有皆陵埠”而得名。
公元前278年秦将白起拔郢置江陵。1994年底江陵县,经国务院批准撤销原沙市市、荆州地区、江陵县,设立荆沙市和荆州、沙市、江陵三区,1998年7月,又经国务院批准,撤销江陵区恢复江陵县。
公元前9世纪初叶,周夷王年间,楚国君熊渠封长子熊无康为句亶王,句亶国地理位置即后来的郢都一带。
公元前689年,楚文王即位,将国都自丹阳徙郢(今荆州城北五千米外纪南城),至公元前278年白起拔郢,楚国连续二十代王在此建都400余年。
公元前278年,秦将白起拔郢,分郢置南郡、江陵县。
秦末楚汉相争,项羽立其部将共敖为临江王,都于江陵。敖死,其子尉嗣。汉高祖五年(公元前202年),刘邦使将军刘贾及太尉卢绾击杀共尉,临江国除,复于江陵置南郡,分江陵县,置郢县。
汉景帝时,先后封其子阏及荣于江陵为临江王,阏、荣死,国除,复为南郡。王莽改制时,更南郡名南顺,江陵县名江陆县,郢县为郢亭,但不久即恢复江陵本称。东汉建初三年(公元78年),章帝徙其弟钜鹿王恭为江陵王。元和二年(85年),江陵乃复为南郡。
三国时江陵为吴荆州治所。晋平吴,复于此置南郡、江陵县,辖属荆州刺史。
东晋元帝南渡(318年),曾在江陵境内设云中、九原、定襄、宕渠、广牧、新丰6个侨县,并设新兴郡统辖,这些侨郡、侨县的位置大致在当时江陵县东部即现在江陵县、沙市区岑河镇及潜江市西部龙湾、张金一带地区。东晋时荆州刺史治所,初犹迁徙不定,太元十四年(389年),刺史王忱治江陵,从此不复迁徒,江陵城由此又称荆州城。
南北朝时期,齐中兴元年(501年)3月,齐和帝萧宝融在江陵建都,自立为帝,史称西齐。552年11月梁元帝萧绎即帝位于江陵,554年11月西魏发兵入江陵,元帝降而被杀,梁都江陵3年而国除。后梁宣帝大定元年/西魏恭帝二年(555年)正月,萧繹在江陵称帝,改元大定,史称后梁,西魏设江陵总管府监督。同年在江陵境内今白鹭湖一带置华陵县;后又在华陵县南置鄀州,同时置云泽县属之。后周时改华陵县为紫陵县。隋开皇二年(582年),因与后梁联姻,罢总管府;开皇七年(588年),并后梁,又置江陵总管, 江陵县废新兴郡;十一年(592年),省安兴县入广牧县。仁寿初复称安兴县。
隋炀帝大业元年(605年)将后梁所置鄀州及云泽县并入紫陵,又省定襄并入安兴。大业十四年(618年),萧繹后裔铣称梁帝,徙都江陵,是为隋后梁。唐武德四年(621年),萧铣降唐。
唐、五代、宋属江陵府。唐初,废紫陵县入江陵。贞观十七年(643年),省安兴县入江陵。至此,东晋以来侨置郡县及南北朝时析江陵增置州县均归入江陵。上元元年(760年)升荆州为江陵府,建为南都。同年析江陵置长宁县。次年,省枝江并入长宁。大历六年(771年)省长宁复置枝江县。
五代十国时,江陵为荆南国都(或称南平国)。
宋太祖乾德三年(965年),析江陵白洑巡置潜江县。
元属中兴路。
明、清属荆州府,明朝时,江陵在龙湾市、沙头市、郝穴、虎渡口设巡检司。
洪武十一年(1378年)建湘王府,建文元年(1399年)除;永乐元年(1403年)辽王府自辽东广宁(今辽宁北镇县)迁于此,隆庆三年(1569年)除;万历二十九年(1601)年建惠王府,崇祯十五年(1642年),李自成据江陵,惠王常润出逃,王府遂废。 清朝江陵分为五汛,即捕汛(现荆州区长江以北范围)、龙汛(潜江市龙湾、徐李、张金一带)、虎汛(原江陵县长江以南虎渡河一带)、鹤汛(现江陵县马家寨、熊河以东的地区)、沙汛(即现沙市区及江陵县西部)。并于丫果驿设置县丞署,郝穴设主簿署,沙市、龙湾、虎渡口设巡检司。康熙二十二年(1683年)于江陵置湖北驻防将军府,是为全国十三大将军府之一。
民国元年(1912年),裁荆州府,江陵属省直辖。
1913年,湖北分道,江陵属荆宜施鹤道。
1914年,改为荆南道,江陵属之。
1915年,属荆宜道。
1927年,又属省辖。
1932年,属省第七行政督察区。
1936年,改属省第四行政督察区。
民国31年(1942年),日本侵略军曾扶持建立伪江陵县政府,驻沙市。
至民国34年(1945年)随日军投降而瓦解。第二次国内革命战争时期、抗日战争时期、第三次国内革命战争时期,县内均有中国共产党领导的县、区、乡政权。当时,区行政督察专员公署与江陵县政府同驻荆州城。
中华人民共和国成立后,属荆州地区(荆州行政专员公署)。1949年7月15日,沙市划出建市。1953年将县属埠河区划隶新成立的荆江县(1955年并入公安县)。
荊州府江陵,簡曰荊,故楚之都也。地處鄂省之南,逆流而上,可達宜昌、重慶,順流而下,可達武漢。
荊州 (古代)
荊州是中國古地名,是中國古籍所記載的九州之一,而作為實際的行政區劃,開始於漢武帝時期。
兩漢時期西漢武帝元封五年(公元前106年),將全國除中央之外的地域分為十三個州刺史部,其中荊州的轄域相當廣,大體來說以北為現今河南省南陽市一帶往南延伸至兩湖(湖北、湖南)全境內。但此時的州刺史部只是監察區,並無治所,並非真正意義上的行政區。
東漢後期,州成為正式的一級行政區域,依據後漢書記載,荊州轄有南陽(河南西南)、南郡(湖北西部)、江夏(湖北東部)、長沙(湖南東北)、桂陽(湖南東南)、武陵(湖南西北)、零陵(湖南西南)七郡。州治所一直到東漢末年劉表領荊州牧以前都在漢壽縣(武陵郡轄,今常德市漢壽縣),後因荊南地區黃巾賊餘孽尚未退去才將治所移到當時已經有相當繁榮的南郡襄陽城(今襄樊市)。
三國魏晉時期208年赤壁之戰後,原先短暫領有荊州的曹操只保住了荊州北部南陽郡與南郡的一部分,而中南部被劉備和孫權勢力瓜分。曹操之後從南郡、南陽郡中分出襄陽郡、南鄉郡,荊州成為三分割據的局面:南郡、零陵、武陵歸劉備,江夏、桂陽、長沙歸孫權,南陽、襄陽、南鄉歸曹操。一般認為這階段三家各佔三郡的局面是「荊襄九郡」一詞的來源。
但到了219年,荊州牧劉備的守將關羽被東吳、曹魏聯軍擊敗,在隨後的夷陵之戰中劉備又敗於孫權勢力後,蜀漢再無力奪回原有荊州轄權,荊州成為由曹魏與孫吳兩家分領的局面。
三國的曹魏荊州,荊州的治所在南陽郡新野,下轄南陽郡、江夏郡(長江以北)、襄陽郡、南鄉郡、新城郡、上庸郡、魏興郡等共七郡。三國的孫吳荊州,荊州的治所在南郡的江陵,下轄南郡、江夏郡(長江以南)、長沙郡、湘東郡、桂陽郡、臨賀郡、零陵郡、衡陽郡、武陵郡、建平郡、宜都郡等共十一郡。
西晉時期,荊州治所在襄陽(今湖北襄樊),下轄二十三個郡國,北魏太和二十一年(497年)於穰(今河南鄧州市)置荊州,轄8郡。
南北朝時期,州的數量增多,地域縮小,南朝宋設有荊州,治所在襄陽(今湖北襄樊),南朝齊改治所為南郡,另設雍州,治所在襄陽<寧蠻府>(湖北襄樊)。而北朝的北魏設荊州和東荊州,治所分別在山北(河南魯山)和泚陽<東陵鎮>(河南泚陽)。
隋朝到了隋文帝開皇三年(583年),楊堅廢除郡一級行政區劃,改為州縣兩級體制,而隋煬帝時,又改州為郡,恢復秦朝的郡縣兩級體制,荊州的名稱只存在地域為現今荊州市附近。一度稱為南郡、江陵郡,後來為江陵府、荊州府。
荊州城,又名江陵城,是全國24座歷史文化名城之一,古城牆又是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城內東西直徑3.75公里,南北直徑1.2公里,面積4.5平方公里,城牆周長10.5公里,高8.83米,共六座城門,每座城門上均建有城樓。歷史上「劉備借荊州」、「東吳賠了夫人又折兵」、「關羽大意失荊州」等故事都發生在這裡。
荊州古城牆四周,原有城門6座,即東門、小東門(亦稱公安門)、北門、小北門、西門、南門。每座城門均設「雙保險」,前後兩道門, 二門之間建有甕城,以便「甕中捉鱉」,致攻城之敵於死地。之後新開城門3座,即新東門、新南門、新北門。新開的城門均無甕城。 6座古城門上原都建有城樓,現只有東門和大北門兩處有城樓。因此,遊覽領略古城牆風采,最好的去處就是東門和大北門。東門又稱「寅賓門」, 城樓為「賓陽樓」。東門是迎接來使和賓客的城門,因此,門樓壯觀,甕城也最大。 從新東門進城,很快便到東門。今次安排遊覽東門,有當地導遊講解,聽了一會便四處拍照。可登上賓陽樓2樓,從高處欣賞古城牆、甕城、城外護城河和城內風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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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 강릉 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사(使) 1인, 판관(判官) 1인, 유학 교수관(儒學敎授官) 1인.
본래 예(濊)의 고국(古國)인데,【철국(鐵國)이라고도 하고, 예국(橤國)이라고도 한다. 】한나라 무제(武帝)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어 우거(右渠)를 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임둔(臨芚)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일명 하슬라(河瑟羅). 】일컬었고,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소경(小京)을 두었다. 태종왕(太宗王) 5년 무오에 하슬라의 땅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경(京)을 파하여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서 지키게 하였는데,【당(唐)나라 고종(高宗) 현경(顯慶) 3년. 】경덕왕(景德王) 15년 정유에 하서주(河西州)를 명주(溟州)라 고쳤다. 혜공왕(惠恭王) 12년에 옛 이름으로 회복하고, 고려 태조(太祖) 19년 병신에【진(晉)나라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 】이름을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다. 성종(成宗) 2년 계미에【송나라 태종(太宗) 태평흥국(太平興國) 8년. 】하서부(河西府)로 고쳤고, 5년 병술에는【송나라 태종 옹희(雍熙) 3년. 】명주 도독부(溟州都督府)로 하였다. 11년 계사【송나라 태종 순화(淳化) 4년. 】명주목(溟州牧)으로 고쳤고, 14년 병신에 명주 단련사(溟州團練使)로 고쳤다가, 원종(元宗) 원년 경신에 공신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 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남송(南宋) 이종(理宗) 경정(景定) 원년. 】충렬왕(忠烈王) 34년 무신에【원나라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강릉부(江陵府)로 고쳤다. 공양왕(恭讓王) 원년 기사에【명나라 태조 홍무(洪武) 22년.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는데, 별호는 임영(臨瀛)이라 한다. 속현(屬縣)이 2이니, 연곡현(連谷縣)은 본래 고구려의 복산현(攴山縣)인데, 신라 경덕왕 때에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으로 하였고,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그대로 임내(任內)로 만들었다.【현(縣) 사람들이 전하기를, “옛 양곡현(陽谷縣)이라” 한다. 】우계현(羽溪縣)은 본래 고구려의 우곡현(羽谷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삼척군(三陟郡)의 영현으로 하였고, 고려 현종 9년 무오에 명주 임내로 이속(移屬)하였는데,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며, 별호를 옥당(玉堂)이라 한다.
명산(名山)은 오대(五臺)이다.【부(府) 서쪽에 있다. 봉우리 5가 고리처럼 벌려 섰는데,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산이라 한다. 서대(西臺) 아래 수정암(水精庵) 옆에서 우리샘[檻泉]이 솟아나는데, 〈물의〉 빛과 맛이 여느 물과 다르고, 그 무게도 또한 그러하므로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곧 금강연(金剛淵)은 한강물[漢水]의 근원이 된다. 봄·가을에 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한다. 한강물이 비록 여러 곳의 물을 받아 흐르나, 우통수가 중심이 되어 빛과 맛이 변하지 아니해서 중국의 양자강(揚子江)과 같으므로, 한(漢)이란 이름이 이로 인하여 되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삼척에 이르기 70리, 서쪽으로 횡성(橫城)에 이르기 1백 55리, 북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46리이다.
호수가 1천 25호요, 인구가 3천 5백 13명이다. 연곡(連谷)의 호수가 1백 단(單) 4호요, 인구가 2백 51명이며, 우계(羽溪)의 호수가 2백 25호요, 인구가 7백 75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백 65명이요, 선군이 2백 50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김(金)·최(崔)·박(朴)·곽(郭)·함(咸)·왕(王)이요, 사성(賜姓)이 1이니, 옥(玉)이다. 속성(續姓)이 3이니, 전(全)【정선(旌善)에서 왔다. 】·이(李)【평창에서 왔다. 】·원(元)【원주에서 왔다. 】이다.【모두 향리(鄕吏)이다. 】연곡의 성이 5이니, 명(明)·이(李)·진(陳)·신(申)·장(蔣)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전(全)이다.【정선에서 왔는데, 향리이다. 】우계의 성이 4이니, 이(李)·변(邊)·심(沈)·노(盧)요, 속성이 1이니, 유(劉)이다.
땅이 많이 메마르며, 간전(墾田)이 5천 7백 66결이요,【논이 6분의 2에 약하다. 】토의(土宜)는 오곡·뽕나무·삼·왕골·모시·감·밤·모과·닥나무·칠(漆)이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시우쇠·잣·호도·북나무충영·미역·지초·백단향·석이·사슴포·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담비가죽·문어·숭어·대구·상어·전복·홍합이다. 약재는 인삼·오미자·승검초뿌리[當歸]·망초뿌리[蓁]·모란뿌리껍질[牧丹皮]·복신(茯神)·대왕풀[白芨]·산무애뱀[白花蛇]·다린송진[白膠香]·북나무진[安息香]·궁궁이[芎藭]·석고(石膏)·일엽초[石韋]·곰의 쓸개[熊膽]이다. 토산(土産)은 가는 대와 왕대다. 염분(鹽盆)이 23이니, 연곡의 염분(鹽盆)이 5이요, 우계의 염분이 20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府) 서쪽 보현촌(普賢村)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府) 서남쪽 궤장촌(机杖村)에 있고, 하나는 우계현 남쪽 마류사동(瑪瑠寺洞)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
읍 토성(邑土城)【둘레 7백 84보이다. 】파암산 석성(把巖山石城)이 부 서쪽에 있다.【둘레 7백 68보이며, 안에 작은 도랑 5가 있는데, 그 3은 가물면 마르며, 그 2는 마르지 않는다. 】우계읍 토성(羽溪邑土城)【둘레 1백 97보이다. 】경포(鏡浦)가 부(府) 동북쪽 10리에 있으며, 옆에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 정자가 있다. 한송정(寒松亭)은 예전에 부(府) 동쪽 12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역(驛)이 13이니, 대창(大昌)·안인(安仁)·구산(丘山)·목계(木界)·고단(高端)·횡계(橫溪)·진부(珍富)·대화(大和)·방림(芳林)·운교(雲交)·동덕(冬德)【연곡에 있다. 】·악풍(樂豐)·임계(臨溪)이다.【모두 우계에 있다. 】요해(要害)는 대령(大嶺)이니, 부(府) 서쪽 35리에 있다. 봉화가 5곳이니, 어을달(於乙達)이 임내 우계현 남쪽에 있고,【남쪽으로 삼척 지광진(地廣津)에, 북쪽으로 오근에 응한다. 】오근(吾斤)【북쪽으로 부(府)의 땅 해령(海令)에 응한다. 】소이동(所伊洞)이 부(府) 동북쪽에 있으며,【남쪽으로 해령에, 북쪽으로 사화에 응한다. 】사화(沙火)【북쪽으로 연곡 주을문에 응한다. 】주을문(注乙文)이다.【북쪽으로 양양 임내 동산(洞山)의 양야(陽也)에 응한다. 】
관할[所領]은 도호부가 1이니, 양양이요, 군이 2이니, 정선(旌善)과 평창(平昌)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동쪽으로 바닷가까지 10리, 서쪽은 평창(平昌)군 경계까지 1백 59리, 횡성(橫城)현 경계까지 1백 90리, 서남쪽으로 정선(旌善)군 경계까지 90리, 남쪽으로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94리,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60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6백 리이다.
[건치연혁]본래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蕊國)이라고도 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이 지역을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다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하였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작은 서울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무열왕(武烈王) 5년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고쳐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서 진무하고 지키도록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洲)라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고,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다. 5년에는 명주도독부라 고쳤으며, 11년에 목(牧)으로 고쳤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라 하였다가, 그 후에 또 방어사(防禦使)라 개칭하였다. 원종(元宗) 원년에는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 3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부로 만들었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풍속]욕심이 적다 《후한서(後漢書)》에, “그 지역 사람은 성품이 어리석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어서,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후한서》에 있다. 질병을 싫어한다 《후한서》에, “질병을 아주 싫어하여, 사람이 죽으며 살던 집을 홀연히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하였다. 삼[麻]을 심고 누에를 치며 면포를 만든다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핀다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펴서 그해의 풍ㆍ흉을 미리 안다.” 하였다. 벌할 때에는 우마를 받는다 《후한서》에, “촌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서로 벌하며 우마(牛馬)를 받는데 책화(責禍)라 부르며, 살인한 자는 죽음으로써 보상하게 한다. 도둑이 적고 보병으로 하는 싸움을 잘한다.” 하였다. 학문을 숭상한다 다박 머리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른다.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히 들리며, 게으름 부리는 자는 여럿이 함께 나무라고 꾸짖는다. 놀이를 좋아한다 그 지역 풍속에 명절을 만나면 서로 맞이하여 함께 마시며,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끊임없다. 그러나 농사에 힘쓰지 않아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다.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구름 속에 개간한다 이제현(李齊賢)이 박안집(朴安集)에게 준 시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푸른 구름 속에 개간한다.” 하였다. 예의(禮義)를 서로 먼저한다 황희(黃喜)의 시에, “예의로 오래된 지역인데, 어찌 괴이쩍게 신선을 말하리.” 하였다.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고을 풍속이 늙은이를 공경하여, 매양 좋은 절후를 만나면 나이 70 이상 된 자를 청하여 경치 좋은 곳에 모셔놓고 위로한다. 판부사 조치(趙菑)가 의롭게 여겨서 관가의 재용에서 남은 쌀과 포목(布木)을 내어 밑천을 만들고, 자제들 중에서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자를 가려서 그 재물의 출납을 맡아 회비(會費)로 하도록 하고, ‘경춘경로회’라 명명하였다.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록 노부의 천한 사람이라도 나이 70 된 자는 모두 모임에 오도록 하고 있다.
[형승]산맥은 북쪽에서 왔고, 바다가 동쪽 끝이 된다 이곡(李穀)의 시에, “산맥이 북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지 않았고, 바다가 동쪽 끝이어서 아득하게 가이 없어라.” 하였다. 산수가 천하에 첫째이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창해가 넓고 크며, 골짝이 천 겹이다 안축(安軸)의 기문에, “먼 데 있는 물을 창해가 넓고 크며, 먼 데 있는 산은 골짝이 천 겹이다.” 하였다. 일도(一道)에서 큰 부(府)이니,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서거정(徐居正)의 〈운금루(雲錦樓)〉 기문에 있다.
[산천]오대산(五臺山)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동쪽이 만월(滿月), 남쪽이 기린(麒麟),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복판이 지로(智爐)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 우리 세조대왕께서 12년에 관동(關東)에 행차하다가 이 동구에 보연(寶輦)을 머물고, 과거를 베풀어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 진화(陳澕)의 시에, “당년에는 그림 속 오대산을 보았는데, 구름 속에 높고 낮은 푸른 산이 있더니, 지금 만 골짝 물이 다투어 흐르는 곳에 와서 보니, 구름 속에서도 길은 어지럽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노라.” 하였다.
대관령(大關嶺)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
○ 김극기(金克己)가 권적(權迪)의 시를 차운(次韻)한 시에, “대관산(大關山)이 푸른 바다 동쪽에 높은데, 만 골짜기 물이 흘러나와 물이 천 봉우리를 둘렀네. 험한 길 한 가닥이 높은 나무에 걸렸는데, 긴 뱀처럼 구불구불 모두 몇 겹인지. 가을 서리는 기러기 가기 전에 내리고, 새벽 해는 닭이 처음 우는 곳에 돋는도다. 높은 절벽에 붉은 노을은 낮부터 밤까지 잇닿고, 깊숙한 벼랑엔 검은 안개가 음천(陰天)에서 갠 날까지 잇닿았네. 손을 들면 북두칠성 자루를 부여잡을 듯, 발을 드리우면 은하수(銀河水)에 씻을 듯하다. 어떤 사람이 촉도난(蜀道難)을 지을 줄 아는고, 이태백(李太白)이 죽은 뒤에는 권부자(權夫子)로세.” 하였다.
보현산(普賢山) 부 서쪽 35리에 있다.
원읍현(員泣峴) 부 서쪽 41리에 있으며 대관령 중턱이다. 세간에 전해지기로는, “어떤 원이 강릉 부사로 있다가 갈려서 돌아가는데, 여기에 와서는 되돌아보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으므로 인하여 원읍현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 강회백(姜淮伯)의 시에, “길이 구산역(丘山驛)으로 접어들자 양의 창자처럼 꾸불꾸불하여 말이 가지 않는다. 앞에 선 말 몰이꾼은 나무끝으로 가고, 잔도(棧道)는 구름 끝에 걸리었네. 북쪽을 바라보니 산이 창 같고, 동쪽을 임하니 바다가 하늘에 닿았네. 부여잡고 가는 길 다한 곳에 우주가 다시금 아득하여라.” 하였다.
모로현(毛老峴) 부 서쪽 1백 25리에 있다. 독현(禿峴) 부 서쪽 1백 89리에 있다. 화비현(火飛峴) 부 남쪽 35리에 있다. 영의 흙이 검어서, 불에 탄 것 같은 까닭에 화비(火飛)라 이름한 것이다. 삽현(鈒峴) 부 서남쪽 60리에 있으며, 정선(旌善)으로 가는 길이다. 월정산(月正山) 부 동쪽 6리에 있다. 화부산(花浮山) 부 북쪽 3리에 있다. 소은백이산(所隱柏伊山) 부 서쪽 65리에 있다. 전해오는 얘기에, “신선이 사는 곳이다. 옛적에 사냥꾼이 짐승을 쫓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서 골 안을 바라보니, 늙은 나무와 띳집과 길들이 죽 늘어섰고, 시냇가에는 베를 마전하고 옷을 빨아 널어서, 의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산에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구름과 아지랑이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어지러워 그곳을 몰랐다.” 한다.
소우음산(所亏音山) 부 서쪽 80리에 있다. 산속에 샘이 있고 날씨가 가물어서 비를 빌면 영험이 있다. 해령산(海靈山) 부 동쪽 27리에 있다. 담정산(淡定山) 부 남쪽 32리에 있다. 사화산(沙火山) 부 북쪽 30리에 있다. 주문산(注文山) 연곡현(連谷縣) 북쪽 12리에 있으며, 부와는 42리 거리다. 바다 부 동쪽 10리에 있다. 견조도(堅造島) 부 동쪽 10리에 있으며, 남천(南川) 물이 바다에 들어가는 어구이다. 성남천(城南川) 부성(府城) 남쪽 1백 보에 있으며, 물 근원이 대관령에서 나온다. 여러 골짜기 물과 합류하여 송악연(松嶽淵)ㆍ광제연(廣濟淵)이 되고,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금강연(金剛淵)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곁에 있으며, 부에서 서쪽으로 1백 10리이다. 4면이 모두 반석이고 폭포는 높이가 열 자이다. 물이 휘돌아 모여서 못이 되었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여항어(餘項魚)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지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이 못에 와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맥질한다. 힘을 내어 낭떠러지에 뛰어오르는데, 혹 오르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반쯤 오르다가 도로 떨어지기도 한다.
○ 정추(鄭樞)의 시에, “금강연 물이 푸르게 일렁거려, 갓 위에 묵은 먼지를 씻어낸다. 월정사에 가 옛 탑을 보려 하는데, 석양에 꽃과 대[竹]가 사람을 매우 근심스럽게 한다.” 하였다.
우통수(于筒水) 부 서쪽 1백 50리에 있다. 오대산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漢水 한강)의 근원이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서대의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 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 중국에 양자강(楊子江)이 있는 것과 같으니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
방림천(芳林川) 부 서쪽 1백 58리에 있다. 연곡포(連谷浦) 연곡현 동쪽 5리에 있으며, 북에서는 35리다. 오진(梧津) 우계현 남쪽 30리에 있다. 주문진(注文津) 연곡현 북쪽 10리에 있으며 부에서 40리다. ○ 이상 세 곳 포구에는 모두 척후가 있다. 안인포(安仁浦) 부 동남쪽 25리에 있다. 예전에는 만호영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토산]모시[苧]ㆍ궁간상(弓幹桑) 우계현에서 산출한다. 죽전(竹箭) 부 북쪽 증산(甑山) 및, 부 동북쪽 강문도(江門島)에서 산출한다. 잣[海松子]ㆍ오미자(五味子)ㆍ자단향(紫檀香)ㆍ회양목[黃楊]ㆍ지치[紫草]ㆍ송이[松蕈]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꿀[蜂蜜]ㆍ산무애뱀[白花蛇]ㆍ해달(海獺)ㆍ소금[鹽]ㆍ미역[藿]ㆍ참가사리[細毛]ㆍ김[海衣]ㆍ해삼(海蔘)ㆍ전복[鰒]ㆍ홍합(紅蛤)ㆍ문어(文魚)ㆍ삼치[麻魚]ㆍ방어(魴魚)ㆍ넙치[廣魚]ㆍ적어(赤魚)ㆍ고등어[古刀魚]ㆍ대구[大口魚]ㆍ황어(黃魚)ㆍ연어(鰱魚)ㆍ송어(松魚)ㆍ은어[銀口魚]ㆍ누치[訥魚]ㆍ여항어(餘項魚)ㆍ순채[蓴]ㆍ회세합(回細蛤).
[불우]상원사(上院寺) 오대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건문(建文) 3년 봄 정월 신미일에 계운신무태상왕 전하(啓運神武太上王殿下)께서 내신 판내시부사(內臣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을 시켜 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신 권근(權近)을 불러 전지하시기를, ‘내가 일찍이 강릉부 오대산이 기이하고 빼어났다는 것이 옛적부터 드날렸음을 듣고, 원찰(願刹)을 세워서 착한 인과(因果)를 심고자 생각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운설악(雲雪岳)이라는 늙은 중이 이 산에서 와서 고하기를, 「산 중에 사자암이 있었는데, 국가의 비보사찰(裨補寺刹)입니다. 대(臺)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대에 오르내리는 자가 모두 거쳐가는 곳입니다. 그런데 창건한 지 오래되어서 지금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으니, 보는 자가 마음 아파합니다. 진실로 이 암자를 중건한다면 여러 사람의 흔쾌함이 딴 곳보다 반드시 곱절일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여 곧 공인을 보내 중건하였다. 세 칸은 부처를 봉안하고 중이 우거하는 곳이며, 그 아랫쪽의 두 칸은 문과 목욕간으로 만들었다. 규모는 비록 작으나 지세가 적당하므로 거기에 알맞게 하고자 하여, 사치하거나 크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공사를 마친 다음, 그해 겨울 11월에 친림하여 낙성하였는 바, 대개 세상을 먼저 떠난 이의 명복을 추념(追念)하고 후세에까지 이로움이 미치게 하여, 남과 내가 고르게 부처의 은덕에 젖고 유명(幽明)이 함께 의지하기 위함이니, 경은 기문을 써서 오랜 후세까지 알게 하라.’ 하시었다.
신 근이 적이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는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하는 것인데, 그 설법은 매우 광대하다. 그러므로 한(漢) 나라 이래로 군주로서 존숭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우리 태상왕전하께서 신무(神武)하신 자질로써 천운에 응해 개국하시어 동방을 보유하고 유신(維新)하는 정사를 베푸시니, 어진 은택이 깊고 두터우며 자손을 위해 남긴 법과 드리우신 복이 지극하다 하겠다. 번거로운 정무를 싫어하시어 사왕(嗣王)에게 전하시고, 불법에 전심하시어 부지런하게 받들고 믿으시어 깊고 높은 산꼭대기의 옛터까지 찾아서 이름 있는 절을 건립하시되 천 리 길도 멀다 않으시고 옥지(玉趾)를 수고롭게 하여 친히 임어(臨御)하시니, 숲과 골짜기는 빛이 더 나고 칡덩굴도 광채가 나니 이 산이 생긴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분이 이 산에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미담으로 전해 오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께서는 창업하신 임금이시고 태상왕의 존귀한 몸인데 멀리 승여(乘輿)를 움직여 친히 임어하셨으니, 지금으로부터 산골 늙은이들은 이 일을 한없이 일컫고 이 산의 소중함을 더할 것이다. 마땅이 헌원씨(軒轅氏)가 구자산(具茨山)에 놀던 것과, 주목왕(周穆王)이 요지(瑤池)에 갔던 일과 아울러 아름다움을 무궁토록 칭송하리라.” 하였다.
관음암(觀音菴) 오대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부 동쪽 해안(海岸)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東遊記)〉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두 석상(石像)은 땅에서 솟아나온 것이라 한다. 동쪽에 사선비(四仙碑)가 있었는데, 호종단조(胡宗旦朝)가 물에 빠뜨려 오직 귀부(龜趺)만이 남았다 한다.” 하였다.
○ 정추의 시에, “고요한 밤에 풍경소리 반공에 울리는데, 단청한 불전에 등불이 붉다. 노승이 우통(于筒) 물을 즐겨 말하는데, 지수(智水)와 어느 것이 묽고 진한고.”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 같다. 공중을 향해 바로 솟음은 솔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竹]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하였다. ○ “유인(幽人)이 보산(寶山) 속에 편히 쉬며, 한 줄기 향연으로 임금을 축수한다. 천녀(天女)가 꽃을 흩어 향기가 땅에 덮였고, 야신(夜神)이 나무를 쪼개니 그림자가 공중에 어른거린다. 처마끝 달빛은 붉은 기둥에 흐르고, 베갯가 구름은 푸른 헌함을 스쳐간다. 한밤중 동창에 객이 놀라 잠 깨니, 해가 바다에서 솟구치어 붉은 빛을 쏜다.” 하였다.
염양사(艶陽寺) 화부산(花浮山)에 있다. 이곡의 중수기가 있다.
금옹사(金甕寺) 오대산에 있다. 이첨(李詹)의 중수기가 있다.
흥원사(興原寺) 담정산(淡定山)에 있다.
월정사(月精寺) 오대산에 있다.
○ 정추의 시에,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은 문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하였다.
수정암(水精菴)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우통물 근원에 수정암이 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사람이 여기에 숨어서 참선하여 도를 깨쳤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으로서 수도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머물기를 즐겨 한다.” 하였다.
등명사(燈明寺) 부 동쪽 30리에 있다.
○ 이곡의 〈동유기〉에, “등명사에 와서 해돋이를 보았다.”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쇠줄친 길이 벽련봉(碧蓮峯)을 둘렀는데, 겹 누각 층층 대가 공중에 솟았다. 그윽한 나무는 그늘져서 여름을 맞이하고, 늦은 꽃은 고움을 남겨서 봄의 조화를 돕는다. 봉간(鳳竿) 그림자는 천 봉우리 달에 걸렸고, 어고(魚鼓) 소리는 만 구렁 바람에 전한다. 고상한 사람이 눈오는 밤에, 화로 재 헤쳐 불 피우던 것이 생각난다.” 하였다.
○ 김돈시(金敦時)의 시에, “절이 창파를 눌러 멀리 아득한데, 올라 보니 바다 복판에 있는 듯하다. 발을 걷으니 대 그림자가 성기면서도 빽빽하고, 베개에 기대니 여울 소리가 낮았다가 높다. 경루(經樓)에 밤 고요한데 향불이 싸늘하고, 객탑(客榻)에 달 밝은데 갈건(葛巾)이 서늘하다. 좋은 경치에 머물 인연 없음이 못내 서글퍼, 종일토록 정신없이 구복(口腹) 위해 바쁘다.” 하였다.
지장사(地藏寺)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고적]창해군(滄海郡) 한(漢) 나라 무제(武帝) 원삭(元朔) 5년에 예국(濊國) 임금 남려(南閭)가 조선(朝鮮)을 배반하고 요동(遼東)에 가서 붙었으므로, 그 지역을 창해군으로 만들었으나 수년 후에 폐지하였다.
동루(東樓) 용지사(龍池寺)에 있다.
○ 정추의 시에, “대관령 동쪽은 천하에 드문 경치이니, 명주(溟州) 고목에 꾀꼬리 어지러이 나네. 새벽에 말 타고 절 찾아갔다가, 빈관(賓館)에 돌아오니 해가 기우네. 누에 오르니 달빛이 눈 같고, 쇠피리 한 소리에 산이 찢어지는 듯하네. 난간에 기대니 시름에 겨워, 묻노니 천년 동안에 달은 몇 번이나 둥글었나, 밤 깊어서 사방에 인적이 드문데, 까마귀 까악까악 티끌도 고요하다. 별빛은 반짝반짝 달과 겨루고, 은하는 천고에 빛이 환하다. 환한 빛이 사방에 임했는데, 뜬구름이 덮으려니 마음 아파라. 어찌하면 긴 칼로 창공에 기대볼까. 고래 같은 물결이 한없이 아득하네. 화부산은 꾸불꾸불 무성한 빛이어라. 김유신 장군은 참 영웅일세, 천년토록 우뚝하고 기이한 공이여.” 하였다.
○ 고려 김태현(金台鉉)의 시에, “절월(節鉞)을 잡고 난간에 기대 한 해를 보내는데, 바라보이는 것은 온통 흰 갈매기 가득한 하늘이네. 서쪽으로 돌은 멧부리 구름 밖에 솟았고, 동쪽으로 일어나는 물결은 해 가[日邊]에 부서진다. 새벽 모습은 버들잎에 이슬이 깨끗하고, 저문 자취는 댓가지에 연기가 짙다. 다만 몸이 임영관(臨瀛館)에 있는 까닭으로, 약은 짓지 않아도 뼈는 벌써 신선되었다.” 하였다.
○ 윤혁(尹奕)의 시에, “신령이 승지를 숨겨, 몇 천 년 만에 백 척 높은 누가 반공에 솟았다. 붉은 기둥은 멀리 창해 속에 떠 있는 듯, 푸른 처마는 높게 흰 구름가를 스친다. 가을은 성곽 무성한 나무에 깊고, 해는 들판 담담한 연기에 진다. 아전이 가고 뜰이 비어 아주 깨끗한데, 낮은 소리로 월중 항아(月中嫦娥)를 부르고 싶다.” 하였다.
예국고성(濊國古城) 읍성(邑城) 동쪽에 있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4백 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우계산성(羽溪山城)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부에서는 61리다. 흙으로 쌓았으며 둘레가 4백 51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보현산성(普賢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1천 7백 7척이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석조(石竈)ㆍ석지(石池)ㆍ석정(石井) 모두 한송정 곁에 있으며, 네 선인(仙人)이 놀이할 때 차를 달이던 도구였다.
양어지(養魚池) 세상에 전해오기로, “한 서생이 유학(遊學)하면서 명주(溟州)에 왔다가, 자태가 아름다운 양가(良家) 여자를 보았는데 제법 글을 아는 것이었다. 서생이 매양 시를 지어 부추기니, 그 여자가, ‘부인네는 함부로 남을 따르지 않습니다. 학생이 과거에 뽑히기를 기다려서 부모의 말씀이 계시면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서생은 곧 서울에 돌아가서 과거 공부를 하였다. 그 여자는 못에 고기를 길렀는데, 고기들이 그 여자의 기침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몰려 와서 먹이를 먹었다. 그 후에 여자의 집에서 신랑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여자는 고기에게 먹이를 주면서, “내가 너희들을 기른 지가 오래이니, 나의 뜻을 알 것이다.” 하며, 비단에 적은 편지를 던졌다. 큰 고기 한 마리가 펄쩍 뛰면서 그 편지를 삼키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서생이 서울에 있으면서, 하루는 부모에게 드릴 찬을 장만하기 위하여 고기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고기뼈를 가르다가 비단에 적은 편지를 발견하여 놀라고 이상하게 여겼다. 곧 비단 편지와 자기 아버지의 편지를 가지고 바로 그 여자의 집에 가니, 신랑이 벌써 그 집 문에 와 있었다. 서생이 편지를 그 여자의 집에 보이니, 그 부모도 이상하게 여기며, ‘이것은 정성이 고기를 감동하게 한 것이고, 사람의 힘으로써는 될 것이 아니다.’ 하고 그 신랑을 보내고 서생을 맞이하였다.” 한다.
개운루(開雲樓) 객관 동쪽에 있다. 연못 복판에다 대를 쌓았고 대 위에 다락을 세웠던 것이나, 지금은 없어졌다.
○ 조운흘(趙云仡)의 시에, “뜰 위에 풀빛이 파릇파릇한데, 버들 그늘진 관도가 깨끗도 하다. 누구네 집 남은 꽃이 떨어지는가, 조각조각 바람따라 말굽에 든다.” 하였다.
사동부곡(史冬部曲) 부 남쪽 20리에 있다. 오홀부곡(烏忽部曲)ㆍ조대산부곡(助大山部曲)ㆍ소점부곡(蘇漸部曲), 반곡소(般谷所) 부 동쪽 6리에 있다. 죽원소(竹原所)ㆍ영평수(寧平戍), 해령수(海令戍) 부 동쪽 10리에 있다. 화성수(化城戍), 사화수(沙火戍) 부 북쪽 20리에 있다. 철옹수(鐵甕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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