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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海道]1.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평산(平山)

한부울 2011. 3. 16. 16:49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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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海道] 

1.진정부(眞定府)는 지금의 평산(平山)이고,

直隸省(十一府。六直隸州。十九州。一百二十四縣)。 

○正定府(名恒山。領一州。十三縣)正定(東垣。附府)獲鹿(鹿泉)井陘(威州)阜平(泜州)欒城(開縣)行唐(玉亭)靈壽(燕州)平山(蒲吾)元氏(槐渠)贊皇(房子)晉州(鼓城)無極(魏昌)[蒿/木]城(廉州)新樂(新市)-地輿名目(一十九省)

 

경상도 진정부(眞定府) 진주(晉州)

경상도 진정부(眞定府) 진주(晉州)

황해도 진정부(眞定府) 평산(平山)

 

 

 

 

平山

历史沿革

唐尧之世平山属冀州地,虞舜之际属并州地,东汉属常山国,三国鼎立属常山郡,隋代初属恒山郡,后属房山郡,唐代肃宗至德元年(756年)兼取西平、房山二名置平山县。


平山历史悠久,文化灿烂,置县2200年。早在新石器时代就有人类在此居住。

公元前17世纪商始祖契发祥于此。

商汤之祖在此发展成为统治华夏600余年的殷商氏族。

春秋时为晋国地,战国时属中山与赵国。西汉初置蒲吾县,三国、魏晋沿袭汉制。隋开皇十六年(公元596年)析蒲吾县一部置房山县。唐贞观元年(公元627年)蒲吾县并入井陉县。玉德元年(公元756年)改房山县为平山县。熙宁六年(公元1073年)井陉县并入平山、获鹿二县(八年又析置井陉县)。

1940年8月,以平山、井陉、获鹿各一部分置建屏县(东建屏)。

1945年10月撤消建屏县,把平山县西部析出一部分分置建屏县(西建屏),东部区域仍为平山县。1958年9月,将建屏、平山合并,称平山县至今。 


平山地处太行山东侧一个马蹄形谷地之中,地域宽阔,落差达2000多米,复杂变化的地形,多层次的绝壁悬崖,加上起伏的山峦、纵贯全境的滹沱河和岗黄两大水库,构成了“山岳——河湖——建筑”混合相间的骨架。

境内山川相映,景色秀美,分布着奇峰、异洞、温泉、瀑布、河湖、树木花草、文物遗址等名胜古迹150多处,其中西柏坡、天桂山、驼梁山、古中山国都城遗址、温泉、文庙、林山万寿寺唐太子墓塔群、沕沕水瀑布等最为著名。 


恒州 - 简介

北魏太和十八年(494年),孝文帝把都城由平城迁到洛阳,改旧都平城(今山西省大同市)的司州改为恒州。北齐北周因之。

隋初废入马邑郡。

唐高祖李渊武德六年(公元623年)在此置北恒州(大同市)。

观十四年(公元640年)改名为云州,治定襄县(大同市)。

947年耶律德光建立辽国。称云州设西京,并设西京道大同府作为辽的陪都。

宋宣和五年(公元1123年)收复云州,升为云中府,并为云中路,领一府八州。

公元1115年,金灭辽建立金国,改云中府为大同府。

元改西京道大同府为大同路,治所在今大同市,领八州五县。

1277年,意大利旅行家马可·波罗奉元世祖忽必烈之命,出使南洋诸国,路经大同。他在《马可·波罗游记》中盛赞大同是“一座宏伟而又美丽的城市”,并说“这里的商业相当发达,各样的物品都能制造,尤其是武器和其它军需品更加出名”。

明清为大同府。民国废大同府入雁门道。


北周宣政元年(578年)正月,析定州置恒州(治今河北正定正定镇),

隋大业元年(605年),改恒州为恒山郡(治真定县,即今河北正定正定镇)。

武德元年(618年),废恒山郡置恒州,治石邑县(即今河北获鹿县东北万夏村)。四年(621年),恒州治迁还真定。

天宝元年(742年),改恒州为常山郡,十五年(756年),常山郡更名平山郡,乾元元年(758年),废平山郡,复置恒州。

长庆元年(821年)正月,避穆宗讳,改恒州为镇州(仍治真定)。

五代后唐同光元年(923年)四月,以镇州为真定府,建北都(治真定)。十一月,北都迁太原,真定府复为镇州。

五代后晋天福七年(942年)二月,改镇州为恒州(治真定)。

五代后汉天福十二年(947年)五月,契丹以镇州为中京。镇州曾改称镇阳。八月,改恒州为镇州(治真定)。

乾括元年(948年),改镇州为真定府(治真定)。

五代后周广顺元年(951年),改真定府为镇州(治真定)。

庆历八年(1048年),改镇州为真定府(治真定)。金因之。

蒙古太宗元年(1229年),改真定府为真定路(治真定)。

明洪武元年(1368年)十月,改真定路为真定府(治真定)。

清雍正元年(1723年),避世宗讳,改真定府、真定县为正定府,正定县。

民国2年(1913年)2月,废府存县。正定府废入正定县属直隶省范阳道(治保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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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연안 도호부◎ 평산 도호부(平山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인데,【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평주(平州)로 고치어, 성종 을미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의하여 평산군으로 고쳤는데, 을미에 호수가 2천이 찼으므로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별호는 연덕(延德), 또는 동양(東陽)이라 한다.

멸악산(滅惡山)【부의 서쪽에 있다. 】전탄(箭灘)【부의 동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우봉(牛峯)에 이르기 12리, 서쪽으로 봉산(鳳山)에 이르기 60리, 남쪽으로 연안(延安) 바닷가에 이르기 1백 20리, 북쪽으로 신은(新恩)에 이르기 30리이다.

호수가 2천 1백 30호요, 인구가 6천 3백 23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백 90명이요, 영진군이 1백 44명이요, 선군이 2백 단(單) 6명이다.

토성(土姓)이 6이니, 정(丁)·박(朴)·신(申)·윤(尹)·유(庾)·김(金)이요, 망성(亡姓)이 2이니, 안(安)·조(趙)요, 내성(來姓)이 5이니, 이(李)·왕(王)·고(高)·전(田)·정(鄭)이요,【지금은 없다. 】속성(續姓)이 1이니, 한(韓)이다.【고려 말에 사헌 장령(司憲掌令) 한철충(韓哲沖)이 있었는데, 평주(平州) 사람이다. 】인물은 태사 개국(太師開國)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이다.【고려 태조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

땅이 많이 메마르고, 산이 높아서 서리가 일찍 오며, 풍속이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힘쓴다. 간전(墾田)이 2만 7백 27결(結)이요,【논이 10분의 1에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수수·팥·메밀·삼·잇이다. 토공은 각색 가죽과 자리·종이·족제비털·칠(漆)·오미자·애끼찌[弓幹木]·지초·느타리요, 약재는 궁궁이[芎藭]·황기(黃耆)·애기풀[遠志]·흰바곳[白附子]·삿갓나물[皀休]·모란뿌리껍질[牧丹皮]·고슴도치쓸개[猬膽]이다. 자기소(磁器所)가 2이니, 하나는 부의 서쪽 성불동(成佛洞)에 있고, 하나는 부의 북쪽 범간리(凡干里)에 있으며,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부의 북쪽 도천리(刀淺里)에 있다.【모두 중품(中品)이다. 】푸른 숫돌[靑色蠣石]이 부의 서북쪽 보산참(寶山站) 남쪽에서 난다.

온천(溫泉)이 1이니, 부의 남쪽 55리 사천대(司天臺)에 있다.【돌난간의 목욕실이 있고, 또 청사와 의창(義倉) 5간이 있다. 본조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이 모두 〈이곳에〉 거둥하였다. 】참(站)이 3이니, 금암(金巖)·보산(寶山)·안성(安城)이요, 역(驛)이 1이니, 기린(麒麟)이다. 봉화가 4곳이니, 독발산(禿鉢山)이 부의 북쪽에 있고,【남쪽으로 봉자산에, 북쪽으로 서흥(瑞興) 회산(回山)에 응한다. 】봉자산(奉子山)이 부의 북쪽에 있으며,【남쪽으로 남산에 응한다. 】남산(南山)【남쪽으로 강음(江陰) 성산(城山)에 응한다. 】·성의곶(聲衣串)이 부의 남쪽에 있다.【남쪽으로 해주(海州) 피곶(皮串)에, 동쪽으로 연안(延安) 주지곶(走之串)에 응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평산도호부(平山都護府)

동쪽으로 우봉현(牛峯縣) 경계까지 15리, 남쪽으로 바다까지 1백 20리, 서쪽으로 해주 경계까지 1백 3리, 봉산군 경계까지 1백 리, 강음현(江陰縣) 경계까지 22리, 북쪽으로 신계현(新溪縣) 경계까지 64리, 서흥부(瑞興府) 경계까지 6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71리이다.

[건치연혁]원래 고구려의 대곡군(大谷郡)이다. 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하였다. ○ 살펴보건대, 한(漢) 나라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에 두 외부(外部)를 두었는데, 조선의 옛 지역인 평나(平那) 및 현도군(玄菟郡)으로 평주도독부(平州都督府)를 삼았다. 지금 부(府)의 동쪽 우봉현의 성거산(聖居山)이 바로 옛날의 평나산(平那山)이니, 고을 이름이 그래서 얻어진 것이다. 아마도 부(府)는 한 나라 때 도독부인 것 같다. 신라에서는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쳤으며 고려조 초기에 평주(平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때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지주사(知州事)로 하였다. 원종(元宗) 때에 복흥군(復興郡)에 합병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때에 다시 예전대로 하였다.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산천]멸악산(滅惡山) 부의 서쪽 60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성악산(省惡山) 부의 북쪽 40리에 있다. 월봉산(月峯山) 부의 남쪽 75리에 있다. 연봉산(煙峯山)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운봉산(雲峯山) 부의 남쪽 60리에 있다. 감악산(紺岳山) 부의 북쪽 13리에 있다. 철봉산(鐵峯山)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만송산(滿松山)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서봉산(西峯山)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성불산(成佛山) 부의 서쪽 90리에 있다.

모란산(牡丹山) 부의 서쪽 69리에 있다. ○ 이색(李穡)의 시에, “산색이 창연(蒼然)하여 바라만 보아도 기이한데 산중의 정사(精舍 절)는 고비(高卑)라 부르네. 살고 있는 중은 여산파(廬山派)에서 나왔으니 술을 사다 놓고 맞이하며 취하자 시를 청하네.” 하였다. ○ 장송(長松) 그늘 아래 돌이 대(臺)가 되었는데, 서쪽으로 바라보니 여러 산과 큰 들이 열렸네. 수양산(首陽山) 고죽(孤竹) 옛터라고 가리키나 그 유래를 어떤 이가 변박(辨駁)할꼬.

총수산(蔥秀山) 부의 북쪽 30리에 있다. ○ 동월(董越)의 기문에, “보산관(寶山館)에서 서쪽으로 10리쯤 가면 산이 있는데 높은 절벽이 흐르는 물을 내려다본다. 구부려진 소나무와 괴이한 돌이 빈 바윗골 사이에 층층으로 보이고 첩첩으로 나와서 돌이빨[石齒]이 잇몸[齦齶]처럼 되었는데 비에 젖은 이끼로 점이 되고 담쟁이덩굴로 얽혔는데 위태로워 떨어질 듯한 것이 반이나 되고 그 사이에 비스듬히 걸려 있어 손과 주인이 나누어 앉은 것 같기도 하다. 흐르는 물이 북쪽으로 와서 돌틈으로 흘러나오며 부딪쳐 쏘고, 거품을 뿌리는 것이 구슬이 뛰고 흰 해오리가 날개 치는 것 같으며, 굽이돌고 꺾여서 동으로 가서 멈출 곳을 알지 못한다.

지금 천자께서 황통(皇統)을 계승하시어 내가 황문(黃門) 금릉 왕군(金陵王君) 한영(漢英)과 함께 명을 받들어 정삭(正朔)을 반포하려고 이 동쪽 나라에 왔다. 처음 여기를 지날 때는 날이 벌써 저물려 하니 수레 끄는 사람들이 바쁘게 달려서 관(館)으로 갔기 때문에 멈출 수 없어서 한 번 고개를 돌려보았을 뿐이었다. 밤에 보산관에서 유숙하면서 황문과 함께 그 말을 하니 마침 관반(館伴) 이조(吏曹) 허 판서가 통역을 통하여 말하기를, ‘조금 전에 산기슭을 지나오면서 잠시 멈추어 쉬려 하였는데 그만 따라오지 못하여 아쉬운 마음을 가진다.’ 한다. 내가 ‘이 산 이름이 무엇인가?’ 물으니, 총수(聰秀)라 대답하였다. 드디어 황문과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잠시 멈추고 좋은 경치를 다 보고 가자고 약속하니 이조(吏曹)가 매우 기뻐하였다.

열흘 후에 우리 두 사람이 이 나라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보산을 지나니 아직 정오가 안 되었다. 이조가 예전의 약속을 이행하자 하고 황해 관찰사 윤군(尹君)이 역시 나를 맞이하러 와서 드디어 함께 갔다. 도착해 보니 일을 맡은 이들이 벌써 장막을 길 왼쪽에 설치하였는데 여러 가지가 모두 갖추어졌다. 때는 3월 22일이다. 두 군(君)이 나에게 읍하며 자리에 앉게 하는데 오직 한 골짜기만이 깊이 뚫려 있는 것이 보이고 그 외에는 모두 장막에 막혀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두어 걸음을 가니 여울이 급한 곳에 이르렀다. 맑은 물을 움켜서 먼지 묻은 갓끈을 빨고, 그 비스듬히 갈려 있어 객과 주인처럼 나누어 있는 곳을 쳐다보았는데, 그 서쪽의 두어 봉우리가 푸르고 깎아질러서 푸른 파[蔥]와 같았다. 이조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 산 이름의 총(聰) 자를 총(蔥) 자로 고치지 않는가.’ 하니, 이조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함께 따라 간 이들이 모두 돌 위에 걸터앉아서 어부들의 고기 잡는 것을 구경하였다. 얼마 후에 산마루에서 피리ㆍ젓대 부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골짜기가 메아리에 울리는 소리인가 하였다. 황문은 그런 것이 아니라 하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나에게 보여 주는데, 거기에는 두 졸병이 벌써 비스듬히 갈려 있는 곳, 동쪽에 높고 우뚝하게 나온 돌벼랑에 올라가서 원숭이처럼 매달려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는데 이것은 관찰사가 시킨 것이었다.

자리로 가서 앉으려 하자 장막이 벌써 물가로 옮겨졌으며 음식 만드는 사람들은 칼을 두드리고 노루를 벗겨 구워서 올리고 물고기로 상에 오른 것 중에 큰 놈은 손가락 같고, 작은 놈은 젓가락 같은데 거품을 품고 꿈틀거리는 것이 불쌍해 보였다. 우리 두 사람이 통역을 명하여 모래를 트고 물을 끌어들이며 하나씩, 둘씩 잡히는 대로 그 안에 두는데 돌문 하나를 만들고 마음대로 가게 하니, 얼마 후에는 하나도 남아 있는 놈이 없었다. 그래서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물고기가 갈 곳을 얻은 것을 기뻐하였다는 말과 정이천(程伊川)의 〈양어기(養魚記)〉를 외우니 이로부터 어부도 나의 뜻을 알고 다시는 빽빽한 그물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술잔을 주고받는데 이윽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견여(肩輿)를 재촉하여 수백 무(武 3척)를 보지 못하고 갔다. 여러 봉우리가 술렁술렁 동쪽으로 달아나는 것이 바람 앞 돛대 같고 진중을 달리는 말과 같아서 기괴한 정경이 온갖 나오다가 모두 총수(蔥秀)에 이르러 멈춘다. 여기서 또 이 산이 깊고 우묵하여 장질(藏疾)하기에 알맞을 뿐 아니라, 그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을 혼자 차지하여 좀처럼 양보하지 않음을 기뻐한다. 대저 강(剛)하고 유(柔)한 두 기운이 섞이고 엉켜서 형세를 따라 모양을 이루는데 명승지가 되는 것은 반드시 사람으로 인하여 되는 것으로서 자못 정해진 수(數)가 있다. 이 산이 동쪽 나라에 있어 그동안 몇 천 년을 지났는지 모르지만 물가에 벽처럼 서서 지나는 이들에게 다시금 눈여겨보지 못하게 된 지가 오래되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이조(吏曹)의 주창과 우리의 화답으로 인하여 해가 뜨는 이 나라로 하여금 모두들 이 산의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 내게서 시작될 줄 알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른바 정해진 수(數)가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사실 거짓으로 이 산을 중히 여기는 자가 아니다. 다른 날 계속하여 이곳에 오는 이들로 하여금 많이 일컬어서 한강 양화도(楊花渡)와 서로 백중(伯仲)이 되게 된다면 전혀 도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놀기를 마치고 저녁에 용천(龍泉)에서 자면서 내가 이 글을 적는다.” 하였다. 황문(黃門)과 이조ㆍ관찰사도 다 시가 있다.

○ 왕창(王敞)의 시에, “푸른 산 깎으니 담을 두르는 듯하고, 칼 같은 봉우리 사방에서 모여 높고 낮네. 평평한 밭이랑 십여 장은 중앙에 펼쳤는데, 하늘하늘 물가 버들 연한 뽕을 겸하네. 두견화(杜鵑花) 떨어지니 붉은 향기 날고 괴이한 돌 꿇어 엎드렸으니, 이상한 분양(羵羊) 같네, 신선과 세속이 다만 하늘 한쪽에 격(隔)했는데, 이 가운데의 좋은 경치 참으로 보통이 아니네. 찬 샘물 밑바닥에 푸른빛 어른거리고, 공중에서 떨어지는 물 바로 만길이나 길구나. 벼랑을 뚫고 구렁에 웅덩이 지며 어찌도 그리 바쁜가, 돌모퉁이 옆으로 부딪치니 소리도 낭랑하네. 펄렁이는 깃발 3월 하늘에 가는 길 재촉하는데, 향기로운 티끌 비단 치마에 살짝 스치네. 채찍 들고 말 몰아서 중첩한 멧부리에 섰는데, 전구(前驅)가 문득 관로(官路 큰길) 곁에서 보고하는구나. 판서가 잔치를 배설하고 술이랑 찬이랑 벌였는데, 겹겹한 흰 장막을 가지런히 높게 쳤네. 말에서 내려 왔다갔다하는데, 물가에 좌석 벌여 걸상을 배설했네. 손과 주인 길게 읍하며 술잔을 돌리는데, 상 위의 해산물(海産物) 두 줄로 벌였네. 복어ㆍ곤포(昆布)에 여황(蠣黃)을 곁들이고, 잉어회만이 아니라 노루도 구웠구나. 어부들 그물 치며 강물에서 노니, 벗은 몸에는 쇠코잠방이[犢鼻褌] 걸쳤네. 그물 주머니를 뒤져도 방어(魴魚)와 준어(鱒魚)는 보이지 않는데, 모래를 헤치면 낱낱이 세 치 길이로다. 모래를 막고 땅을 파서 못을 만들고 놓아주니, 지느러미로 헤엄치며 빙빙 도는구나. 돌문에 한 구멍의 틈만 있는데, 어느 사이엔가 빠져나가 모두 도망했네.

황주 관찰사는 수염이 늘어졌는데, 기이한 것을 찾고 재미난 일 좋아함은 당할 이 없구나. 머리를 끄덕이며 급히 황두랑(黃頭郞)을 보내어 덩굴 만지며 바로 산 위로 올라가게 했네. 호가(胡笳) 소리 끊겼다 이어졌다 이량곡(伊涼曲) 부르는데, 하늘 높이 부는 센 바람 구름 밖에서 생황(笙簧) 소리가 들리네. 산이 비어 골짜기에 메아리처럼 악기 소리 맑게 들려오니, 얼굴 들어 한번 보니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네. 잠깐 동안 정(情)과 경(境)을 둘 다 잊으니, 나도 모르게 절로 늙은이의 흥이 일어나구나. 동쪽 나라의 산수가 원상(沅湘) 지방 같은데, 나무 꼭대기의 험한 길이 양의 창자처럼 서렸구나. 이 산의 수려(秀麗)한 명성 드러남이여, 내가 와서 올라 구경하며 천황(天荒)을 열었으니 무릉도원(武陵桃源)과도 서로 다투겠네. 소금수레 끄는 준마(駿馬)가 네거리를 달리다가 백락(伯樂)이 한 번 돌아보면 좋은 말인 줄을 알아서 천금 값으로 다투어 사려하고, 말발굽이 벽옥(碧玉)인양 번득이며 용마처럼 뛰어올라 갈기털 하루아침에 광채가 난다네. 좋은 놀이의 오늘이 항상 있지 못할 것, 돌아가고 싶은 마음 천리에 황경(皇京)만 생각나네. 옥 섬돌 한밤중에 봉씨의 반렬[鵷行] 따라서 오색구름 깊은 곳에 옥황(玉皇)께 뵈이려 이두(螭頭)에 따오기처럼 옥패(玉珮)를 울리리. 이 먼 곳에서 즐거운 소리 어찌 다하리, 다만 짧은 글귀나 지어 찬양해 보네. 누가 있어 금낭(錦囊)을 거두어 이 산으로 백천 세대에 꽃다운 이름 드리우게 할거나.” 하였다.

『신증』 당고(唐皐)의 시에, “빙설(氷雪) 바위 앞에 경치 다시 기특한데, 주인은 객을 멈추어 금술잔 기울이네. 장차 녹으려는 은(銀)이 가득 깔렸고, 꽃이 피기 전에 옥이 가지에 붙었네. 냉기를 가시려니 세 번 잔을 들고, 회포를 쓰자니 칠언시(七言詩)에나 붙일밖에. 오래전부터 이 산이 동쪽 나라에 이름난 줄 알았는데, 아직도 규봉(圭峯)의 기록한 비(碑)가 있네.” 하였다. ○ 길이 총수산(蔥秀山)에서 나와 물 흐르는 가운데 임했는데, 창연히 처음 올 때와 경치가 같지 않네. 시내 굽어보며 물고기 구경하려니 얼음 얼었고 골짜기에 꽃 찾으려도 아직 피지 않았구나. 거북ㆍ용은 무엇 때문에 양자(羊子)를 슬퍼하나, 새ㆍ짐승들은 그래도 취옹(醉翁)을 즐겁게 하누나. 머리를 돌리니 어느 사이 오늘에 옛날을 보게 되리,까마귀는 바다 동쪽에 날아오르네. ○ 수레를 황해도로 몰아오니, 지금 겨울 경치를 만났네, 소소(蕭蕭)하게 나무는 잎이 떨어지고, 막막(漠漠)하게 새 날아가는 그림자로세. 3일 만에 용천(龍泉)을 지났는데, 새벽에 떠나니 기온 아직 차구나. 가는 비 때문에 견여(肩輿)에 발을 드리우니, 두 눈을 가린 것 같네. 안성(安城) 동쪽으로 계속 가니 문득 총수령(蔥秀嶺)에 이르네. 쳐다보니 초목(草木)이 어울렸고, 내려다보니 샘물과 돌이 어울렸네. 그 안에 다시 바윗골이 열렸으니, 뚫어져 트인 것이 더욱 그윽하고 고요하네. 아마도 봄빛이 무르익으면 온갖 꽃들 찬란하게 피리라 하였더니, 다시 기온이 답답하여, 옷깃 풀어놓고 깨끗이 씻고 싶네. 이 산 이름 유래를 물으니, 동선(董仙 명 나라 사신 동월(董越)을 말함)이 이곳에 다녀갔다네. 눈여겨 다시 보니 흥이 더욱 깊어라. 기문 지어 재주 다시 보여 주니 이로부터 동방(東方) 사람들, 금 백 덩이보다도 더 소중히 여기네. 3기(紀 36년)가 지났다고 하니, 연대가 아직도 멀지 않네. 남은 비(碑)는 바람과 비에 깎였으니, 글자 흐려서 알아보지 못하겠네. 오직 비(碑)를 받친 거북이만 남아서 성낸 기운 스스로 목을 펴는구나. 수레 돌려오던 길 따라가는데, 견여(肩輿) 멘 하인들 빨리 걷네. 거듭 배회할 필요 없다, 이 뜻 벌써 잘 알았네. 지난 일 그렇지 않음이 없지만, 믿는 것은 경경(耿耿)한 마음 있다네. 보산관(寶山館)에서 짐을 푸니, 연기 낀 수림에 저녁 어둠이 드누나.

○ 사도(史道)의 시에, “동(董), 왕(王 왕창) 두 신선 왔던 때는 바로 봄철 경치였다네. 방초(芳草) 사이를 지나가니, 걸음마다 화조(花鳥) 그림자였으리. 지금 비단옷은 춥지만 초구(貂裘)야 어찌 춥다 하리. 이러한 깊은 겨울에는 일만 경치 모두 감추었다네. 우연히 안성 동쪽에 나갔다가 돌아서 반곡령(盤谷嶺)으로 내려갔네. 문득 총수산을 보니 사랑함이 아울러 일어나는구나. 높고 높게 석벽이 섰는데, 텅 빈 동구가 고요하네. 빼어난 봉우리 정말 깎아 세운 것같이 파[蔥] 같은 그 형상 더욱 빛나고, 날아 떨어지는 샘물 용천검(龍泉劍)을 세운 듯 물가 모래판에는 새 발자국이 깨끗하구나. 모여서 잔치하던 그 옛터 있으니, 두 신선 와서 놀던 곳이라네. 동선(董仙)의 기문 돌에 새겨 있는데, 그 돌이 굴레 벗은 말이 달리는 것 같네. 높이 빼어난 모습 일천 산 중 제일인데, 풍류(風流)는 만금(萬金)의 가치였네. 맑은 물 동쪽으로 길게 길게 흐르는데, 높은 산 서쪽으로 멀리멀리 가누나. 여기 지나는 동안 나는 잠이 들었는데, 통역하는 이 바삐 불러 깨우네. 다 구경하고 수레를 돌리려는데, 차마 머리가 잘 돌려지지 않는구나. 당공(唐公 당고(唐皐)를 말함)이 동비(董碑)를 바라보며, 다시금 빨리 가지 말라고 주의시키네. 멍하니 거듭 탄식하니, 국상(國相)도 마음속으로 알아주네. 따라서 관찰사에게 말하는데, 그 마음도 나처럼 초조함을 느끼고 나는 당공을 권하여 가자고 하는데, 날이 저물까 두렵네.” 하였다.

운달산(雲達山) 부의 남쪽 1백 3리에 있다. 속용산(束聳山) 부의 남쪽 1백 20리에 있다. 남천(南川) 보산역(寶山驛) 남쪽에 있는데 부(府)와의 거리는 19리이다. 사매천(賜每川) 부의 남쪽 20리에 있다. 바다 부의 남쪽 1백 50리에 있다. 삼탄(三灘) 부의 남쪽 1백 10리에 있다. 근원이 성불산(成佛山)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해주와의 경계이다. 전탄(箭灘)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기탄(岐灘) 부의 북쪽 45리에 있다.

저탄(猪灘) 부의 동쪽 25리에 있다. 근원이 수안군(遂安郡) 언진산(彦眞山)에서 나와 신계현(新溪縣)을 지나 부의 북쪽에 이르러 기탄(岐灘)이 되고, 부의 동쪽에서 전탄이 되며, 저탄에 와서 물이 비로소 커져서 아래로 강음현(江陰縣)으로 흘러 조읍포(助邑浦)가 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저탄은 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 하였다. 또 우봉현조(牛峯縣條)에도 나온다.

○ 살피건대, 백제 시조 13년에 위례성(慰禮城)에서 도읍을 한산(漢山) 아래로 옮기고 국경을 정하였는데, 북쪽은 패하(浿河)에 이르고 남쪽은 웅천(熊川)으로 한계를 삼으며 서쪽은 큰 바다까지 가고 동쪽은 주양(走壤)에 닿았다 하였는데, 만일 평양을 패강이라 한다면 그것은 고구려의 서울 곁에 있으니 어찌 백제의 경계가 될 수 있을 것이랴. 그렇다면 패하(浿河)라는 것이 바로 이 물[水]인 것 같다.

○ 이색(李穡)의 시에, “물이 맑고 돌이 드러난 두 산 사이 지나가면서, 노는 물고기 세어보고 얼굴 비쳐보네. 오늘 동으로 돌아오는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니, 중국의 한림학사로 난새[鸞]를 타고 온다네.” 하였다.

○ 김식(金湜)의 시에, “비 온 뒤 저탄에 푸른 물결 넘쳤는데, 거듭 이곳 지나니 객의 정회가 많구나. 긴 다리는 어느 사이 거센 물결 따라 가버렸는데, 짧은 돛대가 가는 물결 따라 오고가네. 흰 안개는 저 멀리 하늘가의 장막을 걷었는데, 푸른 산은 어지러이 바다 가운데 소라[螺]가 점찍었네. 칠령(漆嶺)을 굽이굽이 돌아오니 석양이 다 되어, 금암(金巖)에서 한 번 자는데 자는 밤이 어떠한지.” 하였다.

○ 이첨(李詹)의 시에, “두어 칸 모래밭 가게가 모여서 마을을 이루었는데, 보리 이랑에 바람이 부니 푸른 물결 번득이는구나. 나루터 왕래하는 손에게 묻노니, 집안에서 농사짓는 이 몇 명이나 있는지.” 하였다.

온천(溫泉) 부의 남쪽 55리에 있는데, 돌난간의 욕실(浴室)이 있다.

[토산]사(絲)ㆍ남석(藍石)ㆍ청려석(靑礪石) 보산역(寶山驛) 남쪽에서 생산된다. 석이ㆍ지치[紫草]ㆍ적토(赤土) 성악산(省惡山)에서 생산된다. 오미자ㆍ철ㆍ누치[訥魚]ㆍ숭어ㆍ게ㆍ조개ㆍ붕어[鯽魚]. 『신증』 녹반(綠磻) 총수산 남쪽에서 생산된다.

[불우]연봉사(煙峯寺)ㆍ성불사(成佛寺)ㆍ산암사(山菴寺)ㆍ묵방사(墨彷寺) 모두 성불산에 있다. 용정사(龍井寺)ㆍ해운사(海雲寺)ㆍ망월사(望月寺)ㆍ쌍암사(雙菴寺) 모두 모란산(牡丹山)에 있다. 소성불사(小成佛寺) 만송산(滿松山)에 있다. 서림사(西林寺) 속용산(束聳山)에 있다. 건동사(乾洞寺) 성악산(省惡山)에 있다. 남방사(南方寺)ㆍ관남사(觀南寺)ㆍ음을사(陰乙寺) 모두 멸악산(滅惡山)에 있다. 음적사(陰寂寺) 감악산(紺岳山)에 있다.

[고적]성황산성(城隍山城)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천 5백 25척이요, 높이 20척이며 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자모산성(慈母山城) 부의 남쪽 7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4백 80척, 높이 15척이다. 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철봉산성(鐵峯山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백 13척, 높이 10척이며, 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청심루(淸心樓) 객사 동쪽에 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척서정(滌暑亭) 지금은 있던 곳을 알 수 없는데, 김 원외(金員外)의 시를 가지고 상고하여 보면 저탄(猪灘) 언덕 위에 있었던 것 같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취하여 높은 난간 의지하고 두건을 반만 벗었는데, 먼 산이 어른어른 맑은 강은 넓으네. 서시(西施)의 자태 아무래도 어여쁘니 엷은 단장이 짙은 단장보다 못지않네. 흥이 무르익자 석양(夕陽)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노젓는 노랫소리 명경(明鏡) 가운데 뜨네. 화공(化工)은 오히려 우리들이 쉽사리 흩어질까 하여 저녁달을 불어 보내네.” 하였다. ○ 세상의 티끌 생각 모두 다 벗어 버리고, 잠시 다른 고장 찾아 보고 넓은 지경 바라보네. 높은 산의 일천 봉우리는 북두성 이고서 높았고, 평평한 강물 한 갈래는 땅을 가로비껴 줄을 긋누나. 하늘이 어두우니 물과 나무 문득 아득해지는데 흰 해오라기 한가로이 모래 물가에서 조누나. 무더운 5, 6월 마루문에 상쾌하게 맑은 바람 생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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