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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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原道]
1.산남부(山南府)는 지금의 양양(襄陽)이고,
湖北省(領十府。一直隸州。七知州。六十縣)。
○襄陽府(名漢川。領一州。六縣)襄陽縣(南鄉。附府)宜城(鄢陵)南漳(臨沮)棗陽(蔡陽)穀城(筄陽)光化(乾德)均州(武當)-地輿名目(一十九省)
山南府(仿襄阳)
襄陽府,北宋宣和元年(1119年)升襄州置,治襄陽縣(今湖北襄樊市漢水南襄陽區)。
轄境約今湖北省襄樊、谷城、南漳、宜城等市縣地。
元至元年間改置路。明初復置府。
清轄區約今湖北省丹江口市以東,棗陽以西和蠻河以北地。
1912年廢。宋為京西南路治。清嘉慶時白蓮教劉之協等在此起義。
王莽时曾一度改称“相阳”,东汉光武帝时恢复原名,仍属荆州南郡。献帝初平年间,荆州刺史刘表移州治于襄阳城内。
建安十三年(208年),曹操控制了南郡北部,置襄阳郡,郡治在襄阳城内。
曹魏、西晋时,仍属荆州襄阳郡。东晋时,因雍州(今陕西一带)人避难流入襄阳等地,为安置流民,孝武帝于太元十四年(389年)以襄阳为中心侨置雍州。
南北朝时期,宋元嘉二十六年(449年),划出荆州的襄阳、南阳、顺阳、新野、随等五郡为侨置雍州的实土,州治在襄阳城内。南齐沿仍。
梁朝时萧祭以襄阳降西魏,西魏改称襄州,置总管府。
本县属襄州总管府襄阳郡。北周沿仍。
隋文帝时属襄州。隋炀帝时属襄阳郡。
唐武德四年(621年),改郡为州。
贞观初年置山南道,治所在襄阳城内,本县属山南道襄州。
开元二十一年(733年)属山南东道(治所仍在襄阳城内)襄州(天宝时改州为郡,乾元时复称襄州)。
五代时,属山南道(实即山南东道)襄州。
北宋时,属京西南路襄州。
宣和元年(1119年)属京西南路襄阳府。
南宋绍兴五年(1135年),“省邓城,入襄阳”,本县辖境遂扩展到汉水以北,仍属襄阳府。
元二十九年(1292年),属江北河南行中书省襄阳路。
明洪武初年,属湖广行中书省襄阳府。
洪武九年(1376年),属湖广承宣布政使司襄阳府。
1643年1月(崇祯十五年十二月),李自成一度改称襄阳为襄京。
清朝时期属湖北布政使司襄阳府。
中华民国2年,直属湖北省政府。3年,属湖北省襄阳道。
16年废道,县直属于省。
17年,属鄂北行政公署。
21年,属湖北省第八区行政督察专员公署。
25年,属湖北省第五区行政督察专员公署。
其间,1930年7月至1932年6月,中国共产党在黄龙一带(县内其它地方为国民党统治)建立襄阳县苏维埃政权,属鄂豫边苏区领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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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강릉 대도호부◎ 양양 도호부(襄陽都護府)
사(使) 1인.
본래 고구려의 익현현(翼峴縣)인데,【이문현(伊文縣) 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익령(翼嶺)이라 고쳐서 수성군(守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고종(高宗) 8년 신사에 글안 군사를 잘 막았다 하여 양주 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하였으나,【남송(南宋) 영종(寧宗) 가정(嘉定) 14년. 】44년 정사에 적에게 항복한 까닭으로 덕녕 감무(德寧監務)로 강등하였고,【남송 이종(理宗) 보우(寶祐) 6년. 】원종(元宗) 원년 경신에 지양주사(知襄州事)로 회복하였다. 본조 태조(太祖) 6년 정축에 외향(外鄕)이라 하여 부(府)로 승격하고, 태종(太宗) 13년 계사에는 예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고, 16년 병신에 양양으로 고쳤다. 별호는 양산(襄山)이라 한다. 속현(屬縣)이 1이니, 동산현(洞山縣)은 본래 고구려의 혈산현(穴山縣)인데, 신라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명주(溟州)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익령현(翼嶺縣) 임내에 이속(移屬)시켰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명산(名山)은 설악(雪嶽)이다.【부(府) 서쪽에 있는데, 신라 때 소사(小祀)로 하였다. 】동해 신사당(東海神祠堂)【부(府) 동쪽에 있는데,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사지낸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강릉(江陵) 임내 연곡(連谷)에 이르기 50리, 서쪽으로 인제(麟蹄)에 이르기 36리, 북쪽으로 간성(杆城)에 이르기 33리이다.
호수가 8백 57호요, 인구가 1천 2백 77명이요, 동산현의 호수가 1백 25호요, 인구가 2백 1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73명이요, 선군이 1백 95명이다.
토성(土姓)이 2이니, 김(金)·이(李)요, 망성(亡姓)이 4이니, 손(孫)·박(朴)·하(河)·정(鄭)이며, 속성(續姓)이 3이니, 장(張)·임(林)·윤(尹)이다. 동산현의 성이 4이니, 박(朴)·김(金)·최(崔)·진(陳)이요, 내성(來姓)이 1이니, 임(林)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이(李)이다.
땅이 메마르고, 풍속이 바다에서 나는 것으로 생업을 하며 무예(武藝)를 숭상한다. 간전(墾田)이 1천 8백 33결이요,【논이 5분의 2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왕골·감·배·밤·닥나무·칠(漆)이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잣·호도·북나무충영·지초·석이·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대구·문어·상어·연어·전복·홍합·숭어·상멱·자리·시우쇠요, 약재는 인삼·오미자(五味子)·승검초뿌리[當歸]·복령(茯苓)·북나무진[安息香]·쥐꼬리망초뿌리[秦]·궁궁이[芎藭]·산무애뱀[白花蛇]·웅담(熊膽)·병풍나물[防風]·다린송진[白膠香]·대왕풀[白芨]·모란뿌리껍질[牧丹皮]이요, 토산(土産)은 가는 대이다. 석철(石鐵)이 부(府) 서쪽 10리 철굴산(鐵掘山)에서 난다. 염분(鹽盆)이 22요, 동산현의 염분(鹽盆)이 18이다.
읍 토성(邑土城)【둘레가 1천 88보이다. 】옹금산 석성(擁金山石城)이 부(府) 북쪽에 있다.【둘레가 1천 9백 80보(步)이며, 비가 오면 바위 새에 물이 솟아 흘러서 샘이 된다. 】역(驛)이 4이니, 연창(連倉)·상운(祥雲)·강선(降仙)·인구(麟丘)이다.【동산현에 있다. 】요해(要害)는 본 부(府) 서쪽으로부터 인제 경계 바드라재[所等羅嶺]로 가는데 36리이다. 봉화가 4곳이니, 수산(水山)이 부(府) 동쪽에 있고,【남쪽으로 임내 동산의 광정(廣汀)에, 북쪽으로 부(府) 덕산에 응한다. 】덕산(德山)【북쪽으로 간성 죽도(竹島)에 응한다. 】양야산(陽也山)이 동산현 남쪽에 있으며,【남쪽으로 연곡 주을문에, 북쪽으로 광정에 응한다. 】광정(廣汀)이 부(府) 북쪽에 있다.【남쪽으로 양야산에, 북쪽으로 덕산에 응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양양도호부(襄陽都護府)
동쪽으로 해안까지 12리, 남쪽으로 강릉부 경계까지 65리, 서쪽으로 인제현(麟蹄縣) 경계까지 55리, 북쪽으로 간성군(杆城郡) 경계까지 45리다. 서울과의 거리는 5백 11리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 익현현(翼峴縣) 이문현(伊文縣)이라 하기도 한다. 신라에서 익령(翼嶺)이라 고쳐서 수성군(守城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이 현령을 두었고, 고종(高宗) 8년에는 거란 군사를 방어한 공이 있다는 것으로써 양주 방어사(襄州防禦使)로 승격하였으나, 44년에 적에게 항복하였다는 것으로써 덕령 감무(德寧監務)로 강등하였고, 원종(元宗) 원년에는 지양주사(知襄州事)로 회복하였다. 본조 태조 6년에는 임금의 외가 고을이라 하여 승격하여 부로 만들었다. 태종 13년에는 예에 따라 도호부로 고쳤고 16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산천]설악(雪岳) 부 서북쪽 50리에 있는 진산이며 매우 높고 가파르다.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소동라령(所冬羅嶺) 부 서쪽 60리에 있으며 겹쳐지고 포개진 산맥에 지세가 험하고 궁벽지다. 예전에는 서울로 통하는 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성황산 부 북쪽 25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부 동북쪽 15리에 있으며, 낙산(洛山)이라고도 한다. 수산(水山) 부 동쪽 10리에 있다. 덕산(德山) 부 북쪽 36리에 있다. 초진산(草津山) 부 남쪽 29리에 있다. 이산(離山) 부 북쪽 63리 쌍성호(雙成湖) 서쪽에 있는데, 곧 대관령 동쪽 가닥이다. 기이한 봉우리가 꾸불꾸불하여 울타리를 설치한 것과 같으므로 이름하였다. 울산(蔚山)이라 하기도 한다. 양야산(陽野山) 동산현 남쪽 10리에 있다. 정족산(鼎足山) 부 서남쪽 40리에 있다. 세 봉우리가 높게 솟아나서 모양이 솥발 같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바다 부 동쪽 13리에 있다. 사전(祀典)에 동해신(東海神)을 여기에서 제사한다고 하였고, 중사(中祀)에도 기재(記載)되었다. 쌍성호(雙成湖) 부 북쪽 40리 간성군(杆城郡) 경계에 있으며 둘레가 수십 리다. 호수 경치가 영랑호(永郞湖)보다 훌륭하다. 예전에는 만호영(萬戶營)을 설치하여 병선(兵船)을 정박하였으나 지금은 폐하였다. 남대천(南大川) 부 남쪽 2리에 있다. 강릉부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오며 소동라령(所冬羅嶺) 물과 합치고 부 남쪽을 지나 바다에 들어간다. 죽도(竹島) 부 남쪽 45리 관란정(觀瀾亭) 앞에 있으며, 푸른 대나무가 온 섬에 가득하다. 섬 밑 바닷가에 구유같이 오목한 돌이 있는데 닳고 갈려서 교묘하게 되었고, 오목한 속에 자그마한 둥근 돌이 있다. 전설에는, “둥근 돌이 그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므로 닳아서 오목하게 된 것이며, 다 닳으면 세상이 바뀌어진다.” 한다.
[토산]모시, 철(鐵) 서선사(西禪寺) 동쪽 봉우리 밑에서 산출된다. 죽전(竹葥) 죽도에서 산출된다. 잣ㆍ오미자ㆍ지치[紫草]ㆍ인삼ㆍ지황ㆍ복령ㆍ꿀ㆍ산무애뱀[白花蛇]ㆍ김ㆍ미역ㆍ전복ㆍ홍합ㆍ문어ㆍ대구[大口魚]ㆍ송어ㆍ연어ㆍ은어[銀口魚]ㆍ황어ㆍ방어ㆍ고등어ㆍ광어ㆍ농어ㆍ숭어ㆍ쌍족어(雙足魚)ㆍ해삼ㆍ송이.
[불우]낙산사(洛山寺) 오봉산에 있다.
○ 신라 중 의상(義相)이 지은 것이다. 대웅전 위에 전단 관음상(栴檀觀音像) 하나를 봉안하고 대를 이어 높이 받들었는데, 영험이 있었다. 우리 세조(世祖)가 이 절에 행차하였다가, 전사(殿舍)가 비좁고 누추하다 하여 신축하도록 명하여, 매우 굉장하여졌다.
○ 고려 중 익장(益莊)의 기문에, “양주(襄州) 동북쪽 강선역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두어 마장쯤 되는 큰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1백 자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1만 섬을 싣는 배라도 용납할 만하다. 그 밑에는 바닷물이 항상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렁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士)가 머물던 곳이라 한다. 굴 앞에서 오십 보쯤 되는 바다 복판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 신라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친히 불성(佛聖)의 모습을 보고자 하여 돌 위에서 전좌 배례(展坐拜禮)하였다. 27일이나 정성스럽게 하였으나 그래도 볼 수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동해 용왕이 돌 위로 붙들고 나왔다. 대성(大聖)이 곧바로 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水精念珠)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 없다. 다만 굴 위에서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에 가면, 그곳이 나의 머리 꼭지 위다. 거기에다 불전(佛殿)을 짓고 상설(像設)을 안배하라.’ 하였으며 용(龍)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치는 것이었다. 대사는 구슬을 받고 그 말대로 가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다 불전을 창건하고 용이 바친 옥으로써 불상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는바, 곧 이절이다.
우리 태조께서 나라를 세우시고, 봄가을에 사자(使者)를 보내 사흘 동안 재를 실시하여 치성하였고, 그 후에는 갑령(甲令 항상 하는 일)에 적어서 항규(恒規)로 하였다. 그리고 수정염주와 여의주는 이 절에 보관해 두어 보물로써 전하게 하였다. 계축년에, 원(元)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으므로 이 주(州)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 방어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절 종[奴]이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땅에 묻고 도망하여 조정에 고하였다. 침입군이 물러간 후에 사람을 보내 가져다가 내전(內殿)에 간수하였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사람이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배례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 하였다. 명종(明宗) 정사년에, 유자량(庾資諒)이 병마사가 되어 시월에 굴 앞에 와서 분향 배례하였더니, 청조가 꽃을 물고 날아와서 복두(幞頭)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한다.” 하였다.
○ 고려 유자량의 시에, “바다 벼랑 지극히 높은 곳, 그 가운데 낙가봉(洛迦峯)이 있다. 큰 성인은 머물러도 머문 것이 아니고, 넓은 문은 봉해도 봉한 것이 아니다. 명주(明珠)는 내가 욕심내는 것 아니며, 청조는 이 사람이 만나는 것일세. 다만 원하노니 큰 물결 위에서, 친히 만월 같은 모습 뵈옵는 것을.” 하였다.
○ 안축의 시에, “대성의 원통(圓通)한 지경은, 일찍이 바다 위 봉우리라 들었네. 불은(佛恩)은 감로와 같이 젖고, 향은 자니(紫泥)로 봉한 것이 있다. 유(類)에 따라서 몸은 항상 나타났으나, 미혹에 잠겨서 눈으로 만나지 못한 것일세. 참인가 거짓인가는 말할 것 없고, 다만 자애스런 모습에 배례할 뿐일세.” 하였다.
○ 김부의(金富儀)의 시에, “한번 해안 높은 곳에 등림하고서는, 머리를 돌리니 티끌 근심 없어졌노라. 대성의 원통한 이치를 알고자 하면, 성낸 물결이 산 밑에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것일세.” 하였다.
○ 김극기의 시에, “다행히 묘경(妙境)을 찾아 떠돌던 몸을 머무르니, 생각이 맑아지고 보는 것이 그윽하여 만 가지 상념(想念)이 없어진다. 물결 밑의 달은 누가 위아래를 분간하리, 봉우리 끝 구름은 저절로 서동(西東)을 차지한다. 금당(金堂) 속 가짜 상을 잠깐 보았을 제, 석굴(石窟) 속 참 몸을 벌써 보았노라. 대사를 도와 7일재함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의 마음은 원에 응해 먼저 통했으리라.” 하였다.
관음굴(觀音窟) 오봉산 밑에 있다.
○ 우리 익조(翼祖)께서 정숙왕후(貞淑王后)와 함께 여기에 와서 후사를 점지하도록 기원하였다. 어느 날 밤 꿈에,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와서 알리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며 이름은 선래(善來)다.” 하였다. 얼마를 지나서 도조(度祖)를 낳으므로 드디어 선래라 이름하였다.
영혈사(靈穴寺)ㆍ사옹사(四擁寺) 모두 설악산에 있다. 도적사(道寂寺) 정족산에 있다.
[고적]권금성(權金城) 설악산 꼭대기에 있으며 석축이다. 둘레는 1천 1백 12척이고 높이는 4척이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세상에 전해 오기로는, “예전에 권씨 김씨 두 집이 여기에 피란한 까닭으로 이름하였다.”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 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방어하였다.” 한 곳이 이곳인 듯하다.
냉천(冷泉) 오봉산 밑에 있다. 세상에 전해 오는 말에, “관음보살이 계집으로 화해서 벼를 베고 있었는데,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냉천 물을 마시면서 함께 장난을 하였다.” 한다.
○ 정추의 시에, “바닷가 산이 밝은 세상 되기 전부터 왔는데, 금년까지 몇 번이나 흥망을 보았나. 가을빛이 온 들에 젖어 붉은 벼가 수북하고, 해가 오봉산에 비쳐서 붉은 연기 오른다. 덕녀(德女)의 옛터엔 잔디가 섬돌을 덮었고, 원효의 남긴 자리에는 나무가 하늘에 닿았다. 누에 올라 상사(相思) 꿈을 맺고자 한다면, 꿈속에도 응당 냉천을 잔질하리라.” 하였다.
오색역(五色驛) 부 서쪽 45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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