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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15.기주부(夔州府)는 양산(梁山)

한부울 2011. 3. 16. 16:21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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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15.기주부(夔州府)는 양산(梁山)이다.

四川省(領十一府。九直隸州。十一州。百十一縣)。

夔州府(名雲安。領六縣)奉節(魚復。附府)巫山(建平)靈陽([月*旬]忍)萬縣(安鄉)開縣(漢豐)大寧(巫溪)-地輿名目(一十九省)

忠州(名臨江。領三縣)酆都(南賓)墊江(桂溪)梁山(南浦)-地輿名目(一十九省)

 

8.운안부(雲安府)는 양산(陽山) 夔州府-永宁郡 와 겹쳐진다.

 

 


夔州府  

位于重庆市北部。元为夔州路。

明洪武四年(1371)改置夔州府,九年(1376)降为夔州,改属重庆府,十年(1377)升为 直隶州,十三年(1380)复升为夔州府。

清承明制。

清末府治奉节(在今重庆市奉节县)。

辖:奉节(今重庆市奉节县)、巫山(今重庆市巫山县)、云阳(县治在今重庆市云阳县云阳镇)、万(县治在今重庆市万州区)、开(今重庆市开县)、大宁(今重庆市巫溪县)共6县;尼溪(厅治在今重庆市云阳县尼溪乡)1散厅。1913年废除。

战国时,这里属楚国管辖,秦汉年间改为鱼复县.关于“鱼复县”的名称,还有一段悲凄感人的传说。

战国时候,爱国诗人屈原忧国忧民,主张联齐抗秦,以保楚国,却受奸臣陷害,进贬官放逐.后来楚国被秦国侵吞,他悲愤至极,便投湖南汨罗江而死。

汨罗江有一条神鱼,十分同情屈原,它张开大嘴吞入屈原的尸体,从汨罗江游经洞庭湖,然后进入长江,再溯江而上,送往屈原的故乡秭归。

当神鱼游到秭归时,百姓们拥到江边,失声痛哭。

神鱼越发受到感动,也跟着淌下泪来。

泪水模糊了神鱼的视线,它早已游过归。

还在继续往上游,直到撞着了瞿塘峡的滟滪堆,才猛然醒悟。

神鱼急忙掉头往回游,将屈原的遗体送到了秭归.就这样人们将神鱼从滟滪堆往回游的地方,叫做“鱼复县”了。

蜀汉章武二年(公元222年),刘备兵伐东吴,遭到惨败,退守鱼复,将鱼复改为永安县。

唐贞观二十三年〔公元649年)改称奉节县,隶属夔州府.因奉节是夔州府治地,所以人们往往忽略了奉节的县名,而称它“夔州”或“夔府”。

宋咸平四年(公园1001年)分置利州、夔州二路,夔州路治夔州,以夔州、黔州、施州、忠州、万州、开州、达州、涪州、渝州、云安军、梁山军、大宁监来属;


梁山

重庆市梁平县,设立于西魏元钦二年(公元553年),其后直到1952年的1500年间,一直名为梁山县,是中国历史上最早出现、使用时间最长的行政地名“梁山”。   

至今,重庆市梁平县的县城所在地仍称“梁山镇”。 

沿革

西周、春秋,县地属庸国。战国时属巴国、巴郡。

秦、西汉,属巴郡朐䏰(朐忍)县(治今云阳)。 

梁平县第四纪冰川遗迹西汉居摄三年(公元8年),县地属巴郡临江县(治今忠县)。东汉初,属益州巴郡。

兴平元年194),刘璋三分巴郡,县地属固陵郡(治鱼复今奉节)。

建安六年(201),改固陵郡为巴东郡,县地属巴东郡直至晋代。   

西魏元钦二年(553),置梁山县,以境内高粱山为名,治黄土坎。   

隋开皇三年(583),全国撤郡改州,以州统县,梁山县隶南州(治今万州区)。

大业三年(607),废州设郡,以郡统县,梁山县隶巴东郡(治民复县,今奉节)。 

唐武德元年(618),改巴东郡复置信州,梁山县隶信州。

武德二年,析信州三县(南浦、梁山、武宁)置南浦州,梁山县隶南浦州。

武德八年,废南浦州,三县并入夔州。武德九年,复置南浦州,改南浦州为浦州,梁山县还隶浦州。

贞观八年(634),浦州改名万州,天宝元年(742)改名南浦郡,乾元元年(758)复名万州,梁山县均隶之,直至宋初。   

宋开宝三年(970),以万州石氏屯田务置梁山军,亦名高粱郡,同于下州,隶夔州路,领梁山县(中下县),军治今梁山镇,县治自黄土坎亦徙此。

宋元祐元年(1086),还隶万州,寻复故。   

元至元二十年(1283),升梁山军为梁山州,领梁山县,隶夔州路。   

明洪武四年(1371),新宁县(今开江)划入梁山县,洪武六年十二月,裁梁山州,仍置梁山县,隶下川东道夔州府

洪武十年五月,改隶忠州,后还隶夔州府。洪武十四年,新宁县划出。   

清康熙七年(1668),裁新宁县入梁山县

雍正七年(1729),新宁县划出复置。雍正十二年,改隶忠州直隶州。   

民国2年2月,以道统县,梁山县隶川东道。

民国5年,全川军阀混战,形成防区制,梁山县成为川军一、二军、国民政府军二十、二十一军的防区。

民国18年,直隶四川省政府。

民国24年3月1日,川政统一,全省划为18个行政督察区,梁山县隶第十行政督察区,列为一等县。

民国29年,列为二等县。   

解放初,梁山县隶川东人民行政公署大竹专区

1952年12月3日,因县名与山东省梁山县同名,遂以境内有平坝而更名为梁平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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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경주부◎ 양산군(梁山郡)

지군사(知郡事) 1인.

신라 문무왕(文武王) 5년에【당나라 고종(高宗) 인덕(麟德) 5년. 】상주(上州)·하주(下州)를 베어서 처음으로 삽량주(歃良州)를 설치하였는데, 경덕왕이 양주(良州)로 고쳐서 구주(九州)의 하나로 갖추었다. 고려 태조 23년 경자에 양주(梁州)로 고치고, 현종(顯宗) 무오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본조 태종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양산군(梁山郡)으로 고쳤다.【이 해에 유수부(留守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관(牧官)을 제외한 ‘주(州)’ 자를 가진 단부(單府) 및 군현(郡縣)은 모두 ‘산(山)’과 ‘천(川)’으로 고쳤다. 뒤에도 이와 같다. 】별호(別號)는 의춘(宜春)이며,【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또 순정(順正)이라고도 한다.

진산(鎭山)은 원적산(圓寂山)이다.【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한다. 소금강(小金剛)이라고도 한다. 양산과 울산 두 고을 사이에 있다. 】취서산(鷲棲山)【군(郡) 북쪽에 있다. 】대천(大川)은 가야진(伽倻津)과【군(郡) 서쪽 33리에 있다. 속칭은 옥지연(玉池淵)인데, 신룡(神龍)이 있다는 곳으로서, 매년 춘추로 향축을 내려 제사를 행한다. 중사(中祀)이다. 금상(今上) 즉위(卽位) 3년 신축에 붉은 용이 진(津) 가운데에 나타났었다. 】가야진(伽倻津) 연연(衍淵)이다.【군(郡) 남쪽 22리에 있다. 속칭은 적석룡당(赤石龍堂)인데, 춘추로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한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11리, 서쪽으로 김해(金海)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동래(東萊) 임내(任內) 동평(東平)에 이르기 29리, 북쪽으로 언양(彦陽)에 이르기 33리이다.

호수는 4백 25호, 인구가 9백 3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5명, 진군(鎭軍)이 43명, 선군(船軍)이 1백 31명이다.

토성(土姓)이 7이니, 김(金)·이(李)·박(朴)·정(鄭)·한(韓)·방(房)·조(曺)이며, 귀화한 성[投化姓]이 1이니, 진(陳)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2천 30결이다.【논이 9분의 4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이며,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칠(漆)·종이·여우가죽·삵가죽·노루가죽·사슴가죽·송이버섯·석이[石茸]·표고버섯·가는 대[篠]·왕대[簜]·지초(芝草)·석류(石榴)·배[梨]·은구어(銀口魚)·황어(黃魚)이요,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맥문동(麥門冬)·두충(杜沖)·방풍(防風)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군(郡) 남쪽 금음산리(今音山里)에 있다.【중품이다. 】

성황산 석성(城隍山石城)은 군(郡) 동쪽 5리에 있다.【둘레가 5백 69보인데, 그 안에 작은 시내가 둘, 작은 못이 넷, 샘과 우물이 넷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쌍벽루(雙碧樓)【객사(客舍) 서남쪽에 있다. 】최공대(崔公臺)【황산 강변(黃山江邊) 절벽 위에 있는데, 송만(松巒)이 바로 천 길[千仞]을 내리 누르고 있다. 곧 최치원(崔致遠)이 놀며 구경하던 곳이다. 】역(驛)이 3이니, 황산(黃山)·위천(渭川)【예전에는 우천(亐川)이다. 】·윤산(輪山)이다. 대저도(大渚島)【군(郡) 남쪽에 있는데, 육지와의 거리가 1백 60보이다. 국농소(國農所)가 있었는데, 지금은 혁파되어, 백성들이 들어가 산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양산군(梁山郡)

동쪽으로 기장현(機張縣) 경계까지 23리이고, 동래현(東萊縣)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으로 같은 현 경계까지 46리요, 서쪽으로 밀양부(密陽府) 경계까지 50리요,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18리요, 북쪽으로 언양현(彦陽縣) 경계까지 41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6리이다.

[건치연혁]신라 문무왕(文武王)이 상주(上州)와 하주(下州) 땅을 베어서 삽량주(歃良州)를 두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양주(良州)로 고쳤고, 고려 태조가 양주(梁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이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뒤에 원 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본국의 관청은 번거롭고 백성에게는 폐가 된다고 하므로 밀성(密城)에 합쳤다가 충렬왕(忠烈王)이 전대로 회복했고, 본조 태종조(太宗朝)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풍속]집집마다 남녀의 구별이 없이 대나무로 도구를 만든다 최해(崔瀣)의 안량주(安梁州)를 보내는 서(序)에 이르기를, “양산(梁山) 고을은 우리 계림(鷄林) 고리(故里)에서 1백여 리나 떨어져 있다. 금년 여름에 내 상복을 벗고 고향에서 돌아오는데, 마침 죽옥상공(竹屋相公)이 진(鎭)에 나와 포구를 합친다 하기로, 공을 뵙기 위하여 갔었다. 이에 길이 헌양(巘陽)을 지나게 되어 양산에서 자려 했더니, 때마침 몹시 무덥고 또 비가 와서 그 곳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일 하루 저녁만 비가 더 오면 냇물이 넘어서 며칠동안 건너지 못할 것이다.’ 한다. 내 생각건대 관청에 돌아갈 날짜가 장차 차있으니 걸음을 천천히 할 수 없다하여, 이에 부득이 양산에 들어가 자지 못하고 바로 냇물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다. 관사(官舍)를 바라다보니 백성들의 집이 대나무 숲 사이에 가물가물 보이는데, 사람들이 이곳을 가리켜 양산 고을이라고 한다. 이로 인하여 그 풍속의 한두 가지를 알겠도다. 이 지방은 땅이 좁고 백성들은 경박하며, 전답은 모두 낮고 습해서 가물면 곡식이 익고, 비가 오면 물이 해로워 그 풍흉이 딴 고을과는 판이하다. 대개 가뭄은 해마다 있는 것이 아니니, 하늘이 어찌 오직 양산 백성들만 위해서 항상 비가 오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이유로 풍년드는 해는 적고 흉년만 계속되는 것은 그 지형 때문인 것이다. 집마다 남녀의 구별이 없이 대나무를 가지고 그릇을 만들어 다른 물건을 바꾸고, 의식(衣食)과 세금 내는 것을 오직 대나무만 바라다 보고 있을 뿐이며, 또 큰 장사꾼이나 부자로 이것을 취급하는 자는 없다. 심지어 사신의 왕래에 그들을 대접하는 것까지 초초해서 차마 견디고 응할 수가 없으니, 이는 곧 대나무 숲 속에 숨어서 마치 놀란 사슴과도 같기 때문이다. 동남쪽 여러 고을 중에 이 고을이 가장 가난해서 본래 다스리기 어렵다고 했더니, 이원윤(李元尹)이 이곳으로 귀양오자 공은 그 폐단을 알고 먼저 상전(上田)을 보고 그 도랑을 깊게 판 다음, 사람으로 하여금 거친 밭 몇 두둑을 농사짓게 하여 힘을 써서 갚도록 하였다. 또 옛 풍속은 농사에 익숙하지 못하여 모두 아침에 늦게 나가고 저녁에는 일찍 파하는데, 이것을 보고 그 땅 품질에 따라서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매양 사람 열 명이 보(保)를 만들고 보마다 대쪽 하나씩을 만들어 맨 먼저 온 사람이 이것을 가졌다가, 그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차례로 서로 전하면, 맨 나중에 오는 사람은 이것을 전할 곳이 없으므로 이것을 가진 채 일하게 된다. 일이 끝나면 이 대쪽을 가진 자는 맨 뒤에 왔다는 죄로 벌했다. 그때에야 해가 떠오르는데, 전부터 공은 이미 밭에 나가 있으니 이렇게 하기를 10일 동안을 하자 사람들은 다투어 가며 먼저 밭으로 나가서, 양산의 거친 밭은 모두 잘 이루었으나 이것을 쓸 곳이 없었다. 반년이 못되어 공이 부름을 받아 돌아오니, 이때에는 공의 은혜가 그다지 심히 나타난 것 같지 않아서 사람들은 옛 습관을 편하게 여겨 옛날에 갈던 밭에 금시에 씨도 뿌리지 않고, 씨를 뿌린다 해도 또한 김매주지 않았다. 내가 양산을 다녀온 것과 이공(李公)이 그곳을 떠난 지가 겨우 한달 남짓한데, 나는 여기에서 인인군자(仁人君子)가 조그만 벼슬을 낮게 여기지 않고 자기 몸이 백성의 일을 먼저 하는 것을 보았으니, 이로써 양산 백성들의 가난한 것은 비단 이곳 백성들의 잘못뿐이 아니라, 정치하는 자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데에 있다는 것을 알겠다. 이제 죽옥(竹屋)에 사는 사람이 양산의 명을 받았기로 인하여 내가 양산에서 들은 것을 기록하여 주면서 또 권하기를, ‘내 다만 이공의 정치한 것을 들어 말했으니, 양산이 적다고 여기지 않는다면 양산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무엇을 근심할 것이며, 양산 백성의 가난한 것을 부자로 만들지 못하랴. 만일 부자가 된 뒤에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대로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이니 어찌 내 말을 기다리겠는가.’ 소년 시절에 글을 읽은 효력이 나타나는 것을 내 양산 백성들이 그대에게 교화(敎化)된 것에서 보겠도다.” 하였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고을 동북쪽 5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취서산(鷲棲山)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또 언양현(彦陽縣) 조에 있다. 원적산(圓寂山) 고을 북쪽 20리에 있으며, 혹은 천성산(千聖山)이라고도 하고, 또는 소금강산(小金剛山)이라고도 한다. 칠점산(七點山) 고을 남쪽 44리 되는 곳 바닷가에 있다. 일곱 봉우리의 산이 점과 같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가락국(駕洛國) 때 참시선인(旵始仙人)이 놀던 곳이라 한다. ○ 안축(安軸)의 시에, “바닷물 천 리에 물이 하늘에 떠 있으니, 일곱 점 푸른 봉우리 안개 속에 아득하네. 이곳이 바로 금선(琴仙)이 살던 곳, 배타고 가는 길 총총히 하지 말게.” 하였다. 금정산(金井山)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동래현(東萊縣) 조에 있다. 이천산(梨川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증산(甑山) 고을 서남쪽 12리 되는 큰 들 가운데 있다. 바다 칠점산 밖 2리에 있다. 내포(內浦) 고을 서쪽 40리에 있다. 계원연(鷄原淵) 쌍벽루(雙碧樓) 아래에 있는데, 물이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원적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범곡부곡(凡谷部曲)에서 나오는데, 이곳에서 합쳐서 호포로 흘러 들어간다. 서쪽 언덕에 죽오(竹塢)가 있다. 호포(狐浦)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물이 두 근원이 있으니 하나는 원적산에서 나왔고 하나는 취서산에서 나왔는데, 이것이 합해서 황산강으로 들어 갔으며 건너는 배가 있었다.

황산강(黃山江) 고을 서쪽 18리에 있다. 신라에서 사대독(四大瀆)의 하나로 쳤고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고려에서는 무안(務安)의 용진강(龍津江)과 광양(光陽)의 섬진강(蟾津江)과 이 강을 배반하여 흐르는 삼대수(三大水)라고 일컬었다. ○ 정포(鄭誧)의 노래에, “지나는 비 부슬부슬 강 나무 적시고, 얇은 구름 조각 조각 맑은 빛을 가렸네. 황산강 깊은 물 건널 수 없어, 돌아다보니 백 리 먼 곳 구름만 아득하네. 강 머리에 있는 계집애 아름답기도 해라. 강에 임해 건너려 하여 이리저리 방황하네. 우는 비둘기 젖 먹는 제비 봄 해는 저물고, 떨어지는 꽃 나는 버들가지 봄바람 향기로워. 배 부리는 사람 불렀는데 어디서 오는가. 돛대 달고 저 아래 어산장(魚山莊)으로 향하네. 물어보니 나하고 같이 가는 길 배 중앙에 그와 함께 앉았네. 나부(羅敷)가 스스로 지아비 있는 걸 알겠는데, 괴상할손 웃음의 말 왜 그리 경망한가. 막연히 황금 주는 것 돌아다보지 않으니, 강 언덕에 쌍으로 노는 원앙새 바라보네. 그대가 배를 대나 내 어찌 머무르리, 내 친구 정히 황모강(黃茅岡)을 기다리도다.” 하였다. ○ 이곡(李穀)의 시에, “생각건대 옛날 배타고 황산강 동쪽을 지날 적에, 북풍은 해에 불어 차갑고 빛이 없더니, 황산강 서쪽으로 3십 리를 바라보면, 고기잡이 배 출몰하는 곳 강물은 멀고 멀어라. 내 불시에 떠나 또한 급히 가노라니, 눈앞에 좋은 경치 다하여 부질없이 방황하네. 듣건대 그대 원으로 나가 바다를 향했다하니, 상상하건대 화극(畫戟)에 맑은 향기 어렸으리. 손을 보내노라 자주 강 길을 지났고, 중을 찾아 여러 번 빈 산 속 집에 이르렀으리. 황산강 놀이 가장 즐거우니, 붉게 단장한 그림 배 강 중앙에 떠 있구나. 사군(使君)이여, 황산가(黃山歌) 한 곡조 부르라, 사군의 호기 맑고 미친 듯하리. 인생의 모이고 흩어지는 것 애락(哀樂)을 다할지라, 연꽃 밑에 원앙새만 시름 짓노라. 어찌 거듭 사군의 곡조 부르리. 단판(檀板)으로 황산 언덕을 쳐부수리라.” 하였다.

가야진(伽倻津) 혹은 옥지연(玉池淵)이라고도 하며, 고을 서쪽 40리 황산강 상류에 있다. 우리 세종조(世宗朝) 때 황룡(黃龍)이 물속에 나타났으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문득 효험이 있었다. 동원진(東院津) 고을 남쪽 25리, 황산강 하류에 있다. 구읍포(仇邑浦) 고을 서쪽 3리에 있으니, 근원은 취서산에서 나왔으며, 호포와 합해서 황산강으로 들어간다. 대저도(大渚島) 고을 남쪽 40리, 바다 어구에 있으며, 좋은 밭이 백 이랑은 됨직하다. 화자포(火者浦)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영천(靈川) 고을 동쪽 22리에 있으며, 남으로 흘러서 동래현(東萊縣) 해운포(海雲浦)로 들어간다. 『신증』 사두도(蛇頭島) 곧 칠점산 남쪽 가지에 있으며, 밭 5백여 두둑이 있고, 사는 백성들이 또한 많다. 소요저도(所要渚島) 대저도 동쪽에 있으며, 밭 수백여 두둑이 있는데, 땅이 몹시 기름지다. 축포(杻浦) 고을 남쪽 35리에 있으며, 백성 5백여 호가 산다. 동두저(東頭渚) 고을 남쪽 35리 축포 상류에 있다. 북천(北川) 고을 북쪽 10리에 있으며, 물이 넘치면 바로 읍성으로 대들기 때문에 뚝을 쌓아서 막았다.

[토산]철(鐵) 화자포(火者浦)에서 난다. 죽전(竹箭) 고성산에서 난다. 송이ㆍ은어[銀口魚]ㆍ표고[香蕈]ㆍ황어(黃魚)ㆍ천문동(天門冬). 『신증』 차(茶)ㆍ웅어[葦魚]ㆍ수어(秀魚).

[불우]통도사(通度寺) 취서산(鷲棲山)에 있다. 이색(李穡)의 기문이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날 개어 천 떨기 산을 열었는데, 한 줄기 물이 흘러내리네. 놀란 물결 어지러이 얼굴에 튀니, 6월에도 가을 뜻 생기네. 한 발 숲 밖의 누각은, 붉은 난간이 푸른 산에 비쳐있네. 그림 그린 대들보엔 제비가 말을 하고, 진귀한 나무 가지엔 꾀꼬리가 졸고 있네. 어지러운 돌 높다랗게 하늘에 의지했고, 거치른 이끼는 어지러이 땅에 깔려 있네. 높다란 율단(律壇)의 백(伯)이요, 물에 씻겨 조그만 때도 없네. 그윽이 사노라니 푸른 것 밟지 않고, 글 삼천 구절만 내리 외우네. 맑은 절경을 그릇 나누어, 방탕하게 노는 이 사람의 마음 위로하네. 노는 사람의 행적 가벼우니, 문 밖에 나면 만 리를 움직이네. 기이한 것을 탐하여 여기 머무르니, 그래도 백이나 만 중에서 하나둘밖에 보지 못하네. 그 중에서 두 번 다시 오는 곳도 있으니, 숲과 구렁이 더욱 아름다운 곳일세. 옛날에 박후(朴侯)의 손자와 더불어, 여기 올라 몹시 취했었네. 지금 와서 그 때 놀던 것 생각하면, 황홀해서 마치 꿈속과 같네. 시험삼아 왕파(王播)의 글귀를 찾아보니, 사롱(紗籠)이 이미 물에 빠져 없어졌네. 바람에 임해 긴 휘파람부니, 옛일 생각하는 눈물 한없이 흐르네.” 하였다. ○ “동굴 속 감옥(紺屋) 가장 깊은데, 연하(煙霞) 속에 파묻혀 쉽게 찾기 어려워라. 숲 아래 갑자기 지둔(支遁)의 학을 보겠고, 꿈속에는 먼저 중수(仲殊)의 거문고를 매만지네. 지경이 맑으니 붉은 티끌 씻은 것을 알겠고, 못이 고요하니 흰 달이 떠 있는 것 매우 예뻐라. 깨끗한 물 한 병 등 한 자루로, 무심한 어느 곳에 다시 마음 달래리.” 하였다. 『신증』 불지사(佛池寺) 원적산(圓寂山)에 있다. 절 북쪽 바위 언덕 아래에서 샘이 솟아 나오는데 빛이 금과 같다.

[고적]임경대(臨鏡臺) 혹은 최공대(崔公臺)라고도 하는데, 황산역(黃山驛) 서쪽 절벽 위에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놀고 즐기던 곳이다. 치원의 시에, “연기 낀 봉우리 빽빽하고 물은 넓고 넓은데, 물속에 비친 인가 푸른 봉우리에 마주 섰네. 어느 곳 외로운 돛대 바람 싣고 가노니, 아득히 나는 저 새 날아간 자취없네.” 하였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에, “맑은 강물 거울 같아 푸르고 또 넓은데, 아득한 물 외로운 마을 어지러운 봉우리를 등졌네. 고기잡이 노래 한마디 조각배 하나, 푸른 버들 깊은 곳에 사람의 자취 없네.” 하였다. 와곡부곡(瓦谷部曲)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범어부곡(凡魚部曲) 고을 서쪽 6리에 있다. 원포부곡(源浦部曲)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옛날에는 원포역(源浦驛)이 있었다. 어곡소(於谷所) 고을 서쪽 5리에 있으며, 조그만 성이 있다. 속칭 수질옥(水蛭獄)이라 하였는데, 옛날에 소(所)가 되었을 때 죄인을 가두던 곳이다. 범곡부곡(凡谷部曲) 고을 북쪽 10리에 있으며, 지금은 석곡촌(石谷村)이 되었다. 고산성(古山城) 고을 동쪽 3리에 있으며, 돌로 쌓았다. 고장성(古長城) 황산강(黃山江) 동북쪽 언덕에 있으며, 돌과 흙을 섞어서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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