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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12.태주부(泰州府)는 영해(寧海)

한부울 2011. 3. 16. 16:12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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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12.태주부(泰州府)는 영해(寧海)이고,

江南省(舊名南京)(分江蘇八府。三直隸州。三小州。六十二縣。分安徽八府五直隸州。四小州。五十縣)。

○揚州府(名維楊)(名廣陵。領二州。六縣)江都(邦溝。附府)甘泉(與縣。附府)儀徵(真州)高郵州(臨澤)興化(白塗)寶應(安宜)泰州(蒲濤)東臺-地輿名目(一十九省)

 

 

 


泰州

建置沿革 

西漢,海陵縣屬臨淮。海陵縣始置時間史無明載。《漢書.地理志》載:武帝元狩六年(前117)設置臨淮郡,下轄29個縣,其中有海陵縣。海陵縣命名由來,《大清一統志》卷六十七雲:"以其地傍海而高故曰海陵。"漢代海陵縣治所在地不詳,唐以后縣治位於今泰州市市區。

新莽,海陵縣改稱亭間,屬淮平郡。 

東漢,海陵縣屬廣陵郡 三國,江淮之間為魏吳戰場,海陵縣廢。

西晉,武帝太康元年(280)海陵縣復立,屬廣陵郡。

東晉,海陵縣屬廣陵郡

劉宋,海陵縣屬廣陵郡。

南齊,海陵縣屬廣陵郡。

,海陵縣改屬海陵郡。海陵郡設置於東晉義熙七年(411),下轄建陵、臨江、如皋、寧海、蒲濤5個縣,郡治所在地不詳。劉宋明帝泰豫元年(472)增轄臨澤縣。

武帝永明元年(483)、五年先后增設齊昌、海安2個縣。梁時海陵郡郡治移治海陵縣,下轄海陵、建陵、寧海、如皋、臨江、蒲濤、臨澤7個縣。海陵郡屬南兗州。

北齊,南兗州改稱東廣州,海陵郡屬東廣州,仍轄海陵等7個縣。

,宣帝太建五年(573),東廣州復稱南兗州,海陵郡屬南兗州,仍轄海陵等7個縣。

北周,南兗州改稱吳州,海陵郡屬吳州,轄海陵、建陵、如皋、寧海、臨澤5個縣。 

蒲濤縣省,臨江縣並入寧海縣

,文帝開皇三年(583),海陵郡廢。建陵縣並入海陵縣,如皋縣並入寧海縣,臨澤縣並入高郵縣。不久,海陵縣分出江浦縣。海陵縣屬吳州。開皇九年,吳州改稱揚州,海陵縣屬揚州。煬帝大業初年,揚州改為江都郡,海陵縣屬江都郡。江浦縣又並入海陵縣。

,高祖武德三年,海陵縣改稱吳陵縣,以縣設置吳州。武德七年吳州廢,復稱海陵縣,屬邗州。武德九年,邗州改稱揚州,海陵縣屬揚州寧海縣並入海陵縣。中宗景龍二年,分海陵縣東境設置海安縣,玄宗開元十年,海安縣又並入海陵縣。

楊吳,海陵縣屬江都府。高祖武義二年,分海陵北境招遠場設置興化縣。

睿帝乾貞中,於海陵縣設置海陵制置院

南唐,烈祖升元元年設置泰州。又分海陵南境5個鄉設置泰興縣。

泰州下轄海陵、泰興、鹽城、興化4個縣。元宗保大十年分海陵縣如皋場設置如皋縣,泰州增轄如皋縣。同年又於海陵縣東境設置靜海制置院。

馬令《南唐書》卷一:"改元升元,……以揚州海陵縣為泰州。" 王象之《輿地紀勝》卷四十:"相傳以為取通泰之義。"海陵縣為泰州州治所在地。

后周,以泰州為團練州,屬揚州。仍轄海陵等5個縣。

北宋,太祖乾德五年,泰州由團練州降為軍事州,屬淮南道。太宗至道三年分全國為15路,泰州屬淮南路。神宗熙寧五年淮南路分為東西兩路,泰州屬淮南東路。太宗太平興國前,泰州仍轄海陵等5個縣。太平興國二年鹽城改屬楚州后,泰州轄海陵、興化、泰興、如皋4個縣。

南宋泰州為軍事州,屬淮南東路。高宗建炎四年,興化縣改屬承州,泰州轄海陵、如皋、泰興3個縣。紹興五年,泰興縣改屬揚州,興化縣廢為鎮並附入海陵縣,泰州轄2個縣。紹興十年,泰興縣改屬泰州泰州治所一度移至泰興沙上。紹興十二年,泰興縣再次改屬揚州。紹興十九年復設興化縣,仍屬泰州。孝宗乾道二年,興化縣改屬高郵軍,不久又屬泰州。淳熙四年,興化縣再次改屬高郵軍,泰州僅轄海陵、如皋2個縣。

元,世祖至元十四年,設置泰州路,屬淮東道,至元十九年屬江淮行省。至元二十一年,泰州路改為泰州,屬揚州路。泰州轄海陵、如皋2個縣。

,太祖洪武初年,海陵縣省入泰州泰州揚州府,轄如皋縣。

泰州揚州府,轄如皋縣。世宗雍正三年,如皋縣改屬通州,從此泰州不再轄縣,成為散州。高宗乾隆三十三年分泰州東北境設置東台縣。

民國元年,南京臨時政府裁府廢州,泰州改稱泰縣。3年,江蘇省分為5道,泰縣屬淮揚道。16年道廢泰縣屬江蘇省。(來源:泰州旅游網) 


揚州府,明初改維揚府置,治江都縣(今江蘇揚州市),屬京師,永樂後屬南直隸。清轄境相當今江蘇省寶應縣以南、長江以北,東台市以西、儀征市以東地。當運河交通衝要,為明清兩淮鹽運中心。1912年廢。

在明代,揚州府是今江蘇長江以北僅有的2個府之一(另一個是淮安府),下轄高郵州、泰州、通州3州和江都縣、甘泉縣、儀真縣(今儀征市)、寶應縣、興化縣、泰興縣、如皋縣和海門縣8縣,轄區範圍基本上相當於今日揚州市、泰州市、南通市以及鹽城市南部。

清代,揚州府歸屬新成立的江蘇省,並且分出通州直隸州(及如皋縣、泰興縣)和海門直隸廳,範圍有所收縮,下轄高郵州、泰州2州和江都縣、甘泉縣、儀征縣(今儀征市)、寶應縣、興化縣、東台縣(分泰州東北部新設)6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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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안동 대도호부◎ 영해 도호부(寧海都護府)

본디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인데, 신라에서 유린군(有隣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예주(禮州)로 고쳐, 현종(顯宗) 무오년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는데, 고종(高宗) 46년 기미에 위사 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올려서 덕원 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삼았다가, 뒤에 예주목(禮州牧)으로 올렸고,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에 여러 목(牧)을 없앰에 따라 영해부(寧海府)로 고쳤다. 본조 태조 6년 정축 6월에 비로소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부사(府使)를 겸하게 하였는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단양(丹陽)이다.【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속현(屬縣)이 2이니, 영양현(英陽縣)은 본디 고은현(古隱縣)인데, 뒤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예주(禮州) 임내(任內)에 붙였다.【연양(延陽)이라고도 한다. 】별호(別號)는 익양(益陽)이다. 청기현(靑杞縣)은, 본디 대청 부곡(大靑部曲)이 예전에 청부현(靑鳧縣)에 속하고, 소청 부곡(小靑部曲)이 예전에 영양현(英陽縣)에 속했었는데, 고려 충렬왕 30년 갑진에 대청·소청 부곡을 합하여 청기현(靑杞縣)으로 만들었다. 별호(別號)는 청계(靑溪)이다. 부곡(部曲)이 2이니, 석보(石保)와 수비(首比)이다.

등운산(登雲山)【부(府) 북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10리, 서쪽으로 진보(眞寶)에 이르기 65리, 남쪽으로 영덕(盈德)에 이르기 18리, 북쪽으로 강원도 평해(平海)에 이르기 17리이다.

본부(本府)의 호수는 2백 15호, 인구가 1천 5백 38명이며, 영양(英陽)의 호수는 40호, 인구가 4백 81명이요, 청기(靑杞)의 호수는 29호, 인구가 2백 24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명, 진군(鎭軍)이 62명, 선군(船軍)이 1백 26명이다.

본부(本部)의 토성(土姓)이 6이니, 박(朴)·김(金)·황(黃)·이(李)·임(林)·신(申)이며, 영양의 성이 4이니, 남(南)·이(李)·김·방(房)【지금은 방(方)을 쓴다. 】이요, 청기(靑杞)의 속성(續姓)이 2이니, 유(兪)·최(崔)이며, 석보(石保)의 속성(續姓)이 1이니, 김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기후는 따뜻하고, 간전(墾田)이 2천 7백 20결이다.【논이 7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콩·보리·삼[麻]·닥나무[楮]·왕골[莞]·뽕나무이며,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칠·종이·자단향(紫檀香)·가는 대[篠]·지초·인삼·송이버섯·우모(牛毛)·세모(細毛)·김·미역·대구·모래무지·전포(全鮑)·마른 조개·노루가죽·사슴가죽·삵가죽이요, 약재(藥材)는 방풍(防風)·백복령(白茯苓)·백급(白芨)이며, 토산(土産)은 은구어(銀口魚)·문어·신감초(辛甘草)·청각(靑角)·연어(年魚)이다. 염소(鹽所)가 2이니, 모두 군(郡) 북쪽에 있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1백 14보이며, 안에 샘 3이 있다. 】성황당 석성(城隍堂石城)【영양현 서쪽 2리에 있으니, 부(府)와 거리가 66리이다. 둘레가 2백 88보인데, 높고 험하며, 안에 못 하나와 우물 하나가 있다. 】관어대(觀魚臺)【부(府) 동쪽에 있는데,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봉송정(奉松亭)·소송정(小松亭)은 모두 그 아래에 있다. 】역(驛)이 2이니, 병곡(柄谷)【본부 지경에 있다. 】·신역(新驛)【석보(石保)에 있다. 】이다. 축산포(丑山浦)【부 동쪽 60리에 있고,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있어 수어한다. 】봉화(烽火)가 2곳이니, 대소산(大所山)【부 동쪽에 있고, 남쪽으로 영덕(盈德) 별반(別畔)에 응하고, 북쪽으로 평해(平海) 후리산(厚里山)에 응하며, 서쪽으로 본부 광산(廣山)에 응한다. 】·광산(廣山)【서쪽으로 진보(眞寶)의 남각산(南角山)에 응한다. 】이다. 위장사(葦長寺)【부 서쪽에 있다. 산(山)에 우물이 있는데, 비가 오거나 가물어도 물이 불거나 줄지 아니하며, 깨끗지 못한 사람의 그림자가 〈물에〉 비치면, 맑은 물이 진흙물로 변하고 말라버린다. 】

월경(越境)은 진보현(眞寶縣)의 임천(臨川)·성부(省夫) 2리(里)가 부(府)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동쪽은 해안까지 7리, 남쪽은 영덕현(盈德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은 진보현(眞寶縣) 경계까지 80리, 예안현(禮安縣) 경계까지 1백 26리, 북쪽은 강원도(江原道) 평해군(平海郡) 경계까지 30리이다. 서울과의 거리는 7백 7리이다.

[건치연혁]본래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이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유린(有隣)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현종(顯宗)은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고종(高宗)이 위사공신(衛社功臣) 박송비(朴松庇)의 고향이라고 하여 승격시켜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하고, 뒤에 승격시켜 예주목(禮州牧)으로 하였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태저목(汰諸牧)을 고쳐 지금 이름으로 하였다. 본조에서는 태조 6년에 처음으로 진(鎭)을 두고, 병마사(兵馬使)가 부사(府使)를 겸임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 13년에 예에 따라 고쳐서 도호부(都護府)로 하였다.

[풍속]집마다 거문고를 갖고 있어서, 사람들은 그 줄을 다루는데 공교(工巧)하다 권근(權近)의 서루기(西樓記)에 있다.

[형승]동쪽이 바다에 닿아서 일본과 이웃하였다 이색(李穡)의 기문(記文). 산이 막히고 바다에 임하였다. 산은 멀고 첩첩하며 바다는 넓고 평평하다 모두 권근의 기(記)에 있다.

[산천]용두산(龍頭山)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그 산정(山頂)에 우물이 있는데, 장마에도 가뭄에도 물의 증감이 없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처음에 산정에 한 갈대[葦]가 있었는데, 길이가 하늘에 닿았다. 그곳에 우물을 팠더니 물이 썩 맑고 깨끗하였다. 그러나 간사한 사람이 비치면 변하여 진흙 빛이 되었다.”고 한다. 동해산(東海山) 부의 동쪽 4리에 있다. 반포산(半浦山) 부의 남쪽 7리에 있다. 잉량대산(仍良大山) 부의 서쪽 9리에 있다. 가서음산(加西音山) 부의 서쪽 13리에 있다. 가을면산(加乙面山) 부의 서쪽 23리에 있다. 산성산(山城山) 부의 서쪽 13리에 있다. 등운산(騰雲山)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일월산(日月山) 영양현(英陽縣)의 북쪽, 강원도 울진현(蔚珍縣)의 경계에 있다. 망일봉(望日峯) 부의 동쪽 5리에 있다. 서읍령(西泣嶺) 부의 동쪽 40리에 있어서 온 고을의 전송(餞送), 영접(迎接)하는 곳이 되어 있다. 『신증』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크고 작은 사신(使臣)의 행차가 만약 처음으로 재[嶺]를 넘으면 반드시 흉한 일이 있다.” 하여, 사람들이 다 피해 다녔다. 손순효(孫舜孝)가 감사(監司)가 되었을 때에, 바로 재 위로 와서 고목(古木)을 깎아 껍질을 벗기고 글을 써서 말하기를, “너는 화산(華山 서울의 북쪽에 있는 진산(鎭山))을 읍(揖)하여 만세를 부르고, 나는 왕명을 받들어 여러 백성들을 위로한다. 어느 쪽이 가볍고 무겁다는 것을 누구가 능히 알 수 있으랴. 밝은 태양이 우리의 두 충정(衷情)을 비추고 있다.” 하고, 인하여 이름을 고쳐 파괴현(破怪峴)이라고 하였다. ○ 권오복(權五福)의 시에, “탐천(貪泉)도 오은지(吳隱之)를 그르치지는 못하였으니, 우는 재[泣嶺]라는 이름자를 가지고 무지(無知)한 자들을 놀라게 하지 말라. 구구하게 괴이한 것을 깨뜨린다고 한 것이 도리어 괴이하노니, 우는 재라면 모름지기 타루비(墮淚碑)를 새기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오현(烏峴) 영양현(英陽縣) 경계 50리에 있다. 남면현(南眠峴) 부의 남쪽 15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오다가 이 재에 이르러 말 위에서 곤(困)하게 자는데, 황(黃)씨 성을 가진 한 아전이 술을 올렸다. 태조가 잠에서 깨어서 마시고 그 아전을 수헐(愁歇 근심이 그친다는 의미)이라고 명명(命名)하고, 그 산을 면현(眠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송현(松峴) 부의 남쪽 5리에 있다. ○ 아조(我朝) 세종 조(世宗朝)에 이 재의 남쪽에 땅불[地火]이 일어나서 밤낮으로 연기는 나지만 불빛은 보이지 아니하였으며, 나무나 돌을 던져 넣으면 다 탔다. 큰 비가 와도 꺼지지 않더니 거의 반달이나 지나서 저절로 꺼졌다. 성종(成宗) 갑진년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밑에 석유황(石硫黃)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므로 파보았으나 석유황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함한동(含恨洞)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그 동중(洞中)에 연지계(燕脂溪)가 있으니 관기(官妓)들이 사는 곳이다. 축산도(丑山島) 부의 동쪽 1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형상이 소[牛] 같아서 축산(丑山)이라고 한다. 그 남쪽에 높은 봉우리가 있는데 그 형상이 말 같다. 그래서 마산(馬山)이라고 한다. 전함(戰艦)이 정박하는 곳이다. 바다 부의 동쪽에 있다. 적천(赤川) 부의 서북쪽 5리에 있다. 어량(魚梁)이 있다. 영양현(英陽縣) 대천(大川) 현(縣)의 동쪽 5리에 있다. 그 원류(源流)는 일월산(日月山)에서 나와서 진보현(眞寶縣)에 이르러 신한천(神漢川)이 된다. 용당(龍塘) 부의 서쪽 5리에 있다. 산의 돌 사이에서 샘이 솟아 나와서 큰 못이 되었다. 그 아래에 관개(灌漑)하는 토지가 매우 넓어서 백성들이 그 이(利)를 입고 있다. 백석정(白石汀) 부의 북쪽 20리에 있다. 경정(鯨汀)ㆍ장정(長汀) 모두 부의 북쪽 10리에 있다. 병곡포(柄谷浦) 부의 북쪽 12리에 있다. 병곡역(柄谷驛)의 옛터가 있다. 망곡포(網谷浦) 백석정에 있다. 경정(景汀) 부의 동쪽 15리에 있다. 고성포(高城浦)ㆍ대진(大津) 모두 관어대(觀魚臺) 아래에 있다. 영혈지(靈穴池) 영양현에 있다.

[토산]구리[銅] 대소산(大所山)에서 난다. 아연[鉛] 창수원(蒼水院) 남쪽에서 난다. 죽전(竹箭) 축산도에서 난다. 인삼(人蔘)ㆍ방어(魴魚)ㆍ대구[大口魚]ㆍ홍어(洪魚)ㆍ청각(靑角)ㆍ석류(石榴)ㆍ문어(文魚)ㆍ송어(松魚)ㆍ넙치(廣魚)ㆍ연어(鰱魚)ㆍ자해(紫蟹)ㆍ고등어[古刀魚]ㆍ홍합(紅蛤)ㆍ전복[鰒]ㆍ송이[松蕈]ㆍ김[海衣] 미역[藿]ㆍ참가사리[細毛]ㆍ꿀[蜂蜜].

[불우]범흥사(梵興寺) 등운산(騰雲山)에 있다. 위장사(葦長寺) 용두산(龍頭山) 우물 곁에 있다.

[고적]석보부곡(石保部曲) 부의 서쪽 60리에 있다. 수비부곡(首比部曲) 부의 북쪽 90리에 있다. 본래는 영양(英陽)에 속하였는데, 고려 문종(文宗) 때에 옮겨서 울진(蔚珍)에 붙였다가 뒤에 근처라 하여 도로 영양에 붙였다. 북량루(北涼樓) 옛터가 객관의 북쪽에 있다. 이곡(李穀)의 시(詩)에, “한기(韓琦)는 감히 주금당기(晝錦堂記)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부탁하더니, 비록 돌아올 수는 있었으나 가기 또한 바쁘더라. 촉군(蜀郡)에서 길잡이 현령(縣令)이 노시(弩矢)를 짊어지고 구종(驅從)하는 것을 보았으며, 회계(會稽)에서 벽제하는 것 허리의 문장(紋章)을 웃었구나. 북쪽 헌함에 서니 하늘은 넓고 바다는 검고, 서쪽 재[嶺]에 가을이 깊으니 나무도 풀도 황엽(黃葉)일세. 이별하는 마당에서 먼저 눈물부터 뿌리는 일은 그만두라. 나에겐 이미 때를 느끼고 옛날을 회포하는 배알마저 무디었으니.” 하였다. ○ 종적은 평생에 물에 뜬 마름 같은데, 꿈속에서 이따금 누(樓) 머리에 기대어 보네. 다리[橋]에 이름을 쓰고 한 번 삼천리 멀리 떠났다가 인(印)을 차고 20년 만에 다시 왔구나. 소나무는 들에서 마중하는 듯 모두 머리를 숙이고, 물은 어옹(漁翁)으로 숨을 만하여 가벼운 배 떠 있네. 다른 해에 혹시 동산(東山)의 뜻을 성취하리니, 곱게 단장한 자야 잘 있으니 눈물 흘리지 말라.” 하였다.

유사정(流沙亭) 부의 동쪽에 있다. ○ 이색(李穡)의 기(記)에, 유사(流沙)는 우공(禹貢)에 실려 있는 바로서 임금의 감화(感化)를 받은 곳이다. 그러나 유사라고 정자의 이름을 지은 것은 나는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옛 사람들이 그들의 유연(遊燕)하며 거처 휴식하는 곳에 현판을 걸 때에는 본래 이름난 산수에 의거하여 명명하거나, 혹은 크게 아름다운 것, 크게 악(惡)한 것을 이름으로 걸어서 권장하거나 징계하는 뜻을 붙였으며, 혹은 그 선대(先代), 고향 등에 대한 이름을 붙여서 근본을 잊지 않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만약 멀리 떨어진 이역(異域)이며 낮게 여기고 미워하는 곳으로서, 중국에서 인물도 나지 아니하며, 배와 수레가 이르지 않는 땅인 유사(流沙)와 같은 이름은 사람들이 말하기도 싫어하며 일컫기도 부끄럽게 여기거늘, 하물며 그것을 큰 글씨로 두드러지게 써서 문 위에 걸어 놓겠는가. 나는 우리 형의 품은 뜻이 반드시 남보다 뛰어남이 있음을 안다. 천하의 큼과 성인(聖人)의 교화는 다같이 무궁한 것으로 이것은 오히려 밖에 나타난 상태요, 사람의 신체의 작음과 천하의 큼은 다같이 서로 같은 것으로 이것은 그 안에 있는 이치이다. 그 밖의 상태로부터 보면 동쪽으로는 부상(扶桑)까지, 서로는 곤륜(崑崙)까지, 북쪽은 불모의 땅까지, 남쪽으로는 눈이 오지 않는 곳까지 성군(聖君)의 교화가 젖어들고 미치고 입혀지게 된다. 그러나 온 천하가 혼연일체로 통일되는 일은 항상 적고 분열되는 일은 항상 많으므로 진실로 나는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안의 것으로 살펴본다면 근육과 뼈가 서로 묶이고, 정(情)과 성(性)은 미미하다. 그런데 심(心)이 그 가운데에 있으면서 우주를 포괄하고 사물에 대처하여 위세나 무력으로도 능히 떠나게 할 수 없으며, 지혜나 힘으로도 저지시키지 못하는 의젓한 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비록 편벽된 한 구석에 그윽하게 엎드려 있더라도 그 가슴속과 도량(度量)은 성군의 교화가 펼치는 사방의 먼 곳까지도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형의 뜻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인가. 나는 일찍이 사방으로 유람할 뜻이 있었으나 이제는 이미 싫증났다. 신축년 겨울에 병화(兵禍)를 피하여 동쪽으로 와서 처음으로 영해부(寧海府)에 올 수 있었다. 여기는 나의 외가로서 우리 형이 산다. 영해는 동쪽으로 큰 바다에 연접하여 일본과 이웃하고 있으며, 실로 우리나라의 동쪽 끝이다. 이제 내가 다행히 한 구석에 올 수 있어서 그 동쪽 끝의 끝까지를 보았다. 다른 것도 돌이켜 생각해 볼 터인데, 더구나 유사(流沙)와 상대되는 곳이겠는가. 그 위에서 술잔을 들면서 나에게 기(記)를 쓰라고 요구하기에 gms연(欣然)히 쓴다.” 하였다.

읍선루(揖仙樓) 부의 서쪽 2리에 있다. ○ 박효수(朴孝修)의 시에, “읍선루 멀리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더니, 부절(符節) 잊고 올라 보니 마음대로 할 수 있네. 버들 장막에 드리운 연기는 작은 말을 감추고, 연방(蓮房)은 물에 거꾸로 향하여 잠긴 물고기에 비친다. 좋은 노님이 이제부터 몇 년의 추억이 되려는가, 아름다운 경치가 도리어 싫어져 3일 동안 소원(疎遠)하였다네. 소남(召南) 황각로(黃閣老)에게 알리기 위하여, 절경(絶景)을 제영(題詠)한 봉서(封書)로 편지를 한 통 보내노라.” 하였다. 무가정(無價亭) 부의 성(城) 동쪽 3리에 있다. 이곡(李穀)이 지은 것이며, 남은 터가 아직도 있다. 정신방(貞信坊) 송현(松峴)의 남쪽에 있다. 예전에 정절이 굳은 여자가 있어서 수절하면서 그 절조를 고치지 않았으므로 그 동네[坊]를 정신(貞信)이라고 이름지어 표창한 것이다. 백석부곡(白石部曲) 부의 북쪽 25리에 있다. 창숙부곡(倉稤部曲) 부의 서쪽 30리에 있다. 묘곡부곡(畝谷部曲) 부의 북쪽 5리에 있다. 주곡부곡(主谷部曲) 청기현(靑杞縣)에 있다. 창석부곡(唱石部曲)ㆍ가하부곡(賈下部曲) 모두 영양현(英陽縣)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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