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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11.하원부(河源府)는 하양(河陽)

한부울 2011. 3. 16. 16:09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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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11.하원부(河源府)는 하양(河陽)이고,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

○惠州府(名梁化。領一州九縣)歸善(西平。附府)博羅(羅陽)長寧(新豐)永安(神江)海豐(陸安)陸豐(圭山)龍川(雷鄉)河源(古雲)連平州(密峰)和平(新浰)-地輿名目(一十九省)

雲南省(領十四府。四直隸州。二十七州。三廳。三十九縣)。 

○澂江府(名羅。伽。領二州二縣)河陽(俞元附府)江川。(步確)路南州(彌沙)新興州(研和)-地輿名目(一十九省)

 

 

 


하원부(河源府)에서 혜주부(惠州府)인가 징(澂:맑다)강부(澂江府)인가는 밝혀야 문제이다.

하원(河源)은 물의 수원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리적으로 광동성(廣東省)보다 운남성(雲南省)이 더 하원(河源地区)에 가깝다.

지금의 광동성(廣東省)하원시(河源市)는 근세기 1912년 민국시대 칭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河源

历史沿革

上古时代,河源市辖区先属沃土次州,后属杨州。

春秋战国时称百越之地,属楚。秦始皇三十三年(公元前214年),秦平百越,置南海郡,在东江中上游流域设置龙川县,首任县令是后来统一岭南,被汉高祖封为南越王的赵佗,县治设在现龙川县佗城镇,县域包括现在的河源市、惠州市、汕尾市,(部分)以及兴宁、五华、江西省寻邬县等地。

南朝齐永明元年(483年),龙川析土置河源县;明正德十三年(1518年),龙川析土置和平县;明崇祯七年(1634年),和平、河源析土置连平县;明隆庆三年(1569年)由长乐县(今五华县)、归善县(今惠阳、惠东县、古属川县)析土置永安县,民国三年改名紫金县。

河源地区汉朝属南海郡,两晋南北朝属东官郡,南梁天监二年(503年)属梁化郡,隋唐属循州(期间曾更名龙川郡、雷乡郡等)。

南汉乾享元年(917年)析循州分置祯州、循州,河源地区属循州。

宋天禧五年(1021年)改祯州为惠州。

明洪武二年(1369年)循州并入惠州。

河源地区在1913年属广东省革命政府东江行政委员会;新中国成立后,先后属东江行政委员会、东江行政专员公署、粤东行政公署、韶关地区、惠阳地区等。


特產

河源的土特產繁多,主要有:客家黃米酒、五指毛桃酒、龍川牛筋糕、米排粉、酸蘿蔔、萬綠湖天然礦泉水、龍川天然礦泉水、仙湖王茶、竹殼茶、火蒜、忠信花生、獼猴桃等。


河源

《漢書西域傳》“河有兩源,一出蔥岭,一出于闐,于闐河北流与蔥岭河合,東注蒲昌海,其水亭居,冬夏不增減,皆以為潛行地下,南出于積古,為中國河云,”考河源不見于經,言之者自漢張騫始,然所云于闐蔥岭兩源,杜佑、歐陽忞等俱斥其非,山海經、水經注所紀,又荒荒遠稽,唐劉元鼎、明釋宗泐所言稍合,又各不同,惟元潘昂霄為都寶撰河源志,清康熙間,屢遺使臣考求河源,測量地度,繪入輿圖,河實導源于青海之巴顏喀喇山東,名阿爾坦河,東北流三百余里,合鄂敦他拉諸泉,匯為查靈鄂靈二海子,回環曲屈,凡二千三百余里,入導河縣界,為中國黃河,蓋河源更出炎敦腦儿之西,視元都實所志,更得其真矣。[中國古代地名大詞典]


河源郡

隋置,唐廢,故城在今青海南,即吐谷渾赤水城也。[中國古代地名大詞典]


河源縣

漢龍川縣地,南齊置河源縣,以縣東北三百里有三河之源,故名,元末廢,明徙于壽春市,后遭水患,仍還舊治,屬廣東惠州府,清因之,民國初屬廣東潮循道。[中國古代地名大詞典]


澂江府,明洪武十五年(138年)改澂江路置,治河陽縣(今雲南澄江縣)。轄境約當今雲南省玉溪市紅塔區和澄江、江川二縣地。屬雲南省。清因襲之,1913廢。

澂chéng ◎ 同“澄”。[字典中澂字的解释]

这个县的名称到底是"澄江"还是"澂江"?问别人显得咱这个"文化人"知识不够"渊博",后来"百度"一下才知道,原来"澂"字是"澄"的异体字,二者同音同义,"澄江"即"澂江"。异体字的存在是汉字中较为普遍的现象,只是现在的一般人和二般人都不知道它的来历。

据史料记载:"澂江"古为梁州界,战国时期为滇国属地。"澂"字作为地名,是公元1276年元朝在这里设置"澂江路"开始的。

当时的"澂江路"统领河阳(今澂江)、江川、阳宗、普舍、研和(今玉溪研和)、邑市(今宜良古城一带)六县和新兴(今红塔区)、路南(今石林县)二州。

明洪武十五年(1382年),改澂江路为澂江府,领三县二州,即河阳县、江川县、阳宗县、新兴州、路南州。

清康熙八年(1669年),裁阳宗县入河阳县,澂江府实领两县两州。

辛亥革命后,民国二年(1913年)废府留县,就将河阳县改为澂江县,"澂江"之名便一直沿用下来。


澂江府:繁,難。隸迤東道。明,澂江府,領州二,縣三。康熙八年,省陽宗入河陽。西北距省治百二十里。廣二百三十六里,袤百七十五里。北极高二十四度四十二分。京師偏西十三度二十七分。領州二,縣二。河陽沖,繁。倚。康熙八年,省陽宗縣入焉。東:云龍山。西:虎山。北:羅藏。東南:赦人、天馬。東北:碌碌山。明湖一名陽宗湖,周七十餘里,合錦溪、日角溪、七古泉諸水瀦為湖,北入宜良,為大成江。南:撫仙湖,一名羅伽湖,周三百餘里,東入鐵池河,東流入路南。東北:玗扎溪,一名東大河,合鏡庄、北坡二泉,西南入撫仙湖。羅藏溪、立馬溪、石澗溪、西浦泉諸水并從之。東北有東關、中關、西關。江川沖,繁。府東南九十里。東:海瀛山,一名孤山,特立撫仙湖中。北:屈顙顛山,上有泉,三派分流,西入滇池,東入撫仙湖,南入星云湖。星云湖納上河、中河、下河諸水,周八十餘里,東由海門入河陽,匯為撫仙湖。兩湖相通,中有界魚石。北:關索岭關。驛一:江川。新興州繁。府南百二十里。東:連珠。西:馬拖羅山。南:玉乞山、研和東山。北:金蓮、落伽、臥牛。大溪自江川入,會香柏河、撒喇河,又西納羅么溪、羅木箐二水,至州西北為玉溪。玉溪河自江川入,納西河、窯溝水、牟溪、黑龍潭,又西會甸苴河、良江河、清水河諸水,南入習峨,即曲江上流也。北;刺桐關。路南州沖,繁。城內:鹿阜山。東南:遮口山。南:紫玉、香花。西南:竹子山,峰高千仞。大池江,即鐵池河上流,自陸涼西流入,逕州北境,納小河水入宜良,复自河陽流入州西南境,繞竹子山三面,納巴盤江水為鐵池河,又南納撫仙湖諸水入宁州。東南:革泥關。驛一:和摩。[清史稿 地理]


河阳县

武帝元封五年(前106年)置河阳县,故治在今孟州市槐树乡桑洼村。属河内郡。新莽改称河亭县。东汉、魏、晋、北魏均称河阳县。北魏太和中至东魏元象元年(公元538年)先后筑河阳三城,河阳三城遂为洛阳以北军事重镇。北齐天保七年(556)废河阳县为河阳关。隋开皇十六年(公元596年),置河阳县。唐武德初改为大基县,置河阳宫。八年,改称河阳县。咸亨五年(公元674年)复大基县,属洛州。玄宗朝以讳复为河阳县。开元初,为东京几邑,属河南府,武宗会昌三年(公元843年),设孟州,河阳为治所。徽宗政和二年(1112年)改属济源郡。 金天会六年(1128年)仍为孟州治所。明洪武初,省河阳入孟州。


河阳一县花(河陽一縣花) 

晋 潘岳 任 河阳 (今 河南省 孟县 西)县令,于一县遍种桃李,传为美谈。 北周 庾信 《枯树赋》:“若非 金谷 满园树,即是 河阳 一县花。”《白氏六帖·县令》:“ 潘岳 为 河阳 令,树桃李花,人号曰‘河阳一县花。’” 清 纪昀 《阅微草堂笔记·滦阳续录六》:“ 乾隆 庚寅,有翰林偶遇乩仙,因问宦途。乩判一诗曰:春风一笑手扶笻,桃李花开泼眼浓……茫不省为何语。俄御试翰林,以编修改知县。众谓次句隐用 河阳 一县花事,可云有验。” 《ZDIC.NET 汉 典 网》


河陽縣

春秋晉河陽邑,《春秋僖公二十八年》“天王狩于河陽,”戰國屬魏,漢置縣,晉省,后魏复置,北齊省,故城在今河南孟縣西三十五里,隋复置,移治北中府城北,在今孟縣南,金移今孟縣治,明廢。

南朝宋置,齊梁時廢,今湖北宜城縣地。

南齊置,今陝西南鄭縣地。

南齊置,今闕,當在四川境。

南詔置河陽郡,元置州,降為縣,故城在今云南澄江縣東,明徙置澄江府治,清因之,民國改國澄江縣。[中國古代地名大詞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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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안동 대도호부◎ 하양현(河陽縣)

신라 때 이름은 자세히 알 수 없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소속된 소(所)가 1이니, 안심(安心)이다.【예전에는 경주(慶州)에 속하였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영천(永川)에 이르기 4리, 서쪽으로 해안(解顔)에 이르기 14리, 남쪽으로 경산(慶山)에 이르기 13리, 북쪽으로 신녕(新寧) 임내(任內)인 이지현(利旨縣)에 이르기 2리이다.

호수는 1백 77호, 인구가 1천 8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명, 진군(鎭軍)이 22명, 선군(船軍)이 1백 60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허(許)·현(玄)·제(諸)·유(兪)이요, 속성(續姓)이 1이니, 김(金)이다.【경주(慶州)에서 왔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안심소(安心所)의 성이 6이니, 전(全)·신(申)·김(金)·박(朴)·허(許)·노(魯)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간전(墾田)이 2천 2백 16결이다.【논이 3분의 1이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닥나무·목면(木緜)·삼[麻]이며, 풍속이 묘종(苗種)하기를 숭상한다. 토공(土貢)은 꿀·밀[黃蠟]·호도·대추【여러 고을에서 제일(第一)이 된다. 】·칠·종이·자리[席]·지초·노루가죽·수달피(水獺皮)·돼지털이요, 약재(藥材)는 모란피(牧丹皮)이며, 토산(土産)은 입초(笠草)이다.

역(驛)이 1이니, 신역(新驛)이며,【본조 태조 병자년에 처음 설치하였다. 】봉화(烽火)가 1곳이니, 시산(匙山)으로, 현(縣) 서쪽에 있다.【동쪽으로 영천(永川)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남쪽으로 경산(慶山) 성산(城山)에 응한다. 】큰 방죽[大堤]이 3이니, 토산(吐山) 방죽【길이가 3백 24보인데, 관개하는 논이 80결이다. 】·큰 방죽[大堤]【길이가 2백 31보인데, 관개하는 논이 80결이다. 】·조장(條長) 방죽【길이가 1백 90보인데, 관개하는 논이 1백 결이다. 】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하양현(河陽縣)

동쪽으로는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6리, 남쪽으로 경산현(慶山縣) 경계까지 18리,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30리, 북쪽으로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6백 42리다.

[건치연혁]본래 고려의 하주(河州)였는데 성종(成宗) 14년에 자사(刺史)를 두었더니. 현종(顯宗)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 현(縣)을 만들어 경주부(慶州府)에 붙이고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산천]무락산(無落山) 현에서 12리에 있는 진산(鎭山). 초례산(醮禮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고려 태조가 동수(桐藪)에서 견훤(甄萱)을 치고, 이 산에 올라 하늘에 제사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공산(公山) 현의 서쪽 20리에 있다. 병풍암(屛風巖)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남천(南川) 현의 남쪽 5리에 있으며, 영천군(永川君) 동경도(東京渡) 하류(下流)이다. 대지(大池) 현의 동쪽에 있다. 동자지(童子池) 현의 남쪽에 있다.

[토산]대추[棗]ㆍ입초(笠草)ㆍ붕어[鯽魚]ㆍ은어[銀口魚].

[불우]신림사(新林寺) 무락산(無落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갈대 태워 6월 더위 돋우니, 금기(金氣 가을 기운)는 움츠리고 화기(火氣 여름 기운)는 가슴을 떠네 붉은 기운 우주에 뻗치니, 이글이글 새 가마 연 듯 어찌 풀과 나무만 타겠는가? 모래도 돌도 다 탄다네. 내 이슬 먹는 신선이 아닌 바에야, 어떻게 이 번거로움 피할 수 있으리. 마음속이 타고 있으니 이 답답함 언제나 가시려나. 근심스레 앉았으니 스스로 편치 않네. 조용히 더위 씻을 곳 생각한다면 돌아가는 길 멀다고 어찌 사양하리. 나귀 타고 다른 고을로 향하니, 내와 육지가 이렇게도 먼가. 모인 강물은 흰 비단이 비치듯, 겹친 산봉우리에는 푸른 옥을 묶은 듯. 서남쪽으로 통한 한 줄기 길, 꾸불꾸불 산허리를 감았네. 이끼를 밟고 고찰을 찾으니, 아름다운 경계라 속세를 떠나 있네. 연기와 안개 는 골짜기에 자욱하고, 측백나무 잣나무 공중에 솟았다. 뜰 앞에 냇물은 콸콸 흐르고, 난간 밖에 바람은 으스스하다. 초가집 암자엔 노승이 하나 방장(方丈 승의 거처하는 방)에서 우뚝하게 앉아 있다. 눈속의 원숭이가 저렇게 싸느랄까 서리맞은 갈매기가 저렇듯 고고할까. 향 연기는 가늘게 피어오르고, 꽃잎은 가볍게 흩날린다. 선(禪)을 닦은 마음 물욕은 버렸지만 옛 친구는 아직 차마 못 잊네. 조용히 마주보고 앉아서, 담소하며 맑은 바람(淸風 고상한 인격) 일으킨다. 서늘한 자리에 놀란 물결 일어나 찌는 더위 식혀주네. 갈건(葛巾)을 쓰니 머리 손질 귀찮고, 부채[葵扇]를 잡아 이따끔 흔드네. 조용한 분위기 내 맘에 맞아서, 돌아가고 싶은 생각 내키지 않네. 요란한 매미 소리에 저녁 노을 붉어 오고, 잔잔한 종소리에 아침 구름 훤해진다. 아침에 시를 읊으면 낮이 후딱 가고, 저녁에 취하면 밤새우기 일쑤지. 한 번도 지적 없는 소 학사(蘇學士 소동파), 삽수(霅水 땅 이름)에서 삼료(參廖)와 마주했다.” 하였다.

남태사(南泰寺) 시산(匙山)에 있다. ○ 김극기(金克己)의 시(詩)에, “말 위에서 시내와 산 백 겹이나 지나서, 황혼에야 비로소 범왕궁(梵王宮 절)에 도착했네. 눈 덮인 일천 봉우리는 반공중의 물결이요. 온갖 구멍에서 나는 바람 소리는 평지의 천둥일세. 시든 부들에 시름겹게 앉으니 몸이 떨려오고, 마른 삭정이를 쾌하게 태우니 다리가 활같이 굽네. 그대를 시켜 술을 청해 함께 마시니, 얼었던 뺨이 금시에 난만하게 붉어지네.” 하였다.

[고적]양량촌부곡(陽良村部曲) 현의 서쪽 12리에 있다. 이지부곡(貍只部曲) 현의 서쪽 8리에 있다. 안심소(安心所) 명산(明山)이라고도 한다. 공산(公山) 밑에 있다. 양량원(陽良院) 옛날 양량부곡(陽良部曲)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이지폐현(梨旨廢縣) 신영현(新寧縣) 서쪽 20리에 있다. 본래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였다. 고려 말년에 현으로 승격되어 영주에 소속되고,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이곳[하양]에 속했다. ○ 최해(崔瀣)의 비석에 쓰기를, “지원(至元) 후원년(後元年)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由) 등이 중국 서울에 갔다가 돌아올 제, 천후(天后)의 명령으로 부마이신 선왕에게 복명하여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이지은소는 옛날에는 현을 삼았었는데 중년에 이 고을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을 어겼다고 폐지하였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백금(白金 은이다)을 세금으로 받아 은소(銀所)라고 일컬은 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그곳 토인(土人)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중국 궁중에 내시로 있어 수고로운 일을 많이 했다. 그 공으로 그의 고향을 다시 현(縣)으로 승격시켜라.’ 하였다. 그래서 임금이 유사(有司)를 시켜 중국의 뜻대로 시행하였다. 이듬해에 나수가 사신이 되어 귀국, 고향을 영화롭게 했다. 본래의 터가 비좁다고 자리를 고을 서쪽으로 옮겼다. 본래의 터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고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다시 두어 처음과 같이 했다. 5년 뒤에 야선불화의 향함(香函)을 갖고 잇달아 와서 ‘이 고장이 회복되게 된 전말 사실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사왕(嗣王)에게 비문을 청했으므로 내가 늙었다고 사양할 수가 없어서 명(銘)을 지어 이 비를 보는 자들을 깨우쳐 준다. 나수(那壽)는 벼슬이 봉의대부 견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에 이르렀고, 야선불화(也先不花)는 중의대부 중서사승(中議大夫中瑞司丞)에 올랐으니, 성은 모두 이씨(李氏)다. 본국에서도 나수에게는 신안군(信安君)을 봉하고, 야선불화는 영리군(永利君)이라고 이름해서 삼대(三代)에 걸쳐 모두 추봉(追封)했다. 그 아들이 귀하게 되어 장차 중국 조정으로부터 추봉, 증직(贈職)될 것은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하였다. 명(銘)에 이르기를, “너의 나라 선군(先君)이 동쪽 나라를 정할 때에 그 산천(山川) 형세로 따르고, 크고 작은 터를 보아서 현(縣)을 세우고 주(州)를 두었다. 밝게 훈계하여 이르시기를, ‘조금도 더하고 덜함이 없게 하라.’ 하였으나, 때로는 운명이 스스로를 깎아냈다. 오직 이 이지현(梨旨縣)은 영주(永州)에 소속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옛날에 고을 유생[邑子]들이 스스로 중흥[修擧 회복함]하지 못하여서 온 고을이 엎어졌다. 죄를 간직하고 수치심을 당하고 폐지되어 은호(銀戶)로 삼았었다. 세월이 길고 길지만 특출한 자가 이 수치심을 씻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고향을 생각[狐正首岳 여우가 죽을 때 살던 굴쪽으로 머리를 둔다]하랴! 그 의리가 참으로 돈독함에 천후의 은혜가 넓고 두터우며[后命旣優] 국가의 은혜 또한 두터웠다. 아, 나는 알았노라. 이치란 진실로 확장되고 단축된다는 것을 한 사람이 똑똑지 못하여 몇 사람이 굴욕을 받았다든가! 오랜만에 회복되는 데는 이 두 사람의 힘이 컸으니 그 사람의 옳고 그른 것이 혁파되기도 하고 그대로 있기도 한다. 변화를 관찰하려거든 여기에 새긴 글을 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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