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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광주부(廣州府)는 남해(南海) 와 신녕(新寧)

한부울 2011. 3. 16. 16:05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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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9.광주부(廣州府)는 남해(南海)이고,

10.광주부(廣州府)는 신녕(新寧)이고,

廣東省(領十府。三直隸州。七州。八十縣)。

廣州府(名羊城。十四縣)南海(胥江附府)番禺(熙安。附府)順德(龍潭)東莞(南頭)從化(橫潭)龍門(東澗)新寧(上川)增城(綏寧)香山(陽江)新會(盈允)三水(高安)清遠(中宿)新安(寶安)花縣(花山)-地輿名目(一十九省)

 

 남해(南海)

 

 

 

신녕(新寧)

 

 


廣州,是中國古代的一個行政區劃,其範圍曾覆蓋今天的廣東、廣西兩省。

東吳政權分東漢的交州為交、廣兩州,北部為廣州,郡治在番禺(今廣州市中心),廣州的範圍橫跨今日廣西、廣東兩省,只有南部今天湛江市(廣州灣)、北海市、玉林市、欽州市範圍屬於交州,北部桂林市、賀州市、韶關市範圍屬於荊州。兩晉基本沿用了三國建置,但到了南朝後期增設了大量州置,廣州的範圍也大大縮小。


隋朝廢州置時,廣州成為南海郡。之後唐朝恢復廣州之名,但是範圍已經縮小到了今天廣州、佛山、東莞、清遠,以及惠州的部分。此後廣州之名一直沿用至今,但是其範圍已經與三國、兩晉時期的廣州有很大的區別。至民國才正式成立廣州市政府,將當時的廣府(現時的廣州老四區)定名為「廣州市」。1949年10月14日,中華人民共和國成立廣州市人民政府。


"广州府",辖南海县(约今之佛山市南海区、禅城区、广州市荔湾区全部、白云区部分、原越秀区全部;县城即广州旧城西半部)、番禺县(约今之广州市番禺区全部、南沙区全部、海珠区部分、白云区部分、天河区部分、原东山区全部;县城即广州旧城东半部)、顺德县(约今之佛山市顺德区)、东莞县(约今之东莞市)、从化县(约今之从化市)、龙门县(约今之惠州市龙门县)、新宁县(约今之台山市)、增城县(约今之增城市)、香山县(约今之中山市、珠海市、澳门特别行政区)、新会县(约今之江门市蓬江区、江海区、新会区)、三水县(约今之佛山市三水区)、清远县(约今之清远市)、新安县(约今之深圳市、香港特别行政区)、花县(约今之广州市花都区)共14县。“广州府”这一史称,一直沿用至民国初年,后因“大总统谕”宣布废除州、府、厅的旧称而停用。清史稿对“广州府”的记载如下:   

广州商埠,道光二十二年英南京条约订开。   


南海

冲,繁,疲,难。倚。府西偏。粤之山,五岭据其三。北:越秀。西北:灵洲。西南:西樵山。北江自三水入,东南流,东别出为紫洞水,至番禺,合珠江入顺德。西江自三水入,东南过九江,亦入顺德。西北马迳水,首受芦包水,南与三江水会。屈东北流,左合黄洞水,南流溪水自番禺西南注之。南出石门山为石门水,过府治西南,屈东为珠江,入番禺。有九江浦主簿。三江、金利、神安、黄鼎、江浦、五斗口六巡司。西粤汉,西南三佛铁路。


新宁

疲,难。府西南三百六十里。北:三台。东:百峰山。西南:大隆山。南滨海。海中有上川洲、下川洲。北:长沙河,即恩平江,自开平入,东南流,合南门河,西北合紫霞河,入新会。东南:泥涌河,南合牛角水,至烽火角入海。西:那扶水,亦南至狮子洲入海。又有潭江河,康熙二十六年总督吴在南凿,西引泥涌河,东北达新会崖门,以通舟楫。温泉、醴泉在西南。广海寨,县丞驻。有上川盐巡司。有公益商埠。宁阳铁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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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경상도 / 진주목◎ 곤남군(昆南郡)

본디는 곤명현(昆明縣)이다. 신라 때의 이름은 자세히 알 수 없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는데, 본조(本朝) 금상(今上)이 즉위한 원년(元年) 기해에 어태(御胎)를 현(縣)에서 20리 북쪽 소곡산(所谷山)에 안치하고, 남해현(南海縣)을 곤명현(昆明縣)에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시켰다. 남해현(南海縣)은 본디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인데,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야산국(轉也山郡)을 두었는데, 경덕왕이 남해군(南海郡)으로 고쳤고, 현종 무오년에 현령관(縣令官)을 두었다. 공민왕이 무술년에 왜적으로 인하여 땅을 잃고,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대야천 부곡(大也川部曲)에 교거(僑居)하였는데, 본조 태종 갑오년에 하동(河東)과 합하여 하남현(河南縣)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하동현(河東縣)을 설치하고 진주(晉州) 임내(任內)인 금양 부곡(金陽部曲)을 남해(南海)에 붙여서 해양현(海陽縣)으로 일컬었으며, 정유년에 금양(金陽)을 도로 진주(晉州)로 붙이고 다시 남해현(南海縣)을 삼았다가, 기해년에 곤명현(昆明縣)에 합하였다. 난포현(蘭浦縣)은 본디 내포현(內浦縣)이고, 평산현(平山縣)은 본디 서평산(西平山)이다.【위의 두 현은 모두 바다 섬인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남해군의 영현(領縣)을 만들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인물(人物)이 모두 없어지고 다만 토지만이 있을 뿐이다. 】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하동(河東)에 이르기 6리, 남쪽으로 하동(河東)에 이르기 14리, 북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9리이다.

호수는 2백 70 단(單) 1호, 인구가 1천 3백 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1명, 진군(鎭軍)이 9명, 선군(船軍)이 1백 36명이다.

곤명(昆明)의 성이 3이니, 유(兪)·전(全)·문(文)이요, 현(縣)을 세운 뒤의 성이 2이니, 현(玄)·백(白)이며, 내성(來姓)이 3이니, 강(康)·유(柳)【모두 진주(晉州)에서 왔다. 】·조(趙)【함안(咸安)에서 왔다. 】이다. 남해(南海)의 촌락성(村落姓)이 1이니, 제(諸)요, 망성(亡姓)이 4이니, 배(裵)·김(金)·백(白)·진(陳)이다. 난포(蘭浦)의 성이 2이니, 정(鄭)·박(朴)이요, 촌락성이 1이니, 고(高)이며, 평산(平山)의 성이 3이니, 조(趙)·배(裵)·백(白)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조(曺)이다. 없어진 다음향(多音鄕)의 속성(續姓)이 1이니, 문(文)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8백 24결이다.【논이 조금 많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콩·조·감·송이(松茸)·목면(木綿)·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표고버섯·문어·홍합·지초·칠·사슴가죽·삵가죽·노루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생포(生鮑)·미역·은구어·해삼이다. 염소(鹽所)가 3이니, 모두 군(郡) 남쪽에 있다.【염창(鹽倉)이 있고, 염장관(鹽場官)이 감독해 지킨킨다. 】자기소(磁器所)가 2이니, 하나는 군(郡) 남쪽 포곡리(蒲谷里)에 있고,【중품이다. 】하나는 군(郡) 동쪽 노동(蘆洞)에 있다.【중품이다. 】

역(驛)이 1이니, 완사(浣沙)이다.【본래는 남해도(南海島) 덕신역(德新驛)이었는데, 왜적으로 인하여 육지로 나왔다. 】평산포(平山浦)는 남해도 남쪽에 있다.【본군(本郡)에서 90리 거리인데, 노량(露梁)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수어한다. 】봉화가 3곳이니 금산(錦山)은 남해도 동쪽에 있다.【서쪽으로 본도(本道) 소흘산(所屹山)에 응한다. 】소흘산(所屹山)【서쪽으로 망운산(望雲山)에 응한다. 】망운산(望雲山)은 남해도 남쪽에 있다.【북쪽으로 진주(晉州) 금양 부곡(金陽部曲)의 양둔(陽芚)에 응한다. 】남해도(南海島)는 수로(水路)로 1리 2백 48보이다.【백성들이 들어가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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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 진주목 ◎ 하동현(河東縣)

본디 한다사군(韓多沙郡)인데, 경덕왕이 하동군(河東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현종 무오년에 진주(晉州)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명종 임진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갑오년에 남해현(南海縣)을 합하여 하남 현령(河南縣令)으로 일컫다가, 을미년에 다시 나누어서 하동 현감(河東縣監)을 두었다. 별호(別號)는 청하(淸河)이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곤남(昆南)에 이르기 20리, 서쪽으로 악양현(岳陽縣)에 이르기 20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임내인 금양(金陽)에 이르기 4리, 북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21리이다.

호수는 3백 46호, 인구가 1천 1백 8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5명, 진군(鎭軍)이 11명, 선군(船軍)이 1백 58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정(鄭)·곽(郭)·이(李)·하(河)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간전(墾田)이 1천 2백 72결이다.【논이 3분의 2가 못된다. 】토의(土宜)는 벼·기장·조·뽕나무·삼[麻]·목면(木綿)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표고버섯·감·건합(乾蛤)·칠·종이·왕대[簜]·사슴가죽·노루가죽·삵가죽이며,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방풍(防風)이요, 토산(土産)은 작설다(雀舌茶)·생포(生鮑)·은구어·문어·모래무지·홍어(洪魚)·우무[牛毛]·세모(細毛)·미역·주토(朱土)·대구어이다. 어량(魚梁)이 3곳이요, 염소(鹽所)가 1이니, 진주(晉州) 지경에 있다.【고을 사람들이 내왕하면서 굽는다. 】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3백 79보인데, 안에 우물 5, 못 1이 있다. 】역(驛)이 3이니, 횡포(橫浦)·율원(栗原)·마전(馬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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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현(南海縣)

동쪽으로 진주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쪽으로 바닷가까지 15리이며, 남쪽으로 바닷가까지 36리이고, 북쪽으로 노량까지 38리이며, 서울까지는 1천 45리 거리이다.

[건치연혁]본래 바다 가운데의 섬이었다. 신라 신문왕(神文王)이 처음으로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 현종이 현령을 두었던 곳이나, 공민왕 때에 왜적에게 땅을 빼앗기고, 진주 대야천부곡(大也川部曲)에 우접하였다. 본조 태종조에 하동과 합쳐서 하남현(河南縣)이라 일컫다가 뒤에 다시 하동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을 내속시켜서 해양현(海陽縣)이라 일컬었다. 얼마 안 되어 금양을 진주에 환속(還屬)하고 다시 남해라 하였으며, 세종조에는 곤명현과 합쳤다가 다시 쪼개고 그대로 현령을 두었다. 전하(殿下) 4년에 현 사람이 구례(求禮) 백성 배목인(裵目仁)과 서로 연결해서 모반했으므로 현감으로 강등시켰다.

[산천]망운산(望雲山) 현 서쪽 2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이다. 소흘산(所訖山) 현 남쪽 30리 지점에 있다. 원산(猿山) 현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 녹두산(鹿頭山) 현 북쪽 23리 지점에 있다. 금산(錦山) 현 동쪽 25리 지점에 있으며 목장이 있다. 성현(城峴) 현 남쪽 24리 지점에 있으며 요해처이다. 미조항(彌助項) 현 동남쪽 87리 지점에 있다. 노량(露梁) 현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 적량(赤梁) 현 동쪽 41리 지점에 있다. 동천곶(凍川串)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둘레가 55리이며 목장이 있다. 상주포(尙州浦) 현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

관음포(觀音浦) 현 북쪽 21리 지점에 있다. 신우 때에 원수 정지(鄭地)가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한 것은 이 싸움에서 처음이었다.

○ 정이오의 시에, “망운산 아래에서 돛배 바람 바라보니, 동서로 오가는 배가 통행한다. 영웅의 당시 일을 묻지 마소. 지금도 사람들이 첫째 공이라 기쁘게 말한다네.” 하였다.

대포(大浦) 현 북쪽 15리 지점에 있다. 파천포(巴川浦)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다. 난포(蘭浦)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아울러 어장(魚場)이 있다. 차산포(車山浦)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다. 평산포(平山浦)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두음포(豆音浦) 현 동쪽 22리 지점에 있다. 염전포 (鹽田浦)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호을포(湖乙浦)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모답포(毛沓浦) 현 북쪽 25리 지점에 있다. 가을곶포(加乙串浦) 현 북쪽 30리 지점에 있다. 이상은 모두가 염밭이다. 소도(蘇島) 현 동쪽 6리 지점에 있으며, 온 섬이 모두 동백이다.

[토산]살조개[江瑤柱]ㆍ문어ㆍ홍어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ㆍ대구[大口魚]ㆍ석류ㆍ유자ㆍ석이버섯[石蕈]ㆍ미역ㆍ애끼찌[弓幹桑]ㆍ비자(榧子)ㆍ닥종이[楮]ㆍ청어ㆍ모래무지[鯊魚]ㆍ홍합ㆍ송이[松蕈]. 『신증』 낙지[絡締]ㆍ준치[眞魚]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농어ㆍ해삼ㆍ치자.

[불우]보리암(菩提庵)ㆍ상도솔암(上兜率庵)ㆍ중도솔암(中兜率庵) 모두 금산에 있으며 남쪽 바다를 굽어본다.

[고적]고현 산성(古縣山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1천 7백 40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관당성(官堂城) 현 북쪽 17리 지점에 있다. 석축이며 둘레는 7백 20척이고, 높이는 9척이다. 난포 폐현(蘭浦廢縣) 본래 신라 내포현(內浦縣)이며 본 섬 안에 있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동쪽 21리 지점에 있다. 평산 폐현(平山廢縣) 본래 신라 평서산현(平西山縣)인데, 서평(西平)이라 하기도 한다.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내속시켰으며,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 우산소(于山所)ㆍ미조항고진(彌助項古鎭)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8백 35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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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광주부(廣州府)는 신녕(新寧)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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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대도호부◎ 신녕현(新寧縣)

본디 사정화현(史丁火縣)인데, 경덕왕이 신녕(新寧)으로 이름을 고쳐 임고군(臨皐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 무오년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공양왕 2년 경오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경덕왕이 매열차현(買熱次縣)을 고쳐서 민백현(黽白縣)으로 하였는데, 지금 신녕현(新寧縣)에 합속(合屬)시켰다.”고 하였다. 】속현(屬縣)이 1이니, 이지은소(梨旨銀所)이다. 본디 영주(永州)에 붙였었는데, 고려 말에 이지현(梨旨縣)으로 승격시켜 그대로 영주(永州)에 붙였다가, 본조 태조 갑술년에 이에 내속(來屬)시켰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영천(永川)에 이르기 14리, 서쪽으로 의흥(義興) 임내(任內)인 부계(缶溪)에 이르기 15리, 남쪽으로 하양(河陽)에 이르기 26리, 북쪽으로 의흥(義興)에 이르기 12리이다.

호수는 3백 82호, 인구가 1천 3백 단(單) 1명이며, 이지(梨旨)의 호수는 88호, 인구가 1백 98명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17명, 진군(鎭軍)이 33명, 선군(船軍)이 1백 48명이다.

본현(本縣)의 토성(土姓)이 4이니, 이(李)·박(朴)·정(丁)·사(史)이며, 이지(梨旨)의 속성(續姓)이 3이니, 이(李)·윤(尹)·안(安)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고, 간전(墾田)이 2천 47결이다.【논이 3분의 1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조·기장·콩·보리·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칠·종이·자리[席]·지초·여우가죽·노루가죽·돼지털이며, 약재(藥材)는 맥문동(麥門冬)이요, 토산(土産)은 신감초(辛甘草)·송이버섯·입초(笠草)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현 동쪽 25리 되는 잉제(芿堤)에 있다.【하품이다. 】

역(驛)이 1이니, 장수(長壽)이며, 봉화가 1곳이니, 여음동(餘音同)으로, 본현 서쪽에 있다.【동쪽으로 영천(永川) 성황당(城隍堂)에 응하고, 북쪽으로 부계(缶溪) 토현(吐峴)에 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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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녕현(新寧縣)

동쪽으로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 10리, 남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5리, 서쪽으로 의흥현(義興縣)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는 같은 현(縣) 경계까지 17리, 서울과의 거리는 5백 2리다.

[건치연혁]본래 신라(新羅)의 사정화현(史丁火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임고군(臨皐郡)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주부(慶州府)에 소속시켰고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본조(本朝)에서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치고 장수역(長壽驛)으로 소재지[治所]를 옮겼다. 연산(燕山) 3년에 고을의 아전들이 현감(縣監) 길수(吉脩)의 사나운 정치가 괴로워서 땅을 비우고 도망하니 옆 고을에 붙였다가 9년에 복구시켰다.

[산천]화산(花山) 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공산(公山) 현의 서쪽 14리에 있다. ○ 정덕(正德) 경진(庚辰)에 왕세자의 태(胎)를 봉안했다. 보현산(普賢山)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한다. 현의 북쪽 30리 청송부(靑松府) 경계에 있다. 서천(西川) 현의 서쪽 1리에 있다. 근원이 공산(公山)에서 나와서 영천군(永川郡) 북천(北川)에 합류(合流)된다. 자을아천(玆乙阿川) 옛 신녕현(新寧縣)에 있다. 곧 영천군(永川郡) 북천(北川) 상류(上流)다. 여질동령(餘叱洞嶺) 현의 서쪽 10리에 있다. 갑현(甲峴)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꿀[蜂蜜]ㆍ인삼ㆍ옻[漆]ㆍ입초(笠草)ㆍ지황(地黃)ㆍ맥문동(麥門冬).

[불우]부귀사(富貴寺) 공산(公山)에 있다.

[고적]민백현(黽白縣) 본래 신라(新羅)의 매숙차현(買熟次縣)이던 것을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뒤에 현에 합쳐서 소속시켰다. 이지폐현(梨旨廢縣) 현의 서쪽 20리에 있으니 본래 영주(永州) 이지은소(梨旨銀所)다. 고려 말년에 현(縣)으로 승격시켰고 인하여 영주에 소속시켰으며, 본조(本朝) 태조(太祖) 때에 여기로 붙였다. ○ 최해(崔瀣)의 비석에 쓰기를, “지원(至元) 후 원년(元年)에 상호군(上護軍) 안자유(安子有) 등이 중국 서울에 갔다가 돌아와 천후(天后)의 명령으로 부마(駙馬)인 선왕에게 복명하여 지위를 말하기를, ‘영주(永州)의 이지은소(梨旨銀所)는 옛날에는 현이었는데 중년에 이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국가의 명령을 어겼다 해서 폐지하고 백성들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때 백금(白金 은이다)을 세금으로 받아 은소(銀所)라고 일컬은 지가 오래였는데 이제 그곳 토인(土人)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부터 중국 궁중에 있어 수고가 많았으며, 그 공으로 향관(鄕貫)을 승격시켜서 다시 현(縣)으로 삼으라.’ 하였다.” 했다. 그리하여 임금이 유사(有司)를 시켜 황제 뜻대로 시행하게 했다. 이듬해에 나수(那壽)가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로 돌아와서 고향의 영광이 되었는데, 옛 곳이 비좁다 해서 자리를 잡아 고을 서쪽으로 옮겼다. 먼저 있던 곳에서 몇 발자국 떨어졌다. 현사(縣司)와 장리(長吏)를 둔 것은 모두 처음과 같았다. 또 그 뒤 5년에, 야선불화(也先不花)가 향을 싸가지고 잇따라와서 본현(本縣)이 먼저대로 회복되고 옮기게 된 전말 기록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사왕(嗣王)께 비문에 쓰기를 청했다. 내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가 없기에 명(銘)을 지어 뒤에 이 글을 읽는 자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나수(那壽)는 벼슬이 봉의대부 견용태감(奉議大夫甄用太監)에 이르렀고, 야선불화는 중의대부 중서사승(中議大夫中瑞司丞)에 올랐다. 성은 모두 이씨(李氏)다. 본국(고려)에서 나수를 신안군(信安郡)에 봉하고 야선불화를 영리군(永利君)이라는 이름으로 삼대(三代)에 걸쳐 추봉(追封)했다. 그 아들이 귀하게 된 때문에 다시 중국 조정의 봉함과 증직(增職)이 마땅히 있었지만 여기에는 생략한다. 명(銘)에 쓰기를, “우리나라 선군(先君)께서 동쪽 나라 정하시고, 산천(山川) 형세 따라 크고 작은 터를 잡아 현(縣)을 세우고 주(州)를 두었으며, 밝게 교훈하여 이르시기를, ‘말씀에 더하고 덜함이 없게 하라.’ 하셨는데, 혹시는 운명을 스스로 깎아댔다. 이에 이지현(梨旨縣)은 영주(永州)에 소속되었는데 전하는 말에 옛날 이 고을 사람이 자기 몸을 닦지 못한 이가 있으므로 온 고을이 엎어졌다. 죄를 간직하고 수치를 계승하여 폐해서 은호(銀戶)를 삼아서 세상 세월 오래 되었으나 뛰어나지 아니하면 밝히 써서 줄 자 누구더냐. 여우도 죽을 때는 언덕으로 머리 두나니, 이 의리는 참으로 두터운 것이다. 황제의 명령이 이미 우악하시니 국가의 은혜 또한 두텁다. 아, 나는 알았노라. 이치가 진실로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함을 한 지아비의 총명치 못함으로 굴욕 받은 자 몇 사람이더냐. 오랜 뒤에 능히 회복된 것은 이 두 사람의 힘을 입은 것이니, 그 사람의 잘하고 못하는 것으로 그 혁파하기도 하고 그대로 두기도 한다. 변하는 것을 잘 보려거든 여기 새긴 글을 보라.” 하였다. 고신녕(古新寧) 지금 고을의 동쪽 25리에 있다. 신촌부곡(新村部曲) 보현산(普賢山) 남쪽에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