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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7.남평부(南平府)는 영천(永川)

한부울 2011. 3. 16. 15:58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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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尙道]

7.남평부(南平府)는 영천(永川)이고,

福建省(領十府。二州。六十二縣)。 

延平府(名南劍。領六縣)南平(劍浦)將樂(金泉)沙縣(沙村)尤溪(翠帷)順昌(富屯)永安(斗山)-地輿名目(一十九省)

四川省(領十一府。九直隸州。十一州。百十一縣)。 

重慶府(名渝州。領二州。十一縣)巴縣(江州附府)江津(僰溪)長壽(樂溫)永州(英井)榮昌(昌元)綦江(南平)南州(隆化)合州(赤水)湆州(漢平)銅梁(巴川)大足(昌州)壁山(油溪)定遠(不照)-地輿名目(一十九省)

 

[延平府]

 

[重慶府]


南平市

历史沿革

汉建安初(196-205)境内始置汉兴(浦城)、南平、建安(建瓯)、建平(建阳)4县,属会稽郡。三国吴永安三年(260)置建安郡,治所建安(今建瓯)。晋元康元年(291)属江州。南  茫荡山

朝陈永定初(约557)属闽州,后属丰州。隋开皇九年(589)废郡为县,属泉州(州治今福州),大业三年(607)属建安郡(郡治今福州)。

唐武德元年(618)以原建安郡地置建州,天宝元年(742)复置建安郡,乾元元年(758)改为建州,属江南东道。

五代闽龙启二年(934)属闽;天德三年(945)改建州为永安军,旋改忠义军;南唐保大四年(946)置剑州,州治剑(浦今南平)。

宋开宝八年(975)改忠义军为建州,太平兴国四年(979)改剑州为南剑州,五年(980)置邵武军,治所邵武,端拱元年(988)改建州为建宁军,绍兴三十二年(1162)改建宁军为建宁府,属福建路。

元至元十三年(1276)改邵武军为邵武路,十五年(1278)改建宁府为建宁路,改南剑州为南剑路,大德六年(1302)南剑路改为延平路,均属江浙行中书省福建道宣慰使司(至正十六年即1356年为福建省)管辖。

明代境内并置建宁、延平、邵武3府。清亦同。

清末为延建邵道(驻南平),领3府。

延平府南平、顺昌、将乐、沙县、尤溪、永安6县和上洋厅,建宁府领建安、建瓯、建阳、崇安、浦城、政和、松溪7县,邵武府领邵武、光泽、泰宁、建宁4县。

1913年废府制,为北路道(驻南平,领16县)。

1914年为建安道。1925年废道,直属福建省。

1933年11月为“中华共和国人民革命政府”(即“福建人民政府”)延建(闽上)省,

1934年境内为第三、第九、第十行政督察区,

1935年改为第二、第三行政督察区。1940年改水吉特区为县。 


建宁府  

地处福建省北部。南宋高宗绍兴32年(1162年),升建州为建宁府。元世祖至元元年(1264年),隶属江浙行中书省杭州,15年(1278年),改为建宁路,属福州行中书省,置录事司,17年(1280年),改为建宁路总管府;顺帝至正22年(1362),置建宁分省。明太祖洪武元年(1368年),罢录事司恢复建宁府。清承明制。   

清建宁府治建安、瓯宁(今福建省建瓯市)。辖:建安(县治在今福建省建瓯市区)、瓯宁(县治在今福建省建瓯市区)、建阳(今福建省建阳市)、崇安(今福建省武夷山市)、浦城(今福建省浦城县)、政和(今福建省政和县)、松溪(今福建省松溪县)共7县。   

1913年废建宁府。


邵武府  

地处福建省西北部。明洪武元年(1368)改邵武路为邵武府。清承明制。府治邵武(今福建省邵武市)。下辖:邵武(今福建省邵武市)、光泽(今福建省光泽县)、泰宁(今福建省泰宁县)、建宁(今福建省建宁县)共4县。

1913年废除。


永川市 - 历史沿革

唐大历十一年(776年)置县。北宋初,永川县仍属昌州。宋真宗咸平四年(1001年),四川分益、利、梓、夔州路,永川县隶梓州路;宋徽宗重和元年(1118年)改梓州路为潼川府路,昌州永川县隶属之。元至元二十年(1283年),昌州废,永川、昌元、大足等县辖地并合州。至元二十二年(1285年)改隶重庆路合州。元末,明玉珍起义(元至正二十三年,1363年)建都重庆(国号“夏”),复置大足县辖永川县地。明洪武六年(1373年),复置永川县,属重庆路。康熙元年(1662年),省璧山县入永川县。雍正六年(1728年)复置璧山县,永川仍专治。嘉庆时,永川县属四川省川东道重庆府。 

辛亥革命时,永川县属(重庆)蜀军政府。民国元年(1912年)3月12日,成渝两军政府合并成立四川都督府,设重庆镇抚府,永川属之。6月,重庆镇抚府撤销,永川县直属四川都督府。民国2年,废府设道,永川县属四川省川东道行政公署,民国3年6月,改为东川道行政公署,后更名为东川道道尹公署,永川均属之。民国18年撤道,永川县直属四川省政府。民国24年,四川省第三行政督察区专员公署设永川县。民国30年专员公署迁巴县,永川县仍属之。


重庆府  

地处重庆市南部。

南宋孝宗淳熙16年(1189年),光宗赵享封为恭王,以藩王受禅登帝位,自是“双重喜庆”,将恭州升为重庆府,重庆因此得名。

元代,四川行中书省领重庆路等9路,省下设四道宣慰司,四川南道宣慰司驻重庆;顺帝至正10年(1357年),明玉珍入蜀,攻占重庆,分兵夺取四川各地,16年(1363年),明玉珍称帝,定重庆为都,国号夏。

明太祖洪武4年(1371年),明灭夏,置重庆府。   

明清均府治巴(在今重庆市渝中区)。

清末管辖巴(县治在今重庆市渝中区)、江津(县治在今重庆市江津区)、长寿(县治在今重庆市长寿区)、永川(县治在今重庆市永川区)、荣昌(今重庆市荣昌县)、綦江(今重庆市綦江县)、南川(县治在今重庆市南川区)、铜梁(今重庆市铜梁县)、大足(今重庆市大足县)、璧山(今重庆市璧山县)、定远(县治在今四川省武胜县城区)共11县;合(州治在今重庆市合川区)、涪(州治在今重庆市涪陵区)共2散州;江北(厅治在今重庆市渝北区)1散厅。 


渝州历史

公元前11世纪,周武王封宗姬于巴,以江州(今重庆)为府,后几易其名(改渝州、恭州),为历朝重镇。南宋时,赵敦封恭州王,后即帝位,自诩“双重喜庆”,遂于1189年升恭州为重庆府,重庆由此而得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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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안동 대도호부◎ 영천군(永川郡)

경덕왕이 절야화군(切也火郡)을 임고군(臨皐郡)으로 고치고, 또, 도동화현(刀冬火縣)을 도동현(道同縣)으로, 골화현(骨火縣)을 임천현(臨川縣)으로 고쳐서 모두 임고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는데, 고려 때에 이르러 세 현(縣)을 합하여 영주(永州)로 만들어, 현종 무오년에 경주(慶州) 임내(任內)에 붙였다가, 명종 2년 임진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고, 뒤에 승격시켜 지영주사(知永州事)로 삼았다. 본조 태종 계사년에 예(例)에 의하여 영천군(永川郡)으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익양(益陽),【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혹은 영양(永陽)이라고도 한다. 고려 태조 본기주(本紀註)에 이르기를,

“고울부(高鬱府)가 지금의 영주(永州)라.”

하였다.

진산(鎭山)은 모자(母子)이다.【산등성이의 동쪽과 서쪽의 여러 골짜기 물이 군(郡)의 서남(西南) 모퉁이에서 합하여, 군(郡)이 두 물[水] 안에 있는 까닭으로 영(永)으로 이름하였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안강(安康)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해안(解顔)에 이르기 40리, 남쪽으로 자인(慈仁)에 이르기 27리, 북쪽으로 안덕(安德)에 이르기 56리이다.

호수는 8백 63호, 인구가 3천 6백 72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9명, 진군(鎭軍)이 90명, 선군(船軍)이 3백 36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황보(皇甫)·신(申)·이(李)·윤(尹)이며, 내성(來姓)이 5이니, 송(宋)·김(金)·유(兪)·최(崔)·심(沈)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이며, 간전(墾田)이 7천 4백 32결이다.【논이 10분의 4가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조·콩·보리·목면(木綿)·뽕나무·삼[麻]이며, 토공(土貢)은 호도·지초·칠·종이·자리[席]·노루가죽·여우가죽·삵가죽·돼지털[猪毛]이요, 약재(藥材)는 천문동(天門冬)·맥문동(麥門冬)·백자인(栢子仁)이며, 토산(土産)은 입초(笠草)·은구어(銀口魚)·황어(黃魚)·송이버섯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군(郡) 동쪽 원산곡리(原山谷里)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군(郡) 동쪽 포배곡리(蒲背谷里)에 있다.【모두 하품이다. 】

명원루(明遠樓)【객사(客舍) 동남쪽 모퉁이에 있는데, 삼면(三面)이 밝게 통하고, 밑에는 큰 내가 있어 남쪽으로 흐른다. 】동수루(東水樓)【청통역(靑通驛) 동남쪽 돌벼랑 위에 있는데, 두 물이 남쪽에서 합류한다. 】역(驛)이 2이니, 청통(淸通)과 신역(新驛)이다. 봉화(烽火)가 3곳이니, 방산(方山)은 군(郡)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경주(慶州)의 서쪽 주사(朱砂)에 응하고, 서쪽으로 본군(本郡) 성황당(城隍堂)에 응한다. 】성황당(城隍堂)【동쪽으로 방산(方山)과 소산(所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서하양(西河陽) 시산(匙山)에 응하며, 북쪽으로 신녕(新寧)의 여음동(餘音同)에 응한다. 】소산(所山)은 군(郡) 동쪽에 있다.【동쪽으로 안강(安康)의 형산(兄山)에 응한다. 】큰 방죽[大堤]이 4이니, 청촌(菁村) 방죽【길이가 4백 95보, 너비가 1백 72보이며, 관개하는 땅이 71결이다. 】·예곡(乂谷) 방죽【길이 3백 30보, 너비 1백 87보, 관개하는 땅이 1백 50결이다. 】·삼일(三日) 방죽【길이 5백 43보, 너비 2백 5보, 관개하는 땅이 90결이다. 】·삼귀(三歸) 방죽【길이 3백 60보, 너비 1백 28보, 관개하는 땅이 26결이다. 】이다.

월경처(越境處)가 2이니, 경주(慶州) 임내(任內)인 북안곡 부곡(北安谷部曲)이 군(郡) 동남촌(東南村)으로 넘어 들어왔고, 신녕(新寧)의 속현(屬縣) 이지(利旨)가 군(郡) 서촌(西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영천군(永川郡)

동쪽으로는 경주부(慶州府) 안강현(安康縣) 경계까지 42리요, 남쪽으로는 같은 부(府) 자인현(慈仁縣) 경계까지 33리요, 서쪽으로는 하양현(河陽縣) 경계까지 23리요, 북쪽으로는 임내 신녕현(任內新寧縣) 경계까지 25리요, 서울과의 거리는 6백 87리이다.

[건치연혁]본래 신라의 절야화군(切也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임고(臨皐)로 고쳤고, 고려 초년에 도동(道同)ㆍ임천(臨川) 두 고을을 합쳐서 영주(永州) 고울부(高鬱府)라고도 한다. 라고 고쳤다. 성종(成宗)이 자사(刺史)를 두었고, 현종(顯宗)은 경주(慶州)에 붙였고, 명종(明宗)은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승격시켜서 지주사(知州事)로 삼았으며,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삼았다.

[풍속]풍속은 평이한 것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있다.

[형승]청계석벽(淸溪石壁) 정몽주(鄭夢周)의 시에 있다. 이수삼산(二水三山)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흰 구름 누른 학은 몇몇 때나 돌아왔나. 이수(二水)와 삼산(三山)이 차례로 열려있네.” 하였다. 형세웅반(形勢雄盤) 정조(鄭慥)의 시에 있다.

[산천]모자산(母子山) 고을 북쪽 90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사룡산(四龍山)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채약산(採藥山)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금강산성(金剛山城) 고을 동쪽 8리에 있다. 공산(公山)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대구부(大丘府) 조에도 있다. ○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지팡이 끌고 제일 높은 데 올라갔다 돌아오니, 산에 오른 지 반나절에 귀밑머리 희어졌네. 하늘이 얕고 바다는 넓어 땅이 없는가 의심스럽고,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이 열리더니 갑자기 산이 있네. 위태로운 길 구불거려 마치 촉(蜀) 땅 가는 길 같고, 여러 봉우리 높고 높아 진(秦) 나라 관(關)과 같네. 우리들은 이미 집에 전해 오는 훈계를 알거니, 무슨 일로 지금같이 위험한 일 당하는가.” 하였다. 작산(鵲山) 고을 남쪽 6리에 잇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이 고을의 지형이 나는 봉(鳳)과 같다.” 하는데, 봉은 대나무를 사랑하고, 또 까치가 지저귀고 날아가지 않는 것을 보았으므로 산의 이름을 작(鵲)이라 하고 또 죽방(竹防)이라고도 한다. 죽방산(竹防山) 고을 남쪽 9리 떨어진 곳의 남천(南川)과 북천(北川) 두 물 어구에 있다. 청경산(淸景山)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혹은 모자산(母子山)이라고도 하며, 신녕현(新寧縣) 북쪽 30리에 있다. 화산(花山) 신녕현 북쪽 3리에 있다. 유현(柳峴) 고을 남쪽에 있으며, 청경산에서 나와서 명원루(明遠樓) 밑을 거쳐서 북천과 합하여 흘러 가다가 하양현(河陽縣) 남천이 되었다. 북천 고을 북쪽 6리에 있는데, 모자산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청통역(淸通驛)에 이르고 남쪽으로 남천과 합해서 동경도(東京渡)가 되었다. 이 고을이 두 물이 합류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영천(永川)이라고 이름했으며 영(永) 자는 이수(二水)를 뜻한다. 범어천(凡魚川)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그 근원이 사룡산(四龍山)에서 나와서 동경도(東京渡)로 들어갔다. 자을아천(茲乙阿川) 옛날 신녕 북천 상류에 있다. 서천(西川) 신녕현 서쪽 1리에 있는데, 공산(公山)에서 흘러나와서 고을 북천과 합하여 흐른다. 시천(匙川) 고을 서쪽 16리에 있는데, 근원은 공산에서 나와서 하양현 남천 상류로 들어갔다. 동경도(東京渡)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청천지(菁川池)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증』 병풍암(屛風巖)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토산]은어[銀口魚]ㆍ황어(黃魚)ㆍ꿀[蜂蜜]ㆍ송이[松蕈]ㆍ왕골[莞草], 입초(笠草) 풀로 갓을 만들 수 있다 해서 이렇게 이름 지었다. 산수유(山茱萸)ㆍ인삼(人蔘)ㆍ복령(茯笭), 철(鐵) 고을 동쪽 건천(乾川)에서 난다. 잣[海松子]ㆍ지치[紫草]ㆍ옻[漆]ㆍ지황(地黃)ㆍ맥문동(麥門冬).

[불우]정각사(鼎脚寺)ㆍ공 덕사(功德寺) 모두 모자산(母子山)에 있다. 『신증』 운부사(雲浮寺) 유방선(柳方善)의 시에, “혼자서 운부사를 찾아가니, 중의 방 고요해서 의지할 만하네. 골짜기 깊어 수레와 말이 적고, 중은 늙어 해는 더디 가네. 대나무 그림자 빈 걸상을 침노하고, 솔바람은 엷은 옷에 불어오네. 산신령 응당 어둡지 않으니, 집 짓는 것이 필경 시기대로 될 것이다.” 하였다. 백지사(柏旨寺) 『신증』유방선의 시에, “병을 피해서 산사에 와 있으니, 산중 일마다 신기로워라. 들나물 밥 싸먹기 부드럽고, 시내 고사리 국 속에 살쪄 있네. 방이 따뜻하니 아침 잠 편안하고, 등잔불 밝으니 밤 이야기 늦었어라. 중과 같이 있으니 마음 속되지 않아, 반쪽 달에 돌아갈 것 잊었네.” 하였다. 거조사(居祖寺)ㆍ은해성(銀海城)ㆍ원명사(圓明寺)ㆍ안흥사(安興寺)ㆍ상원사(上元寺) 모두 공산에 있다. 죽방사(竹防寺) 죽방산에 있다. 부귀사(富貴寺) 공산에 있다.

[고적]태조지(太祖旨) 고을 서쪽 3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해서 퇴병하여 공산 밑 한 조그만 봉우리에서 보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영주성(永州城) 남정원(南亭院) 서쪽에 있는데, 고려 고종(高宗) 때에 동경적(東京賊) 최산(崔山)과 이유(李儒)가 난을 꾸미므로 임금이 이자성(李子晟)을 보내서 치게 했다. 자성이 밤을 세워 달려가서 영주성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적이 자성의 군사가 먼데서 급히 왔다하여 그 군사가 피로했을 때를 타서 공격하고자 하여 남교(南郊)에 주둔했다. 관군이 성에 올라 이것을 바라보다가 자성에게 고하기를, “우리 군사가 더위를 무릅 쓰고 멀리 왔고 적의 형세는 성하고 또 날카로워 가히 적을 당하지 못하겠으니 마땅히 성문을 닫고 군사를 쉬게 했다가 며칠 후에 그들과 싸우게 하옵소서.” 했다. 자성이 말하기를, “그것은 옳지 않다. 대체 피로한 군사가 쉬게 되면 더욱 게을러진다. 만일 여러 날을 끌게 되면 적이 우리 실정을 알게되어 딴 변이 생길까 두려우니 급히 공격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문을 열고 뛰쳐나가서 적이 진을 치기 전에 급히 쳐서 크게 격파하니 적의 시체가 수십 리에 깔렸다.

고읍성(古邑城)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춘추》에 성에 대해 쓴 것이 24곳이 되는데, 모두 허여하지 않는 것은, 곧 시기가 아니요 의리에 해로우며 또 그 제도가 아니라 해서 그런 것이다. 비록 그렇지 않더라도 또한 쓴 것은 백성을 수고롭게 한 것을 중한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비록 공자(孔子)가 지금 세상에 났더라도 성이 제도에 어긋나지 않고 역사가 때를 어기지 않았으며 일이 의리에 맞게 되면, 반드시 특별히 써서 상주고 아름답게 여길 것이니, 어찌 그대로 두고 말겠는가. 임술년 봄에 이지중(李止中)후가 나가서 영주(永州)를 다스릴 때, 한 달이 지나지 않아서 왜적이 침입해 왔다. 이 뒤로 모두 36차례나 계속하여 침입해오니, 영주 백성들이 모두 강을 건너 서쪽으로 도망해서 겨우 입에 풀칠하고 살면서,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었다. 그러나 이후가 이 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자 서로 이끌고 와서 역사에 참여하여 얼마 안 되어 성이 이루어졌다. 때에 마침 난리가 있으므로 이후는 지킬 준비를 한 다음 무리에게 명하여 성으로 들어가 군사를 거느리고 기다리고 있으니, 인심이 이미 견고해져서 적들이 어찌하지 못했다. 역사는 늦은 가을에 시작하여 중동(仲冬)에 완성했으니, 진실로 그 때를 얻었다 할 것이요, 편안한 도민들로 하여금 그 수고로움을 잊게 하여 급하고 빠르지 않게 하였으니, 의리가 진실로 그 속에 있다 할 것이요, 3리밖에 되지 않는 성이 백치(百雉)에 지나지 않으나 또한 제도에 맞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다. 이 세 가지가 이미 갖추어졌는데 당시 세상의 태사씨(太史氏)가 영주의 성을 쓸 줄을 모른 것은 잘못이 아닌가. 성을 쓴다는 것은 옛 법을 완전히 하는 것이요, 쌓은 걸 쓰는 것은 비로소 시작하는 것이니, 이 성은 우연히 이후의 손으로 이루어져서 일시의 계획과 터를 닦는데 비로소 옛 기물(器物)을 얻었으니 반드시 그 옛터라고 한다면 단연코 이 성을 써야 할 것이다. 성은 고을 서쪽 청통역(淸通驛) 위에 있는데, 3면이 높고 끊어져 있으며 오직 남쪽만이 올라갈 수 있다. 이후는 나와 동방급제(同榜笈第)한 벗으로 그가 이런 큰 역사를 했다는 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또 아무런 허물도 짓지 않았다 하기로, 그 기문을 구하는데 있어 감히 내가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하지 못했노라.” 하였다.

도동폐현(道同廢縣)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본래 신라 도동화현(刀冬火縣)이니, 경덕왕(景德王)이 고쳐서 도동(道同)이라 하여 임고군(臨皐郡)의 영현을 삼았었는데, 고려 초년에 인하여 소속시켰다. 임천폐현(臨川廢縣)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인데 신라 조분왕(助賁王) 때에 이곳을 쳐서 빼앗아 가지고 현(縣)을 두었었다. 경덕왕이 임천(臨川)으로 고쳐서 임고군의 영현을 삼았다. 고려 초년에 인하여 붙였으니 고을 동남쪽 5리에 있다. ○ 김유신(金庾信)이 고려를 칠 계획으로 골화관(骨火館)에 나와 잤는데 바로 이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史)》에 있다. 면백현(黽白縣) 본래 신라의 매숙차현(買熟次縣)이던 것을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신녕현(新寧縣)에 소속시켰다. 전하(殿下) 6년에 와서 붙였다. 고신녕(古新寧) 신녕현(新寧縣) 동쪽 25리에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