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충청도 하중부(河中府)로 본 소현세자와 강희제 http://blog.daum.net/han0114/17050219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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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淸道]
4.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이고,
山西省(領九府。十直隸州六州。八十七縣)。
○蒲州府(名河中。領六縣)永濟(蒲阪。附府)臨晉(北解)虞鄉(南解)榮河(寶鼎)萬泉(薛通)猗氏(桑泉)。
○絳州(名東雍。領五縣)垣曲(毫城)聞喜(左邑)絳縣(南絳)稷山(高京)河津(龍門)-地輿名目(一十九省)
[사마르칸트]
충청도 하중부(河中府)는 직산(稷山)
함경도 하중부(河中府)는 길주(吉州)
河中府,一般是指位于今中亚境内乌兹别克斯坦撒马尔罕,位于锡尔河、阿姆河之间,撒马尔罕是著名的古都,古名寻思干、撒马而干,“干”或“罕”在当地指“城池”。河中府曾是西辽国首都。
河中府,今山西省永济县蒲州镇。唐开元八年(公元720年),开蒲州为河中府,因位于黄河中游而得名。同年改为蒲州。乾元(公元758-759)时又改称河中府。以后历代屡有变动。明洪武二年(1369)河中府改为蒲州。
唐朝的河中府-蒲州
蒲州,中国古代行政区划名。
北周明帝二年(558年)以泰州改置,治蒲坂县(今山西永济市西南蒲州镇)。
隋大业三年(607年)改为河东郡,义宁元年(617年)复为蒲州。
治桑泉县(今临猗县西南临晋镇)。
唐武德三年(620年)移治河东县(今蒲州镇)。
辖境约当今山西省永济、河津、临猗、闻喜、万荣等市县及运城市西南部地区。
开元元年(713年)曾升为河中府,旋仍为蒲州。
乾元三年(760年)又升为河中府。属河东道。
金天会六年(1128年)改为蒲州。属河东南路。
天德元年(1149年)复为河中府。
明洪武二年(1369年)复为蒲州,省州治河东县入州。辖境相当今山西省永济、河津、临猗、万荣等市县及芮城县西部地区。属平阳府。
清雍正二年(1724年)升为直隶州,六年升为蒲州府。为晋、陕间交通咽喉,历为军事重地。
中亚的河中府-撒馬爾罕
撒马尔罕(乌茲別克语:Samarqand)是中亞地區的歷史名城,也是伊斯蘭學術中心,現在是乌兹别克斯坦的舊都兼第二大城市、撒马尔罕州的首府,有人口40萬,現任總統伊斯拉木·卡里莫夫生於此城。Samar意为“肥沃”,qand意为“土地”,撒馬爾罕意为“肥沃的土地”;耶律楚材说:“寻思干者西人云肥也,以地土肥饶故名之。”
十四世紀時為帖木兒帝國國都,這裡也是帖木兒陵墓的遺址Gur-e Amir所在地。
Bibi-Khanym Mosque清真寺也是著名地標之一,Registan則是市區古老的中心。
在2001年時,聯合國教育、科學及文化組織將擁有二千七百五十年歷史的撒馬爾罕編入世界遗产之列,稱為Crossroads of Cultures(文化交匯之地)(亚洲和大洋洲世界遗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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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청주목◎ 직산현(稷山縣)
본래 위례성(慰禮城)이다. 백제 시조(始祖) 온조왕(溫祚王)이 도읍을 만들고 나라를 세웠는데, 고구려가 차지하여 사산현(蛇山縣)으로 고쳤고, 신라 때에도 그대로 따라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가, 고려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9년에 천안(天安) 임내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太祖) 2년 계유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使臣)이 되어 와서 청하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 신사에 다시 감무(監務)로 강등하였고,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하양창(河陽倉)을 고쳐 경양현(慶陽縣)으로 삼아 영(令)을 두고 감장관(監場官)을 겸임하게 하다가, 본조 태조(太祖) 5년 병자에 현(縣)을 혁파하여 직촌(直村)으로 삼았다.
성거산(聖居山)이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진천(鎭川)에 이르기 28리, 서쪽으로 평택(平澤)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천안에 이르기 10리, 북쪽으로 경기(京畿) 양성(陽城)에 이르기 19리이다.
호수가 5백 53호요, 인구가 2천 1백 11명이다. 군정은 시위군(侍衛軍)이 40명이요, 선군(船軍)이 2백 54명이다.
토성(土姓)이 4이니, 최(崔)·유(兪)·백(白)·조(趙)요, 촌성(村姓)이 1이니, 전(全)이요, 경양(慶陽)의 속성(續姓)이 3이니, 김(金)·조(趙)·백(白)이다. 인물(人物)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충간공(忠簡公) 백문보(白文寶)이다.【공민왕(恭愍王) 때 사람이다. 】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5천 4백 46결(結)이요,【논이 좀 많다. 】토의(土宜)는 기장·벼·피·콩·조·팥·메밀·녹두·율무[薏苡]이다. 토공(土貢)은 칠·대추·감·족제비털·잡깃[雜羽]·종이·여우가죽·삵괭이가죽이요, 약재(藥材)는 속서근풀[黃芩]·연밥[蓮子]·백출(白朮)이다. 어량(魚梁)이 1이요,【주로 송어[蘇魚]가 난다. 】염소(鹽所)가 1이요,【서촌(西村) 왜곶이[吾也串]에 있다. 가마[盆]가 여섯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현의 동쪽 천흥리(天興里)에 있다.【하품이다. 】
백제 시조 온조왕 사당[百濟始祖溫祚王廟]【현의 동·북쪽 사이 5리에 있다. 금상(今上) 11년 기유 7월에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봄·가을에 향축(香祝)을 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한다. 】역(驛)이 1이니, 성환(成歡)이요, 봉화가 1곳이니, 현의 서쪽 경양산(慶陽山)에 있다.【서쪽으로 아산(牙山) 갓바위[笠巖]에, 북쪽으로 양성(陽城) 괴태길(槐台吉)에 응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직산현(稷山縣)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형승]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사산(蛇山)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밴댕이[蘇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준치[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산무애뱀[白花蛇]. 『신증』 참조기[黃石首魚], 붕어[鯽魚].
[불우]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고적]위례성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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