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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畿內]1.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고양(高陽)

한부울 2011. 3. 15. 21:02

대륙조선 강역이 보인다-벽려(薜荔 : Ficus pumila) http://blog.daum.net/han0114/1705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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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畿內)

1.보정부(保定府)는 지금의 고양(高陽)이고,

直隸省(十一府。六直隸州。十九州。一百二十四縣)。

保定府(名莫州。領二州。一十五縣)清苑(樊興附府)滿城(永樂)安肅(遂城)定興(范陽)新城(新泰)唐縣(解虞)博野(博陵)望都(武定)容城(漢縣)完縣(燕平)蠡縣(彖州)雄縣(歸義)祁州(安國)束鹿(鹿城)安州 高陽(高平)新安(安全)-地輿名目(一十九省)

 


보정부(保定府)

明洪武元年(1368年)改保定路置,治清苑县(即今河北保定市)

辖境相当今河北省太行山以东,潴龙河、唐河、拒马河之间,及定兴、新城、雄县、深泽、深县、束鹿等地。

明正统十四年(1449年)瓦刺部也先进攻京师,即取道紫荆关经此北上。明属京师,清属直隶。1913年省。

[始建保州城]宋淳化三年(公元992)李继宣知保州,筑城关,浚外濠,葺营舍,疏一亩泉河,造船运粮,保州成都市。因处于宋辽边界,宋、辽多次在这一带发生战争。金代末年,保州城在战乱中成为废墟。

[重建保州城]蒙古元太祖二十二年(公元1227),张柔主持重建保州城池,重新划市井,定民居,建衙署,筑寺庙,造园林,修筑土城墙,疏浚护城河,引一亩泉河水入城,既起到防御作用,又改善了城中水质,并利用水能在城外建水力石磨,奠定了保定城的基础。新建的保州城,成为京师门户,为燕南一大都会。


여기서 보면 보정부 고양(高阳)과 안주(安州)를 같이 쓴 것으로 나온다.


고양(高陽)

周安王二十年(前380)齐伐燕,高阳属齐。

周赧王二十年(前295年)燕赵重新划分疆界,易水长城以南属赵,以北属燕,高阳属赵。《战国策》有“燕封宋人荣蚠为高阳君,使将而攻赵”的记载。   

秦属钜鹿郡。

西汉高祖六年(前201)始置高阳县,属涿郡。

建和至永寿年间(147~157)置高阳郡,为郡治,县属高阳郡。

延熹元年(158)改属博陵郡。

建安末年(215~219)属河间郡。   

三国时期,高阳为魏地。

黄初二年(221)隶属高阳郡。

西晋泰始元年(265)隶属高阳国。   

东晋时期,高阳于建兴四年十二月(317年1月)被后汉攻占,易国为郡,高阳为郡治,县属郡。

从建武元年(317)至太元二十年(395),高阳先后被前赵、后赵、前燕、后燕等所据,归属不定。太元二十一年(396),高阳属北魏,沿置高阳郡,县属郡。   

南北朝时期,北魏太和十年(486),高阳随郡改属瀛州。

太和十八年(494)封高阳王。

北齐天保元年(550)属北齐。

北周建德六年(577)属北周。   

隋开皇三年(583)罢高阳郡,县属瀛州,十六年(596)于高阳置蒲州,高阳为州、县治。

大业三年(607年)改属河间郡,当年废任丘县,其西南部并入高阳县。   

高阳归唐。唐武德四年(621),在高阳置蒲州。

贞观元年(627)废蒲州,高阳先后属瀛州、鄚州、范阳郡。

开元十四年(726)置高阳军,为军治。   

五代十国时期,后唐同光元年(923)于高阳置郡。

后晋天福元年(936),属契丹。

后周显德六年(959)归后周,仍隶属高阳郡。   

宋至道三年(997)改属顺安军,高阳为军治。

熙宁六年(1073),降高阳为镇,仍属顺安军。

金天会七年(1129)置安州,治在高阳。

蒙古至元二年(1265)废安州,葛城县省入高阳县,属顺天路。

元至元十二年(1275),属保定路安州。   

明洪武元年(1368),高阳县属北平布政使司;明洪武三年(1371年),因为水涝,高阳由旧城(原高阳县城)西迁至丰家口(一说丰家裕。

丰家口(裕)为运河渡口,在今高阳县圈头的西北面,高阳的东街一带)。

洪武八年(1375)省入蠡县,十三年(1380)复置。

明景泰年间,山东人鲁能知高阳县事。

此人清正廉明,体察民情。

甫上任便缉捕盗贼,修桥筑堤。修建庙学。

1460年,鲁能修筑高阳城池。置四门,南城沾化门,北城迎恩门,东城东作门,西城西成门。

天启四年(1624)高阳共有98个自然村,编为91个乡,设11社3屯。   

清雍正二年(1724),高阳改属保定府

据清雍正八年(1730)《高阳县志》载,时高阳县域东北部扩至今安新刘李庄,东南辖今任丘县的培里及河间县的龙关,西临清苑县东王庄。

光绪十年(1884),王家坨(今莘桥东部)和任丘的白洋等四个村划归高阳,清苑县的王家庄也归属高阳。   

1913年,属范阳道(次年改称保定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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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지리지 양주도호부

◎ 고양현(高陽縣)

본래 고구려의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가 고봉(高烽)으로 고쳐서 교하군(交河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높은 산머리[山頭]에서 봉화(烽火)를 피우고 고구려의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고봉(高烽)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의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가 우왕(遇王)이라 고쳐서 한양군(漢陽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혹은 왕봉현(王逢縣)이라고도 한다.【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의 아름다운 딸이 안장왕(安藏王)을 맞은 곳이므로 이름을 왕봉(王逢)이라 하였다.”고 하였다. 】고려가 행주(幸州)로 고쳤다.【별호(別號)는 덕양(德陽)이라 하는데, 순화(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위의 2현(縣)은 현종(顯宗) 무오에 모두 양주(楊州) 임내(任內)에 붙였다. 용산처(龍山處)는 본래 과주(果州)에 속하였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 10년 갑신에【곧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21년. 】부원현(富原縣)으로 고쳤으며, 황조향(荒調鄕)은 본래 부평부(富平府)에 속하였었는데,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 갑술에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監務)를 두고, 행주·부원현·황조향을 이에 붙이었다. 태종(太宗) 계사에 고봉(高峯)과 덕양(德陽) 두 현의 이름을 따서 고양(高陽)으로 고쳐 현감(縣監)을 두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양주(楊州)에 이르기 6리, 서쪽으로 교하(交河)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한강[大江]에 이르기 15리, 북쪽으로 원평(原平)에 이르기 15리이다.

땅은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6천 3백 26결(結)이다.【논이 좀 적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수수[唐黍]·메밀·팥·참깨·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지초(芝草)이며, 약재(藥材)는 살남초(殺男草)이다.

역(驛)이 1이니, 벽제(碧蹄)요, 봉화가 3곳이니, 소달산(所達山)【현 북쪽에 있다. 북쪽으로 원평(原平) 성산(城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에 응한다. 】·성산(城山)【현 서쪽에 있다. 북쪽으로 교하(交河) 검단산(劍斷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봉현(蜂峴)에 응한다. 】·봉현(蜂峴)이다.【현 동쪽에 있다. 서쪽으로 성산(城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서울 무악(毋岳)에 응한다. 】대자사(大慈寺)【현 북쪽에 있다. 태종(太宗)의 원경 왕후(元敬王后)의 막내 아들 변한 소경공(卞韓昭頃公)이 일찍 죽어서, 그를 위하여 재암(齋庵)을 묘(墓) 남쪽에 짓고, 선종(禪宗)에 소속시켜, 밭 2백 50결을 주었다. 】압도(鴨島)【현 남쪽 강(江) 가운데에 있다. 동서가 7리요, 남북이 4리인데, 선공감(繕工監)의 갈대갓[草薍場]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지리지

고양군(高陽郡)

동쪽으로 양주 경계까지 14리이고, 서쪽으로 교하현까지 21리이며, 남쪽으로 양천현 경계까지 26리이고, 북쪽으로 파주 경계까지 19리인데, 서울과는 37리 거리이다.

[건치연혁]고봉현(高峯縣)은 본래, 고구려 달을성현(達乙省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고봉이라 개칭하여 교하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행주(幸州)는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우왕(遇王) -일명 왕봉(王逢)이라고 한다.- 이라 고쳐서 한양군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기에는 행주(幸州)라고 개칭하였고, -일명 덕양(德陽)이라 하기도 한다.- 현종 9년에는 고봉ㆍ행주 두 현을 모두 양주에 예속시켰다. 부원현(富原縣)은 본래 과주 용산처(果州龍山處)인데, 고려 충렬왕 11년에 부원 황조향(富原荒調鄕)이라 고쳤으니, 본래 부평부(富平府) 속현이었는데, 본조 태조 3년에 비로소 고봉 감무(高峯監務)를 설치하고, 행주ㆍ부원ㆍ황조향을 고봉에 예속시켰다. 태종 13년에 고봉ㆍ덕양 두 현의 이름에 가리어 지금 이름인 고봉으로 고치고, 현감으로 만들었다. 성종 2년에는 경릉(敬陵)ㆍ창릉(昌陵) 두 능이 있다는 것으로써 군으로 승격하였다.

[산천]장령산(長嶺山) 군 북쪽 18리 지점에 있다. 대자산(大慈山)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령산(高嶺山)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성지산(星知山)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건자산(巾子山)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견달산(見達山) 군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건지산(巾之山)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혜음령(惠陰嶺)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압도(鴨島)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는 22리이다. 갈대가 생산되는데,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베어가서, 나라의 쓰임에 충당한다. 박만도(朴萬島)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가 10리이다. 가둔천(街頓川) 군 동쪽 5리 지점에 있는데, 물 근원이 양주 홍복산에서 나와서, 교하현 학당포(學堂浦)에 들어간다. 북포(北浦) 군 남쪽 20리 지점에 있는데, 양화도(楊花渡) 하류이다. 덕수천(德水川)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물근원이 청당동에서 나와서 북포에 들어간다.

[토산]웅어ㆍ게ㆍ은어.

[불우]대자암(大慈菴) 대자산에 있다.

○ 서거정의 시에, “산속에서 여윈 말 채찍질하고, 절 안에서 고승(高僧)과 이별한다. 빽빽한 수목엔 구름도 어둡고, 명랑한 모래엔 물이 절로 맑다. 거친 둔덕에 예전 빗돌을 찾고, 기우는 날에 전조의 능[前陵]을 조상한다. 가을을 슬퍼하는 객이라 마소. 다락집 오르니 한이 많네.” 하였다. 정인사(正因寺) 경릉 동쪽에 있다.

○ 김수온(金守溫)의 〈중창기(重創記)〉에, “능침(陵寢)에 절이 있음은 무슨 일일까.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모하여 능침 측근에 절을 세워 인사(仁祠)로 삼아서 삼보(三寶)를 높이고, 명혼(冥魂)을 천도(薦度)하기 위한 것이다. 한ㆍ당 이래로 영명(英明)하고 의로운 임금이 그렇게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제왕이 근본에 보답하고 영구하게 추모하는 데에 극진함을 다하는 도리였다. 천순(天順) 기원 가을 8월에, 우리 의경대왕(懿敬大王)이 승하하시었으므로 고양군 동쪽 봉현(蜂峴)에 장사하였다. 장사한 다음 해에 세조 대왕께서 내수사에 전지(傳旨)하기를, ‘내 아들 의경이 불행하게 수명이 짧아서 갑자기이 지경에 이르렀다. 초상 장사에 일이 거창하였으니, 거듭 국가를 번폐스럽게 하지 않고자 한다. 너의 내수사는 현실(玄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절 한 구역을 만들어라. 혹시라도 폐단을 끼치지 말고 완성하게 하라.’ 하였다. 드디어 그 해 모월 모일에 능 동쪽에다 절의 터를 잡고 터를 넓혀서 역사를 시작하였는데, 열두 달을 지나서 마쳤다. 신묘년 봄에 우리 인수 왕비(仁粹王妃) 전하께서, ‘절을 당시에 급속하게 지었으므로 재목이 매우 좋지 못하고 지음새가 정밀하지 못하였다. 가령 오래되지 않아서 썩고 허물어지면 무엇으로써 후세에 보일 것인가.’ 하고, 이에 판내시부(判內寺府) 신(臣) 이효지(李孝智)에게 명하여 그 일을 전적으로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궁중에서 물품 중에 일찍이 절약한 것을 쌀과 베로 계산한 약간을 내수사에 주었다. 장차 날을 가려서 예전 집을 철거하고 새로 창건하려는 데, 대왕대비 전하께서, ‘의경 대왕과 예종 대왕 두 능의 현실(玄室)이 아주 가까와서 한 절의 종소리가 서로 들릴 만한 곳이다. 만약 인수 왕비의 개축하려는 원심(願心)을 인해서, 힘을 합치고 재물을 함께 하여 정인(正因)의 일을 도우면 공이 쉽게 이루어지고, 내가 의경ㆍ예종을 위해 천복(薦福)하는 정성도 또한 거의 이루어질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내수사에 특별히 신칙하여 돈과 곡식을 더 내도록 하고, 이어 진실로 모자라는 것이 있으면, 수시로 알리어서 그 쓰임에 보태게 하였다. 그 해 2월에 시작했는데, 백성들을 부역시키지 말고 백성을 뽑아 노역에 싻을 주도록 명하였다. 마침 서울 가까운 지역에 흉년이 들어서 늙은이 젊은이를 막론하고 앞을 다투어 품팔아 먹었다. 삽을 멘 자가 구름같이 모이고 동아줄 당기는 데에 개미처럼 붙어 두드리거나 치는 것을 보지 않아도 사람들이 기꺼이 일에 나아가므로, 겨울 10월 일에 이르러 일이 이루어졌으니, 총 1백 19칸이었다. 방앗간과 변소도 각각 제자리에 있고, 바르고 칠한 단청을 휘황 현란하게 하였다. 전당(殿堂)과 골마루가 통활 장려하고, 방과 헌함과 문이 선명 정밀하였다. 집이 높다랗고 상설(象設)이 빛나서 사찰로서 아름다움이 봉선사(奉先寺)와 서로 첫째 둘째로 될 만하다. 전당 제도와 칸살의 넓고 좁음은 모두 전일에 판화엄 대선사 설준(判華嚴大禪師雪峻)이 아뢰어서 윤허를 받은 대로였다. 인수왕비 전하께서, ‘절은 있으나 곡식이 없으므로 중이 의지할 곳이 없다.’ 하여 특히 미곡 백 섬을 시주하여, 본곡(本穀)은 남겨 두고 이자만 이용하여서, 식륜(食輪)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무릇 집기 등속도 죄다 여유 있게 구비하였다. 계사년 4월 초파일에 낙성 법회를 크게 실시하고, 대승(大乘) 여러 경(經)을 인출하였다. 이날 오색 구름이 있고, 이상한 향기가 골에 가득하며, 서기(瑞氣)가 하늘에 뻗쳤다. 원근에 있던 중 수 만여 명이 쳐다보고 절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임을 감탄하였다. 신은 엎드려 생각하건대, 모자간 은혜와 부부간의 윤기(倫氣)는 천지간 떳떳한 의리에 근본한 것으로 천자로부터 서인에까지 통한 것이다. 우리 의경대왕과 예종대왕은 한창 시절이었고 성덕이 새로워지는 중이었는데, 문득 여러 신하들을 버렸다. 이 때문에 대왕대비 전하와 인수왕비 전하께서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한 정에서 나오는 것이니, 비록 천지를 다하고 만고에 이르도록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온 나라 신민이 한갓 두 대비가 선왕의 명복을 위해서 삼보를 독실히 믿고, 사찰을 장엄하게 한 것이 이 같음을 알 뿐이고, 두 대비가 모자간의 은혜를 돈독히 하고 항려(伉儷)간의 예의를 삼가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밝히는 것이 억조 군생이 보고 감동하는 기회가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큰 역사를 마쳤으나 한 가지 일이라도 백성을 수고롭게 함이 있을까 걱정하고, 큰 공덕은 완성했으나 한 자만큼의 베라도 나라 것을 소비했을까 염려하여, 그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신 전전긍긍한 심회는 또 신민들이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 두 대비 전하의 지극하신 뜻을 받들고, 선왕의 지극하신 은택을 생각하여 시절 따라 친히 거둥하여 몸소 희생과 폐백을 능에 드리며, 신정(宸情)이 생생하여 서리와 이슬에 출척(黜陟)하는 감회를 견디지 못하신다. 그리하여 절이 능침 곁에 있으므로 이에 왕지(王旨)를 내려, ‘우리 인수 왕비께서 시주하신 전지(田地)와 노비 외에 여러 가지 요역(徭役)을 다 면제하고, 승도(僧徒)들을 편히 살게 하여 번뇌가 없게 하라.’ 하시었고, 은사(恩賜)가 여러 번이나 많았다. 이것은 대개 사왕(嗣王)이 선왕을 추념하여,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을 생각하는 지극하신 덕으로서 진실로 천재(千載)에 없었던 성스러움이었다. 이것은 대개 효도로써 백성을 다스리는 극치(極致)로서 신명에 통하고, 불승(佛乘)을 감동시켜서 하늘의 온갖 복을 받음이 억만 년일 것이며, 자손만대에 한없는 경사를 누릴 것이다. 아, 성한지고.” 하였다.

○ 정인지의 시에, “원릉은 채색 구름 가에 엄숙하고, 사찰은 빼어난 메 앞에 높다랗다. 금벽 채색 빛나서 아침 햇볕이 쬐고, 달랑거리는 풍경 소리는 바람이 멀리 전한다. 불등(佛燈)은 넓게 삼천계(三千界)를 미치고 국운(國運)은 응당 억만 년에 뻗치리라. 정맹(精猛)한 두타(頭?)는 법좌(法座)에 올라 묘법을 말하고, 진전(眞詮)을 부연한다.” 하였다.

○ 최항(崔恒)의 시에, “달은 주림 삼계(珠林三界)의 그림자를 흩고, 비는 금지 시방(金地十方)의 추위를 나눈다. 후산(?山)에 학이 가니 공연히 구슬프고, 정수(鼎水)에 용이 옮기니 다시 아득하다.” 하였다.

○ 서거정의 시에, “목어(木魚)가 소리나니 아침 멧부리 고요하고, 돌말[石馬]이 소리 없는데 새벽 능침이 춥다. 주수(珠樹)에 두견이 우니 봄이 적적하고, 정호(鼎湖)에 용이 가니 달이 망망하다.” 하였다.

○ 노사신(盧思愼)의 시에, “교산(橋山)에 아름다운 기운이 성한데, 탑묘(塔廟)는 원침(園寢) 앞에 높다랗다. 바다도 안 보이는 구름 탄 신선이 멀고, 공덕이 성취하니 각월(覺月)이 불등(佛燈)을 전한다.” 하였다.

○ 성임의 시에, “서쪽으로 능원을 바라보니 어디쯤인가, 송추(松楸)에서 보일락말락 절문 앞일세. 산 중에는 구름이 아침마다 변하고, 달 아래 종소리가 밤마다 들려온다.” 하였다. 나암사(羅巖寺) 군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소화사(小華寺) 군 남쪽 15리 지점, 호숫가에 있다.

○ 고려 인분(印?)의 시에, “파초 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에 비 오는 줄 알겠고, 돛대가 봉우리 위에 나오니, 바다에 바람 있는 줄 알겠다.” 하였다. 어침사(魚沈寺) 고령산에 있다. 흥복사(興福寺) 무을고리(無乙古里)에 있다.

[능묘]경릉(敬陵) 본조 덕종(德宗)의 능이다. 군 동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서울과의 거리는 30리쯤이다.

○ 강희맹의 시에, “노반(露盤)이 구름가에 솟았으니, 멀리 원릉이 절 앞에 있는 줄 알겠다. 만 구렁 송추에는 아름다운 기운이 감쌌고, 상방(上方) 종소리는 묘한 여운(餘韻)을 전한다. 조정에 나아가던 금학(禁鶴)은 일찍이 어느 날이던가. 교산(橋山)에 장사한 것도 이미 옛날이었다. 큰 경사는 마침내 보력(寶曆)을 빛나게 했다. 하찮은 신하는 머리 조아리며 말을 마친다.” 하였다.

○ 최숙정(崔淑精)의 시에, “생학(笙鶴)으로 하늘에 조회하며 돌아오지 않는다. 성서쪽 10리쯤이 곧 후산이구나. 연기와 노을은 송(松)ㆍ삼(杉)이 서 있는 길을 어둡게 잠갔고, 구름과 안개는 범과 표범 굴을 깊게 감추었다. 이날 빈번(??)은 깨끗하여 제물로 올릴만하고, 당년 궁검(弓劍)은 아득하여 부여잡기 어렵다. 두견새 소리 괴로워라 마음 상한다. 봄 바람에 눈물 뿌리니 점점이 아롱진다.” 하였다.

『신증』연산군 10년에 소혜왕후(昭惠王后)를 부장하였다. 창릉(昌陵) 본조 예종의 능이며, 안순왕후(安順王后)를 부장하였다. 경릉 북쪽에 있다. 고려 공양왕릉(恭讓王陵) 견달산(見達山)에 있다. 최영 묘(崔瑩墓) 대자산에 있는데, 무덤 위에 지금도 풀이 나지 않는다.

○ 변계량의 시에, “위엄을 떨쳐 나라를 구하노라 살쩍이 하얗고, 말 배우는 거리 아이도 그 이름을 다 안다. 한 조각 장한 마음만은 응당 죽지 않았으리. 천추(千秋)에 길이 대자산과 함께 우뚝하다.” 하였다. 성녕대군 묘(誠寧大君墓) 대자산에 있다. 월산대군 묘(月山大君墓) 군 북쪽 2리 지점에 있다. 『신증』 황치신 묘(黃致身墓) 군 북쪽 16리 지점, 덕수촌(德水村)에 있다. 김전 묘(金詮墓) 군 남쪽 5리 지점에 있다.

[고적]고고봉현(古高峯縣) 지금 관아(官衙) 서쪽 10리 지점에 있다. 봉(峯)을 봉(烽)이라 한 곳도 있다.

○ 김부식(金富軾)이 이르기를, “한씨(漢氏) 미녀(美女)가 달을성현 높은 산 위에 봉화를 올려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뒤에는 고봉(高烽)으로 이름하였다.” 하였다. 왕봉 폐현(王逢廢縣) 곧 행주이다.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 김부식이 이르기를, “한씨 미녀가 개백현(皆伯縣)에서 안장왕을 맞이하였던 까닭으로, 왕봉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 하였다. 부원 폐현(富原廢縣)군 동쪽 30리 지점에 있다. 과천현(果川縣)에 내속하였는데, 곧 용산처(龍山處)이다. 지금 성 밑 10리 지역은 한성부(漢城府)에 속하였다. 황조향(荒調鄕) 군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주섭리(注葉里)라는 속칭이 있다. 율악 부곡(栗岳部曲) 고봉현에 있다. 군 서쪽 12리 거리이다. 장사향(長史鄕) 군 동쪽 10리 지점 건지산 밑에 있다. 파을곶소(巴乙串所) 행주에 있다. 건자산소(巾子山所) 건자산 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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