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도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과 조선인 학살

한부울 2011. 3. 12.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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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과 조선인 학살

 

정리:한부울

 

일본인들의 참혹한 자연재해상황을 뉴스로 접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내일처럼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도를 보면 이러한 대한민국 한국민의 안타까움과 상관없이 인터넷에서 일부 몰지각한 일본 네티즌들이 1923년에 있었던 관동 조선인 학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헛소문을 퍼뜨려 일본내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또다시 위협하고 있다.

 

“동북부 지진에 한국인들이 기뻐하고 있다.”
“재일 조선인과 지나인(중국인)이 우물 물에 독을 타고 혼잡한 틈을 타서 부녀자를 강간하기 쉽습니다. 조심하세요.”
“조선 바퀴벌레가 약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구출해주세요!”
일본 네티즌들은 포털이나 2ch 등을 통해 실시간으로 지진 피해 상황에 대해 정보를 주고 받고 있지만 일부 네티즌들은 지난 1923년 관동대지진을 연상케 하는 루머를 퍼트려 충격을 주고 있다.[뉴데일리2011년 03월 12일(토)]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1923년 때 일을 생각하면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런 일본인들은 근본이 뭐고 무슨 종자인지 알 수가 없다.

이래서 일부이긴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상황역시 88년전 관동대학살 당시 처럼 우리의 순수한 의사와 전혀 상관없이 불행한 일이 언제든지 재현될 수도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일본내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은 이러한 사실에서 철저한 경계와 자기 보호에 신경써야 할 것이다.

또한 극단적인 불행한 상황이 재현되지 않기 위해서는 일본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처음부터 숨어서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악질적인 일본인들을 색출하여 공개적으로 처벌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러한 조치가 종래 1923년처럼 언제든지 불거지고 확대 될 수 있는 극단적인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최소화할 수 있다는데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진으로 인한 일본인들의 아픔과 고통이 하루빨리 치유될 수 있으면 하고 안정이 되었으면 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기가 1923년 9월 1일 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분명 일제가 조선을 합방하고 식민지로 삼았던 때이다.
조선인을 두려워했다는 말인데 무엇때문에 조선인을 두려워했을까?
한반도 조선인이 아니라 대륙조선인이라고 불려야 하며 일제가 열도에 이동한 시기가 1872년이라면 열도에서 일본인과 조선인들이 치열하게 부딪치거나 충돌이 비일비재 하였을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상황이 바껴 대륙조선인들이 쳐 들어와 일본인들을 몰살시킬 것이란 상상으로 그때까지 열도에 존재하던 대륙조선인을 일본인들이 필요이상으로 견제하고 두려움에 히스테리하게 대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제(동남아, 대륙남부해안, 필리핀등지에서 활동하던 왜구무사정치집단)가 열도를 침범하고 난 후 대지진으로 말미암아 내부통치력이 와해되고 전국적으로 혼란이 가중이되어 총체적인 위기를 느꼈던 지배자들은 언제든지 잠복된 잠새성 불만세력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을 것이고 그 중심에 있었던 조선인들을 무차별 학살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당시 상황을 들여다 보면 열도에는 왜구라고 하는 일본인, 대만인, 조선인, 중국인, 토착원주민 아이누족들이 있었다고 보인다. 대륙
조선인을 중국인이라 지칭하였을 것이라고 보이지만 의도적으로 깍아내려 한반도 조선인이라 구분했을 가능성도 예측이 된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대륙인들을 지나인이라고 한다.

그들이 지칭하는 지나인은 옛 대륙조선인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청나라인을 지칭한 것이 아니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시기는 한반도와 대만을 일제가 점령하고 식민지 한 상태에 일어났다.

하지만 대륙조선인들은 언제든지 그들을 열도에서 몰아내고 파멸로 몰아 갔을 수 있는 강력한 세력으로서 견제대상으로 여겼을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다.

때문에 늘 열도에 있는 조선인은 경계대상이 되었다고 보인다.

대지진으로 인한 혼란은 극에 달하고 아비규환같은 생지옥 상황에서 지배자들은 그러한 책임을 다른 곳으로 돌려 정치적으로 벗어나려고 하는 심리적인 강박이 있을 수 있고 이참에 불만세력인 조선인을 타겟으로 하여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마치 그들이 말하는 바퀴벌레를 제거하는 식으로 일본인 자경단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인 경찰, 군대, 자경대라고 하는 일본무사 출신들이 이러한 조선인들을 사냥하듯 학살하였다고 기록에 나오며 조선인을 희생삼아 계획대로 불만을 잠재웠을 것이며 골치아픈 잠복된 반란세력들을 완전히 제거 수습했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때까지도 일본인들은 지금 열도를 완전하게 장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원주민과 토착민들 모두 대륙조선을 종전과 같이 변함없이 섬기던 상황이라 일제 명치정권을 이은 대정정권에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으며 내부적으로 통제하는데 상당히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때까지도 내부적으로 이러한 혼란이 지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열도에 존재하는 불만세력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대지진의 혼란을 이용 헛소문을 퍼뜨렸고 불안해하는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면서 부추기고 불만세력으로 지목되었던 대륙조선인들이 표적이 되어 당시 대정정권 묵인하에 무차별 살해하도록 방치한 것이 아닌가 추측 해 볼 수 있다.

그 당시 이런식으로 희생된 숫자 역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우리가 현재까지 알고 있는 숫자 10 배이상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나라없이 떠돌던 무리 왜구무사정치집단이 정치적으로 나라 만들기위한 일환이라고 보여진다.

근세기에 서세의 힘을 빌어 나라를 새롭게 세우려는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지진이 발생하는 것을 기화로 국제여론을 덮으며 국가를 설립하는데 방해세력들을 일거에 제거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결국 일본이란 신생국이 탄생하였고 그들의 역사가 어쨌던 꾸며 만들어 졌으며 아시아 역사는 완전히 완전히 분해되어 소설같은 역사가 각색이 되어 괴물로 나타나게 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일본이 태동한 꼴 같잖은 역사이다.
다시말해 일본인들이 침범한 열도가 대륙조선인들의 영토이고 영토를 빼앗기는 토착민과 대륙조선인들은 연속적인 반란을 일으켜 1872년 보신전쟁부터 관동대지진(1923)까지 지속적으로 반정부활동을 벌려 당시 대정정권을 힘들게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1923년 9월 1일 11시 58분에 일본제국 관동지방(関東地方) 사가미만(相模湾)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1855년에도 대지진이 있었으나 보통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이때를 말한다.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5분 간격으로 발생한 세 차례의 지진이다.

최초에 발생한 M 7.8의 진원은 거의 동시에 11시 58분에 오다와라(小田原)와 미우라 반도(三浦半島)의 지하에서 약 15초 간 일어났다. 계속하여 M 7.3의 첫 번째 여진이 12시 1분에 일어나고, 두 번째 M 7.2의 여진이 12시 3분에 발생하였다. 이 세 개의 지진은 모두 약 5분 이상 계속되었다. 지진 후 간토 지역은 총체적인 혼란에 빠졌다. 정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며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일어난 시간은 11시 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이날 도쿄를 비롯한 지진피해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 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과 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건물인 피해지역 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피해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東京府)지역과 요코하마(橫濱市)지역, 지바현(千葉県), 가나가와현(神奈川県), 시즈오카현(静岡県)등에서 14만2807명이 사망했고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 되었다.


受害者人數死亡人數、失蹤人數:約14萬2千8百人(官方統計死亡者約105,385人) 

避難人數:至少190萬人以上

倒塌建築物:約12萬8千棟

因火災燒毀之建築物:約44萬7千棟 


2차 피해 이 부분의 본문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조선인 학살사건

 

 

 

                                                일본군경이 조선인을 해치는 광경.

 

당시 일제 치하때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우선 제목이 이렇다.

강도, 능욕, 방화기획 큰제목이 그렇고
불량조선인들의 폭동은 이와같다.

후쿠다(福田)계엄사령관발표에 의하면 
질서는 회복, 인심은 전연안전....내용을 보면 새빨간 거짓말을 꾸며 낸 것이 들어나 보인다.

                                              大將為戒嚴司令官1923年9月1日任命

                                                     福田 雅太郎(1866-1932)

 

 

[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이 보도는 검열을 철저하게 받는 하에 발행되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1923年9月1日,關東一帶發生罕見的巨大地震。有10萬多人死亡,地震和火災讓數百萬人無家可歸,露宿街頭。這時日本軍方故意放出謠言:「朝鮮人會暴動!」、「朝鮮人在井裡下毒,想毒死日本人!」當時,日本政府不但不澄清謠言,反而搧風點火,軍隊和警察一起逮捕、殺害許多在日朝鮮人,一般日本平民也組織3689個自警團,殺害在日朝鮮人。在這個事件中,有6600餘朝鮮人就這樣被殺害。

當年,在日朝鮮人的總數為8萬人,其中住在東京為1萬2千人,住在東京旁邊的神奈川為3千人,由此可見,這場對朝鮮人的殘殺規模有多大!此外,有300至600位中國人也被當成朝鮮人誤殺。日本人用的武器有消防鈎、竹槍、武士刀、手槍、鐵鋸等等,一切可以殺人的武器都拿來用。

 

지진으로 인한 사망 및 실종자

死亡人數、失蹤人數:約14萬2千8百人(官方統計死亡者約105,000人)

이 중에서도 지진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덮어 씌워 살상한 숫자가 미지수로 남아 있고 자료에는 6600명의 조선인이 살상되었다고 하지만 그 이상의 엄청난 숫자의 피해자가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 할 수 있는 악질적인 사건이다.

 

関東大震災当時、火に焼かれ、死んでしまった屍身。 

地震による大火災で、火の手を避ける事が出来なかった数多い人々が死んだ

간동대지진 당시 , 불에 태워져 죽어 버린 시신. 

지진에 의한 대화재로, 불길을 피할 수가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関東大震災当時、自警団による朝鮮人虐殺の場面。日本権力の流言飛語で騙され、朝鮮人を虐殺している村の自警団

간동대지진 당시 , 자경단에 의한 조선인 학살의 장면. 일본 권력의 유언 비어로 속아 조선인을 학살하고 있는 마을의 자경단 모습

 

 

虐殺された、故ク・ハクヨンさんを追悼する卒塔婆。2009年8月第5次朝鮮人虐殺現場研究をして、参加者達が韓国の松で作った卒塔婆を虐殺された故ク・ハクヨンさんの墓碑の横に立てた。

졸탑파(卒塔婆):추선공양을 위하여 무덤 뒤에 세우는, 위를 탑 모양으로 꾸민 좁고 긴 판자. 《범자(梵字)·경문·계명(戒名) 등을 적음》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 조선인 학살사건(關東大地震 朝鮮人 虐殺事件, 간단히 관동 대학살)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1923년) 당시 혼란의 와중에서 일본 민간인과 군경에 의하여 무차별적으로 자행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벌어진 대대적인 학살 사건이다. 희생자 수는 약 6,000명 혹은 6,6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피해 사망자 수는 그 이상 상상할 수 없는 숫자가 될 수 있으며 정확한 것은 그 당시 일제 당국뿐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있기 때문에 아무도 진실된 내용을 알 수 없다.


1923년 도쿄 일원의 관동지방(関東地方)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사실 확인도 없이 보도되었고, 보도 내용에 의해 더욱 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879년 오사카에서 창간),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 1874년 창간)등 여러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또한 中國人)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라는 거짓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인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 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에게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조선인(또한 中國人) 이란 표현은 그 때까지 조선인을 중국인으로 알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즉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이라고도 하였고 중국인이라고도 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조선인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것도 간파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조선인 학살이에 곳곳에서 일본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심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이나 중국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이나 중국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이나 중국인, 타지역 출신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이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琉球人:이 당시는 대만인들을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제도(奄美群島)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東北地方6현-青森県, 岩手県, 宮城県, 秋田県, 山形県, 福島県), 고신에쓰(甲信越地方), 홋카이도(北海道) 출신], 미국, 영국 등 서양 출신으로 도쿄에 온 기자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여기서 조선인이라 함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는 대륙조선인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잔악했다.

 

들어난 자료에 의하면 류큐인(琉球人)은 대만인일 가능성이 많다.

당시 일제가 대만을 식민지로 하여 열도에 대만인들도 많았을 것인데 대만인이라고 특별하게 구분하여 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와같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아마미제도(奄美群島) 출신을 왜 조선인이라고 오인했을까?

그렇다면 류쿠인, 대만인, 아마미제도 출신도 대륙조선이었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 있다.

특히 도후쿠(동북지방)의 일본인들도 대륙조선인일 가능성이 있으며 외(外)자 성씨를 가진 일본인들 역시 모두 대륙조선인이었을 가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조선은 일본인 뿐만아니라 모든 민족들이 포괄적이고 광대한 상징성을 부여한 명칭으로 사용되어 불편하게 인식했음을 알 수 있고 때문에 일본인 스스로 조선이란 명칭에 엄청난 스트레스와 심리적인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고 풀이 할 수 있다.

그것은 작은나라가 큰나라를 건드리고 잘못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대륙조선을 반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잘못이다.

예를 들어 열도가 일찍이 대륙조선의 영역으로 존재했었다면 그래서 1870년경 서세를 등에 업은 일본무사정치집단들이 친 대륙조선계 정부 에도세력을 물리치고 강제적으로 열도를 점령하였다고 할 때 시기적으로 불과 50년 정도 지난 시기라 불안했을 것이다.

또한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시점으로 본다면 근간이라 할 수 있는 1895년에 명성황후를 일본인들이 시해하여 국제적 사건으로 알려져 그러한 죄의식도 잠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가중하여 심리적인 불안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것이란 예상을 할 수 있다.

열도가 대륙조선의 영역이었다면 어찌 열도에 대륙조선을 열망하던 세력이 없었겠는가?

비록 명치정권이 열도를 점령하였지만 그러한 명치정권에 대한 반감이 없을 수 없어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항거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고 그러한 불만 세력을 잠재우기 위해 노심초사 하던 일본제국(명치정권 승계세력) 내정 최고 실력자들에게 관동대지진 발생은 그야말로 기름에 불을 지르는 형태였음으로 이에 대한 탈출구가 필요하였다고 보인다.

때문에 헛소문을 퍼뜨려 큰 재란으로 인하여 공포에 질려있는 불안한 일본인들의 심리를 건드리고 이용하여 껄끄러운 반대세력이라 할 수 있는 대륙조선인들을 열도에서 자연스럽게 제거하고 잠재웠을 가능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 이후 완전하게 열도를 지배 할 수 있었다고 풀이 할 수 있다.

역사에서 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고 보이는 큰 사건들은 어김없이 그에 따른 정치적인 해결책이 원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게 이 관동대지진 발발한 시기를 전후로 하여 열도 전역에 있던 무고한 조선인들이 얼마나 희생되었을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자경단이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내어 학살하였다. 외국인이나 타 지역 사람들이 도쿄에 가는 것은 곧 죽음을 뜻했다. 경찰은 살인을 보고서도 방관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의 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東京府)에 흐르는 스미다 강(隅田川)과 아라카와 강(荒川)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관련 사실당시의 일본 당국은 지진 발생 얼마 전에 조선의 3.1운동과 식민지였던 대만에서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낳은 대규모 봉기를 유혈 진압하면서 민중의 저항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지진 당시, 치안을 맡은 최고 책임자들은 주로 대만 총독부에서 일하던 관료 및 군인 출신이었다. 또한 일본 본국에서는 다이쇼 데모크라시(大正民主 1911년~1925년, 신해혁명(1911-1912) 발발에서 치안 유지법 시행까지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주의 운동)로 인하여 노동운동, 민권운동, 여성운동 등 지배 권력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권리찾기 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를 사회적 혼란 또는 일본제국의 위기으로 판단한 이들은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인 지진을 기화로 조선인을 희생양 삼아, 질서를 유지할 목적으로 “조선인 폭동설”을 날조하였다. 사건 이후, 일본 당국은 이 사실이 알려질 경우, 조선에서 다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한동안 일본 내 조선인의 입국을 금지시켰다. 또한 초기 발표를 하면서 조선인 사상자의 수는 불과 2~3명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정도로 일본 정부는 사건을 숨기는데 급급하였다.


“조선인 폭동설”은 일본 내정(內政)의 우두머리 내란 즉 폭동을 염려한 나머지 정부로 향하는 민중의 반항을 조선인에게 향하게 하여 피해보려고 하였다고 하고 당시 조선인은 유라시아대륙을 지배하던 엄청난 세력들이 아니라 이제 일본에 반하여 해를 끼치는 민족이라고 하여 민족감정을 부추기면서 경계하고 적대시하도록 민중에게 유도한 측면에서 나온 조악한 일본제국 나름대로의 정책이라고 해야 맞다.

 


내정(內政)우두머리 : 야마모토 곤노효에(山本権兵衛1852.11.26~1933.12. 8)

藩士出身
사쓰마 번(薩摩藩현재의 가고시마현) 출신
청년시 영국-사쓰마 전쟁에 참전 사쓰마 번군에 입대. 보신전쟁 사쓰마 번군으로 참전하여 도쿠가와 막부 타도에 나섰다.
中日甲午战争时任海军大臣副官、军务局长兼将官会议成员,负责作战指导。
1898年6月~1905年12月连任海军大臣,主持海军军备扩充计划,参与准备和发动日俄战争。1913年组阁,修改军部大臣现役武官制。次年因西门子事件被迫下台

1923年再度组阁,并兼任外务大臣。在关东大地震时实施戒严令,颁行《治安维持法》,残酷镇压社会主义者和朝鲜人。22任日本首相(1923.9.2–1924.1.7)


이러한 혼란속에서 일본내 저명한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栄)와 그의 6살짜리 조카 다치바나 소이치(橘宗), 페미니스트 사회주의자이자 오스기의 아내인 이토 노에(伊藤野枝)가 아마카스 마사히코(甘粕 正彦, 1891.1. 26~1945.8. 20) 중위가 이끄는 군경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구타당한뒤, 우물에 유기된 아마카스 사건(甘粕事件)이 일어났다.


아마카스사건(甘粕事件)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난 칸토 대지진(関東大震災)으로 야기된 혼란을 틈타서, 9월 16일에 도쿄 헌병대 코지마치쵸(麹町)분대장이었던 아마카스는 아나키스트인 오오스기 사카에(大杉栄)와 이토 노에(伊藤野枝)와 그 조카인 타치바나 소이치(橘宗一, 당시 7세이었음)등 3명을 헌병대 본부로 강제 연행한 뒤에 살해했고, 같은 곳의 우물에 시체를 던져넣었다고 한다. 이른바 아마카스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사건에 관련해서 헌병이나 육군의 책임은 묻지 않고, 모든 게 아마카스의 단독 범행으로서 처리되어 같은 해  12월 8일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군사법정에서 아마카스는 '내 생각으로 3명 모두를 살해했다', '아이는 죽이지 않았다. 거적에 싸인 걸 보고 처음으로 아이가 죽은 걸 알았다'라고 빈번히 증언을 바꿨으며, 공범자인 병사가 '살해는 헌병사령관의 지시였었다'라고 자백하고 있는 등, 이 결론에 현재도 의심을 가진 사람은 많다. '고귀한 분'의 죄를 뒤집어 쓴 것이다(실제로는 치치부노미야秩父宮가 연대장을 맡은 연대의 범행이었다), 라는 설도 있다. 덧붙여 아마카스는, '(사상은 이해할 수 없지만) 오오스기는 인간적으론 훌륭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아마카스 본인도 나중에 똑같이 평가 받게 된다. 나중에 만주 시절, 아마카스는 이 사건에 대해 "그 사건은 '내가 했다'라는 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웃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이 발언에 대해서 그의 진심은 불명이다.


이 사건은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후의 사회적 패닉상태를 일본 전국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인 학살사건도 이 사건을 통해 알려졌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는 대지진 후의 혼란기를 소년기에 직접체험하여,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과 자경단의 광기, 유언비어 등에 대하여 상세히 증언하는 유명인의 한 사람이다. 한편, 일본의 소설가이며,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 1892.3.1~1927.7.23)는 자경단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카미 준(高見順)는 자전적(自傳的) 소설 《내 가슴의 밑바닥 여기에는》을 발표했다. 다카미는 16세 때 지금 한국대사관이 있는 도쿄 아자부(麻布)에서 이 지진을 겪었다. 소설 속에는 진재 이틀째 저녁의 체험을 생생하게 그려놓았다. 소설의 이 대목은 다큐멘터리라 해야 할 만큼, 참으로 귀중한 일본인 손에 의한 학살 관련 기록이다. 일본 민간인 손에 의한 조선인 학살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도쿄의 풍경이 가감 없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가 자국민의 가슴 속에 남긴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대 조선인 죄악감을 예리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때에 학살된 다수의 조선 사람은 주검조차 남기지 못했고, 이름도 남기지 못했고, 조선 고향으로 소식도 날리지 못했다. 조선 사람을 제국일본이 국민이라 했는데도, 일본정부는 장례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 땅에서 한도 못 남기고 극한의 고통 속에 스러져간 조선 사람들에게 다카미 소설의 이 대목은 더 할 수 없는 진혼곡일 수 있다 싶어, 좀 길어도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소문이라고만 해치울 수가 없는 유언비어가 연달아서, 어지럽게 날아들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잊기 어려운 것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데마였다.

‘어젯밤, 한창 불났을 때 쾅, 쾅쾅 하는 소리가 멀리서 울렸죠. 그건 죠센진(朝鮮人)이 화약고에 불을 붙여 폭발시킨 것이라 해요.’

그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다 태울 듯하던 그 화재는, 무너져내린 집에서 불이 나 점점 번져나간 것뿐만 아니고, 조선인이 시내 여기저기에 불을 지르며 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다. 과연 그렇군이라며, 듣는 자들 중에는 곧장 맞장구를 치는 자도 생겨나서

‘그렇지요, 아니라면 그렇게 큰불이 될 리가 없어,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어요.’

이런 얘기를 하고 있을 때는 좋았는데,

‘큰일났다, 큰일났다! 조센진(朝鮮人)이 쳐들어온다!’

총기 탄약을 가진 조센진 한 떼가 아니 대군(大軍)이 메구로(目黑·앞에서 나온 아자부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의 거리) 방면에 나타났다 한다. 도쿄 중심을 향해 대거 진격 중으로, 일본인을 보기만 하면 남녀 가리지 않고, 어린애든지 뭐든지 닥치는 대로 학살한다니!

어 큰일이다며, 멀쩡한 사내도 새파래졌다. 습격자들이 어디를 어떻게 지나서 도심으로 나갈지, 그것이 전혀 예측이 안되니 도망을 빼려야 뺄 수가 없다. (지진의) 쓰나미라도 왔다면야 높은 언덕으로라도 도망칠 방도라도 있겠으나, 어디에 불쑥 나타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벽장 속에라도 숨어서, 꾹 숨을 죽이고 있을 수밖에 딴 수가 없다. 이리하여, 사람 하나 없는 텅 빈 집으로 보이게 하여, 습격자를 지나치게 할 수밖에 없다.

그때까지 어제와 마찬가지로 집 밖에 나와 있던 근처의 사람들이 홀연히 집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해서 거리 전체가 금세 괴괴해져 버렸다. 그러고 나서 몇십 분간인가, 거리 자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은 그 섬뜩한 침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침묵은 ‘조센진’ 내습 따위 있을 수 없는 데마에 대해 누구 하나 반박 발언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인 폭동설과 학살의 원흉 두 명의 내무대신

 

다카미 준(高見順)의 위인용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 세 가지를 들겠다.

첫째는 도쿄 전 시에 걸쳐 일본 민간인이 떼지어 길을 막고서 조선인으로 보았으면 ‘나부리 고로시’로 죽였음을 제2차대전 직후 시점에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나부리 고로시’, 인용 속의 주에서 의미는 알게 했지만, 한자로 된 말이라도 한국말에는 없다. 권위 있는 일본어사전인 이와나미(岩波)사의 고지엔(廣辭苑)을 그대로 옮기면 ‘곧바로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어, 희롱하여 죽이는 것’으로 되어 있다. 몇 가지 자료에 실상이 그려져 있지만 여기 옮기기엔 역겹다.

제국일본의 수도의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이 유언비어에 격발되어 그들의 생활공간에서 인종청소의 기세로 조선인을 ‘나부리 고로시’로 학살했던 것이다. 유언비어의 출처가 드러나면 이는 ‘나부리 고로시’와 함께 일본인들의 역사적 악행의 세계사적 등급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히틀러의 권력장치에 의해, 은밀하게 진행되고 순식간에 죽게 한 아우슈비츠보다 더 악질적이다.


다카미 준의 인용에서 둘째로 관심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유언비어의 발생처와 전파경위를 의아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전적 서술이므로 당시 16세의 다카미 준이 갑자기 출처를 짚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무렵 한창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의 챔피언적 양심이었던 도다이(東大)교수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 1878-1933년)는 9월의 학살 2달 뒤인 11월의 《추오코론》(中央公論)에 ‘책임있는 XX가 이 유언(流言)을 전파하여, 이를 믿게 하는 데 힘이 되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위의 ‘XX’는 당시의 검열 때문이었다. 1960년대에 제국시대 쇼와기의 역사비리를 파헤쳐 선풍적 인기 속에 문호 소리를 들었던 마쓰모토 세이초(松本淸張)는 이 ‘XX’에 정부, 경찰, 군부 등의 자구(字句)를 넣으면 된다고 했다. 즉 정부쪽의 관헌이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이다. 거기서 나아가 마쓰모토(松本)는 “이 데마의 근원은 정부가 의식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구석이 있다”고 했다. 연이어서 유언비어의 근원을 진재 때의 두 사람의 내무(內務)대신으로 지목하는 설을 확신하였다.( 松本淸張, 《昭和史發掘 1》, 文春文庫)


한 사람의 내상(內相)은 3ㆍ1운동 직후에 사이토(齊藤) 총독과 함께 조선에 왔던 총독부의 2인자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1868.2.3~1949.11.25 秋田県출신), 또 한 사람은 대만 총독부의 2인자, 민정(民政)장관을 ‘하고 있을 때 대만사람들을 몇천명이나 죽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1857.7.24~1929.4.13岩手县출신)였다. 이들은 모두 5년 전인 1918년의 일본민중의 쌀폭동을 각료로서 체험하였다.

제국일본의 내정(內政)의 우두머리를 소문의 원천으로 보는 설(說)은 이렇다.

“조선인 학살을 부추겨 일으킨 것은 식량폭동(주 지진으로 도쿄의 절반이 불타, 전 시가의 교통, 통신, 전기가 단절되어 시민의 식량접근이 일조에 불가능해졌기에)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민족증오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정부로 향하는 민중의 반항을 조선인으로 향하게 했을 터이다.”(‘朴烈大逆事件’, 《昭和史發掘 1》) (월간 조선 3월호)참조

 

1.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1868.2.3~1949.11.25 秋田県출신)

 

 

江戸詰의 秋田藩藩士 水野立三郎의 아들

1871년(明治4年) 봉토가 폐지되고 현을 설치한(廃藩置県) 행에 의하여, 1874년(메이지 7년) 일가는 東京으로 돌아간다. 1882년(明治15年) 경, 錬太郎로는 부모님을 잃는다. 神田의 공동설립 학교를 거쳐, 대학 예비문(후의 一髙)에 입학, 제국대학 법과 대학(현재의 東京大学法学部)을 明治25年에 졸업, 穂積陳重교수의 추천으로 渋沢栄一의 第一銀行에 취직하지만, 明治26年 梅謙次郎 교수의 권유에 의해 農商務省鉱山局에 들어간다. 明治27年, 内務省 土木局長의 都筑馨六(1861-1923 貴族院議員、男爵、枢密顧問官)로부터 초대되어 내무성에 들어간다. 社寺局長、地方局長등을 역임, 내무의 중진이라고 칭해진다. 原敬의 중용되어, 정우회(政友会)의 당원이 되어, 貴族院議員이 된다. 後藤新平로부터의 요구로 寺内正毅内閣의 내무 대신. 加藤友三郎内閣, 清浦奎吾内閣의 내무 대신. 寺内内閣의 内相 당시 1918년(大正7年) 쌀소동(米騒動:일본 민중들이 쌀도매상들의 가격담합에 항의한 사건)이 있었다. 1919年, 原敬内閣(1918.9.29-1921.11.13)때, 조선 총독부의 정무 총감(政務総監)이 되어, 文治政治를 실시한다. 加藤内閣은, 加藤友三郎 수상이 8월 26일에 사망하여, 9월 1일에 関東大震災이 있었기 때문에, 후임의 내상(後藤新平1923.9.2-1924.1.7)이 정해질 때까지(9월 2일), 선두지휘를 했다.


2.고토 신페이(後藤新平1857.7.24~1929.4.13岩手县 奥州市출신)

 

 

留守家家臣 後藤実崇의 長男

(1906)男爵、(1922)子爵、(1928)伯爵。日本植民地経営者

台湾総督府民政長官。満鉄初代総裁。逓信大臣、内務大臣、外務大臣。東京市第7代市長、보이스카웃日本連盟初代総長。東京放送局初代総裁。拓殖大学第3代学長。

1910年8月22日에 대한제국(大韓帝国)을 併合 실현시킨 第2次桂内閣(1908.7.14-1911.8.30)에 체신대신·초대내각철도원총재(1908.7.14-1911.8.30),

寺内内閣의 内務大臣(:1916.10.9-1918.4.23)·外務大臣(1918.4.23-9.28),

東京市長(1920.12.17-1923.4.20), 第2次山本内閣 다시 内務大臣(1923.9.2-1924.1.7) 등을 역임했다. 관동대지진 후에 내무 대신겸 제국의 수도 부흥원총재로서 토쿄의 도시 부흥 계획을 입안했다(열도 에도가 비로소 일본역사의 에도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東京府)에 흐르는 스미다 강(隅田川)과 아라카와 강(荒川)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다.


복구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히메지(姬路城:兵庫縣姬路市)나 경성(京城)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복구를 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 등이 계획되어 보다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은 일본이 안전한 땅이 아니라는 인식을 일본인에게 영원히 심어 주었고 이러한 불안이 이후 적극적으로 중국을 침략 지배하겠다는 일본 제국주의를 키운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일본의 안전 불감증의 심각함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다.[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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