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기후천문

기름종이 우산에서 바라본 태국과 일본

한부울 2010. 12. 14.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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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종이 우산은 중국이 원산이라 한다.

또 이 기름종이 우산은 아열대, 또는 열대 몬순기후로 우기가 긴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비를 막기 위해 사용하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름은 방수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종이 기름을 발랐던 것이다.

아시아지역에서 일본(日本:동남아왜구와 열도일본)、조선(朝鮮:중국,대륙조선과 한반도조선)、월남(越南)、유구(琉球: 오키나와 와 대만)、태국(泰國)、라오스(寮國)로 전파되었다고 하고 있다.

중국은 조선이다.

동남아왜구와 열도일본,

오키나와유구 와 대만유구,

이러한 이중 표기는 근세기 역사 조작으로 발생된 것들이다.

아래 한어자료를 보면 중국대륙 전역(浙江餘杭, 四川分水, 江西甲路, 湖南長沙, 湖北漢口, 福建福州, 福建洋口, 雲南滎陽)에 걸쳐 기름종이 우산이 제작된 것으로 파악된다.

물론 조선시대때 기름종이 우산을 사용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유독 일본 여인들은 이 기름종이 우산을 애용하는 것을 넘어 패션 도구로도 사용하였던 것 같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여인들이 외출시 화려한 기모노를 입고 형형색색의 기름종이 우산을 받쳐 든 모습을 보면서 차림새가 퍽 이상하고 이색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이 기름종이 우산은 태국에서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전통적으로 민간에서 제작하고 이어 오고 있다.

태국 치앙마이 시내에서 9km 떨어져 있는 보상(Bo Sang)이라는 마을에서 지금도 기름종이 우산과 사원용 종을 만들어 관광상품으로 팔고 있다.

그 모양이 일본 여인들이 들고 다니던 우산 색깔 모양 모두가 매우 흡사하다.

이 기름종이 우산은 분명 일본과 태국사이에 있을 밀접한 역사연결고리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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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종이 우산에서 바라본 태국과 일본


우산은 4세기 말엽 중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처음의 우산은 비단으로 만들어졌다. 전차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가리개로 썼던 것이 그 효시라고 한다. 하지만 비단 우산의 가격이 너무 비쌌었기 때문에 종이 만드는 기술이 발달하자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이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먼저 사용되었고, 서양으로 전해져서 헝겊우산이 됐다는 설이 있다. 1747년 한 영국 사람이 중국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서양인이 중국 사람들이 기름종이로 만든 우산을 쓰고 돌아다니는 걸 보고 그 후 그는 우산을 영국으로 가지고 들어가서 모방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굉장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상하이저널]


우산(雨傘)은 비, 눈, 우박이 내리고 있을 때에 스스로의 몸이나 소지품을 적시지 않기 위해 쓰이는 물건이다. 이와 비슷한 물건으로 양산(陽傘)이 있는데 강한 햇볕을 피하기 위해 쓰인다. 우산과 양산이라는 날맡에서 산(傘)은 위에서 내려오는 것을 막기 위한 물건으로, 손으로 쥐고 다닐 수 있다. 고어(고유 한국어)로는 슈룹이라고 했다.

슈룹 <명사> <옛말> 우산


우산

우산은 흔히 볼 수 있으며 축과 뼈대가 금속으로 되어 있고, 방수가 되는 옷감이 펼쳐지는 것이 많다.


양산

양산을 가리는 여자양산은 비가 아닌 강한 햇볕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지면에 축을 찔러 이용하는 크기가 큰 물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양산」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우산과 같이 손에 가지고 사용하는 크기가 작은 물건을 가리킨다. 크기가 큰 물건은 파라솔(parasol, 프랑스어)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parasol는 프랑스 말의 원래의 뜻은 부인용의 양산을 가리킨다. 양산은 그 용도상, 방수 기능보다 자외선 반사 기능이나 장식성이 요구되어, 우산과 비교해 보통 크기가 작지만, 커다란 돔형도 등장했다. 바닷가에서 사용되는 것은 비치파라솔(beach umbrella)로 불린다.[위키]


기름종이 우산(油紙傘)

 

 

亦傳至亞洲各地如日本、朝鮮、越南、琉球、泰國、寮國(Laos)等地

 

 

                                                   琉球古代婚禮中所用的油紙傘

 

 

                                             일본(歌川国芳所繪的江戶時代的持傘女子)

 

 

                                            일본(高田馬場邊作藝妓打扮的持傘表演者)

 

 

                                                    泰國慶典活動中的油紙傘


태국 북부의 또 다른 아름다움 - 보상마을

 

 

 

 

 

 

보상(Bo Sang)은 우산과 사원용 종을 만드는 마을로, 치앙마이 시내에서 9km 떨어져 있다. 이 마을을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우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인데 마을은 우산을 만드는 곳과 파는 곳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산에는 나무로 된 손잡이부터 대나무로 된 우산의 살, 그리고 우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덮개 부분은 실크와 기름종이로 구성되어 진다. 보상마을의 우산이 유명한 것은 아마도 이 우산의 덮개 부분의 장식에 대한 부분 때문이 아닌가 싶다. 기름종이 혹은 실크에다 각종 무늬를 넣어 만드는데 태국 전통의 각종 문양과 코끼리, 난등을 넣어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며 관광객들은 주로 이러한 우산을 구입하게 된다.[인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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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두(중국 쓰촨성)=신화/뉴시스]한 우산 제작자가 2일 중국 청두(成都)에서 열린 국제무형문화재 페스티벌에서 400년 역사를 지닌 기름종이 우산 제작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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油紙傘是源於中國的一種紙製傘,亦傳至亞洲各地如日本、朝鮮、越南、琉球、泰國、寮國等地,並在各地發展出具有當地特色的油紙傘。隨著客家人遷移至台灣定居,也令中式油紙傘在台灣生根發展


浙江餘杭油紙傘


浙江餘杭的紙傘製作至少230餘年歷史,清乾隆三十四年(1769年),董文遠九房開設傘店。餘杭油紙傘有漁船傘、文明傘等多個品種,由於技術精良、用料上乘,做出來的傘經久耐用,日曬雨淋也不會散架和穿裂,很受歡迎。從前不少外地香客途徑餘杭都會在半夜叩門購傘,作為禮物送給家鄉的親友。


1951年,浙江省選擇餘杭紙傘為手工業合作化試點,組建「雨傘生產合作小組」,又在1952年底,建立「雨傘手工業合作社」,成為全省第一個手工業生產合作社,受國內媒體廣泛報導。隨著市場上出現鋼製骨架的晴雨兩用傘,這種紙傘逐漸被淘汰,餘杭油紙傘技藝亦瀕臨失傳。


直至2006年12月5日,餘杭區委副書記、代區長姜軍在瓶窯塘埠村駐村入戶時,製傘老師傅劉有泉向姜軍表示想恢復餘杭紙傘,為當地當地山民開發旅遊商品致富,迎合近年農家樂旅遊的潮流。劉有泉於油紙傘開始被淘汰時就萌生了把這種傳統工藝繼承下去的念頭,不久在富陽找到一個生產竹傘架的廠家,用幾百元人民幣買回了100把竹傘架。但他當時沒有掌握加工工藝,只能保管好這批傘骨架,保管了三十多年。《城鄉導報》於12月7日頭版頭條報導《尋找制傘師傅恢復「餘杭紙傘」》,引起當地人高度關注。至12月19日,四位老師傅房金泉、陳月祥、沈麗華、孫水根於瓶窯鎮塘埠村聚首,商議恢復餘杭紙傘。他們在2007年1月憑著靈巧之手,成功恢複製作油紙傘。他們在瓶窯塘埠村傳授技藝,帶動山區一大批竹農致富。餘杭區文廣新局把紙傘作為民間手工技藝項目進行重點保護,浙江省文化廳也把餘杭油紙傘列入浙江非物質文化遺產名錄。同年6月,餘杭紙傘於杭州市首屆非物質文化遺產保護成果展中展出。


四川分水油紙傘


四川瀘州分水油紙傘起源於明末清初,有四百多年歷史,當地出產的油紙傘手工精巧,圖案精細、色彩鮮艷、花型美觀,不但小巧精緻,而且擋風力強,既美觀又實用。1993年5月,江陽區分水嶺鄉的分水紙傘廠六位老藝人以四個月時間,用88根老松、52根楠竹、1800張皮紙、100公斤油料,經過70多道工序製成「二龍戲珠」傘,被譽為「中國傘王」,曾申報過金氏世界紀錄,並出口至多個國家如英國、馬來西亞、新加坡等。


洋傘流行後,瀘州油紙傘的工藝日漸式微,油紙傘工序繁複,製作成本高,利潤少,難以吸引年輕人入行,2004年當地只有三十多名老工匠繼續這門工藝,當時不少人擔心瀘州油紙傘會失傳。2005年10月,上海吉尼斯大世界瀘州油紙傘再度寄邀請函給江陽區政府,當地油紙傘業就開始復甦。


油紙傘業復甦後,先在雲南、貴州及瀘州古藺縣、敘永縣等少數民族聚集地區盛行,作為祭祀、恭賀、饋贈等禮儀用品。不久又出口到日本、新加坡、韓國、香港、澳門等地區。


江西甲路油紙傘


江西婺源甲路村生產的油紙傘技藝古樸、造型美觀大方,堅固又輕巧,所謂「金溪斗笠甲路傘」 。


相傳宋朝時當地人馬庭嵐被封為丞相,從京城帶了一把油紙傘回鄉,甲路人便不斷改進工藝,世代相傳製傘。傳說清朝康熙年間,婺源當時屬安徽,康熙帝微服到了當地,看徽劇時忽然下雨,前排觀眾撐傘擋住後面觀眾的視線,有頑童就向前掉觀眾擲石,石子擊中其中一把傘卻反彈。康熙帝就派人那把傘產自何處,正是產自甲路,自以有了「甲路傘,甲天下」的說法,並收入《婺源縣志·貨屬篇》。江南地區有一首民謠:「景德鎮的瓷器、甲路的傘、揚州的女子不用揀。」讚賞甲路傘,又有「甲路紙傘甲天下」的美譽。


甲路傘於1936年曾獲得國際產品博覽會金獎,1943年為全盛時期,產量曾高達二十五萬把,出口外銷十七萬把。2000年代初只有三名超過八十歲的老人傳授技藝,原材料之一油柿樹為瀕危物種,甲路油紙傘因此面臨失傳。有見及此,當地製傘業改良工藝,開發出天然樹葉、恢膜紙等新品種,提高了油紙傘的質量,2006年工藝改進後年產50餘萬把,遠銷美國、日本、韓國等國家。該縣鼓勵農民學到技術後在家進行初加工,然後由傘廠進行深加工,進行大規模生產,現時中雲、賦春、許村等多個鄉鎮形成了一大批專業加工村。全縣規模工藝傘廠4家,年產值800萬元,專業加工村達30多個,從業人員1800多人。


湖南長沙油紙傘


湖南長沙的油紙傘業有一百多年歷史,長沙有史可查的最早的傘店是陶恆泰紙傘店,由陶季橋於清朝咸豐年間創辦,幾年後又在附近另組陶恆茂紙傘店。


1900年,梁敬庭在長沙市北正街梁宏茂傘店學藝後掛牌梁宏發傘號開業,生產老式明油、黑油紙傘和特製鴨棚用大傘,出產的紙傘做工精細,經久耐用,得到「湘潭木屐,靖港油傘」的美譽。1921年,潘饋清兄弟創辦菲菲傘廠生產紙傘,除了傳統的繪花外,還有噴花、印花和貼花,圖案亦多種多樣,遠銷香港、澳門和東南亞,並於1929年的中華國貨展覽會上獲優等獎 。當地生產的油紙傘最高年產接近三萬把,直至1975年2月,靖港雨傘社被撤銷,靖港油紙傘停產,長沙其他地區的紙傘業亦式微。


湖北漢口油紙傘


湖北漢口蘇恆泰傘店出產的油紙傘有百多年歷史。1864年,來自湖南的蘇文受積蓄了30串(1串為1000文),開始嘗試投資在家製傘,他把學過的造傘技藝改良,成品經常總是供不應求。不久就在漢正街關帝廟魁斗巷口開了蘇恆泰傘店,僱工12人,帶學徒3個,一個月能賣500把600把,並帶動了當地的雨傘市場。之後在大火路先賢巷開設了作坊,生產方式由一人生產整把傘轉為五人一組分工製造傘子。同治九年,蘇恆泰月銷雨傘700把,年獲利接近200串文。


蘇恆泰紙傘很受當地人歡迎,江漢平原曾經流行於結婚時買紅藍蘇恆泰傘各一把,男持紅、女持藍,以喻「紅男綠女,婚姻美滿」之意。直至1970年,蘇恆泰油紙傘停產,這項民間工藝也在當地絕跡。


福建福州油紙傘


油紙傘是「福州三寶」之一(另兩種是脫胎漆器和牛角梳),在從前福建福州人的生活當中有重要的地位,當地有句俗語叫「包袱傘」,意思是出門人所帶包袱中都有傘。


福州的油紙傘可以追溯至五代十國時期,王審知率兵南下入閩建立閩國,來自中原和江浙一帶的人把造傘工藝帶到福州。清朝進入了繁榮期,清末民初時全市雨傘店號最多時達300多家,辛亥革命後的抵制日貨運動中,福州市民把傳統的福州油紙傘稱為「國傘」,大力提倡使用 。


以中亭街上的楊常利傘店最為著名,有「選料精,上油膩,繪花雅」的特點,所用之竹材必須為青山老竹,傘面的紙必須為福建省特製的棉紙。1915年在巴拿馬舉行的萬國博覽會上,評委們檢測楊常利出產的「雙喜牌」紙傘,發覺它可承受1170次的反覆收撐不起頂、不斷線、不裂槽,以五級逆風吹20分鐘傘柄不折、傘骨完好,長時間泡在沸水中,不脫骨、紙不爛,因而獲得優勝獎殊榮。1933年在芝加哥百年進步博覽會上也獲得獎項。中華人民共和國成立後又多次獲福州市人民委員會授予名牌產品稱號。


「大躍進」時,當地各傘廠合併為「福州雨傘總廠」,不久因為溫州仿綢傘的競爭,該廠就派出林永欽到溫州學藝,改良了福州油紙傘,並於當地和東南亞暢銷。文革後因為布傘流行,福州油紙傘就由實用品轉向工藝品發展。1985年,該廠生產的油紙傘遠銷日本、歐洲和東南亞,三年後先後退出歐洲和東南亞市場。近年又把紙傘原料和工藝改良,每把傘有72條傘骨,撐起來大,合起來小,狀似蛇腰,故名「蛇傘」。


1990年代,福州市委領導林愛枝到美國西雅圖參加全世界花傘藝術節,並展示一把紅色大傘,全場轟動。 福州雨傘總廠於1997年倒閉,福州紙傘業也因此式微,現時只有福州西門的一個作坊繼續生產紙傘,出口至日本。一些造傘工匠雖然已經轉業,仍然希望能振興製傘業,希望當地政府扶持。


福建洋口油紙傘


福建南平洋口鎮油紙傘,是福建紙傘「三口」名牌之一(另兩個為水口、閩清口),於二十世紀初開始生產,最高年產量達五萬多把。贛東南一帶姑娘出嫁曾以有此隨嫁為榮,1970年代開始,傳統油紙傘逐漸被新式的布傘和摺疊傘取代,當地就由生產實用為主的傘改為生產小巧玲瓏、輕巧美觀的小花傘。傘面以手工繪製各種圖案,1980年代獲得福建省工藝美術百花獎。現時出口至香港、澳門、台灣、東南亞、歐美等地。


雲南滎陽油紙傘


雲南騰沖滎陽村的製傘業有二百多年歷史,傳承了九代,又叫做「紙撐子」。相傳當時在騰越城縣衙當師爺鄭以公閒逛時結識了西街的姓張姓周的兩個懂做紙傘的師傅,跟他們學到手藝並帶回家鄉,代代相傳過去當地生產的油紙傘供應整個滇西市場。當地很多客家人聚居,最喜愛油紙傘,村長鄭傳國指該村過去80%的村民都會做紙傘及其他編製品,而且是世傳。如今村裏僅餘四家人仍然在製作油紙傘,會做的人共五人,其中三人已年逾古稀。現時以鄭家朝一家的手藝最好,用料講究,塗料中的天然桐油和柿子水都要依古法調配,成品堅固美觀,一天只能做一兩把,他所製的油紙傘曾獲雲南省民族民間美術藝人三等獎。另有鄭映樓做的大紙傘,因為過去商家喜歡在店前擺放大紙傘,可以擋雨遮陽,招商引客,因此又有「照舖傘」之稱。現在他們都只是在農閒時才製傘


該處製作的花紙傘做工精細、色彩鮮艷、式樣美觀,質量好,曾一度熱銷保山、大理、昆明等地。1950年至1951年從業57戶,年產雨傘4萬把。1952年60戶90人,年產量達3萬把,其中大傘佔10%,1953年走國營貿易、合作加工之路,提高了規格質量,圍線由的四道加為六道,當年盈利(含稅收)約1.3萬元人民幣。1954年有62戶,92人,產品大量銷往少數民族地區,並銷往保山、縣城及出口緬甸。1958年至1960年,國營三化廠生產過油紙小花傘。1965年後由於布傘和尼龍傘取代了油紙傘作為日常生活用品,小油傘停產,僅有少量的大油紙傘賣給路邊攤使用用。近年當地紙傘業再度引起注意,又恢復了小花傘的生產,作為工藝品,但產量不大。2006年5月21日,騰沖縣文產辦主任周特等人到當地紙傘製作基地視察,尋求紙傘產業化發展道路。現在當地製傘主要是為了傳承民間工藝[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