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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시암타이(siam tai)의 공통점

한부울 2010. 4. 8. 17:45

황제폐하!-백두구(白豆蔻:Cardamom)  http://blog.daum.net/han0114/17049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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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시암타이(siam tai)의 공통점

 

동남아 인도차이나반도를 서양제국(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들이 서로 나눠가지면서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왜 태국(시암 siam)은 제외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문다.


1. 그야말로 민족성이 강해서

2. 일본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풍(神風)이 몰아 닥쳐?

3. 몽골제국과 서양제국들이 공통적으로 태국(시암 siam)과 일본이란 존재를 보호하기로 양해(같은 동지애가 발동)하였기 때문에?

 


13세기에 몽골제국은 동남아시아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다.

1281년, 1285년과 1288년에 일본, 베트남에 침공한 몽골군은 실패한다.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였으나 포기하고 베트남 중부에 있는 참파왕국 원정을 1292년에 시도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난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몽골군이 동남아시아 정벌에 실패한 이유와 일본이 몽골군에 점령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본이 동남아에 존재하였다고 여겨지는 면이 아이러니 하게도 있다.

신풍으로 미화하고 있지만 기실 지금 열도에 존재하지 않았을 확률이 대단히 높다.

동남아시아 북부는 엄청난 강이 마치 바다처럼 넓고 흐름이 강하다.

동남아시아 북부로 흘러드는 강 상류는 티벳고원 설산을 수원지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풍부하다.

그곳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나온 전쟁담일 것이지만 좀 과대 포장된 설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아시아 전역을 공격한 몽골군 정체가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몽골군인가 하는 것도 믿을 수 없고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몽골제국과 징기스칸은 근세기에 들어 서양에서 만든 영화와 미디어를 총 동원한 이야기 역사이다.

마치 예수를 주제로 삼은 영화, 소설등이 센세이션을 일으킬 정도로 파급효과 컸던 것처럼 엄청난 물량을 투자한 역사 만들기라고 볼 수 있다.

그 때 징기스칸의 이야기 역사도 그런 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징기스칸이 뜨면서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신풍이란 신조어가 탄생되면서 열도가 졸지에 신의 영역이 되어 버렸고 가미가제란 신성어가 탄생하여 수많은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 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계질서를 주도한 서양세력들에 의한 근세기 역사재편성과정에서 역사만들기 픽션일 가능성도 점쳐지는 면이고 그때까지만해도 뚜렷한 근거지 없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왜구무사정치집단인 일제가 가장 큰 혜책을 받는 수해자이기 때문에 주도한 서양세력보다 더 적극적이지 않았는가 한다.

일제가 스스로가 나서 성웅 이순신의 띄우기 한 사실도 따지고 보면 열도 일본만들기에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몽골제국의 역사는 고려연합의 역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본이 열도에 자리 잡으면서 거대한 고려연합이 한반도 고려로 쪼그라 들게 된다.

일본이 열도에 자리 잡으면서 거대한 대륙조선이 한반도 조선으로 쪼그라 든다.

더 세밀하게 파악해야 할 문제이지만

결과적으로 고려연합의 한 부류 몽골군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때문에 고려(몽골군)가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 왜구(일본)는 결론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존재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

서세가 동남아시아를 평정하기 시작하던 19세기 1840년도에도 태국이 존재하는 곳에 현재 일본으로 둔갑한 왜구무사정치집단들이 집거 또는 웅거하였다고 보아야 하는 점이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분명코 다시 말하지만 일본은 역사적 사실로 보아 지금의 열도는 그들의 근거지가 도저히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나서 진실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는 곳도 그들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곳도 바로 동남아시아에서 찾아야 마땅한 이야기가 된다.

지금의 열도를 기반으로 하는 역사를 일본사라고 우기고 있지만 근세기 역사재편성 과정에서 돌출한 미스테리이며 그 당시 세계질서를 장악한 서세들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이것 역시 음모론으로 치부 될 수 있겠지만 왜구(일본)란 존재가 열도에 존재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 이치에 없는 이야기 일 뿐이다.

서세가 동남아시아로 몰아닥친 1840년도에는 일본주체세력들이 시암(siam)타이에 집거 웅거하였기 때문에 서세가 전위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을 同志愛的 입장에서 보호하기로 양해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더 나아가 서세가 동남아지역(대륙조선)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자원으로 이용하였을 가능성이 많아 침략대상에서 아예 제외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만하면 이유는 충분해 진다.


그리고 아래는 침공세력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와 피침세력인 시암타이와 일본이 같은 시기에 맺은 통상조약인데 아무래도 시암타이와 일본은 동일한 존재로서 서세가 의도적으로 분리한 기록이 아닐까 의심 되는 점이다.
왜냐하면 근세기 이후 시암타이 즉 태국은 동남아에 근거해야 하고 일본은 지금의 열도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시암(Siam)타이가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 (Siam–UK)과 일본이 프랑스와 맺은 친선통상조약T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France and Japan, signed 1858, 그리고 동년 Anglo-Japanese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英日修好通商条約)을 분석할 필요성이 있다.

  

위 통상조약일지인데 이상하게 시암타이와 일본이 맺은 주요 서양제국과 조약 시간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2~3년 차이다. 근세기 기록에 명과 조선, 청과 조선을 분간할 수 없도록 시간차를 낸 것처럼 꼭 2~3년 그런 년도 차이다.

 

1855년 네덜란드와 화친조약 체결 이후 시암타이보다 2~3년 늦은 1858년 일본이 영국과 프랑스를 동시에 통상조약을 맺을 이유를 찾아야 한다. 분명히 이 조약들은 동남아시아를 근거로 하거나 연계한 조약이라고 보는 것이 옳고 난데 없이 열도까지 넣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일본이란 왜구무사정치집단들이 웅거한 곳이다. 

왜구무사정치집단들이 동남아와 필린핀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기득권을 미국과 서양제국에게 넘겨 줌으로서 무엇을 얻었을까?


타이는 1826년 영국과 맺은 친선·통상 조약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Siam–UK)으로 최초로 동남아시아 지역 서양 열강의 등장을 인정했다. 1833년에는 미국과 시암(1939년 이전과 1945년-1949년에 사용되었던 타이의 옛 이름)간에 외교관계가 시작되었다. 그 후 몽꿋(라마 4세, 1851년-1868년)와 그의 아들 출라롱꼰(라마 5세, 1868년-1910년) 즉위 하에서 시암은 서양 열강과 친선 관계를 굳게 다졌다. 타이인들은 이들 왕들의 능력 있는 외교력과 타이 정부의 근대화 개혁 때문에 타이가 남아시아·동남아시아를 통틀어 식민지화 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유일한 나라로 남을 수 있었다고 여긴다(?) 이는 타이의 오늘날 국명인 프라텟 타이(1939년-1945년에는 비공식 국명으로 사용, 1949년 5월 11일 공식 국명으로 제정)에서도 볼 수 있는데 프라텟은 '나라', 타이는 '자유로운'이라는 뜻이다.[위키]

 

나라 국명이 시암, 타이, 프라텟 타이, 타이랜드 로 넘어오는 과정이 순수하지만 않다.

1909년의 영국-시암 조약은 시암과 영국령 말라야 사이의 국경을 정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국경이 되었다. 이때 말라야의 토후국 파타니와 케다의 일부였던 파타니(Pattani)주와 얄라(Yala) 주, 나라티왓(Narathiwat) 주, 사툰(Satun) 주가 타이령이 되었다. [위키]

 

근대 시암타이의 왕조일지-샤크리(Chakri)시대(1782-현재)

Rama 1세(Chakri, 1782-1809)

타이족의 부와 중국계 모 사이에서 출생

방콕에 도읍하고 관제 및 지방조직 정비

캄보디아의 Battambang지역을 병합하고 1785년의 버마 격퇴

Rama 2세(Phatthaloetla Naphalai, 1809-24)

정부조직의 제도화(왕실의 참여강화)

1822년 영국의 우호통상조약 체결 제의를 거절

Rama 3세(Nang Klao, 1824-51)

Rama 2세의 서장자(Rama 2세는 나이어린 적자 Mongkut를 보호하기 위해 Nang Klao에 왕위를 승계) 1824년 영국과 버마전쟁 발발, 1826년 버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태국과 통상조약 체결(Burney조약)

Rama 4세(Mongkut, 1851-68)

Nang Klao 재위기간(27년) 수도원에서 불교경전과 서양문물을 연구하며 생활

1855년 영국과 우호통상조약체결(Bowring조약), 태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불평등 조약

1856년 동 조약 비준시 최초로 'Siam'이란 국호 사용, 미국과 프랑스와 우호통상조약 체결

Rama 5세(Chulalongkorn, 1868-1910)

근대지향의 개혁정책 추진, 인재등용(학교 설립)

1885년 부왕제를 폐지하고 황태자제를 도입

1902년 국민 개병제 및 1905년 현금 인두세제 도입

불교 개혁, 사원의 교육기능강화, 초등교육의 의무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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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AD) 10월, 애로호(號)사건이 전쟁으로 발전(~1860). 중국광둥[廣東]에서 반영(反英) 폭동.

일본, 네덜란드와 화친조약 체결.


1857년(AD) 5월10일, 인도에서 ‘세포이의 난’ 일어남(~1858).

9월 델리 함락되고 황제는 포로가 됨.

중국 광시[廣西]에서 프랑스인 선교사 살해. 영국˙프랑스군이 광둥[廣東]을 함락, 제2차 아편전쟁 발발.


1858년(AD) 동인도회사 해산으로 인도 통치권이 영국정부에 이관(인도 정식식민지화)

1858년(AD) 인도에서 무굴제국(indies)이 멸망됨.

영국의 인도통치개선법 공포로 영국의 동인도(東印度)회사 폐지, 영국의 직접통치 시작.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4개국과 톈진[天津]조약 체결.

프랑스, 사이공 점령으로 전쟁 발발.


1858년 reaty of Amity and Commerce between France and Japan, signed

1858년 anglo-Japanese Treaty of Amity and Commerce (日英修好通商条約)


1859년(AD) 일본, 가나가와[神奈川]˙나가사키˙하코다테[5館] 등 개방, 영국˙러시아˙프랑스˙네덜란드˙미국에 무역허용. 포르투갈과 수호통상조약 체결. 


1866년 영국, 미얀마를 인도제국에 합병

1886년 프랑스,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삼음

1887년 프랑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형성

1893년 프랑스, 라오스 지배

1895년 영국, 영국령 말fp이 연방형성

1898년 미국,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음

1904년 네덜란드, 네덜란드령 동인도 형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