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히말리아산맥(喜马拉雅山脉 :Himalayas Range)

한부울 2009. 9. 2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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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리아산맥(喜马拉雅山脉 :Himalayas Range)

 

산 이름

Other names and meaning

Elevation(m)

1

Everest

Sagarmatha (네팔) 세계정상
Chomolangma (티벳) 세계여신

8,850

2

K2

Chogo Gangri(큰 산)

8,611

3

Kangchenjunga

다섯 개의 위대한 눈의 보고

8,586

4

Lhotse

남쪽 꼭대기

8,516

5

Makalu

거대한 암흑

8,462

6

Cho Oyu

Qowowuyag, "청록의 여신"

8,201

7

Dhaulagiri

흰 산

8,167

8

Manaslu

Kutang, 영혼의 산

8,156

9

Nanga Parbat

Diamir, 나신의 산. 정령(精靈)의 산

8,126

10

Annapurna

풍요의 여신

8,091

11

Gasherbrum I

빛나는 산

8,080

12

Broad Peak

Faichan Kangri, 넓은 눈의 산

8,047

13

Gasherbrum II

-

8,035

14

Shishapangma

Xixiabangma, 황량한 땅

8,013

15

Gyachung Kang

unknown

7,952

16

Gasherbrum IV

-

7,925

17

Masherbrum

unknown

7,821

18

Nanda Devi

천국의 여신

7,817

19

Rakaposhi

광채의 벽

7,788

20

Gangkhar Puensum

Gankar Punzum, "삼산무녀"

7,570

21

Ama Dablam

어머니와 그녀목걸이

6,848


1. Everest

珠峰, 珠穆朗玛峰, 台湾称 圣母峰, 喜馬拉雅山脈之上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확인된 것은 1852년의 일이다.


영국은 1849년부터 식민지였던 인도의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광범위한 측량사업을 벌였는데 그중에서 P15란 기호로 표기되었던 봉우리가 해발 8,840미터로 세계 최고의 높이를 가진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세계 최고봉은 그후로도 P15란 기호로만 불리다가 1865년에 가서야 비로소 전임 측량국 장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경(Sir Gorge Everest)의 이름을 따서 마운트 에베레스트(Mt. Everest)라 명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산의 이름에 인명을 붙일 수 없었던 당시의 관례를 깬 것으로 재래의 고유명이 없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그후 십 수년이 지나서 이 산에 초모룽마(Chomolangma)라는 티베트 이름이 옛부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세상에서는 에베레스트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초모룽마는 티베트어로 초(Chomo)는 '여신, 수도녀'를 뜻하며 룽마(Lungma)는 '산골짜기, 지역, 경지'를 뜻한다. 그래서 초모룽마는 '대지의 여신, 세계의 여신'을 의미한다. 또 네팔인들은 사가르마타(Sagarmatha)라고 부르는데 네팔어로 사가르(Sagar)는 '세계'를, 그리고 마타(Matha)는 정상을 의미한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원정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부터이다. 1919년 영국왕립지질협회의 회장에 취임한 영허스번즈는 그의 임기 동안에 에베레스트 등정을 가장 큰 사업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에베레스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 에베레스트위원회는 후에 히말라야위원회로 바뀌었으나 수차례에 걸친 에베레스트 원정은 모두 이 위원회에서 주관하게 된다.

 

1921년 봄 드디어 제3의 극지라 불리는 에베레스트봉에 역사적인 도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하워드 버리가 이끈 이 원정은 4명의 대원과 3명의 과학자가 참가한 정찰 원정이었다. 이들의 목적은 에베레스트에 이르는 티베트쪽 접근로를 찾고 등정 가능한 루트를 찾는 것이었는데, 4개월에 걸친 원정기간 동안 인도의 다아질링을 거쳐 티베트로 들어가 에베레스트의 북동릉의 안부, 즉 노스 콜(6,985m)까지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2차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6년까지 7차례나 도전을 했으나 최고봉의 정상에 오르지 못했다. 그때까지 인간이 오른 최고의 높이는 8,572미터였다. 2차대전이 끝나고 네팔왕국이 외국인에게 문호를 개방한 직후부터 에베레스트에 대한 도전은 다시 시작되었다. 미국과 스위스, 그리고 영국원정대가 각축을 벌였으나 몇 년동안 계속 패퇴를 거듭했다.

 

1953년 프레몬순기의 입산허가를 네팔정부로부터 받아놓았던 영국은 52년에 스위스원정대가 실패하자 제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했다. 존 헌트대장은 이때까지 원정 중에서 기량이 가장 뛰어난 대원들을 선발했다. 원정대는 2개월간의 등반 끝에 힐라리대원과 텐징 셀파를 마지막 정상공격조로 정했고 이들은 5월 28일에 남동릉을 올라 8,350미터 지점에 제9캠프를 설치했다.


5월29일 날씨는 쾌청하게 맑았다. 새벽 6시30분경 마지막 캠프를 떠난 힐라리와 텐징은 오전 9시경에 남봉에 올라서서 정상을 보았다. 그곳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날카로운 설능을 등반하던 두 사람은 5미터 정도의 수직의 암부를 만났다(후에 이곳은 힐라리 스탭이라고 명명되었다). 그곳을 어렵게 오른 두 사람은 바로 앞에 보이는 정상을 향해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은 더 이상 높은 곳이 없는 어느 꼭지점에 섰다. 그곳이 세계 최고봉의 정상이었다.

 

1953년 5월29일 오전 11시30분 드디어 인류 최초로 제3의 극점이라 불리는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선 것이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실로 100년 만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에베레스트는 세계산악인들의 동경의 대상으로 매년 원정대가 끊이질 않았다. 1997년 말까지 44년동안 43개국에서 391회 원정이 있었고, 676명의 등정자를 배출했다. 이들중 여성은 39명이고 1회이상 오른 사람은 9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히생자는 22개국에서 148명이나 되었다.

 

한국은 1977년 9월 15일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대장 김영도)의 고상돈대원과 셀파 1명이 남동릉 루트로 등정해 세계 8번째 에베레스트 등정국이 되었다. 

 

 

 

 

2. K2

喬戈里峰, 為世界第二高峰

 

K2는 그 높이에서 뿐만 아니라 등반에 있어서도 많은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산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이 봉우리가 세계 두 번째 고봉으로 알려진 것은 1858년의 일이다. 에베레스트와 같은 방식으로 이 산을 측량한 결과 8,611미터라는 숫자가 나온 것이다. 이때까지 이 산은 K2(카라코람 제2봉이란 뜻)란 기호로 쓰여왔던 것인데 우연하게도 세계 2위의 고봉으로 밝혀지자 그대로 '케이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후 이 산에 최초로 다가간 사람은 영국인 고드윈 오스틴이었다. 그는 1861년 카라코룸에서 탐험을 하다가 K2에 이르는 발토로빙하를 발견해 냈다. 그후 1888년 영국 왕립지질학회에서는 그의 공적을 찬양하여 K2에 그의 이름을 붙일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실제 아주 오래된 지도 중에는 이 산의 이름이 K2 대신에 '마운트 고드윈 오스틴(Mt.Godwin-Austin)'이라고 표기된 것들이 있다. 후에 이 산은 원주민들이 초고리hogori)라고 부르는 것을 알게 되었으나 이미 K2라는 이름이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초코'는 크다라는 뜻이고 '리'는 산을 뜻한다.

 

발토로 빙하 깊숙히 위치한 콩코르디아 북쪽 끝에 우뚝 솟은 K2는 크게 나눠 북릉, 북서릉, 서릉, 남릉, 남동릉, 남서릉, 북동릉의 7개 능선으로 이루어진 삼각뿔형 독립봉이다. 이 산을 오르겠다고 생각한 최초의 사람은 영국인 엑켄스타인이었다. 그는 서구인들이 히말라야에 본격적으로 원정을 시작하기 훨씬 전인 1902년에 5명의 대원을 이끌고 이 산에 들어와 총 11개의 캠프를 전진시키며 등반했다. 결국 북동릉 6812미터에 도달하는 것으로 그쳤으나 이 원정으로 K2가 그렇게 만만한 산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K2의 등반에 관심을 가진 두번째 사람은 1909년 당시 이태리 왕의 사촌형이 되는 아브루찌公이었다. 아브루찌는 비록 등정에 실패했지만 그가 발견한 남동릉은 '아브루찌 릉'으로 명명되었고 그의 뜻을 이어받아 44년 뒤인 1954년에 이 루트로 초등정하게 된다. A. 데지오가 이끄는 이탈리아의 대규모 원정대가 7월 31일 아브루찌 릉을 통하여 L. 라체델리와 A. 콤파뇨니를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1858년 이 산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판명된 지 96년 만의 일이었다. 아브루찌가 택한 대규모 캬라반과 조직적인 등반방식은 후에 히말라야 8천미터급 고산원정의 패턴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나라는 1986년 8월 3일 대한산악연맹 원정대(대장 김병준)의 장봉완, 김창선, 장병호대원이 아브루찌 릉을 통해 정상등정에 성공했다.

 

 

 

 

A:West Ridge

B:West Face

C:Southwest Pillar

D:South Face

E:South-southeast Spur

F: Abruzzi Spur

 

3. Kangchenjunga

干城章嘉峰, 金城章嘉峰

 

네팔히말라야의 가장 동쪽에 솟아 있는 세계 제3위의 고봉 캉첸중가는 히말라야의 여러 봉우리 중에서도 오래 전부터 잘 알려진 산이다. 1899년 영국의 더글라스 프레쉬필드 일행이 이 산을 두루 탐험하고 <캉첸중가 일주>라는 탐사기를 남기면서 서구세계에 널리 알려졌다. 인도의 유명한 피서지인 다아질링(Darjeeling)으로부터 불과 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장관을 이루고 있는 이 산은 에베레스트가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알려져 있었다.

 

캉첸중가(Kangchenjunga)란 산 이름은 티베트어로 눈을 뜻하는 '캉(Kang)', 크다란 의미의 '(Chen)', 보고(寶庫)란 뜻의 '주(Ju), 그리고 다섯이란 뜻의 '은가(Nga)'가 합쳐져 만들어진 합성어로 '다섯 개의 위대한 눈의 보고'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의미는 캉첸중가가 주봉외에도 서봉(일명 얄룽캉; 8,505m), 중앙봉(8,473m), 남봉(8,491m) 등의 연봉으로 이루어진 데서 연유한 것이다.

 

이 산은 55년 에반스대장이 이끈 영국대가 얄룽빙하를 경유하여 남서면으로 초등정했다. 1905년 이 산에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된지 반세기 만에 이룩된 업적으로 10개팀의 실패와 11명의 히생자를 낸 끝에 이룬 인간승리였다. 그 후 77년 인도대가 북동릉으로 두 번째 등정을 이루었고, 78년 봄에는 스페인대가 중앙봉을, 폴란드대가 남봉을 초등정하는 데 성공했다. 그후 북면으로 영국과 일본이 새 루트를 뚫었으며 82년에는 메스너 일행이 최초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고 84년에는 일본대가 남봉, 중앙봉, 주봉을 종주하는 기록을 세웠다.


한국에서는 부산 대륙산악회의 87-88동계 칸첸중가 원정대가 캐러번 도중 대원 1명의 사망 으로 인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정상등정에 성공했으나 정상사진이 없어 의혹이 제기되었다. 후에 1999년 봄 동국산악회의 박영석대원이 사실상 한국초등을 기록했다.

 

 

 

 

4. Lhotse

洛子峰

 

세계 4위의 고봉 로체는 최고봉 에베레스트에서 남쪽으로 3km정도 떨어져 있으며 에베레스트의 사우스콜을 기점으로 분리되어 있어서 에베레스트의 위성봉으로 인식이 되어서인지 등반이 다른 8000미터봉에 비해서 등반이 그리 많지는 않으나 성공률 역시 매우 낮은 봉우리이다. 산이름 로체의 '로(Lho)'는 남쪽을, '체(Tse)'는 봉우리란 뜻으로 '에베레스트의 남쪽 봉우리'를 의미한다.

 

최초의 등반은 1955년 N.다이렌퍼스가 지휘하는 국제원정대가 시도를 하였는데 프리몬순에 이산의 남쪽에 서 정찰등반을 그리고 E. 슈나이더가 지형도를 제작했으며 몬순 후에 웨스턴 쿰으로부터 정상등정을 시도했지만 8,100m 지점에서 철수했다. 초등정은 1956년 5월 18일 A. 에글러 지휘한 스위스 원정대에 의해 5월 18일 이루어졌는데 F. 루이징거와 E. 라이스가 서벽을 경유하여 정상에 도달했다.

 

현재 히말라야의 고봉의 벽중에서 가장 등반이 어려운 벽 중의 하나로 로체 남벽이 꼽히는 데 라이홀트 메스너가 '21세기에나 가능한 벽'이라고 했다. 8000미터급 14봉을 모두 오른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가 89년 로체 남벽을 오르던 중 추락사했다. 한국은 1988년 10월 2일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의 정호진, 임형칠, 박히동, 박쾌돈대원이 최초로 등정했다.

 

로체는 에베레스트와 인접한 관계로 로체봉 단독등반보다는 에베레스트와 로체를 연결하는 등반이 시도되는 경우가 많다.

 

 

 

 

5. Makalu

马卡鲁峰

 

마칼루는 네팔과 티베트의 국경을 이루는 중부히말라야에서도 쿰부 산군 동쪽에 위치해 에베레스트의 관문인 남체바잘에서 불과 38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세계 제5위의 고봉이다. 산의 이름은 힌두교 시바신의 화신(化神) '마하카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이것은 '검은 신'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실제 마칼루는 밑에서 보면 흑갈색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다른 산에 비해 검게 보인다. 우리나라에는 '검은 귀신'이라고 발표하여 이 산의 인상을 더욱 무시무시하게 만들었다.

 

마칼루의 모습은 1921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정찰대가 북카르마 계곡으로 들어가 웅장한 자태를 촬영하여 처음 알려졌고, 본격적인 등반은 54년 봄 미국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동남릉으로 등반을 시도하여 7200미터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55년 장 프랑코대장이 이끄는 프랑스대가 북서릉 초등정을 이루었다. 이들은 5월 15일, 16일, 17일 3회에 걸쳐 9명의 대원 전원이 등정해 세계산악계를 놀라게 했다.

 

그후 70년 봄에 일본대가 동남릉 루트를 뚫고 2등을 기록했고, 다시 71년 불란서대가 서릉에 새 루트를 내며 세 번째 등정을 했다. 그리고 75년 가을에는 유고슬라비아대가 수직의 남벽을 통해 4등을 이루었고, 76년에 체코대가 남서 버트레스, 스페인대가 동남릉으로 각각 5, 6등을 기록했다. 78년에는 서독-스위스-오스트리아합동대가 북서릉으로, 80년에는 미국대가 서쪽 필라로, 81년 봄에는 오스트리아대가 북서쪽으로, 가을에는 폴란드-영국합동대가 서벽으로 등정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2 5월 10일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함탁영외 12명)의 허영호대원이 셀파 2명과 함께 등정에 성공했다.

 

 

 

6. Cho Oyu

卓奥友峰, 乔乌雅峰

 

세계 6위의 고봉 초오유는 네팔과 티벳의 국경지역에 걸쳐 있다. 초오유라는 산이름의 초오(Cho O)는 산스크리트어로 신성(神性)을 뜻하는 '초'와 여성을 뜻하는 '오'의 합성어로 여신을 의미한다. 여기에 터키옥(玉)을 뜻하는 '유'를 합쳐 초오유는 '터키 보석의 여신' 또는 '청록 여신이 거주하는 산'이란 뜻이 된다

이 산은 대부분의 히말라야 고산들이 그러하듯이 남면, 즉 네팔쪽은 상당한 급경사에 장장 2km에 달하는 넓고 긴 벽을 형성하고 있으며 북면은 비교적 완사면으로 형성되었다. 이 산만을 대상으로 한 정찰기록 1952년 에베레스트 남면 정찰대원이었던 에드먼드 힐라리와 에릭 쉽튼에 의해서 북서릉 6800m까지 접근한 기록이 유일하다.

이후 1954년 오스트리아의 강력한 경등반대에 의해 초등이 이루어진다. 당시 이들은 네팔과 티벳간의 교역로이자 남체 바잘에서 가까운 낭파라(Nangpa La 5716m)를 넘어서 북서릉을 통하여 둥정에 성공했다. 당시 이들은 8200m가 넘는 고소임에도 불구하고 산소보급없이 등정에 성공하였다.

티벳쪽 등반은 네팔 하이웨이를 경유 티벳의 팅그리(Tingri)에서 차량을 이용해 5100m까지 접근한 후 다시 야크 등으로 5750m의 벽 하부까지 접근, 전진 베이스캠프를 설치한 후 본격적인 등반을 시작하게 된다. 초오유 등반은 중국정부에 의해 등반이 허가되고 있는 현 시점에도 접근로나 비용의 문제 때문에 네팔의 쿰부지역에서 낭파라를 넘어 티벳 영토에서 등반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 남측인 네팔 쪽에는 2km에 달하는 급준한 장벽에 2개 루트가 개척되어 있고, 티벳쪽에는 4개의 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루트는 7743m 고줌바에서 연결되는 긴 북동릉이다.

한국대는 1989년 대구경북연맹팀이 네팔쪽에서 낭파라를 넘어 서면으로 등정했다고 발표했지만 의혹이 제기되었고, 확실한 등정은 1992년 정식으로 중국정부의 입산허가를 받아 도전한 울산-서울합동대(대장 김관준외 7명)의 남선우, 김영태조가 등정에 성공했다.

 

 

 

 

7. Dhaulagiri

道拉吉里峰

 

세계 7위봉 다울라기리는 고대 티벳과의 교역 통로였던 칼리간다키(Kali Gandaki) 강을 사이에 두고 안나푸르나 산국과 마주보고 있다. 산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발라기리(Dhavalagiri)에서 비롯되었는데, 'Dhavala'는 '희다'는 뜻이고 'Giri'는 '산'이란 뜻이니 다울라기리는 '하얀 산'을 의미한다.

 

다울라기리 산군은 동쪽의 투크체피크(6,920m)에서 서쪽 푸타히운출리(7,426m)까지 40Km에 걸쳐 주산맥과 지맥들로 이루어졌는데 이 안에 다울라기리 1봉에서부터 6봉이 연이어 있고, 그밖에 추렌히말, 구르자히말 등이 솟아 있다. 다울라기리는 프랑스원정대의 7회에 걸친 도전에도 정상을 허락하지 않다가 1960년 이 산에 세 번재로 찾아온 스위스합동대(대장 막스 아이젤링)에 의해 마침내 초등정되었다. 북동릉 루트를 선택한 스위스대는 카라반 대신 경비행기로 타파고개(5,200m)와 북동콜(5,877m)에 물자를 수송하는등 치밀한 등반활동을 펼쳐 5월 13일 6명의 대원이 무산소로 정상을 밟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박철암대장이 이끄는 경희대학팀에 의해 최초로 정찰되었으며, 1988년 11월 14일 부산합동대(대장 조정술외 11명)의 최태식대원과 셀파 2명이 등정에 성공했다.

 

 

8. Manaslu

马纳斯卢峰

 

네팔 제2의 수도 포카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60Km 떨어진 마나슬루 산군의 최고봉이자 세계 제 8위의 고봉이다. 주위에 북봉(7,154m), 서봉(7,571m)과 피크29(7,835m), 추렌히말(7,371m) 등을 거느리고 있다.

 

인도측량국의 측량기호로 P30이었던 마나슬루는 산스크리트어로 '마음'이나 '영혼'을 뜻하는 '마나사(manasa)'와 '나라'나 '토지'를 의미하는 '룽(Lung)'의 합성어로 '영혼의 산'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현지인들은 이 산을 신성시하여 초등정을 목표로한 일본대의 등반을 수년간 집요하게 방해하기도 했다.

 

마나슬루에 대한 인간의 도전은 네팔왕국이 개국한 직후인 1950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영국원정대(대장 틸만)가 이산의 북서면을 답사했고, 이어서 52년부터 일본원정대가 3회에 걸쳐 등반활동을 펼치면서 북측과 동릉의 등반 가능한 루트를 관찰했다. 마침내 1956년 5월 9일에 마키대장이 이끄는 일본대에 의해서 이마니시와 셀파 걀첸 노르부가 정상등정에 성공했다. 그후 1971년에는 다까하시가 이끄는 일본원정대가 북서벽을 경유하는 새롭고 험난한 루트로 2등을 기록하면서 이 산이 '일본인의 산'임을 재확인 했다. 이어서 72년에는 라인홀트 메스너가 남벽에 새 루트를 뚫었다. 

 

마나슬루는 한국산악인들에게는 비극의 산으로 인식되어 있다. 1971년 최초원정에서 김기섭대장이 추락사한데 이어 72년에는 김정섭대장이 이끈 원정대가 6,950미터 지점에서 눈사태로 4명의 한국대원과 1명의 일본인, 그리고 10명의 셀파가 사망하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재로 큰 조난사고를 당했다. 결국 1980년 봄에 결국 이인정 대장이 이끄는 동국산악회에 의해 세계에서 8번째로 등정에 성공했다.

 

 

 

9. Nanga Parbat

南迦帕尔巴特峰

 

산중의 왕'으로 불리는 낭가파르밧은 약 2500Km에 달하는 협의의 히말라야 산맥 서쪽 끝에 위치한 푼잡히말라야의 최고봉으로, 북쪽으로는 인더스강 상류를 경계로 카라코람과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캐시미르를 이어 히말라야로 통하고 있다.

 

다섯 개의 큰 빙하 위에 수직의 루팔(Rupal)벽이 남쪽으로, 디아미르(Diamir)벽이 서쪽으로, 그리고 라키오트(Rakhiot)벽이 북동쪽으로 내리 뻗고 그 위에 북봉, 주봉, 남봉이 사다리꼴 모양으로 400미터 정상벽을 이루며 장엄하게 솟아 있다. '낭가파르밧'은 인도측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벌거벗은 산'을 의미하고, '디아미르'는 산의 서측 탈트계 사람들이 '정령(精靈)의 산'이란 의미로 부른다.

 

세계 제 9위의 고봉 낭가파르밧은 일찍이 알프스에서 등로주의를 선창하고 나선 머메리가 1895년 히말라야등반사의 첫 장을 열었던 산이다. 머메리는 불행하게도 이 등반에서 조난사하고 만다. 그로부터 58년 뒤인 1953년 7월 3일 독일-오스트리아합동대(대장 헤를리히코퍼)의 헤르만 불에 의해 초등정되기까지 독일인에게 여섯 차례나 실패를 안겨주었고 그 과정에서 31명의 히생자를 낸 산이기도 하다. 초등정 당시 본부의 명령을 어기고 단독으로 정상도전에 나서 3일만에 살아 돌아온 헤르만 불은 '8천미터의 위와 아래'라는 유명한 책을 남겼다.

 

보다 높고 어려운 등반을 추구하는 머메리즘의 실현 대상으로서의 낭가파르밧은 8천미터급 산 중에서 가장 많은 히생과 고통을 요구하는 산이었다. 대표적인 벽은 디아미르벽과 루팔벽인데, 특히 남동쪽의 루팔벽은 수직 고도가 4,500 미터로 세계 최대의 벽이며 그 등반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7월 광주전남합동대가 낭가파르밧 정상등정을 시도했으나 정성백(조대공전 OB) 대원이 7900m지점에서 실종되고, 1992년 우암산악회가 등정에 성공했다.

 

 

 

 

10. Annapurna

安纳布尔纳峰

 

세계 10위의 고봉 안나푸르나는 서쪽으로 칼리간다키(Kali Gandaki)강과 동쪽으로 마르산디

(Marsian야) 계곡까지 수많은 연봉을 거느리고 있는 안나푸르나 산군의 최고봉이다. 안나푸르나 2봉, 3봉, 4봉의 위성봉과 닐기리, 틸리쵸, 강가푸르나, 마차푸차레 등 아름다운 7천미터급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모리스 엘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는 본래 공격목표였던 다울라기리에서 안나푸르나로 진입하여 등반로를 정찰했는데 등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과감하게 등반을 시도하여 6월 3일에 정상에 서는데 성공하였다.

 

안나푸르나는 산스크리트어로 '풍요의 여신'이란 의미이며 인류 최초로 등정된 봉우리라 하여 'Premier 8000'이란 별칭을 가지고 있다. 1949년 네팔왕국이 오랜 쇄국정책 끝에 문호를 개방했는데 이에 세계 각국의 원정대가 미답의 8천미터급 봉우리를 등정하기위해 몰려들었고, 그 tsen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 프랑스원정대의 안나푸르나 등정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성공과 달리 하산 때에는 여러 처참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등정조 모리스 엘조그와 루이 라슈날이 3도 동상을 입고 후송되어 내려왔는데, 그는 여러날 걸린 무더운 카라반 끝에 결국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야만 하는 불운을 당해야 했다

 

이후 1970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원정대가 험난한 남벽을 통해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등로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후 안나푸르나에는 10여개의 루트가 개척되었으나, 이산 특유의 눈사태로 수많은 산악인이 히생되었다.

 

우리나라도 지금까지 14명의 대원과 셀파가 눈사태로 사망했다. 한국대는 1983년부터 등반을 시도하여 84년 겨울에는 여성 최초, 동계 최초로 등정하는 성과를 이룩했으나 의혹이 제기되었다. 공식적인 최초 등정은 1994년 남벽으로 오른 경남산악연맹의 박정헌대원과 4명의 셀파에 의해서다.

 

 

 

11. Gasherbrum I

加舒尔布鲁木I峰

 

가셔브룸산군은 콩코르디아 남동쪽 아브루찌(Abruzzi)빙하에 들어서면 만나는 남가셔브룸 빙하를 1봉부터 6봉까지 말굽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가셔브룸 I봉은 아브루찌 빙하에 도착할 때까지 다른 산들에 의해 숨겨져 있어 일찍이 1892년 이 산군 정찰에 나선 독일의 콘웨이(W.M. Conway)가 '히든피크(Hidden Peak)'라 불렀다. 가셔브룸은 발티어로 '아름답다' 혹은 '빛나는'이란 뜻의 'Rgasha'와 '산'이란 뜻의 'Brum'의 합성어로 '빛나는 산'을 의미한다.

 

1889년부터 1929년 사이의 히말라야 카라코람 개척사의 초기에 영국, 이탈리아인들이 가셔브룸 I봉을 측정하고 탐사활동을 펼쳤다. 이산의 측량기호는 K5.

 

1934년 스위스의 디렌푸르트의 지휘 아래 국제원정대가 가셔브룸 I봉에 대한 대규모의 탐 사를 감행했는데 H. 에르틀과 A. 로흐가 남서쪽에 있는 스퍼를 올라 6300m 지점까지 도 달했고, 1936년에는 H. 드 세고뉴의 프랑스 원정대가 수송문제와 포터의 파업으로 남쪽의 스퍼를 통해 6900m까지 도달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1958년 미국원정대(대장 크린치)가 이 '숨겨진 봉우리'를 찾아왔다. 그리고 7월 4일 쇼닝과 카프만 대원이 강추위와 심설을 헤치고 마침내 정상에 도달했다. 이로써 미국은 8000m급 초등정 대열에 끼게 되었다.

 

히든피크는 알파인스타일로 등정된 최초의 8000m봉이다. 1975년 8월 베이스 캠프까지 불과 12명의 포터만 동원한 2인조 원정대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가 가셔브룸 I봉의 북벽을 경유하여 등정했는데 이것은 히말라야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알파인스타일 등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 충남산악연맹 원정대(대장 윤건중)의 박혁상대원이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12. Broad Peak

布洛阿特峰

 

발토로산국의 고드윈 오스틴 빙하 오른족으로 솟아 있는 세계 12위의 고봉. K2와 남동쪽으로 이웃하고 있으며 북봉(7,537m), 중앙봉(8,006m)을 거느리고 있다. 산이름은 발티어로 '넓은 눈의 산'이란 뜻을 지닌 팔첸 캉리(Falchen Kangri)가 있었으나1892년 콘웨이가 이끄는 영국탐험대의 정찰 때 '폭 넓은 봉우리'란 뜻으로 현재의 이름 브로드 피크로 붙여졌다.

 

1954년에 헤어리히코퍼가 지휘하는 독일-이탈리아 원정대가 처음으로 브로드 피크를 도전해 남서사면에 있는 위험한 빙벽을 오르려고 시도하다가 6,900미터 지점에서 결국 포기하게 되었고, 1957년에 M. 슈무크의 지휘 아래 헤르만 불, 디엠베르거, 빈터슈텔러 등 강력한 4인조가 전원 초등정에 성공했다. 이들은 고소포터와 산소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장비를 3개의 고소캠프를 전진 시킨 후 두차례의 정상공격으로 간단히 등정에 성공했다.

 

낭가파르밧 등정자 헤르만 불은 이 등정으로 세계 최초로 8천미터 2개봉 등정자가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악우회가 서릉으로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가 일본대에 의해 전봉임이 밝혀져 오랫동안 미등정을 남아 있다가 가장 늦게 등정되었다. 1995년에 스페인 바스크 원정대와 합동으로 등반한 엄홍길과 광주전남의 빛고을 원정대가 몇 시간 차이로 정상에 서게 되었다.

 

 

 

13. Gasherbrum II

加舒尔布鲁木II峰

 

가셔브룸산군의 가장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세계 13위의 고봉 가셔브룸 2봉은 K4의 측량부호가 붙여진 것 외에는 특별히 다른 이름이 없다. 8000미터 봉 중에서는 가장 등정이 쉬운 산으로 꼽힌다.

1909년 아브루찌가 이끄는 원정대와 이때 참가한 이탈리아의 사진사 V. 셀라가 북쪽과 초 고리사 방면에서 가셔브룸 산군을 정찰했으며, 1934년 스위스의 G.O. 디렌푸르트의 지휘 아래 국제원정대가 가셔브룸 II봉의 등반 가능한 루트를 살피면서 6,250m까지 올랐다.

1956년에 오스트리아의 프리츠 모라벡의 지휘 아래 6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남서릉을 경유하여 가셔브룸 II봉의 초등정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8월 19일 성균관대학교 원정대(대장 한상국)의 한상국, 김창선, 김수홍, 유석재 등 대원 전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14. Shishapangma

希夏邦马峰(藏语“希夏邦马”, 意为“气候严酷”, 旧称“高僧赞峰”)

 

시샤팡마는 히말라야의 8천미터급 14좌 중에서 가장 낮은 산으로 동쪽으로 순코시(Sunkosi)강과 서쪽으로 트리술리(Trisuli)강을 끼고 있는 랑탕-쥬갈 지역의 최고봉이다. 이 산은 8천미터급 봉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중국 국경 안에 위치한 관계로 14좌 중 가장 늦은 1964년에야 허경(許競)대장이 이끄는 중국대에 의해 초등정된 산이다.  

 

산명은 티베트어로'황량한 땅'즉, 기후가 나빠 작물과 가축이 살 수 없는 장소를 의미한다.
이 산을 네팔에서는'고사인탄(Gosainthan)'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50여 킬로미터 떨어진 힌두 성지 '고사인쿤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사인쿤드는 힌두어로 '성자의 거주지'를 의미한다. 시샤팡마는 티베트의 수도 라사에서는 서쪽으로 무려 420킬로미터나 떨어진 반면에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는 북북동쪽으로 불과 85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네팔서 티베트 국경 잠무를 거쳐 육로를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팀이 많다.

 

이 산의 정찰은 1921년 영국 에베레스트 정찰대에 의하여 동면에서 관찰되었고, 하인리히 하러 일행의 인도 포로수용소 탈출 후 티베트로 망명 중 북서면에서 관찰되었으나 본격적인 정찰은 1949년 틸만(Tilman)에 의해 랑탕계곡 쪽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은 대륙의 공산화에 성공 후 최후의 8천미터급 산을 초등정하기 위해 1961년부터 3회의 정찰로 현재의 주접근로인 북면 야북캉갈라 빙하를 통해 7,160m까지 도달한 후 1964년 10명의 중국산악인을 정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1년 대한산악연맹(대장 김명수)의 김창선, 김재수대원이 남서벽을 통해 최초로 올랐다. 이름처럼 시샤팡마의 가장 곤란한 점은 극심한 기상변동으로 인한 바람인데, 10월부터 시작 되는 티벳고원의 폭풍은 바람을 피할 것 조차 없는 평야지대 위에 우뚝 선 시샤팡마로 불어 와 등반가들에게 고통을 준다.

 

 

 

15. Gyachung Kang

格重康峰

 

히말라야산맥의 지맥인 마할랑구르히말(Mahalangur Himal) 산맥에 속한 산으로 네팔과 티베트 경계에 놓여 있다. 높이 7952m로 초오유산(Cho Oyu, 8201m)과 에베레스트산(Mount Everest, 8848m) 사이의 최고봉이며, 세계에서 15번째로 높다. 8000m 이하의 산들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며, 가장 낮은 8000m급 봉우리보다 겨우 100m 낮을 뿐이지만 이름은 훨씬 덜 알려진 편이다. 1964년 4월 10일 가토·사카이자와 등이 처음 등정하였고, 다음날 마치다·야쓰히사가 등정하였다. 북쪽 면은 1999년 슬로베니아 탐험대가 처음 등정한 데 이어 2002년 야쓰시 야마노이가 다시 등정에 성공하였다.

 

 

 

16. Gasherbrum IV

加舒爾布魯木IV峰屬於喀喇崑崙山脈

 

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와 파키스탄과의 경계에 있다. 그레이트 카라코룸, 발토로 산맥의 가셔브룸 산군 북쪽 끝으로 K2에서 동남방으로 16km 지점에 위치한다. 발토로 빙하의 콩코르디아 동면에 사다리꼴로 솟은 대암봉이다 서면 벽의 높이는 약 2500m이다.

 

1958년에 이탈리아의 리카르도 카신 등 8명이 남 가셔브룸 빙하를 거쳐 가셔브룸 Ⅲ봉과 Ⅳ봉 사이에 있는 고개로부터 주능선을 올라 8월 6일에 보나티와 마우리가 초등정 했다. 1985년 폴란드의 쿠르티카와 오스트리아의 로버트 샤워 2인조가 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올랐다.

 

 

 

 

17. Masherbrum

玛夏布洛姆峰

 

파키스탄의 발티스탄 지방, 소 카라코룸의 최고봉으로 마셔브룸 산맥의 마셔브룸 산군에 있다. K2로부터 서남으로 32km 지점에 위치하며 동북봉이 7821m이고 서남봉은 7806m이다. 발토로 빙하 왼쪽 기슭의 만두(Mandu) 빙하, 이에르 마넨드 빙하와 후세 골짜기(Hushe Valley) 원류 사이에 솟은 두 개의 독립봉이다.

 

북면은 고도차 약 3200m의 수직벽이다. 1857년 인도 측량국이 측량할 때 카라코룸의 머리글자(K)와 측량번호(I)를 각각 따서 명명했다. 1911년 미국의 워크맨 부처가 남면으로 부터 후세 골짜기를 공격, 마셔브룸 빙하의 작은 피크에 오른 뒤, 곤도고로 빙하를 정찰했다. 1960년 미국·파키스탄 합동대가 맨체스터 루트로 올라 초등정에 성공했다.

 

산이름은 산스크리트어로 「최후의 심판일의 봉우리」또는 「검은 산」이라는 뜻이다. 마셔란 「귀부인」또는 「여왕」의 뜻이기도 하다.

 

카라코룸(Karakorum)산맥

 

카라코룸산맥은 중앙아시아 남쪽과 인도대륙 북서쪽에서 동서로 500킬로미터, 남북으로 150킬로미터� 면적을 차지하며 대장벽을 형성한다. 이 산맥은 중국 신강위구르 자치구의 탈리무 분지로 흐르는 야르캄드강 지류와 인더스강으로 들어가는 샤이요크강 지류의 분수령을 형성하며 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을 이룬다. '얼음 산'을 뜻하는 무즈타그라고도 불렸던 카라코룸이란 이름은 이 산맥 동부에 있는 5,570미터 높이의 고개 이름에서 유래한다. 터키어로 '카라'는 흑색을 '코룸'은 돌멩이를 의미하는데 이 고개 주변을 덮고 있는 검은 돌에서 생긴 이름이다.

 

8천미터급 봉이 4좌,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6천∼7천미터급 산이 집중되어 있는 이 산맥은 다시 대카라코룸과 소카라코룸으로 나눈다. 대카라코룸은 산맥의 주축을 이루는 부분이며 사세르 캉리, 테람 캉리, K2 등이 솟아 있는 발토로 산군과 히스파 산군, 그리고 바투라 산군이 이에 속한다. 소카라코룸은 주산맥의 남쪽에 있는 살토로 캉리, 마셔브룸, 하라모쉬, 라카포시 산군 등이다.

 

 

 

18. Nanda Devi

 

동봉(7,434m)과 서봉(7,817m)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산의 둘레 112km, 평균 해발고도 7,000m의 약연(藥碾:약재를 갈아서 가루로 만드는 그릇) 모양의 수많은 골짜기 중앙에 우뚝 솟아 있다. 동봉과 서봉 사이는 평균 해발고도 7,500m, 길이 3㎞에 이르는 톱니 모양의 능선이 이어진다. 난다데비란 ‘축복받은 여신’이란 뜻이다.


난다데비산에 대한 최초의 등반은 1934년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6년 H.W.티르만을 대장으로 하는 영국과 미국의 합동등반대가 처음으로 동봉의 정상에 올랐다. 이어 1939년에는 폴란드 등반대가 같은 동봉을 정복하였다. 1951년 동봉과 서봉을 잇는 종주(縱走:능선을 따라 걸어서 산정을 밟는 등산 형식)를 시도한 프랑스 등반대 2명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9. Rakaposhi


파키스탄 북부 카라코람산맥 서부에 있는 라카포시산맥의 주봉(主峰). 해발고도 7788m. 서북서로부터 동남동으로 달리는 라카포시산맥의 서쪽 끝과 가깝고, 길기트강(江) 지류인 훈자강 동쪽 기슭에 우뚝 솟아 있다. 이 산은 이미 1892년 W.M. 콘웨이를 비롯하여 카라코람의 선구적 탐험가들이 주목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등산은 1938년 북서쪽에서 행해졌는데 약 6000m에 지나지 않았다. 그 뒤 1947년·1954년·1956년 남서쪽에서 등반이 시도되었고, 1958년 6월 25일 영국-파키스탄 합동등반대가 처음으로 등정에 성공하였다. 산 이름은 이 지방 전설상의 인물과 관련시켜서 <라카의 망루(望樓)>를 의미하며, 또한<구름의 목걸이>라는 뜻의 두마니(Dumani)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20. Gangkhar Puensum

尚无官方翻译, 暂作 干卡本森峰

 

강가르·푼섬(Gangkhar Puensum)은 부탄의 최고봉이며, 등정하지 않은 산의 최고봉이기도 하다. 해발 7570미터. 1983년에 부탄이 등산을 해금하고 나서, 1985년과 1986년에 4개의 원정대가 등정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1998년 종속 정상 등정에 티벳에서 성공했다. 강가르·푼섬은 1922년에 처음으로 표고가 계측 되었지만, 지도는 정확하지 않으며 산은 다른 장소와 다른 높이로 표시되고 있다. 실제로 부정확한 지도이기 때문에, 최초의 등산대는 산을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1986년의 영국의 원정대에 의한 책은 표고를 24,770피트(7549미터)로 하여, 쿨러·칸리만이 티벳내에 있을 뿐 강가르·푼섬은 완전히 부탄내에 있다고 했다. 쿨러·칸리는 표고 7554미터로 북동 30 km 간에 있는 다른 산이며 첫등정은 1986년이다.

 

1994년부터, 부탄에서는 6000미터 이상의 산 등산은 지역의 종교 신앙에 반한다고 하여 금지되어 2003년부터는 등산은 완전하게 금지되고 있다. 강가르·푼섬은 당분간 그 독특한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미등정의 산으로 남아 았을 것이다.

 

 

 

 

21. Ama Dablam

 

아마다블람(Ama Dablam : 6,856m)란 뜻은 '어머니와 그녀의 목걸이'를 의미하는 아름다운 산이면 쿰부(Khumbu)지역의 로체(Lhotse : 8,516m)와 에베레스트(Everest : 8,850m)의 남쪽 끝에 위치한다. 정상 바로 밑에 높이 달려진 세락이 셰르파니(Sherpani)여자들이 목 주위에 하고 있는 Dablam, 즉 보석상자와 닮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이 지역의 높은 골짜기를 에워싸는 이 고봉은 그것의 고전적이 아름다움과 함께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 산의 모양은 수직의 벽과 날카로운 산등성이를 지닌 얼음의 가파른 피라미드로 되어있다. 아마다블람은 아름다운 마터호른(Matterhorn : 4,478m)과 자주 비교되지만, 이 산보다 1만 피트 가량 더 높다.

아마다블람은 네팔의 많은 여행자에게 영속적인 영향을 형성하며 아마도 에베레스트 베이스 켐프에서 이어지는 인기 절정의 트레킹 루트를 속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산은 에베레스트산의 정상에서 1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네팔의 셰르파 지역의 중심부인 쿰부(Khumbu) 계곡 안에 있으며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빙벽 등반 코스이다.

 

이 산의 첫등정은 마이크 길(Mike Gill), 배리 비샵(Barry Bishop), 마이크 워드(Mike Ward), 발리 로마니스(Wally Romanes)가 남서 릿지를 통해 1961년 3월 13일에 20일 동안의 여정을 마치며 이루어냈다.

 

이 후 산은 남서 릿지를 통해 430명 이상의(셰르파는 포함하지 않음) 등반가들을 받아드리고 있다. 아마다블람은 단순한 등반보다는 이 산을 탐험하려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오르는데 그 까닭은 이 산이 히말라야의 심장 안으로의 여행이기 때문이다. 높이 치솟은 릿지라인은 경험 많은 등반가들에게도 그 정상을 가리고 있다.

 

정 상에서의 전망은 이채롭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여섯개의 봉 중 다섯개가 분명히 보이기 때문이다. 아마다블람은 암벽과 빙벽에 대한 유능한 기술을 요구한다. 산에 설치된 줄은 가장 기술을 요구하는 지대에 설치되었는데, 짐을 쉽게 나를 수 있도록 도와주며 안전한 등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완벽한 준비가 되어있는 등반가들을 위해 아마다블람은 세계에서 가장 흥미 있고 아름다운 등반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