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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梔子)가 난 탐라(耽羅)는 주호(州胡)이고 호주(濠洲)이다.
글쓴이:한부울
제주(濟州)가 왜 섬(島)이 되어야 했을까?
도저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혼자 스스로에게 나는 이렇게 질문을 하곤 했다.
어떠한 기록에도 제주를 섬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어찌하여 제주를 섬이라고 하였을까 하는 근원적인 문제에서 얻은 해답은 한반도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확고한 사실이다.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제주(濟州)를 도(島)가 아니라 목(牧)이라고 분명히 하였다.
太祖 1卷, 1年(1392 壬申 / 명 홍무(洪武) 25年) 7月 30日(己酉) 1번째기사
도당에서 이색 등을 도서 지방으로 귀양보내도록 청했으나 내륙으로 유배토록 하다
○己酉/都評議使司請前日敎書所載流放遐方者, 分徙武陵、楸子島、濟州等處,
한가지 주요한 예를 들면 위 조선왕조실록 태조1년(1392) 즉 조선건국시 기사인데 원문을 보면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전일의 교서(敎書)에 기재된 먼 지방으로 귀양보낼 사람은 무릉(武陵), 추자도(楸子島)와 제주(濟州)등지로 나누어 귀양보내기를 청하니...하였는데 한국번역원의 번역을 보면 바로 '추자도'와 함께 제주(濟州)를 '제주도'라고 해석해 버렸다.
원문에 추자도(楸子島)처럼 도(島)가 붙지 않았음에도 섬 도(島)가 붙은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사관을 가진 번역인이 지레짐작 선입견으로 꿰 맞추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세종(世宗,1397-1450,재위:1418-1450)때 목(牧)부(府)군(郡)현(縣)이라고 하여 지방행정제도를 두고 제일 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라 하여 목(牧)을 두었고, 이 목(牧)에는 정3품(正三品) 당상관(堂上官)인 목사(牧使)를 임명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정치적으로 주요하다는 것은 그 만큼 넓은 지역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조공이 많았다는 것이며 매우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섬이 아닌 제주(濟州)를 섬이라고 당연하게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 길들여진 관성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어떤 변명을 하고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반도사는 엉터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왜 원문 그대로 번역을 하려고 애를 쓰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부합리한 사실들이 지금까지 우리의 혼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역사 오류 박테리아로 존재하며 모두의 정신을 혼탁하게 만든 심각한 폐해였다는 것을 새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어찌 이 제주(濟州)지명만 그렇다고 하겠는가?
기존 뿌리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세계를 지배하던 세력을 구세력이라고 하고 근세기에 자본과 최신형 무기를 들고 나타나 구세력들을 제거하고 새롭게 등장한 세력들을 유럽서양세력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신세력이라고 한다.
구세력이 붕괴되고 난 후 그래도 남아 있던 대조선잔여세력들을 없애버리려고 하던 일제와 그 수족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병적으로 도발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예가 역사를 엉터리고 조작한 사실인데 이것의 대표적인 상징성이 있는 것이 바로 제주란 지명이다.
그들입장에서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기록에서 제주라고 하니 현 제주도(濟州島) 말고는 제주라고 마땅하게 붙일 곳이 없었을 것이고 부득히 지명을 따 붙여야 했으니 섬이 아니더라도 섬처럼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미 일제와 그 수족들에 의해 대조선의 역사지명을 한반도에 따 옮겨 붙일 때 부터 이러한 역사사실과 반할 수밖에 없는 역사모순과 기후지형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다.
제주(濟州)는 역사 기록에 의하면 분면 조선(朝鮮) 남쪽에 위치하여 아열대의 따뜻한 기후를 가지고 있어야 했고 그곳에서는 온갖 아열대 작물들이 생산되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으로서 지방행정단위에서 가장 높은 목(牧)을 설치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에 더하여 삼한역사사서에 등장하는 탐라(耽羅), 탐모라국(耽牟羅國),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 주호(州胡)등을 한데 묶어 기어코 한반도 제주도(濟州島)에 앞 뒤 가리지도 않고 통째로 아예 덮어버렸다는 사실이다.
耽羅之見於史籍記載,始自《三國志》魏志東夷傳、《後漢書》東夷傳的州胡。馬韓之西、海嶋上有州胡國。其人短小、[冠髟脚兀]頭、衣韋衣、有上無下。好養牛豕。乘船往來貨市韓中。
『三国志』『後漢書』によれば、州胡の人は言語が韓と異なり、背が低く、鮮卑のように髪を剃り、上半身に革の衣を着たが下が覆われず裸に近い。牛と猪を飼い、船で往来して韓と交易した。これは当時の韓の風俗として記されるものと大きく異なっている。[일본위키]
[三国志], [後漢書]에 의하면, 주호(州胡)의 사람은 언어가 한국(韓)과 다르고 키가 작고, 선비(鮮卑)와 같이 머리카락을 깎아(剃:칼로 머리·수염 따위를 깎다 또는 밀다), 상반신에 가죽의 옷을 입었지만 아래가 덮이지 않고 알몸에 가깝다. 소와 멧돼지를 길러, 배로 왕래하고 한국(韓)과 교역 했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韓)의 풍속으로서 기록되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隋書卷81列傳第46, 滿洲源流考卷03隋에 의하면
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남해로 3개월을 가면 모라국(牟羅國)이 있는데 남북천여리고 동서수백리로서 그곳에 노루와 사슴이 많다. 백제(百濟)의 부용(附庸)인데 백제(百濟)에서 서쪽으로 3일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고 한다.
《수서(隋書)》에는 또, “양제(煬帝)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위 자료들을 보면 오히려 탐라보다 주호국(州湖国)이라 하여 수서, 후한서에 나타나는데 삼국지(三國志)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 의하면 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주호(州胡)가 마한(馬韓)의 서쪽의 해상에 있는 큰 섬으로서 기록된다 하였다.
그 후 주호(州胡)는 삼한때에 탐라(耽羅)와 이름을 바꾸었다고 하고 있다.
탐라[耽羅]의 이명(異名)으로 탐모라국(耽牟羅國),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지칭되었으며《三國志》동이전에서는 주호(州胡)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고 반도사서와 일제사서 말고는 제주도(濟州島)라고 명기한 사서는 없다.
아래 해동역사를 보면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탐라는 바다 섬 나라이다. 후위서(後魏書)에서는 섭라(涉羅)라고 칭하였고, 수서(隋書)에서는 담모라(牟羅)라 칭하였고, 당서(唐書)에서는 담라(儋羅)라 칭하고 또 탐부라(耽浮羅), 탁라(乇羅)라 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이다 하고 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방언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는데, 탐(耽), 섭(涉), 담(儋) 세 음은 모두 섬(剡)과 음이 비슷하니, 대개 섬 나라를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또 특이한 것은 고기(古記)에 ‘처음에 탐진(耽津)에 정박하여 신라에 조회하였으므로 탐라(耽羅)라고 한다.’는 것을 해동역사 저자는 이를 가당치도 않은 말을 억지로 끌어다 대는 것이라고 절하하고 있다.
문제는 한반도의 신라가 아니기 때문에 탐라에서 조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해동역사(海東繹史)도 전적으로 믿기 어려운 것은 조선말기에 한치윤(韓致奫;1765-1814)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삼한역사서를 저자가 죽고 난 후 조카 한진서(韓鎭書)가 기전체로 1823년에 서술했다는 것으로 실제 기록과 너무 차이나고 또한 첨가되는 설명에서 기존 주요사서기록을 인용하는데 제동을 걸고 무시하는 듯한 첨가언이 많아 이것은 아무래도 일제사관들이 달려들어 한반도 사정에 맞게 유도한 듯한 것에서 일제의 장난이 있었던 사서라고 생각된다는 점이 있어 중요하게 보질 않는 편이다.
실제로 국(國)을 라라, 또는 나라(羅羅)라고 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고 특히 열대 섬 나라를 지칭하느데서 보면 라(羅)가 많이 들어가있음을 알 수가 있다.
어찌되었던 수서[隋書]에서 결정적인 기록을 남겨놓고 있는데'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남해(南海)로 3개월을 가면 모라국(牟羅國)즉 탐라가 있다 하였는데 도대체 남쪽바다 또는 고유지명'남해'로 3개월이 걸리는 곳이 한반도 제주라고 하면 솔직히 너무 황당한 이야기가 아닌가?
반도사관에 찌들은 우리들은 으례히 탐라(耽羅)라고 하면 제주도(濟州島)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백과사전에서 보더라도 제주가 아니라 제주도란 사실이 얼마나 상식적인 것인가 하면 특히 탐라(耽羅)를 제주(濟州)의 옛 이름이라고 하면서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 고(高),양(梁),부(夫) 3성(姓)의 개벽설화까지 전하여 진다하며 일찍이 백제(百濟)문주왕(文周王475-477)2년(476)에 통교하였다 하고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신라의 속국이 되었으며 고려태조21년(938)에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가 고려숙종10년(1105)에 군(郡)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군현체제에 편입되었다가 고려의종7년(1153)에는 현(縣)으로 격하되었으며 조선(朝鮮)초기까지 탐라(耽羅)의 지배층에게 조선국에서 성주(星主), 왕자(王子)등의 작호까지 내 준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지만 모두 제주도에 포함되는 역사인 것처럼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만 놓고 보더라도 제주 또는 제주목과 도저히 같을 수가 없는 역사가 존재하였음에도 한반도에는 제주도 말고 탐라(耽羅)가 될 만한 곳이 없었다는 이유로 탐라는 제주도에 있었다고 하였으니 이 얼마나 황당하고 끝내 우릴 바보도 만들어 우롱한 것인가에 대한 분노가 하늘에 닿고 있는 것이다.
기언(記言) 제48권 속집(續集) 사방(四方) 2
탐라지(耽羅誌) 其穀宜黍,稷,菽,麥。其貨。璸珠,玳瑁,螺具。其魚。鰒魚,鮫魚,望魚。胎化無卵育。其果。橘,柚,橙,柑,梔,榧。產良馬。
그곳의 곡식으로 알맞는 것은 기장ㆍ피ㆍ콩ㆍ보리이며 재화로는 빈주(璸珠)ㆍ대모(玳瑁)ㆍ나패(螺貝)이고 고기는 복어(鰒魚)ㆍ교어(鮫魚)ㆍ망어(望魚)인데 태생(胎生)이고 알에서 부화(孵化)된 것은 없다. 과일은 귤(橘)ㆍ유자(柚子)ㆍ등자(橙子)ㆍ감자(柑子)ㆍ치자(梔子)ㆍ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생산된다.
그렇지만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탐라를 정확하게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기록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서 위 허목(許穆,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 보면 동서남북(東西南北) 사방(四方)이란 소제목에 탐라지(耽羅誌)편에 보면 과일은 귤(橘), 유자(柚子), 등자(橙子), 감자(柑子), 치자(梔子)가 생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옛부터 치자(梔子), 비자(榧子), 유자(柚子)는 남해(南海)의 삼자(三子)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남해(南海)의 기후와 풍토에 알맞아 아무 곳에나 잘 자란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여기서의 남해(南海)가 과연 어딘가 하는 점이다.
아열대지역이 아닌 한반도 남해(南海)란 말인가?
세종지리지(地理志) 치자(梔子)의 토산지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정의현(旌義縣)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전라도(全羅道) 제주목(濟州牧)
위 세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분명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에 치자(梔子)가 토산으로 났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으니 남해(南海)와 별도로 조선 경상도, 전라도, 제주목의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에 이 치자가 토산으로 생산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이 정말로 한반도 제주도에 있었던 것일까?
그곳을 정녕 탐라(耽羅)란 말인가?
그러나 천만에 말씀이다.
그런데 현재 자료들을 보면 이 치자나무의 원산지를 전부 중국이라고 하였다.
린네의 학명보다 앞선다고 생각되는 1761년에 영국의 상인이며 박물학자 존 엘리스(John Ellis:1710 -1776) was a British linen merchant and naturalist.가 명명한 학명 'Gardenia jasminoides'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의 속명(屬名) 또는 종소명(種小名) 'jasminoides'는 '재스민과 향이 비슷하다'는데서 유래되었다 하고 우리는 이 종(種)을 ‘꽃치자’라 하며 영어로는 케이프 쟈스민(CAPE JASMINE)라고 한다.
이것을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한 생명의 백과사전(EOL:Encyclopedia of Life)이 제공한 분포지도와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한 분포지도를 동시에 살펴 보면 아래와 같다.
Gardenia jasminoides Ellis1761, CAPE JASMINE
栀子(学名:Gardenia jasminoides),又名木丹、鲜支、卮子、越桃、水横枝、支子花、枝子花、山栀花、黄鸡子、黄荑子、黄栀子、黄栀、山黄栀、玉荷花、白蟾花,
科學分類
界: 植物界 Plantae
門: 被子植物門 Magnoliophyta
綱: 雙子葉植物綱 Magnoliopsida
目: 龍膽目 Gentianales
科: 茜草科 Rubiaceae
屬: 栀子属 Gardenia
種: 栀子 Gardenia jasminoides J.Ellis
[분포지]
동아시아대륙 다수
1)북아메리카대륙
캘리포니아주(California)의 뷰트(Butte), 버클리(Berkeley), 앨러미다(Alameda), 르무어(Lemoore), 샌타 바버라(Santa Barbara), 샌 디에고 라 메사(San Diego La Mesa)이며
택사스(Texas)의 제퍼슨 포트아서(Jefferson Port Arthur)
미주리(Missouri)의 세인트루이스(St. Louis)
코네티컷주의 북동부
미시시피(Mississippi)의 스타크빌(Starkville), 머리디어(Meridian)
앨라배마(Alabama)의 터스컬루사(Tuscaloosa)
조지아주(Georgia)의 클라크 애선스(Clarke Athens), 머스코지(Muscogee), 불로크 스테이츠버로(Bulloch Statesboro)
플로리다(Florida)의 다데(Dade), 브로워드(Broward)
2)중앙아메리카대륙
멕시코(MEXICO)의 베라크루즈(Veracruz), 할라파, Enriquez, cordoba, 푸에블라 등이고
과테말라(Guatemala) 비야누에바
온두라스(Honduras)
니카라과(Nicaragua)의 에스테리(Estelí), 마나과, 누에바(Nueva), Zelaya, San Martín
코스타리카(Costa Rica) Puntarenas
3)남아메리카대륙
콜롬비아(Colombia) 보고타(Bogota), Antioquia Medellín
페루 치클라요(Chiclayo)
파라과이 아순시온(Asuncion)
브라질 팬하(Penha), 산투스(Santos)
물론 동아시아대륙 다수의 분포지가 나타난다.
그렇다고 하여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아 중국을 동아시아대륙이라고 볼 수가 없다는 것은 다음에 게시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위키영어자료에서 치자나무의 역사를 보면 아래 같은 글이 있다.
Evidence of Gardenia jasminoides in cultivation in China dates to the Song Dynasty (960-1279 AD), where both wild and double-flowered forms have been depicted in paintings, such as those of the Song Emperor Huizong, and the Tenth century artist Xu Xi.
즉 송나라(Song Dynasty:960-1279 AD)때 야생 형태로 꽃잎이 여러 겹으로 피는 치자나무(Gardenia jasminoides)가 경작되었다고 하는 흔적이 북송(北宋) 제8대 휘종(徽宗,1082-1135:재위1100-1125)과 10세기 화가 서희(徐熙:886-975)가 그린 그림에 의해서라고 하고 있다.
徐熙 (五代十国)(886年-975年)中國畫家。
徐熙 (高丽)(942年-998年)王氏高麗時期著名外交家。
10세기 화가 서희(徐熙:886-975)가 누구인가?
또한 '송나라'라고 하는 중국은 어디쯤에 있었던 것일까?
바로 강남(江南)이란 지명이 나온다.
위 두 명의 서희(徐熙)는 거의 같은 시대에 살았던 그래서 같은 사람이라고 하여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 두 사람이다.
한 사람은 위 영어자료에서 치자나무를 그렸다고 하는 화가이며 오대십국시대(五代:907∼959)의 사람이라고 하며 나머지 한사람은 우리가 반도사를 통하여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으로서 바로 고려(高麗)의 외교가 서희(徐熙)인데 거란의 1차 침략(993년)때, 소손녕(蕭遜寧)80만 대군과의 담판으로 물리쳤다는 사람으로 알고 있다.
물론 여기서 송나라의 서희와 고려의 서희가 과연 다를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여러가지 정황으로 판단할 때 이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는 송이 고려라고 하여 송고려(宋高麗)라고 불려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같은 시대의 사람이다.
그런데 화가 서희(徐熙)는 자칭(自稱) 강남포의(江南布衣)라고 하며 종릉(鍾陵:江蘇省 南京) 또는 금릉(金陵:江蘇省南京)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당(南唐)에 벼슬하던 강남(江南)의 명족이었다고 한다. 반면 반도사에 의하면 고려 서희(徐熙)는 출신지가 확실하지 않고 다만 본관이 이천서씨(利川徐氏)로만 나올 뿐이다.
여기서 무엇을 느낄 수 있는가?
서희가 동일인물일 가능성은 말할 것도 없고 화가 서희(徐熙)는 자기 출신지에서 이 치자(梔子)를 그렸다는 것인데 즉 강남(江南)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치자나무를 그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강남(江南)이 어디라 했던가?
본 블로그에서 중앙아메리카라고 분명히 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은 위 분포지도에 나타는 것을 바탕으로 하더라도 동아시아대륙이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다면 어딜 말하는 것일까?
바로 멕시코(MEXICO)의 베라크루즈(Veracruz), 할라파, Enriquez, cordoba, 푸에블라 를 들 수 있고 과테말라(Guatemala) 비야누에바 와 온두라스(Honduras) 그리고 니카라과(Nicaragua)의 에스테리(Estelí), 마나과, 누에바(Nueva), 셀라야(Zelaya), 산마르틴(San Martín) 그리고 코스타리카(Costa Rica)의 푼타레나스(Puntarenas)까지 강남에 넣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이곳을 송나라가 있었다고 하여 남송(南宋)이라고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치자나무가 토산으로 생산되었다는데 이곳은 어딜 말하는 것일까?
바로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에 미주리(Missouri)의 세인트루이스(St. Louis)가 돋보이는 것으로 경상도라고 판단되는 미시시피(Mississippi), 앨라배마(Alabama)를 들 수 있고 특히 전라도, 제주라고 판단되는 텍사스(Texas)의 제퍼슨 포트아서(Jefferson Port Arthur), 조지아주(Georgia)의 많은 카운티와 플로리다(Florida)의 다데(Dade), 브로워드(Broward)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나는 잘 보이는데 아직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딱히 중국이라고 꼬집을 수 없는 곳이 현재 동아시아대륙이라면 기어코 고집하는 것보다 현재의 상식에서 조금이라고 벗어나 생각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충고하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하여 무조건 나의 이야기를 다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판단의 유보를 남겨 고착화된 상식에서 벗어날 수있는 여유를 가져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강남(江南)은 중앙아메리카대륙 목구멍, 목덜미라고 하는 후금에 있다는 것을 이제 믿을 수 있겠는가?
왜 대륙 중앙(中央)을 중원(中原)이라 하였고 중국(中國)이라 한 사실을 보지 못하는가?
강남을 바로 볼 수 있다면 중국이라고 하는 송나라도 볼 수 잇을 것이란 판단을 할 수가 있다.
항간에는 진보 역사학자들이 주장하길 고려는 중앙아시아에 존재했고 중원의 지존이었음을 강조한 사실도 중앙아메리카란 지형적인 상징성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세계삼한역사판단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여지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는 치자(枝子)로 돌아가 백과사전을 보면 치자나무(Cape jasmine)는 치자(枝子)라고도 불리는 열대 및 아열대 식물로서 꼭두서니과(Rubiaceae)에 속하는 늘푸른 넓은 잎 떨기나무인데, 여름에 흰 꽃이 피며 향기가 있다 하였고 열매는 그 모양이 타원형으로 옛날 술 단지와 비슷하다고 하여 치자라는 이름이 생겼다 하였다.
이것은 위 치자나무의 사진을 보면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는 형태적인 문제이다.
이것의 분류체계는 용담목(龍膽目:Gentianales), 천초과(茜草科=꼭두서니과:Rubiaceae), 치자나무속(栀子屬:Gardenia)의 상록성 관목이며 다른 이름으로는 목단(木丹), 선지(鲜支), 치자(卮子), 월도(越桃), 수횡지(水横枝), 지자화(支子花), 지자화(枝子花), 산치화(山栀花), 황계자(黄雞子), 황제자(黄荑子), 황치자(黄栀子), 황치(黄栀), 산황치(山黄栀), 옥하화(玉荷花), 백담화(白蟾花)등이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옛날에도 종류가 하나가 아니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 치자나무를 특징적으로 보면 남부지방에서는 정원 관상용으로도 재식하는데, 작은 가지는 어릴 때 먼지 같은 털이 있고 키는 1.5∼2m 정도 자라며 잎은 각 마디마디 두개씩 마주 붙어 나는 대생(對生)으로 어겨 붙었고 다소 억세며 광택이 있는 장타원형 또는 넓은 도피침형(倒披針形)으로 밑이 좁고 끝이 급하게 뽀족하며, 길이 3∼15cm로서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는 것이 특징이이라 하였으며 꽃은 7월에 피며 화편(花梗)이 없고 꽃받침은 6∼7조각으로 갈라지며, 수술도 6∼7개이면서 쟁반같은 모양의 직경 6㎝ 정도 흰 꽃이 피는데 1474년(성종 5) 강희안(姜希顔:1417-1464)이 쓴 양화소록[養花小錄]을 보면 “모든 꽃은 꽃잎이 여섯 장인 경우가 거의 없는데 오직 치자꽃 만이 여섯 장의 꽃잎[六出]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치자(梔子)를 민간에서는 다치고 삔데 쓰이는데 대개는 곱게 가루로 만들어 밀가루에 개었다가 환부에 붙이는데 본래 치자는 약성이 차서 염증을 제거시키는데 효과가 있고 열을 내려주기도 한다 하였다. 임상적으로는 급성 황달형 간염에 담즙의 분비작용을 촉진시키면서 간장의 기능을 활성화시키는데 자주 쓰인다는 약재라고 알려졌으며 성분으로는 치자 열매에 사포닌, 그로신 등이, 꽃에는 다량의 향지(香脂:꽃기름)가 함유되어 있어, 피로회복, 최면, 건위, 이뇨, 정장, 해열, 식욕증진에 효과가 높고 코피가 날 때 치자(梔子)를 태워 콧구멍에 붙여 놓으면 효과가 있다 하였다. 또한 치자(梔子)의 황색(黃色)색소는 물에 쉽게 녹는 크로신(crocin)이라는 색소가 있으며 이 크로신 색소는 황적색의 결정으로서 186℃에서 녹아 일종의 배당체이기 때문에 가수 분해되면 크로세틴(crocetin)이라는 물질로 변하며 색소는 내광성(耐光性:light stability, light resistance), 내열성(耐熱性:heat resistance), 내약품성(耐藥品性:chemical resistance)이라 식품의 색소로서 상당한 가치가 있고 더우기 물이 잘드는 염착성(染着性)이 좋아 일단 착색되면 씻겨 지지 않는 잇점이 있는 물질이라고도 하였다.
특히 이러한 성분 때문에 치자(梔子)는 한약으로 도 많이 쓰이지만 염색으로도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사전에서도 알 수 있었는데 천연색소라 하여 예부터 제사상 차림 음식에 전(煎)붙이는데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제사음식으로 동태, 고구마, 부추, 우엉, 배추, 다양한 꽂이 등 노르스름한 색깔을 내는 것은 치자열매를 물에 우려내어 밀가루에 섞어 반죽하고 그것으로 갖가지 전을 붙인 것이다.
또한 치자 열매를 삶아서 그 물에다 천을 넣고 뒤적이다가 건져 미지근한 물에 잿물을 조금 타서 저은 다음 천을 넣고 골고루 뒤적인 후 금방 짜지 않고 햇볕에 말리면 주황색 빛 치자 빛이 나 옛 부터 치자 열매는 식용으로 널리 쓰였고 윗글에서도 있듯이 천연염료로도 사용되어 왔음도 알 수가 있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젖을 떼려고 할 때 노란 치자 물을 엄마젖꼭지에 발라 쓴 맛에 아이가 놀라게 했으며 타박상, 삔데, 멍든 부위에 밀가루를 치자 물로 개어 아픈 부위에 부쳐 두면 낳았다는 것은 민간 치료법으로 상식처럼 되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제사상 음식을 만들 때 지금은 전을 치자대신 계란을 밀가루에 넣고 풀어 노란 색을 내지만 우리 어머니와 할머님들께서는 치자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아주 오랜 옛날부터 치자가 조선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식물이었음을 알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자(梔子)는 조선인과 분리될 수 없었다는 이야기고 안타깝게도 한반도는 분명히 치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열대이거나 아열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여러분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치자나무는 한반도사정과는 매우 이질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것이 경산도와 전라도 그리고 제주목에서 토산(土産)으로 생산되었다는 것은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오대십국시대(五代:907∼959)의 사람이며 종릉(鍾陵:江蘇省 南京) 또는 금릉(金陵:江蘇省南京)출신으로서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남당(南唐)에 벼슬하던 강남(江南)의 명족이었다고 하는 서희(徐熙)가 있었던 강남은 중앙아메리카이며 그곳에 분명 치자나무의 근원지임을 알았다.
또한 세종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치자나무 토산지인 경상도, 전라도, 제주의 대정현(大靜縣)과 정의현(旌義縣)이 북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바로 치자(梔子), 비자(榧子), 유자(柚子)는 남해(南海)의 삼자(三子)라고 불렀다는 사실에서 근원적으로 제주(濟州)와 탐라(耽羅)가 다르다고 할 때 제주(濟州)는 북아메리카대륙 남부의 플로리다라고 한다면 탐라(耽羅)는 분명 남해(南海)에 있어야 하는데 도대체 이 남해(南海)는 과연 어딜 지칭한 것인지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1.Gardenia actinocarpa. Puttock, 2.Gardenia dacryoides. A. Cunn. ex Puttock(Malava, Wild Gardenia), 3.Gardenia ewartii. Puttock, 4.Gardenia faucicola. Puttock, 5.Gardenia fucata. R. Br. ex Benth, 6.Gardenia gardneri Puttock, 7.Gardenia jabiluka Puttock, 8.Gardenia jasminoides Ellis, Cape jasmine, 9.Gardenia kakaduensis Puttock, 10.Gardenia megasperma, F. Muell. Wild Gardenia, 11.Gardenia ovularis F. M. Bailey, 12.Gardenia psidioides, Puttock, 13.Gardenia pyriformis, A. Cunn. ex Benth, 14.Gardenia resinosa F. Muell, 15.Gardenia rupicola, Puttock, 16.Gardenia scabrella, Puttock, 17.Gardenia schwarzii, Puttock, 18.Gardenia sericea, Puttock, 19.Gardenia tessellaris, Puttock
Gardenia dacryoides. A. Cunn. ex Puttock 1867
Gardenia fucata. R. Br. ex Benth 1864
Gardenia pyriformis, A. Cunn. ex Benth.1867
Gardenia ovularis F. M. Bailey 1893
Gardenia resinosa F. Muell 1858
위 19종 중 앞에서 이야기한 ‘Gardenia jasminoides J. Ellis’를 뺀 나머지 학명들 중에 학명자 'Puttock 1988' 가 대부분인데 이 사람은 현대인으로 1947년 영국에서 태어나 호주의 식물에 대한 식물 학자와 식물 작가로 34 년 동안 호주에서 살았다 하였으니 연구가 일방적일 수 있어 제외 하더라도 나머지 다른 명명자의 위 5 종을 DNA 분석을 바탕으로 한 디스커버 라이프(Discover life)가 제공한 분포지도에서 각각 살펴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호주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는 것이다.
위 학명 19종의 모두 공통점을 찾는 다면 바로 근원지가 한결같이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그곳이 남해(南海)가 될 수밖에 없다.
한반도 사관으로 보았을 때 이 어찌 충격적이고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있겠는가?
허목(許穆,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 사방(四方) 중 남쪽을 가르키고 있는 소제목속에 탐라(耽羅)를 찾으니 이와같다는 사실이다.
분명 기언에서 말하는 탐라는 제주와 별개의 지명이 확실한 것이다.
다시 말해 탐라(耽羅)가 바로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란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기언에서 말하는 탐라지(耽羅誌)에 치자(梔子)가 과일로 생산된다 한 것에서 놀랍다는 것은 이 치자나무의 근원지로 거의 위 학명 18종 전부가 호주를 나타내고 있다는 공통점에서 즉 탐라가 호주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 서양인들이 만든 고지도에서 남해(南海)란 근거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아래 적시한 두 종의 지도는 1602년에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Matteo Ricci,1552-1610)가 북경(北京)에서 제작한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와 1785년에 그렸다고 하는 일본고지도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로서 이 두 지도 속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남해(南海)와 녕해(寧海)가 지도 하단부에 명백하게 새겨진 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영해는 나중에 또 한번 이야기 하기로 하고 남해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1602)전체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A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B
지구만국산해여지전도(地球萬國山海輿地全圖:1785)
대전제 즉 서양사가 말하는 대항해시대는 대왜구시대, 또는 대해적시대라고 풀이 할 수 있다는 확고한 철학이다.
대왜구시대는 물론이고 대해적시대는 상대방이 있어야 하는데 그 상대방은 거대한 세계를 통치하던 세력 즉 삼한이었던 것이 틀림이 없다.
앞서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실제로 해구(海寇:sea marauders), 해적(海賊:pirates), 왜구(倭寇), 왜적(倭賊)들은 서양사에서는 늘 '탐험가' 또는 '항해사'라고 불리는데 이러한 무리들이 대양을 마구 여기저기 설쳐되던 15세기 말엽부터 처음으로 그들이 접한 곳을 신개척지라고 야단법석을 떨고 있지만 이것은 기존 역사를 부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그들이 마구 쳐들어간 곳들은 이미 오래된 역사문화를 가지고 진보된 생활을 하던 문명인들이 살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전통이 생생하게 이어지며 나름대로 굉장한 문화창달을 이루던 평화로운 곳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넓은 지역이니 특징적인 원주민들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다양한 원주민들을 지혜롭게 통치하던 세력이 있었다는 것이고 탐라처럼 삼한으로부터 봉작, 작호가 내려지는 시스템이 존재하였다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한탕주의 또는 배금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백정들이 여기저기 들 쑤시던 15세기후반부터 이러한 평화는 깨어지게 되고 약탈과 방화, 살인으로 아비규환의 장소로 바뀌어 갔음을 현재 서양사라고 하는 세계사를 놓고 보면 이러한 사실을 충분하게 추측하고 예측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위 두 지도를 보면 묵와랍니가(墨瓦臘泥加)라고 표시된 곳을 볼 수 있지만 매우 어설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서양인들에 의해 근세사가 만들어지면서 그들의 역사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 이전에 존재한 삼한역사를 바탕으로 하는 세계지도들은 어딘가 숨겨놓고 오직 들어내놓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항해시대를 시작한 시기때부터 약탈자, 침략자인 해구, 해적들이 그린 항해일지를 바탕으로 새롭게 지도란 것을 그리고 내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만이 현재까지 최대한으로 알려지게 하여 마치 그들이 그린 지도 이전 것은 없는 냥 만든 것이라고 볼 때 그들의 지도기술은 항해일지를 벗어날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판명된다.
그나마 서양인이 세계지도를 세밀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1602년에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Matteo Ricci,1552-1610)가 북경(北京)에서 제작한 곤려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라 할 수가 있는데 이렇듯 어설프다는 것은 미루어 짐작컨데 지도기술이 낙후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삼한에서는 이러한 세계지도를 작성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오히려 더 뛰어난 지도기술을 가지고 수많은 지도를 양산하였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미 신라는 나침판을 만들어 세계일주를 번번히 실행하였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어디에 숨겨 놓고 들어내고 있지 않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훨씬더 정확한 세계지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1602년에 이탈리아인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Matteo Ricci,1552-1610)가 그린 지도 역시 호주를 남방대주(南方大洲)라 하여 두 지도 똑 같이 그려놓고 있지만 이미 탐라, 또는 호주라고 하여 삼한인들은 수도 없이 들락거렸을 것이란 예측이 가능하다.
마테오리치가 삼한지도를 모사하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서양사에서는 16세기 초 포르투갈 태생의 에스파냐 항해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는 해구, 해적에 불과하기는 마찬가지인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이 1520년 11월 28일 험난한 항해 끝에 해협을 빠져나가 잔잔한 대양(大洋)에 이르자 이를 태평양(太平洋)이라 명명하였고, 지나온 해협은 마젤란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식으로 서양인의 관점으로 보는 해양사를 남기고 있지만 믿을 것이 못된다.
마젤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태평양을 지나 괌선에서 필리핀 비사야제도(Visayas) 세부 섬(Cebu Island)에 도착하여 잘 훈련된 원주민들과 교전하다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는 마젤란 최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서도 서양사의 추악한 모습을 그려볼 수 있는데 마젤란이 세부섬에 도착하여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와중에 그를 도우려고 하는 쪽의 사람과 그의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다는 것은 매우 무엇인가 꿰맞추려는 소설 같은 느낌이 없지 않고 이런식으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었던 대항해시대였으니 그들이 스스로 오만한 짓이라고 할 정도로 과욕이 앞섰다는 것을 자인 한것이 된다.
하지만 늘 상 이러한 엉뚱한 짓을 정당화시키고 합리화 하는데 근세사가 이용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은 한마디로 해구, 해적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할 때 해구, 해적질을 하고 다니던 무리들을 탐험가, 항해사로 둔갑시켜 역사를 새롭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인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 1602년까지 지금 호주에 도달하지도 않았다면서 막연하게 남방대륙을 거쳤다고 하여 묵와랍니가(墨瓦臘泥加)를 해적 '마젤란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식으로 만들고 라틴어의 'Magellanica(or Magallanica)'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니 가당찮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보다 앞서 정식으로 호주에 도착한 것은 1606년 네덜란드의 두이프겐호(Duyfken)가 북부 카펀테리아만(Gulf of Carpentaria)에 도착한 것이 최초라고 하고 이후 네덜란드 선박들은 가끔씩 이곳을 거쳐 동쪽으로 이동하고는 하였다는데 해적이 어딜 못가겠는가 마는 그들이 당시 주류세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여 그 이전 역사의 주류와는 전혀 합의 없이 지들끼리 주고 받고 야단이었는데 이후 1688년에는 최초의 영국인 항해사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해적신분을 벗어날 수 없는 댐피어(William Dampier:1651-1715)가 도착하였다는 이유로 또는 같은 영국인인 제임스 쿡(James Cook:1728-1779)역시 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이어서 동쪽해안을 탐험하였다는 이유로 현재 영국이 이 지역의 지배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인데 시기가 1769년이라고 한다.
어쨌던 그 이전 역사는 서양세력들에게 깡그리 무시되어버렸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설치던 시기에 이미 이 지역은 조선관할이었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조선과 거대한 전쟁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기어코 대조선과 서양세력들과 거대한 충돌은 현재로선 임진왜란 말고는 없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호주,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영국으로부터 1788년 1월 31일 죄수 736명과 하급관리들을 태운 배 13척이 건너온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고 신대륙을 말하는 북아메리카에 발을 딛은 청교도처럼 호주역시 서쪽으로 개척해나갔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환경은 그렇게 녹녹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에서 보면 당시 호주에는'아보리지니 또는 애버리진(Aborigine)'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있었고 그들과 수많은 충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때문에 학살 등도 자행되었다고 하였으며 대표적인 것으로 특히 호주대륙의 유일한 섬 타즈매니아(Tasmania)지역에는 조직적인 인간사냥을 통해 원주민의 수가 백만명을 넘는 수준에서에서 1920년대 초반에 수만명선까지 줄어들었다고 하고 있으니 당시 처참한 살육현장은 눈에 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이 현재 서양사의 대항해시대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나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볼 때 그곳에는 고려사(高麗史)지리지에 나타나듯이 고(高), 양(梁), 부(夫) 3성(姓)의 개벽설화가 전하여 지는 곳이었으며 백제(百濟)문주왕(文周王475-477)2년(476)때 통교하였다는 사실과 신라 문무왕 2년(662)에 신라의 속국이 되었던 사실, 고려태조21년(938)에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가 고려숙종10년(1105)에 군(郡)이 설치되면서 비로소 군현체제에 편입되었다는 곳이고 고려의종7년(1153)에는 현(縣)으로 격하되었던 곳이다.
또한 조선(朝鮮)초기까지 이 대륙의 지배층에게 조선국에서 성주(星主), 왕자(王子)등의 작호까지 내려 준 사실의 역사가 존재하는 실제로 역사의 땅 탐라(耽羅)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재미나는 이야기가 있는데 자료를 보면 영어의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가 각각 이름에서 혼란을 야기하는 것으로서 비슷한 명칭에서 보면 둘다 라틴어가 어원인데 '오스트리아(Austria)'는 12세기의 기록에서 독일어인 외스터라이히(Österreich)가 '동쪽제국'Eastern kingdom' 혹은 'eastern empire'를 라틴어화한 것으로 '동쪽의 나라'라는 의미한 것이고 '오스트레일리아'는 라틴어로 'southern' 또는 'South Land' '남쪽 땅'을 의미하는 'australis'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고 있다.
독일어 "Ost" 는 동쪽(east)을 나타내지만 라틴어 "auster"는 남쪽(south)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과 매우 다른것은 오스트리아(Austria)는 동쪽에 있었던 나라라는 사실이다.
즉 오스트리아는 동쪽이라면 적어도 아메리카대륙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들어나는 사실마다 현격히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세계사에서 삼한의 조선사는 다 어디에다 깡그리 숨겨버렸는가?
아니 동양사에서도 제대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근세기에 본 블로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분명히 모종의 거대한 음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 여파가 한반도 현실과 최악 점선에서 만났는데 두동강이 잘려져 있는 분단국으로 세계에서 둘도 없는 비참한 비극의 땅이 되고 말았다.
아무리 항해시대를 통하여 서양세력들의 주도된 것이라고 하지만 이 어찌 정당하다고 할 수 있고 당연하다고 여길 수가 있겠는가?
정녕 치자(梔子), 비자(榧子), 유자(柚子)는 남해(南海)의 삼자(三子)라고 하였다면 그래서 남해(南海)와 묵와랍니가(墨瓦臘泥加)가 명확하게 아로새겨진 곳에 뉴질랜드와 호주가 있었다면 그곳은 분명 탐라(耽羅)라고 하는 것이 옳다. 다시말해 허목(許穆,1595-1682)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치자(梔子)가 생산되었다는 사방(四方) 내에 있었을 탐라(耽羅)는 바로 호주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수서[隋書]에서 결정적인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하였는데'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남해(南海)로 3개월을 가면 모라국(牟羅國)즉 탐라가 있다 하였다는 사실은 바로 호주란 대륙을 명확하게 지정하고 있다.
한가지 더 추가하여 위키자료에 나오는 것을 참고로 하면 주호(州胡)의 지운왕(指雲王:483-508)에특산물 가(珂)를 고구려에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가(珂)는 옥과 비슷한 돌로 흰색의 마노(瑪瑙)라고 하는 것으로 영어자료에
The greatest diversity of agate types, colour and distribution is found in Australia, Brazil, Germany, Mexico and the USA.
마노의 유형, 색깔 및 유통에서 가장 큰 다양성을 보이는 것은 호주, 브라질, 독일, 멕시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자료가 있다.
팔해(八海)는 사방(四方)과 사우(四隅)의 바다를 일컫는 것으로 팔해(八海)안을 천하(天下)를 뜻한다고 하였는데 사방(四方)은 동서남북(東西南北)이며, 사우(四隅)는 서쪽부터 이야기 하면 서북(西北), 서남(西南), 동북(東北) , 동남(東南)이라 할 때 남방(南方)에 남해(南海)가 아로새려져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삼한(三韓)이 세계를 통치한 통치국이라면 이 여덟개의 방향의 바다를 모두 합쳐 팔해(八海)라고 하고 이것을 천하(天下)를 뜻했다는 것이니 삼한(三韓)의 거대한 기풍은 실로 대단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의 틀, 시스템을 근세기에 해적세력들이 사방에서 부흥하여 역사새판짜기를 시작하였고 결국 영국이라는 이름으로 가로챈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에서 나온 결과의 판단은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대조선이 해체된 1881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영국(United Kingdom)을 홍모번(紅毛番)이라 하였고 홍모번은 곧 하란인(荷蘭人)이라고 하였으며 네덜란드(Nederland)이고 네덜란드를 화란(和蘭), 화란타(和蘭陀), 아란타(阿蘭陀), 하란타(荷蘭陀)하여 통괄 홍이(紅夷)라 하였으니 당시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대조선내에 일개 작은 갈래 계(係)같은 성질이었음을 알게 한다.
지금도 글로벌 미국에서는 한국계니 프랑스계니 터어키계라고 통칭하지 않는가?
만약 해구, 해적출신 홍이(紅夷)라고 하는 영국이 대조선의 지위를 그대로 떠 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으며 이러한 사실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없을 수가 없다.
적어도 세계삼한역사관을 신봉한다면 그래서 대의를 품고 있다면 이렇게 힘들게 돌출된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진실의 역사가 이처럼 소리치고 있는데 우리는 왜 그 소릴 듣지 못하는지 늘 안타까움만 있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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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와 관계되는 문헌들
탐라국왕세기(耽羅國王世紀)에 의하면 기원전 2337년이라 하였다
탐라국(耽羅國:B.C57-A.D1402) 신라, 백제에게 복속되었다가 15세기 초반에(1400년대) 조선에 완전 병합되었다.
탐모라국(耽牟羅國), 섭라(涉羅), 탁라(乇羅), 담모라(耽牟羅), 담라(憺羅)라고도 지칭되었으며《삼국지》동이전에서는 주호(州胡)라고 적고 있다.
胡州(见《红楼梦》第一回)作者虚拟的地名,脂评:“胡邹也。”(甲戌本)小说中的地名,真真假假,有的确指,有的“胡邹”,不必全部当真。在《红楼梦》传抄过程中,有的抄手不明作者之意,将“胡州”改抄成“湖州”(如已卯本、蒙府本、戚序本、甲辰本、舒序本等),在程本中,则落实为“浙江湖州府”,去原意更远(参见“湖州府”条)。
주호(州胡)는, 진수(陳壽,233-297)의 삼국지(三國志)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에 의하면 주호가 마한(馬韓)의 서쪽의 해상에 있는 큰 섬으로서 기록된다.(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三国志], [後漢書]에 의하면, 주호(州胡)의 사람은 언어가 한국(韓)과 다르고 키가 작고, 선비(鮮卑)와 같이 머리카락을 깎아(剃:칼로 머리·수염 따위를 깎다 또는 밀다), 상반신에 가죽의 옷을 입었지만 아래가 덮이지 않고 알몸에 가깝다. 소와 멧돼지를 길러, 배로 왕래하고 한국(韓)과 교역 했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韓)의 풍속으로서 기록되는 것과 크게 차이가 난다.
주호(州胡)는 이 후, 조선(朝鮮)의 삼한때에 탐라(耽羅)와 이름을 바꾸어 나타났다.
西伯利亚的名称来自鲜卑利亚
선비(鮮卑;BC1-AD6)는 하북성에서 규합된 혼혈 유목 민족으로서
탁발부(拓跋部:北魏), 모용부(慕容部:前燕, 後燕, 西燕, 南燕)에서 서천(西遷)한 토욕혼(吐谷渾), 단부(段部), 우문부(宇文部:北周), 흘복부(乞伏部:西秦), 독발부(禿髪部:南涼)
수서(隋書)권(卷)81열전(列傳)제(第)46,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권(卷)03수(隋)에 의하면
其南海行三月 有牟羅國 南北千餘里 東西數百里 土多麞鹿 附庸於百濟 百濟自西行三日 至貊國云
남해로 3개월을 가면 모라국(牟羅國)이 있는데 남북천여리고 동서수백리로서 그곳에 노루와 사슴이 많다. 부용(附庸)은 백제(百濟)인데 백제(百濟)에서 서쪽으로 3일가면 맥국(貊國)에 이른다고 한다.
해동역사 제16권
세기(世紀) 16
제소국(諸小國) 살펴보건대, 동사(東史)를 보면 신라와 고려 시대 때 소소한 속국(屬國)들이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의 서책에 나오는 나라들만을 취하여 이들을 합하여 제국기(諸國記)로 삼아 끝에다가 붙인다.
탐라(耽羅)
진서(鎭書)가 삼가 살펴보건대, 탐라는 바다 섬 나라이다. 《후위서(後魏書)》에서는 섭라(涉羅)라고 칭하였고, 《수서(隋書)》에서는 담모라(牟羅)라 칭하였고, 《당서(唐書)》에서는 담라(儋羅)라 칭하고 또 탐부라(耽浮羅)ㆍ탁라(乇羅)라 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한나라이다. 우리나라의 방언에 도(島)를 ‘섬(剡)’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羅羅)’라 하는데, 탐(耽)ㆍ섭(涉)ㆍ담(儋) 세 음은 모두 섬(剡)과 음이 비슷하니, 대개 섬 나라를 이른 것이다. 고기(古記)에 칭한 바 ‘처음에 탐진(耽津)에 정박하여 신라에 조회하였으므로 탐라(耽羅)라고 한다.’는 것은 견강부회한 설이다. 백제 문주왕(文周王) 때부터 백제를 섬겼고, 백제가 망하자 다시 신라를 섬겼으며, 고려 숙종(肅宗) 10년에 이르러 강등시켜 군(郡)으로 삼았는데, 지금의 제주(濟州)이다.
○ 탐라는 임읍(林邑)의 남쪽 변경 바다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책부원귀》 ○ 《한창려집(韓昌黎集)》에는, “해외의 여러 나라 가운데 탐부라(耽浮羅)ㆍ유구(流求) 등의 나라는 동남쪽 천지(天池)에 있다.” 하였다.
○ 탐라는 또한 탐모라(耽牟羅)라고도 한다. 그 나라는 백제의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나 동물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속에서 솟아나왔다. 맏이를 양을나(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나(高乙那)라 하고, 그다음을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어느 날 세 사람이 바닷가에서 사냥을 하다가 석함(石函)을 하나 얻어 열어보니, 세 여인과 개와 소 등 가축과 오곡(五穀)의 종자가 있었다. 이에 드디어 세 여인을 나누어 아내로 삼고 각자 샘물이 달고 토질이 비옥한 곳을 찾아 살았다.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1도(都)라 하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2도,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3도라 하고는 비로소 오곡을 씨뿌렸으며, 또 망아지와 송아지를 길러 날로 부유해졌다. 송 원휘(元徽 후폐제(後廢帝)의 연호) 4년(476)에 비로소 백제국에 방물을 보내었다. 《일본기(日本紀)》 ○ 이것은 바로 동사(東史)의 본문이다.
○ 후위(後魏) 정시(正始 선무제(宣武帝)의 연호) 연간에 세조(世祖)가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芮悉弗)을 인견하였다. 예실불이 아뢰기를,
“황금은 부여(夫餘)에서 나고 가(珂)는 섭라(涉羅)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겨나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습니다.”
하였다. 《후위서》
○ 백제에서 남쪽 바다로 3개월을 가면 탐모라(耽牟羅)라는 나라가 있는데, 남쪽에서 북쪽까지의 거리가 1천여 리이고, 동쪽에서 서쪽까지는 수백 리이며, 토산물로는 노루와 사슴이 있다. 백제의 부용국(附庸國)이다. 《수서》 ○ 《수서》에는 또, “양제(煬帝) 대업(大業) 4년(608)에 문림랑(文林郞) 배세청(裴世淸)을 파견하여 왜국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는데, 백제국을 건너 죽도(竹島)에 이르러서 남쪽으로 바라보니, 탐라국이 큰 바다 가운데 있었다.” 하였다.
○ 당 고종 용삭(龍朔) 초에 담라(儋羅)란 나라가 있어 국왕 유리도라(儒李都羅)가 사신을 파견하여 들어와서 조회하였다. 그 나라는 신라 무주(武州)의 남쪽 섬에 있는데, 풍속이 소박하고 누추하며, 개 가죽과 돼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여름에는 초실(草室)에 살고 겨울에는 굴실(窟室)에 산다. 땅에서는 오곡이 나는데, 소를 써서 경작할 줄 모르며, 철치(鐵齒)로 땅을 판다. 처음에는 백제에 부용하였다. 인덕(麟德 당나라 고종의 연호) 연간에 추장(酋長)이 와서 조회하면서 황제를 따라서 태산(太山)에 갔다. 뒤에 신라의 부용국이 되었다. 《신당서》
○ 가우(嘉祐 송나라 인종(仁宗)의 연호) 연간에 소주(蘇州) 곤산현(崑山縣) 상해(上海)에 어떤 배 한 척이 표류하여 와서 해안에 닿았다. 배 안에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의관은 중국 사람과 같았으며,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시험 삼아 글자를 써 보게 하였으나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서찰 하나를 내보였는데, 바로 당나라 천우(天祐 애제(哀帝)의 연호) 살펴보건대, 천우(天祐)가 《사문유취(事文類聚)》에는 천수(天授)로 되어 있는데, 이는 천우를 잘못 쓴 것이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서는 이를 인하여 고려 태조의 연호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연간에 둔라도(屯羅島)의 살펴보건대, 둔라도는 탁라도(乇羅島)가 잘못된 것이다. 수령(首領)에게 배융부위(陪戎副尉)를 제수하였음을 고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글이 있었는데, 바로 고려에 올리는 표문(表文)으로, 역시 둔라도라고 칭하였으며, 모두 한자(漢字)를 써서 기록하였다. 이는 대개 동이로서 고려에 신하로 소속된 자이다. 《몽계필담(夢溪筆談)》 ○ 교빙지(交聘志) 표류조(漂流條)에 상세히 나온다.
○ 탐라는 고려의 여국(與國)이다. 세조(世祖)가 이미 고려를 신하로 복속시키고는 탐라가 남송(南宋)ㆍ일본(日本)과 통하는 요충지라고 여겨 주의를 기울였다. 《원사》 ○ 삼가 살펴보건대, 원나라 때에는 탐라가 이미 고려에 병합되었으므로, 《원사》에 실려 있는 탐라에 대한 사실은 모두 고려기(高麗紀)에 편찬되어 있다.
○ 마한의 서쪽 바다의 섬 위에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았으며, 가죽 옷을 입는데 상의(上衣)만 있고 하의(下衣)는 없다.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물화(物貨)를 한(韓)의 국중(國中)에 사고 판다. 《후한서》 ○ 살펴보건대, 주호국은 탐라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가 없기에 끝에다가 기록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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