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삼한역사

하서주랑(河西走廊)

한부울 2009. 8. 23. 20:11

 

하서주랑(河西走廊)


하서주랑: 대략 난주에서 돈황에 이르는 길이다.


Hexi Corridor or Gansu Corridor (Chinese: 河西走廊; Wade-Giles: Hehsi Tsoulang)


하서주랑(河西走廊)은 동쪽은 오초령(烏鞘嶺)으로부터 시작해 서쪽은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 남북은 남산(南山: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과 북산(北山: 마종산(馬鬃山),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 사이의 길이 약 900km, 폭 수km에서 100km에 이르는,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 복도 모양과 같이, 황하의 서쪽에 있어 하서주랑이라 부른다.


지역은 감숙성(甘肅省)의 난주(蘭州)와「하서사군(河西四郡):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을 포괄한다. 거주하는 민족은 한족과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의 민족이 있다. 한의 무제가 하서를 개벽해 무위, 장액, 주천, 돈황의 사군을 연 이래, 내륙의 신강(新疆)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통로이며,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진행시킨 중요한 국제 통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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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는 인구 600만명, 구도인 은천의 인구는 120만명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회족이 전체 인구의 1/3을 차지하고 있다. 본래 감숙성(甘肅省)에 속하였으나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중국 정부의 정책에 의하여 영하회족자치구로 분리되었다.


서하왕조(西夏王朝)의 역사 : 7세기 송첸캄포가 티벳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며 티벳 최초의 통일 왕국인 토번(吐蕃)을 건국하고 심지어 唐나라를 침공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지자, 당시 사천성 송번(松藩)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탕구트족은 감숙성(甘肅省)을 거쳐 섬서성(陝西省) 북부로 생존을 위한 엑소더스를 감행하였다. 당 말기에 접어들며 독립된 지방 세력으로 성장한 탕구트족은 11세기 초 이원호(李元昊)가 여러 부족을 통합하면서 宋나라의 행정조직을 모방하여 관료 제도를 정비하였고, 1036년에는 고유 문자까지 창제하였다. 1038년 이원호는 송과 맺은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면서 스스로 황제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국호인 대하(大夏)는 중국 최초 왕조인 하(夏)를 계승한다는 뜻으로, 송은 자신의 영토 서쪽에 있다 하여 '서하(西夏)'라 불렀다.


서하는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황무지를 개척하고 실크로드의 중계무역을 장악하며 2세기 동안 번성하여 영토는 동쪽으로는 내몽고(內蒙古)자치구의 포두(包頭), 서쪽으로는 감숙성의 옥문관(玉門關), 남쪽으로는 난주(蘭州), 북쪽으로는 오늘날 중국과 몽고의 국경선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개국 황제 이원호에서 마지막 황제 이현까지 10대에 걸쳐 번영을 누린 서하왕조는 실크로드 무역로를 장악하고 영화를 누렸지만 13세기 들어 강대해진 몽골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1206년 징기스칸이 몽골을 통일하자 서하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몽골에 충성을 맹세하고 공주를 징기스칸과 정략 결혼시키는 한편 몽골과 함께 금나라에 대한 전쟁도 벌여나갔다. 그러나 금나라를 상대로 한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하게 되자 1226년 징기스칸의 서역 정벌 제안을 거부하게 되었고 이에 1227년 징기스칸이 직접 이끈 몽골군은 서하를 침공하게 되었다. 서하는 몽골 대군에 강력하게 저항하였고 몽골 불세출의 영웅 징기스칸은 서하와의 전투 중 사망하였다. 징기스칸은 죽으면서 "서하인을 섬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말라. 멸망시키고 죽여 버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징기스칸의 유언처럼 몽골군은 서하인을 철저히 도륙하였고 처절한 파괴와 학살은 오랫동안 서하의 존재를 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멸망의 참화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탕구트족은 옛 고향인 사천성으로 되돌아갔는데, 오늘날 사천성 깐즈장족자치주(甘孜藏族自治州)의 단빠(丹巴)와 따오푸(道孚)에서는 현지 원주민인 장족(藏族)이나 강족(羌族)과는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를 지닌 서하왕조의 후예로 추정되는 소수민족이 발견되고 있다.


서하어는 티벳-미얀마 언어 계통으로, 중국어와는 문법과 발음 체계가 전혀 다르다. 서하 문자는 6000여 자가 만들어졌는데, 한자에 한자 획수를 더한 문자로 어떤 자수는 40획이 넘기도 했다. 서하의 문자는 서하가 멸망한 이후에도 16세기 초까지 쓰여 240여 년간 생명력을 유지하였다. 서하는 동서 문화의 영향을 고루 받아들여 중국의 유교, 티벳의 밀교, 서방의 이슬람 문화까지 흡수한 고도의 문명을 창조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서하왕조와 같이 독자적인 문자와 문명을 꽃피웠던 유목민족은 그리 많지 않다.


1. 서하왕릉 : 은천에서 서쪽으로 30Km 외곽에 위치하며 '동방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서하왕릉(西夏王陵)에는 1038년 서하왕조를 세운 이원호(李元昊)를 비롯한 8개의 왕릉(王陵)과 200여 개의 귀족의 묘가 있다. 이원호의 묘는 태릉(泰陵)이라 하며 서하왕릉에 있는 무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서하왕릉은 고대 한족 황실능원의 장점을 흡수하면서 불교건축을 융합하고 탕구트와 북방유목민족의 전통을 더한 독창성 있게 건축된 능묘이다. 서하왕릉에서는 14만점의 유물과 200점의 건축 장식 등 각종 문화재가 출토되어 서하문화의 보물창고인 셈이다.


2. 회향문화원 : 회향문화원은 영하회족자치구에 살고 있는 회족의 유래, 종교, 의상 등을 볼 수 있는 테마파크로서 내부에는 회족박물관과 무슬림사원, 회족민가가 있으며 회족 전통 민속공연도 볼 수 있다. 시내 곳곳에서 흰 모자를 쓴 회족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본래 회족은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때 강제 이주되어 이 머나먼 중국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 회족은 이슬람교를 믿으며 언젠가는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품고 있다하여 回(돌아올 회)族이라 부르게 되었다.


3. 내몽고박물관 : 내몽고박물관은 몽고족의 전통적인 민속 의상과 유목민의 이동식 텐트인 빠오 등 몽고족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민족풍정관, 매머드와 공룡의 화석이 원형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고생물관, 흉노족의 왕관과 몽골 문자가 새겨진 인장이 있는 역사관, 몽고족과 중국인이 힘을 합쳐 외세에 대항해 나라를 지켜낸 내용을 담은 혁명관 등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4. 왕소군의 묘 : 漢 元帝는 기원전 33년 북방의 강대국이었던 흉노족과의 화친을 위하여 당시 궁녀로서 중국 4대 미인의 한 명으로 불리는 왕소군(王昭君)을 수양딸로 입양한 후 흉노족의 왕과 정략결혼을 성사시켰다. 한 여인의 희생(??)으로 그녀가 생존하던 시기에는 흉노와의 전쟁은 없었고, 왕소군을 기리는 소군묘에는 그녀의 일생을 묘사한 부조와 동상, 호화호트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높이 33m의 소군묘가 있다.


5. 오탑사(五塔寺) : 1727년 淸나라 가정제때 인도의 건축 양식으로 세워진 오탑사의 원래 명칭은 금강좌사리보탑(金剛座舍利寶塔) 이다. 높이 16.5m의 오탑 외벽에는 1,560개의 부조 불상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조각되어 천불탑(千佛塔)이라고도 불린다. 불상과 함께 새겨진 글자는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옴마니반메훔〉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옴, 연꽃 속에 있는 보석이여, 훔”이라는 의미로 불교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주문이다.


6. 시라무런초원 : 호화호트에서 90분 소요되는 시라무런초원에 도착하면 형형색색의 깃발을 들고 말을 탄 몽고족 기마병들이 호위를 하며 여행객들을 초원으로 인도하고, 은 술잔에 술을 권하는 몽골의 전통 환영의식이 행해진다. 낮에는 말을 타고 초원을 질주하며 몽고족 유목민가 방문, 하늘에 제를 지내던 오보산, 한국의 씨름과 흡사한 몽고족의 씨름 체험, 저녁에는 초원에서의 아름다운 일몰 감상과 전통음식인 수바루(양고기)를 즐긴 후 가을처럼 선선한 밤에는 캠프화이어와 함께 몽고족의 전통 민속공연도 관람할 수 있다.


포두 : 내몽고자치구의 구도인 호화호트에서 서쪽으로 약 2시간 30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포두는 중국의 주요 철강공업 기지로서, 몽고어로 <사슴이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옛 성(동하구)의 동쪽 신지구(청산구, 곤도룬구)에는 넓게 만들어진 대로와 정제된 건물 높은 굴뚝과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공업 도시 풍채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철강대가(鐵剛大街)에는 300여 곳의 상점이 있고 "변방 제1의 거리"라는 명칭이 있으며 저녁마다 제련소의 뜨거운 화염이 온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장관을 보여주고 있다.


7. 쿠부치사막 : 포두에서 약 1시간 이동하면 영화에서나 봄직한 거대한 쿠부치사막에 도착하게 된다. 낙타를 타고 사막에 올라 모래썰매를 즐길 수 있고, 사막에서 바라보는 석양과 일몰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8. 텅거리사막(騰格里沙漠) : 서하왕릉에서 90분 소요되는 텅거리사막은 중국 8대 사막의 하나로 크게는 고비사막의 남단부를 이루는 아라선사막(阿拉善沙漠)에 포함되며,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와 감숙성(甘肅省)과 접해 있는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내에 위치한다. 짚차를 타고 텅거리사막의 오아시스 월량호까지 30분 이동한 후 다시 낙타를 타고 또 다른 오아시스 나인호까지 45분 이동한다. 나인호에서 낙타와 짚차로 75분 이동하여 사막 입구로 나온 후 영하회족자치구 중위까지는 차량으로 3시간 소요된다.


하서주랑(河西走廊) : 황하의 서쪽에 긴 복도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하서주랑이라 불리며 난주(蘭州)와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 돈황(敦煌) 등의 하서사군(河西四郡)을 포함하는 고대 실크로드의 일부분으로서 고대 중국과 서방 세계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국제 교역로였다. 동쪽의 오초령부터 서쪽의 옥문관(玉門關)까지 약 900Km, 남쪽의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부터 북쪽의 마종산과 합려산(合黎山) 및 용수산(龍首山)까지 100Km 미만으로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은 평지이다.


9. 황하석림(黃河石林) : 중위에서 3시간 떨어진 황하가 굽이쳐 흐르는 감숙성 경태(景泰)에 위치하는 황하석림은 34K㎡에 달하는 웅장한 계곡에 기암절벽이 병풍처럼 형성되어 있는데, 양피로 만든 배를 타고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를 유람할 수 있다. 황하석림은 국가지질공원으로 "자연의 기적"으로 불리며 성룡과 김희선 주연의 "신화", "한무제", "대돈황", "천하양창"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최근에는 송일국 주연의 한국 드라마 "바람의 나라"도 이곳을 배경으로 대규모 전투 장면이 촬영되었다.


무위(武威) :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漢 武帝의 명을 받아 곽거병이 흉노(匈奴)를 물리쳤던 무위의 唐나라 때 지명은 ‘사막의 서늘한 도시’를 의미하는 양주(凉州)였다. 무위는 최근 신라 문무왕의 비문을 통하여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추측되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던 김일제(BC 134년~BC 86년)와 고구려 유민의 후예로 중국 역사상 최초로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의 치트랄(蓮雲堡)을 격파하고, 힌두쿠시 준령을 넘어 小勃律을 정벌하여 안서절도사(安西節道使)에 올랐던 唐나라의 명장 고선지(高仙芝, ?~756년)의 고향이기도 하다.


10. 김일제(金日碲) 석상 : 신라 문무왕의 비석에는 <하늘에 제를 지내는 투후의 자손이 7대를 전하여 15대조 星漢王은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다>는 구절을 통해 신라 김씨의 시조인 성한을 칭송하고 있는데 투후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맹주인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BC 134년~BC 86년)이다. 漢 武帝의 흉노 정벌 명을 받은 곽거병과의 전투에서 휴도왕이 전사하며 흉노가 패한 후 낙양으로 끌려와 말을 기르는 노예가 된 그는 漢 武帝의 눈에 띄어 노예에서 해방되어 金氏 성(姓)을 하사 받고 오늘날 산동성 일대를 다스리는 투후(秺侯-투국의 제후)에 봉해졌다.


11. 김가장(金家庄) : 무위(武威)에서 75분 외곽의 작은 마을인 김가장에는 800여 명의 주민 중 자신들이 흉노의 태자로 투국(秺國)의 제후였던 김일제(金日碲)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600여 명의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산동성 하택시에는 투국의 표지석이 있는데 이곳 주민들은 김일제의 성을 따라 투국성을 ‘金城’이라고 하는데 신라의 수도 ‘金城’과 명칭이 동일하며, 신라 김씨의 무덤과 흉노의 무덤 양식도 동일한 적석목곽분이며, 흉노의 근거지에서 발견된 ‘동복(청동 솥)과 기마인물상’ 역시 신라의 것과 동일한데 이는 단순한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12. 리첸 : 무위의 김가장에서 3시간 떨어진 영창(永昌)의 리첸은 후한서(後漢書)에 BC 36년 서역도호부의 천탕(陳湯)이 漢 元帝의 명을 받아 흉노(匈奴)를 대파하였는데 당시 흉노족과는 달리 머리가 노랗고 코가 우뚝한 모습의 병사 1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그후 중국어로 로마를 의미하는 리첸이라는 부락을 만들어 포로들이 거주하도록 도왔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케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삼두(三頭) 정치를 하던 크라수스(BC 115~BC 53년)의 군대로 최근 고대 시신 발굴과 현주민의 DNA 검사 결과 BC 53년 로마와 파르티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로마로 돌아가지 못하고 중국의 넘어와 흉노족의 용병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옆의 사진은 중국 문회보에 실린 로마 군단의 후예로 추정되는 리첸의 주민들이다. 리첸에서 장액까지는 차량으로 90분 소요되는데 도로 양편으로 漢과 明代의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


장액(張掖) : 하서주랑(河西走廊) 중부에 위치하는 장액은 예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를 연결하는 요충지였다. 漢과 隋代에는 장액현(張掖縣)이 설치되었고, 唐 후기에는 토번에 복속되었으며, 元代에는 한약재인 감초(甘草)의 특산지로 감주(甘州)라 불렸다. 淸 후기에 다시 장액현으로 바뀌었으며, 마르코 폴로에 의해 유럽에는 ‘칸피추’로 소개되었다.


13. 대불사(大佛寺) : 대불사는 1098년 창건된 서하왕조(西夏王朝)의 불교 사찰로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에도 소개된 길이 35m, 어깨너비 8m에 이르는 중국 최대의 실내 와불(臥佛)이 있는 대불전(大佛殿), 티벳 불교의 경전을 보관하는 장경루, 만불탑 등이 있다.


14. 칠채산(七彩山) : 장액(張掖) 외곽으로 45분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칠채산은 오랜 기간 지질운동으로 붉은색 사암이 풍화와 퇴적작용으로 단층화된 특이한 고원 단하지모(丹霞地貌)의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이 계곡의 봉우리들은 다채로운 일곱가지의 색을 띤다하여 칠채산이라고 불리는데,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로 인하여 대자연의 대지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아직까지 중국인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이 방문하지 않은 덕분에 자연경관이 잘 보존되어 있다.


주천(酒泉) : 무위, 장액, 돈황과 더불어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대표하는 4대 도시의 하나인 주천(酒泉)은 예로부터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중국의 역대 왕조와 주변의 이민족들 사이에 끊임없는 다툼이 벌어진 곳이다. 시 중심에는 각 방향별로 <東迎華岳, 西達伊吾, 南望祁連, 北通沙漠>이라 쓰인 액자를 볼 수 있는 종고루(鐘鼓樓)와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漢 武帝가 내린 술이 많은 병사들이 마시기에 부족하자 곽거병이 샘에 술을 붓자 샘에서 술 향기와 함께 술이 솟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주천공원(酒泉公園)이 있다.


가욕관(嘉峪關) : 만리장성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天下第一雄關으로 불리는 가욕관은 明나라 최서부의 국경도시로서 군사의 요충지였다. 明나라가 멸망하고 淸나라가 건국되면서 영토를 가욕관에서 서쪽으로 1,000Km를 더 확장하면서 군인들이 철수하자 실크로드 국경도시로서의 역할을 잃고, 방치되어 황폐해졌다. 그러나 주변에 철광광산이 발굴되고 만리장성의 서쪽 끝을 보고자 하는 관광객들이 늘면서 서서히 활기를 띠고 있다.

 

15. 위진벽화묘(魏晋壁畵墓) : 가욕관에서 동북쪽으로 20Km 외곽의 고비사막 한 가운데 주위 10Km에 걸쳐 1,000여 개의 위(魏)와 진(晋) 시기(220~419년)의 분묘군이 발견되었다. 분묘 내부의 벽화에는 농사, 양잠, 목축, 사냥, 연회, 소와 말 등의 가축, 농기구 등 모두가 실제 생활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경작을 할 때 두 마리의 소와 써레를 사용하는 모습을 그린 벽화는 농사법의 연원을 추측하게 해주는 가장 오래된 자료이다. 그림은 주로 황토를 써서 붉은색을 띠는데 1,600여 년 이상된 벽화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하다.


16. 만리장성성채 :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에서 시작하여 동쪽 끝 산하이관까지 약 2,700km에 걸쳐 축성된 만리장성은 인류가 만든 최고의 건축물이다. 현재의 가욕관은 明代 축성되어 높이 11m의 성벽에 33,500㎡의 면적을 자랑하며 천하웅관(天下雄關)으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내성(內城)에는 동쪽의 광화문과 서쪽의 위원문이 있는데, 각각의 문 위에는 높이 17m의 3층 누각이 있어 가욕관의 상징이 되었다.


17. 장성박물관(長城博物館) : 장성박물관은 만리장성을〈춘추전국 시대의 장성〉〈진.한(秦.漢) 시대의 장성〉〈북위.수.당.요.금(北魏.隨.唐.遼.金) 시대의 장성〉〈明代 장성〉네 부분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각지에 산재한 만리장성의 사진과 모형 등 만리장성의 역사와 2,700Km 만리장성의 모든 것을 응축하여 전시하고 있다.

 


실크로드(SILK ROAD)의 역사 :실크로드는 19세기 독일의 지리학자 리히트호펜

(1833.5.5~1905.10.6)이 중국 여러 곳을 다녀온 후 1877년 중국 이라는 책에서 독일어로  자이덴슈트라젠(Seidenstrassen 비단길)이라고 명명하면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한다.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漢나라 초기까지 실크로드는 타림분지 주변에 위치한 서역 36국이라 불리는 오아시스의 작은 여러 도시 국가들에 의해 유지되었는데, 실크로드를 통한 경제적 이익이 커지면서 2세기부터는 중국의 왕조들과 흉노, 돌궐, 티벳 등의 유목민족들이 실크로드를 차지하여 교역으로 인한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기 위하여 서역 36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군사적 움직임이 발생하게 되었다.


秦나라의 뒤를 이어 漢 고조(高祖) 유방(劉邦, BC 206~BC 195년)이 漢나라(BC

206~AD220년)를 건국한 후 안정을 찾은 BC 138년 漢 무제(漢 武帝, BC 141~BC 87년)는 대월지(大月氏)와 동맹을 맺어 당시 타림분지를 점령하고 있던 흉노를 치기 위하여 장건(張騫 ?~BC 114)을 대월지에 파견하였으나 결국 동맹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장건은 BC 126년 귀국할 때까지 중앙아시아의 대원(大遠), 강거(康居-키르기스탄), 대월지(大月氏-아프카니스탄), 소월지(小月氏-카자흐스탄), 대하(大夏-아프가니스탄), 안식국(安式國-이란), 조지(趙地-시리아), 신독국(新獨國-인도) 등을 들렀고, 귀국 후 서역의 지리, 민족, 산물 등을 漢 무제에게 보고하여 중국과 서역의 교역이 이루어져 실크로드를 개척하였다.


이후 漢은 이 지역의 영토를 지키고 서역으로의 통상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BC 68년 쿠차(庫車)의 차사국(車師國)을 정복하고, BC 59년 흉노의 일축왕을 정벌하여 룬타이(輪台) 지역에 오루성(烏壘城)을 지어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세움으로서 서역 36국을 속국으로 다스렸다. 반초(班超, 32~102년)는 91년 쿠차로 서역도호부를 옮기고, 97년 천산산맥과 파미르고원을 넘어 흉노와 훈족을 정벌하고 서로는 카스피해와 바그다드 인근까지 기지를 확장하였다. 100년 반초가 낙양으로 돌아와 사망한 후 서역도호부는 흉노와의 패권에 따라 설치와 폐지를 반복하였고, 107년에는 이 지역에서 흉노족의 세력이 강성해져 漢은 서역도호부를 잃고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166년에는 대진국(大秦國, 당시의 로마제국) 안돈(安敦, 121.4.26~180.3.17,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칭함)은 漢나라와 직접 교역을 원하여 바다를 통하여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동진(東晋)의 고승 법현(法顯)은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고 불교경전을 구하기 위하여 399년 장안(長安, 오늘날 서안)을 출발하여 난주, 돈황, 누란(樓蘭), 카라샤르(焉耆), 호탄, 카슈가르를 거쳐 천축(天竺, 오늘날 인도)에 도착하였다. 414년에 해로를 통하여 장안에 돌아올 때까지 15년간 30여 개국을 순례하였고, 법현의 여행기 〈불국기(佛國記〉는 인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640년 唐은 트루판(吐魯蕃)의 고창국(高昌國)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아래에 안서4진(安西四鎭)을 두고 90여 속주(屬州)를 다스림으로서 안정된 교역로를 바탕으로 실크로드의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 시기 唐과 서방의 교역과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특히 이란의 조로아스터교·마니교 및 로마 교회에서 이단시되던 네스토리우스파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그러나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난과 790년 토번의 타림분지 진출로 唐은 안서도호부를 잃고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이후 서역의 동부는 위구르인들이 점거하고 서부는 이슬람 세력이 점거하여 실크로드는 파미르 고원에서 끊겨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역은 단절되었다.

 

〈서유기(西游記)〉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唐나라의 고승 현장(顯奬, 603년~664년)은 629년 장안을 출발하여 돈황, 트루판, 카라샤르, 쿠차, 바이(拜城), 타쉬켄트, 사마르칸트, 大夏의 도읍인 헤라트,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인도에 도착하였다. 인도에서 몇 년을 머문 후 다시 육로를 통해 645년 장안으로 돌아왔다. 현장이 쓴 여행기〈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큰 가치가 있다.


이후 明나라는 급속히 밀려오는 무슬림 세력과 가욕관, 돈황, 하미, 트루판에서 피비린내 나는 땅뺏기 싸움을 거듭하였다. 18세기 淸나라 건륭제(乾隆帝, 1711~1799년)가 트루판을 정복하면서 실크로드의 정세가 안정되는 듯 했으나 지속적인 전쟁과 부패로 인한 반란으로 가경제(嘉慶帝, 1760~1820년)에게 양위하였으나, 국력이 쇠퇴하면서 서양의 아편이 들어오고 급격하게 몰락하였다. 19세기 들어 독립을 꾀하는 토착 위구르인의 유혈 반란이 수시로 일어났고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돈황(敦煌) : 돈황은 사막 한가운데 위치하여〈모래마을〉이라는 의미의 사주(沙州)로 불린다. 기원전 111년 漢 무제는 최서부의 중요한 군사요충지인 돈황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인 돈황군(敦煌郡)을 설치하고, 돈황 외곽에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만들었다. 이후 돈황은 안정된 치안을 바탕으로 특히 唐代에는 동서양의 교역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져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로 불리며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한인·페르시아인·투르크인·인도인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국제적인 무역도시로 번영하였다.


18. 막고굴(莫高窟) : 前秦시대인 366년 승려 낙준(樂尊)에 의하여 시작한 석굴사원은 이후 隨. 唐. 5大10國. 宋. 西夏. 元를 거치며 1000여 년간 1618m에 735개의 동굴이 만들어졌다. 세계 최대의 불교석굴인 막고굴에는 현재 492개의 석굴, 1400여 개의 불상과 45,000㎡의 벽화가 남아있다. 16번 굴에 숨겨진 17번 굴에서 불교 경전, 황제의 칙령, 티벳 의약서, 위구르족의 토지매매 계약서, 고대 기독교의 네스토리우스 경전, 인도 경전, 마니교 경전 등 다량의 고문서가 발견되었으나, 淸代 말기 유럽, 미국, 일본 등으로 대부분 밀반출되었다.


19.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 신라 고승 혜초(慧超, 704년~ 787년)는 장안에서 수행하던 중 인도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기로 하고 723년 광주에 배를 타고 말레이반도를 거쳐 인도에 도착하여 몇 년을 머물렀다. 인도의 서북부에서 大夏의 북부를 통해 타슈쿠르칸을 넘어 카슈가르를 통과하고 쿠차, 언기, 고창을 거쳐 장안으로 돌아왔다. 혜초가 쓴 여행기〈왕오천축국전〉은 각국의 불교, 정치, 경제, 풍속을 기록하여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 책은 우연하게 1908년 돈황의 막고굴 17호 굴에서 프랑스의 동약학자 펠리오에 의해 발견되었다.


20. 명사산(鳴沙山) & 월아천(月牙泉) : 명사산은 높이 1,650m에 800K㎡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의 모래 언덕으로 실크로드가 활황이던 시기에 다양한 물품을 낙타에 싣고 머나 먼 서역을 오가던 상인들의 모습이 떠오르는 곳이다. 언덕의 모래가 해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바뀐다는 명사산의 Gradation, 달빛 아래 환상적인 야경은 영화에서나 본 듯한 멋진 경관을 연출한다. 명사산 안에는 초생달 모양의 조그마한 오아시스 월아천이 있는데, 주변의 명사산 모래 언덕과 어우러져 환상적이다.


21. 아커싸이(阿克塞) : 돈황 남쪽으로 70Km 외곽에 위치하는 아커싸이는 노래와 춤에 능하고 용맹스러운 카자흐족(哈薩克族)의 농목민들이 거주하는 자치현이다.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처녀가 총각에게 구혼하는 카자흐족의 전통적인 구혼 풍습과 민속가무를 볼 수 있으며, 초원에서 말타기 체험도 할 수 있다.


22. 기련산맥(祁連山脈) :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에 있는 기련산맥의 주봉은 해발 5,547m의 치롄산이다. 장액(張掖)에서 만년설산과 초원을 조망하며 차로 2시간 30분을 달리면 청해성 아보(峨堡)에 도착하며, 다시 1시간을 달리면 기련산맥의 분지에 위치하여 매년 6월 중하순~9월 중순 주변의 만년설산과 함께 40여 Km에 걸쳐 아름다운 유채화가 장관을 이루는 문원(門源)에 도착한다. 문원에서 해발 3,793m의 대판산 터널과 흑천 저수지를 지나 2시간을 달리면 청해성의 성도로 여름의 도시(夏都)라 불리는 서녕(西寧)에 도착한다.


23. 문원(門源) : 서녕에서 동북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문원은 회족자치현으로 매년 6월 중하순~9월 중순이면 주변 5,000m가 넘는 만년설산을 배경으로 40여 Km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에 황금빛 유채꽃이 장관을 연출하는 아름다운 절경을 볼 수 있다. 중국에 “門源油, 萬街流”라는 말이 있는데, 문원의 식물油가 모든 거리에 넘친다는 의미로 중국에서 식물성 기름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산지이다.


24. 일월정(日月亭) : 당 태종의 수양딸 문성공주가 티벳을 최초로 통일한 토번(오늘날의 티벳)의 왕 송첸캄포와의 화친을 위해 정략결혼을 떠날 때 당과 토번의 국경이었던 곳에 문성공주의 동상과 동상 좌우에 일정(日亭)과 월정(月亭)을 만들었다.


역사적으로 우리와 무관한 듯한 이 머나먼 곳에 세워진 일월정...그러나 잘 살펴보면 우리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는데...고대 수나라가 무리한 고구려 침략으로 멸망하고, 그 뒤를 이은 당나라 역시 고구려 정벌을 통한 북방 통일을 위하여 남방의 토번과는 화친이 필요했고 문성공주는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25. 청해호(靑海湖) : 중국 최대의 염호인 청해호는 해발 3,260m의 고산호수로 둘레가 360Km에 달하며, 몽고어로 쿠쿠눠얼(庫庫諾爾) ‘푸른 바다’라는 뜻으로 본래는 바다였으나 지각충돌로 인하여 솟아 오른 후 바닷물이 갇혀 호수가 되었다. 호수 안에는 많은 섬이 있는데 해심산도(海心山島)과 조도(鳥島)가 유명하다. 특히 조도섬은 매년 4월말~5월초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날아와 장관을 이루는 자연보호구에 속하며 해심산에는 티벳 라마교 사원이 있다.


26. 장의약박물관(藏醫藥博物館) : 2002년 개관한 장의약박물관은 티벳 장족의 고산에서만 볼 수 있는 식물과 동물, 암석에서 채취한 희귀한 약재료와 의학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고대 인간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 뇌수술을 했던 장의학은 1400여 년 전부터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장의약박물관의 백미는 길이 618m, 높이 2.5m로 기네스북에 오른 세계 최대의 탕카(Thangka)인데 400여 명의 스님이 1996~1999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이 거대한 탕카에는 티벳의 문화, 역사, 민속, 천문, 의학, 과학, 정치, 종교, 우주관 등 폭넓은 주제를 담고 있다. [한겨레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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